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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묵 극작가

[2020 매일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심사평

1차 심사에서 5편이 선정되었다. 희곡 '32일의 식탁', '단 하루', '택배가 온다', '현수막:Colorful Daegu', 시나리오 '표절시비'가 바로 그것이다. '현수막:Colorful Daegu'는 지역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와 사회 풍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었으나, 구성의 혼란과 캐릭터 창조의 미흡 등으로 탈락되었다. 시나리오 '표절시비'는 비교적 성공한 성격 창조와 구성의 완결성 등이 인정되었으나, 작가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깊은 시선 등이 엿보이지 않고 단순한 사건 전개 등으로 본격적인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최종 본심에 오른 세 편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단막극의 전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즉 단 하나의 공간에서 최소화된 인물, 그리고 반전으로 인한 예상치 못한 결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세 편의 작품 모두 현실의 공간에서 오늘날의 사회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작가로서 자기 나름대로 철학과 전망을 가지고 인물 창조와 결말을 맺고 있다. 이는 세 작품의 작가 모두가 한 명의 희곡작가로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세 편의 작품 모두가 벌써 전형화된 틀을 답습하였다는 것도 의미한다. 때문에 세 편의 작가들은 앞으로 자기만의 깊은 성찰을 통하여 개성과 창의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그리하여 최종 당선작 '32일의 식탁'은 희곡으로 갖춰져야 할 중요한 덕목, 즉 연극성에 주목하여 선정하였다. 특히 극중 엄마 역인 해진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줄 연기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딸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모든 것이 망가진 중년 여인의 절규와 애타는 집착을 무대 위에서 발견하는 극적 매력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불분명한 딸의 죽음과 성급한 결말 등은 다시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다.사족. 원고지 80매 안팎을 지키길 권한다. 그것은 신인작가로서 자질을 파악하는데 중요하다. 평소 써두었던 100매 이상의 작품들 여러 편을 마구 투척(?)하는 것은 신인작가를 찾는 신문사와 심사위원들의 진지한 노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최현묵(극작가·대구문화예술회관장), 박근형(한국예술종합대학 연극원 연출과 교수)

2020-01-01 06:30:00

박기섭 시조 심사위원

[2020 매일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문제는 새로움이다. 늘 처음이면서 또 다른 처음을 꿈꾸는 시! 요컨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다. 낯선 비유, 삐딱한 시각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시조는 선험의 형식을 따르는 이 땅 유일의 정형시다. 그렇다고 그 형식에 갇히거나 끌려 다녀서는 낭패다. 형식을 부리되, 작위나 억지가 아닌 자연스러움의 미학에 닿아야 한다.이런저런 생각들을 전제로 응모작들을 읽어갔다. 전국을 망라한 응모자의 지역 분포는 예년과 다를 바 없었으나, 가파른 인구 고령화 탓인지 노년층의 응모 비율이 부쩍 높아졌다. 응모작 전반의 수준은 상향 평준화 추세가 뚜렷했다. 그러면서 사회현실에 직핍한 서정, 자연과 인간의 결속, 역사의식의 표출 같은 퍽 다양한 미학의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정독과 숙고의 과정에서 '팔분음표 일어선다'·'꽃총포 쏘아 올린다'·'독거 혹은 풍장'·'슴베를 뽑다'·'폐철선을 들다'·'장사리 서신'·'모란이 오는 저녁' 등이 눈길을 끌었다. '도예'·'거짓말'은 20대의 감각이 신선했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메가시티 동굴'·'덧니, 날아가다'·'욱', 그리고 '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 앞뒤를 가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차피 언어의 건축인 시의 완성도 측면에서 '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당선작으로 낙점했다.당선작은 얼개와 짜임이 견고한 데다 맞춤한 비유와 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누"에 비유된 두 수녀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들이 물 설고 낯선 땅, 그것도 편견과 비탄의 섬 소록도에 온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스치는 손길에도 부끄럼을 타는" 20대에 와서, "마흔 해"가 넘도록 "제 몸을 풀어"낸 것인가? 그 답은 이 작품의 행간에 오롯하다. "낯선 뱃길" 끝의 "여윈 섬"을 안고, 그 섬의 "병든 사슴 곁에"서 가없는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산 것이다. "파도가 일 적마다 파도를 움켜쥐고" "마디 굵은 사투리에" 끊임없이 사랑의 "향기"를 베푼 것이다. "맨 처음 온 그대로 닳지도 않은 비누"가 한결 같은 그들의 정신을 표상한다. 실존 인물의 삶을 좇는 따뜻한 긍정의 시각을 높이 산다. 영예의 당선을 축하하며, 생을 건 역주를 기대한다.박기섭(시조시인)

2020-01-01 06:30:00

윤태규 동화작가

[2020 매일신춘문예]동화 심사평

동화의 중심 독자인 초등학교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내일이 아니고 오늘이다. 거기도 저기도 아니고 여기다. 의미나 가치보다는 재미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육목표가 '기본생활습관 형성'이고 독서도 습관 기르기가 목표다. 습관은 반복에서 생겨나고, 반복은 재미가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동화에서 의미나 가치는 재미에 담겨야하고, 지금 여기에 내일을 숨겨두어야 한다.이러한 아이들의 눈길을 붙잡아 둘만한 작품들이 여러 편 보여서 반가웠다. 그 가운데서 마지막까지 읽고 또 읽었던 작품을 들어본다. 김민영 씨의 '엄마 없이 마트에'는 일곱 살 아이가 마트 심부름 과제를 가지고 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는 이야기이다. 뒤따르는 엄마를 의식하면서도 혼자인척 겪는 일들이 무척 재미있게 펼쳐지고, 일곱 살 아이의 마음을 담은 독백 같은 문장이 돋보이지만 '대화', '질문', '구입' 같은 낱말들은 문장에 덜 어울린다. 강아지를 만나는 설정 또한 굳이 필요했나 싶다.김성복 씨의 '마음의 저울'은 마음을 재는 저울 때문에 벌어지는 고학년 교실 이야기다. 호기심과 긴장감이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간다. 꼬여버린 문제 해결을 위해 저울을 모래밭에 묻어버리는 결말이 안이하게 느껴진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공윤경 씨의 '가짜 배꼽'은 입양한 아이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부터 혼란을 겪지만 부모의 장난스럽기까지 한 탯줄 놀이로 다시 태어난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무거운 주제에 비해 이야기는 놀라우리만큼 잔잔하고 태연스럽게 진행 된다. 그러나 파도의 높낮이도 생각해볼 일이다. 이야기 흐름의 시점도 헷갈리는 곳이 있다.김지민 씨의 '보호 받던 슈퍼맨'은 늘 보호를 받던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도움을 주는 자리로 서게 하는 이야기다. 특별한 사건이 아닌 '사과 자루 들어주기', '팔씨름'으로 반전을 시키는 작가의 역량이 돋보인다. 이야기로 봐서 윤빈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 '윤빈이네 아줌마', '한 손으로 짊어진', '선생님 손에는 책들이 잔뜩 쌓여', '문자에∽쓰여 있었다.' 와 같이 잘못 된 표현들이 더러 보인다.장혜진 씨의 '기억을 모으는 아이'는 엄마를 기억하기 위해서 보육원에서 살아가는 모든 기억을 모아가는 아이의 이야기가 짠하고 감동이다. 마지막까지 저울질하던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갓 태어난 오리에게 우유가 든 젖병을 물린다는 대목이다. 포유류가 아닌 오리에게 우유를 먹일 수는 있을지 모르나 보편적이지 않는 일이다. 동화에서 동식물의 삶이나 생태를 그릴 때는 정확해야 한다.송우들(본명 송선금)씨의 '하늘을 달리다'를 최종 당선작으로 뽑았다. 전학 온 아이가 학교체육대회 멀리뛰기 선수로 뽑히면서부터 시작되는 문제와 그 극복 과정이 6학년 아이의 심리 발달단계에 맞게 그려져 감동을 준다. 마무리도 군더더기 하나 없이 산뜻하고 멋지다. 그런데 작가는 들여쓰기와 띄어쓰기를 소홀하게 하고 있다. 또 대화체에서 '2개 더 싸주면 안 돼?'에서 '2개'를 '두 개'로 고쳐야하고, 'D –며칠' 식으로 쓴 것도 '며칠 앞'으로 '시선'도 '눈길'로 와 같이 우리말을 살려 쓰려는 노력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런 글이라면 고학년 아이들이 지긋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즐겨 읽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기쁜 마음으로 뽑았다. 윤태규 (동화작가)

2020-01-01 06:30:00

하청호 동시심사위원

[2020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심사평

응모된 작품을 정독하면서 동시의 장르적 특성에 대한 인식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특히 지난날의 회억을 바탕으로 한 과거지향적 서정이 줄어들고, 오늘을 살고 있는 어린이의 삶에 시적 관심이 높아진 것은 기쁜 일이었다.그러나 아직도 시적 상상과 공상이 혼재되어 있고, 흔히 보이는 입말의 과도한 활용은 시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산만함도 있었다.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김영욱 씨의 '물끄러미' 와 유연정 씨의 '흙새' 그리고 강복영 씨의 '응'이었다. 세 작품 모두 개성적이며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었다.'물끄러미'는 어린이가 이성에 눈뜨는 심리를 낚시에 빗대어 형상화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흙새'는 할머니가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는 것을 새의 부리가 곡식을 쪼는 것으로 포착한 은유적 감각이 새롭고 독특하였다. 그러나 시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으로 울림을 주는 것이라면, 이 두 작품은 새롭고 참신한 발상과 표현, 그 자체에 머물러 있어 시적 감동을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당선작으로 선정된 '응'은 동시의 특질을 잘 살렸으며, 눈높이가 동심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자녀의 일상적 대화 속에 담긴 의미를 읽어낸 감성이 놀랍다.이 작품은 시적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참신한 표현도 없다. 그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담하게 표현하였지만, 마음이 훈훈하고 여운이 남는다. 특히 자녀와 어머니의 정서적 교감을 입말을 활용하여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고 맛깔스럽게 형상화 한 점은 돋보였다.일상적인 말이 적절한 시의 옷을 입을 때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고 감동을 준다는 것을 작품 '응'은 잘 보여주고 있다.당선을 축하며 정진을 빈다. 하청호(아동문학가)

2020-01-01 06:30:00

희곡 당선인 정승애

[2020 매일신춘문예]희곡 당선소감

아직도 당선 소식을 듣던 오후의 공기가 제 주위에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목소리를 갖고, 말을 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에 감사하던 날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서투른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올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흐릿하던 시야에 선과 색을 더할 수 있도록 배움을 선물해주신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님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특히 부족한 제게 조언과 격려를 해주신 전성희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사랑하기에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시던 재작년의 봄을 지나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랑과 믿음으로 저를 지지해주신 가족들, 말을 하지 않아도 제 그늘까지도 알아봐 주는 벗들, 켜켜이 쌓인 시간 위로 다정한 눈짓을 건네는 문우들. 모두 감사합니다. 제게 내어주신 마음들에 기대어 하루 더 쓸 수 있었습니다.잊지 않겠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곤 합니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슬픔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듭니다. 늘 남겨진 이들이 어떤 얼굴로 살아가는지, 어떤 시도와 실패 속에 내일을 맞이하는지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 위로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저의 언어가 우리의 기억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게으르게 쓰지 않겠습니다. 조금은 믿어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정승애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2020-01-01 06:30:00

김옥자 수필 당선인

[2020 매일신춘문예]수필 당선소감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매사에 까칠함이 많아 모서리 몇 개쯤은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아이는 또래의 친구와 어울려 놀기보다는 땅 바닥에 풀잎을 그리거나 친구의 이름 내지는 마음속엣 말을 썼다가 지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밖에 나가 놀 수 없다는 핑계로 다락방을 어린 소녀만의 공간으로 삼았지요. 벽지대신 순서 없이 천장과 벽면에 붙여진 빛바랜 신문의 깨알 같은 활자와 책보다는 박을 타서 만든 바가지들이 놓여 있었지요. 바느질에 필요한 천조각과 털실뭉치, 인두와 소소한 잡동사니가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기도 했다. 호기심에 몇 번은 이런 것들을 만져보다 이내 관심 밖에 두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거나 엎드려 뭔가를 궁리하듯 가만히 있다 무료한 시간에 답답증이 일면 단어의 의미나 군데군데 섞여 있는 한자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띄엄띄엄 천장의 글자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우연찮게 글을 쓰게 되었다. 어떻게 써야 된다는 것도 모른 채 사색의 창고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꺼내 지면으로 옮겨 적는 것조차 새록새록 하던 일이 생각난다.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글쓰기에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괴감 내지는 혼란스러움의 연속된 나날들이었다. 삶의 희 노 애 락을 겪을 만큼 겪고 나서야 문 하나를 열수 있는 기회가 제게 주어졌습니다. 지연희 교수님을 만나 시와 수필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시름과 희열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방황하고 있을 때마다 아낌과 격려, 채찍을 함께 주셨습니다.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매일신문이 제게 안겨준 영광스런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듣고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밀려왔습니다. 올 3월 친정어머니를 먼 곳으로 보내드린 후라 그런지 더 그랬던 같습니다. 제 글을 읽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하나의 문을 열어주신 것임을 알기에 더욱더 정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아직까지도 미덥지 못한 구석이 많습니다. 또 다른 나를 알아가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창작에 임하겠습니다.그동안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했던 문파 문인협회 신시 가족이었던 장명순선생님 정이춘선생님 한복선선생님 강근숙선생님 류성신선생님의 사랑과 아낌없는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문인협회 파주지부 여러 선생님들의 격려와 따뜻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늘 한 마음으로 응원해준 친구 동숙, 화숙, 영순, 은숙1, 은숙2 효숙아 정말 고마워. 서투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박수를 보내준 오빠내외 언니들 동생아 많이많이 사랑해. 내 곁에서 여름휴가 때마다 친정 부모님과의 여행을 계획하고 동행해준 남편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더 전하며, 딸내외(태형 다람), 아들내외(현주 동주)와 함께 이 영광의 기쁨과 행복을 같이 하고 싶습니다. 미처 다 얘기 하지 못한 많은 지인들에게도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 김옥자한국방송통신대 재학2009년도 문파문학 시부문 신인상 수상시집 '가급적이면, 좋은' '꽃 사이사이 바람'

