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정실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폭풍이 일어난 날 /이정실

▶ 포성이 들리던 날1950년 경인년(庚寅年) 유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 햇살이 얇은 창호지 문틈을 뚫고 나의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늦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이 많고 다정하며 부지런한 봉서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어둑어둑한 새벽녘부터 안방은 물론 문지방, 대청, 부엌, 마당, 장독대 등 집안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대청소한다. 이날도 그런 대청소를 하다가 봉서와 내가 잠자고 있는 방의 툇마루를 털고 닦으면서"일어나라. 일어나라∼. 어서∼! 해가 동천에 훤하게 떴다"고 큰소리로 다정스럽게 말하다가 연달아"방문을 활짝 열고 맑은 공기로 바꿔라""꼬리 꼬리하고 퀴퀴한 총각냄새가 나지 않도록 해라"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앉았다가 봉서 어머니의 청소가 끝난 뒤에 잠자던 방을 봉서와 함께 청소했다.나는 지난해 상경해 서울성북구돈암동 전차종점부근에 살고 있는 우리 집과 친분이 두터운 집에서 두 살 연하인 그 집 외동아들 봉서와 함께 한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봉서 부모는 나의 후견인이 되어 있었다.그날은 고향에서 하숙비와 잡비 등을 보냈다는 편지에 적힌 인편을 한국은행 사택에서 만나기로 약속된 날이다. 평소에는 우체국으로 보내던 것을 이번 달은 인편으로 보낸 것이다.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 4가 전차정거장에 내렸다가 서울역으로 가는 전차를 갈아탔다. 서울역 전차정거장에서 용산구후암동에 있는 그 당시 국방부 앞을 거쳐 한국은행 사택에 갔다. 만나기로 약속해 둔 편지에 적힌 인편은 상경을 늦추어 허탕만 쳤다.돌아올 때도 갈 때처럼 국방부 앞을 지나왔다. 갈 때는 정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아 분주했다. 올 때는 갈 때와는 달리 정문 옆 출입구 한쪽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어 출입자를 제한하고 있었다. 또 갈 때는 정문 안쪽 기관총 사격대에 근무병이 없었는데 올 때는 완전무장한 두 병사가 앉아 있어 으스스했다. 그들은 언제라도 명령만 떨어지면 기관총을 사격할 태세도 갖추고 있었다.국방부 앞을 지날 때는 정오가 막 지났고 올 때는 오후 1시쯤이었다. 불과 1시간도 안 된 사이에 국방부 주변의 모습은 달라도 엄청나게 달랐다. 그곳 주변에는 녹음이 우거진 한 그루의 노송이 있었다. 그 노송 밑은 그늘져 있어 바람을 쐬러 온 주민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삼팔선에서 일어난 이번의 국군과 인민군 충돌은 보통 때와는 달리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소곤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봉서 집에 기거하고 있는 방은 한낮이 되니 통풍이 신통치 않아 무더웠다. 이웃에 사는 두 급우 준병과 종록을 만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늘진 곳에 갔다. 그곳에서 낮에 본 국방부 분위기와 그 지역 주민들이 소곤거리는 말을 들은 대로 말해 주었다. 인민군은 평소에도 남북의 경계인 남쪽 송악산 삼팔선에서 심심찮게 공격했다. 그때마다 국군은 수복하느라 가벼운 충돌이 있었다. 그들은 그 정도 충돌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그들과 함께 서울 북쪽 경계인 미아리 고개로 오르는 대로에 연결된 돈암동 전차종점 길 건너편에 살고 있는 또 다른 급우 기환이를 만나러 갔다. 그 당시는 큰길에도 횡단로 표시가 없어 누구나 자유로이 길을 건너게 되어있다. 그런 것을 그때는 육군 헌병의 수신호에 의해 건넜다.저녁노을이 지자 외출이나 휴가 중인 군인을 실은 군용트럭을 비롯해 민간트럭, 시외버스 등 각종 차량들이 헌병의 수신호에 의해 미아리 고개로 쏜살 같이 달리고 있었다. 한편, 그 고개에서 내려오고 있는 차량 속에는 부상한 장병들이 신음하는 고통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또다시 인민군이 공격한 이번 삼팔선의 충돌을 끝으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음 날 월요일, 종로구혜화동 로터리 동쪽에 있는 동성고등학교 운동장 조회 때 단상에 올라선 교장선생님은 국군이 외출이나 휴가를 간 일요일 틈을 타서 인민군이 남침을 하고 있다. 국군은 실지를 곧 회복할 것이다.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학교는 정상 수업한다. 추호도 동요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서는 인민군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국군과의 충돌보다 더한 대대적인 남침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교장선생님 말씀과는 달리 단축수업을 했다. 하교 때 학교 앞 전찻길 인도에는 간밤에 인민군에게 침공당한 경기도동두천지역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종로 쪽 인도로 걸어가고 있는 농민들이 띄엄띄엄 줄을 잇고 있었다. 그들은 시내에서 볼 수 없는 달구지를 몰고 있었다. 어떤 농민은 맨발로 핫바지의 아랫도리를 걷은 채 농기구와 봇짐을 지게에 지고 있었다.언뜻 생각나는 것은 '수도 서울도 안심할 수 있겠는가?'설마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그날이 지난 다음 날도 학교는 단축수업을 했다. 귀가한 대낮부터 봉서 집 동네는 포탄이 터지는 소리인지, 떨어지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쿠쿵∼쿵, 쿠쿵∼쿵'거리는 가느다란 소리가 미아리 고개 너머 먼 하늘에서 심심찮게 들렸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깝고 크게 들리고 있어 몹시 불안했다. 한편,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경기도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대통령 담화를 뉴스 시간마다 방송하고 있었다. 의정부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없어 그 담화는 알쏭달쏭했다. ▶ 대피하러가던 날여느 때보다 좀 일찍이 퇴근한 봉서 아버지는 정세가 신통치 않음을 지레짐작한 것인지 저녁을 빨리 끝내도록 했다. 그의 아들 봉서와 며칠 전 경북의성에서 다니러 온 나보다 한 살 연상인 봉서의 큰집 형, 주방 일을 맡고 있는 예쁘장한 아가씨, 나 등 네 명에게 남산기슭의 용산구용산동에 있는 어느 집에 있다가 총소리가 멎으면 돌아오라고 하면서 서둘러 떠나도록 했다. 봉서 부모 내외는 집을 지킨다고 했다. 용산동으로 가게 된 우리는 하루나 이틀 지나면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간단한 단봇짐을 꾸리고 봉서를 따랐다. 나는 이번 기회에 잠시 고향에 다녀올 생각을 했다.우선 우리 일행은 종로로 가기 위해 돈암동 전차종점으로 갔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밖에 되지 않았는데 떠나는 전차가 없고 도착하는 전차도 없었다. 차도에는 군인이 승차한 차량만 왕래하고 인도에는 전투복을 입은 군인이 통행인을 통제하고 있어 길거리는 썰렁했다.전찻길을 따라 종로 4가로 가려던 방향을 바꿔 둘러가기로 했다. 꼬불꼬불한 언덕이 많은 서울 성곽 외부의 성북구안암동과 동대문구창신동 비탈길을 따라 동대문 전차종점에 도착했다. 보통 때 같으면 서울역행 전차가 한참 다니는 번잡한 시간대인데 그날따라 마지막 전차가 막 떠났을 때 도착했다. 어쩔 수 없이 종로구장사동과 관수동 청계천 쪽을 거쳐 수표교로 향해 걸었다. 청계천 천변 길을 걸을 때는 밤바람을 쐬러 길가에 평상을 내 놓고 앉아 부채질을 하는 주민이 많았다. 그들은 단봇짐을 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국군과 인민군 충돌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미아리 고개 너머로 포탄이 떨어질 것 같은 요란한 폭음소리가 들려 하루나 이틀 동안 대피하러 가는 중이라 했다. 그때는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시간마다 방송하던 대통령 담화의 녹음방송은 30분마다 하고 있었다. 길가에 나와 평상에 앉아 있는 주민들은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탐탁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수표교를 건너 중구을지로와 명동, 충무로, 남대문로를 거쳐 서울역 앞 광장에 왔을 때는 봉서 집에서 떠날 때처럼 잠시 고향에 다녀오리라는 생각이 들어 봉서와 헤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될까? 하는 의구심으로 흥분됐다. 그것은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전차가 두절됐고 동대문 전차종점에서 막차를 놓쳤기 때문이다.서울역 앞 광장에서 열차표를 구입하기 위해 매표소로 갈 때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뛰다시피 걸었다. 그랬는데도 예고 없이 변경한 마지막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매표소에서 헤어지려던 봉서를 다시 따랐다. 국방부를 거쳐 간 용산고등학교까지의 도로변은 불빛이 비치고 있어 걷기에는 불편한 점이 없었다. 용산고등학교를 지났을 때부터는 꼬불꼬불하고 언덕진 남산기슭의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달도 없고 불빛도 비치지 않는 캄캄한 골목길을 무디어진 걸음으로 봉서 뒤를 따르느라 어떻게 걸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피란하러 간 집에 도착해 안내된 방에서 곤하게 잠든 자정이 지났을 무렵, 벼락 치는 굉음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들렸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위쪽 눈까풀과 아래 쪽 눈까풀이 저절로 떨어졌다 붙었다. 그와 함께 천장에는 불빛이 환하게 번쩍거리다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그 정도로 의식을 잃고 깊이 잠들었는데도 인민군은 벌써 이곳까지 점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죽음이 코앞에 닥쳐 온 것 같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데도 깊은 잠에 못 이겨 그 생각은 그때뿐 세상모르게 잠에만 폭 빠졌다. ▶ 점령당한 소식자정이 지난 깊은 밤, 골목길에서 큰소리로 횡설수설하듯 짓거리는 노파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내 아들이 살아왔다. 내 아들이 돌아왔다"고 하며 미친 듯이 말하며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한바탕 지껄였다. 자정 때 아들을 찾으러 서대문 형무소(교도소)에 갔다. 인민군 탱크가 잠겨 있는 대문을 닥치는 대로 부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보다 맨 먼저 감방으로 들어가 아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풀려난 아들은 누구나 잘 살게 하는 공산주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위해 투쟁한 '테러리스트'였다고 자랑하면서 곧 '혁명가'로 추대될 것이라고 했다.고향에서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어느 월요일, 운동장 조회시간에 교단에 올라선 좌익계로 소문난 J주번선생의 훈화가 생각났다. 그 선생은 주훈과 실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떤 이론을, 입에 거품을 물면서 거침없는 달변으로 연설을 했다. 중학교 1학년인 어린 나는 마이크 잡음이 심해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힘찬 목소리로 뭉쳐서 붉은 피를 흘릴 수 있을 때까지 '투쟁'하자는 말만 어렴풋이 들렸다. 주번선생의 투쟁과 노파의 테러리스트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공통점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폭력이 수반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날이 새면 반드시 인민군 점령지역을 벗어나 천 리나 되는 내 고향 경북포항을 걸어서라도 가리라 다짐했다.노파가 지껄이던 말 가운데는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내용도 있었다. 폭파된 순간에 한강인도교를 걸어가던 수많은 시민은 강에 떨어져 죽고 폭파가 끝난 뒤에 걸어가던 시민도 앞이 보이지 않아 수없이 죽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난 나는 피란한 집에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들리던 굉음은 국군이 후퇴하면서 예고 없이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노파의 말이 끝나고 자리를 뜨자 간밤에 집을 지키겠다던 봉서 부모님이 궁금해졌다. 봉서의 성화로 총소리가 멎었으니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때 남산기슭에는 앞이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어두운 적막이 흐르고 있는 새벽이다. 통행인이 없는 새벽, 인민군 점령지역이 된 남산기슭의 골목길을 걷는 마음은 깊은 산속의 울창한 숲 속을 걷는 것보다 더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용산고등학교 앞 네거리에 왔을 때는 날이 밝기 시작했다. 통행인이 어쩌다가 있었다. 네거리 한가운데는 하늘을 향해 두 다리를 뻗고 벌렁 드러누운 채 입가에는 붉은 피를 흘린 자국이 있는 검정색 신사복차림의 시체가 있었다. 그 시체 앞가슴에 붓글씨로 무슨 글이 씌어 있는 흰 천으로 된 어깨띠는 붉은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피 흘린 시체라 무서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벌벌 떨렸다.국방부 앞을 지나 서울역 앞으로 가는 모퉁이를 돌기 전, 주택가 맞은 쪽 남산기슭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소총에 실탄을 장전한 이십여 명의 국군이 웃옷을 벗은 채 될 대로 되라는 듯 맥없이 앉아 있었다. 식검(式劍)을 길게 빼들고 사방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웃옷을 벗은 장교는 부하들이 잠시라도 편안하게 휴식하도록 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그곳을 지나 서울역 앞 광장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나 서울 역사(驛舍)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앞서 가던 통행인 무리가 앞을 보면서 뒷걸음으로 비실비실 거리며 되돌아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누군가 서울 역사에는 상당히 많은 인민군과 마차가 있다고 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사실을 노파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소식이 새롭지 않아 그들을 해치고 서울역 광장 못 미친 대로변 상가의 인도로 걸어가서 서울 역사를 바라봤다. 역사 밖으로 전등 불빛이 보여 인민군과 마차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은 듣지 못했다.남대문시장의 중간 정도쯤 되는 남대문로에 이르렀을 때는 쏜살같이 달리던 국군 스리쿼터가 인도 쪽에 급히 정거했다. 무장한 이십여 명의 헌병이 내리더니 부리나케 시장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보니 서울 장안의 거리는 시민과 함께 인민군과 국군이 뒤죽박죽된 것 같았다.남대문시장을 지나 그 시장 가까이에는 신세계백화점이 있다. 그 백화점은 그 당시 동화(東和)백화점이었다. 동화백화점에서 충무로로 건너가는 길에는 간밤에 피란 갔던 통행인의 왕래가 극심해 난장판이었다. 그 길 한가운데는 무전기를 들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수신호를 하고 있는 순경(경찰관)이 있었다. 그는 통행인에게 인민군은 이곳까지 진입했다. 어서 안전지대로 대피하라는 말을 하면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동화백화점 앞 인도에서 충무로로 건너가려다가 그 순경의 제지로 멈칫하던 순간, '타당, 타당'하는 총소리가 한차례 들렸다.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재빨리 동화백화점 정문 쪽 외부의 네모난 굵은 기둥에 기대어 섰다. 내 뒤로 여러 명의 통행인이 줄을 서 듯 벽 쪽 쇼윈도에 붙어 섰다.총소리는 바로 멎었다.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중상을 입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 그의 아버지 등에 업혀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밖에 몇 사람의 사상자가 났는지 눈여겨보지 않아 알 수 없었다.정신을 차리니 총을 발사한 곳이 확인됐다. 남산에 진주한 인민군 탱크에서 한국은행(화폐금융박물관) 쪽을 향해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에게 발사한 기관포 소리였다. 그때 인민군의 잔인성을 보고 더 이상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 달라진 길거리한낮이 가까워지자 한강로에는 수많은 인민군 탱크가 한강인도교를 향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그 행렬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도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산기슭의 피란한 집에서 똑똑히 내려다 보였다. 탱크마다 인공기(북한기)가 꽂혀 있었다. 또 인민군 병사가 탱크 뚜껑을 얼어놓고 드나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붉은 천이나 인공기를 들고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며칠만이라도 아니 하루만이라도 시민이 서울을 벗어나 안전지대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한강인도교 폭파를 늦추고 국군이 서울 장안을 지켜주었으면 나는 고향엘 쉽게 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어 지난 밤, 걸은 것이 너무나 어굴하고 한심했다."에∼라! 모르겠다. 나의 운명…"될 대로 되라가 되어 버렸다. 내 아들이 살아왔다고 지껄이던 노파가 골목길에 다시 나타났다.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니 거리로 나와 인민군을 환영하라며 지나갔다. 노파의 말에 귀가 쏠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한강로에 행렬해 있던 탱크는 보이지 않고 아침에 볼 수 없었던 붉은 천이 집집마다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을 환영하러 골목에 나온 주민은 한 사람도 없어 노파의 말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봉서는 부모님이 걱정되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새벽처럼 재차 재촉했다. 나는 우리 같은 젊은이들이 안전할지 의심스러워 좀 더 두고 관망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봉서의 성화로 '에∼라!' 모르겠다. 죽지 않으면 산다. 한방에 잤던 셋은 '이판사판이다'하고 골목길에 나왔다. 그때 주방 일을 맡은 아가씨도 옆방에서 뒤따라 나왔다.용산고등학교 앞 네거리에는 새벽에 걸었을 때와는 달리 피란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봇짐을 진 통행인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은 네거리에서 새벽에 내가 본 시체를 알지 못한 듯 무심히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네거리에 이르기 전부터 한참 지났을 때까지 그 시체를 생각하느라 무섭고 불안했다.서울역 광장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 때는 새벽에 봤던 언덕 위에서 허탈하게 쉬고 있던 이십여 명의 국군이 아롱거렸다. 그들은 인민군 추격에 일부는 전사하고 남은 병사는 포로가 됐거나 처음부터 싸우다가 전원 장렬히 전사됐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민군에게 노출되기 전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렸을 것이라 상상했다. 남대문과 남대문시장 입구 쪽 사이에는 도로를 겸한 자그마한 노상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에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을 '남조선해방'이라 하고 찬양하는 연설장이 생겼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오년도 채 되지 않는 지금에 와서 또다시 해방이 됐다는 것은 무슨 뚱딴지와 같은 말인가? 당치 않는 소리로 들렸다. 오년 전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해방이 됐다고 동네 어른들을 따라 총칼 없는 거리를 태극기를 흔들고 '얼씨구절씨구 좋다'고 춤을 추면서 기뻐했다. 지금은 그런 점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무섭고 두려운 적막만이 흐르는 음침한 분위기가 되어 있어 그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누군가 손가락으로 연설장으로 유인하고 있어 본체만체하면 반동분자로 연행될 것 같아 참석했다.연설자는 광장에 모인 백 명 안팎의 군중들로부터 뺑 둘러싼 가운데 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화장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눈초리는 아주 매섭게 생긴 서른 미만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입고 있는 치마저고리는 언제 세탁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때가 꼬지지 배여 있는 허름한 차림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은 빗질을 하지 않은 생긴 대로 흐트러진 산발(散髮)이었다. 그런 모습을 한 그녀는 발을 광대처럼 좌우전후로 오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펄럭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여자 귀신이 복수심에서 산발한 채 캄캄한 깊은 밤중, 골목에 휙 나타난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내 곁에 있는 지지하는 극렬분자는, 그녀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새벽에 풀려난 투쟁심이 강한 여성동무라고 했다.그 당시 남북한을 자유로이 왕래하던 삼팔선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절했다. 그 이전에 인권탄압에 견디지 못한 수십 만 북한주민들이 월남(탈북)해 용산동 해방촌, 만리동 뒷산 일대. 서울역전 도동(남대문로 5가)등 여러 곳에 파란 와서 판잣집을 짓고 난민생활을 하고 있는 세칭 '삼팔따라지' 동네가 생겼다. 나는 그녀가 그런 현실을 알고 있는지 의구심이 생겼다.그녀의 연설은 남조선해방을 위해 지하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방생활을 하게 된 강인성만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내용을 반복하다가 치켜 올린 오른 손을 쳐다보면서"함께 뭉쳐서 투쟁하자~!"는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몇몇 극렬분자도 그녀처럼 오른손을 힘차게 치켜 올리면서 "옳소~!"라고 동조했다. 군중들도 그에 따르면서 박수를 쳤다. 나는 '투쟁'이란 말이 귀에 거슬려 평화스러운 기대는 물 건너 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그녀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합창했다. 또"김일성 장군 만세~!"를 선창해도 따랐다. 마이크가 없는 연설장 맨 뒤편에서 들은 나는 흉내만 내다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이 생겨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 명동과 충무로 거리남대문시장을 지나 동화백화점 정문 앞 도로로 갔다. 아침에 그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교통순경이 남산에 진주한 인민군 탱크에서 발사한 기관포 사격에 희생된 시체는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고 시민들만 웅성거렸다.길 건너 충무로 서울중앙우체국 옆길을 거쳐 명동으로 갔다. 명동과 충무로 길거리는 서울에서도 가장 번잡하다. 평소에도 통행인이 많아 몸을 비빌 정도로 북적거린다. 그런데도 길 폭이 좁아 인도와 찻길의 구별이 없다. 간밤에 엉겁결에 단봇짐을 메고 대피하러 집을 나왔던 시민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총소리가 잠잠해 지자 서둘러 되돌아가고 있어 여느 때보다도 통행인이 더 많았다. 거리 한가운데는 전투모와 야전용 군복에 나무 잎을 소복하게 꽂은 완전무장한 인민군대열이 이십여 명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줄 종대로 질서 있게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의 장총인 소련장총과 인민군따발총 총구 끝에 총검을 끼고 앞에총을 하고 있었다. 또 앞만 보고 행군하는 그들의 상체는 부동자세고 눈은 빛이 날 정도로 초롱초롱했다. 이처럼 완벽하게 훈련된 인민군 병사의 위엄은 칼날 같이 날이 선 듯 했다. 가까이에서 인민군을 처음 본 나는 국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훈련된 것 같고 무장한 장비도 우수한 느낌이 들었다.그런 인민군이 나와 반대쪽에서 행군했다. 소련장총은 총신이 길다. 인민군이 내 옆을 마주치면서 지날 때마다 나는 통행인 틈에 떠밀려 총신 끝에 낀 칼날에 찔릴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명동과 충무로 상가건물에는 외벽마다 북한의 대남선전용 벽보가 붙어 있었다. 벽의 규모가 여러 종류라 붙어있는 인쇄된 선전물도 여러 규모였다. 나는 통행인 틈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데만 정신을 몰두하느라 벽보를 유심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발짝씩 걸을 때마다 똑같은 내용의 선전물이 밀집된 건물 벽에 부착되어 있어 곁눈질만 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벽보 상단에는 인공기와 소련 국기가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부착되어 있었다. 또 인공기 밑에는 김일성 사진, 소련 국기 밑에는 스탈린 사진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남조선해방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맨 끝 하단에는 민족반역자로 지목한 십 명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었다. 첫째는 대통령이다. 그 밖에는 미군정 때 치안을 담당했던 인사, 정부수립 후 질서유지에 공헌한 인사 등이었다. 그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하고 그들을 제외한 모든 인민은 남조선해방 전선에 동참해 줄 것과 김일성 장군은 위대한 우리의 영도자라고 자랑했다.종이로 된 선전물이 대부분이었으나 그 당시 명동국립극장(국립예술극장) 같은 대형건물에는 극장 프로 간판 규격의 크기로 된 대형도 있었다. 그런 큰 선전물은 천으로 되어 있었다. 인민군은 삼팔선에서 침략한지 삼일 남짓 되고 서울을 점령한지는 한나절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는 활판으로 인쇄할 때라 4색도로 제작된 인물사진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인쇄해 두었을 것이다.그 선전물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새벽에 부착한 것으로 들어났다. 그렇게 단정하게 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착하는 장면을 봤다는 소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벽보는 북한이 먼저 남침을 시작한 확실한 증거로 확인됐다. ▶ 종로 거리간밤에 피란했던 남산기슭의 용산동 집에서 종로구장사동까지는 어저께 돈암동에서 용산동으로 피란 갈 때와 정반대로 걸었다. 장사동부터는 동대문 쪽으로 가지 않고 질러가기 위해 종로 4가 네거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네거리도 명동과 충무로처럼 통행인이 북적거리는 번화한 지역이다. 그런 지역이 그날따라 너무나 한산하고 고요했다. 훈풍이 부는 유월 마지막 주의 청명한 대낮인데도 통행인이 뜸해 음침하고 서늘한 숲 속에 어두움이 닥쳐온 것처럼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왜 그런 가 했더니 지난 새벽에 미아리 고개를 넘어 종로로 진격해 오던 인민군이 창경원(창경궁)에서 국군과의 전투를 했다. 그 전투를 거쳐 동대문경찰서(혜화경찰서)에서 순경과도 전투를 했다. 그 전투로 경찰서는 시커먼 흉물처럼 탔고 길 건너 맞은편 서울전매서(종로금은쥬얼리) 지하실도 까맣게 타버렸다. 이런 두 흉물을 본 나는 여태껏 인민군은 서울을 무혈로 점령했다는 인식을 달리 했다.초기에는 순경들이 인민군과 교전해 상당한 사상자를 낸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인민군 후속부대가 대거 도착했다. 전투할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순경들은 길 건너 전매서 지하실로 이동했다. 그러자 인민군은 전매서 지하실을 향해 집중 사격했다. 순경도 굽히지 않고 대항했다. 화가 난 인민군은 지하실 출입구, 비상구, 환기통 등에 기름을 뿌리고 가연성이 있는 물질을 쳐 넣은 다음, 불을 질러 순경은 전원 희생됐다. 그런 말을 한 피란 가지 안 했던 그곳 주민들은 공포의 불안으로 간밤은 한잠도 자지 못하고 겁에 질려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동대문경찰서를 지나 돈암동 쪽 창경원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혼자서 히죽거리거나 히히거리는 마흔 안쪽으로 보이는 여성이 있었다. 한복차림을 하고 있는 그녀의 맵시는 남루하고 엉성했다. 답답해서 고쟁이를 벗어 버린 채 네거리의 모퉁이를 재빠르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또 '느릿느릿' 걷기도 했다. 옷고름이 풀릴 듯 말 듯 하고 저고리의 앞섶이 벌렁 벌어져 한쪽 젖통이 덜렁거렸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지난 새벽에 창경원 맞은쪽 서울대학교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창경원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전투하는 총소리에 놀라 뛰쳐나오다가 미쳐버렸다는 풍문만 들렸다. 서울대학교부속병원 북쪽 끝자락에 있는 영안실 상공에는 시커먼 연기가 바람이 불지 않아 흩어지지 않고 하늘을 가로막으면서 뭉게뭉게 떠 있었다. 그 연기는 오뚝이 모양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무리를 하얀 색으로 바꾸어 놓으면 여름철의 뭉게구름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누군가 그 연기에서 품어낸 냄새는 병원에 입원했던 사망자를 비롯해 살아있는 환자 또는 간밤에 창경원과 동대문경찰서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 부상자 등을 그 영안실 뜰에서 몽땅 태운 송장냄새라고 했다.창경원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뜰에 들어서자 국군 스리쿼터가 세 대 정차해 있었다. 그 차는 타이어가 펑크 났거나 엔진 등이 손상되어 가동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중 매표소 쪽 스리쿼터 운전석 아래 땅바닥에는 군인 발목 한 개가 야전용 군화를 신은 채 떨어져 있었다. 그 발목을 본 순간, 내 발목이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불안했다.그 부상병은 걷지 못해 포로가 됐다가 이곳 영안실 뜰에서 산채로 화장됐을 것이다. 또 창경원을 지나 혜화동로터리 쪽 서울여자의과대학부속병원(명륜 아남아파트)은 인적을 볼 수 없었다. 그곳 환자도 서울대병원 영안실 뜰에서 화장됐을 것 같아 인민군의 포악한 야만성에 몸서리쳤다. 나는 다행히 화장하는 장면이 지난 다음에 그 지역을 걸었기에 무섭기는 하지만 정신은 멀쩡했다.드디어 돈암동 봉서 집에 도착했다. 간밤에 집을 지키겠다던 봉서 부모도 돈암동 전차종점 부근에서 따발총, 소련장총과 포탄 소리가 나드니 자정이 가까워 질 무렵부터 포탄이 지붕 위로 떨어질 것 같아, 무서워서 남산의 동쪽 기슭인 장충단공원 숲 속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돌아온 즉시 대문 옆 기둥에 붉은 천을 매달아 놓고 계셨다. ▶ 뒤바뀐 세상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다음 날부터 모든 직장은 올 스톱되고 학교는 언제 개교한다는 예고도 없이 자동 휴교됐다. 고향에 가려던 생각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강을 건널 수 없어 무모하게 되었고 생활비를 보냈다는 인편은 상경을 늦추어 만나지 못해 용돈마저 떨어지게 됐다. 그런 처지에 있는 나를 봉서 집에서는 봉서와 똑같이 대해 주어 다행이었다.물가는 폭등하면서 싸전은 문을 닫았다. 매달 봉급을 수령하고 말쯤 양식을 마련하는 봉서 집에서는 월말이 가까워졌으니 비축해 둔 양식이 거의 동이 난 것 같았다. 또 봉서 집에서는 인사차 다니러 왔던 봉서 큰 집 형이 꼼짝할 수 없게 되어 식구는 평소보다 한 명 늘어났다. 그런 형편이 되어 있는 봉서 집에서는 점심은 굶고 아침저녁만 두세 숟가락 정도의 쌀이 들은 멀건 죽 한 대접으로 지냈다.시청과 구청, 동사무소(주민 센터)는 인민위원회, 경찰서와 파출소(지구대)는 내무서로 바뀌었다. KBS 라디오 방송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찬양, 충성, 그리고 인민군은 남조선해방을 위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정당하다고 방송했다.미쳐 피란 가지 못한 고위직정부요원, 사회적지도자, 저명한 인사 중 일부는 연행되어 강제로 북한의 남침을 지지하는 성명을 육성으로 발표케 했다. 돈암동 인민위원에서는 그 방송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형 확성기로 내보내고 있어 할 일 없는 나는 봉서 집에서 하루 종일 싫증나도록 들었다. 중단 됐던 전차가 운행된 다음 날은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종로 쪽으로 갔다. 그곳에 간 것은 혹시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루트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시민들은 집 밖을 드나들기를 꺼리고 있어 전차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종로구원남동 네거리에서 통행인이 많을 것으로 예측된 동대문을 향해 걸었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길에는 서둘러 내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청소년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과 좌익계청년들이 합동으로 젊은 통행인을 동원한다면서 서둘러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나도 동원될 까봐 겁이 났다. 방향을 돌려 충신시장에 들어갔다.그 시장은 텅 비어 있어 선들하고 으슥했다. 