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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7>-엄창석

그때 해성재 1층의 왼쪽 문이 열렸다.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댕기머리를 하고 있어서 계승은 착시가 일어났나 싶었다. 신발을 찾느라 마루 끝에서 허리를 굽히거나 다리를 댓돌로 내리는 게 모두 여자애들이었다. 해성재가 여학교로 바뀌었나? 놀라운 일이었다. 우물이나 빨래터가 아닌 곳에서 여자애들이 모여 있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방 안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있던 수녀가 저들과 같이 문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계승은 성당 앞으로 몸을 피했다. 왠지 자신을 알아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세상은 아주 급변했다. 로베르 신부가 부민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성안에서 쫓겨 난 게 겨우 10년이 되지 않았다. 계승이 해성재에 다닐 무렵에 십자 성모당이 신자들로 미어터질 정도로 민심이 바뀌었다. 지금은 여자애들이, 당연히 그럴 테지만 수리나 과학이나 서양음악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계승은 까마득히 하늘을 찌르고 있는 계산성당을 올려다보다가 곧장 달서교를 건넜다. 애란의 집이 있는 큰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양은 늦가을의 쌀쌀한 대기를 몰아내고 바닥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버드나무, 왕버들, 보리수나무 아래엔 그늘이 짙었다. 큰시장으로 들어서자 초가 앞으로 툭 불거진 빈 진열대와 길가에 펼쳐놓은 긴 평상들이 보행을 방해했다. 곳곳에서 목수들이 임시 건물을 짓느라 나무를 켜고, 바닥에 기둥을 세웠다. 그러고 보니 대시가 열리는 게 열흘 뒤였다. 음력 10월과 2월에 대시(大市, 약령시)가 시작되면 도시 전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시장으로 변한다. 대시가 성안 객사 앞에서 열리긴 해도 오히려 발 디딜 데가 없는 곳은 큰시장이고 성 밖의 골목들이었다. 양반 집과 외거노비 집을 빼면 모두 상가가 되는 것이다. 빈터에도 임시 상가가 들어서서 한적한 데가 없었다. 서울, 황해도, 청나라 상인들까지 끝없이 몰려들어 주막과 여관과 민가의 빈방을 차지했다. 봄에는 약재를, 가을에는 직물을 주로 거래하지만, 금속 그릇, 모피, 금은 보석, 미국산 문구 등 모든 물건들이 도시를 뒤덮는다. 대시는 한 달 동안 이어진다. 수백 마리의 마필과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 도시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무는 것이다. 큰시장 어귀인 대구천(川)을 따라 말들이 마차에 엽전을 가득 싣고 서 있는데, 말의 목을 축이게 하려고 개울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하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지경이었다. "국수 한 그릇 말아 줘요. 이번 대시가 언제지요?" 계승은 한 이불점 앞을 기웃거리다 옆에 있는 식점으로 들어갔다. 점심 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라 주파(酒婆)가 손님이 비웠던 그릇을 씻고 있었다. "이 달 16일요." 그를 힐끗 보던 주파가 계승이 등을 돌리고 앉자 더 말을 붙이지 않고 화로에 냄비를 얹었다. 상인들은 서력(西曆)에 익숙한 듯했다. 음력 10월 초하루가 서력으로 11월 16일이란 뜻이었다. 요즘 대시가 어떠냐고 물으려다 말을 바꾸었다. "옆에 이불집이 상만이 가게 아니요? 장상만이요." "이불집 총각 말이네. 저기 그릇집 있죠? 고 건너편이 상만 총각 가게예요. 여기선 보이지 않네. 작년에 그리로 옮겼어." 주파가 다시 계승을 보고 아는 체하는 눈치였는데 계승은 머리를 박고 국수를 먹었다. 계승은 쉰 살쯤 먹은 이 늙은이를 알고 있었다. 예전에 남문 객점에서 술을 팔다가 시장으로 들어왔다. 살결이 부들부들하고 궁둥이가 아주 팡파짐했다. 식탁에 행주질을 하며 뒤웅박 같은 젖가슴을 손님 눈앞에다 출렁대면서 "총각 뭐 드실까?"하는 통에 입맛이 싹 가시곤 했다. 뒤웅박 주파의 말대로 그릇집 건너편에 꽤 큼직한 이불가게가 있었다. 친구 장상만의 가게인 듯했다. 면포와 목화솜 이불이 잔뜩 쌓인 게 제법 돈을 번 품이었다. 장상만은 보이지 않고, 어린 애 하나가 의자에 앉아 식곤증이 겨운 듯 졸음과 싸우고 있었다. 열한두 살쯤 돼 보였다. 계승과 장상만도 큰시장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한 게 열 살부터였다. 가게를 지키고, 수표를 전달하고, 말을 구해오는 일 따위를 맡았다. 가게와 가게 사이, 점포상과 보부상 사이, 가게와 객주 사이, 큰시장과 사문진 사이를 들쥐처럼 재바르게 돌아다니는 심부름꾼이 없으면 시장은 마비되고 말 것이다. 이런 심부름꾼 아이들이 나중에 거상으로 커기도 하고 만석꾼이 되기도 했다. 대구 최고 부자들인 서씨와 장씨도 이곳 큰시장의 심부름꾼 출신이었다. 상설 5일장과 봄가을 대시의 규모가 심부름꾼을 거상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졸음에서 깬 아이의 말로는 장상만이 점심 전에 나갔는데 언제 돌아올지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에게 백동화 한 푼을 던져주고 가게를 나왔다. 계승은, 자신이 왜 애란의 집에 가는 시간을 자꾸 늦추는지 알 수 없었다. 남의 아내가 되었다 해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그것은 열한 살 소녀로서 그녀의 사랑을 간직하겠다는 생각 때문만이 아니었다. 7년 만에 와본 도시가 소름이 돋도록 변해서 이것이 그녀에게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웠다. 그렇게 가게 주변을 머뭇대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다가왔다. 친구인 장상만이었다.