2020-01-01 06:30:00

강복영 동시 당선인

[2020 매일신춘문예]동시 당선 소감

전통의 매일신춘문예 동시부문에 당선 되어 우선 무척 기쁘다.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다지만….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줄이야 당선의 한 자리를 내어 주신 매일신문에 고마움의 마음을 전한다. 학수고대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다 형언키 어렵다는 걸 새삼 느끼는 바다.시를 써 오면서 동시로는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하지만 한 편 한 편의 좋은 동시를 써 내기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되었다. 시(詩)로써 동(童)으로써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한 편의 동시가 된다는 걸... 그래서 동시는 한참이나 더 어려워져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호흡을 익히고 보법을 익히며 동시와 친해졌다.이제 당선은 시작일 뿐 결코 완성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조급해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동시의 길에 누가 되지 않는 나만의 발성으로 나의 동시의 길을 닦아나가고 싶다. 조금은 서투를 때도 있겠지만…. 질타보다는 격려를 바라마지 않는다.그동안 수 없이 떠나보낸 밤들이 생각난다. 그 속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나를 본다. 이제 그곳에 있던 나를 만난다. 수고 했어….돌아가신 두 분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우리 오남매 가족들... 중대 쌤들, 제천문학식구들, kt&g식구들, 시협, 눈꽃, 영동, 선미, 재원…. 그들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매일신문 신춘문예담당자분들과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노고에도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린다. 하루하루 기온이 떨어진다. 모두 건강하시기를…. 해피 뉴이어! ▶ 강복영'시와비평' 시로 등단.충북시인협회 회원.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시창작전문가과정 수료.2020경상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20-01-01 06:30:00

최란주 시 당선인

[2020 매일신춘문예]시 당선소감

고향에 가면 저와 나이가 같은 산수유나무가 있습니다. 참 부지런해서 봄에 노랑으로 바쁘고 가을엔 빨강으로 바쁜 그 친구와 해마다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이 노랑으로 시작해서 빨강으로 끝이 나는 동안 저는 한 번도 약속을 성실히 지키지 못했습니다.올해도 그러려니 했습니다.최선을 다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지친다는 것은 어딘가 부족했다는 뜻일 겁니다. 당선통보전화를 받는 그 순간에도 최선의 봄과 겨울이 교차하며 지나갔습니다. 지금쯤 고향의 산수유나무는 겨울잠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실눈을 뜨고 저에게 빙그레 웃음을 지어주고 있을 것입니다.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주신 부모님, 부족한 저를 많은 인내심으로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랑과 격려를 해준 남편과 동생들에게도 감사하고, 응원을 해준 문우들과 직장동료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빈곳이 있어 통이 존재하겠지요. 어떤 견고한 진공에도 한 호흡, 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앞으로 쓰는 시들이 그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단 한 줄의 언어가 '그래 맞아 나도 이런 느낌이었어.'라는 공감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이제 저의 영혼, 비어있는 공간에 꾹 참고 있는 한 호흡을 담겠습니다.그리고 동년배인 산수유나무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킬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것이 노랑이든 빨강이든 말입니다.마지막으로 저에게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매일신문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최선 (본명 최란주)전남대 법과대학 졸업현재 서울행정법원 근무

2020-01-01 06:30:00

여운 시조 당선인

[2020 매일신춘문예]시조 당선소감

추위를 타는 자에게 겨울은 길고 더위를 타는 자에게 여름은 길다. 삶의 궤도에서도 길게 느끼는 힘든 계절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길더라도 계절은 바뀌고 활기를 되찾을 때가 오기 마련이다. 빛과 어둠의 순환을 보며 느린 걸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따뜻한 봄과 선선한 가을은 오리라.특별한 형식 없이 제멋대로 자유시를 쓰다가 만난 시조는 수식어가 많지 않은 절제된 언어의 미와 일정한 구조로 유지되는 소리의 질서와 운율이 가득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한민족의 집단 무의식과 숨결이 깃든 서정적 장르였다. 시조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졌다. 뒤늦게 접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비상을 꿈꾸던 초심은 우선 백일장으로 눈을 돌렸다. 백일장은 해마다 봄이나 가을에 전국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백일장 장원으로 뽑힌다고 하더라도 문단에서는 대부분 그것을 등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등단은 원칙적으로 신문이나 계간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언제까지나 땅바닥에 앉아 허리를 구부린 채 한 시간 혹은 반 시간 안에 주어진 시제에 따라 즉흥적인 시만 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때 익힌 잘못된 버릇은 계속해서 따라다녀 떨쳐버리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좀 더 깊이 있고 세련된 습작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제대로 된 일간 신문 지면을 통해 문단에 데뷔할 결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랜 날을 그렇게 붙잡고 살았는지 계산도 하기 어렵다. 아마 십 년도 넘게 흘러간 것 같다. 물론 중간에 포기했던 시절이 있었다. 매년 늦가을과 겨울 사이 뛰놀던 설렘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열정은 식어버렸다.찬바람이 스며들어도 끝까지 글줄을 놓지 않고 기다린 덕분인지 갑자기 당선을 축하하는 전화를 받아 떨리던 가슴은 더 떨리고 있다. 모든 이웃이 함께 나누는 정감 어린 시적 소통으로 봄이 올 때까지 한파를 무사히 견딜 수 있기를 바란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같은 손길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훈훈하다. ▶여운(본명 나동광)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입선구제활동가

2020-01-01 06:30:00

소설 당선인 고수경

[2020 매일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소감

나는 맏이 겸 영재인 언니와 막내 겸 아들인 동생 사이에서 어정쩡한 둘째 딸로 자랐다. 머리든 뭐든 가지고 태어난 게 없으니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가족들을 웃기려 했다. 엄마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일화는 일곱 살쯤 피자 박스를 머리에 이고 다닌 일이다. 나중에 그건 웃기려던 거였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아냐, 그건 백 퍼센트 식탐이었어, 라며 웃었다.그러니까 나는 귀엽긴 해도 자랑할 만한 자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외할머니는 나를 다짜고짜 믿으셨다. 아무 근거도 없이 얘가 뭔가가 될 거라고 장담하면서. 말의 힘은 참 신기하다. 내 글쓰기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했으니까.해명할 게 하나 더 있다. 중학생 때 내 백일장 상장을 모아둔 파일에 누군가 실수로 언니의 이름을 붙인 걸 보고 울었던 이유. 집에서 쫓겨나도 울지 않던 애가 울자 가족들은 많이 당황했는데 나는 말을 못했다. 그 파일만큼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만의 것이라고. 그게 없으면 나는 피자 박스를 이고 다니던 일곱 살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아직도 그렇다. 나는 소설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내내 걸어오고 뛰어왔다. 밑창이 닳기 직전 튼튼한 새 신을 신겨주신 매일신문과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을 뵐 낯이 생겼다. 함께 걷는 동안 주저앉을 때마다 일으켜 준 노른자, 도란, 소란, 연작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왜 이렇게 느리니, 저글링하면서 걸을 순 없니 같은 말 않고 응원석에서 기다려준 가족들, 친구들과 하이파이브 한 번씩 해야겠다.이제 고백하지만 나는 가끔 당선 소감을 쓰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 소감의 끝에는 항상 조경란 선생님이 계셨다. 여러 버전을 생각해두었는데 결국 꺼내온 건 2013년 겨울의 흑석동 지하 강의실이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수업, 어디서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던 순간. 선생님은 다 들으시고 짧게 대답하셨다. 고수경아. 계속 소설을 써라. 나의 모든 동력은 그 한 마디가 전부다. ▶ 고수경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수료

2020-01-01 06:30:00

[2020 매일신춘문예]시 당선작-남쪽의 집수리

전화로 통화하는 내내꽃 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그때 산수유나무에는 기간을 나가는 세입자가 있다.얼어있던 날씨의 아랫목을 찾아다니는 삼월,나비와 귀뚜라미를 놓고 망설인다.봄날의 아랫목은 두 폭의 날개가 있고가을날의 아랫목은 두 개의 안테나와 청기聽器가 있다.뱀을 방안에 까는 것은 어떠냐고수리업자는 나뭇가지를 들추고 물어왔지만갈라진 한여름 꿈은 꾸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오고 가는 말들에 시차가 있다.그 사이 표준 온도차는 5도쯤 북상해 있다천둥과 번개 사이의 간극,스며든 빗물과 곰팡이의 벽화가문짝을 7도쯤 비틀어지게 한다.북상하는 꽃소식으로 견적서를 쓰고문 열려있는 기간으로 송금을 하기로 한다.꽃들의 시차가 매실 속으로 이를 악물고 든다.중부지방의 방식으로 남쪽의 집 수리를 부탁하고 보니.내가 들어가 살 집이 아니었다.종료 버튼을 누르면서 계약이 성립된다.산수유 꽃나무가 화르르허물어지고 있을 것이다.

2020-01-01 06:30:00

동시 '응'

[2020 매일신춘문예]동시 당선작-응

엄마 하고 부르면응! 하신다 엄마 하고 부르면또 응! 하신다 왜! 하는 것 보다응! 하는 게 나는 더 좋다 응! 하면엄마의 마음이따뜻하게느껴지니까 응! 하고엄마가 대답을 하면나는 왠지 엄마와 한 뼘은 더 가까워진 것만 같고더 다정해진 것만 같아서 기분이 참 좋다 그래서 나는엄마 하고 불러 놓고응! 소리를 또 기다린다

2020-01-01 06:30:00

동화 '하늘달리다'

