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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라라를 지나쳐간 남자들

선이 지나치면 악이 되는 것 같다고 했지요? 자기 옳음이 강한 사람이 부담스런 이유입니다. 자기 방식이 아닌 것은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면서 정의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인간이 용감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그런 사람이 가까운 사람일 때 가까운 사람은 치명적 상처를 입습니다. 닥터 지바고의 라라처럼 말입니다.라라는 지바고의 소울 메이트라 할 수 있지만, 소용돌이 멈추지 않는 돌물목 같은 그녀의 운명은 그녀를 혁명가 스트렐니코프의 부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적 공간도, 둘만의 시간도, 둘만이 나눌 언어도 없는 남자가 남편일 때 삶은 얼마나 각박할까요? 더구나 상대는 라라인데.라라의 남편 스트렐니코프는 정의와 평등과 민중의 빵을 위해 싸우는 대단한 혁명가지만, 라라에게는 없는 남편, 삶을 흔드는 위험한 남편이었습니다.아마 스트렐니코프가 라라 곁에서 오손도선 정붙이며 살아간 시간의 두께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표정하게 비인간적인 정치인으로는 죽지 않았도 되었을 것입니다. 혁명을 하든, 정치를 하든, 사업을 하든 자기 표정이 없는 자의 세상은 자기 세상이랄 수가 없어서 자꾸 세상을 두려운 곳으로, 무서운 곳으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그래서 그보다는 코마로프스키가 낫다는 친구가 있습니다. 코마로프스키가 누구냐구요? 라라를 사랑했으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라라에게 다가가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라라와의 관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개혁의 대상이었을 법한데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수완 좋은 사업가 말입니다. 그는 끝까지 라라의 생존을 책임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글쎄요,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자존감인 라라에게 그것이 통할까요?어쨌든 세상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지 않아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기대도, 실망도 없는 그는 세상이 지옥인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며 자기 힘으로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힌 능구렁이이니 어쩌면 자기 옳음이 강한 사람보다는 현실적일 수 있겠습니다. 그가 라라가 파샤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의 말은 정말 적확했으니까요. "그래, 그는 고매하고 순결한 남자야. 세상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멸시를 받고 있지, 불행을 잉태하는 남자야, 특히 여자에게는."젊은 날 그저 싫기만 했던 코마로프스키의 매력을 발견했다는 친구의 말에 '닥터 지바고'를 다시 보는데, 내 눈에 여전히 그가 역겹네요. 나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얼마나 불행한 지도 모르는 파샤도 싫지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고마는 코마로프스키의 탐욕도 그만큼 싫습니다.젊은 날 나는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경험하면서도 엄살떨지 않고 꼿꼿하게 인간의 길을 가는 아름다운 라라를 사랑했는데, 이제는 남자들이 보이네요. 역시 '의사 지바고'의 매력은 지바고에 있습니다.지바고에게는 엄마가 없지요? "진흙은 검게 변하고 그릇은 깨어졌도다." 엄마를 차가운 흙속에 묻는 날 사제가 읊는 노래를 소년 지바고는 어떻게 들었을까요? 그 엄숙하고도 슬픈 자리, 무서운 노래가 그에게는 묘하게도 생에 대한 감수성이 된 것 같습니다.지바고에겐 채워지지 않은 공허가 있습니다. 거기에 그리움이 깃들고 그리운 것들이 시가 된 거지요. 그는 엄마가 남긴 발랄라이카의 선율을 듣고, 현미경 위에서 노는 세균들의 춤을 봅니다. 모독당한 사랑에게 총을 겨누는 여자의 행위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혁명의 와중에서 피 흘리는 사람들을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싸매줍니다. 의사로 살든, 혁명의 시대를 살든 그는 시인입니다. 수완 좋은 사업가의 눈에 그는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고, 혁명가의 눈에는 민중적인 삶을 외면하는 부르주아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거지요? 그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소문과 상식의 세상을 살지 않고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습니다.당연히 그는 생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답을 갖고 있다면 마냥 좋을 수만은 없는 라라와의 사랑을 따라가겠습니까, 라라의 영상을 따라가다 쓰러져 죽겠습니까?"우리 모두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심연에서 유래합니다." 헤세가 '데미안' 서문에서 한 말인데 바로 지바고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지바고에게는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은 헤세가 말한 대로 바로 '어머니'에게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운명을 살고 잇는 것은 아닙니다. 헤세가 지적했듯이 제각기의 심연에서 건져내는 운명은 고유합니다. 시인은 바로 그 고유한 운명을 따라가는 자인 거지요?

2018-10-15 13:40:58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사람은 무엇으로 진실에 이를까

그대, 삶을 사랑하세요? 그게 무슨 질문이냐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고 싶으세요?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통해 말했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세상의 고통 속에서, 죄 없이 받는 고통 속에서 삶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지만 또한 가장 큰 기쁨이라고.삶에 대한 사랑의 고백은 혹독한 삶의 바람을 어쩌지 못해본 경험이 있는 자의 고백일 때 힘이 있습니다. 삶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경멸해본 적이 있는 자가 어느 날 그 바람이야말로 삶이 자기에게 낸 미묘한 수수께끼였음을 고백하게 될 때 니체가 사랑한 여인 살로메의, "생에 바치는 찬가"가 그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신비에 가득 찬 생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벗이 그의 친구를 사랑하듯이, 몇 천 년을 사색하고 생을 누리기 위해 그 두 팔로 힘껏 안아주십시오. 이제 더 주실 행복이 없다면 당신의 고뇌를 주십시오.'전쟁과 평화'의 배경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입니다. 작품에서 전쟁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삶이 '나'에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는 전쟁이 배경인 것이 의미 있습니다. 삶이 전쟁이니까요.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를 전장에 끼어들게 만드는 것은 역사적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명분도, 교과서에 기록된 대단한 가치도 아닙니다.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몸에 밴 안드레이가 폭력을 싫어하고 전쟁을 싫어하는 친구 피에르에게 전쟁터로 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눈에 뜁니다. "내가 왜 전쟁터로 나가는지 아나? 나폴레옹이 괴물이라서? 아니면, 러시아가 강대국이 될 거라 믿어서? 아니네. 내가 떠나는 건 모스크바 최고의 미녀와 사는 게 참을 수 없어서야."안드레이의 말이 힘이 있지요? 정략결혼에, 파티가 일상인 귀족 청년이 자기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그림자를 만지려 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함부로 살아도 되는 것이 마치 특권인 양 술과 여자와 노름과 파티 속에서 젊음을 낭비하며 오로지 그런 삶을 누릴 힘을 가지기 위해서만 애를 쓰는 그런 귀족이 아닙니다. 그에겐 가치를 아는 든든한 아버지가 있고, 사랑스런 누이가 있고, 믿음을 나눌 친구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림자는 어쩔 수 없지요?도피하듯 그렇게 전쟁터로 떠나지만 전장에서 안드레이는 누구보다도 괜찮은 리더입니다. 그는 그가 전쟁터로 떠난다고 하자 이렇게 조언하는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자, 이제 작별이구나, 한 가지를 기억해라. 안드레이 공작, 네가 죽는다면 나는, 이 늙은이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니콜라이 볼콘스키의 아들로서 제대로 처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수치스러울 것이다."수 백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작이지만 '전쟁과 평화'를 이끄는 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서자 출신으로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기까지 어두운 시절을 보냈던 피에르,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정의와 선까지 겸비한 귀족 안드레이, 그리고 이들이 사랑하는 밝고 순수한 여인 나타샤입니다.순수한 사람은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도,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지요? 순수한 사람은 물불 가리지 않는 열정에 상처입고 실수를 했더라도 그 경험을 소화하며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약혼자 안들에가 전쟁터에 나가있는 1년, 아름다운 나타샤에게 예상치 못했던 강렬한 유혹자가 생깁니다. 그 황홀하고 달콤한 유혹에 빠진 나타샤는 평판을 잃고 안드레이를 잃습니다. 그녀의 배신에 마음이 타고 증오의 잿더미만 남은, 다 닺춘 선한 남자가 어찌 그녀에게로 돌아오겠습니까? 안드레이의 선은 배신한 나타샤를 악으로 규정하며 그 무엇으로도 녹아내리지 않는 성벽이 되어 그를 고립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알았겠습니까?삶이 전쟁이라고 할 때 그 전쟁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전이기도 한 거지요? 삶은 전쟁이고 혹 우리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어렵고 위험한 전쟁을 수행하는 전장의 리더인 것은 아닐까요? 톨스토이가 쓰고 있습니다."모든 전투는 지휘관의 예상대로 수행되지 않는다. 이것이 본질적인 조건이다."라고. 삶은 마음대로,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서 매듭이 생기고, 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매듭이 풀립니다. 그렇게 맺혔던 안드레이의 매듭이 언제 풀리는 아십니까?언제나 구원은 엉뚱한 곳,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찾아오는 법입니다. 안드레이가 부상자가 되어 의식불명으로 돌아왔을 때 나타샤가 그를 극진히 간호합니다. 안드레이의 구원은 그의 부상에서,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목에서 찾아왔습니다. 병이 찾아드니 의식의 끈이 약해지고 의식의 파수꾼이 힘이 빠진 사이 진실이 드러나는 거지요? 겨우 의식이 돌아온 안드레이가 나타샤에게 하는 말은 진심입니다."이제 당신은 그날 밤새 춤추던 그 소녀가 아니야. 달님에게 속삭이던 소녀도 아니고. 당신은 뭔가 달라졌고 더 멋져졌어. 얼마나 평화롭고 고귀한지, 나는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해. 이제야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다니 슬픈 일이지. 나는 지금까지 사랑을 몰랐어. 그저 나는 증오심이 많은 사람이었어. 많은 것을 증오했고, 당신도 증오했었어. 이제는 정말 당신을 사랑해."안드레이는 바른 생활의 남자입니다. 선이 지나치면 악이 되듯이 바른 생활의 사람이 지나치면 사람을 지치게 하는 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지치게 하기 때문이지요? 주변에 온통 맘에 들지 않아 비판받아야 할 사람뿐이니 어찌 증오를 담지 않을 수 있고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지쳐 진실에 가 닿지 못할 때 그를 사랑한 운명은 어떤 충격을 주며 바른 사람을 진실한 사람으로 인도하나 봅니다.안드레이가 윤리와 관습이라는 잿더미 속에 묻혀있는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 진실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를 찾아온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이, 병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가 진실해질 수 있었을까요? 그를 찾아온 죽음이 진실을 밝히는 등불이었던 거지요. 보왕삼매론의 첫 구절이 생각나지요?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이르시기를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2018-10-07 16:40:59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쑥과 마늘의 시간, 고통의 연금술