2017-04-03 12:42:16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6>-엄창석

계승은 길가에 쌓인 볏단 옆에 바싹 붙었다. 곱사등이가 몸을 감춘 골목을 주시했다. 초가 앞, 싸리나무 울타리 틈으로 그림자가 얼씬거리는 것 같았다. 낮은 싸리 울타리는 겨우 가슴께에 미치는 높이지만 곱사등이라면 몸을 다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왜 뒤쫓고 있지? 아무것도 짚이는 게 없었다. 대구에 와서 하루 동안 별다른 일이 없었다. 밤새도록 성돌을 파고 나서 일행과 헤어졌을 뿐이었다. 계승은 발소리를 죽이고 울타리로 다가섰다. 곡식을 널었을 수수돗자리가 담장에 죽 세워져 있고 땅에 떨어진 홍시를 핥아먹는 개 한 마리만 보였다. 곱사등이가 개로 변했나. 계승은 의아해하면서 큰시장으로 내쳐걸었다. 애란의 집은 큰시장이 끝나는 벌판 초입에 있었다. 큰시장으로 가려면 개울이 가로막고 있어서 서문(西門) 앞에 있는 달서교로 에둘러야 했다. 왠지 뒤가 신경 쓰였지만 완연한 풍경이 그의 마음을 녹록하게 했다. 이쪽 성벽 바깥은 7년 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일인 상점이 어쩌다 보였으나 낮은 초가들이 연해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성벽 아래에 붙어 햇살을 쬐었고, 크고 작은 솥단지를 펼치고 그 사이에 앉아 상인들이 장죽을 빠는 것도 흔히 보던 풍경 그대로였다. 개울 둑으로 머리에 물동이를 인 여자들이 마주 걸어왔다. 깡동한 저고리가 겨우 명치에 닿아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물동이를 잡으면 젖가슴이 활짝 드러났다. 꽤 젊은 여자들은 몸의 탄력으로 통통한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물동이에 균형을 재는 게, 느닷없이 낯설어 보일 지경이었다. 초량에서는 여자들이 그러고 다니지 않는다. 그 모습이 뜨악하고도 친근해서 여자들 속에 애란이 있지 않을까 싶어, 언뜻언뜻 돌아보았다. 읍성의 서문 밖은 옹기장수들이 북적였다. 성 안에서 보면 큰시장으로 가는 길목이라 언제나 상인들로 붐볐다. 높은 성곽에서 조금 떨어진 채로 그 둘레를 따라 맑은 개울이 흘렀다. 개울 양쪽으로 초가와 기와집이 마구 뒤섞이고 높은 서양식 건물도 하나씩 박힌 이곳엔 부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았다. 계승은 서문 밖 다리인 달서교를 건너 큰시장으로 가지 않고 계속 개울가를 걸었다. 물고기가 그려진 돌이 있나 봐야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난 듯 프랑스 성모당으로 향했다. 빽빽이 들어차 있는 초가 위로 거대하게 솟은 붉은 벽돌 건물이 보였다. 계승은 깜짝 놀랐다. 좀 전 곱사등이가 뒤를 쫓고 있다고 여겼던 자리에서도 하늘 높이 솟은 건물이 보였었다. 우람한 건물은 성당이었다. 예전에 루르드 성당이라고 부르던 십자형태의 기와 성모당이 사라지고, 거기에 두 개의 까마득히 높은 첨탑이 마치 구름을 꿰뚫을 듯이 하늘로 뻗어 있었다. 초량에서도 보지 못했던 우람한 건물이었다. 나중에 기와 성모당에 불이 나 새로 지은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정작 계승이 찾는 것은 기와 성모당의 우측에 있던 해성재였다. 기와 성모당과 함께 지은, 7년 전에도 있었던 2층으로 된 특이한 기와집은 불에 타지 않고 남아, 계승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반갑게 서 있었다. 애란을 처음 만난 곳이었다. 그때 애란은 열한 살 소녀였다. 반반한 집 자제들은 향교나 서당으로 갔고 시장통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해성재에 보냈다. 대개가 성모당에 미사를 보러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계집아이도 더러 끼어 있었다. 해성재에서는 사각형이나 원 같은 도형의 넓이, 다섯 선에 그려놓은 음표, 영어나 불어를 조금씩 공부했다. 애란은 옷을 자랑하러 오는 건지 뽀얀 무명옷을 입고 맨 앞줄에 앉아 있곤 했다. 여느 계집애와 다르게 웃옷이 허리를 가릴 만큼 길었다. 어떤 옷은 봉선화물이나 흙물을 들여서 멋을 냈고, 심지어 베틀로 10새까지 승(升)을 돌려 옥양목처럼 산뜻하게 지어 입었다. 베 짜는 솜씨가 귀신같지만 옛날 같으면 궁둥이를 벗겨 곤장 맞을 짓이었다. 신분에 따라 승을 차이 나게 입어야 하는 것이다. 계승은 해성재 마루 밑, 댓돌 위에 흩어진 아이들의 짚신 수십 켤레를 보자 문득 애란의 얼굴이 가까이 떠올랐다. 그토록 기억나지 않았던 애란의 얼굴이. 방실방실 웃으면 눈이 휘고 뺨이 오목해졌지. 밤새 뭘 하는지 삼각형의 넓이를 계산하다가 앞에 있는 신부님에게 꾸벅꾸벅 절을 하고. 어떤 땐 잠에서 깨질 않아 집까지 업어다주었어. 계승은 손바닥을 펴고 그때 애란의 엉덩이를 받쳤던 감촉을 잠시 기억했다. 해성재 이층 방에서 함께 부르던 서양 노래가 뭐였더라. 둘이서 텅 빈 성모당에 몰래 들어가기도 했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을 네 개의 무릎 위에 놓고 "애란아 우리 혼인할까?" 입을 뗐지. 혼인을 못할 나이도 아니었다. 애란이 뭐라고 대꾸더라. "엄마가 나보고 기생 하래요." "뭐, 기생?" "내가 자꾸 재수없게 헤실헤실 웃는다면서요." 빈궁한 집에서 딸에게 밥 굶기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보내는 게 기생이었다. 잘 웃는다고 기생으로 보낸다는 건, 그러니까 흰소리일 거다.