[2020 매일신춘문예]동화 당선작-하늘을 달리다

"그럼, 우리 반 멀리뛰기 대표는 유달리로 한다."망했다. 완전.나는 지난주에 전학을 왔다. 우리학교 체육대회는 2년에 한 번씩 열린다고 한다. 2년에 한번이 하필 내가 전학 온 올해이고, 그 주요경기중 하나인 멀리뛰기 우리 반 대표가 바로 내가 된 것이다.선생님이 나를 반대표 선수로 뽑은 이유는 '멀리' '잘' 뛰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우리 반 여자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크고, 키가 커서 다리가 기니 멀리 잘 뛸 거란 거였다.달리기와 농구, 축구는 인기가 높아 지원자가 넘쳐났지만 모두에게 낯설기 만한 멀리뛰기는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 종목에도 끼어 있지 않은 아이는 나뿐이었다. 그러니 이것도 두 번째 이유가 됐다.선생님이 처음부터 '유달리 너는 멀리뛰기 대표!' 라고 말한 건 아니다. 분명 내 의견을 물어봤었다. 정말 싫었다면 그때 대답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왜냐고? 순간 나에게 집중된 아이들의 눈빛에서 궁금증과 기대를 느껴서라고 할까? 새로 전학 온 존재감 없는 아이와 멀리뛰기 반대표 사이에는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모인 그 순간, 6학년 경기 1등을 하고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내 모습을, 엘리베이터에 올라 당당하게 꼭대기 층 버튼을 누르고 올라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달리는 틈나는 대로 운동장에서 연습하면 될 것 같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네."'네' '네'라니! 대답을 해버렸다. 나의 '네'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의 시선은 다시 앞쪽으로 돌아갔다. 내 앞에 까만 뒤통수들만이 가득해지자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초고속으로 1층에 도착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지구의 중력이 두 배쯤 강해져 내 다리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몸의 반쯤이 접혀있었다. 그대로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엄마가 퇴근했을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잠들어있었다. 엄마의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소파에 엎드려 엄마의 99번째 질문이 빨리 100번으로 넘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00번이 끝나고 엄마의 마침표가 들렸다."에휴."이젠 내 얘기를 할 타이밍이다."엄마, 나 우리 반 멀리뛰기 대표됐어.""멀리뛰기? 막 달려가서 모래판으로 날아가는 그 멀리뛰기? 네가 반대표라고?"한꺼번에 세 개씩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엄마의 질문 세 개의 핵심은 나의 달리기 실력과 연결돼있다. 그래. 난 달리기란 달리기는 죄다 꼴찌다. '달리'라는 이름값도 못한다는 소리는 늘 따라다니는 후렴구였다. 딱 두 번 꼴찌가 아니었던 적이 있다. 1학년 운동회 때 손님 찾기 달리기에서 내 봉투에 있던 미션이 결승선을 잡고 있는 6학년 이어서 혼자 열심히 뛰어 1등한 것, 그리고 5명이 뛰다 3명이 넘어져 2등을 한 것…….그날 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교실에서 대답한 "네~" "네~" "네~" 소리가 끝없이 들리면서 어딘가로 계속 떨어지는 꿈을 꿨다. 다음날 아침은 중력이 4배쯤 강해진 것 같았다. D - 30.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하는 건 겁쟁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멀리뛰기는 달리기 실력만으로 하는 건 아니니까 연습을 하면 생각한 것만큼 나쁘진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내 목표는 3위다! 6학년은 모두 다섯 반이니 두 반만 제치면 3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우선 '멀리뛰기'를 검색해봤다. '일정 거리를 도움닫기한 뒤 발 구름판에서 한 발로 굴러 멀리 뛴 거리를 겨루는 경기종목이다. 고대올림픽에서 육상의 주 종목으로 채택되었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해서는 도움닫기와 발 구름·공중자세·착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한 방법이 저 한줄 뿐이라니 말로는 참 간단하고 쉬워 보인다.연습만이 살길이다. 그런데 운동장에 아이들이 너무 많다. 아이들이 없는 시간이 필요했다.저녁을 먹고 다시 학교 운동장에 갔다. 해가 길어져 아직 운동장은 밝았다. 비장하게 운동화 끈을 조여 신고, 모래밭에서 30m쯤 떨어진 곳에 섰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용수철처럼 달려 나갔다. 모래밭 앞 발 구름판을 딛고 유튜브에서 본 영상을 떠올리며 점프를 하고 착지했다. 나의 첫 멀리뛰기였다. 감았던 눈을 뜨고 나의 도착점을 봤다. 1m도 안 되는 거리였다. 망했다. 완전.뛰고 또 뛰었지만 내 기록은 1cm도 나아지지 않았다. 뒤로 갈수록 다리가 풀려 모래밭에 넘어지기까지 했다.울고 싶은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흙투성이에 무릎까지 까진 내 꼴을 보고 엄마는 놀란 표정이었다. 질문 폭탄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냥 나를 안아주었다."다시 새 학교에 적응하게 만들어서 미안해……."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앞에선 내 마음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것 만 같다. 6학년부터는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샤워를 하고 누워서 우영이한테 전화를 하려다 말았다. 우영이랑 친해진지 반년도 안됐을 때 이번 학교로 전학 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다. 나는 무릎에 붙인 밴드만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었다. D - 20텅 빈 운동장을 기대하고 학교로 갔는데 누군가 모래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빨랐다. 바람처럼 달리던 그 아이는 구름판을 딛고 날아올랐다. 가슴을 내밀고 하늘을 달리더니 다시 몸을 접어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유튜브에서 봤던 칼루이스의 멀리뛰기 모습이 떠올랐다. 하늘을 달리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다니."체육대회? 연습하러 온 거야?"그 애가 먼저 말했다. 박수라도 칠 것 같은 표정으로 서있는 나를 못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어……. 어?"내가 연습하러 온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 애가 말했다."난 다 했으니까 너 뛰어도 돼."나는 그 애가 완전히 운동장을 떠날 때까지 쭈그려 앉아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하늘을 달리는 자 앞에서 콩! 하고 뛸 수는 없었다. 쭈그려 앉아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머리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D - 17전학 온 지 얼마 안 되는 내가 다른 반 아이, 그것도 남자애에 대한 정보를 얻는 건 힘든 일이다.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멀리뛰기를 잘 하는 아이. 하늘을 달리는 것처럼 잘 하는 아이라는 것뿐이었다."달리야. 연습은 잘 되니?"농구경기에 나가는 여자아이들이 한참 수다를 떨다가 체육대회에 멀리뛰기라는 종목도 있었지?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응. 그럭저럭."내 대답은 그렇게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농구팀은 다시 자기들의 동그란 작전타임 수다를 이어갔다."얘들아. 참! 1반에 이정우 멀리뛰기 하는 거 봤어?""그 우리 시 육상대표라는 애? 장난 아니라며?""그래. 걔 요즘은 가끔 학교 운동장에서 연습한다잖아. 거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는데?""진짜? 언제 연습한대?""글쎄. 원래는 전국체전 준비하느라 시민운동장에서 연습하는데 올해는 학교 체육대회 때 참가하려고 가끔 학교운동장에서 연습한다나봐"농구팀의 다양한 관심사 덕분에 내가 궁금해 하던 정보를 한꺼번에 얻게 됐다. 체육대회에서 농구팀을 열심히 응원해야겠다. D - 12농구팀의 정보에서 가장 정확하지 않은 대목이 '가끔'이었다. 그 '가끔'중 한번이 내가 그날 이정우를 봤던 날인 것이다. 며칠째 그날과 비슷한 시간에 운동장에 나왔지만 이정우는 보이지 않았다. 이정우를 만난다고 '내 형편없는 실력을 확 올릴 수 있도록 방법 좀 알려주겠니?'라든가, '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하늘에서 달릴 수 있어?' 라고 물어볼 수 있을까?그 '가끔'을 찾아야 할 이유에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다시 비장하게 출발선에 선 다음 달렸다.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해서는 도움닫기와 발 구름, 공중자세, 착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이 한 줄을 되뇌며 발 구름을 하려는 순간. 이정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를 똑바로 보면서. 이럴 수가! 공중자세로 연결돼야 하는데……. 난 모래판에 보기 좋게 엎어져버렸다. 이대로 땅을 파고 들어가 버리고 싶었다. 이정우가 큰소리로 비웃는다면 난 죽을 때까지 저주를 퍼부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이정우가 없었다. 혹시 내가 엎어지는 꼴을 못 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0.1초쯤 했을 때였다."도움닫기 속도가 너무 느려. 위로만 높이 뛰니까 스피드가 안 나지."정확하게 다 본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확인사살까지 했다."너 발구를 때 딴 생각했냐?"다시 내 머릿속이 훤하게 드러나면 안 된다. 머릿속 유리창에 커튼을 치고 최대한 무표정하게 말했다."너 때문이잖아.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니까 집중을 못했잖아!"볼륨조절에 실패했다. 내 생각보다 목소리가 너무 컸다. 배에 묻어있던 모래들이 후두둑 떨어졌다."그래? 미안......"예상하지 못한 이정우의 대답에 또다시 볼륨조절에 실패했다."지금 연습할거야?"물어보는 말이었는데 따지는 말이 됐다."너 연습 더 해도 돼. 난 시민운동장으로 가도되니까......""아니. 가……. 가지마!"이정우도 나도 놀라서 서로 멀뚱멀뚱 쳐다봤다. 머릿속에도 모래가 들어간 건지 말을 할수록 문제였다." 저번에 너 뛰는 거 봤어. 나 좀 가르쳐주면 안 돼?"차라리 솔직한 게 제일 멀쩡한 말이 됐다."그래!"이번에도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D-10"호흡이 중요해. 난 땅이랑 호흡을 맞춘다고 생각하면서 뛰어. 그러면 땅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리곤 땅이 나를 밀어준다는 느낌이 들 때 발을 구르고 뛰어오르는 거야. 머뭇거리지 말고 한번에!"역시 하늘은 아무나 달리는 게 아니다. 이정우는 멀리뛰기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 거지만 도무지 땅과 나 사이에 호흡이라는 게 생길 것 같지 않았다. 나를 밀어주기는커녕 잡아당기는 것만 같으니 말이다. 이틀 동안 포기하지 않고 가르쳐주는 이정우가 고마울 뿐이다."잘 봐."이정우가 달린다. 정말 달릴 때 땅에서 소리가 났다. "싹-싹-싹-" 저게 호흡이란 걸까? 달릴 때의 이정우는 전혀 다른 표정이 된다. 순둥이 같은 표정은 사라지고 초원을 달리는 치타처럼 매서운 표정이 된다. 자기가 뛰어오를 모래판 위 공간만 보이는 것 같은 눈빛이다. 무언가 단단한 표정이었다."야! 이정우! 너 여기서 뭐해!"시청 추리닝을 입은 남자애가 나타나 정우를 불렀다."코치가 너 잡아오래. 자꾸 없어지더니 여기 있는 거였어? 시립운동장 놔두고 왜 여기서 뛰고 있냐? 학교 체육대회는 그때 와서 감만 익히면 된다며?"체육대회 연습 때문에 계속 오는 게 아니었다고? 그럼……."야. 알았다. 가자 가."정우가 추리닝의 입을 막으면서 끌고 갔다. D - 7내일은 6학년 전체가 소풍을 가는 날이다. 전학생이 제일 힘들 때가 바로 이런 날이다. 짝이 필요한 날, 팀이 필요한 날.저학년 때야 번호별로 짝을 지어서 다니지만 고학년들은 단짝이랑 다니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버스에서 같이 앉고, 같이 돌아다니고, 점심을 같이 먹을 '단짝'말이다.나는 6학년이 될 때까지 거의 해마다 전학을 다녔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선 엄마의 직업이 계속 바뀌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바뀌는 학교에서 새로운 단짝을 만들어야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처음엔 많이 노력했지만 점점 지쳐갔다. 고학년이 될수록 아이들은 각자의 울타리가 생긴 것 같았다. 울타리 밖에 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 아이들의 시선도 혼자 있는 친구보다는 울타리 안의 친구들을 향해 있었다."엄마. 나 그냥 김밥집에서 포장해갈게""아니야. 엄마가 예쁘게 도시락 싸줄게"전학을 하고 첫 소풍이 다가오면 엄마도 나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은 눈치다. 역시 엄마 앞에선 내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걸까."그럼 2개 더 싸주면 안 돼?""왜? 누구 주려고?""아니……. 소풍 다녀와서 오후에 연습할거거든. 그때 배고플 거 같아서"거짓말이 보일까봐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D - 6예상대로 불편하고 재미없는 소풍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챙겨주라며 주연이와 짝을 지어주셨다. 주연이는 농구팀 아이들과 같이 다니지 못해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내 입장도 편할 리는 없었다. 버스에서도 주연이의 신경은 온통 농구팀에 가있었다. 주연이가 나쁜 아니라는 건 아니다. 팀이 있다는 건 든든하니까. 그 든든한 팀을 잃을까봐 불안한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자는 척을 했다. 주연이는 몸을 완전히 돌려 뒷자리의 농구팀 아이들과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난 역시 호흡을 맞추는 게 힘들다.소풍을 마치고 집에 들렀다 다시 학교 운동장으로 가는 길은 설레기까지 했다. 한손에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 가방 두개가, 한손에는 물병이 있었다.운동장에 들어서니 정우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 뻔 했다. 양손에 짐이 있길 다행이었다.정우는 오늘 소풍에 가지 않았다. 시 대표 선수인 정우는 학교 오전 수업만 듣고 운동을 하러 간다. 소풍 같은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해온 정우가 소풍도시락을 먹어본 적이 없을 것 같았다. 농구팀 아이들의 말로는 정우가 장학금 때문에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정우네 집은 시의 외곽에 있는 시골이라 정우 혼자 시청 소속의 기숙사에서 지낸다고도 했다.정우와 나는 멀리뛰기 말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 뭐라고 하면서 도시락을 꺼내야 할 지 한참을 고민했는데 정우가 먼저 물었다."그거 도시락이야?""으응…… 오늘 연습하기 전에 먹으려고…… 너도 먹을래?""정말? 내 것도 있어?"정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도시락을 반가워했다. 우리는 스탠드에 앉아 도시락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엄마의 도시락은 내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평범한 김밥도시락이 아니었다. 볶음밥위엔 완두콩이 하트모양으로 콕콕콕 수놓아져있었다. 옆쪽의 치킨 너겟 마저 하트, 오렌지에 꽂힌 작은 꽂이 손잡이마저 하트모양이었다. 예쁜 도시락을 싸주겠다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리 뚜껑을 열어봤어야 하는 건데……. 정우는 이 하트 투성이 도시락을 어떻게 생각할까? 슬쩍 옆을 보니 정우가 빨개진 얼굴로 우걱우걱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빨개진 얼굴로 도시락만 먹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이 분위기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연습할까?""그래."우리는 여전히 빨간 얼굴로 운동장을 달렸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공기에도 연둣빛이 묻어날 것만 같은 5월이었다. 운동장을 둘러싼 나무사이를 통과한 바람이 나무의 기운까지 담아 내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상쾌했다. 정우랑 함께 달려서였을까? 정말 땅이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서 떠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나는 속도를 내어 구름판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점프하는 순간 나를 둘러싼 공기만이 느껴졌다. 나만을 위한 순간 같았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아무 것도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모래 위로 미끄러지듯 착지했다."야 유달리 멋지다! 최고기록이야!"정우가 옆에 있어서 좋았다. D-day &나는 지금 도움닫기 중이다.발 구름 지점을 생각하면 조금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숨을 모으고 나를 믿어야 한다. 내가 하늘을 달릴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가슴을 열고 뛰어 올라야 한다. 머뭇거리지 말고 한번에!엄마의 응원소리가 들린다. 우리 반 아이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나는 하늘을 달린다.〈끝〉

2020-01-01 06:30:00

2020소설 '옆사람'