우리는 하늘에서 왔습니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신시神市를 세운, 하늘의 아들 환웅이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곰이었다지요?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이 되고 싶어 했던 곰과 호랑이가 같은 굴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곰을 토템으로 했던 부족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했던 부족일 거라고 추측합니다. 새로운 강성부족이 짠, 하고 나타나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과 혼맹을 맺어 강인한 부족국가가 되면서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을 밀어낸 이야기일 거라고.그 역사적 상상력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 제 관심은 '신화'입니다. 그러니 관점이 바뀌네요. 제가 관심을 두는 건 쑥과 마늘, 그리고 동굴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인간이 되고자 신웅神雄에게 빌었던 그들에게 하늘이 준 것은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였습니다.재미있지 않나요?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그들에게 하늘이 일차적으로 준 것은 그들이 원했던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삼키기 어려운 쑥과 마늘, 그리고 견디기 어려운 동굴의 시간 100일,이었습니다.살다보면 인내해야 할 일이 많지요? 쑥과 마늘처럼 목으로 넘기기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쑥과 마늘을 피해갈 수 있는 인생이 있을까요? 나는 지금도 종종 고통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죄의 결과거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증거라고 믿었을 때는 고통을 그 자체로 대면하지 못하고 고통에 쉽게 동요하거나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왜 이리 어려우냐고, 죄지은 것도 없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왜 '나'냐고? 생각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오만이었습니다. 고통이 왜 '나'만을 피해가야 할까요?이제 나는 겨우 고통이 나만을 피해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통의 바람이 불 때 불안과 두려움에 휘둘려 오두방정 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두렵지 않은 것도, 불안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나는 그저 내 앞에 던져진 고통의 쑥과 마늘을, 잘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곰처럼 침착하게, 미련할 정도로 침착하게 인내하면서 쑥과 마늘을 삶의 양식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될 때 불운에 기죽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곰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명상록을 쓴 로마황제 아우렐리우스도 곰이었던 것 같지요? 그가 대표하는 스토아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를 가진 영혼이고, 우리 안에는 신적인 불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안의 신적인 불꽃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은 신적인 상황이라기보다 지옥의 상황입니다. 명상록을 쓸 때 아우렐리우스가 직면한 상황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여기저기 국경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돌아 노예가 죽고, 시민이 죽고, 군사들이 죽어갔습니다. 간교한 혀들의 아첨의 말은 춤을 추고 매일매일 자연재해가 일어납니다. 황제라고는 하지만 참, 정신 없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해 불행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인가이 불행에 빠지는 것은 내 마음 속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말이지요? 고통 속에서 경험한 자기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의미있는 것은 그가 전쟁터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며 자기자신에게 주고 있는 철학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말 인내할 것 많고 절재할 것 많은 고뇌많은 황제였습니다.누구에게나 채워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람 되기를 원했던 곰과 호랑이에게 하늘은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지요?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쑥과 마늘을 먹어야 하는 100일은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채워야 하는 시간이지요? 21일이든, 100일든 채워야 하는 날의 수라는 점에서는 같은 의미일 겁니다.이시는 대로 호랑이는 그 동굴의 시간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이 녹녹하지 않은 거지요? 견디기 힘든 그 시간은 지식을 쌓는 시간도 아니고, 기백을 증명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힘을 과시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그 시간은 어둠의 시간이고, 인내의 시간입니다. '나'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시간, 그 시간이 없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호랑이처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지만 그러면 고통의 연금술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될 수 없는 거지요? 살아왔던 대로 그대로, 성급한 채로 그렇게 고통의 휘둘리며 고통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대면하지 못하는 고통이 이래저래 모습만 바꾸며 운명이 되어 찾아오는 이유가 아닐까요? 평생 엄마를 미워하며 엄마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아들이 아내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고통은 한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적인 고통은, 그것이 가장 좋은 친구였음을 진정으로 고백하게 되기까지 반복, 반복됩니다.부부도, 연인도, 친구도 도와줄 수 없는 시간, 오롯이 나만을 찾아든 고통 앞에 홀로 서서 어둠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옵니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시간이. 그 때 왜 내 식탁은 쑥과 마늘뿐이냐며 저항하고 항변하기보다 내 쑥과 마늘을 잘 받아서 21일을, 혹은 100일을 채우고 싶습니다.쑥과 마늘로 연명하며 어둠 속에서 평정을 찾아야 하는 동굴의 시간을 모르는 삶은 상식을 넘어서지 않고, 편견과 고정관념의 옷을 벗지 못합니다. 상식과 편견과 고정관념, 그런 외피 속에 꼭꼭 감춰져 있는 '나'의 이야기, '나'만의 존재이유는 쑥과 마늘의 시간을 견디며 드러납니다.인내해야 하고 기다려야 하는 고통 없이 삶이 단단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 시간을 견딘 곰만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단군왕검을 낳았듯이 말입니다.수원대 교수

2018-10-02 14:28:39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다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고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봤습니다. 어머, 저게 저런 영화였어! 마치 새로운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영화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진 거지요? 청춘이 지나간 겁니다. 열정을 사랑했지만 열정에 시달리기도 했던 청춘이. 오랫동안 젊었던 우리는 종종 청춘이 지나갔음을 잊습니다. 지나간 청춘이 허무할 때도 있고, 그리울 때도 있고, 다행일 때도 있습니다. 청춘을 지나오면서 잃어버린 것도 많지만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그것이 영원히 쥘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려주는 스승 같기도 합니다.나이 들어 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젊은 날 홀린 듯 몰입했던 스카렛 오하라가 그리 끌리지 않네요. 물론 그녀는 분명히 매력적입니다. 아버지가 사랑했던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목숨 걸고 타라를 지켜가는 그녀에게는 생존이 법입니다. 그 아버지는 전쟁 중에 미쳤고, 세금 낼 돈은 없고, 그들의 삶의 터전인 붉은 땅 타라는 끈덕지게 넘보는 이들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의 생존력은 타라를 지킨 독보적인 힘입니다. 오히려 여신급인 그녀의 미모가 그녀 인생을 평가 절하하는 걸림돌이었겠다 싶기도 합니다.그런데 생존이 법인 사람들은 극성맞지요? 언제 어디서나 극성맞게 존재증명을 하고 있는 그녀의 강한 성격이 이제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나니 여신급 미녀 비비안 리가 분했던 스카렛 오하라보다 덕스럽게 생긴 멜라니가 훨씬 아름답게 느껴지네요.궁금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왜 모든 남자가 빠지는 스카렛이 자기 좋다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그녀가 아니라 멜라니와 결혼을 하겠다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남자, 에슐리만 좋다고 하는 걸까, 하는 것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딸을 잘 아는 아버지가 에슐리의 결혼을 방해하려는 스카렛에게, 심술부리지 말라고, 너는 그와 행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잘 봤습니다. 도덕과 관습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모범생인 에슐리는 절대로 자기중심적인 스칼렛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그런데 왜 스카렛은 모난 곳 없는 멜라니를 선택해서 잘 살고 남부 신사 에슐리에게 그리도 집착하는 걸까요? 왜 에슐리 주변에서 얼쩡대다가 진정 사랑해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감정을 낭비하며, 삶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젊은 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되네요.그런 유형이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만을 좋아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 나르시스트! 자기 아닌 누군가에서 눈을 주고 마음을 주는 꼴을 보지 못하는! 바로 아프로디테 원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늘 거울을 가지고 다닙니다. 혹 벨라스케스가 그린 '거울을 보는 아프로디테'라는 그림을 아십니까? 그림 속 아프로디테는 에로스가 들고 있는 거울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거울은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는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원초적 욕망을 상징하는 아프로디테를 잘 표현하고 있는 그림입니다.아프로디테의 원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를 보고 감탄하고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성에 익숙하고 또 그런 상황을 즐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런 사람일수록 쉽게 자기에게 넘어오는 이성에겐 흥미가 없으니. 그들의 흥미는 자기에게 넘어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 이유로 그 사람에게 묶여있는 그들은 그래서 진정 사랑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해 생이 꼬이기 쉽습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감싸 안으려는 버트를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삶을 꾸리고 있는 에슐리에 집착하는 스카렛처럼!멜라니가 죽자 멜라니 없이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고 눈물 흘리는 에슐리를 보고 각성하며 스카렛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멜라니가 죽고 나서야 (에술리에게) 내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다니, 나는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사랑했구나."미국의 남북 전쟁이 배경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카렛 오하라만큼이나 비중 있는 인물이 바로 그 멜라니입니다. 젊은 날 쟤는 왜 저리 착해빠졌나, 했던 멜라니가 눈이 가고 마음이 갑니다. 멜라니의 발견에 나도 놀랐습니다.전장으로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그녀의 공간은 늘 상처 입은 자들로 가득합니다. 전장에서 다친 사람은 싸매주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쉼터가 되어주는 그녀를 보고 스카렛이 쏘아붙입니다. 자기는 먹고살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는데, 그렇게 굶주린 허수아비들에게 동냥이나 하니 그들이 메뚜기처럼 모여 들잖냐고. 멜라니는 싫은 내색 없이 온화하게 이렇게 이야기하며 스카렛의 이해를 구합니다. 어느 북부 여인이 포로가 된 에슐리를 대접할 수 있고, 그 힘으로 그가 돌아올 수도 있는 거 아니겠냐고. 그녀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에슐리 보였던 거지요? 사랑은 그렇게 행위입니다.멜라니에게는 사랑이 모든 고정관념을, 편견을 녹이고 있습니다. 에슐리가 모든 이들이 손가락질하는 유곽 여인의 도움을 받아 체포되지 않을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진심으로 그 여인에게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여인들의 왕따와 경계에 익숙해있는 여인이 멜라니를 위해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 하지 마세요, 이해할 테니."라고 말하자 멜라니는 여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을 구해준 분에게 감사의 표현도 못하나요? 당신에게 신세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또 만나요."그녀가 있는 곳엔 늘 평화가 있습니다. 그녀가 있는 곳이 천국인 거지요? 그런데 그 천국은? 파울로 코엘료가 말했습니다. "나는 신께서는 그의 지혜로움으로 천국의 한 가운데에 지옥을 숨겨두셨음을 믿어, 우리가 언제나 깨어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우리가 자비의 기쁨 속에 사는 동안에도 혹독함을 잊지 않도록 하시려고."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에서남편은 전장에 나가 있고,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무시하고 싫어하고 질투하면서도 그녀를 떠나지 않는 스카렛 오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몸이 약해 늘 아픕니다. 그녀를 보면 그녀의 천국이 그녀의 지옥에서 꽃이 피고 있음을 느낍니다. 마침내 죽어가는 그녀가 스카렛 오하라에게 했던 유언은 그녀 천국에 절정입니다. "그(에슐리)를 위해 나를 돌봐주었듯이 나를 위해 그를 돌봐줘요.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그녀를 보면 '신심명'의 그 유명한 명제가 떠오릅니다.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一卽) 단능여시(但能如是) 하려불필 (何廬不畢)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이니 다만 이와 같다면 어찌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하나를 보면 전체가 보이지요? 하나 속에는 전체가 있습니다. 언제나 그녀가 사랑으로 내미는 작은 손길은 전체를 소통하는 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기적인 스카렛을 경계하지만 그녀가 편견을 넘어서 스카렛을 감싸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큰 사랑입니다. 집착이 아닌 사랑만이, 사랑이 있는 영혼만이 편견과 질책과 판단을 넘어서 일즉일체라는 세상의 비밀에 다가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수원대 교수