또 불쾌한 화약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시장창고에서 인민재판을 하고 총살한 탄약 냄새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총살 장면이 떠올라 더욱 무서워져 얼른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지난 달 없는 캄캄한 밤, 봉서와 나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빈민들이 밀집해 있는 꼬불꼬불한 창신동 언덕진 골목길을 봉서 어머니를 따라 어떤 싸전을 찾아갔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위해 내놔라 하고 있어 골목은 어수선 했다. 찾아간 싸전 주인은 봉서 어머니의 귓속말을 듣고서는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쉿∼!"하면서 봉서와 나를 점방 안으로 불러 들였다.잠시 후 인적이 없는 틈을 타서 우리 일행에게 숨겨 놓은 쌀을 대두로 한 말 남짓씩 쌀자루에 담아주었다. 그 쌀자루를 어깨에 메고 되돌아오는 길에 내놔라 뒤지고 다니는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숨찬 걸음으로 헐레벌떡거리면서 봉서 집으로 걸어왔다.그날이 지난 후의 양식은 봉서 어머니가 주방 일을 맡은 아가씨와 함께 경기도광주에 가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동대문 전차종점까지는 전차로, 그곳에서 뚝섬까지는 기동차를 이용했다. 그 다음은 폭파된 광진교 가까이에 있는 광나루 나루터로 걸었다. 그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그곳부터 광주까지 걸어가서 각자 대두로 두 말 정도의 쌀과 야채 등을 머리에 이고 돌아왔다. 이른 새벽, 집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봉서, 그의 큰집 형과 나 등을 동행하지 않는 것은 도중에 좌익계단체에 동원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 인민위원회 회의7월 초순 어느 날, 각 세대마다 한 명씩 돈암동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가 왔다. 봉서 아버지는 어느 누구를 지명하지 않고 있어 불참할 것 같았다. 반동분자 집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 같아 내가 회의 도중에 참석했다. 회의는 인민위원회 마당에서 몇 인민위원이 번갈아가면서 북한의 남조선해방은 당연하다는 연설만 했다.지지자가 박수를 치면서 "옳소∼!"라 하면 동원된 참석자는 덩 달았다. 그렇게 하면 회의내용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회의한 모든 결의는 그렇게 한다는 것에 실망했다. 마지막 연설은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의 어린이가 했다. 원고 없이 달변으로 말한 그 연설은 막힌 점이 없어 신통했다. 그 연설의 마지막에는 '모든 애국청년은 인민의용군에 지원해 참전하자'고 했다. 그것은 어린이를 동원한 얄팍한 수작이라 생각됐다.연설을 들으니 금년 8월15일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던 전선이 심각해진 것 같았다. 어린이는 연단을 내려오면서 자진해서 인민의용군에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에 따라 인민의용군에 지원하겠다고 연단 쪽으로 나가고 있는 청중은 7∼8명이었다. 그중 3명은 멈칫거리다가 지원했다.나보다 한두 살 위로 보이는 누군가 다가와서"동무는 인민의용군에 지원할 뜻이 없는가?"라는 투로 말을 걸었다. 갑자기 질의를 받은 것이라 멈칫하다가 좀 시간을 두고 생각한 다음에 집에서 동의를 얻겠다고 응답했다."동무는 아직 교양이 부족하다""교양이 풍부해지면 스스로 지원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청소년에게 접근했다.의용군에 입대하겠다고 지원한 7∼8명 중 멈칫거리다가 지원한 3명만 별도로 분류하고 있어 정식 지원한 것이고 다른 일부는 각본에 의해 형식적으로 지원한 것이라 생각됐다. 멈칫거리다가 지원한 3명은 아무런 연고 없이 지방에서 상경한 하숙생일 것이다.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인민의용군에 입대해 굶주림을 모면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봉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나는 것은 나에게 다가와서 말한 '교양이 풍부해지면…?'이란 뜻에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인민의용군 지원을 강요하기 위한 강제성을 수준 높인 얄팍한 용어일 것이라 생각됐다.인민군이 남침을 시작한 초기와는 달리 국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인민군은 국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침략자 편에 지원해 동족을 상대하여 싸우는 것은 어떠한 경우도 용납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더구나 아무리 부강한 국가라도 인권을 무시하는 일당체제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국가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인민의용군에 지원하라는 권유를 거절했다는 것을 봉서 부모님께 말했다. 봉서 부모는 '좋다. 나쁘다'는 말은 없고 앞으로는 어떤 회의에도 참석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그 말씀은 내가 판단한 것을 잘했다는 격려를 조심해서 말한 것 같았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직장인은 소속 직장에 복귀하라고 독려했다. 경성전기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 본사 행정직 사원인 삼십대 후반의 봉서 아버지는 직장에 복귀했다. 덩달아 나도 등교해 봤다. 선생님과 사무직원은 없고 본교생은 뜸했다. 낯선 청년과 학생이 들랑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좌익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새벽, 종교철학을 강의한 정진구 신부님이 학교에서 인민군에게 연행되어 교문 앞 혜화동로터리 한가운데 분수대에서 총살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시신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서울대병원 영안실 뜰에서 화장되었으리라 가상해보니 몸서리쳐 서둘러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돈암동 인민위원회와 성북내무서는 집집마다 라디오 성능을 조사했다. 성능이 4구 이상은 인민위원회나 내무서에 보관토록 했다. 성능이 4구 이상은 남한방송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을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봉서 집 라디오 성능은 4구다. 발각되어 반동으로 낙인이 찍히게 될지라도 3구라고 신고했다. 봉서 부모는 그렇게 신고하고 몰래 남한방송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 폭격된 용산역 동원7월 10일쯤, 유엔군 제트전투기가 수시로 북녘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그 전투기는 처음으로 개발한 최신무기다. 귀가 쨍하도록 쌕쌕거리는 굉음은 천둥치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하늘을 쳐다보려는 눈 깜작할 사이, 그 전투기는 북녘 하늘의 창공을 뚫고 사라져 버리고 비행했던 하얀 줄무늬 흔적만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그런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목적은 알 수 없었으나 혹시 북한의 인민군 후속 병력과 군수품 수송 등을 차단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으로 봐서 유엔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확인됐다. 앞으로 어떠한 수난을 겪더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인민군 점령지역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이 솟아났다.그런 날이 며칠 연속되다가 여러 편대의 유엔군 폭격기가 서울 상공을 회전하면서 어떤 지역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창공에서 떨어뜨린 수많은 폭탄은 말똥처럼 뚝뚝 떨어지면서 '콰∼쾅쾅'거리는 맹렬한 폭음소리를 내는 순간부터 하늘을 검은 연기로 시커멓게 물들게 했다. 그 위치는 용산역과 그 주변인 것 같았다. 자세한 위치를 몰랐던 것은 내가 있는 돈암동과 폭격한 위치가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다.다음 날은 더 많은 유엔군 폭격기가 그 지역을 재차 폭격했다. 연달아 이틀 동안 폭격이 끝난 저녁노을이 들 무렵, 돈암동인민위원회에서는 폭격당한 곳에 구명과 소화 작업을 할 인력을 각 세대마다 한 명씩 동원했다. 그 경우는 지난 번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라는 성격과 다르고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봉서 집 몫으로 내가 자원했다. 거주지역마다 동원된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인솔되어 도착한 목적지는 돈암동에서 예상한 대로 용산역과 그 주변이었다.유엔군 폭격기는 용산역과 그 주변에 있는 기관고(機關庫), 조폐공사(造幣公社) 등을 폭격했다. 배치된 장소는 화염에 싸여 있는 조폐공사 창고였다. 그 창고에는 화폐제작용 특수종이가 불타고 있거나 연기만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용산역 기관차 급수탑에서 여성들이 날라다 준 양동이에 담긴 물을, 타고 있는 종이 더미를 향해 정신없이 던졌다.이틀 동안 폭격당한 불은 양동이에 담긴 물을 쉴 틈 없이 던지고 던져도 꺼지지 않고 더 활활 탔다. 불씨가 잡히면 활활 타던 종이 더미가 내 몸을 향해 머리 위로 확 덮쳤다. 그때는 이리 비키고 저리 피하면서 불을 껐다. 그런데도 앞뒤와 좌우에서 꺼졌던 불이 되살아나 순식간에 불바다를 이룬 적도 있었다. 불길은 새벽녘에 겨우 잡혔다. 그래도 종이 더미를 휘저으면 불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런 곳을 깊숙이 들어가 불을 끄던 중 날라다 준 양동이가 보이지 않아 창고 밖으로 나와 보니 아무도 없고 날은 훤하게 밝았다.집으로 오려던 순간, 몸이 웅크려지면서 전율이 일어났다. 밤새도록 소화 작업을 했던 가까이에는 불에 타서 살갗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하얀 해골과 뼈만 쌓아 둔 무더기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악!, 억!"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면서 몸서리쳐졌다. 해골은 모두 두 눈알이 빠진 채 전쟁을 원망하고 비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원망과 비관은 구천에 가서도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됐다.유엔군 폭격기가 용산역 영내의 기관고와 이웃에 있는 조폐공사 등을 폭격한 원인이 들어났다. 인민군과 인민위원회는 점령한 지역의 각종 시설을 활용했다. 그중 용산역 영내 기관고에는 많은 기관차가 있다.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철교 이용은 불가능하지만 북한에 있는 상비병이나 군수물자 등을 서울까지라도 수송하려는 것을 유엔군은 단절시키려고 기관고를 폭파한 것 같았다. 또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민족애국청년단. 여성동맹 등 좌익계단체와 공공기관 운영, 시민들이 남조선해방에 대한 협조 등을 위해 한국은행 화폐를 마구 발행하고 남발했다. 그로 인해 물가는 폭등하고 화폐가치는 떨어지며 민심은 흉흉해졌다. 유엔군은 더 이상 화폐를 발행하지 못하도록 조폐공사를 폭격한 것 같았다. ▶ 연행과 탈출친하게 지낸 고향 친구의 집을 찾아가면 한 끼라도 푸짐하게 음식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작은 누나와 절친한 친구의 결혼한 언니는 나를 만나면 친동생처럼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 집은 서대문구충정로에 있고 생활이 넉넉하다. 양식은 농촌에서 철마다 조달되고 있어 사서 먹지 않는 가정이다. 돈암동에서 그 집까지 왕복하려면 한나절은 걸린다.최근에는 기회가 잡히지 않다가 전쟁이 일어났다. 차라리 지금처럼 빈둥빈둥 놀고 있을 때, 그녀의 언니를 찾아보고 이 난리 통에도 피란 가지 않고 있으면 만나서 고독을 달래는 동안 차려 놓은 한 끼의 밥이라도 푸짐하게 먹으면 일시적이나마 배가 부를 것이라 생각했다.7월 하순이 된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그녀의 언니를 만나러 충정로를 향해 무심코 걸었다. 종로구안국동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좌익계청년들이 나의 발걸음을 제지시켰다. 그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남조선해방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긍정할 수 없어 침묵으로 대했더니 나를 '교양이 풍부'한 것으로 간주했다. 먼저 제지를 받고 대기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함께 종로구수송동의 수송초등학교에 수용됐다. 다음 날 오전 11시쯤, 소속 대열이 정해졌다. 그때까지 허기를 참고 있다가 얼금얼금 짜 놓은 긴 판자 위에 가지런히 얹어 놓은 주먹밥을 왼팔에 완장을 찬 여성동무로부터 한 사람당 한 덩이씩 배당받았다. 그 판자는 교실 밖에 별채로 지은 변소(화장실)에 갈 때, 밟고 다니는 발판이었다. 한여름 더위에 바짝 마른 발판을 걸레질만 슬쩍 훔친 인분은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 발판을 보고서는 그 위에 올려놓은 주먹밥에 손이 가지 않았다. 옆에 있는 연행된 동료들은 배당받은 주먹밥을 굶주린 이리처럼 단숨에 먹어버렸다. 그 꼴을 본 나도 시장기에만 몰두되어 순식간에 먹었다. 그것도 한 덩이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밤이 되자 수송초등학교에 수용된 동료들은 덕수궁 돌담을 따라 종로구정동에 있는 배재고등학교로 이동했다.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수많은 동료와 함께 배정 받은 교실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 아침, 연행된 동료들은 인민군이 인수할 때까지 이곳에 수용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민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인수해 갈 때까지 며칠이 걸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연행된 동료들이 잡념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전원 운동장에 집합시켰다.운동장 단상에는 마이크를 장치해 두고 밧줄로 포박한 삼십 안팎으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을 세웠다. 인민위원회에서는 포박한 청년의 성명과 거주지, 나이, 직업 등 신분은 알리지 않고 미리 쪽지에 적은 죄질을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었다. 읽던 구절이 멈추어질 때마다 운동장에 연행된 동료들은 우레와 같은 "옳소∼!"소리와 함께 박수를 쳤다.포박된 청년의 죄는 좌익계애국청년을 연행한 일, 뇌물을 받은 일, 계집질을 한 일, 빌린 돈을 갚지 않은 일, 첩을 둔 일 등이었다. 단상에 포박된 청년에게는 한 마디도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아 그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운동장에 연행된 동료들의 옳소 소리와 박수 치는 소리는 그의 비행과 범죄를 심판하는 절차다. 변명이나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없고 나올 기회도 주지 않아 동료들은 조목마다 만장일치로 찬성한 것이다. 마지막으로"사형을 하자∼!"는 말에 더 큰 우레와 같은 옳소 소리와 박수로 동의했다. 어느 누군가 그것을 '인민재판'이라 했다. 인민재판은 그들이 만든 각본대로 처벌하는 재판이었다. 법률적인 지식이나 상식이 없는 강제로 연행된 동료가 판결한 것이다. 그날따라 인민재판을 하게 된 것은 앞으로 어느 누구도 불만과 불복하면 이같이 처벌한다는 으름장인 것 같았다. 앞이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그날 밤, 수용된 교실 바닥에 옷도 벗지 않고 누운 채 낮에 있었던 인민재판의 광경이 떠올라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운동장 단상에서 인민재판을 받은 청년은 벌써 시체로 변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그는 억울함을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원망만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옆에 누워 있던 몇 살 위로 보이는 키 크고 날씬한 동료가 혼자서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소리로 "도망쳐야지∼!"라는 말을 한 순간, 그의 발가락 끝이 나의 장딴지를 긁적거렸다. 캄캄한 밤중에 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의견을 슬그머니 손잡고 동의했다. 순찰하는 감시가 소홀한 자정쯤, 슬그머니 잠자리를 빠져나와 변소에 가는 체 하고 운동장의 한쪽 귀퉁이 벽돌담 밑에서 그를 만났다. 담 높이가 높아 발판이나 사다리 없이 혼자서는 넘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양어깨를 두 발바닥으로 짚고 담 위로 올랐다. 한쪽 다리는 담 밖으로, 다른 쪽은 담 안으로 덜렁거린 채 펑퍼지게 앉아 그의 오른쪽 손을 양쪽 손으로 꼭 잡고 힘차게 당겼다. 그는 순식간에 담 위에 올라앉았다. 담 위에 올라앉은 우리 둘은 담 밖을 내려갈 때는 숨을 죽이고 운동장 외벽에 손바닥과 배를 바짝 붙여 수직으로 미끄럼 타듯 했다.콩알만큼 작아진 뛰는 가슴은 오랫동안 숨차게 했다. 숨찬 소리를 멈추게 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한밤중의 숨소리는 보통 때보다도 크게 들린다. 혹시 순찰 다니는 감시원이 숨소리를 듣고 의심을 품으면 또다시 연행된다. 숨을 죽인 채 그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수신호로 헤어졌다. 헤어지고서도 통행인을 피하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봉서 집에 돌아 왔을 때는 훤한 아침이었다. ▶ 작심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지나도 국군이 수복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고향을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가야 한다. 가다가 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 죽어도 동족을 살상하고 침략하는 인민군 행위에 협력자가 안 되는 것이 떳떳하다. 봉서 어머니가 양식을 조달하러 광주로 갈 때, 광나루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도강한 코스로 서울을 떠나기로 작심했다.뜻이 맞고 마음에 드는 동행할 고향친구를 규합해야 한다.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을 찾아가야만 상의할 수 있다. 도중에 좌익계청년에게 연행되지 않는 묘책이 필요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금까지 상황을 내 나름대로 참작했다. 아침저녁과 전차 속, 번화한 길거리는 연행하지 않고 한적한 골목에서만 연행한다. 친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이 골목에 있으면 반드시 앞서가는 젊은 남성 통행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좌익계청년이 골목에 나타나 앞서 가는 통행인을 연행하려 설득할 때 뒤 따르던 나는 번화한 도로로 도망칠 여유를 갖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동기생 규태는 그의 누님 집이 있는 종로구효자동에 거주하고 있다. 효자동 전차종점은 전차에서 내리면 오른쪽은 경복궁의 높은 담이 있어 통행인이 뜸하고, 반대쪽은 꼬불꼬불한 좁은 골목길이 많은 고전적인 한옥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그러나 비교적 한산하다. 또 전차종점의 북쪽 자하문 밖은 북한산이 막고 있다. 그런 특징이 있어 다른 정거장에 비교하면 하차하는 승객이 적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만나러 갔다.규태를 만나러 전차종점에서 내릴 때, 좌익계청년과 학생이 나보다 먼저 내린 학생들을 연행하고 있었다. 그중 한 청년이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 순간 '걸렸다'는 생각이 들어 앞서 내린 학생 뒤를 따르는 척하다가 부리나케 효자동 골목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단거리 선수처럼 달리면서 뒤 따라 오는 좌익계 청년과 학생을 따돌리고 반대쪽 통의동 큰길로 도망쳤다. 그 길을 따라 통행인이 많은 체부동, 내자동, 내수동 큰 길을 거쳐 번화한 광화문전차정거장에 갔다. 그 정거장에서 우연히 고향 친구 호진을 만났다. 그와 함께 고향에 갈 것을 약속받았다. 또 내가 거주하고 있는 봉서 집 동네와 이웃한 안암동에는 고향 동기생 영구가 거주하고 있다. 그를 한밤중에 찾아가 동행할 것을 약속했다.이들과 약속했을 때의 풍문은, 인민군은 추풍령과 문경새재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고향에 도착하기 전, 인민군은 내 고향을 진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 봉서 집 가족과의 작별8월1일 오전, 간편한 피란민 차림으로 단봇짐을 지고 정들었던 봉서와 그의 큰 집 형과 헤어지고 안채로 통하는 대청 앞 디딤돌 위에 서서"아주머니 ! 안녕히 계십시오. 고향으로 갑니다"고 하직 인사를 퉁명스럽게 했다. 직장에 출근 중인 봉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도 표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전쟁이 끝나면 다시 오겠습니다"고 하자, 봉서 어머니는 안방에서 듣다가 깜짝 놀라면서 황급히 앞마당에 맨발로 내려 오셨다. 무뚝뚝한 나의 얼굴을 보고 의아스러운 표정으로"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는가?"고 하셨다. 차편이 없어 뜻이 맞는 고향친구 호진과 영구와 함께 걸어서 간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정이 담뿍 들었던 봉서 어머니는 나의 오른쪽 손바닥과 팔목 사이를 두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굶어도 같이 굶고 죽어도 같이 죽자 !"면서 눈물을 훔쳤다. 나도 그 고마움과 앞으로의 두려움이 겹친 눈물이 한꺼번에 흘러 얼굴을 흠뻑 적셨다. 헤어지는 마지막 작별인사 때 봉서 어머니는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뒤로 제대로 된 식사를 차려주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영구 집에서 만난 우리 셋은 경기도광주와 이천, 충북충주, 경북안동 등으로 걸어갈 계획을 세우고 하루 지난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해 광나루 나루터에 갔다. 그 나루터에는 먼저 온 수많은 시민들이 무거운 봇짐을 지고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었다.인민군은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선전한지 한 달을 넘겼다. 그런데도 시민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피란 가느라 좌왕우왕하는 모습을 보고 만감이 교차하면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서울을 떠났다. 그날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엿새 된 날이었다. ※ [참고] 국군이 서울을 9⦁28수복하자 봉서 집 가족도 그의 고향 경북의성으로 피란 갔다. 피란 가던 중, 봉서 부모는 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으로 파괴된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만난 자리에서 내가 서울을 떠난 뒤, 봉서 아버지는 성북내무서로 두 차례 출두했다. 두 번째 출두했을 때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라 짐작했는데 다행히 담당 조사원이 급성맹장염으로 부재중이었다. 다시 출두하게 되면 귀가할 수 없게 될 것 같아 감시가 소홀한 캄캄한 깊은 밤중에 가족과 함께 집을 나와 광주지역 산속에 피신해 죽음을 모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찍이 고향으로 내려간 나의 용단이 재치 있는 판단이었다고 말씀하셨다. ※

2019-08-08 18:14:13

김점식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비륵땅/ 김점식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산을 깎아 만든 논이 있었다. 그 논은 원체 박토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다. 애쓴 보람도 없이 너무 흉작이라 수확을 포기하고 갈아엎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던 그 시절, 곡식을 갈아엎는 일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하지만 갈아엎을 수 없는 땅이 있다. 돌도 아니고 흙도 아닌 비륵땅은 쟁기로도 갈 수가 없다. 삽 끝도 들어가지 않으니 곡괭이로 조금씩 파내야 한다. 이런 땅은 객토를 해야 한다. 객토란 산성화되었거나 질 나쁜 토양 위에, 다른 곳에서 양질의 흙을 가져다 넣어 땅의 힘을 상승시켜주는 작업이다.내 삶의 땅이 바로 그런 비륵땅과 같았다. 혹독한 가난 속에 아버지는 내가 말을 배우기도 전에 원인 모를 병환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한국전쟁과 가난으로 점철된 시대에 살아남기도 힘들었던 때라, 나보다 다섯 살 위인 누님은 초등학교 입학도 못 했다. 다행히 나는 제 나이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누구나 살아가는 형편이 똑같은 줄만 알았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우리 집이 몹시 가난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내 옷에서는 가난이 뚝뚝 흘러내렸고 월사금을 제때 못 내는 때가 많았다. 참고서는 물론 없었고 방학 때면 혼자서 공부하도록 엮은 방학책 살 돈도 내지 못했다.이런 가난한 환경 속에서 나는 물만 먹고도 쑥쑥 자라는 콩나물처럼 무럭무럭 자라서,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크고 힘도 셌다. 하지만 늘 기가 죽어있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몹시 가난하기까지 하여 기댈 언덕이 없으니 그리되었다. 아이들은 이런 나를'가우'라고 놀렸다. 가우란,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정신지체 장애자의 이름이었다.내 나이 열세 살 되던 해, 형님이 원인 모를 무릎 통증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형님이 사용하던 지겟다리를 내 키에 맞춰 톱으로 잘라 짊어지고 하루에 두 차례씩 땔 나무를 하러 다녔다.열여섯 살이 되던 어느 날, 지게를 짊어지고 가다가 학교 가는 동무를 만났다. 교복을 멋있게 차려입은 동무 앞에,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서 있는 내 처지가 참으로 처량하게 느껴졌다. 동무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싱겁게 대답하고 헤어졌다. 이때 나는 평생을 이렇게 남을 부러워하면서 살아가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그래도 당장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해 와야 할 처지인지라, 애써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고 이십 리쯤 되는 먼 산으로 갔다. 그곳은 워낙 산세가 험하여 어른들도 가기 꺼리는 삼박골이라고 하는 곳이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하늘밖에 안 보이고, 혼자 있으면 적막 속에 공포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날따라 꿩과 산비둘기 우는소리가 유난히 구슬프게 들렸다. 그중에서 뻐꾹새의 피를 토하는 듯한 울음소리는 깊은 산골짝을 채우고도 넘쳐서 메아리가 되어 내 가슴속을 울렸다.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땔감을 모았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나무 한 짐이 다 되었다. 이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높은 산을 오를 일이 걱정이었다. 집으로 가려면 꼬불꼬불 경사가 심한 높은 산 고개를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산세가 험하고 가팔라서 맨몸으로도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꼭두마리재'라고 불리는 곳이다.시간이 넉넉하여 지붕처럼 생긴 너럭바위 아래 누워 잠시 쉬었다. 무심코 위를 쳐다보니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틈을 뚫고 나와 옆으로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 나무를 보고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도 절망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그중에서 사람만이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도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계모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친척 형님이 도시로 나가 크게 성공한 것을 보고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나도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출을 결심했다. 무작정 상경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농촌 현대화를 위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다음 날, 4월 23일 내 삶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부스럼 딱지처럼 덕지덕지 붙은 가난의 딱지를 떼어버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농사일밖에 모르는 시골 무지렁이가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선 먹고 잠잘 곳이 급했던 터라 처음 시작한 일은 전기다리미 외판원이었다. 부지런함을 무기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물건이 팔리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가격조차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판매 실적이 좋지 않아 6개월 만에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당장 오고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처럼 나의 남루한 꿈은 도시의 뒷골목에서 사그라들어 갔다.새로운 살길을 찾아 헤매던 중, 마침 석유풍로를 수리하러 다니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석유풍로 수리공은 몇 가지 간단한 공구와 심지만 있으면 되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그 일을 시작했다. 당시 나에게 창피하다거나 고생스럽다는 말은 사치였다. 끼니를 굶지 않고 밤에 잠자리를 구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평소에 석유풍로를 사용해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고장 난 물건을 고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수리하다가 잘못 만져서 오히려 더 큰 고장을 내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경험과 기술을 쌓아갔다.그해 겨울은 평균 기온이 영하 10도였으며, 몇십 년 만의 강추위라고 했다. 한동안은 영하 15도를 넘는 날씨가 계속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많은 겨울을 겪어왔지만, 내 기억에는 그해 겨울보다 더 추웠던 때는 없었다. 하지만 날씨가 추운 날일수록 값비싼 석유난로를 고치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더욱 부지런히 돌아다녔다.물러설 곳 없는 나는 바위에 정(釘)을 대고 쇠망치로 쪼아가는 석수장이처럼 내일을 만들어갔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밥값도 교통비도 아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일 년 만에 전세방을 얻을 수가 있었다.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저택이라도 장만한 것처럼 기뻤다. 이젠 나도 서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치 양어깨에 날개라도 단 듯한 기분이 들었다.여기서 용기를 얻어 더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내 나이 스물일곱 살 되던 해에, 방문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원체 적은 자본금으로 시작한 탓에 3개월 만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제품을 외상으로 공급해주는 업체를 만나 큰고비를 넘겼다. 그때부터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창의력과 실용성이 돋보이는 아이디어 상품을 취급했다. 그러자 판매 실력이 뛰어난 영업사원들이 찾아왔다. 덕분에 관련 업계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많은 매출을 올렸다.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최악의 경제 불황 속에서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덕분에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대지 42평의 단독 주택을 마련했다. 고급 주택은 아니었으나 방이 다섯 개나 되는 그 집이 나에게는 궁궐처럼 느껴졌다. 집을 산 후 제일 먼저 문패를 만들어 대문 오른쪽 위에 붙이고 나서 가슴이 뭉클했다. 내 집을 가졌다는 사실이 꿈만 같아서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기 권리증을 몇 번씩 꺼내놓고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 종점에서 우리 집까지 몇 발자국이나 되는지 세어보기까지 했다.이에 힘입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남이 만들어 놓은 상품만 판매하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여 보람과 가치를 함께 느끼고 싶었다. 그렇지만 기술도 경험도 없으니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처음 생산을 계획한 제품은 무선전축이었다. 녹음기 방문판매를 하면서 무선 마이크를 끼워 주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그러나 기술도 경험도 없이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제조업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생산시설을 갖추는 일이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갖추기란 무리였다. 