[2020 매일신춘문예]소설 당선작-옆사람

금요일 밤에 그녀는 남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시간엔 남편에게 말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스마트폰으로 택시비를 결제해서 혼자 집에 왔다. 그가 옷을 갈아입을 때 그녀는 침대에 앉아 물었다."어쩌다 지갑을 잃어버렸어?""도둑맞은 것 같아."김이 서린 무테안경을 닦으며 남편이 말했다."어디서?""버스 탈 때까진 있었어. 가방에 넣어두고 잤는데 일어나서 보니까 없어진 거야."그녀는 누군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가는데 잠이 안 깼던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남편은 아침 여덟 시부터 열두 시간을 일하고 곧장 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두 시간 타고 왔다. 일요일 오후에도 같은 버스를 타고 내려갈 것이다. 코트와 가디건, 셔츠를 벗고 파자마로 갈아입은 남편은 더 왜소해 보였다."고속버스에서 지갑을 훔쳐갈 수 있는 건 옆에 앉은 사람뿐이잖아. 게다가 난 창가에 앉았거든. 그 사람이 자고 있길래 깨면 물어보려고 했지. 터미널에 도착해서 사람들이 다 내리는데 계속 자는 척을 하더라.""이상한 사람이네.""당신이 그 사람을 봤어야 하는데. 덩치는 산만해서는 옷은 더럽고 냄새나고. 뭘 먹다가 떨어뜨려서 줍는 데도 한참 걸렸어. 그러더니 금방 잠든 거야. 저기요, 저기요, 하면서 깨우는데 팔짱 끼고 고개 푹 숙이고 꼼짝도 안 하는 거지.""진짜로 자고 있었던 거 아닐까?""나도 자는 척이랑 진짜 잠든 것 정도는 구분해. 그렇게 곤히 잠들었다면 숨소리가 안 날 수 없어.""그래서 그냥 온 거야?"이번에도? 그녀는 뒷말을 삼켰다."거기서 뭘 어쩌겠어. 기사가 가서 어깨를 흔드는데도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더라."남편은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지금 생각하니까 너무 괘씸하다. 안 그래? 어떻게 바로 옆사람 물건을 훔치고 자는 척을 해? 버스회사에 가서 씨씨티비를 봐야겠어.""그거 보려면 경찰 데려가야 하잖아."남편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번에는 그가 씨씨티비를 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낮 열두 시에 남편의 친구 결혼식을 다녀온 뒤 저녁 다섯 시에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야 했다. 일요일에는 친정에 가서 식사를 하고 터미널에서 남편을 배웅해 줄 예정이었다."잠깐."남편은 가방을 뒤지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뮤지컬 티켓이 지갑에 들어 있어.""그럼 경찰서는 공연 시간에 가면 되겠네."그녀는 침대 맡에 둔 뮤지컬 원작 소설책을 협탁 서랍에 넣었다. 유명 배우만 나오면 예매하고 보는 남편에게 주려고 산 책이었다. 내용을 알고 보는 것과 아무 것도 모르고 보는 건 전혀 다르니까. 어쨌든 남편은 뮤지컬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책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숨을 고르더니 화장실에 들어가 치약을 짰다."그 티켓까지 보상하라고 할 거야."그가 칫솔을 문 채 웅얼거렸다. 그 뮤지컬은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매진되어서 남편은 두 자리를 구하기 위해 티켓 값만큼의 웃돈을 얹어 암표를 샀다. 두 장을 네 장 가격에 산 셈이었다. 그가 보상 받겠다는 건 두 장 값일까, 네 장 값일까."티켓 값대로 받겠다는 거지?"그녀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남편이 입을 헹굴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양치를 마치고 물기를 털면서 말했다."내가 그 티켓을 살 때 쓴 돈을 받겠다는 거야.""글쎄. 그건 좀 힘들 걸.""내가 손해 본 금액을 그대로 받겠다는데 왜?""경찰서에서 암표 값을 다 받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겠어?"남편은 물을 세게 틀고 세수를 했다. 그녀는 안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화장실에서 그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그 사람이 도둑질하기 전의 아무 일도 없었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것뿐이야."그녀는 눈을 감았다. 도둑질은 그 사람이 했다지만 남편도 뭔가를 할 수 있었을 거다. 애초에 어떻게든 깨워서 지갑을 돌려받았더라면 아무 일 없이 뮤지컬을 보러 갈 수 있었을 텐데. 그 사람을 만지기 싫었다면 버스 기사가 깨울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다. 그녀가 보기엔 남편은 결정적인 심증을 갖고도 지갑 찾기를 스스로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내일 찾을 수 있겠지?"씻고 나온 남편이 그녀의 옆에 누우면서 물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남편은 한숨을 쉬고 돌아누웠다. 그녀가 아는 남편은 그녀와 함께 사는 삼 년 동안 그녀가 자는 척하는 걸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다. 자는 척한다는 걸 알면서 내버려 둔 걸 수도 있었다. 지금 남편도 잠든 척 하는 거라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그 사람은 잠들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와 남편은 다음날 아침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골라놓고 거실에서 사과를 깎아 먹는 중이었다. 남편은 태블릿으로 집 근처의 경찰서를 검색하고 있었고 그녀는 텔레비전 뉴스를 봤다. 시위 현장 뉴스가 지나간 뒤 그들이 사는 지역의 터미널이 나왔다. 뒤이어 남편이 타는 고속버스가 보였고 버스 기사가 흥분한 표정으로 인터뷰를 했다."흔들어 깨웠는데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자세히 보니까 숨도 안 쉬었고요."남편이 태블릿을 내려놓았고 그녀도 사과를 깎던 손을 멈췄다. 기사의 신고를 받고 온 구급차가 한 일은 시신을 안치소에 데려다준 것뿐이었다. 경찰 측에서는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으로 사인을 추측했다. 남편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어젯밤까지 버스 회사에 경찰관을 대동해서 버스 내부의 씨씨티비를 볼 거라고 말했다. 열두 시간 뒤에 그 씨씨티비를 뉴스로 보게 될 줄 모르고서. 승객들은 모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누가 남편인지를 알아보았다. 화면에서 클로즈업된 좌석의 창가 쪽에 앉은 사람일 테니까.남편의 옆에 앉은 사람이 약을 먹으려다가 약통을 놓치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커다란 몸집 때문인지 약통을 쉽게 줍지 못했다. 그녀는 끙끙거리는 그 남자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창 쪽에 몸을 붙이는 옆사람을 봤다. 전국에서 지금 이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같은 화면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남자는 결국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나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의자 밑의 약통을 가까스로 주웠다."뭘 저렇게까지 보여주는 거야?"남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듯이. 아닌 게 아니라 뉴스에서는 그 남자가 숨을 거두고 있는 듯한 장면까지 보여주었다. 불뚝 튀어나온 배 위에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가 어느 순간 고개를 떨궜다. 남자가 죽은 건 이후였을 수도 있지만 뉴스의 연출은 확실히 남자가 이때 죽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시청자들이 더 안타까워하도록. 다음 컷에서는 사람들이 다 내리고 난 뒤 옆사람이 그 남자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나왔다. 남자는 물론 눈을 뜨지 못했고 옆사람은 힘겹게 그 남자를 거쳐 통로로 나간 뒤에 남자를 꼼꼼히 훑어보았다."혹시나 지갑을 갖고 있을까 했던 거야."그 옆사람, 아니, 남편이 설명했다. 그때 기사가 그들 쪽으로 걸어갔고 옆사람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버스에서 내렸다. 화면은 기사가 혼자 남은 남자의 어깨를 흔드는 장면에서 다시 좌석에 사람들이 타고 있을 때로 넘어갔다. 그 위에 리포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사람이 가득 찬 고속버스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도 이 시민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남편이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는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이 먹다 남긴 사과가 거뭇하게 시들어보였다. 그녀는 칼끝으로 사과를 건드렸다. 원래 시든 사과였나."난 정말 몰랐어."이윽고 남편이 우울하게 말했다."그런 상태인 줄 알았다면 뭐라도 했을 거야.""뭐라도?""약통을 주워준다든지. 아니, 만약 그 사람이 약통을 주워달라고 부탁했는데 거절했다면 내가 진짜 나쁜 놈이지. 그 사람은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고 난 그게 약통인지도 몰랐단 말이야."긴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골라놓은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오전 열 시가 넘어서였다. 남편은 거실에 혼자 있다가 들어와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선물했던 시계를 차고 실크 넥타이를 맸다. 그녀 역시 예물로 받았던 가방을 들었다. 그들은 각자 신발장 안 깊숙한 곳에서 아끼는 구두를 꺼내어 신고 말없이 현관을 나섰다. * 남편이 전화를 걸던 간밤에 그녀는 동네 산책로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9,876보, 9,877보, 걸음마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숫자가 올라갔다. 숫자 아래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라났다. 만 보를 채우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막 등지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주는 어플이었다. 그녀는 매주 토요일이 오기 전에 만 보를 채웠고 직장에서도 틈틈이 어플을 켜 완성된 나무들의 목록을 보곤 했다. 9,900보를 넘긴 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남편에게 전화가 오자 수신거부를 해버렸다. 그때 그녀에게는 사막에 나무를 심는 일이 중요했다. 10,000이라는 숫자와 다 자란 나무 그림을 보는 것도. 그녀는 창밖의 클락션 소리를 들으면서 어제의 기분을 떠올렸다. 결혼식이 열리는 호텔의 주변 도로에서 차가 밀려 한참이나 멈춰 서 있었다.당신 잘못이 아니야.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렇게 말할지도 몰랐다. 그건 사고였고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실제로도 그랬다. 남편이 약통을 주워주지 않아서 그 사람이 죽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뉴스에서는 주위 사람들의 무관심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처럼 연출했지만 누구도 승객 중 하나가 심장마비로 조용히 죽어가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거기 있었더라도 남편만큼이나 그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녀는 왜 남편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는지 스스로 묻고 싶었다.웨딩홀 로비는 차려 입은 하객들로 북적였고 코트를 벗어도 될 만큼 훈기가 돌았다. 그녀는 현금인출기를 찾는 남편 옆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들은 전에 이곳을 와 보았다. 웨딩홀 투어를 다니면서. 그때는 그들의 선택지가 명확했다. 예산이 정해져 있었고 그들은 미적 취향과 하객 인원도 비슷했으니까. 상견례 직후 할 일이 정신없이 쏟아졌지만 둘이서 게임의 퀘스트를 깨듯 하나하나 해나갔다. 주말에는 웨딩 화보를 촬영하거나 혼수와 예단을 보러 다니고 저녁마다 서로의 지인들을 만나 청첩장을 돌렸다. 지역 복지센터의 직원들에게도 식사를 대접했다. 아직 남편이 무료 급식 봉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그 시기에 그녀는 이따금 마음이 여유로웠다. 자기 시간을 아껴 복지센터에 다녀온 뒤 욕실 타일을 고르고 그녀의 의견을 묻는 남편을 보면 말이다. 지금처럼 서로를 믿고 기대면서 살아요. 복지센터의 센터장이 하객으로 와서 건넨 덕담이었다. 그녀가 센터장을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현금인출기는 로비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그녀는 돈을 뽑아 남편에게 빌려주었다."많이 친한 친구야? 축의금을 왜 이렇게 많이 내?"그녀가 묻자 그는 돈을 세다가 턱으로 홀을 가리켰다."호텔 결혼식장이니까. 코스 요리가 나오는 데야. 게다가 우린 두 명이잖아."그녀는 까마득히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대리석 벽과 바닥에 비치는 샹들리에 조명 때문에 눈이 시렸다. 남편은 돈을 넣은 봉투에 이름을 써서 신랑 쪽 테이블에 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남편을 불렀다. 머리에 무스를 발라 넘기고 흰 장갑을 낀 신랑 옆에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남편은 그녀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나누다가 물었다."종훈이는? 아직 안 온 거야?""아침에 연락 받았는데, 어제 회사 부장 모친상 다녀왔대."신랑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그래서?""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장례식 다녀오고 여길 오겠냐."남편은 다른 친구들을 돌아봤다. 다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뭔가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녀는 남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남편이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왜, 장례식 때문에 부정 탈까 봐? 그런 건 미신 아냐?""미신을 믿는 게 아니라 예의를 지키는 거지. 남의 경사니까 더 조심해야 하는 거고."다른 친구가 신랑을 거들었다. 남편이 그녀를 봤고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멀리서 한복을 입은 중년 여자가 신랑을 불렀다. 신랑은 남편의 어깨를 툭 치고 그녀에게 말했다."제수씨, 와 줘서 고마워요."