2018-09-26 13:33:20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치매와 함께 한 나날들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 했지요?천년을 훌쩍 넘기고도 여전히 매혹적인 석굴암의 부처님과 그 부처님이 만들어내는 신비하고도 아늑한 공간을 느끼고 나면 신라인이 어머니를, 아버지를 어떻게 느끼고 공양했는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머니는, 아버지는 삶의 중심이고 신성입니다.사실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서 유전자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그들에게서 삶의 태도와 습관, 그리고 정서까지도 물려받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혹은 누구를 닮았다는 얘기를 듣습니까?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 좋으신가요, 싫으신가요? 만약 양친 부모 중 누군가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부담스럽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소화하지 못하는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거기서 얽힌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는 걸 은밀히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를 둔 친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제 한 일은 커녕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도 잊어버린 엄마 때문에 굉장히 놀랐답니다. 그렇게 똘똘했던 엄마에게서, 어려울 때 전적으로 아이를 키워주시고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맞이해주던 엄마에게서, 늘 그렇게 계실 줄 알았던 엄마에게서 표정이 없어진 것을 보는 일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속이 끓고 우울한 날이 많아졌습니다.주중에는 회사에 나가 정신없이 일하고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주말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일을 반복한 친구에게 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톨게이트를 나오는데 차 안에 있어야 할 티켓이 없어진 것입니다. 요금 징수원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데 순간,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잠시 당황했겠지요. 그것은 매 순간 기억을 놓치고 있는 엄마의 현재와 겹쳐져 더 당황스런 일이 됐습니다. 엄마의 치매가 자기의 미래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을 테니까요.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정신 놓고 왔다는 친구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건 것입니다."걱정에 걱정을 보태 사태를 키울 필요 없어, 그건 피곤해서 순간, 번 아웃 된 거야. 그런 사건이 생긴 건 이제 엄마 걱정 놓고, 너를 돌보며 살라는 신의 계시 아닐까. 그 계시를 읽지 못하면 몸이 진짜 반란을 일으킨다!"친구는 그 사건 이후 엄마의 치매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짊어지기 힘든 인생의 무게라 생각했을 때는 어떻게든 엄마를 바꿔보려고 엄마에게 순간순간 단호하게 굴었는데 그 후 그 다급함은 사라지고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온화해진 것입니다.매일 엄마와 통화하는 친구는 엄마를 모시고 사는 오빠를 통해 이미 엄마의 아침식사 내용을 듣고도 엄마에게 다시 묻는답니다. "엄마, 아침에 뭐 먹었어?" "안 먹었어!" "배고프겠다. 뭐가 먹고 싶어?" "시원하게 국수를 말아먹고 싶은데 모두들 나를 굶겨."이제 그것이 확인을 해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 시간을 즐기면 되는 놀이라는 것을 인지한 친구는 대응이 유연해졌답니다. "그래? 엄마. 그러면 주말에 나랑 맛있는 국수집 가서 국수 먹자."그렇게 말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국수가 먹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치매에 대해 겪어서는 안 되는 두려운 불운의 사건이 아니라 겪을 수도 있는 삶의 일이라 여기니 엄마의 치매가 부끄럽지 않게 됐습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어릴 적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 손 잡고 식당에도 가고 목욕탕에도 갔답니다. 그 친구는 그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3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꼭 있어야 할 인생의 '최소한'이 화두인 소설, 전경린의 '최소한의 사랑'에는 치매 걸린 새엄마가 나옵니다. 예의 바르게, 그러나 심술궂게 치매환자를 다루는 요양원 원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합니다. "환자가 하는 부탁, 마음 쓰지 마세요. 본인도 곧 잊어버리니까요."그러나 주인공은 새엄마가 "부탁이 있다"며 한 어떤 당부에서 새엄마의, 지키고 싶었으나 지키지 못한 소중한 '최소한'을 보며 꼭, 들어주고자 합니다. 치매 환자라고 무시하면 안 되는 거지요? 어쩌면 모른다고 단정하는 것이 우리의 무지, 우리의 폭력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존재이유는 그 무지, 그 폭력을 거두어지며 드러나는 것인지도.혹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날들'이라는 책 보셨습니까?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이탈리아 사진작가 필립 툴레다노는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한 존재였음에 절실해지는 존재들 중에, 어머니, 아버지가 있지요?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야 깨달았다. 내가 어머니 생전에 당신의 영향을 부정하고 반항하며 보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어머니를 잃어버리고 나서 그의 소원은 혼자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것이 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한 삶은 의무가 아니라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단기 기억상실증인 아버지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잊고 자꾸 아내의 행방을 묻습니다. 처음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엄마 돌아가셨잖아요."를 힘주어 강조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출 줄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파리에 갔어요. 거기 병상에 계시는 외삼촌을 돌보고 있어요"그러면서 깊이 느끼게 됐습니다. 진실은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사실이 표면적이라면 진실은 심층적입니다. 눈높이를 맞추는 일 없이 사실은 진실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진실에 도달하고 나서야 사실에 온기가 생깁니다.아버지에게는 늘 파리에 계신 어머니지만 그렇다면 아버지가 끝까지 모른 것일까요? 툴레다노가 쓰고 있습니다. "그럴 때가 있다. 아버지가 대화 도중 갑자기 말씀을 멈추고는 한숨을 푹 쉬며 눈을 감으시는 것이다. 그렇구나. 아버지는 아시는구나. 엄마에 대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더는 어떻게 할 수 없어 차라리 잊어버리게 된 것이 있지 않나요? 차라리 잊어버렸던 그것이 어느 날 어느 한 순간에 찾아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리움의 그림을 그린 경험, 없으신지요? 그때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말이 없이도 소통되는 그 그림 속에 들어앉아 있는 '나'에 대해 감사할 밖에요. 그 감사야 말로 생에 대한 감사, 진실한 감사입니다.수원대 교수

2018-09-17 13:04:58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라푼젤, 엄마의 초상

살생 많이 하고, 하인들 학대 많이 한 이기적인 청제부인은 여러 지옥을 거칩니다. 그것이 어찌 나쁜 일 한 자는 지옥에 간다는 윽박이겠습니까? 그보다는 자기 업을 정화하는 시간, 그 시간의 길이일 겁니다. 아비지옥을 거쳐 겨우 흑암지옥으로 올라온 그녀는 그제서야 아들 목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 지옥구제에 나선 목련은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밥 한 덩이를 올립니다. 그런데 그녀는 아들 목련이 건네주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한 손으로 다른 이들이 먹을까 경계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밥을 받는데 그 밥도 그녀가 내뿜는 불기 때문에 바로 새까맣게 타버리니까요. 그 그림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우리 사는 모습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사랑이 나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 잘 할까, 집착하고 경계해서 그 사랑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경험, 없으셨나요? 가족 이기주의에 갇혀 내 자식만 주겠다고 모아놨다가 자기도 쓰지 못하고 자식들 유산 싸움만 하게 만드는 그림을 주변에서 종종 보고 있지 않으신지요? 부모로 인해, 자식으로 인해 삶이 지옥이 되는 경우, 많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기대와 애착이 미움이 되고 애증이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경우, 종종 있지요? 부모에 지친 자식들이 적지 않고, 자식 때문에 후드득 후드득 눈물을 흘려야 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목련존자도 아닌데 그 지옥을 어찌 건너갈까요? 너무나 넓고 깊어서 도무지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지옥들을. 애니메이션 '라푼젤' 보셨습니까? 원작인 그림형제의 동화하고는 분위기도, 주제도 달라졌지만 원작만큼이나 좋은 애니메이션 '라푼젤'은 과보호시대에 딸에게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나는 그 유명한 이야기를 집착으로 지옥을 만드는 엄마의 초상으로 읽습니다. 극성스러운 엄마들이 있지 않나요?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며 모든 것을 다해주면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식을 만드는 엄마들 말입니다. '라푼젤'의 고델이 그렇습니다. 그녀는 라푼젤을 문도 없고, 계단도 없는 탑에 가둬 놓고 그녀 자신은 길고도 기름진 라푼젤의 황금빛 머리카락에 의지해 바깥세상으로 나다닙니다. 아시지요? 동화에서부터 유명한 문장, "라푼젤, 라푼젤! 네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렴!" 라푼젤의 특징은 머리카락이지요? 윤기 나고 풍성한 황금빛 긴 머리카락입니다. 그것은 빛나는 여성성의 상징이겠습니다. 화폭을 가득 채우는 황금빛의 연인이 인상적인 클림트의 '키스'를 기억해보십시오. 세상도 없고 나도 없는 경지, 전 인생을 관통하는 한순간의 황홀이 있음을 그 그림만큼 관능적으로 보여주는 그림도 드뭅니다. 거기 교감의 황홀을 표현해낸 황금빛, 그것은 바로 황금빛의 풍성한 긴 머리를 연상시키는 거지요? 라푼젤은 바로 그 황금빛 머리카락의 주인공입니다. 그 머리카락을 밧줄 삼아 탑을 오르락내리락 했던 고델은 분명히 라푼젤의 젊음을 질투하고 학대하는 엄마입니다. 그녀는 자식에 기대 세상을 살고 자식의 젊음을 착취해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자식 없이는 빈껍데기뿐인 성숙하지 못한 엄마의 초상이겠습니다. 고델은 가짜 엄마이고 실체는 마녀가 아니냐고요? 글쎄요, 엄마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자니 차마 '엄마'라 할 수 없어 마녀로 등장시킨 것은 아닐까요? 꿈까지 대신 꿔주며 꿈까지 통제하려 하는 엄마로 인해 버겁고 숨이 막히는 자식들이 엄마를 마녀로 인지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동화에서는 그 머리카락으로 인해 왕자가 탑으로 들어오지요? 감출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의 폭발하는 열정을 엄마의 탑 속에 가둘 수 없는 겁니다. 왕자와의 비밀스런 사랑을 나눈 라푼젤이 엄마보다 그이가 훨씬 가볍다고 해서 마녀를 노하게 한 것으로 보아 머리카락이 감싸안고 싶었던 것은 엄마가 아니라 남자였던 거지요. 그림동화는 우리가 이해하는 동화를 넘어서 있습니다. 원래 독일에서 전래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를 재구성한 거라고 하지요? 그래서 그런지 원작은 동화라는 말이 무색하게 잔인하고 관능적입니다. 동화 속 마녀는 임신을 한 라푼젤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싹둑싹둑 잘라버리고 황야로 내쫓습니다. 거기서 라푼젤은 쌍둥이 남매를 낳고 외롭고 고단하게 살아갑니다. 고독한 황야는 바로 다시 태어나 고유한 길을 가야하는 존재의 탄생지입니다. 눈을 잃은 왕자를 다시 만날 때까지 라푼젤은 긴긴 광야의 시간을 버티며 견디며 성장해야 했습니다. 라푼젤은 양상추란 뜻입니다. 원래 라푼젤은 요정의 정원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상추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아마 독일에서 상추는 거침없는 생명력의 상징이었나 봅니다. 그런 생명력의 라푼젤이니 평생 엄마의 탑 속에 갇혀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화에서 마녀는 라푼젤을 쫓아내는 악역일 뿐 어찌 보면 라푼젤의 성장을 도와주는 엄마입니다. 외롭게 살더라도, 고단하게 살더라도 엄마를 떠나야 자기 삶을 꾸리니까요. 엄마의 사랑은 자식을 독립하게 합니다. 그러나 엄마의 집착은 독립하려는 자식을 자꾸자꾸 끌어들입니다. 애니메이션 '라푼젤'은 그엄마의 집착을 강조했습니다. 고델이 탑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라푼젤을 기죽이며 반복적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지요? 세상은 위험해, 순진한 너는 어림도 없어, 엄마가 널 지켜줄게, 하는 대목 말입니다. "나를 믿어라, 아가야, 엄마는 다 알아, 네가 둥지를 떠나겠다고 하다니,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엄마는 다 알아. 세상은 너무나 무서운 곳이야, 도둑과 강도 들짐승과 독벌레, 험상궂은 사내들까지, 엄마 곁을 떠나지 말거라, 엄마는 다 알아. 엄마 말을 들어라, 너 혼자는 어림도 없어." 초등학교 때부터 시간관리 해주고, 공부 관리해주고, 몸 관리 해주는 엄마, 그 엄마 덕택에 대학에 들어간 자식들이 많습니다. 오죽하면 엄마 실력 없으면 명문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얘기를 할까요. 대학에 들어간 자식을 위해 시간표까지 짜주는 엄마도 봤습니다. 그 엄마 없이는 매사가 서툴고 두려워 매사를 엄마에 기대는 자식은 '자기'가 없습니다. 당연하지 않나요? 자기의 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자기가 생기겠습니까? 그저 엄마가 원하는 인간, 혹은 엄마 기대에 미치지 못해 자기 비하에 익숙한 못난 어른이 되는 거지요. 몸은 컸어도 마음속엔 내면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엄마 없는 세상을 두려워하는 한 세상은 위험한 곳입니다. 한때는 나의 탯줄이었고 조금 더 성장해서는 나의 울타리였던 엄마, 그 엄마가 갑갑하거나 답답한 탑으로 느껴지면 이제 자기만의 집을 지을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식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잔소리하고 질책하는 엄마의 집착과 두려움에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탑 속의 라푼젤입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 속의 열정을 믿고 탑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해야 하는! 안전 속에 안주하면 안전하지도 못합니다. 이제는 안전이 아니라 자기의 길입니다. 수원대 교수