차선책으로 내가 구상하고 있는 제품의 디자인과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위탁 생산하기로 했다.그 시절에는 라디오도 없는 가정이 많았다. 전축도 대부분 턴테이블에 LP 음반으로만 음악을 들어오다가, 8트랙 테이프를 사용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직 스테레오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납품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이런저런 핑계로 자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사업을 성공시키려면 서로 의견을 존중하고 뜻을 모아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시장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고, 나는 생산기술이 없어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실랑이를 했다.우여곡절 끝에 제품이 출고되었다. 그 당시 천일사 별표전축과 성우전자 독수리표(쉐이코)전축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였다. 한창 음향기기 붐이 확산되고 있던 때라 무선전축이 출고되면 대박이 날 줄 알았다. 하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낮고, 경험 부족으로 거래처 확보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1977년 7월부터 정부에서 부가가치세법을 실시하여 시장 경기마저 얼어붙었다.사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결국 사업을 접고, 32세 되던 해 변두리 재래시장에 그릇가게를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내가 가게를 보고 있으면 장사가 잘 안되었다. 아내가 있을 때는 물건을 사 가는데 나 혼자만 있으면 가격만 묻고 돌아갔다. 심지어는 가게 안을 빠끔히 들여다보고 그냥 가버리는 손님까지 있었다. 내가 아내보다 장사 경험도 더 많고 상품에 대한 설명도 잘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온종일 좁은 공간에 있으려니 답답하고 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디기 힘들었다.점포 장사는 단골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친절과 미소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좋은 물건을 싸게 판매해야 한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손님이 멀어지고, 손님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경영이 어려웠다. 이익을 적게 보고 많이 판매한다는 뜻으로 박리다매(薄利多賣)라는 말도 있지만, 오늘 손님이 내일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다. 또 언제까지 적자운영을 하면,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그런 전략을 쓰기도 쉽지 않았다.장사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신용을 파는 것이라는 말처럼, 신용을 쌓기 위해 좋은 품질만을 고집했다. 그렇지만 상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소비자는 품질의 우수성을 몰라보고 무조건 가격만 따졌다. 반대로 가격이 싼 제품은 그만큼 품질이 낮아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을 수가 없었다.예상했던 것보다 장사가 안되어 가전제품과 생활용품 등, 품목을 바꿔봤지만 현상 유지도 어려웠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첫째 딸이 태어났다. 나도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고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는 딸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흔들었다. 하지만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 사채를 얻어 녹음기 방문 판매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마저 기대했던 만큼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생산업체를 찾아가서 특성이 있는 제품을 주문 생산하기로 했다. 다른 제품과 차별화하여 영업사원들이 판매에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새로운 기능은 경음악에 맞춰 마이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LED 불빛이 소리의 진동에 따라 반짝반짝 빛을 발사하도록 했다. 여기에 에코 기능까지 추가하여 가라오케라고 판매했다.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소비자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러자 다른 업체에서 근무하던 판매원들이 스스로 찾아들었다. 판매 실력이 뛰어난 외무 사원들 덕분에 2년 만에 다시 집을 장만했다. 버스 종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작은 점포까지 있는 건물이었다. 내 실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남의 능력을 끌어다 목표를 달성 한 셈이다.하지만 방문 판매업은 참으로 힘든 사업이었다. 외판원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 대부분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청소년들이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 장사 경험도 없는 사람들에게 판매 교육을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더욱이 외무 사원들 대부분이 자기가 하는 일을 천하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때문에 긍지가 없고 직업관이 희박하여 임시 일자리로 여겼다. 따라서 정착률도 낮았다. 판매 가격도 들쑥날쑥하여 소비자와 다투는 일이 잦고, 상품 대금을 떼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 배운 일이고, 적은 자본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라 마지못해 계속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방문판매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떨어졌다. 판매원의 교육 관리도 힘들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데 한계를 느껴 또다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다시 쏘아 올린 꿈 1992년 내 나이 47세 되던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 별 1호가 발사됐다. 나도 새 상품 개발에 대한 꿈을 쏘아 올리기 위해 준비했다. 당시 요구르트 제조기가 히트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유명 제약회사에서 생산된 제품 하나를 구입했다. 좀 더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봤다.기존 제품은 1,000미리 우유팩에 시약(종균)을 넣고 요구르트를 만들게 되어있었다. 우유팩 안쪽에는 얇은 비닐 코팅이 되어있는데 여기에 오랜 시간 열을 가하면 환경호르몬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시약을 구하기도 어렵고 요구르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 문제점으로 보였다.그 무렵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한 사촌동생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동생이 요구르트 제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생산된 그 제품은 여섯 개의 작은 유리병에 우유를 넣고 만들게 되어있었다. 유리병은 요구르트를 덜어 먹지 않고, 한 번에 먹기 좋을 만큼 크기로 되어있었다.나는 무슨 일이든 한번 마음먹으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라 곧바로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알루미늄 열판과 전자 IC 회로를 이용하여 온도 편차를 극소화하고 타이머와 멜로디 음, 램프 표시 기능을 내장했다. 또 차가운 우유가 유산균이 증식하기 좋은 온도로 높여지는 시간이 단축되도록 했다. 그 방법은 두 개의 열선을 이용하여 적정 온도까지 빨리 높여준 다음, 가열 열선 하나는 전원이 차단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즉 전기밥솥이 밥이 다 된 다음 보온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원리다.장사는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 사업의 목표다. 하지만 제조업은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 제품의 단점을 보완하고 품질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다.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다가 뜻밖의 벽에 부딪혔다. 전기제품을 생산하려면 공장 등록증과 제조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 첫 번째로 공장 설립과 제조 허가를 받기 위한 행정절차가 발목을 잡았다. 공장등록이 되어있는 건물에 생산시설을 갖추고 안전성을 인증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공장 설립에 대한 법정 설비와 관련 법령들이 제정된 지가 몇십 년 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나 전자 전기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 대부분이 제품을 생산하는데 필요 없는 시설들이었다. 그러나 국법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그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품 생산하는데 필요도 없는 값비싼 기계들을 단순히 제조 허가를 받기 위해 설치해야만 했다.이처럼 까다로운 행정절차를 걸쳐 공장등록과 1종 전기용품 제조업 허가를 받는데, 1년이 걸렸다. 사업자금의 대부분이 제품생산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사용되고 결국 빚더미에 올랐다.그러나 기존 제품의 단점을 보완했으므로 상품을 출시만 하면 바로 대박이 나서 그동안 쌓인 빚을 쉽게 갚을 수 있게 될 줄로 믿었다. 그런데 시장 반응은 아주 싸늘했다. 소비자는 품질보다는 브랜드를 더 우선시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친구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KBS 2TV에서'TV 슈퍼마켓'이라는 프로가 방송되고 있으니 빨리 텔레비전을 켜보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텔레비전을 켜보니 마침 아이디어 상품에 대한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 출연을 원하는 업체는 신청하라는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마침 지인 중에서 PD를 잘 아는 분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담당 PD가 마침 잘 왔다고 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겨주었다. 사실을 알고 보니 방송국 측에서는 새로운 상품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누구나 접수만 하면 곧바로 방송을 해주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했었다.친구 부인의 전화 덕분에 1993년 1월 16일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방송이 나가자, 불과 몇 분 동안 주문 전화가 빗발쳐 100여 개의 상품이 팔렸다.이때 마침 설 명절을 6일 앞두고 있었다. 한 참 주문배달이 바쁘던 때에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근무하고 있는 고향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가 근무하고 있는 버스회사에서 설 명절 선물용으로 주문하려고 하니, 노조 사무실로 와서 상품설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경기도 원당에 주문배달이 있어 자동차 운전을 조카에게 하도록 하고 서대문구 문화촌에 있는 버스회사로 갔다.상품설명회를 서둘러 마치고 물건 배달을 위해 경기도 원당으로 향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폭설이 내렸다. 그렇다고 목적지를 가까이 두고 되돌아올 수는 없었다.삼송리를 조금 지나서 갑자기'쿵'하는 소리와 함께 마주 오던 158번 시내버스와 정면충돌했다. 그 순간 운전하고 있는 조카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몸은 다치지 않고 운전대 사이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카는 출고된 지 일 년도 안 된 자동차가 못 쓰게 되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조카가 몸을 다치지 않은 것을 이 세상 모든 신들에게 감사했다.사고가 난 장소는 허허벌판이었다. 당시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사고 수습을 위해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에 불이 밝혀 있었다. 다행히 그곳에 전화가 있어 연락을 취할 수가 있었다.텔레비전 방송 덕분에 광고의 위력을 실감했다. 방송이 나가고 3일이 지나자 주문 전화가 뚝, 끊어졌다. 매출 증대의 해법이 광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오랜 궁리 끝에 각 신문사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와 함께 요구르트 제조기를 하나씩 보내주었다. 고맙게도 10여 개의 신문에서'새 상품 소개' 난에 기사를 실어 주었다. 하지만 광고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전국 발명품 전시관에도 전시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이벤트 행사장을 찾아다니며 최선을 다했지만 한 가닥 빛도 보이지 않았다.희망에 들떴다가 절망을 맛봤고, 비상을 꿈꿨다가 추락을 경험했다. 재물과 사람, 건강까지 잃었다. 나의 무능이 초래한 결과이니,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과 아픔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지난날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다 겪었지만, 삶이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 싶었다.세 번째 사업 실패로 실망감과 좌절감에 빠졌다. 부채의 규모가 컸지만, 주변 사람들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컸다. 당시 나는 건강까지 좋지 않아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의지할 곳이 없으니 내가 더 강해져야 했다. 상처는 오기가 되고 힘이 되었다. 사업은 실패했지만, 가정은 내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분연히 일어섰다.내가 할 줄 아는 일이 장사밖에 없으니 또다시 방문판매를 하는 방법밖에 대안이 없었다.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서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내 형편에 맞는 아이템 찾는데 주력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세운상가에서 가라오케 반제품을 사다가 직접 조립하여 판매하기로 했다. 전기가 없는 유원지나 행사장에서도 오토바이 배터리를 이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존 가라오케보다 판매 가격이 싸고 사용이 편리하여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내가 직접 조립하여 판매하니 마진도 좋았다. 한 달에 20대만 판매해도 현상 유지가 가능했다.그런데 판매 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부피가 크고 중량이 무거운 제품이라 승용차가 없는 사람은 판매 활동을 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고, 방문판매 실력이 뛰어난 영업사원을 구하는 일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장사란, 도입기와 성장기, 성숙기와 포화기, 감퇴기를 먼저 파악한 다음 판매 전략을 세우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볼 때, 1993년 당시 가라오케 붐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만큼, 성장기와 성숙기에 해당하는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했다.지난날 무선전축을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서 무선전화기처럼 생긴 휴대용 가라오케를 생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그러나 생산시설을 갖추는 일과 사업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마침 종로 세운상가에서 자동차 전용 노래 반주기 생산업체 사장을 만나 내가 구상하고 있는 내용 설명했다. 그도 내 이야기를 듣고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하지만 장사에 경험이 없는 그는 판로를 걱정하여 직접 생산하기를 주저했다. 이때 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판매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금형 제작비용까지 나에게 부담하라고 했다. 자기는 아무런 부담도 짊어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사업성이 높다고 믿고 모든 부담을 떠안기로 했다.그는 아주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와 대화를 할 때면 귀를 기울여야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아주 천천히 말했다. 게다가 그는 누구와 마주 앉아있을 때도 수줍은 여인처럼 상대방과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 믿음이 더 갔다.나는 노련한 영업사원들을 끌어들여 판매 조직을 구성하고 제품이 출고되기만을 기다렸다. 계약을 체결했던 업체는 본래 노래 반주기를 생산하고 있던 터라 짧은 기간에 완제품 출시가 가능했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다고 했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총판 계약을 제의하여 오자 마음이 돌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착하고 순하게 보였던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되어, 재차 또 재차 확인을 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수많은 배신과 배반을 보아 왔지만, 내가 직접 이런 일을 당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핸드 가라오케 생산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가 배신을 당하고 나니 분노가 치밀었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갑자기 변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어안이 벙벙했다. 어쩔 수 없이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차마 강제집행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그도 나와 함께 망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소행을 생각하면 분노가 끓었지만, 그의 부인과 어린아이들이 고통을 겪게 될 생각을 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 2천 원짜리의 기적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그해 내 삶의 다리도 무너졌다. 절망의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핸드 가라오케 생산 계획마저 사업 파트너의 배신으로 무산됐다. 평생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앉은 채 결국 사업을 접었다.그때 내 나이 마흔아홉 살 되던 해였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집을 팔아도 빚을 절반도 갚을 수 없었다. 이미 받아 써버린 곗돈과 매월 지불해야 할 이잣돈이 일반 직장인들 두 달 봉급에 가까운 금액이었다.평소에 나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은 채권자들을 불러 모아 빚잔치를 해버리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를 믿고 귀중한 돈을 빌려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을 차마 배신할 수가 없었다. 당장 원금은 갚지 못해도 매월 이자만이라도 밀리지 않고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지난날 내가 편안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산다는 것이 죽는 일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뉴스에서 누가 자살했다고 하면,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그 무렵 둘째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사업을 하는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미안하여 졸업식에 참석했다. 모두들 선물과 꽃다발을 주고받으며 축제 분위기인데, 풀이 죽어있는 아내와 딸아이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처럼 저렇게 여리고 어린것을 위해서라도 이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힘으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어떻게 하든지 딸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참고 견뎌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니 창피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우선 창고에 남아있는 상품들을 자동차에 싣고 이벤트 행사장을 찾아 전국으로 돌아다녔다. 행사가 없는 날은 남의 상가 앞이나 노점에서 장사를 하며, 비상할 수 없는 허약한 날개를 한순간도 쉬지 않고 파닥거렸다.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 창고에 있던 재고상품도 모두 팔렸다. 이제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돈이 고작 85만 원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장사가 없었다. 더욱이 행인들의 눈길을 끌만 한 제품을 찾기란 건초더미 속에서 바늘 찾기 같았다. 당장 생계유지가 참으로 막막하던 그 무렵, 청동(靑銅) 장식품 판매하는 한 노인을 우연히 만났다.제품의 크기는, 길이 10cm, 높이 5cm로, 60여 가지의 모양이 있었다. 본래는 연필깎이 용도로 중국에서 수입되는 상품인데 8백 원에 매입하여 2천 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요즘은 연필을 깎는 일이 별로 없으니 사 가는 사람이 없어 장식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심심풀이로 사람들 구경하면서 용돈이나 벌기 위해 다닌다고 했다.1995년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생활필수품도 잘 팔리지 않는 불경기에 이런 물건이 팔릴까 싶었다. 그렇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청동 장식품 장사를 하기로 했다.바로 그다음 날부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남의 상가 앞에 좌판을 펼쳤다. 몇 시간이 지나도 거들떠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점심때가 지나도 배고픈 줄도 몰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점에서 물건을 사 가는 사람은 하루에 한두 명밖에 안 되었다. 그나마 한 사람이 한두 개씩 사 가기 때문에 자릿세도 못 했다. 하지만 원체 장사 밑천이 적어서 취급 품목을 바꿀 수도 없었다. 청동 장식품으로 절망의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하는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매출을 증대시킬 방안을 찾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 며칠 동안 궁리한 끝에 다섯 개를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서 1만 원씩에 판매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세트를 구성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자동차나 비행기, 악기 모양으로 된 것은 같은 종류들끼리 쉽게 세트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성격이 다른 것들은 세트 구성을 할 수가 없었다. 골똘히 생각한 끝에 극작가가 시나리오를 쓰듯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만들어서 세트를 구성해봤다.예를 들자면 포장마차 뒤에는 대포를 놓고 그다음 호롱불을 놔두었다. 그렇게 하여 서부영화에서 포장마차 뒤에 대포를 달고 가는 것을 연상하게 하고, 또 밤이면 호롱불을 사용한다는 뜻으로 설명하면 될 것 같았다. 이처럼 퍼즐 조각을 맞추듯 하나하나 연결하여 이야기 줄거리를 만들고 각각 특징에 맞는 세트 이름을 붙였다.이런 방법으로 열 가지의 세트를 구성했다.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그 가치가 달라져 보이듯, 이렇게 뜻을 담아 해석을 곁들이면 매출 증가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세트 구성이 완성된 다음, 진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봤다. 똑같은 상품이라도 어떻게 진열하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기 때문이다.오랜 궁리 끝에 인테리어 가구공장에서 백색 바탕의 조립식 진열장을 주문 제작했다. 벽에는 거울을 붙이고 한 칸에 한 세트씩 양쪽으로 여덟 세트를 진열해놓으니 보석상 진열장처럼 아주 훌륭하게 보였다. 세트가 구성되지 않은 나머지들은 진열장 앞에 아무렇게나 흩어놓고, 골라가는 재미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이처럼 머리를 짜고 지혜를 모아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좌판 펼칠 장소를 구하는 일이 큰 벽으로 다가왔다. 장사가 좀 되는 장소는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붙박이처럼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좌판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종일 헛고생만 하고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가 참으로 힘들었다.어렵게 장소를 마련해도, 아이들 소꿉놀이 장난감처럼 자질구레한 것들을 상품이라고 펼쳐 놓고 있으려니 처량한 생각까지 들었다. 중형 아파트 한 채 값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원가 천 원도 안 되는 상품을 취급한다는 것은 노적에 불 질러놓고 싸라기 줍는 격이었다. 가끔 자릿세도 못할 때도 있었지만 손해 보는 장사라도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병이 날 것 같아 더 바쁘게 일했다.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자릿세도 못하고 왔는데 보일러가 고장 났다고 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나는 아내에게"이런 때일수록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라는 말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당장 급하고 필요한 것이 돈인 줄 뻔히 알지만 서로 말을 아꼈다.또 어느 날은 두 딸이 목욕탕을 가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아 그런 사실을 몰랐었다. 20여 년이 흐른 뒤에 둘째 딸이 추억담으로 얘기하여 뒤늦게 알았다. 그만큼 식구들 모두가 돈이 드는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삼가 했었다.이처럼 생활이 어려워지자,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아내까지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아내도 처음 각오나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어했다. 대부분이 처음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건 사라는 말조차 꺼내기가 힘들다. 그런 줄 알지만 아내가 나서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적극 말리지 않았다.당시 아내도 고혈압으로 인하여 편두통과 현기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구들 앞에서 아프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내가 너무 무능하여 건강도 좋지 않은 아내까지 길거리로 내모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가급적 장사하기 편한 장소를 찾아서 아내에게 먼저 마련해주고, 나는 또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문득문득 아내가 걱정되었지만,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종일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특히 아내 나이 또래의 여인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외출하는 모습을 볼 때면 고생하는 아내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이렇게 아내까지 나섰지만 생활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더욱이 무더운 여름철이 다가오니 더 걱정이었다. 날씨가 맑은 날은 무쇠도 녹일 것 같은 뙤약볕이고, 장마가 계속되면 장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때 마침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부산 무역센터에서 공룡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공룡 전시회는 청동 장식품이 딱 어울리는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할 것도 없이 큰 기대를 안고 부산으로 내려갔다.도착한 즉시 행사 관계자를 만나보니 기념품을 판매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이미 다른 사람이 독점하고 있었다. 매장을 독점한 사람은 삼성동 코엑스에서 여러 차례의 전시회 관계로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안면을 싹 바꾸고 한 달 자릿세를 300만 원이나 달라고 했다. 당시 일반 회사원 평균월급이 100만 원이었던 때다. 책상 하나 놓을 정도의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되는데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그곳에서 꼭 장사를 하고 싶은데 나에게 그만한 목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정사정하여 판매 이익금의 50%를 자릿세로 주기로 합의를 봤다. 나에게 주어진 장소는 전시장에서 가장 으슥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그렇지만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서울로 되돌아가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옹색하게 자리 잡았다.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관람객들을 후미진 곳까지 오도록 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오랜 궁리 끝에 진열장 벽면에 거울을 붙이고 양쪽에 100W 전구로 불을 켜두었다. 밝은 불빛이 거울에 반사되어 상품이 최대한 돋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라고 쓴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전시회는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열렸는데 첫날부터 관람객이 물밀듯 몰려왔다. 진열장에 환하게 켜놓은 불빛과 현수막을 보고 사람들이 내가 있는 구석으로 모여들었다. 앙증맞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식품이 연필깎이까지 달린 것을 보고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했다. 많이 사 가는 사람은 다섯 세트에서 열 세트까지 사 가기도 했다. 이처럼 청동 장식품 하나하나가 희망이 되고 빛이 되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다 사그라진 잿더미 속에서 작은 불씨 하나를 찾아낸 기쁨을 맛보았다.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를 부여잡듯 청동 장식품에 희망을 걸었다. 허튼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견딜 수 있기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눈물과 땀방울로 희망의 무지개를 만들어 갔다. 어둠을 밝혀 준 냄비 진정한 가족애는 어려움 속에서 피어났다.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었다. 함께 노력한 덕분으로 1년 동안 노점상을 하여 근근이 모은 돈이 800만 원이 되었다. 그것을 종잣돈으로 또다시 제조업에 도전했다. 도전과 모험으로 실패와 고통을 겪었지만,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길도 오직 도전과 모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금형 값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경험과 신용을 자본으로 냄비를 만들기로 했다. 금형 제작에서부터 포장용 박스생산에 이르기까지 지난날 거래했던 업체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1996년 당시는 경기침체로 대부분이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을 때라, 아무리 친분이 있는 사이라도 도움을 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두들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평소 내가 너무 원칙만 따진다고' '장도칼 또는 탱자나무 가시'라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른 기간에 완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제품의 크기는 지름이 22cm로 아주 조그맣게 만들었다. 