2017-03-30 09:52:55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엄창석

계승은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아연히 앞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왜 성벽만 보였을까. 성벽은 오히려 멀리 떨어졌고 그 앞으로 일식 건물들이 오래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듯 옅은 안개에 감싸여 있었다. 철도 너머 낮은 지대로 펼쳐진 풀밭만 그대로였다. 모든 게 이전과 달랐다. 7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풀밭 저 너머에 자주 범람하던 신천이 흐르고 있을지, 이 길을 따라가면 큰시장이 나올지 의심스러웠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모두가 하행선 광무호를 타러갈 때 계승은 일행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일인 노무자 몇도 이탈하는 눈치였다. 우치타가 보이지 않아 찜찜했지만, 대구에 남겠다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마종수도 같이 대구에 남으려고 했다. 이른 아침에 철거 일을 마치고 대구정거장 옆 숙소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였다. 마종수의 바지 앞섶이 누랬다. 마종수는 아미산 기슭에서 만났던 계집애에게 욕을 퍼부었다. "궁둥이 끄덕거리는 게이샤가 더 해. 다시 오라는 거야 뭐야?" 계승은 낄낄 웃었다. "와서 바다를 메우라는 거네." 마종수는 아미산 남쪽 해변에 있는 매독병원으로 갈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일식 건물은 철도와 평행선을 이루며 줄곧 이어졌다. 각이 진 지붕과 곧은 처마를 가진 요릿집. 장방형 유리창 사이로 장마루가 깔린 고급 여관. 면포, 화로, 목도리, 장갑, 신발을 내놓은 상점들이 있었다. 한자 상호를 처마에서 늘어뜨린 가게도 보였다. 훤칠한 일식 건물 사이에 초가를 개조해 서양물품 취급점이라고 쓴 작은 가게도 군데군데 끼어서, 골목이 갑작스럽게 좁아지거나 트였다. 주인이 진열대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점포 앞을 빠져나올 때 얼핏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 계승은 뒤를 돌아보았다. 옹기장수 지게꾼과 일인 몇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지만 유별히 눈에 띄는 이는 없었다. 일식 건물이 걷히고 따개비처럼 엎드린 낮은 초가를 지났다. 초가 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흐무러진 성벽이 나타났다. 지난밤에 헐었던 곳이었다. 양편으로 성벽이 무너진 북문은 하릴없이 크게 열려있고 성 위의 누각은 더 높이 솟아, 위태롭게 보였다. 북문 우측으로 나뒹구는 돌 위에 독수리가 한 마리씩 앉아 있나 싶었다. 까맣게 더럽혀진 옷을 입은 아이들이 돌을 하나씩 차지한 채 옹크리고 앉아 늦가을 햇살을 쬐었다. 북문을 지나면서 일식 건물이 연해 나타났다. 7년 전에는 초가만 듬성듬성 있던 자리였다. 성 밖 가운데 이곳이 가장 외졌다. 지금 정거장이 들어선 칠성동과 큰시장 뒤 후동(後洞) 사이인 이곳은 예전부터 황량했다. 철도가 놓이기 전이니까. 그 무렵엔 일인 몇 사람만 대구에 왔을 뿐이었다. 철도가 놓인 건 계승이 떠나고 3년이 지나서였다. 계승은, 철도공사를 따라 수많은 인부들과 청부회사 관리들과 전신(電信) 선을 지키는 군대가 대구로 몰려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선지, 계승은 길을 걸으면서 기시감이 자꾸 들었다. 이곳이 황량했던 게 아니라 바라크 지붕과 일본 특유의 목재판벽 건물들이 7년 전에도 있지 않았을까. 벽돌로 지은 응축한 성 같은 관청까지도. 청도의 성현터널 공사장에서 나와 밀양과 언양과 양산으로 떠돌면서 이런 대구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들판에 건물이 쑥쑥 들어서고 짧은 머리카락의 사람들이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왜어가 흘러 다녔다. 아마 그럴 거야. 기차가 어디로 지나가는지 모르지만. 기차가 지나는 곳을 알게 되면 상상이 쉬울 텐데, 오히려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설마 성을 부수며 도시 중심을 통과했을까. 어릴 때의 기억은 흩어지고 상상으로 자란 풍경이 그 자리를 메웠다. 마치 익숙한 거리를 걷듯이. 초량에서 보던 일식 건물들이 원래부터 이 도시에도 있었던 것처럼. 계승은 가방에 손을 넣어 손거울을 만졌다. 초량왜관 입구에서 살 때 가슴이 설레었다. 손거울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비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그녀이길 바랐다. 애란. 도시는 상상 속에서 자랐지만 애란은 자라지 않았다. 애란은 그대로 열한 살이었다. 7년이 지났으니까 열여덟이지 않나. 약간 주저앉은 듯한 콧등, 아주 새카만 눈동자, 덧니가 조금 나온 치아와 흰 팔목에 일곱 해가 어떻게 끼쳐졌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턴지 그녀의 얼굴을 잊었다. 열한 살인 채로 흐릿해졌다. 콧등도 눈동자도 짐작할 수 없었다. 계승이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초량에는 서양 여행자들도 적잖게 눈에 띄었다. 환쟁이들이 즉석에서 그려주는 그림이 서양인들에게 인기였다. 화선지에 붓으로 그리거나 종이에 연필로 그리기도 했다. 피부가 두부처럼 흰 펠트 모자를 쓴 서양 여자가 제일은행을 배경으로 서서 환쟁이를 보고 방긋 웃었다. 계승은 종이 위에 희미하게 윤곽이 잡히는 서양 처녀의 눈과 입술과 뺨을 보다가 애란이 떠올랐다. 아 애란이 저렇게 생겼지. 그러나 흑연 심으로 겹겹이 칠하는 종이 위의 얼굴에서 애란의 모습은 지워지고, 처음부터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돼버렸다. 애란의 집은 그대로 있을까. 한번도 하지 않았던 의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집은 큰시장 뒤에 있었다. 일인이 하는 상점들은 북문에서 망경루까지 이어졌다. 망경루는 아직 무너지지 않는 상태였다. 계승이 망경루를 돌아 남쪽 큰시장 길로 접어 들 때였다. 흠칫, 하며 뒤돌아보았다. 왜 그런지 우치타가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키가 아주 작았을 뿐 우치타는 아니었다. 곱사등이 하나가 골목으로 쓰윽 몸을 숨겼다.