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새 대화는 웨딩홀의 끝없이 높은 층고와 기둥마다 장식된 생화로 넘어가 있었는데 남편이 끼어들었다."정말 너희도 다 믿어? 그런 미신을?""미신을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누군가 답답해하면서 말했다."너 왜 계속 그 얘기야?"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홀에서 그들만 화환 옆에 서 있었다. 들어가기나 하자. 가만히 있던 친구가 먼저 걸어갔고 나머지는 그 뒤를 따랐다. 남편과 그녀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식장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 섰다."어떡하지?"그녀가 묻자 남편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어.""이미 와서 얼굴도 봐버렸는데 그건 괜찮은 거야?""아직은 우리만 알고 나머지는 모르니까. 계속 모르게 하면 돼.""이 사람들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면?""그러더라도 우리 잘못은 아니지. 그건 말 그대로 미신이니까. 무슨 일이 생기든 우리와는 상관없는 거야.""우리?"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식장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신랑이 상기된 얼굴로 문 앞에 서서 입장을 준비했다. 그녀와 남편은 신랑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로 빠졌다. 식장 안에서 사회자가 신랑을 소개했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자. 남편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들은 좁고 빠른 보폭으로 홀을 가로질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뒤에서 웅장한 피아노 선율과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유모차를 데리고 탄 대가족 틈에 끼어 내려갈 때도. 주차장에서 걸을 때 자신의 구두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서 그녀는 새삼 놀랐다. 차에 탄 그들이 문을 닫고 벨트를 매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적막이 내려앉았다. * 이건 내 탓은 아니야. 그녀는 말할 수 있었다. 이 년 전에도 그랬다. 후임이 작업한 서류의 실수를 뒤처리하느라 주말에도 잔업을 해야 했다. 그날 역시 연극을 예매해뒀던 남편은 극장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는 주말마다 각종 공연이나 낭독회 혹은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그런 게 충청도의 소도시에서 일하는 대가라는 듯이.카페에는 혼자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둘이서 온 사람들도 할 일을 하다 간혹 몇 마디를 나누었다. 남편은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집중해서 세 시간 만에 일을 마쳤다. 파일을 저장한 뒤 화장실에 가다가 돌아보면서 말했다. 테이블 작으니까 커피 조심해.커피는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남편은 자리에 없었고 노트북은 바닥에 떨어진 채였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노트북을 들었다. 화면이 먹통이었다. 왜 그래? 돌아온 남편이 물었다. 어디 갔었어? 그녀가 묻자 그는 휴대폰을 들어보였다. 전화가 와서. 여긴 너무 조용하잖아.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각자 노트북과 태블릿, 두꺼운 책을 보거나 뭔가를 적고 있었다. 주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것처럼.그녀는 카운터에 가서 씨씨티비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경찰관을 데려오셔야 보실 수 있어요. 매니저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공연 시간까지는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이 사람들한테라도 물어보자. 그녀는 짐을 챙기는 남편에게 말했다. 뭐라고 물어보게? 그가 주저하며 물었다. 그녀는 옆 테이블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남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중에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남의 노트북을 떨어뜨려놓고 그냥 가는 게 말이 되냐고. 연극을 보고 집에 가는 길에도 그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날 수리 센터에 갔다가 새 노트북을 사러 갈 때도. 다시 생각하니까 진짜 괘씸하네. 안 그래? 그는 그렇게 말했다.그 뒤로 이 년이 지나는 동안 후임은 연봉을 올려 이직했고 그녀는 과장을 달았다. 카페는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남편도, 후임도, 카페의 매니저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다. 지금 그녀는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던 그 순간.우리가 없어진 걸 금방 알 텐데. 전화 오면 뭐라고 할까? 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 남편이 물었다. 몸이 아프다고 해. 당신이? 아니, 당신이 아프다고 해야 둘 다 간 게 납득되지. 나는 당신 일행일 뿐이니까. 그게 크게 상관있나? 그럼. 이런 대화를 나누고 한 블록을 더 지날 때까지도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걱정이 들었다. 아무에게서도 전화가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남편은 기어변속기에 놓아둔 휴대폰을 자주 내려다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옆 차선에서 끼어들던 소형차에 부딪혔을 것이다. 뒤차들이 차례로 멈추는 소리와 클락션 소리가 따라붙었다. 소형차도 멈추었다가 끼어들어 앞서갔다. 그녀는 남편을 보면서 안전벨트를 붙잡았다."무슨 운전을 저렇게 하냐."남편이 헛기침을 했다. 이후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휴대폰 대신 그녀를 힐끔거렸다. 친구들이 그를 찾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차를 주차한 뒤 남편은 몇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는 아파트 입구에 먼저 들어가 그가 들어올 때까지 자동 유리문이 닫히지 않도록 서 있었다.한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저녁처럼 피곤했다. 그녀는 화장을 지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누웠다. 남편은 조용히 그녀를 지나쳐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뒤적였다. 욕실을 청소하고 나와서 파자마 밑단이 젖은 채였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일어나 앉았다. 초밥이나 시켜먹을까? 그래. 그녀가 스마트폰의 배달 어플을 켜서 초밥을 주문하고 있을 때 남편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당신 정말 몰랐어?""뭘?""그럴 땐 남의 경사에 가는 게 아니라는 거.""나도 그땐 생각 못했어.""그러면 당신도 잘못한 거네.""글쎄. 그런가."그녀의 스마트폰 화면에 주문이 접수되었다는 창이 떴다. 정말 그녀가 남편과 똑같이 잘못한 걸까? 죽은 사람을 본 것은 그녀가 아니었는데. 그 결혼식의 신랑도 그녀가 아닌 남편의 친구였다. 생각은 당신이 했어야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 년 전에 당신이 노트북을 지켜봤어야지, 라고 말하려 했던 것처럼. 정작 그녀가 잔업을 하게 했던 후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임은 그 주말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후로도 영영 몰랐다.이제는 다 끝났어.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녀와 남편은 오늘 하루 동안 이 집에서 푹 쉴 거고 내일이면 남편은 근무지로 돌아간다.그래도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떨쳐지지 않았다. 남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호텔 코스 요리 대신 동네 가게 초밥이라니, 하는 표정으로 초밥이 든 봉투를 건네받았다. 그들은 식탁에 마주 앉아 플라스틱 팩을 열었다. 와사비의 매운 향과 초밥 특유의 냄새가 퍼졌다. 그녀는 두 점을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남편은 엄지와 검지로 세 번째 초밥을 집어 들었다."손으로 집어 먹지 마. 젓가락 있잖아."그는 그녀가 건넨 젓가락을 받아서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당신 원래 글쎄라는 말을 자주 썼나?""뭐?""어제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글쎄, 라고 하고 있어. 오늘도 그렇고.""그랬나? 뭐 나쁜 말은 아니잖아.""왠지 기분이 별로야.""말을 조심스럽게 하려는 건데. 조심스러워하는 게 별로야?""아니,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그런 거 아니야."그녀는 초밥 팩의 뚜껑을 닫았다. 와사비 때문에 코가 매웠다. 남편도 입을 닦고 물을 마셨다."내가 정말 그렇게 잘못한 거야?"그가 젓가락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내가 어떻게 했어야 해? 어떻게 하면 더 나았을까?""당신이 아주 잘못한 건 아닐 거야."그녀는 얼떨결에 말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걸."오늘따라 별로네."먼저 일어선 남편이 초밥 팩을 냉장고 안에 넣었다.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초밥을 시켜먹었다. 정말 맛이 달라진 걸까. 남편은 안방에 들어갔고 그녀는 식탁에 앉아 생각했다. 당장 이 주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이 식탁에서 맛있게 먹었는데. 그때 무슨 얘기를 했더라. 그들은 뭔가를 고민하다가 서로의 눈을 마주보곤 했다. 다음 주말이면 다 괜찮아질까? * "이걸 찾았어."남편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녀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눈을 감았다 떴다."가방 안주머니에 있더라고."뮤지컬 티켓이었다."지갑에 넣어놨다며.""아니었나봐. 다행이지. 지금 준비하고 가서 근처에서 뭘 먹으면 시간이 딱 맞을 거야.""그걸 보러 가자고?""봐야지. 티켓이 있는데."그녀는 눈을 비볐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는 몰라도 그 뮤지컬을 보러 가고 싶지 않았다. 무려 두 배의 값을 주고 어렵게 산 티켓인데. 지갑은 잃어버렸지만 티켓은 잃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 기뻐해야 할 텐데. 그녀는 팔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그래? 가는 길에 약 사먹을래? 감기 때문에 이걸 안 볼 수는 없잖아.""궁금했던 게 있는데."그녀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결혼식장에서는 왜 나가자고 한 거야? 어차피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다면서.""그건 또 왜? 꼭 지금 얘기해야 해?"남편이 시계를 보면서 되물었다. 그녀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안방으로 걸어갔다. 혹시라도 그 부부에게 불운이 끼칠까 봐, 혹은 어젯밤의 그 사람이 아직 마음에 걸려서. 그는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다. 나중에 다시 물어본다면 말이다. 안방에서 옷장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습관처럼 스마트폰의 나무 심는 어플을 켰다. 메인에 어제 완성된 나무 그림과 그녀가 선택한 지역명이 떴다. 캄보디아의 캄퐁 스페우. 맨발로 물을 긷는 아이들의 학교 옆에 숲이 조성될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일이 벌써 절반 이상 일어나고 있었다. * 그들은 오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현관을 나섰다. 그녀는 결혼식에 갈 때 신은 구두보다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는데 집을 나서자 아파트 복도에 또각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면서 시계를 봤다. 세 시 삼십 분. 그들은 불과 다섯 시간 전에 나란히 앉아 사과를 깎아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한기를 느껴 팔을 감싸 안았다.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가 된 사람이 옆사람을 피해 몸을 뒤로 젖히는 씨씨티비를 보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 같았다.어디로 갈까? 얼마나 먼 곳으로 갈까? 그들이 이 주 전 주말에 초밥 두 팩을 모두 비우면서 했던 이야기는 여행지에 관한 것이었다. 당신이 결정해. 남편은 초밥을 집었던 손을 닦으며 선택권을 넘겼다. 따뜻한 방콕. 혹은 한겨울의 블라디보스토크. 전혀 다른 두 도시를 놓고 그녀는 오랫동안 생각했다."약국 앞에 세워줘."상가 쪽을 지나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진짜 아픈 거야?"그녀는 약국에서 감기약과 생수를 사왔다. 약 봉투를 뜯는 그녀를 그가 흘끔거렸다. 약을 삼킨 뒤 나머지 약을 글라스박스에 넣다가 그녀는 문득 물었다."그런데 지갑에는 뭐가 있었어?""주민등록증이랑 신용카드, 오티피 카드, 그런 거.""어디까지 갖고 있었는데?""터미널까진 있었어. 거기서 커피를 샀거든. 아, 그건 스마트폰으로 결제했나. 회사에 놔두고 왔나?""그런 거면 진짜 웃기는 거지.""뭐가 웃겨, 다행이지. 재발급 받아야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그녀는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어젯밤의 남편을 기억했다. 이 뮤지컬을 무사히 보고 월요일에 지갑까지 찾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돌려받는 거였다. 주민등록증과 신용카드를 재발급 받지 않아도 되는,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은 상태."그래, 지갑을 찾으면 정말 좋겠다."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남편이 회사에서 지갑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동료들의 원성을 들으며 사무실 전체를 뒤지고 씨씨티비까지 확인한 끝에 점심시간에 주민 센터와 은행을 찾아가는 남편. 그녀는 몸이 더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그녀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괜찮다고, 이 약이 잘 듣는 것 같다고 옆사람에게 말했다.〈끝〉