금형 제작비가 모자라 양쪽 손잡이는 만들지 못했다. 뚜껑에는 둥근 철사를 귀걸이처럼 끼워서 손잡이를 대신했다. 원체 적은 돈으로 옹색하게 만든 제품이라 고급 주방용품들 틈에서 판매될 수 있을까 싶었다.못난 자식 선보이러 가는 심정으로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쇼핑센터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야외용 가스버너에 불을 켜놓고 고구마를 직접 구워 시식시키는 방법을 응용했다. '물과 기름이 없이도 생선을 구울 수 있고, 높이가 일반 냄비의 절반밖에 안 되므로, 뚜껑의 복사열로 음식이 빨리 익을 뿐만 아니라, 생선이 맛있게 구워진다.'고 설명했다.판매를 시작하자마자'요술 냄비가 나왔다.'며,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절실함이 기적을 일으킨다더니 마침내 꿈같은 현실이 펼쳐졌다. 주야로 생산해도 주문량을 다 맞추지 못했다. 새벽부터 시작하여 숨 가쁜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돈이 인쇄소의 폐지처럼 쌓였다. 큰 종이 상자에 수북이 쌓여 있는 돈을 보고, 딸아이가 하는 말이"아빠 우리 돈 세는 기계를 사야겠어요."라고 하여 우리는 모두 함께 웃었다.일할 때는 물건이 팔려나가는 즐거움에 피곤한 줄 모르다가, 일과가 끝나면 식구들 모두 녹초가 되어 손발 씻는 것도 귀찮았다.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했던 그 돈을 세어볼 기운이 없었다. 큰 종이 상자에 차곡차곡 쌓인 돈을 방 한쪽 구석에 미루어 놓고 그대로 잠이 들 때가 많았다. 어느 날은 거래처 은행 지점장이 선물을 잔뜩 들고 찾아와서 은행 직원을 매일 우리 공장으로 보내 입금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했다.바로 그다음 해 1997년은 IMF 외환 위기로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하여 갑자기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노점상이라도 해보겠다고 찾아왔다. 사무실로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장사 경험이 전혀 없거나 물건값이 부족한 이도 있었다. 이처럼 사정이 딱한 사람들에게는 지난날 나도 힘들었던 때를 생각하여 상품을 외상으로 주었다. 또 많은 량을 주문한 사람보다는 적은 량을 가져가는 상인들부터 주었다. 그러자 규모가 큰 거래처들이 불평했다. 대부분 소규모 노점상이라 더러는 물품대금을 갚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노점상이라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하니 큰 보람을 느꼈다.갑자기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다가, 뜻밖에 장사가 잘되어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고맙다고 음료수나 고기를 사서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와서 주고 가기도 했다.여기에 힘입어 일 년 후에는 삼단 바닥 냄비를 개발했다. 계속하여 12종류의 주방용품을 생산하게 되었고, 2년 동안 45만 개가 팔렸다. 똑같이 내린 비에도 떨어지는 꽃이 있고 다시 피어나는 꽃이 있듯이 온 나라가 불황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나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덕분에 나는 평생 갚지 못할 줄 알았던 그 많은 빚을, 1년 만에 모두 다 갚고 상가건물도 장만했다. 그리고 1998년 9월에는 발명 진흥회의 추천으로 이태리 밀라노에서 열리는'마제프 가정용품 국제 박람회'에도 출품했다. 외국어에 서툴러 걱정했는데, 마침 이태리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던 조카(이질) 내외가 상품설명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전시회 기간 내내 외국 바이어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아주 좋은 실적을 올리고 귀국했다. 지금까지 나는 비륵땅 같은 삶의 땅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바뀌고 연장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연장도 내 손에 맞지 않으면 나만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땅의 성질에 적합한 새로운 연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패도 하고 상처가 덧나기도 했지만 보람도 있었다.처음에는 곡괭이로도 팔 수 없는 비륵땅인 줄 알았는데 큰 돌 몇 개를 파고 나니 작은 돌멩이들이 나오고 기름진 흙도 조금씩 섞여 있었다. 이때 자갈밭은 모래밭 같고 모래밭은 옥토처럼 느껴졌다.가난이 죽음보다 더 무서워 모험을 했고, 바닥에서 비상할 수 없으니 갈아엎었다. 내 삶의 땅이 햇볕도 받고, 바람도 잘 통하고, 물도 잘 흐르게 한 후, 희망의 씨를 뿌릴 수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흙 속에 숨겨진 바윗돌처럼 나를 속이고 더욱 힘들게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돌밭에 섞인 흙처럼 힘을 보태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길을 열어주었다.농촌에서는 가을이 되면 수확의 결과에 상관없이 다음 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땅을 갈아엎는다. 겨울철에 잡초와 해충들이 얼어 죽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묵은 땅은 갈아엎어야 위아래 흙이 서로 바뀌어서 땅의 질이 높아진다.이와 같이 살아간다는 건 삶의 땅을 개간하고 갈아엎는 연속이라 생각한다. 삶의 땅이 아무리 기름지고 풍요로워도 수시로 갈아엎어 주지 않으면 땅의 힘이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묵히고 방치해두면 잡초가 무성하고 돌처럼 굳어진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일 수는 있어도 새로운 싹이 움트기는 어렵다. 설령 싹을 틔웠더라도 무성하게 자라지는 못한다. 그래서 박토뿐만 아니라 옥토도 가끔 뒤집고 갈아엎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는 비륵땅은 객토 작업을 해야 한다.농사꾼의 가을처럼 인생의 완성은 노년에 결정된다. 객토 작업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요즘 시민대학과 문화센터에서 내 삶의 마지막 객토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2019-08-08 18:14:01

김은집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미완의 고백 / 김은집

나는 살아오면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받았었다. 그 손길을 뻗어주었던 분들은, 혈연이 있었거나 지연 혹은 학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고 우연히 만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소개로 만나게 된 사람도 있었으므로, 나는 늘 사람이면 누구나 나의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인연이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지속시키고 꽃피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나 혼자 품고 있기에는 너무나 고마웠던 분들과의 사연을 글로 써서 남기는 것이 그 분들에 대한 보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경북지방에서 제법 명망이 높았던 유림 김정기님과 양소선님 사이에 태어난 7남매 중 막내였고 늦둥이 외아들이었다.원래는 무인(1938년)생이었으나 태어날 때 너무 허약하였으므로 출생신고를 늦춘 탓에 호적상에는 기묘(1939년)생으로 되어 있다.내가 태어난 직후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최고조로 극악해질 무렵이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은 물론, 내선일체를 앞세워 우리말, 우리글도 사용하지 못하게 억누르던 때였으니까. 그런 중에 일본이 하와이군도를 기습 공격하여 발발한 태평양전쟁이, 유럽지역에서 일어났던 제2차 세계대전에 병합되면서부터,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공격이 강화 되었으므로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패전으로 끝을 맺었던 것이다. 따라서 36년간 일제의 강압통치를 받아오던 한반도가 광복을 맞았으나, 연합군의 양대 세력인 미국과 소련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앞세웠으므로 북위 38도선을 경계삼아 조국산하가 양분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였기에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이데올로기 싸움의 틈바구니에 빠진 채 살아온 것이 어느 듯 70주년을 넘긴 것이다. 수성 못 아래에 자리 잡은 중동에서 태어난 나는 수성국민학교(입학 당시에는 사대부속국민학교였음)를 졸업하고, 선지원 후시험인 국가고사를 치르고 경대사대부속중학교에 진학 하였었다.6.25 전란 중이었으므로 벽돌건물에 담장이넝쿨이 뒤 덮여 운치가 있던 본교건물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 건물 정문 앞 큰길 건너에 있던 가교사에서 입학식과 졸업식을 치루었는데 나의 학업은 순탄하지가 않았다.아버님은 청렴한 선비셨으므로 가세가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평소 붓글씨를 써주시거나, 남의 편지를 대필, 대독해 주고받은 사례물품으로 생계를 이어 왔으므로, 당시 중학교 공납금 중 제일 액수가 적었다는 그 학교의 학비마저 제때에 내지 못하여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여러 번 하였던 것이다.그러던 중 내가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아버님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었다.「옛날에는 소학교만 나와도 면서기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요즘 세상은 중학교 졸업장 가지고는 학교소사도 못해.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나와야 말단 공무원이라도 할 수 있다구. 네가 나와 함께 인천으로 가면 우리가 너를 고등학교 까지는 다니게 해 주마」아버지의 장례식에 왔던 둘째 누님의 말에 함께 왔던 자형도 동의하였으므로 어머님과 다섯 누님들이 나에게 권하였다.그러나 나는 선뜻 그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무렵 우리국민 모두가 그러하였듯이 결혼한 누님들 모두 생활이 어려웠었고 나의 바로 위 누나는 그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으나 쉽게 취직하지 못 할 것 같아 혼자서 어머니를 모시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 여겨졌던 때문이다.「설마,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냐? 내 걱정 말고 넌 둘째누님 따라 가거라. 외아들인 네가 잘돼야 돌아가신 아버님도 마음 편하실게 아니냐?」「그래, 어머닌 우리가 힘을 합해서 모실테니 넌 누님 따라 가거라」「여러 곳에 이력서 내어 놓았으니 곧 좋은 소식 올게다. 그러니 넌 염려 말고 언니 따라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라」어머님 말씀에 첫째누님과 막내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하지만, 중학교 졸업장은 받아가지고 가야 할 것 아녜요?」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말미를 얻으려고 내가 말했다.「그건 그래. 그럼 네가 오는 걸로 믿고 우린 준비하고 있으마」둘째누님의 말이었다. 그 무렵 둘째누님 내외분은 인천의 남녀 고등학교 교사로 각각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그 해 2월 하순에 졸업장을 받아든 나는 어머니와 막내누나의 배웅을 뒤로 하고 완행열차편으로 상경하여 다시 경인선 열차를 타고 제물포역에서 내려 둘째누님 집을 찾아갔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당시에는 고등학교 진학도 선지원 후 국가고사를 치르고 채득한 점수가 지원한 학교의 모집인원수 속에 들어야 입학이 허용되었었는데, 진학을 포기하였던 나는 어느 고등학교에도 원서를 제출하지 않았었고, 고입을 위한 국가고사도 치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내가 J고교에 들어간 건 그해 입학식이 끝나고도 며칠 후였다.교무실까지는 그 학교교사였던 자형이 동행해 주었었고 배정받은 학급에는 담임선생과 함께 들어갔다.「합격한 학생 하나가 등록금을 내지 않아 입학취소가 되었는데, 이 학생이 그 학생 대신 입학허가를 받아 제군들과 함께 공부하게 된 김은집이다. 대구에서 사대부중을 졸업하고 인천으로 유학 온 학생이니 사이좋게 지내기 바란다.」담임선생의 소개를 받은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에 가름하였고, 그 반 학생들은 일단 박수로 환영의 뜻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 학교에서의 학업도 순탄하지가 않았었다. 동급생은 물론, 선배들도 경상도에서 올라와 보결로 들어온 나를 반겨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요즘말로 왕따 시켰기 때문에 늘 외로웠으며, 게다가 2학년 겨울방학 때 자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누님네 생활도 전보다 궁핍해졌었는데, 그 누님에게도 학교에 다니는 3남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어렵게 그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J고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누님에게 폐를 끼칠 수 없어 서울로 일자리를 구하려 떠날 때「도움이 될 진 모르겠다만 이 편지, 충무로에 계신 이봉래감독에게 드려 보렴」제법 도톰한 봉투하나를 누님이 내게 주셨다. 얼결에 받아든 나는 누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이봉래감독은 네 자형과 호형호제하던 시인이신데, 지금은 영화감독을 하고 계셔. 내가 알기로는 영화사도 하나 차리신 것 같아. 그러니 그 편지 보면 도와 주실지도 몰라」누님의 말을 들은 나는 따사로운 혈연이 다시 한 번 고마워 눈시울이 젖어오고 있었다.그 편지를 가방에 넣고 서울로 간 나는, 달리 찾아갈 곳도 없었으므로 영화인들의 활동지역인 충무로에 가서 이봉래 감독부터 찾아보았다. 그는 D영화사 사장이었고 감독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이력서 갖고 왔는가?」D영화사를 세 번째 찾아간 오전, 나는 비로소 이 감독을 만날 수 있었고, 누님의 편지를 읽어본 그가 한참동안 나를 건너다보다가 불쑥 물었으므로 나는 대답대신 고개만 가로 저어 보였다.「잠자리는 구했는가?」다시 물었을 때도 나는 역시 고개만 가로 저어 보였다.「길 건너가면 문방구점이 있으니, 가서 이력서 용지 한 장 사다 써 놓고 기다리게. 난 또 촬영장엘 가봐야 하니까」말하고는 휑하니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주인 없는 사장실에 혼자 앉아 있기도 거북스러워, 나는 길 건너 문방구점에 가서 이력서 용지 1권을 사들고 다시 돌아와 여직원이 앉아 있는 사무실에서 이력서를 쓰려했지만 정말 쓸 것이 없었다.이 감독이 다시 돌아온 것은 세 시간쯤 지난 후였다.나는 그동안 여직원이 쟁반에 담아서 건네준 빵과 우유로 점심식사를 하였었다. 그 빵과 우유는 촬영장에서 연기자와 스텝들이 먹는 간식이라고 여직원이 말해 주었었다.나는 본적과 성명, 생년월일과 성별, 그리고 내가 졸업한 초, 중, 고교명만 기재한 이력서를 이 감독에게 건네주었다. 주소란도 메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불편하겠지만, 당분간은 내 사무실에서 자고, 제작부의 조부장 일을 도와주게. 월급은 많지 않지만 사람들은 많이 사귀게 될걸세.」이력서를 살펴본 이 감독의 말이었다. 정말 뜻밖의 호의였으므로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 보이며 「고맙습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다음 날부터 나는 「D영화사 제작부차장」이란 직함이 인쇄된 명함을 사용하게 되었고 연기자나 스텝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으며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그때 받은 월급들을 모아 두었다가 겨울이 오기 전에 충무로에서 가까운 남산동에 자취방도 구할 수 있었으며 이듬해 신학년도에는 비록 야간부이긴 하지만 K대학의 사학과에 진학도 하였던 것이다. 동강 조수호선생을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여 뒤였다.동강선생은 내가 중3때 미술을 지도하셨던 분인데 그 무렵 선생께선 배제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기신 후였고, 졸업 후 내가 처음 만난 은사님이셨다.나는 그 무렵, 하숙이나 자취할 수 있는 방을 구하려고 서울의 주택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그 무렵 많은 서울사람들은 대구에서 올라온 학생에게는 방을 세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입자의 친구들이 모이면 마치 싸움판이 벌어진 듯 시끄러웠기 때문이라 하였다. 해서, 내가 처음 자취방을 얻었던 남산동 집에 세 들어 갈 때도 시끄럽게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 주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어느 일요일 오전, 내가 신당동 골목길을 기웃거리며 가고 있다가 동강선생과 마주친 것이다.나는 국민학교 3,4학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었는데 당시 담임선생도 수채화를 잘 그리셨고, 그 선생의 눈에 든 내게 수채화 그리는 법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시다가 6.25때라 입대 하셨으므로, 나는 김용환선생의 조언을 들으며 처음으로 유화그리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으나, 아버님은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시면 호되게 꾸짖으셨으므로 숨어서 그리기를 계속하였고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늘 미술부에 몸담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동강선생도 나를 기억 하시고 반겨 주셨던 것이다.골목길 찻집에 마주 앉은 후 내가 방을 구하려 다니게 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나 하고 같이 청운동엘 가 보세. 마침 청전선생님 댁에 방이 하나 비었을 것 같으니 내가 부탁드려보겠네」그래서 나는 그날 청전이상범 선생님 댁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제가 대구에서 중학교에 근무할 때 미술부에 있던 제자인데, 지금도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유화를 그렸답니다. 헌데 셋집 주인이 기름 냄새가 역겹다고 방을 비우라 한답니다. 마침 선생님의 아드님이 분가했으니 그 방이 비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제자에게 편의 좀 베풀어 주실 순 없을까요?」「동강의 제자라면 문인화 기초는 착실히 익혔을텐데 왜 유화를 그렸답디까?」「김군은 당시에도 수채화와 유화를 잘 그렸습니다. 해서 제1회 한미학생 미술교류전 때도 경북대표 작품으로 선정되어 영남일보에 사진까지 실린 적이 있습니다. 6.25때 피난 오셨던 김용환화백이 김군 집에서 한동안 사셨고, 그때 그분을 만나려고 여러 번 내왕하였던 도상봉화백과 강우문화백과도 인연이 맺어졌던게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하긴, 광복 후 우리나라 미술풍조가 그쪽으로 기운게 사실이지. 학교에서 문인화나 수묵담채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쳤어야 했는데 말일세.」그날 두 선생님께서는 한국미술계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시며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셨고 그 덕분에 나는 그 집에서 1년여를 하숙하게 된 것이다.「굳이 기름 냄새 풍기는 유화를 그리지 말고, 이 기회에 청전선생님에게 수묵담채화를 배우게. 그리고 사학과에 다닌다 했으니 수묵화에 대한 고전들도 좀 많이 구해 보게나」그날 작별할 때 동강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취미로 그리던 유화에 손을 떼고 틈날 때마다 청전선생에게 수묵담채화를 사사 받았고 문인화에도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문학하는 사람이 문인화나 수묵담채화를 배우면, 자작한 시나 시조 등을 화제로 써 넣을 수 있고 그 화제가 관람자들과 소통을 용이하게 해 주었으므로 나는 지금까지 그 작업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은 6.25와 4.19, 5.16과 6.3사태, 1.21사태와 부마항쟁, 그리고 신군부 쿠데타와 광주항쟁 등 숱한 고비를 넘어왔다.그 중에서도 나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4.19와 5.16, 그리고 1.21사태이다.4.19때는 D영화사에 근무하며 K대학 야간부에 다녔으므로 K대학과 Y대학이 주축이 되었던 서울시위에 나도 적극 참가 하였었고, 5.16이후 사회정화 차원에서 각종 단체들을 법인화 시킬 때 발족된 한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의 회장으로 이봉래 감독이 추대 되었으므로 그가 영화산업을 포기하여 내가 실업자가 되었고, 그 동안 연기해 오던 군복무를 마쳐야 했기 때문이며, 1.21사태는 순수문학을 하려던 나를 반공작가와 계몽작가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2년 8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대구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막내누나가 모시고 있었다.그 누나는 내가 인천으로 떠난 후 오래지 않아 대구전신전화국에 취직되어 교환수로 3년여 근무하였고 그때 친지의 중매로 내당동에서 조그마한 직물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사람과 결혼 하였었는데, 영일만이 고향이던 그는 6.25때 부모님을 여위고 대구로 나와 비산동에서 직물공장에 취업하여 자금과 기술을 축적한 다음, 내당동에서 독립하였으므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장모이며 내 어머니였던 분을 친어머니처럼 모셨던 것이다.제대 후 나는 한 때 서울로 가서 충무로 일대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영화사에 다시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T.V 연속극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한국영화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내가 D영화사에 있을 때 사궜던 영화인들, 특히 제작부 직원들은 나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었다. 혹시 내가 자신들의 일터를 빼앗고 들어 올까봐 두려웠던 것이리라.그래서 다시 대구로 돌아온 나는 누님네 공장 일을 도우면서 밤에는 시나리오 습작을 하고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제2의 중흥기가 한국영화계에 도래할 것 같았고 또 T.V 단막극 작법이 영화시나리오 작법과 대동소이 하였으므로 「T.V 극작가라도 되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여류화가 K의 유화개인전 초대장을 받았다.그는 내 고향인 중동에서 이웃하며 자랐었고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던 1년 선배였는데 나와는 매우 친숙하게 지냈었으며 제일여중을 거쳐 경북여고에 진학해서도 미술부에서 활동하다가 2학년 때부터는 부장까지 역임하였던 열성파였으나 가정형편상 미대에는 진학하지 못하고 일찍 결혼하였던 여인이었다.그녀의 첫 개인전 오픈식에는 경북여고 미술부 출신 선후배들이 많이 참석하였으므로 나는 축하인사만 하고 전시장을 나와야 했었다.1주일 후 그 개인전이 끝나갈 무렵 내가 다시 찾아갔을 때 그녀는 후배인 한 아가씨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워낙 바빠서 오픈식 날은 미안하게 됐어. 오늘 잘 왔다. 내 졸업 후 한참 뒤에 미술부장을 하였던 후배인데, 인사하고 지내. 얘도 너처럼 아버지가 그림 못 그리게 하셔서 지금은 H여대 국어국문과에 다니고 있어.」여류화가 K가 자신을 소개하자 아가씨가 고개 숙여 먼저 인사했다.「이 친구, 사대부중과 인천 J고교를 졸업했고 서울 K대학을 다녔어. 또 영화사에도 근무했고, 그때 배운 시나리오 작법으로 지금은 습작을 하고 있다니 언젠가는 훌륭한 작가가 될거야. 한 번 사겨 봐. 그림도 잘 그려」여류화가 K는 이어서 나를 소개해 주었으므로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나의 지난날을 소상히 아는 것은 형이라 부르며 나를 따르던 그녀의 남동생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외아들이었던 나는 그녀의 남동생이 형이라 부르는 것이 좋아 대구 와서는 자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이후 여류화가의 후배인 아가씨와 나는 주말이면 이따금 만나 전시장 순례와 영화감상, 문학토론 등으로 시간을 보냈었다.만남의 횟수가 잦아지자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음을 느꼈고, 반려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갖게 되었으나 두 사람의 결합에는 걸림돌이 많았었다.그것은 내가 이렇다 할 직장이 없는 백수의 신세였고, 그녀 역시 1년 이상 지나야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들, 특히 아버지와 형부의 반대가 극심하였던 것이다. 영천이 고향인 그녀는 그때 대구에 사는 언니 집에 하숙하며 등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영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인 B형과도 사귀고 있었다. 밖에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정도 방문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1968년 2월 초, 구정 다음날 B형이 내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린다고 내당동 누님네 집으로 찾아왔었다.세배가 끝난 후 누님 집에서 나온 B형과 나는 반고개 아래에 있는 신진극장 앞 대포집에 마주 앉아 있었다.「이번에 공보부에서 시나리오 현상공모가 있던데 김형 거기 한번 응모해 보지 그래?」막걸리 몇 잔을 주고받다가 B형이 말했다. 너무나도 뜻밖의 소리였으므로 나는 멀거니 그의 얼굴만 건너다보고 있었다.「하긴 마감 기일이 좀 촉박하긴 하네만…….공보부에서 현상공모 하는 주제는 뻔-하지 않은가? 반공 아니면 농촌 계몽물이지」「언제까진데?」「이달 20일까지」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B형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다.「이 친구, 시나리오 한 편 쓰는게 뭐 치약 짤 듯 하는 줄 알어? 20일까지면 열흘 남짓 밖에 안 남았잖어?」「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보게. 마침 좋은 소재가 있었잖어? 1.21사태 말일세. 육로로 왔던 놈들이 실패하였으니 다음에는 낙하산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해상을 이용하지 않겠어? 그러니 그 쪽으로 가상적 이야기 하나 만들어 보라구. 시나리오 작법이야 그 동안 계속 연구해 왔으니 참신한 소재 하나 잡으면 열흘 동안 끝내지 못할 것도 없잖어?」듣고 보니 그랬다. 그림이나 문학작품은 붓이나 펜을 들기 전에 구상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 그것을 집필하거나 형상화 시키는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니지 않은가?그날 B형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밤을 새우며 참신한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찾은 소재로 1주일 만에 원고를 작성하여 소포로 보낸 「파래섬의 딸」이 뜻밖에도 입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여류화가 K의 소개로 사귀던 아가씨 집의 반대는 그동안 그녀의 언니가 애써 완화 시켜 왔었는데 내가 공보부 현상공모에 입상한 것은 그 언니에게도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그 언니가 아버지와 남편을 설득시켰으므로 사귀던 여인이 졸업한 그해 가을에 우리는 결혼할 수 있었는데, 내가 대구를 떠나 산 것이 10년 가까이 되다보니 주례를 부탁할 만한 지인이 없었다. 그렇다고 예식장에서 계약해 놓은 직업적 주례자를 세우는 것도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 고심하던 중 문득 중학교 때 은사님이셨던 김판영선생이 생각났던 것이다.그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 1학년 1학기 때 영어를 가르쳤지만 2학기부터는 상급반 지도를 하셨고, 내가 그 학년에 이르렀을 때는 고등부 교감으로 떠나셨으므로 두 번 다시 강의를 듣지 못하였던 분이었다.그런데 내가 그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맺어진 것은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 해 광복절 기념식이 끝나고 일직이 된 나와 당직이 되신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만난 것이었다.「은집인 장래희망이 뭔가? 그동안 지켜봤더니 문예부와 미술부에서 활동하며 온실 출입도 잦던데?」「글쎄요. 아직은…… 싹이 나오는 것 봐서 결정해야겠지요」「녀석, 꼭 눈 덮인 산 같은 소리를 하는구먼」그날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러다가 선생님은 나에게 소산(素山)이란 아호를 지어 주셨다.그러나 그 선생님도 졸업 후에는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였었다. 내가 대구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쑥 찾아가서 주례를 서 주십사고 부탁드리기에는 낯부끄러운 일이 아닌가.여러 날 고심하면서도 그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하여 B형에게 물어 보았더니 경상북도 도교육감으로 재선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찾아뵙고 축하 인사 겸 내가 공보부에서 현상 공모한 시나리오부문에 입상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고, 기회를 봐서 어렵지만 주례를 부탁드려 보기로 하였다.경상북도 도교육위원회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반갑게 맞아 주셨고 여비서에게 차를 내어 오라고 하셨다. 차를 마시며 선생님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고, 나는 그 동안 체험한 일들, 특히 시나리오 작법을 배운 과정과 현상 공모에 응모하여 입상되고 상금을 받았다는 말씀을 드렸더니「내가 사람하나는 잘 보았었구먼」 하시며 웃으셨다.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주례를 서주실수 있겠느냐고 여쭈었었는데 뜻밖에도 선생님은 쾌히 승낙하셨던 것이다.당시에는 누군가의 결혼식에 누가 주례를 섰느냐 하는 것이 신랑의 인품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으므로 내 결혼식에 왔던 양가의 하객들 모두가 놀라워하고 있었다.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감사인사까지는 치루었으나 이듬해 봄에, 내가 문화공보부에 특채되어 아내와 함께 상경하였으므로 다시 그 선생님을 찾아뵙지는 못하였었다. 내가 상경하여 문화공보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인사계장 이달형씨였다. 그는 내가 현상공모에 응모하였을 때 문화과에서 현상공모 담당주무였으므로 시상식 때 처음 만났던 사람인데 첫눈에 호감이 갔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가 인사계장으로 승진하였고, 문화과에서 필요한 작품 집필에 내가 적격이라 여겼으므로 총무과장에게 나의 특채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화과에는 빈자리가 없었다.「당분간은 인사계에서 근무하시며 문화과에서 의뢰하는 작품을 집필하도록 합시다. 김작가는 필체가 좋으니 인사카드와 연금카드를 일괄정리 좀 해주시오」그는 나를 총무과장과 문화과장에게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켰다. 출근은 다음 날 아침부터였다.나는 6개월 동안 인사계에서 바쁘게 지냈다. 요즘은 모든 기록이 전산화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육필로 작성하였었는데 문화공보부산하 공무원 전원의 인사카드 및 연금카드는 오래된 것이 많았으므로 한사람의 기록에도 필체가 다른 것이 있어 보기에 좋지 않다고 모두 재작성하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따금 문화과의 호출을 받고 가서 소재와 주제를 받아 퇴근 후 집에서 작품을 집필하여야 했었다.그 기간 동안 나는 두 편의 장편 시나리오와 다섯 편의 단편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문화과에 납본하였었다. 그 작품들은 모두 반공사상 고취와 농촌계몽운동이 주제였다.「힘드시지요? 작가 분들은 소재나 주제가 창작적이어야 집필의욕이 생긴다는데 김작가는 늘 주어지는 소재와 주제를 다루어야 하니 의욕이 감소될겝니다.」농촌계몽물 시나리오인 「물은 위로도 흐른다」의 원고를 문화과에 넘긴 날 퇴근시간에 인사계장의 제안으로 안국동에 있는 어느 술집에 마주 앉았을 때 그가 한 말이다. 하지만 면전에서 즉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어 나는 멋쩍은 웃음만 보여 주었다.「국립국악원 서무과 주무자리가 비었는데, 김작가가 그리로 가시겠오? 그 자린 아주 한직이오. 마침 김작가가 세 들어 살고 계신 장충동에 사무실이 있으니 출퇴근시간도 많이 단축될거요」나는 그의 표정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나를 위한 진심인가? 아니면 나를 떠나보낼 작정인가 하고. 그런데 그의 표정은 정말 진지해 보였다.「국립국악원은 뭘 하는 곳입니까?」나는 원래 음악에는 소질도 취미도 없었으므로 전통음악이나 현대음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국립국악원이 무얼 하는 곳인지 정말 몰랐던 것이다.「해방 전에는 이왕직 아악부라 불리던 곳인데 우리나라 전통음악과 무용의 계승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문화공보부산하 기관입니다. 장악과와 서무과가 있고, 부설인 국악사양성소가 있는데 그 기관 주요업무는 대부분 장악과 소관이고 서무과는 그 보조역할만 하는 곳이지요」인사계장의 설명을 듣고 유혹을 느낀 것은 전통음악과 무용이란 말을 들었을 때 언뜻 뇌리를 스쳐가던 우륵과 왕산악, 그리고 박연선생의 이름과 세종대왕 때 편찬되었다는 악학궤범 등의 고서적 제목들 때문이었다.그래서 나는 인사계장에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국립국악원 서무과로 보내주기를 빌었다.1주일 후 나는 국립국악원 서무과로 자리를 옮겨 앉았는데 그 국악원의 원장은 인간무형문화재 제1호인 성경린씨였다.국립국악원 장악과에는 판소리의 명창인 박동진씨도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는 그 무렵 신축 중이던 국립극장 산하단체인 국립창극단의 임원이기도 하였다.