2017-03-28 07:51:11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4>-엄창석

바람이 불었고 달은 이울어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성벽 위 요철(凹凸) 모양의 여첩은 죄다 제거되었다. 5미터의 성벽이 절반쯤 깎여 북문 밖에 있는 일본식 여관의 바라크지붕과 높이가 비슷할 정도로 낮아졌다. 인부들이 돌을 무너뜨리고 흙을 파면서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대구를 감싼 성은 전체적으로 방패 모양을 띠고 있다. 정문이 있는 남쪽이 방패의 하단처럼 둥근 형태이고 다른 삼 면은 직선이다. 각 면마다 대문이 있고 모서리에는 적의 동태를 살피는 망루가 간소한 정자 모양이지만 높이 치솟아 있었다. 우리가 이날 밤 허무는 부분은 북문 양쪽, 그러니까 직선으로 뻗은 북면이었다. 길이는 8여백미터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계승은 북문에서 200미터쯤 서쪽에서 돌을 파내다가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저렇게 모였던지, 사람들이 성 아래로 난 길과 집 사이의 골목마다 가득 차 있었다. 어둠 속이라 분간이 어려웠지만 수백 명은 돼보였다. 계승이 아래를 가리키자 마종수가 삽으로 턱을 괴고는 "저들 중에 누군가가 청부한 사람을 살해했겠네."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관찰사가 일을 맡긴 사람이 등에 칼을 맞았다는 얘기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마종수의 말이 맞을 것이다. 범인이 저들 속에 있겠지. 그러나 거리가 멀어서겠지만 골목 사람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성 위를 지켜보기만 했다. 성 위에는 작업을 돕느라 횃불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었는데, 불빛이 닿으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아놓은 백석(白石)처럼 허옇게 보였다. 성 위는 부산했지만 성 아래는 이상한 고요가 흘렀다. 벼랑에서 돌이 떨어지면서 쿵, 쿵, 바닥이 진동할 때마다 골목도 흔들렸다. 일본 헌병들이 탄 말이 가벼운 구보를 하며 그들 앞을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고는 했다. 조금 전 자정 무렵이었다.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성 안쪽에서 허물어진 흙더미를 밟으며 성 위로 올라왔다. 그는 헤쳐지거나 더미로 쌓인 흙 위로 말발굽을 찍으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일본 헌병대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비켜라 비켜라", 소리치는 경필(警蹕)을 앞세우고 말을 몰았기 때문에 그가 경상도의 우두머니인 관찰사라는 것을 알았다. 일인들이 야마모토라 부르는 박중양이었다. 횃불을 든 한인 노비(누구의 노비인지 모른다)들이 우르르 머리를 조아렸다. 일인 노무자들은 일손을 멈추고 길을 비켰다. 박중양은 가끔씩 늠름하게 말을 세우고 "모두가 한 백성이야. 아래 초가에 돌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말이 아니라 왜어로 말했다. 일인 노무자가 대다수니까 왜어로 한 건 당연했다. 그런데, 조심하라는 건 부민에 대한 애정 때문인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박중양은 계승의 앞을 지나 서쪽 망루까지 가면서 "민나가 히도쯔노 타미다!"(모두가 한 백성이야)를 소리 높였다. 성 아래에 붙은 집이란 고작 두더지 같은 초가였다. 노비들이 사는 움막이었다. 노비들이 거처를 옮기는 게 성을 허는 어려움보다는 쉽지 않을까. 그러나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다. 박중양은 두루마기를 걸치지 않고 검은 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미리 와 있던 이토와 나카에에게 한참 뭐라 쑥덕이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이토와 나카에는 현장에 남았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성돌은 계속 허물어졌다. 일꾼들은 성 아래에 모인 군중에게 더 이상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이미 사람들도 많이 줄었다. 어떤 골목은 텅 비기까지 했다. 서너 명이 조를 이루어 돌 틈에 징을 박고 지렛대를 꽂았다. 돌이 빠지면 다른 조들이 달려들어 괭이로 흙을 팠고, 또 다른 조들이 어깨에 목도를 해서 흙을 날랐다. 민가를 피해서 떨어뜨리려고 토석을 목도로 나르는 것이다. 그 바람에 일이 제법 더뎌졌다. 그렇지만 일꾼들은 필요에 따라 한 조가 세 명이 되기도 하고 다섯으로 변하기도 하면서 능숙하게 작업을 해나갔다. 초량 바다 매립노역장에서 함께 일했기 때문에 손발이 척척 맞는지 모른다. 몸으로 하는 일이란 그렇다. 어느 때가 되면 한인인지 일인조차 구별되지 않는다. 평소의 차별도 지워진다. 물이 물에 섞이듯이 같은 노무자들이 되는 것이다. 서쪽 끝, 망경루가 지척일 때였다. 여첩은 무너뜨렸지만 여첩을 받치고 있던 성돌이 꿈쩍하지 않았다. 어찌된 건지 몇 군데에 지렛대를 꽂아도 요지부동이었다. 누군가 소를 구해와 끌어당겨보자고 했지만 소를 가진 일본 거류민들은 없을 것이다. 부민들도 소를 선선히 내줄 리가 없었다. 철도부설 때 소를 빌려간 일인들이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먹어버린 걸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감영 뒤에는 감영 진위대의 화약창고가 있었다. 야밤에 성을 철거하는데 화약창고를 지키는 한인 병사가 열쇠를 내어줄까. 나카에와 우치타와 몇몇 일인들이 모여 그런 궁리를 했다. 계승은 저들이 주고받는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느새 허물어진 성 아래로 내려가는 일군의 인부들 속에 끼어 있었다. 망경루 옆의 성 높이는 여전히 4미터였다. 여첩만 뜯긴 상태였다. 까마득히 높은 성 위에서 긴 밧줄이 떨어졌다. 사십여 명이 대오를 갖추고 밧줄을 잡았다. 성 밑에서 열 걸음 정도부터 길게 늘어섰다. 줄을 잡은 맨 뒤쪽은 일인 철물점 마당까지 들어갔다. 성 위에서 횃불로 신호를 보내자 높이 4미터에서 성돌을 껴안은 밧줄이 아래로 팽팽히 당겨졌다. 두 가닥 굵은 밧줄이 횃불 빛을 받아 캄캄한 허공에서 하얗게 그어졌다. 다시 성 위에서 횃불이 깃발처럼 움직였다. 치이영. 치이영. 힘을 쓰는 소리가 성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돌 틈에서 새들이 빠져나와 날아올랐다. 불빛에 얽힌 흰 점들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가운데서 밧줄을 잡은 계승의 손바닥이 찢어지는 듯 쓰라렸다. 선조임금 때 왜(倭)를 물리치려고 세웠고, 300년을 내려오는 동안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된 성돌이 끄떡끄떡 몸을 틀자, 그 느낌이 팽팽한 줄을 타고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이영차, 이영차, 이영차……. 거대한 성돌이 요동하면서 바로 옆 하늘로 솟아 있는 망경루가 앞으로 곧 넘어질 듯이 휘청거렸다. 동쪽 하늘이 조금 희붐했다.