2020-01-01 06:30:00

희곡 '32일의식탁'

[2020 매일신춘문예] 희곡 '32일의 식탁'

▶등장인물해진(54, 여, 윤지의 모)윤지(20대 후반, 여)▶때10월 31일 밤 11시 30분▶곳해진의 집, 부엌.▶무대무대 중앙의 4인용 식탁과 그 옆에 놓인 의자 2개. 식탁의 왼쪽에는 요리한 흔적이 가득한 싱크대와 조리대가 놓여있다. 식탁 뒤편에는 일자가 크게 적힌 달력과 윤지와 해진의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달력의 일자는 31일로, 오래된 듯 누렇고 얼룩진 모습이다. 가족사진 속 해진은 무대 위의 해진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액자의 오른편에 세워진 현관문.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열려있다. 그 위에 커다랗게 띄워진 흰색 전자시계. 극의 진행에 따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식탁의 오른편 구석에는 하얗고 커다란 냉장고가 있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파스텔 톤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벽지나 가구 곳곳의 색이 바래있다.막이 오른다. 싱크대 앞에 서 있는 해진. 그 주변에는 음식 재료와 접시들이 널브러져 있다. 해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접시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어딘가 들뜬 기색이다.해진=이참에 그릇을 바꾸든가 해야지. 쓸만한 게 없네.한참을 고민하던 해진은 둘 다 내려놓고는 찬장에 손을 뻗는다. 이때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해진=여보세요? 누구세요? (사이) 잘 안 들려요. 여보세요?말을 할수록 구겨지는 해진의 표정. 해진의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해진=(고함치듯) 여보세요? (전화를 끊으며) 뭐야, 왜 말을 안 해.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은 해진은 찬장으로 다시 손을 뻗는다. 손이 닿지 않자 그는 발뒤꿈치까지 들어가며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손은 찬장 맨 꼭대기의 접 시까지 닿지 않는다.해진=(귀찮다는 듯이) 아유, 얜 또 맨 꼭대기에 올라가 있어.해진은 식탁 의자를 끌고 온다. 의자에 올라가서 겨우 접시를 꺼낸다. 이때 다시 한 번 휴대폰이 울린다.해진=여보세요? 여보세요? (짜증스럽게) 장난 전화 걸지 마세요.전화를 뚝 끊어버린 해진은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해진=아니 바빠죽겠는데. 오늘따라 왜 이래, 진짜.해진은 싱크대와 조리대 앞, 냉장고 주위를 바쁜 걸음으로 돌아다닌다. 그러다 문득 식탁을 쳐다보고는 깜짝 놀란다.해진=아이고, 내 정신. 빵 꺼낸다는 걸 까먹었네.해진은 오븐에서 빵을 꺼내 접시에 담는다. 식탁으로 가지고 가지만, 이미 가득 차 있다. 다른 접시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빵 접시를 식탁 위로 꾸역꾸역 올려놓는 해진.해진=(두리번거리며) 샐러드를 좀 만들어야겠네.종종걸음으로 냉장고로 향하는 해진. 냉장고 속에 거의 몸을 들이밀고는 야채칸을 뒤적거린다. 이때 윤지가 문을 열고 무대 위로 등장한다. 검은 투피스 정장 차림이 다. 조금 열려있던 문은 이내 바깥쪽으로 활짝 열리게 된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해진에게 다가가는 윤지.윤지=엄마.해진=어머.해진은 놀란 듯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윤지를 와락 껴안는다. 윤지는 순간 움찔하지만, 이내 천천히 해진의 등을 감싸 안는다. 해진은 윤지를 더욱 세게 끌어안 는다.해진=(급히 몸을 떼곤 매우 반가운 투로) 오는데 안 추웠어? 쌀쌀하던데 따뜻하게 입지, 옷이 이게 뭐야. 배고프지? 빨리한다고 했는데 오늘따라 미용실에 손님이 많더라고. (윤지를 의자에 앉히며) 일단 앉아. 앉아있어. 금방 끝나.윤지=(다정하게) 나 점심 늦게 먹었어. 천천히 해도 돼.해진=알겠어. 알겠어.해진은 대답과는 달리 더욱 분주하게 부엌을 가로질러 다닌다. 윤지는 그런 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벗는다.해진=(다급하게) 앉아, 앉아. 앉아있어. 금방 해.윤지=뭐 도와줄 거 없어?해진=아냐, 그냥 있어.윤지=(머뭇거리며) 그래도.해진=괜찮아. 할 것도 없어.다시 싱크대 앞으로 가는 해진. 손을 헹구며 양상추를 집어 든다. 양상추를 손질하며 윤지에게 말을 건다.해진=(뿌듯하게) 내가 너 온다고 너 좋아하는 거 가득 차려놨어.윤지=잡채에 등갈비 찜, 오징어 볶음, 새우전, 탕수육. 이게 다 뭐야. 뭘 이렇게 많이 준 비했어. 다 먹을 사람도 없는데.해진=왜 없어. 네가 다 먹고 가면 되지.윤지=(옅게 웃으며) 하여튼 엄마는 손 진짜 커.해진=좀 이따 스테이크 해줄게. 너 고기 없으면 밥 못 먹잖아.윤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주방을 돌아다닌다. 해진은 손을 움직이면서도 힐끔힐끔 윤지를 바라보며 말을 건다.해진=요즘 부쩍 미용실 손님이 늘었어.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파마하는 사람이 많아졌 어. (우습다는 듯이) 확실히 부풀리면 따뜻하긴 하지.윤지=다행이네. 장사 잘 되면 좋지, 뭐.해진=예약 전화 받는 것도 일이라니까? 더 바빠지면 사람이라도 하나 구해야겠어. 손이 모자라 죽겠어.윤지=진작 구할 걸 그랬다. 엄마 혼자 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지.해진=그래도 옛날엔 할 만했어.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그렇지.윤지는 가족사진과 달력이 걸린 벽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해진은 그런 윤지를 힐끔힐끔 쳐다본다.윤지=집에 되게 오랜만에 왔는데 변한 게 없네. 다 그대로야.윤지의 말에 갑자기 멈추는 해진의 손. 해진은 굳은 표정으로 급히 냉장고로 향한다. 문을 열고는 몸을 숨기듯 반쯤 집어넣고는 냉장고를 뒤적거린다.해진=(머뭇거리다가) 변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윤지=그래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서.해진=다 그대로야. 달라진 건 없어. (중얼거리듯) 달라진 건 없어.한참을 더 뒤적거리다 냉장고 문을 닫은 해진의 손에는 고기 팩이 들려있다. 해진은 인덕션 앞으로 향한다.해진=그냥 스테이크 지금 굽자. 생각해보니까 너 좋아하는 드레싱 사는 걸 까먹었어.윤지=나 그냥 있는 거 먹어도 괜찮아. 고기 안 구워도 돼.해진=(단호하게) 아냐, 아냐. 금방 구워. 앉아있어. 너 배고프잖아.해진의 기분은 전과 달리 가라앉아있다. 윤지는 그런 해진에게 다가온다. 해진은 찬장을 뒤져 꺼낸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윤지에게 건넨다. 그것들을 식탁 위로 가 져가는 윤지. 해진은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윤지=(장난스러운 투로) 근데 엄마, 누구 만나?해진=내가? 누굴?윤지=아니, 뭐, 남자?해진=얘는. 무슨 남자야.윤지=만나는 사람 진짜 없어?해진=(웃으며) 아무도 없어요. 근데 왜?윤지=그냥. 가만 보니 엄마 머리가 조금 바뀐 거 같아서.다시 싱크대 근처로 돌아오던 윤지는 갑자기 해진의 등을 껴안는다. 등에 코를 박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는 윤지.윤지=냄새도 조금 바뀐 거 같고.해진=무슨 냄새?윤지=있어, 엄마 냄새. 엄마 생각나는 냄새.해진=좋은 거지?해진과 윤지, 마주 보고는 웃음을 터뜨린다.윤지=가끔 괜찮은 사람 있으면 만나기도 하고 그래.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해진=뭐가 외로워. 너 있는데.윤지=그래도. 난 맨날 함께 있어 줄 수 없잖아.해진=됐네요. 그렇게 엄마가 걱정되면 연락 좀 자주 해. 자주 찾아오고.윤지=(미안한 듯 웃으며) 힘든 거 알잖아.해진=(조금 원망스러운 투로)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전화 한 통을 안 하고, 집 한 번을 안 찾아와. (애써 분위기를 바꾸며) 너 엄마한테 좀 너무한 거 아냐?윤지=미안. 미안해, 엄마.어딘가 미안한 표정의 윤지는 해진을 놓아주고 해진은 다시 고기를 굽는 일에 집중한다. 불을 조절하고, 팬을 만지작거린다. 이를 지켜보던 윤지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다. 윤지가 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현관문 위에 시간이 띄워진다. 11시 33분이다.해진=내가 오늘 저녁 차린다고 얼마나 골치를 썩였는지 알아? 간만에 집에 오는 건데, 왔을 때 잘 먹이고 싶어서. 오죽하면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요리학원에 다녔어야 했나 생각했다니까.윤지=에이. 엄마 요리 잘하는 거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데, 뭘.해진=매번 하는 것밖에 못 하니까.윤지=아랫집 아주머니도 맨날 엄마 김치 맛있다고 그랬잖아. 반찬도 다 맛있다고 그러고.해진=(못마땅한 투로) 그 양반 단골 자리 던진 지 꽤 됐어. 컬도 별로고 파마 값이 길 건 너보다 비싸다나 뭐라나.윤지=(눈에 띄게 놀라며) 진짜? 그래서?해진=(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과장되게) 내가 그랬지. 거기 가서 하세요, 그럼. 나는 부끄 럽게 장사한 적 없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몸집을 부풀리듯 어깨를 세우며 장난스럽게 말을 하는 해진에 윤지는 허리까지 굽히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이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그들은 매우 즐거워한 다.윤지=엄마는 진짜. 변한 게 없어.해진=내가 변했으면 좋겠어?윤지=(잠시 고민하다) 아니. 그냥. 엄마는 엄마였으면 좋겠어.해진=싱겁다, 싱거워.그사이 다 구워진 고기. 해진이 손짓하자 윤지가 접시를 건넨다. 각자의 접시를 들고 그들은 식탁으로 간다.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차례로 앉는다. 힐끔 시계를 보는 윤지. 해진은 이를 보지 못한다.해진=많이 먹어. 이거 다 먹고 가.윤지=(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럼 집에 못 가는데?해진=안 가면 되지? 오랜만에 온 김에 자고 가.윤지=(잔잔하게 미소지으며) 안돼. 가봐야 해.윤지는 코르크를 빼서 해진의 잔에 와인을 따른다. 포크로 접시를 툭툭 건드리던 해진은 작게 칼질을 해 고기 맛을 본다.해진=(눌린 목소리로) 읍.윤지=왜 그래?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손에 고기를 뱉는 해진. 윤지가 의아한 얼굴로 걱정스럽게 바라보지만, 해진은 싱크대로 뛰어가 물로 입을 헹궈내는 데 집중한다.윤지=왜 그래? 뭐 잘못 씹은 거야?해진=(한참 물로 입을 헹구다가) 고기 먹지 마. 딴 거부터 먹고 있어. 이거 조금 더 해야 겠다.윤지=왜? 맛없어?해진=(당황하며) 너무 덜 익었나 봐. 고기 날 내가 되게 심하다. 먹지 마, 먹지 마. 다시 해줄게.윤지=냄새 많이 나? 아예 못 먹을 정도야?해진=아냐, 아냐. 내가 버터를 덜 썼나 봐. 버터 좀 더 넣으면 될 거야.식탁으로 돌아온 해진은 윤지의 접시까지 집어 들고는 조리대로 향한다. 뻣뻣하게 굳은 해진의 표정. 팬을 다시 불 위에 올려놓는 해진. 묘하게 날이 서 있다.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바라보는 윤지. 해진은 '버터'를 중얼거리며 냉장고로 향한다. 윤지=는 냉장고 속에 반쯤 파묻힌 해진의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본다.해진=(갑자기 몸을 윤지=쪽으로 획 돌리며) 아니, 비싼 거로 달라고. 내가 오랜만에 딸 오니까 고기 좋은 거로 줘야 한다고 계속 말했다고. (돈을 내듯 손에 쥔 버터를 허 공에서 흔들며) 근데 한두 푼 받은 것도 아니고, 이런 그지 같은 고기를 주면 어떡 해.윤지=(달래듯이) 그냥 끝에만 조금 그런 거 아니야? 냄새나는 거 같다가도 먹다 보면 괜 찮을 때도 있잖아.해진=(터무니없다는 듯) 그 정도 수준이 아니야. 꽤 오래 구석에서 썩었다 나온 냄새라니 까? 오래 사 먹었다고 믿었는데 진짜 너무하네, 그 양반. 어떻게 이런 걸 판다고 내 놔?윤지=(고깃덩이들을 가리키며) 그럼 이건 어떡해? 버려?윤지의 말에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듯 해진의 흥분은 천천히 사그라진다. 부산스럽던 그의 행동과 씩씩거리던 말투는 사라지고, 무대 위에는 점점 차분해지는 해진의 숨소리만 남는다.해진=(차분하게) 아냐, 살릴 수 있어. 요리 한두 해 하니.윤지=(무미건조하게) 진짜?해진=(결연하게) 그럼. 할 수 있어. 버터 많이 넣은 음식 중에 맛없는 거 못 봤어.해진은 조리대로 향한다. 버터를 듬뿍 덜어 넣고는 고기를 다시 데운다. 윤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액자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윤지=(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 잘 나왔다. 이거 찍었을 때가 3년 전이지, 아마.해진=그렇지.윤지=벌써 그렇게 됐네. 엄마 이때 진짜 예뻤는데.해진=뭘 예뻐. 네 립스틱 발라봤다가 입술만 동동 뜨고.윤지=(웃음을 터뜨리며) 아, 맞아. 엄마는 레드는 진짜 아니야. 나는 핑크가 안 어울리는 데, 엄마한테는 그게 찰떡이지. 그러고 보니 사진 속이랑 같은 옷이네?가족사진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해진. 해진은 알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옷과 사진을 번갈아 본다.윤지=한동안 못 본 옷이라 버렸나 했는데.해진=(한참 말을 고르다) 그러게. 몰랐네.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같은 옷이네.윤지=난 이 옷 좋아. 엄마한테 잘 어울려.해진=이 옷이?윤지=응.해진은 말없이 팬만 만지작거린다. 어딘가 불편한 표정이다.해진=다 됐어.윤지=(접시를 집으며) 접시?해진=응. 가서 앉아있어.윤지=아냐. 내가 들고 갈게.해진=됐어.접시를 두 개 다 들고 식탁으로 가는 해진. 윤지는 그 뒤를 따라 자리에 앉는다. 해진은 윤지=앞에 접시를 내려놓는다.윤지=(숨을 들이마시며) 버터 향 진짜 좋다. 진짜 다르긴 다르네.해진=이젠 냄새 안 날 거야. 먹어 봐.윤지=꼭 사 먹는 거 같아.해진=(전보단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럼. 