평소에도 유-머와 재치가 많아,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오던 그는 내가 서무과 주무로 가던 날도 원장실에 앉아 있었다.내가 성경린원장에게 부임인사를 끝내자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으므로 대구라고 대답하자, 박동진씨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한바탕 그 특유의 사투리를 쏟아 놓았다.「당신 고향이 대구랑께 문디이구먼, 경상도보리문디이. 그래서 난 더 반갑당께. 대구는 이놈 소리꾼 제2의 고향이여. 6.25때 피난 가서 내가 소리연습 하던 곳이랑께. 영선못과 안지랭이 골짜기가 내 연습장이였지라.」서무과 사무실은 원장실 입구에 자리하였고 원장이 출입할 때는 내가 앉은 책상 앞을 지나 다녔는데 할 일이 없어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원고지를 꺼내 놓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은 내 마음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해묵은 서류철 하나를 펼쳐 놓고, 그것을 검토하는 척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집에 가서 원고지에 옮겨 쓸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그때부터 나는 박동진씨와 가깝게 지냈다. 그것은 국립창극단 임원인 그를 통해서 창극본 집필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그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한 때 인기가 높았던 임춘앵, 김경애 등이 보여준 국극이란게 바로 창극과 비슷한 거여. 그들이 대화체로 말하던 것에 중모리, 중중모리, 혹은 휘모리 등 가락을 덧붙인게 창극이니께 말이여.」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역사속의 이야기 한 토막을 창극 본으로 습작을 시작하였었다.반년쯤 지났을 때 나는 문교부에 자주 출입해야 했었다. 그것은 국립국악원이 10년 가까이 노력해 왔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사업, 즉 국악사양성소를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승격시키는 일 때문이었다. 당시 국악사양성소는 초등학교 졸업생 40명을 전국에서 모집하여 중등과정 3년, 고등과정 3년, 도합 6년 동안 일반교양과목과 전통음악 및 무용을 국비로 가르치던 곳이었으나, 그 양성소를 졸업해도 학력인정이 되지 않았으므로 성경린원장의 전임인 이주환원장 때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 승격을 도모해 왔었으나 대를 이은 그때까지도 성사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성원장도 고령이라 정년퇴임이 3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조급해진 그가 나를 앞세웠던 것이다.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립국악원과 국악사양성소는 문화공보부 소속이고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승격되면 문교부 산하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 예산도 지금까지는 문화공보부에서 편성하고 지원하던 것을 학교로 승격시키면 문교부가 책임져야 했던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사립학교 설치령을 참고하여 신청서를 작성제출 하였었으나 그 서류는 보통교육국장의 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나는 1년 가까이 문교부에 드나들었지만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제2종합청사 9층에 있는 문교부에 가기 위해 승강기에 올랐다가 뜻밖에도 김판영선생님을 2년여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선생님도 나를 알아보시고 반가워 하셨다. 승강기가 오르는 동안 선생님께서는 나의 신혼생활을 궁금해 하셨고, 나는 선생님이 경상북도 도교육감 자격으로 문교부에 출장 오셨나 보다고 생각하였었는데 9층에서 승강기를 내렸을 때「저게 내방이니, 용무 끝나면 와서 차나 한잔하고 가시게」하시며 장학실장실을 가리키셨다.정부기관 중 일반기관은 장, 차관 아래 기획관리실장이 최상급이지만 당시 문교부 체재는 기획실장 보다 장학실장의 발언권이 더 힘을 받고 있었으므로 나는 「선생님! 차부터 먼저 주세요」하고 장학실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 방 입구의 비서실에는 전날 경상북도 교육감실에서 보았던 여비서도 있었다.선생님과 마주 앉은 나는 여비서가 내다준 차를 마시며, 그동안 내가 문교부에 출입하게 된 과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였던 것이다. 선생님도 국악고등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공감 하셨다.보통교육국장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서류들은 다음날부터 차상급자의 결재가 났고 5일 후에는 장관의 결재도 받았으며 며칠 후에는 법제처로 이관되었다가 승인이 떨어져 국립국악고등학교 설치령이 관보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교장선임 문제에 또 발목이 잡힌 것이다.국악인들이 추천하였던 성경린씨의 학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문교부가 인정하는 졸업장이 한 장도 없었다. 승동교회에서 운영하던 야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국악사양성교육을 받은 것이 그의 학력 전부였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는 당시 서울음대와 이화여대 음악과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다.「고등학교 교장자격도 인정 않으면서 서울음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의하는 건 왜 인정하느냐?」나는 담당공무원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먹혀들지가 않았다. 그 무렵 김판영선생님은 장학실장 자리를 떠나 인천교육대학 학장으로 가신 후였으므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당시 문교부 측에서는 서울음대의 장사훈 교수를 교장으로 앉히라 하였지만 내가 찾아갔을 때 그는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장선임 문제는 반년이 넘어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8월20일경에 나는 문교부의 복도에서 김판영선생을 다시 만났다. 당시 선생님은 인천교육대학 학장 겸 경기도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계셨는데 차관실에 출장차 오셨던 것이다.선생님을 따라 차관실에 들어간 나는 그동안의 고충을 선생님과 차관에게 말씀 드리고 도와주십사고 부탁을 드렸다. 김판영선생께서도 선처해 주라고 차관에게 부탁하셨다.그해 9월 4일, 성경린씨는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으로 발령 받았고, 그동안 나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던 그의 할애요청을 두 부서에서 승인하였으므로 그때까지 문화공보부 소속이던 내가 문교부 소속이 된 것이다.성경린교장이 평가한 나의 역량은 순전히 김판영선생님 덕분에 높아졌던 것이다.국립국악고등학교 개교식 준비 때문에 나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모표, 뱃지의 도안 및 제작, 교기 도안 및 제작, 초청장 기안과 인쇄 및 배포, 교사초빙, 학교건물 대청소 등, 그 어느 것도 내가 아니면 앞장 서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성경린교장이 개교기념행사로 그 무렵 사용이 가능해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할 방아타령, 즉 백결선생의 이야기를 극본화 할 것을 나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극본은 퇴근 후 집에서 밤새워 쓰고 있었다.건강한 30대 초반이었으나 몸에 무리가 갔던 모양이다. 오후만 되면 으슬으슬 추웠고 식욕도 감퇴 되었다. 처음에는 몸살 정도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증상이 5일 이상 계속 되었으므로 집 가까이 있는 개인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다.두 살짜리 아들의 잔병 치료를 위해 아내와 함께 이따금 드나들던 그 병원의 의사 김중환씨는 포항 출신으로 경대의대를 졸업한 사람이며, 파는 달랐지만 본관이 나와 같은 성씨였고 나이도 동갑이였으므로 가끔 만나면 농담도 주고받으며 함께 소주잔도 기울이던 사이가 되었던 터였다.「몸에 열이 많아 창자에 염증이 생겼으니 거친 음식 먹지 말게」그의 말을 듣고 이틀 동안 통조림으로된 복숭아와 포도 등으로 끼니를 때우며 출근을 하였다.그날 점심때 구내식당에 맡겨 둔 통조림을 찾으러 갔을 때 주방요리사는 양배추를 곱게 채 썰어 무치고 있었다. 새콤한 식초냄새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내 코끝을 스쳐 갔을 때 갑자기 식욕이 생겼다. 원래 나는 육식보다 채식을 좋아하였고 특히 식초나 참기름을 넣고 무친 나물로 비벼 먹기를 좋아 했었다.「아주머니, 오늘은 나도 밥 한 그릇 주세요. 무치시는 나물 보니 군침이 도네요」그래서 그 날 점심은 그 나물에 비빈 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었다. 그런데 퇴근 후 집에서 잡다한 일을 마무리 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랫배가 몹시 아파왔다. 당시 아내는, 우리가 상경하던 해 가을에 출산한 아들을 돌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두 번 째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한 아내가 나의 신음에 놀랐지만 원래 밤에는 겁이 많던 여인이라 어둠을 헤치고 병원까지 달려갈 수가 없어 주인집 아들에게 부탁하여 가까운 병원에 가서 왕진을 청하였다.「음식 조심하랬는데 거칠게 먹었군 그래. 창자가 뚫어졌으니 수술해야겠오. 천공성복막염이라고.」급히 달려왔던 의사 김중환은 내 몸을 두루 살펴보고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아「헛소리 말고 진통제나 한 대 놔주게」 말했다.「그래 진통제 놔 줄테니 빨리 준비하고 병원으로 오게. 난 먼저 가서 수술준비 할테니까」진통제 주사를 놓아준 그는 서둘러 돌아갔다.아랫배의 통증이 잦아들고 있었으므로, 나는 웅크리고 누워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아내는 내 곁에서 몹시 불안한 심정으로 굽어보고 있었으리라.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였는데 의사가 가고 난 후 얼마 아니 되어 통금 사이렌이 울었던 것이다.이튿날 새벽,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기 조금 전까지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원고 집필 한답시고 밤잠을 설친 날이 많았었는데, 그때 부족하였던 잠을 몰아서 잤었나보다.통금해제 사이렌 소리가 끝나고 채 10분도 아니 되었는데 다급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주인집 남자가 나가서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우리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내 곁에 앉아서 밤을 지새웠던 아내가 방문을 열자 뛰어 들어온 사람은 지난밤에 왕진 왔던 그 의사였다.「이 사람 죽으려고 작정 한거야? 일어나! 일어나라구. 빨리 병원 가서 수술 받아야 해」그는 누워 있는 나를 끌어 일으키며 말했다. 그 때문에 다시 아랫배의 통증이 느껴졌다.「애기엄마! 이 친군 내가 업고 갈테니 입원준비 좀 해 가지고 병원으로 오세요」말하고는 나를 등에 업고 방을 나섰다.「내 창자 정말 뚫어진건가?」「가서 X레이 찍어 확인시켜 줄테니 잠자코 있으라구」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을 때 그는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병원에서 찍은 X레이 필름에는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검은 부분이 세 곳 나란히 있었다.「어제 밤에는 한 곳이 뚫어 졌었는데 당신이 꾸물거리는 바람에 두 곳 더 뚫어졌다구.」의사는 그 검은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를 꾸짖고 있었다. 반항할 수도 없이 수술대에 눕혀진 나는, 허둥지둥 달려온 아내에게「교장선생님 댁에 전화해서, 내가 오늘 출근 못한다고 전해줘요」부탁하고는 마취제주사를 맞았던 것이다.내가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입원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남산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내와 교장도 초조한 눈으로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개교기념 행사는 내년 3월초로 연기할 테니 아무 염려 말고 몸조리 잘하시오. 그리고 병원비도 내가 준비할 테니 걱정 마시오」성경린교장의 말이었다. 그날부터 한 달 동안 나는 그 병실에서 지내야 했다.배꼽 바로 밑에서 한 뼘 가까이 배를 가르고 창자를 모두 꺼내어 뚫어진 부분을 제거한 다음 다시 꿰매고 집어넣은 후 봉합한 바깥 부위가 쉽게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동안 학교직원은 물론, 국립국악원직원, 문화공보부의 인사계장과 문화과장 등이 번갈아 가며 문병을 왔었고 성교장은 5번이나 다녀갔었다.퇴원 후 나는 다시 바빠졌다. 연기 시켰던 개교기념 행사준비와 딸을 출산한 아내도 산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일도 많았던 것이다.나는 병원에 누웠을 때도 교장이 부탁하였던 백결선생 이야기를 일반극본이 아닌 창극본으로 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여겨졌으므로 교장에게 말씀 드렸더니 아주 좋아 하셨다. 그래서 퇴원 후 박동진씨의 자문을 받으며 그 원고를 마무리 지었는데 그 작품에 출연할 연기자는 학생들로 충당 시켰지만 연출을 맡아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연습기간 중 나는 연출자 역할도 해야 했었다.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막을 올린 「방아타령」은 내가 처음으로 집필한 창극본이였는데 절찬리에 막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작품발표를 위해 제작자나 감독을 찾아 다녀야 하는 영화 시나리오 보다 창극본 집필에 더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 생각은 박동진씨가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개교식이 끝나고 조금 한가해졌을 때 아내의 건강도 회복되었으므로 나는 다시 전에 습작하다 중단하였던 창극본을 마무리 지어 보려고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문화공보부에서 문예작품 현상공모가 있었고 그 속에 창극본부문도 있어 나는 습작하던 작품 「당태종과 안시성」을 정리해서 응모하였더니 그것이 입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또 그 입상이 계기가 되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강감찬장군의 일대기를 창극본으로 집필해 달라」는 의뢰도 받았던 것이다.그런 중에도 나는 문교부와 문화공보부에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문교부는 학사문제 때문이었고, 문화공보부는 예산 편성 때문이었다.내가 가기 전 국립국악원에서는 국악사양성소를 무조건 승격시켜 달라고 하였으므로 매년 거절당하였었는데 나는 문화공보부에서는 예산을 지원하고 문교부에서는 학사만 참견하는 형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산부담을 느끼지 않은 문교부가 국립국악고등학교 설립을 인가해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그랬다손 쳐도 나는 그 일이 김판영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하였을 것이라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별정직이던 성경린씨가 교육공무원이 되었으므로 그의 정년은 4년이나 늘어나게 되었었는데 1년이 지나자 그는 나에게 또 중책을 맡겼다.당초 한 학년 1학급이던 학생정원을 두 학급으로 증원시켜 줄 것과, 그때까지 공간으로 있던 건물 1층에 방을 만들어 기숙사로 활용하게 하라는 것이었다.학급증설은 문교부 소관이지만 문화공보부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학생 모두가 국비생이었으므로 문화공보부에서 예산증액이 승인되어야 했기 때문이며 기숙사 설치는 전적으로 문화공보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었다.학급증설은 김판영선생의 도움으로 알게 된 차관과 원고의뢰를 자주하던 문화과장이 힘써 주었으므로 겨우 성사 되었지만 그 뒤에 접수시킨 기숙사 설치 문제는 쉽게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나를 문화공보부에 특채해 준 인사계장이 그때는 이미 문화공보부를 떠나 한국방송공사 사업국장으로 가신 후였고 학급증설 때 도와주었던 문화과장도 바뀐 뒤였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으며, 문화공보부에서는 예산절감을 위해 식비는 학생에게 받으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하면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반찬투정을 하는 등 부작용이 많고, 학교설립 취지에도 어긋나니 전액지원 해 달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그런 중에도 심심찮게 원고청탁이 들어오고 있었다. 특히 그 무렵에 국립 창극단 단장으로 추대 받은 박동진씨가 후삼국시대의 이야기 하나를 창극본으로 집필해 달라 하셨고 문화과에서도 이따금 단편시나리오를 집필해 달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밤낮 구분 없이 바쁘게 살다보니 아침에 세수할 때면 코에서 피가 나는 날이 잦아지고 있었다.나의 건강을 염려한 아내의 권유를 받고 사직을 결심 하였었으나 성경린교장은 승낙하지 않았다. 기숙사 문제를 매듭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그 학교의 교사나 강사들의 이동도 잦았다. 그것은 국립이란 말에 호감을 갖고 지원 하였던 사립학교 교,강사들이 봉급을 받아보면 일반학교 보다 액수가 많이 적었기 때문이다.언젠가는 국어선생이 말없이 사라졌으므로 그 후임자를 교섭하려고 내가 뛰어 다녔었는데 교장선생이 부르더니「작품 써서 두 번이나 장관상을 받았으니 국어는 당신이 가르치시오」그래서 정식 교사가 교섭될 때까지 한동안 내가 교실을 드나들었는데 그야말로 힘든 일이었다. 다른 학교처럼 학급수가 많으면, 국어선생도 학년별로 있었을테지만 그 학교는 한 선생이 전 학년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주일에 학년 당 1시간씩 출강하던 미술 강사도 말없이 결강하였으므로 찾아가서 만났더니 강사료가 너무 적고 교통비가 많이 들어 못 나오겠다는 것이었다.「미술도 당신이 가르치시오. 당신 그림솜씨는 국전작가 못지않잖소?」그의 결강사유를 들은 교장의 말이었다. 교장이 그런 말을 한데에는 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국립국악원 서무과 주무로 근무할 때 어느 일요일, 집에서 그렸던 수묵담채화 한 점을 원장에게 선물로 주었었고, 그 뒤 충북 영동지방에 있는 난계선생기념사업회에서 박연선생의 영정을 마련하기 위해 대표 두 분이, 그 영정원본이 있는 국립국악원으로 성원장을 찾아 왔었는데 그때 원장이 나에게 초상화작가를 교섭해 보라 하셨으므로 운보 김기창화백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다들 사례금이 적다고 거절하였기 때문에 내가 대신 그려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미술 강사도 한 학기동안 해 보았는데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국어도 그랬고 미술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래서 참고 될 서적을 두루 구입해서 읽어 보았지만 큰 효험은 없었다.견디다 못한 나는 다시 한 번 사직서를 내어 보았지만 또 다시 반려 되었으므로 방법을 바꿔 주거지부터 멀리 옮기기로 하였다.그 무렵, 서울의 철거민을 강제이주 시켜 시끄러웠던 광주대단지가 성남시로 승격되었으므로 나는 장충동 셋방보증금에 조금 더 보태어 성남의 단독주택을 한 동 구입하고 일요일을 이용해서 이삿짐을 옮겼다. 학교직원이나 국립국악원 직원 누구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다시 사직서를 써서, 서울음대 강의 때문에 자리를 비운 교장의 책상위에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성남으로 이주한 후 나는 부탁 받았던 작품원고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필할 수 있었다.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므로 그때까지 막내 누님이 모시고 있던 어머니도 우리 집으로 모셔 왔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한 것 같아 내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고, 객지를 전전하며 늘 외로웠던 아내도 의지할 곳이 생겨 좋아 하였으며 어머니 역시 내 자녀인 남매의 재롱을 보시며 아주 흐뭇해 하셨으므로 고부간이 화목하게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그런데 다 쓴 원고를 의뢰자에게 전달하기가 용의하지 않았다. 당시 성남시는 「한국판 아메리카 합중국」이란 별칭을 받았을 만큼 8도에 본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의 일터가 서울에 있었으므로, 성남과 서울을 오고가는 버스노선 3개는 늘 콩나물시루같이 만원이 되었으며, 백색전화, 청색전화란 별호가 붙은 전화도 신청자가 너무 많아 반년이상 기다려야 개설되었기 때문이다.새로 이주한 우리 집에도 전화가 없었다. 맨 먼저 완성된 것이 국립창극단 단장 박동진씨가 의뢰하였던 「포석정의 한」이었다.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완성된 원고들을 모두 전달하고 나니 새로운 원고청탁이 없었다. 우리 집 주소는 알려주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번거로웠기 때문이었다.원래 무료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심신을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던 나는, 한 달 가까이 할 일없이 지내다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독서신문성남지사였다. 당시 그 신문은 문화공보부가 지원하고 출판협회에서 주관하였었는데 유익한 기사가 많은 주간교양지였지만, 팔도에서 모여 든 가난한 주민들에게는 사실 흥미 없는 신문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독서인구의 저변확대」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어걸고 부지런히 구독자를 찾아 다녔다.내가 독서신문지사를 운영하게 되자 성남우체국장이 서둘러 전화를 가설해 주었다., 언론사에 대한 특혜였으리라.사업에는 워낙 문외한이던 내가 의욕 하나만 가지고 3회 분할납부형식으로 정기독자를 모집하였으나 수금에는 자신이 없어 그 일을 맡길 총무를 채용하였었는데, 성적이 별로 좋지 않더니 2년 만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성남을 떠나 버렸다. 어쩔 수 없어 내가 직접 수금을 하려고 카드를 들고 나가 보았더니, 다들 납부하였다는 것이 아닌가?본사에서는 지대독촉이 성화같고 수금할 돈은 몇 푼 남지 않았으므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지만 나는 그때 많은 지인을 얻었으므로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었다.그래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국방송공사를 찾아 갔었다. 나를 특채해 주었던 이달형씨가 또 한 번 도움을 주실까 해서 였다. 그는 기획실장으로 옮겨 앉아 있었고 어렵게 찾아간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날 우리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퇴근 후 여의도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김작가는 사학과 출신이니 전설도 많이 아실게 아니오? 그리고 역사에 이름 남긴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실테고……, 내 한 번 담당PD에게 말해 보리다. 「전설의 고향」과 「일요사극 맥」이란 프로가 있으니 김작가가 필요할 것 같구려」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때 그가 한 말이다. 그리고 3일 후, 여의도에 와서 담당PD들을 만나보라는 전화가 그로부터 왔었다.이튿날 나는 방송공사에 가서 담당PD를 만났었고 그때부터 「전설의 고향」과 「일요사극 맥」을 집필하기 시작했다.「아버지 회갑 때 넌 세 살이었어. 그런 네가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큰절을 올리며 「아버님 생신축하 드려요」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대견스러워 하면서도 「쟤가 언제 커서 자식 값 하겠느냐」면서 안쓰러워들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방송극도 쓰고 있으니 정말 장하다. 네 아버지도 지하에서 기뻐하실게다.」내가 쓴 전설의 고향 첫 작품이 방영될 때 어머님께서는 무척 좋아 하셨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해 가을에 세상을 떠나셨다.그런데 담당PD들은 사례를 많이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자주 방영해 주었으므로 내가 쓴 원고는 1년 동안 몇 편 방영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언쟁을 하게 되었고 화가 난 나는 이달형씨를 찾아가서 집필을 그만두겠다고 하였던 것이다.「김작가는 동양화도 잘 그리시니 이참에 화단으로 한번 옮겨보면 어떨까요? 요즘은 화가들이 문인보다 수입이 좋다고 알고 있는데……」그날 이달형씨가 진지한 얼굴로 해 준 말이었다. 그가 내 그림솜씨를 알게 된 것은, 나로 하여금 다시 수입 있는 글을 쓰게 해 준 그의 정이 고마워, 한 달 쯤 후에 내가 산수화를 그려 만든 병풍 한 벌을 그에게 선물하였기 때문이었다.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처럼 당시 나에게는 지속적으로 생계방편이 될 일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며칠 후 인사동 입구에 있는 예총화랑에 들려 전시장 임대계약부터 하였었다. 그림부터 그려 모아 전시하기보다, 전시일정을 잡아 놓고 작품 준비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그런데 그해 10월 26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전국이 비상상태에 들어가 버렸으므로 많은 화가들이 계획하였던 전시를 취소하는 소동이 벌어졌었는데, 나는 전시장에 지불하였던 계약금이 아까워 강행하였던 것이다.그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전통수묵화와는 달리 「한가해진 소」, 「병든 왜가리」, 「산불」, 「기계화된 농촌」 등 현대감각과 시사성이 가미된 것들이었다. 그렇게 개최된 첫 개인전은 그나마 성황을 이루었다. 동강 조수호선생과 청람 김판영선생님도 오셔서 격려해 주셨고 동주 박진목선생을 처음 만난 것도 그 전시장에서였다.동주선생은, 대구 달성공원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독립운동가 박상목선생의 아우 되시는 분인데, 형님의 부탁을 받고 대구지방에서 모금된 군자금을 만주로 전하려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의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풀려났던 민족주의자이다. 그러한 동주선생이 내 첫 개인전에 관람 차 오셨다가, 인사를 청하셨으므로 알게 되었었는데 선생은 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그림도 잘 그렸고 시사성도 높으니 내가 제안 하나 하겠네. 자료사진은 내가 줄테니 북한의 명소를 한번 그려 보시게. 혹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이리로 연락해 주면 그 뒷일은 내가 추진해 보겠네.」선생이 주신 명함에는 「민족통일촉진회」 공동대표란 직함이 찍혀 있었다.그래서 전시가 끝난 후 동주선생을 찾아 갔었고, 선생이 주신 「두고 온 산하」라는 책자의 사진을 보며 2년 반 동안 준비하여 안국동에 있던 덕수미술관에서 개최한 것이 「그리운 산하전」이었다.당시에는 신군부의 반공법 적용이 최고조로 강화되고 있을때이므로 주변에서는 나의 신변을 염려하는 사람도 많았었다.「자칫 잘못 되면, 북한을 찬양하였다는 누명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실향민들에게 향수심을 되살려 주는 한편, 비록 이데올로기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산천이나 문화유적은 남북이 동일하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재인식시켜 줄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의욕이 넘쳤던 것이다.그 전시는 대성황리에 끝났고, 나는 그 전시로 인하여 윤길중, 박권흠의원 등 수 많은 정치인과 송지영, 서영훈선생 등 각계의 명사들을 사귀게 되었으며, 고향을 떠나 서로의 생사마저 모르던 많은 이산가족들이 전시장에 왔다가 다시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이산가족 찾기는 K.B.S보다 소산 형이 먼저 시작했던거요」내가 문화공보부에 근무할 때 알게 되어 호형호제하던 한국일보 문화부기자 K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K.B.S의 이산가족찾기 프로를 T.V로 보다가 웃으며 한 말이다.어쨌거나 그렇게 출발한 나의 화단생활은 경희대, 고려대 강사와 조달청 및 한국도로공사의 초빙강사로 10여 년 간 출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경희대는 안치열학장이, 조달청에는 남두진국장이, 그리고 한국도로공사는 손진호본부장이 초빙에 앞장서 주었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리운 산하전에 관람 차 와서 알게 된 분들이었고, 고려대는 경희대 미술교육학과에 자주 강의를 들으려 왔던 「고대수묵화연구회」란 동아리회장 C군의 요청으로 출강했는데, 그때 나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미술을 잠시 지도하면서 느꼈던 어려움 때문에 많은 참고서적을 사서 보았던 것과 동강 조수호선생의 권유로 여러 권 읽어보았던 수묵화에 대한 고전들이 큰 도움이 되었으므로 「수묵화의 이론과 실기」라는 책도 출간하게 된 것이다.동강선생과 김판영선생님도 그때부터 자주 뵙고 조언을 들었었는데 그때마다 두 선생님은 자신의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 하시면서 실제보다 과분하게 치켜 주셨고, 박권흠의원은 대한체육협회 이사장일 때 내 아들의 결혼식에, 서영훈선생은 대한적십자사 총재 때 내 딸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시는 등, 계속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그 무렵 나는 서울예술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서울예술신학대학은, 내가 D영화사에 근무할 때 이봉래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던 이상열씨가 설립했던 개신교 쪽 신학교였다.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성남에 이주한 후였다. 그 무렵 나는 독서신문성남지사장을 하면서도 문학적 창작의욕이 강하였으므로, 서울의 판자촌에서 강제 이주된 주민들의 애환을 소재로 한 단막극본 「대이동 그 후」를 습작 하였었는데, 독서신문 독자 중에는 「경북학생극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던 한세훈이 있었고 그 무렵 그는 K.B.S 성우로 활약하면서 성남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한 번 읽어보라고 하였더니「시승격 3주년 기념으로 시민위안의 밤을 개최하고 그때 이 단막극을 공연하면 좋겠오. 마침 내가 그동안 노역을 많이 맡아왔으니 작품에 나오는 복덕방영감은 내가 맡고, 주인공인 회사원은 후배 성우 박성규에게 내가 부탁하면 들어줄거요」그래서 나는 그것이, 독서신문 홍보에 도움이 되겠다싶어 성호시장입구에 자리잡은 천일극장을 빌려서 행사를 치루었는데, 그때 구경 왔던 사람 중에 이상열씨와 영화배우 이대엽도 있었던 것이다. 영화배우 이대엽씨도 내가 D영화사에 근무할 때 이미 친숙해진 사이였는데 그는 나보다 먼저 성남에 들어와서 남한산성 라이온즈클럽 회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독서신문 독자확충에도 도움을 주었던 터이다.그 공연이 계기가 되어 이상열씨는 나에게 선교극본 집필을 의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그는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고 원래는 신실한 불교신자였었는데, 결혼 후 개신교 쪽 신앙을 가진 아내와 종교문제로 갈등을 빚어오다가, 가정의 평안을 위해 스스로가 개신교 쪽으로 개종하고 신학대학을 거쳐 그 무렵에는 성남에서 개척교회 목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내가 써 준 선교극 두 편은 그의 교회에서 부흥회 때 공연하였고, 소록도에 있던 애양원 원장 손양원목사의 삶을 극화시켰던 「카인의 후예와 아벨의 후예들」은 성남시민회관 신축개관기념공연으로 발표하였었는데 이때 그가 연출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이목사는 개척교회를 운영하다보니, 미안해하면서도 소액의 원고료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1주일에 한번 씩 조달청과 한국도로공사, 그리고 경희대와 고려대에서 수묵화와 문인화 지도를 계속하고 있었다.이때부터 나는, 누가 보아도 겸업작가였었고 그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그러다가 그 목사가 성남을 떠나 서울의 N교회 담임목사로 갔었는데 그는 「생명」이라는 선교극단까지 운영하면서 계속 나를 찾아와 선교극본을 의뢰하였었다. 그 극본들은 그가 부흥목사로 초빙된 전국의 교회에서 공연되었다.강압적이던 신군부의 집권 제1기가 끝나갈 무렵, 이목사는 다시 나를 찾아와, 자신이 예술신학교를 하나 설립하였으니 문창과 교수로 출강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에서 해당과목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문인협회나 미술인협회에서 실력을 인정해 주면 교수직이 허용 되었었고, 특히 신학교는 문교부의 간섭이 그리 극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나는 그 학교에서 문창과학생 지도뿐 아니라, 회화과학생들의 수묵화도 지도하는 겸임교수가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나는 지금도 화가이기 보다는 문인으로 불려지기를 바라고 있다. 때문에 청송으로 내려온 후 대구시민회관에서 개최하였던 「통일염원전(2008년)」의 도록 서시에도 「화가이기 보다는 문인이고 싶었는데/ 세상사람들은/ 희곡작가 보다는 동양화가를/ 쉬이 기억하더군/ 그래서 나는/ 쓰고 싶은 글을 짧게 줄여서/ 그림 속에 써 넣기를 좋아한다네」라고 썼던 것이다. 아직도 고백하지 못한 사연들이 많이 있지만 지면관계상 마무리 지어야겠다.앞에 언급한 사람들 중에는 아직 살아 계신 분도 많고, 이미 고인이 된 분도 많다.살아있는 분들과는 서로 통화하며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진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인생의 무상함이 피부로 느껴진다.삼가, 고인이 되신 분들의 명복과, 살아계신 분들의 건승과 평안을 다시 한 번 빌면서 이제 자판에서 손을 떼어야겠다.