2018-09-10 13:56:14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폭풍의 언덕 위에서

제대로 발현된 열정은 우리의 살맛이지만 제대로 숨 쉬지 못하는 열정은 우리를 시들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초원의 빛'이 빛났던 시간의 그림자와 대면하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면 '폭풍의 언덕'은 빛났던 시간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병든 영혼의 춤을 그린 작품입니다. 생각해보니 폭풍의 언덕 위 언쇼가에는 여주인이 살지 않았네요. 아버지가 불쌍한 고아를 집으로 데려와 키울 만큼 따뜻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집에 어머니가 없고 아내가 없다는 것은 중요한 상징이지요? 바로 여성성의 부재입니다. 왜 언쇼가의 아들 힌들리가 히드클리프를 향한 질투와 증오를 소화해내지 못하고 언덕위의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는지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바로 그를 감싸 안아주는 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성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습니다. 그 허기에 시달리는 영혼이 추게 되는 비극의 춤이 바로 '폭풍의 언덕'의 주제 아닐까요?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은 역시 히드클리프입니다. 부모 없이 떠도는 아이였던 그는 언쇼의 배려로 어느 날부터 바람 부는 언덕에서 살게 되고, 언쇼의 딸 캐시를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들은 말을 타거나 뛰거나 함께 언덕을 누비고, 함께 놀고, 함께 상상하면서 사랑이라 이름붙일 필요도 없는 사랑을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심심할 때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들이 가서 노는 큰 바위 언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들은 평범한 소녀이고 평범하지도 못한 소년이지만 거기서 그들은 왕자고 공주입니다. 캐시가 말합니다. "너는 네가 얼마나 멋있는지 모르지? 너의 아버지는 중국의 황제, 너의 어머니는 인도의 여왕, 넌 나쁜 뱃사람에게 납치되어 영국으로 흘러들어온 왕자야, 저기 너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성이 있어!" 멋쩍은 히드클리프가 저건 그냥 바위라고 대답하자 소녀가 진지하게 대꾸합니다. "만약 저 곳이 바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넌 절대로 왕자가 될 수 없어!" 참 캐시, 당차고 현명한 소녀지요? 규율이 되는 도덕도, 매너도, 관심어린 시선도, 체계적인 교육도 받아본 적 없는 히드클리프와 함께 거친 자연을 누비는 캐시는 자연에서 배우는 히드클리프에게 은유를 가르쳐준 멋진 문학선생님입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의 세상이 된 이들은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소중한 영역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따라다니는 집안이나 직업이나 부나 명예에 의해 자아팽창이 이루어지거나 반대로 기죽어 있습니다. 그런 껍데기 자아는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밖에 없다면 상식과 편견이 사는 거지 자기가 사는 거라고 할 수 없는 거지요? 껍데기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소중한 영역이 있고, 거기서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소중한 꿈을 꾸는 사람만이 상식을 넘어 자기 삶을 살 수 있으니까요. 바람 부는 언덕 위의 집에서 외로웠던 히드클리프는 자유로운 캐시와 함께 좋았지만 히드클리프가 좋아진 만큼 모질어진 소년이 있습니다. 바로 캐더린의 오빠 힌들리입니다. 내 젊은 날 그는 연민조차 생기지 않는 지질남이었는데 이젠 잘 이해가 되네요. 엄마 없이 자란 그가 이번에는 굴러들어온 돌에게 하나밖에 없는 누이를 빼앗겼으니 생각이 깊어질 새가 없었던 어린아이가 얼마나 상처 입었겠습니까. 병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힌들리는 가장이 됩니다. 가장이 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히드클리프를 가족이 아닌 하인으로 격하시킨 일이었습니다. 히드클리프를 향한 질투와 증오를 힘으로 표출한 거지요. 히드클리프는 힌들리에게 모욕당하며 허들레일이나 하는 하인이 됐습니다. 그 나이에 받아야 할 교육도, 익혀야 할 매너도 배우지 못한 채 집에서 마구 기르는 짐승취급을 받으면서도 그가 그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캐시 때문입니다. 히드클리프에게 캐시는 단순한 연인이 아닙니다. 그에게 캐시는 살아온 이유고 살아갈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그 누구로부터도 존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외로운 그에게 늘 곁을 지키며 좋은 친구가 되어준 명랑한 캐더린이 가을 햇살처럼 스미고 가을바람처럼 감기게 된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마음 담을 노력 없이 마음이 담기고 의지를 낼 필요도 없이 지향성이 생기는 거침없는 사랑이 된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소녀시절을 몽땅 함께 보내며 둘만의 세계를 일구어온 캐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의 이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만일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가 살아있다면 나는 살아갈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사라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질 거야." 그런데 그 캐시가 전부를 걸고 전부를 요구했던 가난한 히드클리프의 사랑을 외면하고 너그럽고 부유한 신사 린튼과 데이트를 시작한 겁니다. 히드클리프의 관점에서는 배신이지요? 히드클리프는 에드거의 조건에 혹해 자기를 부담스러워 한 캐시의 배신에 이를 악 물고 떠납니다. 히드클리프가 사라진 시간, 캐시는 에드거와 결혼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캐시는 시름시름 죽어갑니다. 결국 히드클리프는 부자가 되어 돌아오지만, 세상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있습니다. 돌아온 히드클리프가 죽어 가는 캐시에게 쏟아놓은 사랑의 말들은 폭풍의 언덕의 절정입니다. "왜 당신은 나를 멀리했소? 왜 당신은 자기마음을 배반한 거지? 어떤 말도 내겐 위로가 안돼! 당신은 이런 꼴을 당해 마땅해. 당신이 당신 마음을 죽인 거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했소. 그런데 무슨 권리로 나를 버렸지? 불행도, 타락도, 신도, 악마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었는데... 내가 살고 싶은 줄 아시오? 나는 건강한 만큼 불행하오!" 전부를 걸고 전부를 요구한 사랑, 무섭지 않나요? 나는 건강한 만큼 불행하오,라는 히드클리프의 진실, 그것은 때울 때까지 태우지 못한 열정의 말이지요? 때울 때까지 태우지 못한 열정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변하는데, 변화를 따라 흘러가지도 못하고 넘어가지도 못하는 시간, 그래서 나이가 드는데도 멈춰있는 시간 말입니다. 캐시가 죽고나서 아무리 나이 들어도 성숙하지 못하는 히드클리프의 시간처럼. 그의 시간은 캐시의 죽음에서 멈춰있습니다. 만나지도 못하고 망각하지도 못하는 사랑의 고통은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집착의 결과라고 해도 어찌할까요? 충분히 애착의 시간을 누리지 못한 집착이 삶을 파괴하는 것을 멈출 수 없으니. 수원대교수

2018-09-04 15:54:18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화려했던 시절도, 초라했던 시절도,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물처럼 흘러갑니다. 과거는 정말 꿈과 같습니다. 과거가 꿈과 다를 바 없다면 과거가 될 현재도 꿈과 다를 바 없는 거지요? 톨스토이가 말했습니다. 우리 생은 죽음으로 잠을 깨는 긴 꿈인지도 모른다고. 문득문득 묻습니다. 꿈같은 인생,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얼마 전 우연히 1920년대 미국이 배경인 고전 영화, '초원의 빛'을 보았습니다. 젊은 날에는 그 영화가 그리 좋은 영화인 줄 몰랐습니다. 그저 가부장적이고 청교도적인 윤리에 희생된 젊은 날의 초상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면서 온전히 함께 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는 남자와, 결혼 전에는 잘 수 없는 여인의 성적 억압이 어떤 파장을 불러오는 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만 생각했던 거지요. 그런데 그 영화를 슬픈 영화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장면의 쓸쓸함이 강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열과도 같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재회하는 사랑하는 남녀의 잔상이 너무나 인상적인데다 거기 입혀진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이 매혹적이어서 언젠가는 그 영화를 찬찬히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저 문장들이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그 다음 문장이 확, 들어오네요.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니." 고등학교 동창인 디니와 버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매일매일 붙어다는 그들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연인들입니다. 그런데 키스밖에 할 수 없는 것이 괴로운 버드와 청교도적 윤리 속에서 청순한 디니는, 빛이고 영광이었던 사랑이 괴로움이 되고 어두움이 되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나이가 시선을 바꾸지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장면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그 전엔 잔상으로도 남아있지 않았던 버드의 누이였습니다. 그녀는 청교도적 윤리가 엄혹했던 마을에서 한 때의 사랑이 "방탕"이 되어 "쉬운 여자"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뭇남자들의 성희롱 대상이 될 뿐 존중받지 못하는 그녀가 악에 받쳐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그녀를 그렇게 취급하는 세상에 대해 냉소와 자포자기로 저항하다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무서운 세상이었지요? 또 한 포인트는 디니와 버드의 부모입니다. 그 전에도 그 부모들을 보았을 텐데 어쩌면 그리 새로울 수 있는지요. 자식 교육에 올인하는 그들은 자식의 삶이 자기의 삶이 되는 우리 시대의 부모 같았습니다. 누구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버드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아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자기가 정한 기준에만 맞춰 아들에게 요구하고 아들을 압박하는 이 땅의 많은 아버지를 빼박았습니다. 아들은 숨이 막히는데 그럴수록 조급해져서 아들의 속 표정은 아랑곳없이 밀어붙이는 아버지는 아들의 울타리가 아니라 벽이지요? 심하면 절벽입니다. 당신은 아들을 이해하고 아들에 공감하고 아들을 믿는 아버지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기대에 맞춰 아들이 자라주기를 바라다 때때로 아들을 윽박지르고 몰아붙이는,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하면서 자식을 사랑해서 자식을 위해 돈을 버는 데 자식들이 나를 쓸쓸하게 한다고 믿는 집착의 아버지입니까? 버드의 아버지는 계속 예일대학을 고집하고, 디니의 어머니는 계속 바른 몸가짐을 강조합니다. 농부가 되어 디니와 살고 싶은 버드의 꿈은 명문 예일을 고집해서 도시로 나가 폼나게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로 인해 깊은 좌절을 맛보고, 청교도적 윤리를 벗어나면 주홍글씨를 입혔던 시절은 버드와 살고 싶은 디니의 꿈을 정신병원에 가둡니다. 모두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이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거지요? 우리 모두 좋은 인격을 갖춘 상태에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러나 아버지 때문에 괴롭고 어머니를 이기지 못해 괴롭다 해도 삶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어서 그 괴로움을 부모 탓으로 돌리거나 사회 탓으로는 돌리는 자는 결국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법입니다. 더 이상 부모 탓 하지 않는 것이 어른의 시작이니까요. 부무 탓하지 않는 시기를 지나 보면 알지요? 청춘을 짓누르는 것은 바로 청춘이었다는 것을. 사랑하고 괴로워하며 열정을 앓던 시절의 청춘의 빛, 빛의 영광, 영광의 소멸, 소멸 뒤에 남는 것까지 나탈리우드가 분했던 디니의 독백처럼 젊은 날의 사랑은 우리를 휘몰아치는 소나기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삼켰던 열정의 시기를 지나 평온해진 상태에서 디니는 버드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결심합니다. 디니를 돌봐주었던 정신과 의사가 그를 사랑하냐고 묻자 디니는 버드에게 느꼈던 감정과는 다르지만,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때 의사가 다시 묻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버드를 볼 수 있겠느냐고. 디니가 모르겠다며 머뭇거리자,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느 정도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야만 한다고, 두려움에 당당히 맞서라고 조언해줍니다. 참 좋은 의사고, 참 좋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당히 맞설 수 있지요? 초원의 빛이고, 꽃의 영광이었던 그를 잃어버린 아픔을 심장이 기억해서 그만 보면 자꾸 그 시절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이제는 자기도, 그도 돌이킬 수 없는 곳에 서있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과거에 발목을 잡히는 거지요? 언제나 내 발목을 잡는 것은 내 과거고, 과거에 사로 잡혀 있는 내 자신입니다. 소화하지 못해 흘러가지 못하고 체증으로 남아있는 시절과 대면해야 하는 때가 옵니다. 디니에게 버드처럼, 버드에게 디니처럼. 대면은 그 시절 혹은 그 사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시절을, 그 사람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내 사랑이, 내 가치가, 그리고 바로 내 존재가 존중받지 못하고 존재가 죄인 양 안절부절못하거나 존중받기 위해 기를 써야만 했던 시절이 없으셨는지요? 살면서 잃어버린 것, 누리지 못한 것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면서 그를, 혹은 그 시절을 잘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거기서 누렸던 것, 배웠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고, 괴롭고 아파 소화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통해 한 뼘 자란 나를 긍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과거에 끌려 다니지 않고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초원의 빛, 꽃의 영광이 남긴 오묘한 힘을 이해하는 것이겠지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하지 마라!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니.