파는 것보다 훨씬 나을걸?윤지는 웃으며 다시 와인 잔을 쥔다. 윤지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해진은 고깃덩어리를 입안에 넣는다.해진=(입을 막으며) 욱.윤지=(놀라며) 왜 그래? 또 냄새나?해진=(고개를 숙이곤) 휴지, 휴지.식탁 위엔 휴지가 없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해진은 싱크대로 뛰어가 헛구역질을 한다.윤지=(해진에게 달려가며) 엄마. 괜찮아? 왜 그래?계속 헛구역질을 하던 해진. 물을 마시며 두어 번 입을 헹구고 나서는 곧장 식탁으로 돌아간다.해진=(양손에 접시를 쥐고선) 먹지 마. 냄새가 그대로야.윤지=아니, 어떻길래 그래? 그렇게 심해?해진=(사이) 뭔가 잘못됐어. 이게 아니야. 이렇게 구우면 안 됐어.윤지=(답답한 듯) 엄마?해진=(팬 위로 고기를 다시 쏟으며) 아냐, 아냐. 별거 아냐. 양념 때문인가 봐.윤지=그렇게 심하면 그냥 딴 거 먹자. 나 고기 안 먹어도 돼.해진=아냐, 아냐. 아냐. 다시 하면 돼.윤지=벌써 두 번째야.해진=로즈마리. 로즈마리면 돼. 그거면 다 돼.윤지=(단호하게) 엄마.해진=(중얼거리듯이) 로즈마리. 로즈마리. 로즈마리.갑자기 찬장을 열고선 마구 뒤지기 시작하는 해진.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주로 레토르트 식품들이다. 하나하나 주워 품에 담을수록 굳어지는 윤지의 표정.윤지=(식품들을 주우며) 죄다 레토르트잖아. 이런 거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해진=(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이, 로즈마리. 어디에 뒀지? 그것만 찾으면 되는데.윤지=엄마.해진=(반갑게) 어, 찾았다. 여기 있었네.윤지의 부름은 들은 체도 안 하며 로즈마리를 팬 위에 쏟아붓는다. 윤지는 다시 물건들을 주워 찬장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는 윤지. 시간 은 어느새 11시 45분으로 바뀌어 있다. 시간을 확인하던 윤지와 갑자기 눈이 마주 친 해진.해진=(윤지의 품 안에서 음식들을 뺏어가며) 자리로 돌아가.윤지=아냐, 도와줄게.해진=(단호하게) 됐어. 앉아있어.결국, 식탁에 앉는 윤지. 해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손목을 들어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그런 윤지를 본 해진은 다급하게 말을 시작한다.해진=이번 크리스마스 땐 집에 올 거지?윤지=(사이) 힘들 것 같아. 연말이잖아.해진=그럼 설날엔?윤지=(머뭇거리다가) 아마, 그때도.해진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팬 쪽으로 몸을 돌린다. 한참 팬을 만지작거리던 해진은 다시 몸을 돌려 윤지를 바라본다. 이때 윤지는 다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고 있다. 갑자기 고함치듯 말을 뱉는 해진.해진=(빠르게) 넌 늘 그런 식이야. 난 언제나 뒷전이지. 너한테 난 중요하지도 않아.윤지=그게 무슨 말이야.해진=(단호하게) 아니, 넌 그랬어. 무슨 약속이, 일이 그렇게 많은지 허구한 날 밖에 있고 밤늦게 들어오고. 요즘도 그래. 찾아오지도 않으면서 연락 한 번을 안 하잖아. 이 집에 혼자 남겨진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잖아!윤지=(안절부절못하며) 엄마, 일단 진정해. 지금 너무 흥분했어.해진=너 나한테 너무 소홀해.윤지=그러려던 거 아니었고, 지금껏 그런 적도 없었어. 엄마도 알잖아.해진=알지, 알지! 내가 널 번거롭게 만들고 방해하고 있으니까. 사실 내 잘못인 거야. 내 문제인 거라고.윤지=(시계를 곁눈질로 확인하며) 미안해.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미안해.해진=(더 큰 목소리로) 그게 날 더 미치게 만들어! 내가 너한테 목을 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내가 결국 네게 짐이 된다는 게 견딜 수가 없다고!악에 받친 해진의 목소리는 무대를 가득 메운다. 이때 갑자기 인덕션의 온도 조절 경보음이 울린다. 해진과 윤지의 관심은 꺼진 인덕션으로 모인다. 팬 속의 고기는 이미 다 타버렸다. 해진과 윤지=사이에는 힘이 빠진 호흡만이 오고 간다.윤지=(사이) 다 타버렸네.해진=(힘없이) 그러네.윤지=버려야겠지?해진은 말없이 고기를 응시한다. 윤지가 시간을 확인한다. 시간은 어느새 11시 49분이다.해진=(고기의 냄새를 맡으며) 아냐. 탄 부분만 조금 잘라내면 돼. 나머진 먹을 수 있을 거야.윤지=그럼 반 이상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해진=(사이) 생각보다 맛있을 수도 있지.윤지=(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말?가위를 찾는 해진의 손을 잡는 윤지. 해진은 순간 굳은 얼굴로 윤지가 잡은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제법 큰 소리로 숨을 고르는 해진. 고기를 단숨에 쓰레기통에 버린 다.윤지=엄마.해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기 시작한다. 윤지는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진의 호흡이 고르게 변하고, 그의 힘으로 다 시 일어날 때까지 그저 곁을 지킨다.해진=(억지로 지은 웃음을 지으며) 냉장고에 고기는 많아. 다시 하면 되지. 다시.윤지=괜찮아. 있는 거 먹어도 돼.해진=아냐. 이번엔 맛있게 할 수 있어. 아까랑 다른 부위고, 얘가 더 맛있는 거야.씩씩한 걸음으로 냉장고로 간 해진은 냉장고를 뒤져 고기를 찾아낸다. 큰 덩이의 붉은 고기를 한 손에 가득 쥐지만, 금세 해진을 따라온 윤지의 손에 고기를 빼 앗긴다.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해진과 윤지. 그러나 해진은 윤지에게서 고기를 빼앗 지 못한다. 해진은 허망한 얼굴로 윤지를 바라본다.해진=(다시 인덕션 쪽으로 향하며) 그럼 파스타 해 먹자. 너 토마토 소스에 해산물 잔뜩 들어간 거 좋아하잖아.윤지=집에 해산물 없잖아. 소스도 없고.해진=(찬장을 열며) 아냐. 냉동실 뒤져보면 나올 거야. 소스는 찬장에 있어.윤지=(시계를 확인하며) 오래됐잖아. 못 먹어, 이젠.해진은 꿋꿋하게 찬장을 뒤진다. 찬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들이 다시 우수수 떨어진다. 바닥에 흩뿌려지는 레토르트 식품들. 윤지는 해진의 두 팔을 끌어안아 행동을 저지한다.윤지=엄마. 나 파스타 안 먹어도 괜찮아. 별로 안 먹고 싶어.해진=아냐. 놔봐. 찾을 수 있어. 금방 한다니까?해진은 윤지의 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하게 저항한다. 겨우 빠져나온 해진. 다시 찬장 속을 헤집기 시작한다.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르고 거친 몸짓이다.해진=(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냥 하면 되는데 너는 왜 호들갑을 떠니.윤지=엄마, 인제 그만해도 돼.해진=(매우 흥분한 투로) 왜? 나는 이 식사를 완벽하게 만들 거야. 오늘 저녁은 최고의 만찬이 되어야 한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라고!찬장을 뒤집어 놓는 해진의 손길에 봉지 입구가 열려있던 파스타 면이 바닥에 잔뜩 흩뿌려진다. 순간 윤지와 해진의 시선이 모두 모인다.해진=다른 거 먹자.윤지=엄마.해진=(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럼 해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윤지=엄마.해진=집에 새우가 있었나. 냉동실 뒤져 보면 나올 거 같은데.윤지=엄마.해진=근데 마늘이 간마늘 밖에 없는데. 편마늘이 필요하잖아. 네가 좋아하는 그, 뭐지, 그 거 하려면.윤지=(힘주어 꾹꾹 눌러 말하며) 엄마.해진=그거 말고 다른 거 할까? (냉장고 쪽으로 향하며)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를 알아야 지.윤지=(한숨 쉬듯) 엄마.해진=(우뚝 멈추어 서며) 엄마. 엄마. 엄마! 제발, 엄마 소리 좀 그만해!해진은 윤지에게 다가가 손목시계를 풀어 던진다. 현관 위엔 11시 56분이라고 띄워 져 있다.해진=너는 나와 함께 있는 게 즐겁지 않니? 행복하지 않아?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울 음을 터뜨리며) 지금까지도 넌 떠날 궁리만 하고 있어.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만 한 다고!윤지=곧 가봐야 하니까. (건조한 투로) 시간이 다 됐어.해진=(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윤지에게 매달리며) 얘는, 어딜 간다고 그래. 해놓은 거 한 입도 안 먹었잖아. 이따가 보내줄게. 응? 밥 한 끼만 먹고 가. 오늘 저녁 한 끼만 먹고 가, 엄마랑. 응?윤지=(조금 동요하다가) 시간이 없어. 미안해.해진=(윤지를 억지로 식탁으로 잡아끌며) 앉아, 앉아. 우리 밥 먹자. 응? 윤지야, 제발.말을 다 마치지 못한 해진은 윤지의 손을 잡고 통곡하기 시작한다. 해진의 옆에 서서 이를 바라보는 윤지.윤지=(감정을 애써 누르며) 엄마가 그토록 기다리는 32일은 오지 않을 거야. 엄마가 얼마 를 기다리든 그날은 오지 않아. 애초에 (사이) 그런 날은 없으니까.해진=(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왜 그런 말을 해. 네가! 그런 말을 나한테 어떻게 해! 너는 내 딸이잖아. 내 뱃속에 나왔잖아! 그런데 날 떠난다는 말을,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그렇게 태연하게 해!윤지=(느리지만 또렷하게) 적어도 나는 꼭 해야 하는 말이니까. 엄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해진=(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리며) 어떻게, 그래도. 어떻게.윤지의 손을 놓친 해진은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엎드린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윤지는 와인 병과 잔 두 개를 가져온다.윤지=(다정하게) 고기 오래된 거니까 먹지 말고 그냥 버려. 파스타 면도 뜯어놓은 상태 그 대로잖아. 개봉한 상태로 오래 두면 못 먹는 거 알면서. (해진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달력도 바꿔야겠다. 이제 11월이니까. 해진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몸은 미동도 없다. 윤지는 해진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등 위에 엎드린다. 해진이 못다 한 말을 들어주듯 윤지의 오른쪽 귀는 등과 맞닿아 있다.윤지=(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미안해.윤지가 몸을 일으키자 해진은 천천히 일어나 윤지와 눈을 맞춘다. 잔에 와인을 따르는 윤지. 해진은 자신에게 건네진 잔을 조심스레 받아든다.윤지=(미소를 지으며) 고마워. (잔을 내밀며) 올해도.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두 개의 잔. 자리에서 일어나는 윤지를 따라 일어나는 해진. 윤지는 바닥에 던져진 시계를 주워 시간을 본다. 11시 58분. 해진은 무대 끝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온다. 해진에게 비치는 조명.해진=(객석의 먼 곳을 응시하며) 생일에도 야근을 시키는 회사가 어디에 있냐고 했어요. 너무하다고 정도 없다고 그랬어요, 제가. 그랬는데 (사이) 6시 반쯤 연락이 왔어요. 일이 일찍 끝났다고. 생일이란 걸 알았는지 그냥 기분이 좋았는지 과장이 일찍 가 라고 했대요. 어찌나 기쁜 목소리로 얘기하던지 덩달아 나도 들떠서 장사를 일찍 접었어요. (황홀한 꿈을 꾸는 것처럼) 맛있는 거 먹고 오랜만에 얘기나 나누려고 했죠.윤지=(시계를 두 손으로 꼭 쥐며) 꼭 전해주고 싶었어.해진=(갑자기 꿈에서 깬 사람처럼)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양손 무겁게 집으로 돌 아가는데 전화가 울리는 거예요. 나중에 받으려고 계속 걸어가는데 쉼 없이 울리더라고요. 울고 있었어요. 제발 받으라고, 받아야 한다고, 벨이 소리 내서 울고 있었어요. 근데 나는 그걸 몰랐어.윤지=(해진에게 다가가며) 말해주고 싶었어.해진=가끔 생각해요. 제가 전화를 일찍 받았다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허탈하게) 꼬박 반년 만에 겨우 얼굴 보는 거였어요.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게 나였다면, 차라리 나였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어요.윤지=엄마의 시간은해진=나의 시간을 주고 싶다고요.윤지=계속 흘러가야 한다고.해진=(감정을 터뜨리며) 겨우 28살이었어요. 그토록 바라던 곳에 입사해서 이제 막 꿈을 펼칠 때였다고요. 한창 아름답고 눈이 부실 때였단 말이에요! 어떻게 처음 세상의 빛을 보았던 날, 그 빛을 다시 앗아가 버릴 수가 있어요? 왜 하필 우리 애였윤지=(해진의 말을 끊으며) 엄마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어.윤지는 해진의 손에 반쯤 깨진 시계를 쥐여준다. 쫙 핀 손바닥 위에 놓인 시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해진. 윤지는 그런 해진을 바라보다 현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윤지=엄마.해진은 시계에서 눈을 떼 윤지를 바라본다. 웃고 있는 윤지와는 달리 해진의 표정에는 원망과 슬픔, 애원이 뒤섞여있다.윤지=(해진과 눈을 맞추며) 갈게.해진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여준 윤지는 망설임 없이 문밖으로 퇴장한다. 문은 윤지가 등장하기 전처럼 조금 열려있다. 그 위에 12시를 알리는 시계. 해진은 문을 응시하다 허리를 굽혀 숨을 몰아쉰다. 해진의 호흡엔 이상한 쇳소리가 섞여 나온다. 한참 숨을 고르던 해진은 갑자기 무엇에 쫓기듯이 부엌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식탁을 비우고 엉망이 된 바닥을 치운다. 이때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 리. 해진은 현관문 밖으로 퇴장한다.피자 박스를 들고 부엌으로 다시 들어온 해진. 이제 현관문은 완전히 닫혔다. 뚜껑을 열고 물끄러미 피자를 바라보던 해진. 이내 한 조각을 집어 입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한다. 해진은 우적우적 피자를 씹는다.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막.〈끝〉