2019-08-08 18:13:50

김광임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내 안의 아리랑/김광임

나는 누구인가비행기가 낮게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마당에서 백구와 뒹굴고 있는 나를 사색이 된 할머니가 집으로 잡아끌어 문을 잠근다. 학교에 입학하고 더듬더듬 책읽기에 재미를 붙여갈 즈음 비행기 소리와 포쏘는 듯 한 소리가 잦아지고 있었다. 어느날 해는 지고 어두운데 벽 한 켠에 걸린 남포불도 켜지 않고 나와 동생의 입을 막아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셨다. 쉿, 난리가 났다나…….키가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아버지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였다. 엄마는 쪽머리에 한복차림의 여느 엄마들과 달리 뽀글뽀글 파마머리와 양장차림에 뾰족구두를 신었다. 뾰족구두가 신기해되똑이며 끌고 있으면 엄마는 " 야 이게 얼마짜린데 "기겁을 하며 높은 곳에 올려 놓았다. 엄마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는 무언지 몰라도 기분은 좋아져 하던 짓을 놓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황해도 사리원 빨간 벽돌의 2층집이 있고 넓은 마당을 가로 질러 여러 칸의 집이 있었다. 고모와 고모부, 누구인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 간호사와 또래의 사내아이등 우리식구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 울타리 안에 살고 있었다. 여동생이 있고 할머니와 하얀 앞치마를 두른 고모가 밥이며 빨래며 살림을 맡아하셨고, 할머니 손에는 늘 걸레인지 수건인지 들려있어 2층을 오르는 난간이며 계단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엄마가 밥을 짓거나 집안일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고모부는 우리 집에 함께 살면서 총포사와 사냥을 하셨고 긴 총을 만져보고 싶어 졸졸 따라다녔다. 할머니의 잰 걸음에 텃밭의 남새들은 초록 빛을 더하고 초여름 땡볕에 양귀비는 선혈을 뿌려놓은 듯 붉었다. 무적자(無籍者)영문도 모른 채로 어느 날 나는 혼자가 됐고 군부대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를 돌봐주던 육군상사가 한분 계셨는데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니 그나마 나에 대한 전후사정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왜 내가 혼자 떨어졌는지, 정확한 생년월일도 알지 못한 채로 군인들과 함께 살았다. 어름짐작으로 열 댓 살 무렵 장교 한 분의 알선으로 군부대에서 나와 병원에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청소와 물자가 귀한 시절 붕대도 빨아서 쓰니 피 묻은 붕대를 세탁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받는 것이 전부였다. 전쟁고아가 넘쳐나던 시절이라 먹고 잠 잘곳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간호사는 내가 안쓰러운지 먹을 것과 옷가지를 챙겨주고 자기 방 한 켠 에 따뜻한 잠자리도 만들어 주었다. 엄마 같고 누나 같아서 시커먼 남자들만 있는 군부대와 달리 포근함을 맛보며 고단한 하루를 견디는 힘이 되었다. 병원 생할도 그리 오래 가지를 못하고 나는 세상 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삶은 보리쌀을 소쿠리에 담아 처마 밑에 달아 놓은 것을 통째로 훔쳐다 먹기도 하고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배고픔보다 견디기 힘든것은 혼자인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세상 인심이었다. 어쩌다 싸움이 붙으면 전후 사정이 어찌되었든 일방적으로 내 잘못으로 몰리는 것이 억울해 나는 점점 악바리가 되어갔다. 덩치 큰 아이들과 싸우려니 오래 끌면 불리해 단번에 승부를 내야했다. 한방이 필요했고 기술이 점점 늘어 발등 올려 차기 한방이면 끝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심심한 시골 남자애들의 괜한 시비에 항상 걸려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 싸움대장이 되었다. 지는 날이면 혼자 분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밤중 그 집 장독대를 돌로 깨뜨려 마당을 간장으로 진창을 만들었고 그아이가 지나기를 기다려 어떻게든 되갚음을 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차츰 나를 건드리는 횟수가 줄었고 나름 시골 동네에서 자리 잡아 살게 되었다. 지금도 흉하게 뭉뚝한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보면 그때의 무모함에 쓴웃음이 나온다. 동네에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아이들에게 등 떠밀려 해 본적도 없는 씨름판에 나서게 되었다. 상대는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힘이 센 아이였으나 응원하는 아이들 앞에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리 몇 판을 모래밭에 내동이 쳐진 나는 쳐다보는 아이들 보기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야 이런 법이 어디 있냐 ? 양회다리 가서 다시하자 "동네 개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로 돌다리가 대부분인데 유일한 시멘트 다리였다. 난간이 없어 가끔 술 취한 어른들이 떨어져 물에 떠내려 가고 다치기 일쑤였다." 양회다리 가서 다시하자"억지를 써 양회다리로 가서 다시 한판 붙었으나 기술로나 힘으로나 상대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나는 씨름이 아닌 나의 특기인 발차기로 상대를 넘어 뜨렸다. 넘어진 아이는 매달리며 내손가락을 깨물었다. 물고 늘어지는 아이를 다리 밑으로 힘껏 차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 쳐 왔다. 집에 와보니 새끼손가락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아팠지만 병원에 갈 돈도 없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고약을 붙여 칭칭 동여매었다. 풀어보지도 않고 내버려두니 퉁퉁 부었다 빠졌다 만지지도 못할 만큼 아팠다 하길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 풀어보니 손가락 끝이 부러져 뼈는 따로 놀고 끝은 흉하게 뭉그러져 있었다. 지금은 이동갈비가 유명한 먹거리촌이지만 당시에는 정육점 한곳이 있었다. 정육점 주인은 뚱뚱한 과부댁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려 달려가 보니 과부댁이 물에 빠져 둥둥 떠내려 오고 있었다. 어른들도 발만 동동 구르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영을 못해 뛰어들지는 못하고 아래로 한참을 달려가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곳에서 기다렸다가 간신히 끌어내었다. 이후로 과부댁은 가끔씩 나를 불러 고기를 썰어주어 영양보충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너무 자주 고기를 주는 것이 부담스러워 정육점을 피해 멀리 돌아서 다녔다. 수리시설이 되어있지 않던 시절 봄철 모내기 때에 비가 오지 않으면 논바닥을 깊이 파서 물을 퍼 올리느라 밤샘을 해야 했다. 방앗간에서 쓰는 피대와 펌푸를 개조해 양수기를 만들었다. 쩍쩍 갈라진 논에 물을 퍼 올려 모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자기논에 물을 대기 위해 나를 데려 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자기들이 알아서 기계를 걷고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가면 다시 펼쳐 설치만 해주면 되었다. 양수기는 봄에는 물을 퍼 올리고 가을에는 탈곡기가 되었다. 벼를 베어 동네 마당으로 싣고 와서 탈곡을 해야 했지만 논에서 바로 탈곡을 하여 사람들의 품을 줄여주는 획기적인 기계였다. 곡물로 삯을 받아 나도 모처럼 양식 걱정 없는 풍요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툇마루에 쌀이며 고구마 잡곡들까지 수북이 쌓였으나 그것을 돈으로 환전 할 줄은 몰랐다. 혼자 먹고 남아 당시 끼니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겨우 밥걱정을 덜었나 싶은 중에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동네에 버려진 네 다섯 살 된 사내아이를 데려와 같이 살았다. 애가 애를 키운다고 동네 어른들 모두 혀를 차며 말리셨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며 고아원에 갖다 주라고……. 그러나 그 시절 고아원이 아이들에게 밥도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보다는 눈 빠지게 나를 기다리는 그 아이와 피붙이는 아니지만 한 이불속에서 느끼는 온기가 좋아 보낼 수가 없었다. 가끔씩 엄마한테 간다고 무작정 신작로 길을 내달리는 아이를 붙잡고 나도 엄마가 보고 싶고 고달픈 현실이 서러워 같이 울었다.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능력도 없는 내가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이 불법이라 하며 관에서 사람이 오더니 아이를 데려가 버렸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군부대에 살면서 미군들이 몰고 다니는 군용차를 태워달라 떼를 쓰면 미군들은 나를 태우고 초콜릿이며 껌이며 당시 우리나라에 없는 귀한 간식거리를 주었다. 군인들도 문맹자가 많던 시절이라 부대에서 저녁이면 야학이 열렸다. 다행이 잠시 다닌 초등학교에서 한글은 깨우친 터라 통신강의록으로 초등과정과 중 고등과정을 엉터리지만 배웠기에 일자무식은 면 할 수 있었다. 하루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생시찰을 위해 헬기를 타고 온다고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볼거리 없는 시골동네에 대통령의 시찰은 놓칠 수 없는 귀한 행사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어른들은 대통령을 뵙는데 예를 갖추어야 한다며 갓 쓰고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기다렸다. 대통령이 나오기 며칠 전부터 구멍가게며 쌀집 등에는 조사반이 나왔다. 현물가와 다른 대답을 정해주어 대통령의 눈과 귀는 철저히 가려졌다. 나는 솔직히 대통령은 관심이 없었고 헬기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뽀얀 먼지 날리는 군중들 틈 맨 앞으로 끼어들었다. 헬기의 강한 바람에 허술한 초가지붕이 날아가고 싸리나무를 엮어 세운 울타리들이 일제히 넘어졌다. 바람과 먼지를 뚫고 나온 이승만 대통령은 몰려나온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셨다. 앞줄에 있던 나에게도 손을 내미니 얼떨결에 대통령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 내가 본 이승만 대통령은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였지만 동네 어른들은 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박수를 치면서 한적한 시골동네가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불법영업 택시양수기와 탈곡기로 돈을 조금 손에 쥔 나는 미제세단 삐꾸 (브익)를 200만환을 주고 샀다. 부대에서 들은 오케이 댕큐 영어 몇 마디와 어깨너머로 배운 운전실력으로 번호판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는 택시영업을 시작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부대가 있는 산골짜기를 오갔다. 처음에는 얼마를 받아야 할지 몰라주는 대로 받았다. 그랬더니 말도 못하는 나를 무시하고 돈도 안주고 부대 안으로 달아나 버리기 일쑤였다. 닭 쫓던 개 울타리 쳐다 보기로 다른 수를 찾아야 했다. 계산도 쉽고 거스름도 필요 없이 무조건 한 명당 1달러 오케이? 손가락을 일곱 번 세어 보이며 7명 7달러 오케이? 일곱 명이 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렸다. 바쁘다고 재촉하면 7달러를 받았고 불법이지만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파출소(지서)에는 한 달에 한번 백양담배 한 보루를 사다주면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다 싶으면 지서장이 오늘은 하지 마래이 미리 연락을 주었다. 그런 날은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다가 읍내에 내다 팔았다. 어른들이 하루에 나무를 오전에 한 짐, 점심 후에 한 짐씩 할 수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지게에 한 짐을 채우고 큰 나무 하나를 톱으로 잘라 끌고 내려왔다. 끌고 온 나무를 자르면 대여섯 짐은 족히 되어 하루하루 돈 버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서랍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느 순간부터 동네 어른들은 돈이 필요하면 내게 달려왔다. 조건이나 이유를 묻지도 않고 원하는 만큼 서랍에서 돈을 꺼내주었다. 말은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었고 받지도 않았다.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도 모르고 번 돈을 어찌해야 할지 정말로 아무것도 알지를 못했다. 시골에서 은행을 본적도 없고 읍내에 은행이 있어도 돈 많은 유지들이나 어른들이 가는 것으로 알고 갈 생각을 못했다. 몇 단짜리 서랍장에 달러와 지폐가 가득 쌓인 어느 날 화폐개혁이 되었다 했다. 지금까지 쓰던 돈은 쓸 수가 없으니 은행에 와서 새 돈으로 바꾸란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가마니 석장에 돈을 담아 리어카에 싣고 털털거리며 은행이란 곳을 난생 처음 갔다. 동네 청년과 함께 리어카를 끌고 가니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았다. 실랑이 끝에 들어가 가마니를 열어보이자 소동이 일어났다. 혼자 사는 애가 돈을 가마니에 담아 리어카에 싣고 오다니…….순사가 달려오고 돈의 출처를 의심받아 지서로 가서 조사를 받았다. 지서장이 나를 알고 있었고 돈을 잘 벌고 있다는 이웃 주민들의 증언으로 세가마니의 돈은 한보자기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더 이상 택시영업은 할 수가 없게 되었고 내 마음도 심란해져 시간만 보내다가 이곳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가자. 가자 서울로갖고 있던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와서 팔았다. 평소에 검은 고무신이나 군화 말고는 신어 본적이 없었다. 신고 싶었던 운동화를 사고 구김이 없어 다림질도 필요 없다는 새로 나온 나일론 남방셔츠를 사 입었다. 이발소에 들러 이발도 하고 한껏 멋을 부린 차림으로 서울로 와서 청량리에 내렸다. 말로만 들어본 남산팔각정을 가보자 걸어서 남산 팔각정을 올라갔다. 올라가서 내 모습을 보니 새로 산 검정 운동화와 새 셔츠, 누가 봐도 시골서 올라온 촌뜨기, 눈에 확 띄었다.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저렇게 집들이 많은데 오늘 밤 어디로 가야하나 상념에 빠진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댓 명의 불량배로 보이는 아이들이"야 너 누구 허락받고 여기 왔냐?"순간 나는 여기가 허락 받아야 오는 곳인가? 속으로 움찔했으나 시골이지만 싸움이라면 누구에게 져 본적이 없는 내가 아닌가." 산에 오는데 무슨 허락을 받아 니가 주인이야 뭐야"?덤벼들었고 우리는 뒤엉켜 치고받는 중에 순사가 와서 남산 밑자락에 있는 파출소로 끌려갔다. 몰매를 맞은 나는 입술이 터지고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으나 연고도 없는 촌뜨기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어른들이 와서 애들은 하나 둘 데려가고 나만 종로경찰서로 인계되어 며칠 구류를 살고 나왔다. 입성기를 톡톡히 치르고 서울 살이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깡패이자 경찰들의 정보원들로 보였다. 우선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했다. 신문이라도 팔아 보고자 동아일보에 가서 신문을 받아 광화문 사거리로 나왔다. 국제극장 앞에서 다른 애들이 하는 대로"석간 동아요 동아" 를 외치며 두 세부 팔았을까 어디서 시커먼 애들이 나를 에워 쌓았다. 누구 맘대로 여기서 신문을 파느냐 시비를 걸었고 싸움이 되어 파출소로 잡혀갔다. 이번에도 다른 애들은 나가고 혼자 남았다. 팔에 무슨 완장을 두른 남자가 오더니 동아일보 옆 건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입구에는 상이군인 감찰대 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두리번 거리는 내게"너 갈데없지? 어디서 온 놈이야?"이것저것을 캐묻더니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면서 심부름을 하란다. 어떤 꼼수가 있을까 두렵기는 했지만 우선 밥걱정 잠자리 걱정을 면하는 것만 다행이다 싶어 주저앉았다. 팔아보지도 못한 신문뭉치를 둘러 메고 광화문 거리에 가서 하늘을 향해 힘껏 뿌렸다. 내 나름 억울함에 대한 화풀이였다. 신문은 호외라도 뿌려진 듯 거리에 날리고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줍기에 바빴다. 전후 상이군인들은 팔에 쇠갈고리를 한 채로 자신들의 희생에 보상이 없는 국가와 세상을 향해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잦았다. 그들을 관리하는 곳이 상이군인 감찰대였다. 힘들이지 않고 의 식 주를 해결한 나는 장차 살아갈 궁리를 해야 했다. 종로 Y M C A 옆에 중앙라디오 전기학원을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던 나는 졸업을 하고 나서는 신입생들을 가르치는 얼치기 강사노릇을 한동안 했다. 이것저것 회로를 연결하고 납땜을 하여 라디오를 조립해서 당시 유행하는 노래도 듣고 저녁이면 연속극도 들었다. 최 희준의 인생은 나그네길, 한명숙의 노란 사쓰의 사나이, 박재란의 산 넘어 남촌에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도 조금은 순화가 되었다. 하지만 라디오가 아직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 밥벌이는 안되어 다른 것을 찾아야 했다. 신문물이 밀려 들어오고 거추장스러운 한복보다는 편한 일상복을 선호하는 시기였다. 기술을 배우고자 양재학원을 다녔다. 서울생활에 적응하며 살고자 애를 써도 세상은 혼자인 내가 편안하게 살게 놔두지를 않았다. 혼란한 가운데 종로와 동대문 시장 일대는 상권과 이권을 두고 불량배들의 폭력이나 패싸움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다. 공기관이나 사회의 통제나 보호가 미치지 않는 가운데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중심에서 몸과 마음이 성할 날이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싸움판에 끼게 되었다. 싸움에서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 나는 몇 명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모를 만큼 사력을 다했다. 잡혀가면 나만 남는 여러번 의 경험이 있어 용산 역으로 가서 인천행 기차를 탔다. 용산 역에는 새까만 무연탄이 역 가운데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개찰구 반대편에는 기차표 없이도 탈수가 있었다. 대부분의 역들이 개찰구는 허술했고 검표 없이 제물포에 내려 인천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항구가 있는 하인천은 서울보다 일자리 구하기는 수월해 세탁소에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주로 빨래를 하다가 서울서 몇 달 배운 양재기술을 밑천으로 수선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옷이 미국의 구호물품이다 보니 우리 체격에 맞지 않는 큰옷을 줄이는 일감이 많았다. 성질은 급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내성격상 누구보다 많이 했고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눈 여겨 보던 이웃 양복점 주인이 더 나은 대우를 약속하며 맞춤양복점 기술자로 나를 불렀다. 기술자로 일이 손에 익어갈 즈음 함께 일하며 챙겨주고 환한 미소를 보내는 C에게 딱히 말로 설명 안 되는 묘한 감정이 솟아났다. 휴일이 따로 있지는 않았으나 일이 좀 한가한 날에 근처 공원에서 데이트를 하고 영화도 가끔 보았다. 험하고 거친 삶을 살아온 나에게 C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렘으로 기다림을 품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아마도 첫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양복점 건물 주인인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될 만큼 체구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찬 아주머니가 있었다. 건물이 여러 채인 부자라는 소문이다. 딸 둘을 두었는데 작은딸을 내게 소개해 줄테니 데이트를 하라며 자꾸만 찾아왔다. 퇴근 때를 기다려 식당으로 나를 끌다시피 데려다 놓고 가버린다. 성당으로 불러내어 붙잡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한 상황이 이어졌다. 자기 딸과 결혼하면 시청 옆에 있는 제일 값나가는 건물을 줄테니 거기서 양복점을 하라고 했다. 곤란한 이상황도 벗어나고 남자인데 남들가는 군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사는데 별문제 없었으나 호적도 없이 군대는 갈수가 없었다. 동네 어른 두 분이 보증을 서고 대서소에서 생년월일을 만들어 호적을 취득해 비로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생년월일은 대서소 주인이 자기 딸과 같은 날자로 만든 것이 1946,6,6 일이다. 내가 태어난 해가 단기와 서기에 같은 숫자가 두 개씩 있다는 얘기를 벽에 붙여놓은 한 장짜리 달력을 보며 들은 기억이 있다. 1944년도가 단기로는 4277년이니 아마도 내가 태어난 해가 1944년이 아닌가 추측만 해본다. 물론 날짜는 알지 못하고... ... 해병대 입대인천항에 들어온 해군함에서 내려오는 해군들의 하얀 제복이 멋져 보였다. 이왕 가려고 마음먹은 군대니 배를 타고 먼 곳으로 나가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해군에 자원을 하였으나 불합격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나오는 중 벽에 붙어있는 해병대 모집공고를 보았다. 해병대는 지원자가 적으니 의도적으로 붙여놓은 벽보였다. 내침 김에 어디든 가보자 해병대에 지원을 했다. 1966,5,28 입대를 해서 훈련을 받으니 혼자 독하게 살아온 나도 거품을 토할 만큼 혹독했다. 하루에도 몇 명은 죽어도 못 하겠다 집에 간다며 군복벗어 팽개치고 알몸으로 달아나다 잡혀왔다. 사회에서 대형사고를 치고 해병대 안으로 도망 오는 애들도 부지기 수였다. 무슨 사고를 치고 왔든지 일단 들어오면 그것으로 끝이었으니 그 당시 사회구조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고단하지만 젊은 패기로 하루하루 견뎠지만 고된 훈련에 비해 먹는 것은 부실해서 늘 배가 고팠다. 요즘 군대처럼 식판이 아니라 양은으로 만든 양재기 두 개에 국과 밥이 전부였다. 한 병사가 더 주기를 청하면 양재기로 머리를 내리쳤고 얇은 양재기는 찌그러져 밥은 더 줄어 들었다. 배고픔을 못견딘 한병사는 설거지 물에 떠내려오는 밥알이며 콩나물 꼭지를 손으로 받쳐 건저 먹기도 했다. 해병대가 창설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훈련을 마치고 신설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신설부대 이니 가는 날로 선임이 되어 장교 말고는 모든 병사들이 후임이다. 처음부터 군에서 가장 어렵다는 쫄병 생활없이 곧바로 선임이 되었다. 개병대로 불리는 군 생활은 모두들 힘들다고 투덜 대었다. 나는 C가 보내온 연서를 받으면 좀더 멋진말로 끙끙대며 답장을 쓰고 기다리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온 내게 두려울게 없었다. 오히려 숨 돌릴 틈 없는 빡빡한 일정에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해병대 정신이 성취감을 넘어 묘한 희열을 느꼈다. 전쟁직후 이승만 정부나 군이나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빨갱이 색출에 심혈을 기울였다. 울산으로 포항으로 군인이면서 민간인으로 잠복하여 작전을 나가느라 부대 앞 민가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부대 안에서 세탁소를 하는 분이었다. 어느 날 부터 조카라는 아가씨를 온갖 구실을 만들어 내 주위를 맴돌게 하였다. 내가 묵는 방을 말끔히 청소를 하고 빨래도 해놓고 먹거리를 들고 무시로 내방을 들락 거렸다. 불편해진 나는 부대로 들어가 버렸다. 중대장은 자신도 고향이 이북이라며 가족이 없는 나를 무던히도 아껴주었다. 제대할 날이 3개월 남짓 남은 어느 날 양복점 주인 아주머니 한테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C가 인천의 아주 유명한 건달 보스와 결혼을 했다. 제대하기 전에 알려 주는게 도리일 것 같아 연락을 하니 편지 하지마라. 생각해 보니 얼마 전부터 편지가 뜸하다 싶었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손에든 편지를 떨어뜨렸다. 믿어지지 않아 이게 꿈이 아닐까? 벽을 힘껏 쳐보니 꿈은 아닌데 당장 쫒아갈 수도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읽어보니 그 건달이 납치하듯 데려가 성대한 결혼식을 했다. 너하고는 인연이 아니니 잊어버려라……. 내무반에 틀여 박혀 꼼짝 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겨우 내린 희망의 실뿌리가 통째로 뽑힌 기분 이었다. 또다시 아무도 없는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머릿속이 텅비었다. 귀신 잡는 청룡부대살아도 좋고 죽으면 더 좋지 하는 마음으로 월남파병을 지원했다. 중대장은 지금이 가장 치열한 전투중이고 열 명 중 여덟은 죽는 전쟁터야 놀러가는게 아니라구, 뽑혀도 안 가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데 제대가 낼 모랜데 돌았냐? 하면서 신청서를 찢어버렸다. 다시 신청서를 넣고 찢기를 반복하다 하루는 술을 잔뜩 마시고 중대장을 찾아갔다."정말 가야 되겠니 왜 가야 되는데?"실랑이 끝에 1966년 5월28일 부산에서 월남 가는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부두에 몰려온 가족들과 대대적인 환송인파의 물결을 뒤로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육지라곤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지났다. 난생 처음 타보는 배 멀미와 알 수 없는 설사병으로 병사들이 쓰러졌다. 처음 보는 좌식 변기에 군화를 신고 올라 앉아 미끄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며 15일을 항해하여 월남 다낭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미군과 월맹군의 전투라는 것이 진지를 뺏고 뺏기는 우리의 6,25 전쟁과는 달랐다. 한 가족 중에도 아버지는 월맹군, 아들은 월남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직장 안에도 적군과 아군이 섞여있으며 오랜 전쟁으로 사회 깁숙히 전쟁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한쪽에서 총쏘고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이 죽어 넘어져도 죽은 사람 옆을 개구리 한 마리 죽어 있는 양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너무나 태연한 그 모습에 전쟁을 하러온 우리들이 이상해졌다. 도착한지 한 달도 안 되어 많은 동료들이 눈앞에서 스러졌고 우리들은 말을 잃었다. 아침에 보았던 동료들의 얼굴이 저녁이면 보이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우리의 작전도 적군을 찾아내는 첩보작전으로 가정집에서 두어 달을 지내기도 하고 민간인들과의 접촉이 많았다. 자연스레 월남 말을 배우게 되었고 말이 되니 월남군과의 협력은 수월했다. 키가 작은 나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현지인 속에 섞여 더 많은 작전수행에 앞장을 서야 했다. 적군의 요충지로 판단한 그곳은 민가도 있고 일상의 삶의 터전이었다. 전쟁이란 얼마나 억울한 희생을 수반하는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어차피 삶의 미련을 버리고 온 나로서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작전을 나가면 맨 앞에 섰고 피해를 최소화 하기위해 일정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숨막히는 긴장속에 내 뒤를 따라오는 병사는 내 발자욱을 찾아 따라오지만 펑 소리와 함께 불바다가 되었다. 1년 내내 더운 날씨는 우리를 더욱 지치게 했다. 건기와 우기로 구분되는 날씨는 우기에는 석달동안 비가 내렸다. 집집마다 처마 끝에 작은 보트가 매달려 있는데 우기에 도로는 뱃길이 되어 보트를 타고 다녔다. 이어지는 작전중 네명이 적군에게 포위되어 닷새가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소변을 받아 마시는 극한 상황이 벌어졌다. 몇걸음 앞에 물이 있고 헬기가 비상식량을 떨궈 놓았으나 머리만 살짝 들어도 사방에서 포가 날아오니 눈앞에 뻔히 보이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구출작전이 시작 되었다. 목이 타들어가 의식은 멀어지고 헛것이 보였다. 치열한 사투 끝에 두명의 전우가 희생되는 댓가를 치루고 우리는 사지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더위와 굶주림에 탈진했던 한병사는 끝내 의식을 못찾고 낯선 이국땅에서 별이 되었다. 그 병사는 귀국을 십여일 앞두고 있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호이안에서 보트에 시레이션을 싣고 해안선을 따라가면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 파는 곳이 있었다. 갓잡은 싱싱한 생선과 교환을 하곤 했는데 하루는 보트의 시동 거는 줄이 끊어졌다. 몇 시간을 바다를 표류하다가 헬기가 와서 구출되어 중대장한테 구둣발로 사정없이 걷어 차였다. 비포리라고 하는 화포가 몸을 훓고 지나가 온몸이 불고기가 될 만큼 화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헬기로 독일 군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전신을 붕대로 싸매고 한 달 넘게 치료를 받고 병원을 옮겨 서너달 치료를 받았다. 나는 화상을 입었으니 당연히 온몸이 일그러지는 흉터가 남을 것이라 짐작하고 치료를 거부하며 죽기를 청했다. 한국의 남자보다 훨씬 체격이 큰 독일 간호사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다. 주사도 거부하고 식사를 가져오면 내던졌다. 하지만 간호사는 표정한번 찡그리지 않으며 서툰 한국말로 참으세요, 참으세요를 연발하며 나를 달랬다. 두려운 마음으로 붕대를 풀자 어디 한곳 일그러짐 없이 말끔했다. 주근깨가 자글하던 얼굴은 박피효과로 오히려 더 깨끗해져 행패를 부린 간호사앞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청용부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렸는데 월남 전투에서 가장 치열하고 어려운 고지를 탈환해서 얻어진 이름이었다. 우리부대에 가수 남진, 진송남, 태원. 이명진이 연예부대가 아닌 전투병으로 왔다. TV가없던 시절이니 얼굴을 알 리 없고 그렇게 유명한 가수인지 알지 못했다.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 왔는데 사격실력을 핑계로 훈련을 시키며 진상 선임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전투중인 병사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선임의 의무이기에 당연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네가 그렇게 유명한 가수라며? 노래 한번 불러보라 군대이기에 가능한 선임병 갑질을 했다. 라디오에서 들어본 목소리로 가수임을 알았고 치열한 전선의 시간표도 세상과 다름없이 흘러갔다.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이 가끔 있었다. 최고의 가수들이 왔지만 젊은 장병들이 가장 환호하는 것은 아슬아슬한 무대의상의 무용수였다. 여자가수의 흥겨운 노래는 그 순간 이곳이 숨 막히는 전쟁터라는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죽은 자가 되어붕대도 풀고 흉터걱정도 없어지니 병원생활이 지루해진 나는 병원 측에 일언반구도 없이 부상병을 싣고 온 헬기를 타고 근무하던 부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기록이나 전상망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나는 3개월 전 화포공격에 이미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귀신도 아닌 내가 나타나니 채 순구 주 월 사령관은" 너 이 새끼 이게 어케된 거이야 방수병 맞네?"하며 부등켜안아 되레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리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전사 처리 되었다니 웃음이 나왔다. 이미 제대 날짜가 몇 달을 넘은 터에 귀국절차만 남아 있었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PN이라는 냉동전문회사에서 사람을 구한다기에 원서를 내 채용결정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어차피 돌아가도 혼자인데 미국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귀국날짜가 임박해지자 생각이 많아졌다. 뻔데기 장사를 할망정 같은 민족이 사는 내 나라가 낫지 않을까 며칠을 갈등을 하다가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2주가 넘는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 해서 군 트럭에 실려 부대로 갔다. 제대를 위한 특별교육을 받고 밖으로 나오니 세탁소 아주머니와 조카인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선이 올 때마다 항구에 와서 찾았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벌써 죽었다는 소리에도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며……. 기다렸다는 것이다.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온 것처럼 나를 부등켜안고 울어 민망했다. 복무기간이 남은 병사는 부대로 복귀하고 나머지는 제대증을 받고 사지에서 돌아온 영웅이 되어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흩어져갔다. 전사자가 되어 있는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웃지 못할 처지가 되어 있었다. 세탁소 아주머니의 간청에 딱히 갈 곳도 없어 우선 그 집에 짐을 풀었다. 무엇보다 주민증을 살려야 어디를 가던 일을 하던 할 게 아닌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모든 서류가 수기로 작성되는 시절 이었다.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나에게 대대장은 백지에 자필로 귀향증이라 써주며 해병대 본부로 가서 해결을 하란다. 차비 2만원을 받아들고 기차에 올랐다. 쫓기며 숨어 들었던 용산역을 지나 서울역에 내려 후암동에 있는 해병대 본부를 찾아 갔다. 귀향증을 내밀었으나 누구 하나 내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뿐더러 믿지를 않았다. 군복에 붙은 명찰과 대대장이 써준 귀향증으로 내가 본인이라는 말도 안되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사망자가 되어 국립묘지에는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으나 내 핏줄이라 증명해줄 사람 하나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서류하나 해다 내밀면 또 다른 증명서를 요구했다. 서울에서 울산과 포항으로 몇 달을 쫓아다닌 후에 나는 죽은 자에서 산자로 복권이 되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장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끊겼던 내 젊은 시간의 한 장이 그렇게 이어졌다. 전투수당과 제대 위문금등 무연고자로 국고에 귀속되었던 약간의 돈을 손에 쥐고 파란 만장한 제대를 하니 1969,10월,30일이다. 