2018-08-28 14:03:53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목련존자와 어머니 청제부인

얼마 전 가까운 친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는 아버지를, 가족밖에 몰랐던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로 기억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3년 전 아내를 잃고 홀로 남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외로움과 싸우며 견디며, 얼마나 힘들었을 지를 생각하면 자식이면서도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자신이 죄인이라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가 있으면 느끼시지요? 세상을 떠난 후에 오히려 더 가깝게 느끼게 되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요, 아버지라는 사실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매혹되는 별빛이 이미 죽은 별일 수 있는 이치와 같을까요? 살아생전 받고 또 받았으면서도 해준 것이 뭐가 있냐며 불만만 돌려주었던 자식도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값을 수 없는 빚, 생명의 빚의 무거움을 알게 됩니다. 이번 주에는 음력 7월 15일, 백중이 있네요. 백중의 전설, 목련존자와 그 어머니 이야기를 아시나요?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높디높은 존자에게 그런 한심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친근했습니다. 백석의 시 중에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가 있습니다. 백석의 시는 입으로 읊으면 훨씬 좋습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한 것이다." 내게 존자는 바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존자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가 부자였지만 베풀 줄 모르고, 살생을 즐겨 뒷마당에서는 늘 짐승을 잡아 피를 보고, 남에 대해서는 의심이 많고, 심술 맞고, 거짓말 잘 하는 기막힌 존재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것, 맛있는 것을 아무리 잘 먹여도 우리 몸은 끝이 있고, 많은 하인을 거느린 채 좋은 집에서 명품 옷 휘감고 살아도 목숨은 마침이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입으며 인색하게 살면서 혹여 자기 것을 누가 가져갈까 의심하고 감시하고 화만 냈던 청제부인도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녀가 아무리 좋은 아들을 뒀다 해도 천국에 갔을 리 없지요? 그녀는 지옥에 갔습니다. 지옥으로 간 어머니를 두고 수행하는 아들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원효스님이 말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벗지 못하면 결코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없다(自罪 未脫, 他罪 不贖)고. 그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역으로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있는 경지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죄를 벗어버리며 자기를 풀어주는 힘을 기르는 것이겠습니다. 자기를 풀어준 자, 남을 풀어줄 수 있는 힘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목련은 망설임 없이 어머니를 찾아 지옥으로 걸어들어 갑니다. 그런데 지옥은 왜 그리 한량이 없는 지요. 움직일 때마다 칼날이 상처를 입히는 검수지옥, 먹고 또 먹어도 결코 배고픔이 채워지지 않는 아귀지옥, 피와 살이 맷돌에 갈리는 석합지옥,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잿물 속에 쓸려 다니는 회하지옥, 펄펄 끓는 물에 삶기는 화탕지옥, 머리에 불을 인 채로 죽지도 못하는 화분지옥, 지옥, 지옥 … . 뜨겁거나 차갑거나 가혹하거나 비참하거나 괴롭기 그지없는 지옥은 끝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야기의 전개방식으로 보아 목련존자는 어머니 청제부인을 지옥에서 구해냈겠지요? 그 과정에서 내게는 재미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옥에서 만난 어머니의 몰골이었습니다. 어머니라 하니 어머니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몰골이었습니다. 부자였고, 존경받는 집안의 여주인으로서 명령과 지시에 익숙하던 시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머리에 불을 인 채 새까맣게 타들어가며 살려달라고, 고함만 치는 참혹한 존재만 남은 겁니다. 삼국유사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 사람의 서원으로 지어입니다. 바로 김대성이지요. 그가는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습니다. 삼국유사의 나오는 그 짧은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절을 짓는 정신이 바로 우리들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어쩌면 일연스님은 그 이야기를 통해 냉정하거나 뜨겁거나 기막히거나 시끄럽거나 한 고통의 바다에서 정신을 잃고 악다구니를 쓰고 사는 중생들이 어쩌면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일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목련은 살려 달라, 고함치는 어머니의 고통을 두고 볼 수 없어 옥리에게 대신 지옥에 들어가 어머니의 죄값을 갚겠다고 합니다. 존자가 어찌 어머니의 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다만 지옥의 고통에 머리가 타고, 몸이 타고, 마음이 타고, 타고 또 타는데 물 한 방울 삼키지 못하는 어머니에 다한 안타까움인 거지요. 그 자비의 마음이 부처를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고, 염라대왕을 움직이고, 마침내 어머니를 조금씩조금씩 움직입니다. 목련존자는 어머니로 인해 깊은 슬픔을 경험했지만, 바로 그 경험을 통해 깊은 자비의 실천을 시작합니다. 목련존자의 지옥구제가 시작되는 거지요? '나'를 낳아준, 생명 빚의 어머니를 들끓는 지옥 속에 둘 수 없어 구하러 가는 데서 시작한 지옥행은 지옥을 공부하는 치열한 만행의 시간이기도 하지 않았을까요? 한 사람을 구하려는 지옥행이 지옥의 중생들을 건져야겠다는 서원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부모를 통해 나온 우리는 부모를 통해 지옥을 경험하고 지옥을 충분히 경험한 후에 천국을 만드는 힘을 갖게 되나 봅니다. 지옥의 중생들을 위해 이 땅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경전을 읽어 마음에 새기고, 살생을 하지 않고, '나'와 다른 생명을 아끼고,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일이라면서요? 그러다 보면 겸손을 배우고, 화를 낼 일이 줄고, 욕심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생기겠지요? 원효대사가 말했습니다. 아무도 막지 않는 천국에 이르는 이가 적은 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삼독 번뇌로 자기 삶의 살림을 삼기 때문이고,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악도에 들어서는 이가 많은 것은 4대(지·수·화·풍) 색신, 오욕락(재물·색·먹는 일·명예·수명)으로 허망한 마음의 보배를 삼기 때문(無妨天堂 少往至者 三毒煩惱 爲自家財, 無誘惡道 多往入者이 四蛇五欲 爲妄心寶)이라고. 이번 백중엔 무슨 계획이 있으신가요? 꼭 절에 가거나 하지 않더라도 어머니, 아버지와 식사를 하거나 혹은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듯 주변의 어른들에게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 대접하는 건 어떨까요?

2018-08-22 10:27:09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당신의 저녁은 안녕하신가요?

마음과 몸, 무엇이 우선일까요? 영지주의자들은 몸은 마음의 감옥이라고 봤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이해했던 맥락이 있을 텐데, 그 맥락을 놓친 채 몸은 마음의 감옥이라는 그 구절만 놓고 보면 아예 몸을 부정하는 것 같지요? 실제로 서구역사에서 그 문장은 기독교와 묘하게 결합하면서 죄책감을 낳았습니다. 그것은 서구의 중세가 몸의 부정, 욕망의 부정으로 점철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들어서면서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몸의 해방, 욕망의 해방이 화두가 되는 건 당연합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과 함께 몸의 해방이 누구보다도 절절했던 철학자가 바로 니체였습니다. "대지가 내 껍질을 삼키듯이/ 내 안의 뱀은 대지를 갈망한다./ 벌써 나는 돌과 풀 사이를 기어/굶주림에 몸을 비틀며 나아간다./ 내가 항상 먹어온 것을 먹기 위해/ 너 뱀의 음식이여, 너 대지여!" 뱀은 내 안의 욕망입니다. 뱀은 에덴의 질서에 따르지 않고 자기의 질서를 만듭니다. 뱀은 관념을 살지 않고 대지에 살며 편견을 먹지 않고 흙을, 대지를 먹습니다. 그 대지를 갈망하는 뱀은 '나'를 '나'답게 하는 내 안의 생명력입니다. 생각해 보면 마음이 없는 몸도, 몸이 없는 마음도 모두 허깨비 아니겠습니까? 오르세 미술관에서 밀레의 그림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밀레의 그림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를 알아버린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이 담긴 몸의 힘이었습니다. 그 당시 밀레보다 더 화사하게, 더 예쁘게, 때로는 극적이게까지 그린 그림들이 많은데 소박한 밀레의 그림들이 그렇게 시선을 끄는 건 무엇보다도 거기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밀레의 그림에는 대지를 긍정하며 자기 노동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몸이, 마음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그림 '만종'을 보십시오. 노을이 지는 저녁, 땀 흘려 일한 들판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부부! 그들은 조용히 종소리를 듣고 있는 듯 하지요? 만종에 대해 밀레는 들에서 일하시다가도 종이 울리면 일손을 멈추고 기도를 드렸던 할머니를 추억하며 그린 그림이라 했습니다. 기도하는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밀레는 종소리를 듣는 자의 태도와 포즈를 알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었을 겁니다. 밭을 일구다가, 감자를 캐다가, 이삭을 줍다가 종소리에 홀려 마음을 모으는 그들의 기도가 허황된 것일 리 없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생에 대한 사랑입니다. 비록 그들이 거둔 것이 돈이나 명에나 권력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런 것이 없이도 문제되지 않는 삶이 있는 거지요? 생각해 보면 돈이 많아 돈 지키느라 사람도 잃고 인생도 잃은 사람들이 많지 않나요? 명예의 감옥의 갇히고 권력의 감미로움에 취해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아집덩어리가 되어 스스로 고립된 불안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밀레의 그림들을 한참 들여다보니 자연스레 물음이 생깁니다. 삶은 무엇으로 지켜지는가? 바로 자연 속에서의 노동이고, 그 노동을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노동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까지. 그림 앞에서 나는 그림 속 부부처럼 손을 모아봅니다. 그리고 거두어들인 감자의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 감자를 삶아 나눠먹을 그들의 저녁을 축복합니다. 돌아갈 집이 있어서, 함께 감자를 먹을 수 있어서,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어서, 눈을 맞추고 손잡을 수 있어서 행복한 삶을 축복하는데 마치 내가 그 저녁의 주인공 같네요. 밀레의 노을은 돌아갈 집이 있는 자의 노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저녁이 있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저녁의 종소리, 저녁의 노을, 저녁의 기도에 빠져 있다가 다시 저녁의 노을이 인상적인 한 작품을 만났습니다. 상처 입은 자의 저녁이 인상적인 모로의 작품,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 이야기 아시지요? 길손이 강도를 만나 다 털리고 거의 죽게 된 채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마침 경건하다 일컬어지는 제사장이 길을 가다 그를 보았지만 못 본 척 지나쳐 가고, 존경받는 레위인도 그 사람을 지나쳐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천하다 손가락질 당하는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을 내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을 태워서,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이 이야기와 함께 언제나 듣게 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면, 바로 '위선'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서 도망가는 위선적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살지 말라는 이여기, 선한 사마리안인처럼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종종 강박이 되기도 해서 도와주기 힘들거나 어쩐지 도와주기 싫은 상황에서 죄책감을 갖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바로 강도 만난 자와 그의 상처를 싸매고 있는 사마리아인을 형상화하고 있는 모로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처음에는 황혼이 아름다워서, 다음에는 벌거벗은 길손의 몸과 제대로 걸친 사마리아인의 대비가 시선을 끌어서, 그리고는 황혼녘에 자기를 가누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이를 일으켜 세우는 사마리아인의 동작에 마음이 움직여서 그림 앞에 그대로 서있는데 신기하게도 익숙한 그 죄책감이 사라지는 거 있지요? 죄책감도, 부담감도 없이 작은 그림 속에 빨려들어 갑니다. 그림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의 관점을 바꿔, 내 안에서 아예 다른 이야기가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 찾아옵니다. 상처 입은 채로 쓰러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어설 수 없었던 저 남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남자에겐 자기 집을 찾아 돌아갈 힘이 없고, 돌아갈 힘이 없는 자에게 황혼은 절망입니다. 그런데 상처 입은 채로 쓰러져 있던 남자가 생각 보다 아름다운 겁니다. 절망이나 두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는 시간,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지요? 상처가, 독이, 그의 몸을 삼키고 그의 정신을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때는 레위인처럼, 제사장처럼 지위가 얼마나 높은 지, 사회가 그를얼마나 선망하며 존경받는 지, 하는 것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내 상처에 집중해줄 사마리아인입니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인은 '존중'이라는 무게도 내려놓은 내 속의 치유자인 것은 아닐까요? 내가 그의 손을 잡고 그이에게 내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회복된 몸과 마음으로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돌아갈 집이 있고 감사하는 손이 있는 자에게 저녁은 휴식이고 평안이지만 돌아갈 집이 없는 자, 상처 입은 자에게 저녁은 두려움이고 고립이고 불안이고 방랑입니다.