2020-01-01 06:30:00

수필 '아버지 게밥 짓는다'

[2020 매일신춘문예]수필 당선작-아버지 게밥 짓는다

달무리 속으로 언뜻언뜻 구름이 흘러들다 사라지는 밤, 정월대보름 놀이를 하느라 한껏 들뜬 여흥이 가시기전 경광등을 켠 경찰차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에서 내리더니 보호자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농한기를 맞아 도시에 사는 지인들과 관계의 밥을 짓고 집으로 돌아오다 아버지는 속도의 바퀴에 무참(無慘)하게 부딪쳤다는 것이다.어머니는 오빠와 언니에게 당부의 말도 일러 둘 겨를도 없이 그 분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위중했던 병세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적응되고도, 근 1년여의 투병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진 대퇴부까지 석고 깁스를 하고 목발에 의지한 채 집으로 오셨다. 한 집안의 대들보이자 기둥처럼 튼튼했던 몸이 사고의 후유증 때문인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왼쪽 어깨가 앞으로 치우치면서 게가 걷는 형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걸음이 빠르면 빠를수록 게걸음은 더욱 더 심하게 나타났다.서식환경과 외향적인 특성이 다양한 게는 한 쌍의 집게발과 네 쌍의 다리로 종횡무진 갯벌을 오고 간다. 아버지 역시 푹푹 빠지는 세상 속에서 마른 곳과 젖은 곳의 경계를 넘나들며 세상의 파고와 맞서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파도가 지나간 자리엔 그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아버지는 사고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과 육체적인 상처를 지닌 채 당신의 건재함을 보이려는 듯 세상의 파고 속에서 잠시도 자신을 풀어 놓는 일 없이 게걸음을 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까치발을 든 민꽃게처럼 수게의 기개(氣槪)를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게딱지의 단단함 속에 자신의 가장 여린 부분을 감추고 도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썰물을 밀어낸 너른 벌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게가 숨구멍을 오가며 무기물을 걸러 내거나 갯지렁이 바다 생명의 사체를 먹이로 찾고 있는 중이다. 게가 먹이를 찾는 것이나 아버지가 세상의 바다에서 필요한 양식을 얻기 위해 게걸음 치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편한 다리로 분주히 걷는 모습에선 언제나 인내의 짜디짠 냄새가 배어 있었다.일 년 농사를 준비하며 관계의 밥 짓기를 하는 과정 속에서 품앗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듯, 주위 사람들에게 지청구를 주며 완고함을 보이기 위해 게걸음은 지속되었다. 게가 옆으로 기어가다 길이 아닌 곳에 처박힐망정 당신 사전엔 굽힐 줄도 모르고 포기도 없었다. 게는 위험을 감지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싶을 때 빈 소라껍질을 자신의 은신처로 삼거나 뻘 구멍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긴다. 하지만 아버진 그러지 않았다. 게는 몽글몽글 밥을 짓고 있었다. 뻘과 모래밭에 수 천 수만 개의 밥을 지어 놓았다. 연신 앞발 두 개를 얼굴에 비벼대며 거품을 물었다 뱉어 낼 때마다 게밥의 숫자는 늘어났다. 너울성 파도 한 번이면 와르르 쓸려나갈 저 밥들, 아버지가 지어 놓은 밥들은 수시로 파도에 쓸려 나갔다. 하우스 세 동의 배추 농사가 그랬고, 천오백 평 감자 농사가 가격 폭락으로 거센 파도에 휩쓸려 나갔다. 한우 값 폭락으로 반도 못 건진 비용들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의 다리에 족쇄를 채우며 더욱 더 절름거리게 만들었다. 어린 게들의 왕성한 식욕을 위하여 아버지의 게걸음은 오금도 펴지 못한 채 세상의 바다에서 게걸음을 치며 내달려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몸은 옆으로 치우치며 점점 더 빠른 게걸음이 되어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분명 당신은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셨을 게다.게는 열 개의 다리중 하나라도 부러지면 게로서의 능력을 잃는다. 아버지는 교통사고 이후 다리만 와지끈 부러지고 깨진 것이 아니었다. 속도의 바퀴에 다리가 깨진 순간, 당신의 꿈과 희망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아픈 다리와 함께 상실되었음을 철이 들고서야 알았다. 나와 가족들은 "아버지! 다쳐서 아픈 다리는 괜찮으시냐"고 묻지도 못했다. 아니 그 얘길 입 밖으로 꺼내질 못했다. 마치 금기사항이라도 된 것처럼 모두가 함구했다. 여러 번의 수술로 인해 살가죽 속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다리를 어루만져 드리지도 못했다. 한쪽 어깨가 옆으로 치우치며 게걸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긴 시간을 아버진 묵묵히 혼자서 감내해야만 했다.철이 없어 아버지가 지어 놓은 보리 섞인 밥이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 소금기에 절은 짠내가 싫어 아버지의 고단함을 외면한 적이 많았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서야 삶은 짭조름 간을 맞추며 살아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터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감추듯 어떤 상황이나 낯선 변화에 집게발을 번쩍 들어 대항하는 게처럼 단단한 날을 세웠던 아버지였다. 게는 늘 까치발을 들고 짠물 가득한 세상에서 분주히 움직인다. 그가 뻘 구멍을 아지트로 삼고 쉬는 시간 역시도 마른 곳이 아니듯 아버지의 쉼터 역시 그랬다. 게가 생존을 위해 밥을 짓느라 집게발로 연신 얼굴을 비벼대며 게거품을 무는 것처럼 아버지는 삶을 위해 고군분투 했다. 누구나 세상의 바다에서 게걸음을 걷는 형상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세상을 향해 똑바로 걸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비틀거리며 게걸음을 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매사 어긋나버린 꿈을 향해 비틀거리는 모습은 보였어도, 아버지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우리 가족을 지켜내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온전치 못한 다리를 짜디짠 물에 담금질을 하며 게밥을 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게는 집게발로 연신 얼굴을 비벼대며 거품을 물며 몽글몽글 밥을 지어 놓을지언정 흔들리며 걸어 온 발자국은 남기지 않는다.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 놓은 밥을 퍼 먹고 있는 오늘, 여덟 형제가 그 자식을 위해 다시 세상의 파고를 넘나들며 또 다른 밥을 짓고 있는 중이다.

2020-01-01 06:30:00

시조 '비누,마리안느와마가렛'

[2020 매일신춘문예]시조 당선작-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

스치는 손길에도 부끄럼을 타는 비누낯선 뱃길 따라 외따로 건너가서여윈 섬 가슴에 묻고마흔 해를 씻었다 병든 사슴 곁에 사슴이 와서 앉듯파도가 일 적마다 파도를 움켜쥐고비누는 제 몸을 풀어흰 포말을 재웠다 마디 굵은 사투리에 향기는 시들어도맨 처음 온 그대로 닳지도 않은 비누거품은 섬을 안았다옹이진 발 감춘다

2020-01-01 06:30:00

[알립니다] 2020 매일신춘문예 당선작

▶단편소설: 옆사람…고수경(29·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시: 남쪽의 집수리…최란주(53·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시조: 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나동광(63·경기도 과천시 삼부골로)▶동시: 응…강복영(61·충북 제천시 청전동)▶수필: 아버지 게밥 짓는다…김옥자(56·경기도 파주시 야동동)▶동화: 하늘을 달리다…송선금(45·서울시 용산구 녹사평대로)▶희곡·시나리오: 32일의 식탁…정승애(21·서울시 구로구 신도림로) ◇심사위원▷단편소설: 본심=박덕규(소설가), 김인숙(소설가), 예심=이연주(소설가), 권이항(소설가)▷시: 본심=이태수(시인), 송찬호(시인), 예심=사윤수(시인), 여정(시인)▷시조: 박기섭(시조시인) ▷동시: 하청호(아동문학가)▷수필: 김종욱(수필가), 홍억선(수필가) ▷동화: 윤태규(동화작가)▷희곡: 최현묵(극작가), 박근형(연극연출가 )※시상식은 1월 15일(수) 오후 3시 본사 8층 강당에서 열립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2020-01-01 03:30:00

이태수 심사위원

[2020 매일신춘문예] 시 심사평

본심에 오른 작품들 가운데 최종까지 논의된 시는 김지영 씨의 '간기 벤, 교차로', 김은 씨의 '태양을 가동하는 방법', 최란주 씨의 '남쪽의 집수리' 등 세 편이었다.'간기 벤, 교차로'는 남해섬 일대의 땅과 바다에 깃든 삶의 욕망과 열망을 차분한 어조로 그리고 있다. 특히 계단식 논이 많은 다랑이 마을의 풍광에서 삶의 그늘과 쇠락한 시간의 주름을 읽어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다만 일부 언어가 평이하고 관념적인 사변의 진술로 치우쳐 시의 긴장을 떨어뜨리는 아쉬움이 있었다.'태양을 가동하는 방법'은 역동적인 언어와 활달한 상상력이 돋보였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는 검은 폐유를 닮은 그림자들이 흘러나왔다"는 시구 같은, 현대 도시 문명의 음울함을 가리키는 선명한 이미지도 여럿 눈에 띄었다. 같이 응모한 작품들도 안정되고 개성이 두드러졌지만, 시에 힘이 너무 들어가 경직된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지켜보며 다음을 기대해볼 수밖에 없었다.'남쪽의 집수리'는 눈에 번쩍 띄는 시였다. 꽃핀 산수유나무를 매개로, 자연과 계절의 변화과 순환에 따른 삶의 이치를 시로 넌지시 일깨우고 있다. 봄이 오면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게 아니라, 산수유나무도 '집수리'라는 부단한 자기 삶의 갱신으로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전화로 통화하는 내내/꽃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라고 생동감 있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삶의 시차와 간극을 좁힐 수도 없고 매양 어긋나기만 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불화를 체감하면서도, 북상하는 꽃소식에 귀 기울이며 봄이 오는 길목 어디쯤에서 자기 나름의 '남쪽의 집수리'에 골몰하는 인간살이를 적실한 언어로 표현했다. 요란한 시적 장치를 동원하지 않고도 시의 깊이와 무게를 확보한 좋은 예이다.최란주 씨의 다른 작품들의 수준도 고르고 높아 치열한 습작의 모습이 엿보였으며,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아도 신뢰할 만했다. 주저 없는 의견일치로 '남쪽의 집수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심사위원 이태수(시인)·송찬호(시인)

2020-01-01 03:30:00

홍억선 수필 심사위원

[2020 매일신춘문예] 수필 심사평

아쉬운 심사였다. 무슨 연유인지 응모작이 예년에 비해 3분의 1이나 줄어 450여 편에 머물렀다. 60세 이상의 시니어 응모자가 대다수를 이룬 현상이야 굳이 되짚어볼 것까지는 없겠으나 삼사십 대를 비롯한 젊은 작품이 눈에 띄지 않은 지독한 세대 편중이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애써 뽑아 올린 본심 10여 편 중에 응모자격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해 두어 편 배제된 것도 불편했다.결국은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남았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틀을 갖춘 글들이었다. '힘돌'과 아버지 게밥 짓는다', '속긋을 긋다', '꽃의 숨' 등이 그들이다. '속긋'은 시제가 뒤틀려 있지 않은가 살펴보기 바란다. '꽃의 숨'은 함께 묶은 작품이 따라주지 못했다.최종 경합을 이룬 작품은 '힘돌'과 아버지 게밥 짓는다'였다. 이 두 작품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힘돌'은 안정적이었으나 눈에 익숙했다. 함께 제출한 '쳇불'과 더불어 사물수필이다. 힘돌과 쳇불이라는 사물로써 인간의 삶을 의미화하려는 정형화된 교과서적 수필이다. 우리 수필에서 특히 공모전에서 사물수필이 서정수필에 비해 호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속의 시간과 공간의 배치를 새롭게 하고 1인칭 시점에서 주인공을 너무 멀리서 찾지 않았다면 해볼 만했다. 하지만 무난하다는 평가, 거기까지였다.'아버지, 게밥 짓는다'는 신선했다. 제목은 물론 소재의 질료까지 산뜻했다. 묶어서 제출한 '문밖에서'와 '통과합니다' 역시 선명한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다. 혹시 시적 심상이 풍부한 응모자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일게 했다. 하지만 문장이 거칠었다. 은유와 상징어로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부분도 있어 입문자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하게 했다. 그러면서 두 심사자는 오히려 초보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만한 감각이면 스스로 끊임없는 교술과 자득으로 충분히 신춘의 새로운 촉이 되겠다고 뜻을 모았다. 그래서 '아버지, 게밥 짓는다'를 그의 '문밖에서'와 '통과합니다'와 묶어 당선작으로 밀었다.심사위원 : 김종욱(수필가)·홍억선(수필가)

2020-01-01 03:30:00

제21대 국회의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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