2017-03-22 14:08:21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3)-엄창석

육칠십 명이나 되는 계승의 일행이 정거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정거장 좌측에 초가를 길게 이은 임시 건물이 있었다.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 때 노무자들이 쓰던 숙소였다. 계승은 그곳으로 이동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석지붕에다 목조로 벽을 세운 대구정거장. 초량에서 흔히 보았던 일본식 여관들. 길가의 작은 상점에는 어둠이 내리면서 아마도 석유등을 켜고 있을 사람들의 그림자가 창문을 빠져나와 길 위로 어룽거렸다. 이런 낯선 모습에 계승은 귀향한 실감을 전혀 갖지 못했지만, 비로소 역사 건너편에 높은 성벽이 장중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성벽을 따라가던 눈길이, 저 멀리, 원근의 차이로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긴 성벽 한가운데를 움켜잡듯이 장악하고 있는 북문(北門)에 닿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구네." 계승은 마종수의 어깨를 치며 입을 뗐다. 마종수가 맞은편 돌벽을 쳐다보았다. "니미, 어마어마하게 높네." "5미터야. 높은 데는 6미터가 넘어." 계승은 가방을 든 팔을 올려 아름을 지으며 이것이 대구부를 둘러싸고 있지, 하려다 말았다. 높이에 대한 느낌도 다른 데다 어차피 헐릴 성이었다. 양편에서 일인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걸으면서 장난을 치거나 성을 보며 짜증난 투로 씨부렁거렸다. 마주쳐오는 등짐꾼들에게 한마디씩 입을 던지기도 했고, 앞서 걷다가 떼거리를 피해 갓길로 붙는 여자들의 엉덩이를 손으로 만지기도 했지만, 시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미 일행의 앞머리가 숙소로 들어갔고 나머지도 거리에서 꼬리를 거둘 판인 것이다. 저녁은 푸짐했다. 나무 식판에 얹힌 노루고기는 막 삶아서 꺼낸 듯 김이 뭉클뭉클 올라왔고, 겉이 황금색인 양은 주전자는 주둥이에 술이 뚝뚝 흘렀다. 초량에서든 어디에서든 이 정도는 드문 식사였다. "곧 일을 시작해서 동 트기 전에 마칠 거네. 서울에서 내려오는 첫 기차가 11시에 있으니까 바로 타고 부산으로 돌아가면 돼."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왜어로 크게 말했다. 같은 기차를 타고 올라온 이토라는 사람이었다. 인부를 구하려고 부산에 왔던 두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상한 점은 이들이 일본 이사청의 관리거나 한국 관찰부에 한둘씩 있는 일본 관헌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구에 있는 일본의 민간 거류민들이었다. 계승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황제 폐하의 조정이 흔들리고 있다지만 관리도 아닌 한갓 거류민이 성을 헐 수 있을까. 성은 너절하거나 낡지도 않았다. 황제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보수와 증축을 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성곽의 돌들은 윤곽이 뚜렷했고 남쪽으로 난 제 1문의 자태는 대구부의 모든 건물 가운데 가장 기품이 있었다. 설령 헐벗었다 해도 민간이 헐 수는 없을 터였다. 소리치고 있는 이토 옆에 턱수염을 정갈하게 다듬은 중년 남자가 눈길을 끌었다. 그도 부산에 같이 내려와 인부를 구했던 사람이었다. 이 이가 나카에 고료헤였다.( 이 무렵 소점포 주인인 나카에는 훗날 조선 전체에서 제일가는 미나카이 백화점을 경영하게 된다.) 그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세심해 보이는 눈빛과 다소곳한 인상이 은근히 매력적이었다. 이토가 팔을 벌려서 무너뜨릴 성의 지점을 설명하던 중에, 우리 가운데서 하나가 술사발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다리를 저는 우치타였다. "아 우리는 바다를 메우다 왔죠. 성을 허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핫, 돌을 뜯어 밑으로 굴리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지 않느냐는 듯 주위를 보며 동조를 구했다.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쳤다. "자네 말이 맞네. 자, 잔을 비우고 성으로 가자" 이토가 손을 깃발처럼 흔들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사대문을 닫는 인정(人定) 소리였다. 대구의 인정은 밤 여덟시에 울린다. 그 소리는 대한제국이 여전히 대구를 관장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렇다면 민간인이 야간에 성을 헐 수가 없는 것이다. 둥둥, 북소리는 이 작업이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게 아니면 감영 군대(진위대)가 힘을 잃어서, 성안 사람들이 직접 북을 두드려 부민들을 불러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뭔가 잘못 된 것 같은데." 계승은 옆 사람에게 말했다. 다른 한인들도 얼굴이 붉어졌다. 한인이라면 저 북소리가 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성을 허물려던 사람이 죽었다잖아. 이러다 싸움부터 하는 거 아냐?" "니미, 싸움나면 우린 어느 편이야, 이쪽이야 저쪽이야?" 몇몇이 "한인이냐 초량이냐" 하며 낄낄 웃어젖혔다. 한인들은 불안스러웠지만 일인들도 미심쩍어하는 표정이었다. 이토와 나카에는 단호했다. 십장들을 불러서 이후의 일을 지시했다. 우리는 숙소에 딸린 창고로 가서 장비를 꺼냈다. 삽날이 달린 가래와 삼발수레, 곡괭이, 사다리, 광주리, 가마니를 육칠십 명이 들거나 맞잡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어둠에 쌓여 있었다. 노루고기와 몇 사발씩 들이킨 막걸리가 쌀쌀한 기온을 몰아냈다. 사방이 조용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용구조차 바닥에 끌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성벽을 따라 걸음을 총총 옮겼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업은 성의 북쪽 면을 허는 것이다. 곧 북문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더 짙은 어둠이 깔렸다. 누각의 지붕 끝에 이지러진 달이 걸려 있었다. 문 위로 솟은 거대한 누각은 문 앞으로 모여드는 인부들을 압도했다. 대문이 열려 있었다! 좀 전 폐문하는 북소리가 울렸지만 북문은 닫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없었고 관헌도 눈에 띄지 않았다. 휑하니 뚫린 문으로 성안의 공기가 엷게 밀려나와, 마치 우리가 성안으로 들어가면 섬멸해버리겠다는 양 어떤 음모를 감춘 것처럼 보였다. 북문으로 다가오는 한 떼의 사내들이 보게 된 것은, 우리가 성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밟고 성벽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그들은 다음 기차를 타고 온, 우리와 같은 초량에서 온 노무자들이었다. 한 기차를 타지 못했거나 기차 칸이 모자라 인원을 나누었는지 모른다. 숫자는 스무 명 남짓했다. 작은 수였지만 마치 원군이 도착한 것처럼 일꾼들은 곡괭이나 가마떼기를 흔들며 환호를 질렀다. 저들이 합류하자 이제는 성안의 사람들과 대결이라도 할 수 있는 양 기백이 넘치는 동작으로 성을 허물기 시작했다. 성곽의 두께는 8미터쯤 되었다. 성 위에서 마차를 내달릴 수 있는 넓은 폭이었다. 수비병들이 몸을 가리는 여첩이 성곽 바깥으로 세워져 있고, 여러 가지 형태의 총구를 넣는 작은 구멍(총안)과, 벽을 타고 오르는 적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끔 성벽 밖으로 돌출해놓은 치(雉)가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당시 기술력을 제대로 모아놓은 성이었다. 인부들은 여첩과 치에 정을 때려 틈을 만들었고 거기다가 긴 지렛대를 꽂았다. 두엇이 지렛대에 매달리자 돌이 꿈틀거렸다. 돌과 돌을 물고 있는 회가 떨어지고 한 아름 되는 큰 돌이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돌은 벼랑 아래,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우치타의 말처럼 흙을 파서 바다를 메우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계승은 허리를 펴고 달빛에 비치는 일꾼들을 보았다. 정을 박거나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들도 한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휴식은 일제히 시작하고 일제히 끝내는 게 일꾼의 습성이다. 여기저기서 먼저 성냥불을 그은 이에게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얻은 뒤, 여첩에 기대 앉아 담배를 피웠다. 길게 뻗은 긴 성 위에서 반딧불 같은 작은 불빛이 끝없이 반짝였다. 어릴 때가 생각났다. 몇 살이었던가. 여섯 살 때던가. 어린 우리들이 이 성 위에 올라와 연을 날린 적이 있었다. 성 위에는 정말 아무도 오를 수 없었는데 그해에는 특별했던 것 같았다. 어린 우리와 어른들까지 성 위에서 연을 띄웠고, 밤에는 쥐불놀이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해 정월대보름이었던 것 같았다. 그날도 지금처럼 성 위에서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반짝하였다. 오히려 성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별 같은 것이 땅으로 내려와 대구부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북두칠성 같은 커다란 별자리가 내려온 듯한 그 광경을 잊을 수 없다면서, 언젠가 계승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국수를 밀고 있던 어머니가 계승을 빤히 보며 웃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지."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서교인(西敎人)들을 붙잡아 처형하던 때라고 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좀 길었다. "대구에도 서교인이 셋이 있었어. 마침 성안에 머무는 걸 어떻게 알고는 포졸들이 큰문과 암문(暗門)을 모두 닫았지. 셋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독 안에 든 쥐야. 서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숨을 곳을 찾아 성벽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커다란 성돌 하나가 쑥 빠지는 거야. 벽에서 말이다. 서씨가 냉큼 돌 빠진 곳으로 뛰어들었어. 그때 빠진 돌이 슬쩍 닫혔지 뭐니. 신기하지 않아? 천주님이 도우셨네, 하고 서씨가 놀라는데 그 좁은 곳에 두 명의 신자가 미리 들어와 있더라는 거야. 그들도 이 밑을 지날 때 성돌이 입을 열어준 거지." 계승도 들은 듯했는데 잘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국수를 밀면서 "다들 아는 건데 넌 모르니?"하며 계속 얘기를 이었다. "셋은 작은 암굴에서 사흘을 굶었지만 목숨은 잃지 않았지.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남기고자 했대. 그래서 신비로운 성돌에다 조그마하게 물고기 그림을 그렸단다. 옛날 라마(羅馬, 로마)에서 신도들이 암호로 물고기를 그려서 서로 교인인 것을 알아보았다거든. 성벽에서 나온 서씨가, 훗날에 다시 와서 아무리 찾아도 자기를 살려준 성돌이 보이지 않더라는 거야. 더 신비한 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어. 서문 앞에 십자(十字) 성모성당을 지을 때 말이야, 한 일꾼이 물고기 그림이 그려진 주춧돌 하나를 발견한 거야. 서씨는 이미 고인이 되어 서씨의 조카를 불러 돌을 보여주었대. 너 서씨 조카 알지? 지금 성안에 사는 서 시찰(視察) 어른이 바로 서씨 조카야. 그러니 아주 오래전 얘기지." 계승이 대구를 떠나기 전에 들은 말이었다.