2018-08-14 17:34:15

이주향 수원대 교수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야곱이 천사와 싸운 이유

철학자 정대현은 '나'의 이룸은 만물의 이룸과 맞물려 있다고 합니다. 어디 이룸뿐이겠습니까? 상처까지도 맞물려 있지 않나요? 이룸이 '나'를 긍정하게 한다면 상처는 '나'를 자극합니다. '나'를 자극하는 존재가 있지 않나요? 친구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고, 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형제 혹은 자매일 수도 있지요? 동일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좋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지만 못마땅할 때는 진짜 아픈 적이기도 한 존재들이 바로 형제 혹은 자매 아닌가요? 가인과 아벨이 그렇고,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렇고, 야곱과 에서가 그렇고, 레아와 라헬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렇습니다. 어쩌면 형제 혹은 자매는 내 반쪽이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그림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열흘 가까이 파리에 머물면서 하루 종일 걸어 다녔습니다. 그중에 행복했던 일은 원 없이 미술관을 다녔던 것입니다. 이틀을 오르세에서 보냈고, 삼일을 루브르에서 보냈습니다. 루브르에서는 들라크루아 특별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특별전시의 이미지 컷이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었습니다. 야곱, 운명적인 인물이지요?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선택한, 축복받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형 에서의 입장에서 보면 야곱이 받은 축복은 에서가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축복 도둑질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야곱은, 한때는 분명히 둘도 없는 사이였을 에서를 피해 도망갑니다. 축복을 받고 도망가지만, 야곱이 그 축복의 의미를 진짜 알고 있었을까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신성한 꿈을 꾸지 않았을 테니까요. 꿈, 꾸십니까? 꿈이 잘 맞나요? 베델이라는 곳에서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하늘에 닿아있는 층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그 꼭대기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는 꿈입니다. 월리엄 브레이크나 샤갈을 포함해서 이 극적인 장면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신성한 꿈을 꾼다는 건 스스로 내면의 신성을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거지요? 무의식은 의식이 아는 일을 꿈으로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꿈을 꾸고 나서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거겠지요. 야곱의 고백입니다. "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셨는데도, 내가 그것을 몰랐구나. … 이 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베델에서 야곱은 자신을 지켜주는 손을 믿게 됐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꾀와 머리로 살았던 삶을 진심으로 내려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행복을 위해서는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 말을 몰라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사랑하고 집착하고 쌓아놓은 그것 이상의 힘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그건 내려놓는 게 아니라 에서처럼 빼앗기는 겁니다. 내려놓을 수 없는데, 내려놓아야 한다고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는 건 죄책감을 키우고 강박증을 키우기에는 좋은 방법입니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노예도덕에 길들어지는 방법입니다. 삶을 충분히 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내려놓을 수도 없구요, 자연스레 힘을 빼며 살 수도 없습니다. 이제 자연스레 힘을 빼며 살 수 있게 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4명의 처를 얻었고, 아이도 많이 낳았고, 재산도 많이 생겼습니다. 라반과의 관계에서만 본다면 그는 정말 내려놓은 자였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일했는데, 라반은 그를 속이고 사랑하지 않는 레아를 주었습니다. 그것도 기막힌데, 또 라헬을 주는 조건으로 7년을 일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꾀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라반의 살림을 관리해주었고 불려주었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재산을 주지 않으려고 꾀를 썼는데도 야곱은 묵묵히 속아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자가 됐습니다. 셈법 너머 보이지 않은 힘이 야곱을 진득한 사람으로 만든 거지요. 마침내 야곱은 돌아갈 때가 됐습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형 에서입니다. 고향에 가야 하는데, 그래야 진정 자기 집을 세우는데, 그러자면 피할 수 없는 존재, 형 에서가 걸립니다. 이제는 평생 덮어두기만 했던 자기의 그림자, 형 에서를 대면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대면해야 하는 야곱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그 대면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는지 야곱의 기도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부디 저의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형이 와서 저를 치고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 형이 두려워서 야곱은 형의 분노를 풀어줄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고, 종들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앞세워 보내고 자기는 혼자 남습니다. 혼자 남아 그는 밤새워 우리가 천사라고 하고 싶은 어떤 분과 씨름을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두려운 것도, 불안한 것도 없이 힘을 빼고 살 수 있었던 야곱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 그래서 늘 명치끝에 걸려 있는 것이 바로 형 에서였습니다. 당신의 명치끝에는 무엇이 걸려 있나요? 그것이 바로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내면의 어두운 측면입니다. 내가 부끄러워해서 외면했던 부분이고, 모욕적이어서 증오했던 부분이고, 인정할 수 없어 아예 잊고 있었던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는 자기의 무의식이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제일 잘 모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억누르고 외면하고 방치했으니까요. 그런데 에서를 대면해야 하는 야곱처럼 두렵기만 한 그 그림자를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림자를 대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들라크루아의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날개를 가진 금발의 천사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천사를 밀어재끼고 있는 야곱의 근육들은 그가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자와의 싸움은 그토록 치열합니다. 나를 초조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 그것이야말로 내가 집중해야 할 내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야곱이 선악을 넘어 생사를 넘어 천사와 투쟁했듯, '투쟁'이라 할 만큼 치열하게 나를 불안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그림자를 품고 또 품어 보신 적이 있나요? 그림자 대면하기는 야곱에게 에서처럼 내 인생의 화두로 다가온, 소화할 수 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품고 또 품는 것입니다. 천사와 싸운다는 건 온전한 신성을 얻기 위해 자기 전 존재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야곱처럼 엉덩이뼈를 다칠 수도 있고, 북유럽의 신 오딘처럼 눈 하나를 내줄 수도 있습니다. 붓다의 제자 아노룻다처럼 두 눈을 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투쟁을 제대로 한 사람은 자기가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지혜를 얻었으니까요? 당신의 그림자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천사와 씨름하시나요?

2018-08-08 10:27:36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당신의 목탑, Let it be!  