연고도 없는 서울로 가는 것을 극구 말리는 세탁소 아주머니에게 서류상 죽은 사람을 살려야 사람 노릇할 것 아니냐 다시 오마 하고 서울로 왔다. 다시가면 세탁소 아주머니와 조카 아가씨에게 잡힐 것 같아 짐도 포기하고 가지 않았다. 짐 속에는 어릴 적사진 등 그나마 내 삶의 흔적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이북이 고향인 중대장은 이러저러한 물건을 자기 집에 갔다 주라며 나를 불렀다. 가끔 심부름을 가본 적이 있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짐을 들고 갔다. 중대장님의 무슨 사전 언질이 있었는지 사모님은 고향이 평안도이며 친척도 없고 외로우니 동생 누나로 같이 살자 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의아한 나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딱히 갈 곳이 없던 나는 망설이다가 그러마하고 눌러 살게 되었다. 누님 댁 에는 초등학생 아들 하나와 딸이 셋이 있었다. 아이들도 별 거부감 없이 나를 삼촌으로 받아들여 난생처음 식구라는 구성원으로 살아보게 되었다. 누님을 자청한 송 정자 여사는 그야말로 평양 피난민 또순이였다. 남자도 힘든 집을 ( 집장사 )직접지어 팔아 군인 월급으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큰돈을 벌었고 무슨 일에나 거침이 없는 여장부였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서울엔 집이 부족했고 지으면 팔려나가니 누님의 집장사는 호황이었다. 그 무렵 서울시장은 난립하는 무허가 건물도 막고 서민들의 집 문제를 해결한다며 산중턱에 아파트를 지었다. 입주한지 4개월 된 마포구 창천동의 와우 아파트 한동이 통째로 붕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났다. 지나가다 보게된 현장은 폭격을 맞은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6개월의 짧은 시공 기간과 터무니없이 적게 쓴 철근이 직접적인 붕괴원인이라 했다. 애초 서울시가 예상했던 건축비의 절반으로 시작한 건설사는 원래 써야하는 철근의 십분의 일도 쓰지 않았단다. 서민들의 생활의 편의성 제고와 도시계획의 측면에서는 훌륭했지만 졸속행정과 부정부패의 결합이 만든 인재였다. 붕괴의 조짐이 있었으나 안일한 대응이 애꿎은 서민들만 희생된 안타까운 사고였다. 말단 공무원이 되다일자리를 찾아야했고 우선은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자 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십대부터 운전을 했으나 한남동 면허시험장보다는 수월하다는 소문이 있어 그리 하기로 하였다. 두 달이 지나고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후 나는 문화공보부 지금의 문화체육부에 기술직 말단 공무원으로 취업을 하였다. 당시 공무원은 월급도 적을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은 복지혜택이 전무한지라 인기가 없는 한직 이었다. 육영수 여사의 행차에 카메라맨들과 함께 따라다니며 청와대를 오갔다. 극장에서 영화에 앞서 나오는 대한 뉴스를 만드는 일도 우리가 하는 업무 중 하나였다. 모든 영화들이 문공부의 검열을 통과해야 상영이 되었다. 책이든 잡지든 신문이든 대중가요의 가사도 검열을 거쳐야 노래가 되어 세상에 나왔으며 공연도 사전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루는 인기가수 남진이 무슨 일인지 들어 왔다가 나를 보고는 특유의 미소와 사투리로" 앗따 방수병님 아니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여기서 보요이"손을 잡아 흔드니 직원들은 궁금해 물었다. 그렇게 아주 얇은 월급봉투 말고는 내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국장님이 어느 날 부터인지 문공부 근처 호텔로 출근을 하는가 싶더니 부서원들은 퇴근도 안하고 합숙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유신헌법이 만들어져 공표하고는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신을 반대하는 시위도 날로 격화 되어갔다. 새마을 운동을 시작으로 잘살아 보자는 구호 속에 이지구상에 가장 열심히 일하는 국민이 되었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은 서울로 몰려와 변두리에는 무허가 집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누님은 가정을 꾸리라며 결혼을 재촉하셨다. 친구 조카딸, 누구동생, 선을 보라 약속을 잡아 놓았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번번이 거절을 하였다. 그즈음의 나는 하루 열심히 일하고 술 먹고 다른 욕심이 없었다. 여자든 결혼이든 내 머리 속에 지운지 오래였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꿈이 없었기에 돈을 모을 필요도 욕심을 낼 일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술사고 밥 사고 퇴근 길 손내미는 아이들에게는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면허중을 받은 운전학원 아가씨한테 연락이 왔다. 면허증 받았으면 밥을 한번 사야 되지 않느냐? 그러마 어려운 일도 아닌데 퇴근길에 사무실로 가니 화장을 곱게 하고 있었다. 근처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술을 한잔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가끔 지나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다주고 커피도 얻어 마시며 사무실을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 내 마음은 화장기 없는 옆자리 직원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몇 번을 가도 눈길 한번 안주기에 그냥 눈치만 보는 중 이었다. 어느날 술 인심 후한 내가 술 약속을 하고 약속장소에 가니 옆자리 그 직원이 나와 있었다. 의아해하니 언니가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으나 연락은 못하고 아는 사람이니 대신 양해를 구하라 해서 왔다는 것이다. 오호! 나는 쾌재를 불렀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절호의 찬스 아닌가? 나한테 아무런 관심을 안보이니 말을 걸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엉뚱한 사람과 시간낭비를 하는 중 이었으니. 이왕 왔는데 식사나 하자며 붙들어 묻지도 않는 내 얘기를 했다. 그녀는 건성건성 대답만 할뿐 어서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가 생각해도 처음 보는 자리에서 무슨 생각으로 치부이자 자랑거리 없는 얘기를 쏟아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향하는 내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눈뜨면 그녀가 보이고 길을 가도 어디건 눈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전화를 걸고는 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하다 끊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났다. 사람답게 살아보고 함께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일보다 더 어렵다 해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지만 너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 다 내가 감당 할 테니 내 뒤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도 모르겠다. 절절한 내말에 동요하는게 보였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너무 아픈 사람이라 차마 외면을 못했다. 아직 연애 도 못해본 차에 연민 이었노라, 처음 만난자리에서 자기 얘기를 할 때는 별 미친놈 다 있네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며 )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누구보다도 완고하고 원칙 주의자이신 장인어른은 펄쩍 뛰셨다. 7남매 중 똘똘한 맏딸의 일탈을 인정을 못하셨다. 가진게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근본을 모르는 고아라는 사실에 말도 못 꺼내게 하셨다. 딸의 따귀를 치시면서 내게는 눈길 한번 주시지 않고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하셨다. 나는 오기가 발동했고 결코 물러설 수가 없었다. 퇴근후 날마다 집으로 찾아가 엎드려 사정도 하고 술을 잔뜩 먹고 주정을 부리기도 하였다.극심한 반대에 결국은 집에서 쫒겨 났다. 한 달 월급타서 보증금 걸고 다음 달 월급타서 살림살이 하나사고 우리의 눈물겨운 신혼살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신났고 하루하루가 즐거웠으나 그 사람은 아니었다.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된 생활을 못견뎌했다. 그럴 즈음 임신이 되었는데 장모님께서 찾아오셨다. 호랑이도 제 새끼는 안 잡아 먹는다며 집으로 부르셨다. 그러나 장인어른은 여전히 싸늘한 눈길로 우리를 외면 하셨다. 집안 어른들은 임신까지 했는데 그냥 두어선 안 된다며 서둘러 날을 잡아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누님은 그 사람을 데리고 금은방에 가서 반지를 하나 사주고 색이 고운 한복도 맞춰 주었다. 나도 새 양복을 맞춰 입고 가족이 없는 내게 국장님이 가족대표가 돼주셨다. 지금은 영화진흥공사 사장이며 부산영화제 위원장으로 활약하시고 계시다. TV에 비춰지는 백발이 성성한 국장님의 모습은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말해준다.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오늘까지 우여곡절이 많은 나는 식장에서부터 술을 마셨다. 식이 끝나고 동료들이 권하는 술은 마다않고 마신 탓에 고속버스를 타고는 골아 떨어졌다. 온양의 여관방에도 어떻게 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여관방이고 그곳에서 내주는 아침을 먹고 현충사를 들러보았다. 현충사 관리소장은 얼마 전까지 문공부에 근무하던 아는 분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고 점심도 사주셔서 먹고 돌아온 게 우리 신혼여행의 전부이다. 미국 가볼까도산 안창호 애국지사의 장남인 필립 안 선생께서 한국에 오시게 되어 체류하시는 동안 안내를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을 하시는데 007영화 촬영 중 사고를 당해 보행이 불편하신 분 이었다. 1년이면 몇 차례 오셔서 독립협회며 흥사단 청와대 방문 등 바쁜 일정을 보내시고 돌아가시곤 했다. 그러던 중 나보고 미국으로 함께 가자는 제의를 하셨다. 결혼을 하지 않아 혼자이셨다. 사람은 많지만 퇴근 후 혼자 인 것이 힘들어 믿고 함께 살 가족이 필요하다. 내가 함께 해준다면 미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책임져 준다고 하셨다.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에 사는 부자라 하셨다. 장관까지 나서서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니 가라고 적극적으로 권유를 하셨다. 집에 와 아내에게 넌지시 운을 떼니 펄쩍 뛴다. 부모 형제 가족과 삶의 근간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 필요가 없다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거냐. 몰아세워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접었다. 하긴 혼자였던 월남에서도 미국으로 갈 기회가 있었으나 접은 내가 아니냐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있는데 장인어른께서 소화가 안 되고 체중이 줄어 우석대학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간암 이었다. 몇 년 전부터 소화가 안되어 동네 의원에서 주는 소화제를 복용하고 계셨단다. 요즘 같은 세밀한 검진이 어려운 시절이라 많이 진행된 후에야 진단이 되었다.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 하니 이일은 어찌한단 말인가. 올망졸망 어린 처남 처제들이 눈에 어른 거렸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한의원이며 용하다는 다른 병원으로 장인어른을 업고 찾아다녔다. 내등에 업혀가면서도 자네가 왜 나를 업느냐며 나를 밀어내셨다. 몇 달을 못 넘기고 장인어른은 쉰둘이라는 젊은나이로 돌아가셨다. 군복무 중이던 큰처남은 이른 제대를 하여 20대 초반의 나이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장녀인 아내도 그 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끝까지 나를 인정 안하신 장인어른에 대한 부채의식을 털어낼 기회도 사라졌다. 보란 듯이 잘살아 처가 식구들에게 인정을 받으리라 다짐을 하였다. 배가 불러온 아내는 허리가 아파 쩔쩔매고 누우면 돌아눕지도 일어나지도 못하여 출근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다. 전화가 없는 시절이니 연락도 못하고 하루 종일 걱정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저녁에 어린 처제 처남들에게 케익과 과자를 사주고 돌아왔다. TV를 켜니 22층 대연각 호텔에 큰불이 나서 진화 중이었다. 소방차에서는 연실 물을 뿜어댔지만 8층에 겨우 닿는 턱없이 짧은 물줄기는 헛손질만 하고 있었다. 요즘 같은 초고층도 아니었는데 고가 사다리나 소방 장비가 없어 열기와 유독가스에 쫒긴 사람들이 무더기로 뛰어 내렸다. 창문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가 힘이 부쳐 떨어지는 참혹한 광경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1년에 한번 통금이 풀려 청춘들을 들뜨게 만든 크리스마스가 스크린 속의 한 장면이 되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중에도 중후한 모습의 대만의 외교관 한분이 하얀 모포로 몸을 감싼 채 창가에 서서 구조를 기다리며 왔다 갔다 하는 처연한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가더니 그 외교관은 너무 늦어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나왔다. 침착하게 기다리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은 지 1년밖에 안된 최신식 건물이었고 급속한 도시팽창으로 건물은 고층화되고 있었으나 그에 걸맞는 안전대책은 미흡한 인재였다는 지적이다. 가능한 소방차가 총 출동했고 군인과 주한 미군의 헬기까지 출동했으나 헬리포트가 없는 옥상은 무용지물로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 대통령도 현장에 나와 독려를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고 세계최대의 호텔 화재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빠가 되다이듬에 3월 산 날이 되어 한밤중에 시작된 진통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녘 양수가 터져 흥건해도 둘 다 무지해서 양수 인 것도 몰랐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아내를 끌다시피 병원에 갔다. 후덕하게 생긴 여의사는 양수가 미리 나와 마른아기를 낳으려면 훨씬 더 어렵다고 겁을 주었다. 출근을 했다가 점심시간에 다시 병원으로 가니 의사는 첫 아이니 아직 멀었어요, 아침도 안 먹은 산모가 요기를 해야 힘을 내 아기를 낳을 수 있다. 병원에서는 아이를 낳아야 밥을준다니 갈비탕 한 그릇을 시켜왔다. 진통이 점점 심해지므로 국물 몇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는 다시 사무실로 갔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예쁜 공주님입니다. 퇴근시간이 되기도 전에 병원으로 달려가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가 내 딸이란다 내가 아빠가 되다니……. 내게도 가족이 생겼다 세상사람 들을 향하여" 나도 가족이 있어요. 여우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새끼가 있다구요"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선생님! 세상에서 이렇게 예쁜 아기 보셨어요?"입이 귀에 걸린 내게 의사는 딸 낳고 저렇게 좋아하는 아빠는 처음 본다며 흉을 보셨다. 사흘 만에 퇴원을 하고 장모님이 오셔서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세상을 다 얻은 듯 들떠 있는 나를 보고 조금은 안심이 되는 눈치셨다. 그러나 준비 없이 엄마가 된 아내는 쩔쩔매고 임신 중에 아프던 허리는 출산 후 에도 차도가 없어 아이를 키우는 일이 녹녹치 않았다. 특히 밤잠을 못자고 온종일 혼자 감당하는 육아를 버거워 했다. 퇴근 후에 목욕을 시키고 기저귀를 빨아 거들었으나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딸아이를 보는 것으로 행복했다.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퇴근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오는 딸 바보가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동네의 세탁소에 아내가 맡겨놓은 양복을 찾으러 갔다. 인천 세탁소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가 나를 알아보며 헤어진 형제를 만난 듯이 반가워했다. 그도 나와 같이 혼자였는데 헤어졌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나를 부러워하면서 저녁이면 종종 집으로 와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나는 가정이 있음에도 적당한 타협을 할 줄 몰랐다. 동료들의 만류에도 책상을 둘러엎고 사표를 내고 나왔는데 집에는 말을 하지 않고 아침이면 나오니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아내는 불같이 화를 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먹고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먹고사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월남에 있는 동안 성능 좋은 카메라를 사서 사진 찍는 일에 푹 빠졌었다. 문공부에서 수준급의 사진사들과 현상과정을 두루 섭렵한 나는 여학교 앞에 현상을 하는 사진 점을 열었다. 한참 개인 카메라를 소지하는 붐이 일어 컬러사진이 보급되던 시기였다. 새로 카메라를 구입한 사람들에게 카메라 조작법이나 사진 찍을 때의 구도 잡기등 작은 팁을 가르쳐주며 세 식구 살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곳에서 청록파로 유명한 시인 박목월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아침마다 사모님과 손을 잡고 산책을 하시는 노부부의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아내는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분을 아침마다 뵙는 것을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여행이라도 가셨는지 보이지 않으면 걱정을 하다 두 분이 다정히 손을 잡고 나타나면 반색을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내 또래로 보이는 시인의 아들이 한참 사진에 재미를 붙여 사흘이 멀다고 찾아왔다. 올망졸망 애기들을 찍어 사진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셨다. 해맑은 아이들 사진을 들여다보며 행복한 웃음을 짓던 청년 박동규 선생님은 서울대 명예 교수이시다.둘째를 낳게 되었는데 장모님은 내심 아들을 기다리는 눈치셨다. 아직 애기인 첫애를 안고 입덧을 하느라 아내는 힘들어 했고 엄마를 대신 큰애는 나에게 매달렸다. 첫애와 달리 아내는 진통이 오고 몇 시간 안 되어 수월하게 둘째를 순산했다. 식구가 느니 어깨는 무거웠으나 두 아이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만으로 배가 부르고 흐뭇했다. 두 돌이 된 큰아이는 동생이 생기고 엄마의 손길에서 밀려나자 도로 애기가 되어 매달리며 투정이 늘었다. 밤에는 목을 끌어안고 잠이 들 때 까지 내 귀를 쓸어 내렸다. 둘째의 이름을 짓기 전 큰아이가 부르던 작은애의 별칭은 지금도 본 이름보다 더 익숙하게 불린다. 그러한 소소한 일상의 행복도 그리 오래 가지를 못했다. 다시 인천으로석유파동이 일어났고 공장들은 줄줄이 도산하니 실업자는 늘고 서민들 삶은 어려워졌다. 체감이 더딘 여러 가지 경제 지표는 차치하고 당장 일상생활의 여러 면들이 불편했다. 한 번에 일정량의 기름만 판매를 하니 주유소에는 긴 줄이 세워졌다. 기름 값이 폭등하자 연탄사용이 늘어나고 여유있는 이들의 사재기로 연탄은 수요룰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줄을 서서 연탄을 사 날라야 했다. 쌓아놓을 여유도 없고 사기도 어려운 연탄을 아끼려다가 미처 마르지 않은 연탄불은 꺼지기 일쑤였다. 불 꺼진 냉골에 두 아이를 끌어안고 행여 감기라도 걸릴세라 전전긍긍하는 날이 많았다. 먹고사는 일이 급해진 세상에 사진 영업은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임대료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가게를 접어야 했다. 당장 네 식구 생계가 막막했다. 더운밥 찬밥 갈릴 여유가 없어 당장에 현금을 쥘 수 있다는 택시회사를 찾아갔다.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온종일 돌아다녀도 사납금 채우기 어려워 며칠 만에 그만두었다. 인천의 작은 공장과 탁구장을 겸한 체육관을 운영하는 곳에 취직이 되었다. 내가 먼저 내려가고 문은 닫았으나 정리되지 않은 가게를 정리하고 아내와 아이를 데려왔다. 인천의 외각에 땅이 넓고 한 켠에 방 두 칸이 있는 건물에 짐을 풀었다. 부사장이라는 분이 한울타리 안에 살았는데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라 하였다. 상품에 붙이는 라벨을 짜는 공장인데 석유파동을 계기로 일감이 줄어 땅을 활용하기 위해 체육관을 지은 것이라 했다. 숙련된 기술자들은 떠나고 남아있는 몇 명의 직원의 뒷바라지에 내가 투입된 것 이었다. 부사장님의 사모님은 내 또래의 자녀와 우리아이 또래 손자를 두고 계셨다. 아이들 데리고 떠나온 피난살이가 얼마나 고달팠는지를 얘기하셨다. 어른인 우리도 죽을 고생을 했는데 어린애가 어떻게 살았노 하시며 된장, 고추장을 챙겨주시고 김장도 넉넉하게 담아 주셨다. 넓은 마당에 아이들이 강아지와 뛰어 놀 수 있어 우선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겨울이 가는 2월 바람보다 더 시린 가슴을 안고 내려온 인천에서 여름이 시작되었다. 8.15 광복절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중 영부인 육 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충격적인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 되었다.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는 역사적인 날이었지만 육 여사의 피격으로 빛을 발했다. 며칠 후 청와대를 나서는 장례식을 TV로 보며 아내는 눈물을 훔쳤다. 피난을 겪은 사모님은 공산당이 얼마나 나쁜지를 열변을 토하셨다. 부동산인 공장 부지를 놓고 사장과 부사장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두 분 사이에서 입장이 난처해져 불편해진 나는 이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먹고 살았을 뿐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는 우리는 다시 막막해졌다. 일자리 찾아 다시 서울문공부 다니던 시절에 만들어진 인맥들이 연결되어 한창 잘나가는 밥솥을 만드는 한상전자에 취직이 되었다. 청계천에 있는 회사에는 기숙사로 사용하는 여러 채의 아파트가 있어 그중 한곳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아파트가 보급되기 전 연탄아궁이를 쓰는 집과 달리 욕실과 거실 입식부엌 모든 것이 새로웠다. 8층이면 고층인데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오르내리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행히 5층에 구멍가게가 있어 아이들과 일상생활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3층과 4층에 회사가 있고 대부분 농촌에서 상경한 젊은이들로 기숙사는 필수였다. 당시 외국 여행가면 하나씩 사온다는 일본의 코끼리 밥솥과 기술제휴를 한 회사다. 똑같은 기술로 만들어 훨씬 싼값에 파니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관리 팀으로 발령을 받은 나는 밥솥을 싣고 부산으로 광주로 전국을 누볐다. 대리점주들은 현금을 들고 물건을 기다렸다. 계좌 이체가 없던 시절이니 지사마다 쌀을 담는 푸대에 현금을 받아 계수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현금을 들고 숙박시설을 이용하기도 어려워 밤을 새워 고속도로를 달려와야 했다. 피곤하여 휴게소에 잠시 들러 눈을 붙여 보아도 트럭에 실린 돈 자루가 걱정되어 편히 잘 수도 없었다. 어느 날은 여관에 들었으나 부피가 있는 돈 가방을 놔두고 불안하여 꼬박 밤을 새우고 나왔다. 옆자리 조수석에 젊은 청년이 동행을 해도 많은 현금을 갖고 다니는 일은 긴장의 연속 이었다. 큼지막한 돈 가방을 경리과에 넘겨주고 나면 긴장이 풀려 동료들과 술 한 잔 하는 것이 유일한 낙 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통금을 넘기기 일쑤였고 동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회사 윗 층에 있는 우리 집 으로 올라왔다. 술 한 병씩 들고 당당하게 제수씨를 불러 안주를 요구하면 아내는 말없이 안주를 만들어 냈다. 술 마시다 거실에 제멋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통금이 해제되면 줄행랑을 치곤 하였다. 큰애가 옆집에 놀러가서 TV만화를 한번 보더니 만화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TV가 시작되는 시간이면 그 집으로 달려가 어두워도 올 생각을 않아 우리를 민망하게 하는 날이 많았다. 말리면 우리도 TV 사내라며 엄마를 밀쳐내며 옆집으로 향하는 아이를 두고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우리는 14인치짜리 TV를 할부로 들여놓았다. 딸아이는 같이 뛰놀던 아이들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몰고 왔다. 만화 삼매경에 빠진 내 딸과 했던 실랑이를 또래의 다른 엄마들이 이어갔다. 결혼을 하게 된 큰처남이 와서 TV를 며칠만 빌려 달라했다. 결혼을 하면서 TV를 살 계획인데 며칠만 빌리자고 해서 우는 아이를 달래며 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두어 달이 지나도 돌려줄 생각을 안 하기에 처갓집에 가보았다. 그런데 전후 사정은 모른 채로 어린애 보다 더 재미있어 하는 장모님 앞에서 우리 것이니 가져 가겠노라 차마 말을 못하고 돌아왔다. 애 엄마도 내 눈치만 보고 말을 못 꺼내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렇다고 할부금이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또 살 형편은 안 되어 칭얼대는 딸아이를 달래야만 했다. 아내는 셋째아이를 갖게 되었고 내 어깨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루빨리 전세금이라도 마련해야 하는 데 월급타서 먹고살고 여유돈은 좀 체로 만들어 지지를 않았다. 두 딸들과는 다르게 입덧이 순해서 평소에 즐기지 않던 고기를 먹고 싶다는 날이 많았다. 위로 두아이 때는 시원한 냉면국물과 아이스크림이 먹는 전부였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고깃집을 지나치면 돌아보며 서운해 하고 처음 먹어본다는 족발을 손가락까지 빨며 꿀맛이라 했다. 통닭이 먹고 싶다기에 한 마리를 사오니 애들과 나누어 먹고는 부족한 눈치였다. 다음날 두 마리를 사다주니 한 마리는 아이들에게 주고 돌아앉아서 닭 한 마리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렇게 잘 먹는 모습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다. 첫아들을 낳은 아내의 친구가 자신이 입었던 임부복을 들고 달려왔다." 먹고 싶은 음식이 분명 아들이다 얘 "태몽도 아들 태몽이니 분명히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으나 그보다는 수월한 입덧으로 잘 먹고 덜 힘들어하는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10월 국군의 날 아내는 아들을 낳았으나 나는 지방 출장 중이었다. 아내는 처제를 불러 두 아이를 처가댁으로 보내고 혼자 병원에 가서 밤 11시에 아들을 낳았다. 퇴원 할 때도 아내는 혼자아이를 안고 와서는 팔이 아파 한참을 고생을 했다. 이번에도 장모님이 오셔서 산후조리를 도와 주셨는데 한 달 전 큰 처남은 첫딸을 낳았다. 아들로 가계를 이어가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니 손자를 들려다 보고 또 들여다 보시며 기뻐하셨다. 회사는 24시간 풀가동 하여 물량을 대기에 총력를 기울였다. 지방 대리점들은 물량확보를 위해 선수금도 마다하지 않아 회사는 돈방석에 앉는 듯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회사 내부에서 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고발을 했다는 소문과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나왔다. 한밤중에 관련 장부 서류들을 우리 집 천장 위에다가 감추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서도 오래 살수는 없겠다 싶어 쫓겨나기 전에 이사를 가야 했다. 몇 년을 집세 안주고 공짜로 살면서 얼마간의 돈을 만들었다. 집을 알아보니 돈보다는 아이가 셋이라는 말에 복덕방도 집주인도 모두가 안색을 바꾸었다. 아이 셋을 데리고는 셋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그 당시 서울의 가장 변두리인 암사동에 서울시에서 서민들을 위해 새로 짓는 10평짜리 아파트를 샀다. 시내와 가깝고 교통편 좋은 곳에 방 두 칸 전세금이 70만원 내외인데 모자라는 금액은 대출로 충당했다. 두 달된 아들을 안고 한겨울에 이사를 갔다. 부동산에서 열쇠를 받아 분명 우리 집 이라고 며칠 전에 도배를 했다. 이삿짐을 싣고 가니 부동산에서 하는 말이 착각을 해서 우리 집이 아닌 앞 동 남의 집에 도배를 해놓았단다. 지금 도배를 시작했다며 기다리라니 어이가 없었으나 다른수가 없지 않은가. 당시 서민아파트 도배는 입주자가 하게 되어있었다. 똑같이 같은 방향으로 지어진 아파트이기에 벌어지는 헤프닝 이었다. 한겨울에 갓난아이를 안고 떨며 애들은 보채었다. 부동산은 연실 머리를 조아리며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깔린 후에 집으로 들어 갈수 있었다. 비록 방 두 칸의 작은집 이었지만 세 아이들과 주인눈치 안보고 마음껏 뛰어 놀 수 있어 더 바랄게 없었다. 변두리에 새로 짓다보니 버스도 안다녀 시내로 나가려면 30분은 걸어가야 버스를 탈 수 있다. 시장이 없어 아이를 업고 고만고만 두 아이들과 장을 보는 일도 만만치 않았으나 마음은 가벼웠다.얼마안가 회사는 부도처리가 되었다. 직원들은 호황이던 회사의 부도는 이해가 안되었다. 회장이 구속되고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니 직원들은 살 길을 찾기에 바빴다. 몇 달을 월급을 못 받은 직원들은 물건이라도 챙겨야 한다며 밥솥을 트럭에 싣고 나왔다. 서로 달라고 아우성이던 분명 그 물건인데 세상인심이 망한 회사 물건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목숨 줄 같은 몇 달치 월급의 밥솥이 작은방 구석에 쳐 박혀 있다가 몇 개는 지인들에게 인심을 쓰고 덤핑 장수에게 고물 값으로 처분해 버렸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했지만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쉽지가 않았다. 어쩌다 구한 일자리도 어렵다는 핑계로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였다. 더러는 그런 사회상을 악용하는 사례도 눈에 띄었다. 일은 했으나 수입이 끊기자 아내는 말도 못하고 내 눈치만 살폈다. 궁여지책으로 중정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술기운을 빌어 어려움을 털어놓자 친구는 그 자리에서 전화를 돌렸다. 다음날 돈이 없다던 사장에게 연락이 왔고 이런 저런 변명과 함께 밀린 월급을 전부 계산해 주었다. 중동으로그러다가 한참 사세를 키우고 있는 율산 이라는 신흥 대기업에 취업을 할 수가 있었다. 석유파동으로 오일달러가 넘쳐나는 중동지역 건설에 많은 근로자들이 나가 있었다. 수입이 국내보다는 월등히 많다니 나로선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어려운 시국이다 보니 신청자가 몰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출국을 하게 되었다. 갓돌을 지난 막내를 비롯해 올망졸망 삼남매를 두고 가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보다도 아내한테 미안했으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항에서 즉석으로 찍은 사진 한장 가슴에 품고 말로만 듣던 중동 땅에 내렸다. 공항청사를 나오는 순간 훅하고 밀려오는 열기가 만만치 않았다. 아열대 지방인 월남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열기였다. 같이 온 어떤이는" 오매 오매 이게 사람 사는 데가 맞으요 "청사로 도로 들어가서는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며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억지를 써 마중 나온 직원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율산 공사현장이 아닌 율산 실업 제다 지사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곳은 중동지역과 유럽의 모든 공사 현장의 물품과 직원수급 수출입 현황을 관리하는 컨트롤 타워였다. 지사장과 함께 다음날부터 시작된 일상은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중동이라는 그들만의 왕국의 특수성이었다. 부를 앞세운 오만에 가까운 자국민 우선과 무슬림 법에 의한 시스템에 무조건 맞춰야 했다. 말이 안 통할 뿐더러 국제 공용어인 영어를 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하려들지를 않았다. 필요한 너희들이 아랍어를 배우라는 식이니 아쉬운 내가 아랍어를 배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류 하나 만들어 관공서에 가서 몇 시간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되었는데 기도할 시간이라며 문을 닫아 버린다. 일반인들도 장사를 하다 기도할 시간에는 손님들을 내보내고 나중에 다시 오라며 문을 닫는다. 하루에 다섯 번을 성지가 있는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 모습은 우리로서는 납득이 안 되지만 모든 것이 신의 뜻 이란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눈뜨면 한국말은 들을 수 없고 아랍어만 들리는 환경에 놓이니 몇 달 지나지 않아 웬만한 소통이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해야 할일은 점점 많아졌다. 주방장은 나를 앞세워 필요한 식재료를 구입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돌아가는 직원들과 신입들이 오면 공항에 가서 출 입국 절차를 밟아 인솔해오는 일이 일주일이 멀다하고 이루어졌다. 쉬는 날에도 귀국을 앞둔 이들이 가족에게 줄 선물 쇼핑에 나를 불러내어 휴일에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관광객을 인솔하고 온 가이드처럼 사람들을 쇼핑센터에 내려주고 값을 흥정하고 물건을 골라주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상점 주인들은 나를 기다리고 고가의 카메라나 아내에게 주면 최고라며 목걸이 등의 선물 공세를 해왔다. 받으면 약점이 되어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될 것 같아 단호히 거절했다. 덥고 먼 이곳까지 와서 힘들게 일하고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근로자들의 작은 행복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좀 더 싼 가격에 살 수 있도록 도움이 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렇지만 귀국하는 이들을 공항까지 배웅하고 돌아서면 상기된 표정으로 손 흔들며 돌아가는 그들이 부럽고 그날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늦은 잠에 허둥대며 하루는 시작되고 지내다 보니 무슬림이 그 사회의 법이고 사회를 지탱해주는 궁극적 가치임을 알았다. 면허증하나 더 받는 심정으로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교리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들의 절대적 신 알라를 향한 기도에 참석하니 무슬림을 인정하는 증명서를 주었다. 