2017-03-20 13:10:42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2>-엄창석

계승도 그 까닭을 한번도 짚어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어떤 동요가 가슴에서 출렁거렸다. 사흘 전 저녁이었다. 작업을 끝내고 목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할 수 있었다. 십여 평 남짓한 욕실에서 한꺼번에 수십 명이 뒤엉켜서 하는 목욕이지만 일인들은 이 기회를 기필코 놓치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마종수가 다가와 대구에 일거리가 생겼다면서 가지 않겠느냐고 소리쳤다. 일당을 배로 쳐준다는 말보다 대구로 간다는 것에 귀가 솔깃했다. "무슨 일인데?" "글쎄 잘은 모르지만 힘들지 않대." 일인 십장이 대구로 갈 사람을 모집하려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였다. 이곳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매립공사장에 수천 명의 일인들이 있는데다 여기는 엄청난 인력 공급원이었다. 부산 시가지를 넓히게 될 매립공사장에서만 아니라 예전에 경부선 부설 공사장에서도 그랬다. 일인들은 노역을 하다가도 뛰쳐나가 밀수꾼, 상인, 화폐 위조범, 포주가 되었고, 수비대 첩자로 변신했다. 기회를 탈 수 있는 틈서리가 생기면 물처럼 빠르게 스며들었다. 목욕탕을 나서자 날이 저물었고 일인들은 휘파람을 불며 아미산 아래 유곽으로 몰려갔다. 계승도 며칠 전부터 벼루고 있었으나 그만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마종수만 일인 패들 속에 섞였다. 읍성을 무너뜨리려 간다는 걸을 알게 된 것은 이튿날이었다. 대구성을 허문다고? 순간 아연했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대구로 가기로 마음을 먹은 터라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부산 사람들이 가야하는 거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다시 기차에 오르고서였다. 기차는 검은 연기를 펑펑 뿜으며 기적을 울렸고 텅 빈 플랫폼에서 역원들이 깃발을 흔들거나 기차를 보며 거수경례를 했다. 계승은 마종수와 함께 화물칸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예닐곱 명의 한인들이 화물칸으로 건너왔다. "어이 여기도 넓네." "이 많은 편지를 누가 다 썼냐?" 그들은 일인들 사이에 있는 게 불편해서가 아니라 화물칸이 어떤지 궁금했다는 듯이 우편물 꾸러미를 자세히 뒤적이는 척하다가 바닥에 앉았다. 누군가 성냥에 불을 튕겼고 서로 머리를 맞대어 담뱃불을 얻었다. 대나무로 된 곰방대가 아니라 필터까지 있는 양식 담배였다. 한인들끼리 앉아 있는데도 이상스런 어색함이 감돌았다. 모두 묵묵히 담배를 빨거나 차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일본이 두명이 들어온 것은 청도가 멀지 않았을 때였다. 그 중 한 명이 다리를 약간 저는 듯한 우치타였다. 그는 번뜩이는 눈으로 한인들을 훑어보고는 이쪽이 알아듣든 말든 왜어를 지껄였다. 자기는 대창조(大倉組)에서 트럭을 몰고 있다면서 손을 말아 쥐고 운전하는 시늉을 하고는 우리에게 어디에 소속이 돼 있나고 물었다. 몇은 자기소개를 했고 몇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제 한 시간이면 도착하겠군." 그가 옆구리를 틀어 혁대에 달린 시계를 꺼내보이자 다들 시선이 쏠렸다. 왜어를 잘하는 마종수가 그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마종수와 내가 나누던 얘기였다. "대구에는 인부가 없어요? 굳이 부산에서 올라갈게 뭐죠?" 우치타가 회중시계에 입김을 불어 손가락 끝으로 유리를 닦으면서 말했다. "이거 시모노세키에서 산거요. 싸구려라 버릴라 했더니 시간은 잘 맞네. 1초도 안틀려. 아 그거? 음, 처음엔 관찰사가 대구 한인을 시켜 성을 헐도록 했지. 일꾼을 구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어. 며칠을 기다려보자 했는데 어느날 관찰사의 집에앞에서 등에 칼이 꽂힌 채로 발견됐다는 거야." 마종수가 우리말로 옮기는 순간 다들 놀라 움찔거렸다. 바로 알아듣는 이와 옮긴 뒤에 알아듣는 이의 차이 때문에 놀라는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것 같았다. "하핫, 겁먹을 거 없어. 우린 한밤중에 일부만 헐고 바로 내려올 거야. 복구를 못할 정도로만. 조선 조정이 케케묵은 성곽을 유지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돈이 없어 수리도 못하고 있는 판이야." 듣고 있던 한인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몇몇은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투로 차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느 공사장이든 위험은 따라다녔다. 아침에 숙소를 나갔던 인부의 수가 저녁에 절반으로 줄어들어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별거 아니다. 자신이 그 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타치가 화물칸으로 건너온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가만, 난 형씨를 어디서 본 것 같소. 부산에 오기 전에 어디 있었소?" 우치타가 눈을 번뜩이며 계승을 쏘아보았다. "나요?" "혹시 여기 청도 터널공사장에 있지 않았소?" 우치타가 손가락으로 기차 천장을 가리키며 계승을 쏘아보았다. 계승은 가슴에 쿵 소리가 나는데도 태연하게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무슨 소리요. 초량에 오기 전에 낙동강 선단을 따라 다니며 장사를 했죠."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 계승은 마종수를 슬쩍 곁눈질을 했다. 마종수는 아무것도 몰랐다. 부산 매립공사장에 와서 만난 친구일 뿐이었다. 기차가 우왕하며 터널로 들어서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차량 바깥으로 스치는 공기의 압력이 달랐다. 청도의 삼성역과 남성현역 사이에 건설된 성현터널은 경부선에서 가장 길고 난이도도 심했던, 험악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악명 높은 터널이었다. 임계승은 그 공사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기차는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기울 때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에는 나지막한 바라크 역사가 붉은 황혼을 받고 있었다. 그가 대구를 떠날 때는 없었던 정거장 건물이었다.