1238년, 이 땅을 짓밟은 몽고군에 의해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탈 때 경주 하늘이 3개월 동안 일식이 생긴 것처럼 어두웠다지요? 세상이 불타는 데 지금 당신의 탑은 안녕하신지요? 세상이 불타고 있습니다. 태양이 불타고, 땅이 불타고, 공기가 불타고, 식물의 잎들이 불타고, 마침내 생명 있는 것들이 모두 목이 탑니다. 이렇게 뜨거울 수 있을까요?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탈 때 를 쓴 일연스님은 달성군 현풍면 비슬산에 거하면서 무간지옥은 죽어서 가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펼쳐지는 현실임을 본 것 같습니다. 그는 무의자無衣子 스님을 인용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들었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지는 불길 속에서 한쪽은 무간지옥을 보여주더라고." 불타는 공기가 뜨거워 헉헉거리며 불을, 무간지옥의 불을, 그 그림자를 본 것 같습니다. '나'를 태우고 우리를 태우고 세상을 태우는 그 불의 힘을. 그러고 보니 부처님의 불의 설법이 명문입니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불타고 있으니, 그러면 과연 불타고 있는 모든 것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불타며, 보이는 형상이 불타며, 본다는 의식이 불타며, 보아 비롯된 감명이 불타고 있다. 또한 뜨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거나 간에 보아 비롯된 감명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느낌도 똑같이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는가? 애욕의 불로, 증오의 불로, 미혹의 불로 불타고 있으니 나는 그것이 나고 늙고 죽는 타오름이며, 슬퍼하고 애석해하고 비통해하며 절망하는 타오름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불타며, 정신의 대상들이 불타며, 정신에 다한 의식이 불타며, 정신적 감명이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고 귀가 불타고 마음이 불타면 어찌 되지요? 사랑하는 조카와 열흘 가까이 파리 여행을 갔습니다. 거리를 두고 볼 땐 그저 똑똑하고 이성적인 대학생인 줄 알았던 아이가 함께 해보니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별생각 없이 사야하는 이기적 혹은 감각적인 아이라는 사실에 처음엔 놀랐습니다. 내가 조카를 몰랐던 거지요? 다이어트가 중요한 아이는 음식 앞에서 깨작거립니다. 맛없다고 생각되는 음식은 아예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거기에 밥 한 그릇, 김치 한 종지뿐인 초라한 밥상이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마음의 양식을 삼아야 한다는 내 가치관일 내세우면 내 눈이 불타겠지요? 그러다 아이가 탁, 스푼을 놓으며 어떻게 이런 음식을 팔 수 있냐며 조용히 화를 내면 그 말에 귀가 불타고, 아이에 대한 실망과 걱정에 마음이 불탈 수밖에 없습니다. 불타는 순간 폐허가 되는 것은 나의 정원입니다. 선도 강요하면 악이 되는 이치입니다. 여행지에서도 10시까지는 자야하는 아이를 자게 두고 아침마다 파리의 아침을 배회하다 혼자 하는 아침시간을 즐기게 되었을 즈음 매일 들르는 한 성당에서 화두가 풀리는 홀가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성당엔 성모가 승천하는 천장화가 있었습니다. 소중한 아들을 잃은 피에타의 절망과 아픔을 도대체 어떻게 소화했기에 성모의 표정은 저리도 맑은 걸까요? 우리는 언제쯤 저 성모처럼 아픈 것은 아픈 대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그대로 둘 수 있게 될까요? 그녀를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조카를 맡깁니다. Let it be!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두는 거라는 걸 배웁니다. 시간을 짬지게 이용해야 한다는 것은 내 강박이지 그 애의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의 애착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애착의 불이 나를 태우지 않네요. 내게 파리는 미술관과 성당과 역사의 도시지만 아이에게 파리는 패션과 자유의 도시입니다. 미술관의 도시로서 파리를 좋아하는 건 나의 취향일 뿐입니다. 그러니 아이가 미술관 보다 길거리에서 시간을 더 보내면 어떻습니까? 길거리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고 깊고 큰 나이일 수 있는데. 길거리에서 이것 저것 사들이면 어떻습니까? 아이의 감각을 믿고 함께 감상하다 보면 그것도 소중한 시간인데. 밤새 돌아다니다 늦게 들어와 늦잠을 자면 어떻습니까? 자기방식의 자유를 누리러 여행을 온 것인데. 아이가 늦게 일어나도, 비싼 음식을 맛없다고 먹지 않아 그대로 버려도 내 눈에서, 귀에서 불이 나지 않으니 여행이 편해졌습니다.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인생을 배우고, 내가 모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믿어주면 됩니다. Let it be! 함께 왔지만 서로 자기 좋은 것을 찾아 따로 다니다가 밤에 잠깐 만나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나니 파리가 진짜 좋았던지 앞으로는 불어를 배우겠다고 합니다. 불어를 배워 한 달이든 두 달이든 파리 사람들과 섞여 살아보고 싶답니다. 다른 문화에 호기심이 생기면 그렇게 의지가 생기는 거지요? Let it be! 불타지 않기는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언제나 그의 삶을 그에게 주지 못하는 불이 '나'를 괴롭히니까요. 기대의 불이 실망의 불이 되어 타오르고, 애착의 불이 분노의 불, 절망의 불로 변해 뜨겁게 '나'를 태웁니다. 모두 자기로부터 시작된 불입니다. 그의 삶은 그에게 주어야 나의 정원을 불태우지 않고 가꿀 수 있습니다. 마음의 토대가 자연이듯 탑의 토대는 신성입니다. 마음의 중심인 탑을 세우지 못하면 잘 놀라고 자주 화를 내고 쓸 때 없이 불안에 휩싸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평생 문수보살 뵙기를 소원했던 자장스님이 세웠습니다. 636년,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갑니다. 어찌 보면 팔자 좋은 귀족 스님의 편안한 공부길 같지만 자세히 보면 치열한 구도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연스님은 거기 오대산에서 자장스님이 문수보살의 수법을 감득感得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자장스님이 얼마나 치열한 구도행을 했는지 신인이 그에게 절하며 그를 도왔다지요?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맏아들입니다. 범왕의 명령을 받고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대가 본국에 돌아가 절 안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는 항복해 오고 조공을 바치니 국조가 길이 태평할 것입니다. 탑을 세운 위에는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놓아주면 외적도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외적도, 죄인도 내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죄는 그에게 주고 '나'는 '나'의 탑을 세워야지요. 일연스님이 신비하고도 영험한 목탑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의 탑이 아니었을까요? 탑은 중심이고 궁극입니다. 탑을 세운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훼손되지 않고 불타지 않는 '나'의 중심을 세우는 일,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수원대 교수

2018-08-01 10:30:26

삽화 권수정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탑돌이와 호랑이 신부

장애이자 보물인 사람이 있지요? 그를 버리고는 삶이 빛나지 않는데 그와 함께하는 삶은 또 정돈되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신라 원성왕 때 낭도 김현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실하고 정돈된 사내였나 봅니다. 그런 그가 장애이자 보물인 한 처자를 만납니다. 그녀는 누구일까요? 그와는 도무지 격에 맞지 않는 그녀를, 그는 어떻게 만났을까요? 탑돌이에서였습니다. 그녀를 만난 곳은. 흥륜사 달밤의 탑돌이가 그들을 이어주는 매파였습니다.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 초여드레부터 보름까지 경주 사람들은 흥륜사 전탑(殿塔)을 돌며 복을 빌었답니다. 낭도 김현도 그 탑돌이 무리 속에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사람들은 빠져나가고 마침내 김현 홀로 남아 탑을 돌았다." 그는 무엇을 위해 두 손을 모으고 탑을 돈 것이었을까요? 아마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복을 빌었겠지요. 관직에 나가게 해달라는 것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처자와 혼인하게 해달라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십자가 아래서든, 탑을 돌면서든 간곡히, 삶에서 필요한 무엇을 구해보셨습니까? 사랑을 구하고 학교를 구하고 재물을 구하고 권력을 구하면 구한 것들이 찾아오나요? 찾아올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신앙을 단순히 기복신앙으로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다. 삶이 원하는 것을 간절히 구하고 구하다보면 그것이 마음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으니까요. 김현도 그랬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는 것도 모른 채 천천히 탑돌이를 하다가 궁극엔 기원의 내용도 잊은 채 그저 마음을 모으고 세상도 없고 '나'도 없는 경지를 체험한 것 같습니다. 나는 '그가 홀로 남아 탑을 돌았다'는 삼국유사의 표현에 자꾸 눈이 갑니다. 홀로 남아 탑을 돌았다니요? 시간도 잊고, 소원도 잊고, 말도 잊은 거지요? 삶이 소유가 아니라 경험이라면 그런 경지를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복이 아닐까요? 그 때 한 처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염불을 하면서 그를 따라 도는 처자가. 인연일까, 악연일까 생각할 틈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 빠져듭니다. 일연스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서로 정이 움직여 눈을 주었다고. 정이 움직이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거지요? 탑돌이를 마치고 김현은 처녀를 후미진 곳으로 이끌고 가 관계한 후에 처녀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홀연히 오나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관계가 끝난 후 처자의 태도입니다. 따라오지 말라며 그녀는 그녀를 따라오는 김현을 자꾸 밀어냅니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그것이, 냄새를 맡고 기다리고 있는 호랑이 이빨로부터 남자를 구하려는 여인의 배려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꾸역꾸역 여인을 따라갑니다. 예상하신 대로 여인은 사람 비린내를 맡으면 무조건 잡아먹으려 드는 오빠들이 셋이나 있는 호랑이였습니다. 사랑한 여인이 호랑이라니요? 말도 안 되는 옛날이야기인가요? 실제로 동물 같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사납고 거칠고 맹목적인 동물 같은 사람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 틈에서 아우성치며 살다가 함께 거칠어졌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저 깊은 마음속에 자유의 씨앗이 있어 마침내 탈을 벗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후자인 그녀는 오빠들이 자기 사랑까지 잡아먹을까 두려웠던 거지요. 위험한 오빠들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남자를 구석진 곳에 숨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가 좋은 오빠들은 냄새를 맡고 이렇게 말합니다. "집안에 비린내가 나는구나. 요깃거리가 생겼으니 어찌 다행이 아닐꼬."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아름답고 향기로운 내 사랑이 위험한 모습으로 올 때!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고, 선택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을 때 그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더는 어쩔 수 없다며 사랑을 버리고 안전한 길을 선택하십니까, 아니면 사랑과 함께 위험한 길로 나아가십니까? 김현은 이미 잘 지냈으니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며 위험을 피해가지 않은 낭도였습니다. 사랑 앞에서 당당한, 드물기도 하고 괜찮기도 한 남자입니다. 당연히 호랑이 신부가 그를 해하게 둘 리 없지요? 여인은 자기를 던져 남자를 구하기로 합니다.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집을 찾아온 손님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잡아먹을 수 있는 사납고 거친 오빠들은 그녀의 수치이자 난제라는 사실을.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너희들이 사람의 생명을 너무 많이 해쳤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해야겠다." 남을 공격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자기가 공격당하는 것은 겁내듯,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생명을 해치는 자들은 자기 생명의 위기 앞에서 벌벌 떠는 법입니다. 누가 그 위기를 피해가지 않고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위기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는 있을까요? 철저히 이기적이고 철저히 공격적이었던 동물적 삶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은 있기나 한 걸까요? 그녀가 자기를 던집니다. 사랑의 힘을 배운 그녀는 이제 오빠들의 죄를 정화할 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녀는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자기가 죽을 테니 오빠들은 멀리 떠나 자숙하라고 합니다. 멋지지요? 그러나 철저히 이기적이고 공격적이기만 오빠들이 어떻게 동생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얄팍한 오빠들은 모두 기뻐하며 꼬리를 치면서 도망가 버렸답니다. 죄 없는 동생의 희생에 목숨을 건진 오빠들은 언제 알게 될까요? 소중한 목숨을 담보로 그렇게 건진 목숨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평생 모른다면 그걸 어쩌지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자기 목숨 값을 모르는 것일 텐데. 오빠들이 도망가 버린 자리에서 호랑이 신부가 신랑에게 말합니다. "처음에 저는 당신이 따라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지만 이제는 숨김없이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대단한 문장입니다. 수치와 두려움까지 진실이 되고 고백이 되는 것이니. 일반적으로 잘 보이고 싶은 사랑 앞에서는 장식이 넘치고, 표정이 넘치고, 말이 넘칩니다. 사랑 앞에서 숨김없이 정직해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평화를 일굴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의 표징입니다. 살아온 날들을 정직하게 고백한 후에 기꺼이 죽어 가족의 악을 감당하는 그녀, 그녀가 그녀의 마지막을 그에게 맡깁니다. 김현은 그녀를 위해 호원사라는 절을 지었답니다. 복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복의 근원은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닌 것 같습니다. 복의 근원은 수치와 두려움까지 감당할 수 있는 진실의 힘입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허무하기만 하니까요. 수원대 교수

2018-07-26 05:00:00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미추왕을 아세요?