2017-03-15 04:55:01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1>-엄창석

내가 대구의 근대 이야기를 써보려고 처음 생각한 것은 6,7년쯤 전이다. 프랑스인 샤를 바라가 쓴 '조선기행'에서 대구읍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해놓은 부분을 읽으면서였다. 물론 어릴 때부터 대구에 살아서 동성로 서성로 북성로 같은 독특한 이름의 거리가 시내에 있고 그곳이 성을 부순 자리임을 듣긴 했지만 타국 여행자의 글에서 붕괴되기 전의 읍성 모습을 관찰한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감동을 안겨다주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부터 대구를 포함한 한국 근대와 관련된 책을 읽고 수많은 자료사진과 논문들을 뒤적이면서 문학적으로 그 시절을 탐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 시절이란 1906년과 1907년으로 대한제국이 급격히 저물어가는 때고 대구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이 발흥하던 때다. 나는 이번 소설을 구상하면서, 1907년의 대구를 '재현'하겠다는 처음의 계획에서 나아가 1907년의 대구를 '재구성'하겠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대구성의 붕괴나 국채보상운동이라는 과거 사건에 머물지 않고 그 사건의 뒷면과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마치 오늘날의 일처럼 바로 목전(目前)으로 호출하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1907년의 대구가 국채보상운동이라는 한 개별적 사건의 중심지가 아니라 더 확장된 근대적 의미를 지닌 장소이며, 더불어 그때가 어떤 측면에서 오늘날의 '거울'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서 당시의 실존인물들, 예컨대 서상돈, 김광제, 박중양, 염농산, 양기탁, 서병오 등도 변형된 인물로 재구성되어 나타난다. 물론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도 있다. 소설의 중심무대는 당연히 대구이다. 이야기는 대구성이 무너지는 1906년 늦가을부터 출발하여 국채보상운동을 거처 고종황제가 강제 하야하던 1907년 여름에서 막을 내린다. 소설의 제목은 미흡한 대로 이라고 정했다. '새'는 이상이나 꿈을 가진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저녁'은 하루 내내 날아다녔던 새가 모습을 감추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의 좌절과 고통과 어떤 위안을 상징한다. 소설은 본 매일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매주 40매 분량으로 연재하며 6개월가량 진행할 계획이다. 이제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이 그 옷자락을 거둘 때 가슴 아프면서도 역동적인 힘이 솟구치던 '1907년 대구'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야심과 좌절, 성읍이 무너지는 굉음과 북후정의 함성이 내 책상 위에서 울리는 듯하다. 감히 소망하건대, 독자 여러분들께서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새들의 저녁 - 엄창석 가져갈 것이 목장갑과 통조림 깡통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2층 다다미방 창으로 매립공사를 하고 있는 부두가 멀리 보였다. 그는 경첩이 떨어져 위태롭게 기울어진 창문을 젖히고 고개를 내밀었다. 영선산에서 해안까지 임시로 가설한 레일이 구겨진 종이에 펜으로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어지러우면서 정교하게 얽혀 있고, 토석 운반용 트롤리 수십 대가 아침해를 어슷이 받고 있었다. 그 너머 빈 돛대가 촘촘히 꽂힌 작은 어선들 주위로 괭이갈매기 떼가 날아올랐다. 역광을 받은 까만 점들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모양이 회오리바람에 검은 눈발이 나부끼는 양했다. 그가 밖을 내다보고 있는 다다미방에는 십여 명의 장정들이 지난밤에 들이마신 술 냄새를 역겹게 풍기며 아직도 잠에 빠져 있었다. 좁아터진 2층 다다미방에서 장정들과 뒤엉켜 생활한 지가 일 년이나 되었다. 문득 임계승은 자신의 나이가 많아진 것처럼 여겨졌다. 목에 가래가 끓었고 발가락마다 무좀이 흘렀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이맛살에 굵은 주름이 파인지도 몰랐다. 어딘가로 떠나기 때문에 나이가 느껴지는 게 아닐까. 게다가 가는 곳이 고향이라면 흘러간 시간과 맞닥뜨리는 일이다. 집을 떠날 때가 열일곱 살이었다. 텁수룩한 수염에 새카만 얼굴을 한 그를 보고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이게 누구야? 방물장수 아들이네. 니가 살아 있었어? 남문 벽을 따라 늘어선 크고 작은 옹기들, 십자형으로 기와를 얹은 프랑스 성모당, 달서교 아래서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며 재잘대던 계집아이들이 눈앞을 스쳤다. 그는 가방을 열고 꽁치와 새꼬막과 사슴고기 통조림을 확인했다. 어젯밤에 초량왜관 입구에 있는 상점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담배 비누 양초 빗 성냥 같은 용품들을 진열해놓은 상점이었다. 거울을 사지 않았던 게 후회되었다. 정거장에 가는 길에 들러 반으로 잘라놓은 조롱박 같은 손거울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날 아침의 일이었다. 기차는 삼량진 정거장에 진입해 있었다. 동래부 초량정거장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바깥이 부산스러웠다. 그가 탄 화물칸에는 창문이 없어 밖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삼량진은 첫 번째 급수탑이 있는 곳이었다. 기차가 대략 50킬로미터마다 증기기관을 돌릴 용수를 공급받으니까 삼량진에서는 좀 더 오래 머물 것이다. 초량에서 함께 기차에 오른 이가 예순 명이었다. 일본인이 쉰 명이고 나머지가 한국인이다. 모두 3등석 객차에 탑승했다. 계승과 마종수는 구포를 지나면서 화물칸으로 건너왔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화물칸에서 편지 꾸러미와 수화물을 등지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10월 말인데도 꽤 쌀쌀했다. 그래도 매립공사 노무자 숙소보다 춥지 않았다. 기차는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플랫폼에는 많은 이들이 나와서 북적거렸다. 서울로 가는 이들이 대다수겠지만 안동과 만주의 봉천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자도 눈에 띄었다. 차림새가 행선지를 짐작하게 했다. 승객들이 객차 밖의 플랫폼을 벗어나지 않아서 6량의 기차가 내부를 고스란히 뱉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맨 앞쪽에는 프록코트 차림의 남자들과 화사한 빛깔의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어울려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다음에는 두터운 외투를 걸친 사내들이 주변의 단풍나무를 기웃거렸고, 끝에는 희고 푸른 작업복들이 거친 음성을 주고받고 있었다. 거대한 기관 차량이 허연 김을 허공으로 내뿜었다. 둥근 몸통에서만 아니라 차량 바닥에 정밀하게 교차되어 있는 부품과 바퀴 축 안쪽에서도 김이 자옥하게 흘러나와 승객들을 사이로 번지다 사라졌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급수탑에서 물을 보내는 급수관이 기관차 꼭대기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역원들이 직접 물동이를 날랐다. 몇몇은 높은 기관차 꼭대기로 물을 올리느라 펌프질을 해댔다. 급수탑이 습격을 당했을까. 탑 내부에 있는 펌프가 고장이 난 건지도 모른다. 경부선의 마지막 공사로 부산역과 초량역 구간이 완공되고 한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달리는 중에 기차가 공격을 받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불과 일 년 반 만에 부산에서 의주까지 철길을 놓았으니 강제로 동원된 연선(沿線) 주민들의 불만이 여간 아니었다. 천리 철길을 따라 닭과 돼지가 모조리 사라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보급식량이 모자라 철길 근처의 가옥에 침입해 닭과 돼지를 다 잡아 먹었단 소리였다. 연선 주민들의 항거는 공사가 끝난 뒤로도 이어졌지만 그것은 고작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거나 레일에 돌 더미를 쌓아 운행을 방해하는 따위였다. 그딴 식으로 속상해 할 바에야 차라리 주거지를 옮겼고 자연스럽게 일인들이 연선 주변의 땅을 차지했다. 그와 동행하는 노무자들은 3등석 차량 옆에 모여 왁자하게 떠들었다. 대개가 일인이고 한인도 몇 사람 끼어 있었다. 한인들은 부산 매립공사장에서 함께 일했다는 가여운 자긍심을 띤 얼굴이었지만 잠자코 일인들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일인과 한인은 어딘지 모르게 차이가 났다. 얼굴이 더 창백하고 머리카락이 짧은 게 일인들 이지만 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구별하게 쉬운 게 옷이었는데 퍼렇게 염색한 무명옷을 늘어지게 입는 한인과 다르게 어깨선이 착 달라붙은 잠바를 입었다. 일인들은 비참한 매립공사장 생활을 마치 사치스러운 것인 양 떠벌리면서 앞쪽에 있는 장거리 여행자들에게 같은 나라 사람임을 알리려고 눈짓을 던졌으나 어림도 없었다. 화사하게 기모노를 입고 참새처럼 이마를 까닥이던 여인들이 양산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하카마하오리(일본 전통의복)를 입은 남자들은 아예 이쪽이 눈에 보이지도 않은 시늉이었다. 그럴수록 일꾼들은 비명을 지르듯이 왜어(倭語)를 소리질러서, 맨 뒤에 따로 떨어져 있던 계승에게도 들릴 판이었다. "타이코데 나제 와레와레오 요부노?" 계승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왜 대구로 가냐는 말이 솔깃 귀를 당겼다. "칸샤츠시 야마모토각카가 와타시다찌니 죠우카쿠오 도리하랏데 쿠렛또잇따." 옆에서 한 사람이 대꾸했다. 관찰사 야마모토 각하가 성을 걷어내어 달라고 우리를 초청했다는 얘기였다.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과장된 말투에 은근히 조롱기를 깔았다. 동료를 보고 하는 소린지 앞에 있는 거만한 자국인이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몹시 키가 작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어딘지 걸음거리가 약간 저는 듯했다. 기이하게 흰창이 많아서 눈이 번들거렸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가 쓰시마 출신인 우치타였다. "그건 알지. 왜 대구 사람을 쓰지 않고 부산에 있는 우리를 부르느냐고?"

2017-03-13 13:49:45

소설가 엄창석

국채보상운동 다룬 소설 '새들의 저녁' 본지 홈페이지 첫 선

매주 2회, 6개월간 연재 들어가 소설가 엄창석 원고지 20장씩 집필 "1907년 대구 재구성해 보여줄 것" 국채보상운동을 주제로 한 소설 '새들의 저녁'이 3월 13일(월)부터 6개월 동안 매일신문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연재된다. 매주 2회, 매회 20매(200자 원고지) 분량으로 연재되며, 연재가 끝난 뒤에는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확인하고, 대구시민의 나라 사랑 정신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해 11월 '국채보상운동 장편소설 작가 공모'를 실시, 소설가 엄창석 씨를 집필 작가로 선정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주권수호운동으로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천300만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자고 서상돈이 제안하면서 시작된 민족운동이다. 엄창석 작가는 "이번 소설을 구상하면서, 1907년의 대구를 '재현'하겠다는 처음의 계획에서 나아가 1907년의 대구를 '재구성'하겠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대구성의 붕괴나 국채보상운동이라는 과거 사건에 머물지 않고 그 사건의 뒷면과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마치 오늘날의 일처럼 바로 목전(目前)으로 호출하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1907년의 대구가 국채보상운동이라는 한 개별적 사건의 중심지가 아니라 더 확장된 근대적 의미를 지닌 장소이며, 더불어 그때가 어떤 측면에서 오늘날의 '거울'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고 말했다. 엄 작가는 "국채보상운동은 총칼로 외세에 저항하거나 어떤 정치적 명분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돈 문제'로 시작된 독특한 운동이다. 돈의 성질이 그렇듯, 이 운동은 당시 사람들의 일상적 삶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최하 계층을 형성했던 사람들과 가정에 갇혀 지내던 여성, 권력 변방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며 "1907년 대구는 근대 한국사회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면도(斷面圖)인 만큼 당시 대구를 복원 또는 재구성함으로써 현대의 뿌리를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소설 '새들의 저녁'에는 당시의 실존인물인 서상돈, 김광제, 박중양, 염농산, 양기탁, 서병오 등이 등장한다. 사실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도 있고, 다소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물도 있다. 소설의 중심 무대는 대구이며, 시간적 배경은 대구읍성이 무너지는 1906년 늦가을부터 국채보상운동을 거쳐 고종황제가 하야하는 1907년 여름까지다.

2017-03-13 04:5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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