먹고 살만한 집의 셋째 며느리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를 유난히 아꼈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남겼는데, 사랑받는 며느리답게 제사를 모시는 형님들 몫이라며 남편에게 유산포기를 시킨 결단력 있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셋으로 나누게 되어있는 유산을 둘로 나눠 두 형님 댁이 나눠가졌다고 하네요. 일 년에 대여섯 차례 제사를 준비하는 일이 보통일이니? 제사 지내는 큰 형님 다 줬으면 좋겠는데, 작은 형님도 생각이 있을 테니 그건 내가 밤 놔라, 대추 놔라 할 일은 아니고…. 멋진 친구지요? 그 여인이 일을 도모하면 되는 이유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3년, 열심히 제사를 지내던 큰형님이 어느 날 선언을 하셨답니다. 교회를 다니게 됐으니 이제부터는 제사를 지낼 수 없겠다고. 할 수 없이 유산을 나눠가진 둘째 형님네서 제사를 지냈는데, 2년이 지나자 둘째 형님도 똑 같은 선언을 했답니다. 교회를 다니기로 했으니 더 이상 제사를 모실 수 없겠다구요. 한숨을 쉬면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어쩌지? 내가 떠맡게 됐어. 생전 시아버지 생각하고, 아이들의 할아버지라 생각하면 제사를 지내드리는 게 맞는데, 그러면 나중에 내 아들이 집안의 제사를 다 떠맡게 되는 거잖아. 요즘 누가 일 년에 대여섯 차례 제사 지내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려 들겠어? 내 아들 어디 장가라도 가겠니? 친구는 심각한데 나는 왜 웃음을 참지 못했을까요? 농담 반 진담 반,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지내드리고 싶은데, 네 아들까지 이어지는 건 싫단 말이지? 걱정 할 게 뭐 있어? 너도 교회 다니는 며느리 보면 되겠네. 우리는 그저 한바탕 웃고 헤어졌습니다.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죽은 자와 산 자는 영영 관계가 없는 걸까요? 죽으면 정말 세상과 무관해지는 걸까요? 유산은 다 받아 챙겼으면서 어쩌면 그들을 기억하며 밥상 한 번 차려주는 일에 저리 인색할 수 있을까, 싶다가도 신앙의 문제고 신념의 문제라 하니 어찌 해볼 도리가 없겠습니다. 내가 망자라면 나도 나를 기억하고 향을 올리는 일을 우상이라 손사래를 치는 사람에게 제사를 받고 싶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삶을 이해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믿어주면서 그들의 삶에 끼어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추왕처럼, 김유신처럼 죽어서도 분주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긴 잠을 자겠습니다. 죽어서도 죽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 후손을 돌본 미추왕 이야기를 아시나요? 신라 제 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伊西國:지금의 경북 청도)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신라군이 지고 있을 때 갑자기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병사들이 나타나 신라를 돕습니다. 그 도움으로 신라가 이겼습니다. 적이 물러간 후 그 병사들도 사라졌는데 그들이 사라져간 자리가 미추왕릉이었다지요? 그들이 귀에 꽂았던 대나무 잎이 바로 미추왕릉 앞에 수북이 쌓여있었답니다. 지금까지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13대 미추왕은 중요한 왕입니다.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된 존재니까요. 그는 김알지의 7대 후손으로서 후대의 김씨 왕들이 시조로 삼은 왕입니다. 그 미추왕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역시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37대 혜공왕 때입니다. 779년 기미년 4월, 갑자기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회오리 바람이 일었다지요. 그리고 준마를 탄 장수의 모습을 한 어떤 이가 죽현릉으로 들어가고 조금 후에 능 속에서는 이런 소리가 났답니다. “신은 평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습니다. 지금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 어찌 이 나라가 아무런 죄도 없는 신의 자손을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옳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습니다.” 눈치 채셨지요? 미추왕 앞에 나아가 호소하는 이는 김유신이었습니다. 억울함으로 호소하는 장군에 대해 왕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왕은 유신을 설득합니다. “나와 공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찌 하겠소?” 과연 왕이지요? 이것은 혜공왕이 꿈을 꾼 것이었을까요, 실제 일어난 일이었을까요? 알 길은 없지만 이로 인해 혜공왕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왕은 김유신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김유신을 위해 성대한 체사를 지내고 하고는 진심으로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이성과 과학의 힘을 몰랐던 시절의 옛날이야기로만 치부할까요? 오늘날 이성의 힘만 믿는 현대인은 건강한가요? 이성의 힘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분석심리학자, 20세기의 칼 구스타프 융이 말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이성은 그가 들어갈 어두운 구덩이 외에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융은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을 집필했는데, 그 책의 화두가 바로 죽은 자들의 물음이었습니다. 자서전에서 융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을 집필할 때 나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한 것도 역시 죽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이르기를, 자기들이 구하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찾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서 돌아왔다고 했다.” 아무리 아는 척을 해도 죽음의 벽은 높고 높아서 앎의 영역을 넘어서 있지만 산 자가 방황하고 추구하고 헤매는 것처럼 죽은 자도 방황하고 추구하는 지도 모릅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한 때 나의 산이었고 울타리였고, 또 때로는 독침이었고 아픈 손가락이었던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 삶이 지금 내게 어떻게 흘러들어와 있는 지를 성찰하는 것, 아닐까요? 조상과 부모는 나의 전생입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넘어졌던 곳에서 내가 넘어지고, 어머니가 상처받았던 곳에서 내가 상처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삶을 시작했고 거기서 삶을 배워 여기까지 온 당신에게 아버지는, 어머니는 어떤 존재입니까? 나는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넘어졌던 곳에서 넘어지고 어머니가 넘어졌던 곳에서 넘어지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이해하고 아버지, 어머니와 달리 거기서 다시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보는 일, 그것이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하고. 그러고 보니 우린 부모의 삶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면서 부모의 삶을 반복하기도 하고 전복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제사는 ‘나’를 풀어주는 것일 겁니다. 우리의 전생인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 살피다보면 내 안에 맺힌 곳, 아픈 곳이 스스로 풀리지 않을까요? 우리 속에는 수천 세대를 거쳐 삶을 이어준 조상이 있고, 미래 세대를 이어갈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를 풀어주는 일은 바로 조상을 풀어주는 일이고, 후손들을 풀어주는 일일 겁니다.

2018-07-19 05:00:00

이주향 수원대 교수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 당금애기, 우리 안의 여신

철학자 이주향 수원대 교수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을 연재합니다. 이주향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나 오래된 이야기가 근거없는 허구가 아니라, 이땅의 기억이며, 우리가 살고자 했던 삶 혹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원형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신화와 삶, 삶과 신화를 넘나들며 인간과 존재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것이기에 삶을 완전히 바꿀까요? 파우스트의 그레트헨은 사랑을 하다 미쳐 죽고, 제주신화의 당금애기는 사랑을 하다 쫓겨납니다. 모두 현재의 평온이 깨지는 경험을 하지요.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안정 속으로 도망가서는 안 되는 법이라는 것을 사랑만큼 절절하게 알려주는 것도 없습니다. 시준님을 만나기 전 당금애기는 꼭 파우스트를 만나기 전 그레트헨입니다. 그녀는 그레트헨처럼 청순합니다. 사랑스런 그녀들은 가족의 자부심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당금애기는 제주의 그레트헨이라고. 아니 그레트헨은 유럽의 당금애기라고. 어쩌면 청순하고 올곧은 비극의 주인공 그레트헨이 그 시절 한반도로 건너와 바다를 건너 제주로 갔다면 그녀는 분명 당금애기로 부활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레트헨보다 당금애기가 보다 성숙한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당금애기는 주인공입니다. 그렇지만, 그레트헨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그레트헨이 아니라 파우스트지만, 당금애기의 주인공은 시준님이 아니라 당금애기입니다. 여성의 관점에서 통과하게 되는 고난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당금애기의 매력입니다. 당금애기는 해동 조선의 제일 부자였던 아버지가 아홉 아들을 낳은 후에 기도로 얻은 귀한 외동딸입니다. 귀한 딸이니 만큼 날아갈까 빼앗길까 켜켜이 감춰진 대문 안에 꼭꼭 숨겨두고 키웠습니다. 시준님은 부잣집 열두 대문 안에 갇혀 있는 보물 아기씨와 어찌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까요. 당금애기의 파우스트는 시준님입니다. 시준님이라니요? 이름에서 벌써 세존의 향기가 있지요? 범상치 않습니다. 그는 6년 동안 수행한 후 넓은 세상을 두루 돌다 당금애기를 찾아왔답니다. 6년 동안 수행한 시준님이라니,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을 닮았지요? 그런 그가 아버지 어머니가 여행을 떠나고 아홉 오라비도 나랏일을 위해 집을 떠나있는 틈을 타 누추한 몰골을 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운명처럼, 진리처럼. 스님의 모습을 한 시준님은 시주를 받겠다고 열두 대문을 엽니다. 불심 깊은 당금애기, 어떤 쌀로 시주할까, 시준님께 묻습니다. 아버지 드시던 쌀은 누린내가 나서 받을 수 없고, 어머니 쌀은 비린내가 나서 받을 수 없다네요. 오빠들의 쌀은 땀내가 나서 받을 수 없다는 시준님은 당금애기가 먹던 쌀로 서 말 서 되 서 홉을 달라 합니다. 아버지의 딸로서, 어머니의 딸로서, 오빠들의 동생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너 자신으로서 만나겠다는 것, 그러니 바로 너 자신을 보여 달라는 거지요. 당금애기의 홀로서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넓고 넒은 아버지의 울타리가, 깊고 깊은 어머니의 품이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나'자신을 믿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믿음 속에서 형성된 자신감은 누군가를 향해 자유롭게 쌀을 나눕니다. 쌀을 나눈다는 것은 삶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쌀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바로 부모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와 당당히 자기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 어머니의 승낙 없이, 오빠들의 동의 없이 당금애기는 시준님과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거침없는 사랑을 나눈 거지요. 아버지의 법이 '문란'으로 규정할 수도 있는 하룻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밤, 전 생애를 바꿔버린 우연한 밤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오고 오빠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당금애기는 이미 옛날의 당금애기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몸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점점 배가 불러와 결국은 오라비들에게 들키고 맙니다. 오라비들과 아버지는 가문을 더럽혔다며 당금애기를 죽이려 하는데 어머니가 말립니다. 옳고 그른지는 하늘이 판단할 일이라며 뒷산 바위 돌구멍에 밀어 넣자고 제안한 거지요. 잘 했으면 하늘이 살릴 거고, 잘못 했으면 하늘이 죽일 거라며 하늘에게 판단을 맡기는 건 역시 여성성입니다. 당금애기는 깜깜한 돌구멍 속에서 흙비 맞으며 세 아들을 낳고 돌아옵니다. 나는 이 대목을 좋아합니다. 당금애기 혼자 구멍 속, 동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낳는 이 장면! 본질적인 삶의 고통은 나눌 수 없습니다. 혼자 오롯이 겪어야 합니다. 내 몫의 고통을 피해가려 하거나 고통에서 도망가는 자, 새 생명을 낳을 수 없고, 지킬 수 없습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돌구멍 속에 갇혀 지낸 당금애기는 동굴 속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쑥과 마늘로 살아온 웅녀를 닮지 않았나요? 동굴의 시간, 돌구멍의 시간은 인간의 참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자기만의 어둠의 시간을 오롯이 겪어낸 당금애기, 세 아들들에게 아버지도 찾아줍니다. 시준님이 남긴 증표를 가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시준님을 찾아가는 거지요. 자기의 힘으로 아이를 낳고, 남편을 찾고, 아버지를 찾아주는 당금애기가 마지막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아이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을 짓는데 남편에게 완전히 맡기지 않고 자기 의견을 보탭니다. 단순히 보태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이름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이름도 없이 살았다며 서러워하는 아들들을 살피며, 시준님은 아이들에게 이름을 줍니다. 첫째는 푸른 띠를 하였으니 청산이라 하자 하는데, 바로 그 때 당금애기가 나섭니다. "청산은 삼사월이나 청산이지 구시월에도 청산일 겁니까. 맏이로 태어났으나 맏형 자에 부처불 자를 써서 형불이라 부르지요." 시준님이 동의합니다. 이번엔 누른 띠를 띤 둘째아이에 대해 시준님이 '황산'이 어떠냐고 하자 당금애기, 또 나섭니다. "황산은 구시월이나 황산이지 동지섣달도 황산이겠습니까? 둘째로 태어났으니 재불(再佛)이라 하지요." 백산이라 불릴 뻔한 막내도 삼불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부처인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준 후에는 자기 힘으로 당당히 아들 이름을 지어주는 당금애기가 참 멋있었습니다. 좋은 이름은 본성에 가 닿지요? 시준님도 그것을 알아서 푸른 띠, 누른 띠, 흰 띠를 보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당금애기는 단순한 현상의 모습이 아니라 현상 너머 본성을 본 것입니다. 본성을 봐주고 우리 모두 부처임을 본 것입니다. 당금애기와 시준님 사에서 태어난 이 쌍둥이 삼형제가 삼불제석 제석신이고, 그 어머니 당금애기는 아이를 점지하는 삼신입니다. 그녀가 삼신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녀에게서 왔다는 거지요? 당금애기는 예기치 않게 실수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해 자책하다 늘 왜소해져 있는 아이들에게 너의 본질은 부처라고, 자연처럼 자연스러워 작아져있을 때조차 작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우리 안의 여신, 푸근한 여신입니다.

2018-07-11 1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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