그 증명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 일을 하기는 한결 수월해졌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디나 그렇듯이 한국 사람들이 경찰서에 잡혀가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남녀유별이 엄격한 이곳에서 여자를 쳐다봤다거나 금지하는 술을 먹었다거나 하는 우리 기준으로는 일도 아닌 일들이었다. 그럴 때면 내가 나서야 하고 주변의 다른 회사들까지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누구인지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경찰서 유치장으로 달려갔다. 무슬림 증명서를 내밀면 우리는 형제라며 친절하게 앞장서 대부분 풀려 나올 수가 있었다. 아니면 한국사람 어디 있느냐 해도 모른다 안왔다 하면 그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막대한 오일달러 덕분에 이제 새로 건립되는 모든 도시와 건축물은 사막을 지나 멀리 떨어져 있어 장거리 운행은 필수였다. 가는 길도 무슬림이 가는 길과 일반인이 가는 길이 나뉘어져 있다. 무슬림이 갈 수 있는 길은 한 시간이면 족하지만 아니면 세 시간을 돌아가야 했다. 증명이 있는 나는 통행이 가능한데 동승자라 해도 무슬림이 아니면 갈수가 없어 나 혼자 가아하니 할 일은 점점 쌓여갔다. 도로 표지판에도 애니 멀 로드라 해서 무슬림이 아니면 동물취급을 하는 알면 알수록 이상한 나라였다. 제다에서 리야드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앞자리에 있던 잘차려 입은 중동의 젊은 남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간질이었다. 모두들 우와좌왕 하고 있기에 일단 그남자를 편안하게 뉘었다. 이물질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게 머리를 받혀주고 승무원에게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아주며 발작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몸을 털며 일어났다. 사우디 석유산업은 왕족들의 소유였고 일반 경제의 전반이 왕족의 소유인데 비행기에서 발작을 했던 그 남자도 왕족이었다. 그일이 인연이 되어 친분을 맺게 되었고 아랍 말을 하는 나를 형제라며 집으로 초대를 하였다. 집이 아니라 궁궐이었는데 궁궐의 크기도 크기지만 내부 장식의 호화로움에 기가 죽었다. 대리석이며 기둥이 금장으로 번쩍번쩍 그림책에나 나올법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면서 남자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여자는 보이지 않고 비서인 듯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도 차를 내오는 사람도 모두가 남자뿐이었다. 여자들은 외부 사람과의 접촉은 안 되며 외출시에도 남자와 동행을 해야 한다. 젊은 왕족은 알라신 앞에 우리는 한 형제라며 모든 일에 협조를 약속했고 여러 가지 일들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리야드까지 왕족과 함게 전용기를 타고가서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일반 비행기밖에 본적이 없는 나는 넓은 의자며 응접실에 침대까지 있는 전용기를 난생 처음 보았고 타보는 호사를 누렸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점점 많아져 숨돌릴 여유도 없는 시간이 흘렀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좀더 나은 삶을 찾아 먼 이국까지 희망을 품고 왔던 사람들이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경우이다. 뒷수습을 하러 병원으로 장례식장으로 쫓아다녀 시신을 화물기에 실어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황망해할 그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그런 밤이면 아이들과 아내가 간절하게 그리웠다. 바쁘다는 핑계로 편지도 자주 못하는 나에게 막 한글을 깨친 큰아이가 서툰 글씨로 아빠 사랑해요 건강 하세요 쓴 편지를 받는 날이면 하루가 어찌 지나는지 모를 만큼 신이 났다. 아내는 주기적으로 아이들 얘기며 국내의 여러 소식을 보내왔다. 그 무렵 국내에는 중동의 근로자들이 보내오는 달러로 경기가 살아나서 살만하다는 소식 이었다. 반면 남편들이 피땀 흘려 보내주는 조금 여유있는 월급 덕분에 살림은 나아졌으나 마음이 공허한 아내들이 춤바람이 났다, 제비한테 돈을 털렸다는 둥의 뉴스가 실려 근로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신흥 재벌그룹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이어가던 율산 그룹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나 회장은 구속되고 부도처리가 되었다. 본사에서의 모든 공급이 중단되고 사우디 현지에서도 은행거래며 물품반입이 봉쇄되어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였던 수출 물건들도 압수되었다. 유럽과 중동지사를 겸하고 있던 지사장님은 파리로 가버리고 같이 있던 직원들도 현지사표를 제출하고는 미국이며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최말단인 나와 식사를 챙겨주던 주방장만 남았다. 주거래 은행이던 신탁은행의 차장 한분이 채권확보를 위해 급히 오고 사우디주재 대사님이 달려와 수습에 나섰다. 당시 율산은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율산이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이 율산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지사정을 전혀모르고 아랍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되지 않는 결정권 하나 없는 은행직원이나 대사가 감당할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권한과 책임도 없는 내가 볼모로 잡혀있는 상황이 되었다. 운동장 몇 개 넒이의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거래되던 물건들을 사러 와서 나를 찾았다. 어디에 무슨 물건이 얼마큼 있는지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 혼자 며칠 밤을 새워가며 트레일러에 시멘트며 온갖 건축자재들을 지게차로 실어 주었다.5층짜리 단독건물을 임차해서 사무실과 직원들 숙소를 겸하고 있었다. 계약만료일이 되자 주인은 망한 회사와 재계약은 하지 않겠다며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이사를 해야 하나 누구도 집을 주려고 하지 않아 길거리에 쫓겨날 상황으로 몰렸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현지인의 도움으로 작은 집을 구해서 이사를 했다. 예멘의 젊은 친구들을 몇 명 불러 짐들을 꺼내보니 꽤 큰 5층 건물에 있던 집기들을 단층집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반 이상을 버리고 쓸 수 있는 공간도 없이 창고에 짐을 부리듯 쌓아 놓았다. 잘 나가던 사무실의 집기들은 크고 호화로우니 무게도 만만치 않아 옮기던 중 허리를 삐끗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가 없어 병원에 며칠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부자나라여서 그런지 병원비는 내국인 외국인 차별 없이 무료였다. 이사는 했으나 정작 집은 창고가 되어 쉴 공간도 없고 끼니를 걱정하는 웃지 못 할 처지가 되었다. 은행거래가 막히니 전화도 끊기고 식량도 떨어져 근처 다른 회사 건설현장에 가서 끼니를 구걸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걱정은 집에 있는 가족들 이었다. 부도 처리된 회사는 당연히 월급이 정지되었고 앞일은 알 수 없고 편지도 받을 수 없는 오도가도 못 하는 몇 달이 지나갔다. 웃음이 나오고 허망한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보다 더 답답한 일이 또 있겠는가. 잘나가던 회사들이 내가 일 좀 할 만하면 망해버리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가겠다는 나를 은행직원과 대사님이 붙들었다. 나마져 가버리면 감당할 수가 없다며 돈은 자기들이 해결해 줄 테니 수습이 끝날 때까지 있어주기를 원했다. 그럼 지급 당장 여기서 현금으로 주라 그러면 내가 같이 하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책임지겠다는 말 뿐이었다. 송금이나 환전이 자유롭지 않은데 어떻게 보낼 것이냐며 회유를 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주기만 해라 그러나 나중에 해결해 주겠다는 말뿐이었다. 책임을 질수 있는 위치에 있는것도 아니니 그들도 답답하기는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 살겠다고 가버린 이 상황에서 아무도 믿지 않는다. 몇 달 동안 월급도 못 받은 우리식구들이 굶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가 마냥 여기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수중에는 비행기 표 살돈도 없었다. 궁리 끝에 5층 건물 층마다 달려 있던 에어컨을 떼어내 중고시장에 내다 팔았다. 간신히 비행기 표를 구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누구세요?계획도 없이 서둘러 오다 보니 아이들에게 줄 선물 하나 변변한 게 없었다. 다른 사람들 선물 쇼핑 길에 아이들 생각하며 한두 개 사두었던 것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는 식구들이 굶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시라도 빨리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다. 늦은 시각 공항에 내려 다행히 우리 집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탈수 있어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었다. 기다리라 하고 4층을 뛰어 올라가 벨을 누르니 기척이 없다. 몇 번을 누르니 누구냐 하기에 나야 하니 나가 누구냐고 되묻는다. 소식을 알지 못하고 연락도 안 된 상황에서 밤늦은 시간에 남자가 나라고 벨을 누르니 선뜻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다. 문에 달린 외시경을 통해보고 놀라 문을 연 아내에게 8천원을 받아 택시비를 주었다. 어수선한 소리에 큰아이는 잠에서 깨어 놀란 표정으로 와서 안긴다. 아침이 되자 막내는 아빠야? 하면서도 낯설어 엄마 뒤에 숨고 두 딸은 재잘 되며 좋아라 한다. 지금과 같은 전자제품이 없던 시절에 내가 들고 온 소니 녹음기에 노래와 다투는 소리까지 녹음해서 들려주면 방금전 자기들 목소리를 신기해 했다. 듣고 또 듣고 아들 녀석은 정교한 자동차 모형 장난감에 마음이 팔려 느닷없이 찾아온 아빠와의 낯설음을 지워갔다. 경위야 어쨌거나 나는 모처럼의 아이들과의 소중한 시간이 즐거웠다. 얼마 후 율산에서 미지급된 월급은 다른 회사에서 일부를 받게 되었으나 목돈을 만들고자 시작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매형을 삼킨 연탄가스다시 일자리를 구하러 동분서주하고 있는 와중에 누님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 왔다. 5층 건물인 우리 아파트에 전화가 있는 집은 101호 한집뿐인데 우리라인 대부분이 그 집을 통해서 급한 연락을 전해 듣고 있었다. 아침에 연락을 받았으나 전할 방법이 없으니 저녁에 돌아와 현관에서 신도 못벗은채 성남의 병원으로 뛰어갔다. 한방에서 주무시던 매형인 중대장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누님은 혼수상태로 누워 계셨다. 대학생인 아들, 초, 중학생인 조카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공원묘지를 구하고 장례를 치르는데 요즘 같은 병원의 장례시스템이 자리 잡기 전이므로 염습할 사람이 따로 필요했다. 동네에 경험 있으신 분이 해주시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연락도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대학생인 조카의 친구 하나를 붙잡아 맨 정신으로는 용기가 없어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엉터리인 내방식대로 염습을 하여 공원묘지에 장사를 지내고 온 다음날 누님은 깨어나 매형을 찾으셨다. 다른 방에 계시다고 둘러 대니 어느 병실인지 가자 안 된다 실랑이를 벌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말을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는 자식들의 표정에서 눈치를 채신 듯 입을 다무셨다. 누님이 퇴원하기 전에 가스가 스며든 방을 수리를 했다. 집에 도착하자 누님은 그제야 꺼이꺼이 우셨다. 그리 허망하게 가느냐 아직 이별은 준비가 안됐는데 혼자서 가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이냐. 부모 없이 오빠 한분과 피난 와서 고단하긴 해도 자식 낳고 사람 노릇하며 산다 싶었는데 허망 하다 허망 하다. 먼 산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보내시더니 하루는 앞장서래이 어디다 묻었노 산소에 가서는 말 없이 한참을 앉아 계시다가" 내가 정신을 차려야제 야들과 살아 야제 "문을 닫아놓은 식당으로 가셔서 일할 채비를 하신다. 중령으로 제대를 하신 매형은 이것저것 사업을 벌이셨다. 사람만 좋고 군 생활 말고는 세상일을 알지 못해 다른 사람 말만 듣고 시작한 일이 쉽지 안아 빚만 떠안고 있는 중 이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누님은 시청 앞에 식당을 차렸고 깔끔한 음식 맛으로 식당은 북적였다. 그렇게 동분서주하는 내가 중동에 서 목돈이라도 챙겼다고 생각했는지 지인이 만나자했다. 개인택시를 하면 먹고사는 것은 해결 된다며 택시를 사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만한 여력이 없다 하자 빌려 줄 테니 돈이 매일 들어오면 조금씩 갚으라 하였다. 고마운 마음으로 택시를 구입하여 면허등록과 이것저것 수리를 하고 개인택시를 갖게 되었다. 이틀을 운행하고 하루를 쉬는 일상이 손에 익기도 전에 지인은 돈을 돌려주기를 원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택시를 팔아 돈을 갚았다. 급하게 처분하려니 값도 제대로 못 받았고 등록비며 수리비로 들어간 바용은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나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속내를 모르는 이들은 왜 해보지도 않고 그리 했는지 의아해 했으나 설명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급해진 나는 다시 중동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가족들과 떨어져야 했다. 한 번의 경험이 있으니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미안했고 밤이면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1년 더 연장하기를 간곡히 권하는 소장님의 말을 외면하고 돌아와 버렸다. 그 무렵 KBS에서 이산 가족찾기 생방송이 있었다. 처음 3시간의 특별 방송으로 시작했다가 전국에서 몰려드는 신청자가 줄을 이었다. 5개월여의 생방송으로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기록물은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다. 당시에 나는 중동에 가있어 직접보지는 못했다. 방송현장에서 눈물의 상봉이 이루어지고 전화로 혈육을 확인하는 장면들을 눈물을 훔치며 보던 아내가 신청을 했단다. 한두번 묻는 전화만 있었을 뿐 이렇다할 진전은 없다고 했다. 후로도 이북 5도청에 여러번 가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총감독이 되어안산의 자동차부품 제조공장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사장님의 모친께서 꽤 큰 주택에 혼자 계시니 2층에 살기를 권하셨고 집구할 돈이 여의치 않은 우리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막내는 초등학교 중학생인 딸들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수고를 해야 했다. 서울에서 안산까지 출퇴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본과 기술과 자본의 협력회사로 일본손님의 접대와 수도권에 공장 부지를 찾어야했다. 지방으로 다니다 보니 집에 오는 날보다 밖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더 많은 돈은 필요하나 수입은 한정되어 불안한 아내는 일자리를 찾는 눈치였다. 전문직도 특별한 기술도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보험회사 영업직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생명보험회사에 다니던 지인의 권유로 화재보험회사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경험도 없고 낯가림이 심한 내성적인 성격의 아내가 하기에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 싸서 학교에 보낸 후 출근하는 아내를 말리지도 못하고 바라보았다. 그런 중에도 배움에 늘 미련을 가지고 있던 아내는 공부를 시작했다. 밤이면 식탁에 앉아 강의 테잎으로 공부를 하고 일요일 아침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은 소풍가는 아이처럼 경쾌했다. 반장을 맡아 어린 급우들을 독려하며 포기하지 않도록 시험 준비를 독려하면서, 토해내지 못해 응어리졌던 배움의 갈증을 채워갔다. 수도권에 공장 부지를 물색하던 회사는 수도권의 개발제한으로 허가가 까다로워 조성된 공단에 공장을 신축하게 되었다. 일복 많은 나는 신축현장에 아무런 실권도 없는 감독 아닌 감독이 되었다. 퇴근하는 나를 건축업자가 부르더니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5천이다 가만히만 있어 달라 끝나면 더 줄 수 있다."나는 정중히 고사를 했고 더욱 꼼꼼히 현장을 더 살피게 되었다. 건축업자는 건장한 청년들을 보내 조심하라 며 협박을 하기도 했으나 그런 것이 두려운 내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업자는 자금만 미리 받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공사는 중단되고 다른 업자를 불렀으나 이미 지불된 돈에 추가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원하는 공기를 맞추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사장은 나를 불러 대책을 물었고 어찌 되었건 당신이 해보라 무조건 해야 한다. 안 되면 손해가 너무 크다. 아무런 책임 안 지울 테니 완공만 시켜보자 내가 본 당신은 분명히 할 수 있다. 하도 완강하고 도면대로라면 못할 것도 없겠다 싶어 해 보마 하였다. 그날부터 집에도 못가고 공장 한구석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자며 밤늦게까지 강행군이 계속 되었다. 현금을 한 자루씩 받아 모든 자재와 인부들의 임금을 현장에서 즉시 지급했다.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아 공사는 속도를 내었고 자재비도 예상보다는 적게 들일수가 있었다. 1년이 넘는 동안에 집에는 손에 꼽을 만큼 가보니 아이들이 입학을 했는지 졸업을 했는지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아내에게 미안했으나 먹고 살자면 할 수 없다고 자위를 했다. 공사가 끝나고 새로 지은 공장에서 새로운 물건을 생산하게 되자 사장은 나를 불렀다. 건축업자의 유혹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눈치였다."방기사님 고생 많았습니다. 정말 고맙구요 며칠 푹쉬고 나오세요 "하며 봉투를 내밀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2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다음날로 부동산을 찾아간 우리는 산 자락마을 낡은 연립주택을 대출금을 안고 구입해서 이사를 하였다. 위태롭게 겨우 이어지는 살림살이 였지만 세 아이들은 아무런 말썽 없이 공부도 곧 잘하며 잘 자라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했으니 사장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나는 사장을 뺀 다른 고위 간부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타협할 줄 모르는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회사를 나와 버렸다. 물론 아내는 알지 못했고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안다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따져 묻지는 않았으나 나를 못미더워 하는 눈치였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난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인줄 알면서도 행동이 앞섰다. 옳거나 그르거나 선택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는 나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아내는 보험대리점이라도 해보라기에 몇 달을 공부해서 자격을 얻어 일을했지만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애들 학비며 당장의 생활이 안되었고 대출금이 있는 집에는 독촉장이 쌓여 갔다. 그래도 견뎌보자는 아내의 말을 뒤로 어렵게 마련한 집을 팔아버렸다. 너무 빠른 나의 결정에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말을 못했다. 큰딸이 고3이었는데 야간자율 학습을 마치고 밤늦게 오는 1년동안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아이의 귀가를 도왔다. 한참 여자들의 납치가 사회문제로 떠들썩하고 새벽에 도시락 두 개를 들고 가서 밤 10시가 넘어야 오는 아이를 위해 아비로서 할 수 있는 것이 그 것 뿐이기도 했다. 정 술 생각이 나면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동네에서 한잔하면서. 큰애는 대학에 진학을 하였고 준비가 안된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아내는 동분서주 하는데 나는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아내의 학구열은 계속되어 방송대에 진학을 했다. 자다가 깨어보면 식탁에 앉아 끙끙대며 시험공부를 하고 시간이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안쓰러우면서도 한편 못 마땅한 적도 있었지만 밤길을 아내 혼자 오게 할 수는 없었다. 끝나기를 기다려 함께 돌아오는 시간이 나쁘지 만은 안았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쇼핑도 놀이도 마다하고 힘들게 공부를 하는 것은 아마도 공부가 힘든 아내의 삶의 피난처가 아니었나 싶다. 입학은 쉬우나 졸업이 어렵다고 하던데 아내는 유급 없이 졸업을 했고 엄청난 보물이라도 찾아낸 듯 행복한 표정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지만 내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와 준 행복에너지로 나는 달라졌다. 살아온 인생의 덧칠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펼쳐가고 싶다. 가슴 한구석 응어리진 것이 다 날아 갔노라 며 아내는 뿌듯해했다. 졸업 후 5년 동안 함께 공부한 동아리 회원들이 외조에 감사한다며 식사자리에 남편들을 초대했다. 남편들은 아내를 어떻게 외조를 했는지 자랑하는데 해준 게 없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협조는 없었으나 방해하지 않았으니 오늘 이 자리 참석 자격은 있노라 며 너스레를 떨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진 나는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지라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나 혼자 도망온 것 같은 모양새로 생활의 모든 문제는 오롯이 아내혼자 감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학생, 중학교 고등학교 눈만 뜨면 돈이 필요한 그시기를 어떻게 넘어왔는지 지금도 알수가 없다.졸업을 한 아내는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속셈학원에서 논술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원이 딸린 작은 유치원의 공동운영을 맡게 되었다. 맞벌이 엄마들의 육아문제로 종일반 이 대세였고 오전만 운영하는 유치원은 점차 아동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국문과 출신인 아내는 어린이집 운영에 필요한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중앙대학교 교육원에 입학을 했다. 공부가 필요하면 주저 없이 시작하는 아내의 학구열이 발동된 것이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고 저녁이면 10시까지 수업을 듣는 힘든 여정이 시작되었다. 귀가 길을 돕고자 저녁이면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아내를 태워왔다. 오전 수업으로 끝나는 유치원과 달리 어린이집은 식사도 잠자리도 가능한 내부시설에 필수 규격을 맞추어야 했다. 처음 시작할 때의 약속과 달리 어려움을 겪게 된 와중에 IMF를 맞게 되었다. 자의반 타의반 운영을 맡게 된 아내는 낡은 건물에다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임대료 조정을 요구했다. 주인은 들어 주기는 커녕 오히려 나가라고 하니 어린이집을 옮겨야 했다. 30년이 넘도록 같은 사람에게 임대료를 챙기면서 떨어진 문짝한번 고쳐준적이 없었다. 건물 주인은 낡아진 건물을 도리어 원상복구를 해놓아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며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임대료가 조금은 저렴한 곳으로 시설을 갖춰 이전을 했다. 가진 돈이 없었으니 빚을 내었고 이자를 감당 하자니 점점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자와 임대료에 직원들 월급주고 나면 남는 게 없어 빚은 늘어만 갔다. 후배에게 넘기기로 했는데 건물주는 시설에 대한 권리금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생떼를 썼다. 예상 밖의 상황에 혼란스러웠지만 이미 결정이 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어 권리금보다 적은 보증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빚으로 남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게 되었다. 온전한 정리가 안 되어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더 어려운 상황으로 내 몰렸다. 일자리를 찾았지만 어린이집 교사로 청하는 곳은 있어도 그 수입으로는 감당이 안되었다. 아내 친구중에 부동산 중개사자격을 취득하여 사무실을 연이가 아내를 불렀다. 마침 건축경기가 좋을 때라 단독주택을 헐고 빌라를 지어 분양하는 건축업이 호황중 이었다. 상담을 맡아줄 직원이 필요하다니 아내를 추천했고 분양사무실에 일자리를 얻어 나가게 되었다. 인상이 좋은 평판을 받는 아내는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며 금방 적응해 나갔다. 한 동 여덟 가구를 한 달여만에 완판을 하니 건축업사장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새로 짓는 현장을 오가며 수입도 차츰 나아졌으나 빚을 갚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원점으로그 무렵 500여 가구 아파트 신축현장에 전기공사를 맡아서 하게 되었다. 절반쯤 공사가 진행될 무렵 원청 건설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덩달아 부도를 맞았다. 그동안 들어간 자재비와 인건비는 물론이고 억대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부도소식이 전해지자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인부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난리를 치는 바람에 살고 있던 집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인건비와 자재비등을 계산하고 나니 백여만 원이 남았다. 이사는 해야해 원청 사장에게 2천만 우선 변통이라도 해주기를 청하자 그러마 약속을 했다. 남은 돈으로 방 두칸을 계약해 놓았으나 이삿날이 되어도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돈 전부인 계약금도 날아가 버렸다. 말을 잃은 아내는 눈길한번 안주고 나가 버렸다. 집은 비워 줘야하고 갈 곳 없는 이삿짐을 챙겨 보관소에다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애꿎은 살림살이를 깨버리며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한시라도 게으름을 피워본 적도 없고 힘든 일을 마다한 적도 없었다. 공짜를 바란 적도 없이 죽어라 열심히 살았는데 이건 뭐지? 정말 살고 싶지가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아내가 걱정이었다. 돈 한 푼 없이 어디에 있는지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자꾸 전화를 할 기분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한강공원에 있다기에 앞뒤가릴 것 없이 달려가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오도카니 앉아 있는 아내가 보였다. 우선은 반갑고 가슴이 아팠다. 한 달 만에 만난 아내는 차분한 어조로 당신과도 이세상도 그만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무엇 하나 풍족히 해준 것 없는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은 보여줄 수 없다. 우리 다시 해봅시다, 이보다 더 나빠지겠느냐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아내는 그 달 월급을 보증금으로 안 된다는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지하방 두개를 얻었다. 주머니를 털어 보관소에 있는 짐을 찾아 왔다. 이사는 했으나 생활비가 없었다. 아내는 걸어서 출퇴근을 했고 점심 값으로 주는 몇 만원으로 한 달을 버티면서 우리는 할말이 없어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함께 살지 않아서였다. 우리야 이렇게 견디면 되는데 지금 아이들이 함께라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날아드는 독촉장과 하루에도 몇번씩 걸려오는 전화에 숨이 막힐 지경이나 아내는 오히려 담담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올라갈일 밖에 없지 않느냐며 어느 때 보다 씩씩했다. 아내는 젊은 시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주머니의 간곡한 권유를 못 이겨 교회에 잠깐 다녔다. 그곳을 떠나 이사를 한 뒤로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누가 뒤 꼭지를 잡아 당기는 느낌이라 했다. 교회를 가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어느 교회를 갈까 물색중이라 했다. 큰딸 내외가 성경책을 두권을 사들고 찾아왔다. 사위는 정색을 하며 무릎을 꿇고" 아버님 이제 어머님과 같이 교회에 가셔야죠"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소리다. 큰딸은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교회에서 만나 같이 성장한 청년과 결혼을 했다. 돌아온 주일날 아침 아들 내외가 집으로 왔다." 아버님 같이 가세요. 네? 아버님 "팔을 잡아끄는 며느리를 거절을 못해 어정쩡 끌려갔다. 누구보다도 교회를 비판하고 안티인 내가 교회를 가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아내는 신축한 빌라를 분양하고 나 역시 마른일 궂은일 안 가리고 일을 해 빚을 정리해갔다. 그런 와중에 자꾸만 체중이 줄어 병원에 가 검사를 받았다. 갑상선 항진증 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장 몸져눕는 것은 아니고 약물로 다스릴 수 있다니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강원도에 작은 펜션 몇동 짓는 공사를 하게 되어 아내 혼자 두고 강원도에 가게 되었다. 두어달 동안 정신없이 일을 하면서 밤이되면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가. 열심히 일을 했지만 지금 나는 빈손이다. 마른 하늘에 번개 맞듯 나를 만난 아내는 또 무엇을 위해 그리도 열심히 뛰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며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은 아내를 생각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은? 묻고 나니 할 말이 없다. 나도 힘들지만 지금 누구보다 힘들 아내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싶은데 정작 할 말이 궁했다. 간단히 때우고 넘겼으리라 짐작하지만 목소리라도 들어야 잠이 올 것 같아 문단속 잘하라며 끊었다. 강원도에서 일을 하는중에 올해 내가 환갑 이란다. 환갑이 되도록 빈 하늘에 주먹질만 해댄 공허함으로 쓸쓸했지만 아이들게 떠밀려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어느 날 밤 아내는 한참을 끙끙대며 허우적 대다가 깨어났다. 낚시를 하는데 물고기가 어찌나 힘이 센지 아무리 당겨도 요지부동이다. 당신과 함께 당기니 딸려나와 엉덩방아를 찧으며 깨었는데 분명히 태몽이다. 아들네 아니면 둘째가 아이를 가졌나 기다리던 중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아내는 꿈 얘기를 하며 아들일 것이다. 반가워 하면서도 둘째 생각에 드러내 놓고 기뻐하지도 못하는 눈치다. 세상에 다시 없는 귀한 보물 손주가 태어났고 내손으로 만든 방 씨 호적이 3대를 이었다. 두 달여의 강원도 공사를 마치고 우리는 돈을 조금 만들어 지하방을 벗어나 햇살드는 3층으로 이사를 했다. 큰 사업도 아니고 단시간에 큰 수입이 있는 일도 아닌데 빚을 갚자니 지쳐 포기해 버리고 싶은 날이 많았다. 빚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위안으로 견디는데 사는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소식이다. 이사 올 때에 주인은 사업실패로 세금이 밀려 경매가 진행 중이다. 본인이 경매에 참여하면 우선순위로 집을 지킬 것이니 걱정말라는 말을 믿고 이사를 왔다. 어이가 없었다. 참 산 넘어 산이라더니 갈수록 태산이며 정말 힘이 빠졌다. 그런데 아내는 화를 내기 보다는 주인집 아주머니도 참 딱하게 되었다며 되려 걱정을 했다.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맞은 동병상련은 이해가 되지만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건강하잖아요 아주머니 남편은 뇌경색으로 쓰러져 휠체어를 타는데 거리로 나앉으니 우리보다 훨씬 딱하지 않느냐며 혀를 찬다. 겨우 만든 보증금도 날아가고 막막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묘수가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아내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자식들에게 얼마나 하기힘든 말인지 가슴이 저려왔다. 느닷없는 엄마의 부탁을 아이들은 말없이 들어 주어 작은 빌라를 얻어 이사를 했다. 아내는 최소한의 생활비로 견디며 그 돈부터 갚아갔다. 6월에는 초순에 내 생일이, 말일 경에 며느리 생일이 들어 있다.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 결혼하고 10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던 둘째가 아이를 가졌다한다. 온 식구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축하를 해주었다. 큰애도 아내도 눈물이 나온다며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나 역시 말은 안했지만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었나 하나님 감사 합니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아내는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각별히 몸조심해라 조바심을 내었다. 다음해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 새벽에 병원에 간 둘째는 종일 진통 끝에 늦은 밤이 되어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 했다. 우리 식구 모두에게 더 이상 바랄게 없는 행복한 명절 선물이었다. 만나도 할 말이 궁하던 사돈댁은 환한 표정으로 편하게 뵐 수가 있게 되었다. 손자 녀석은 건강하게 잘 자라 세상에 다시없는 행복한 돌잔치를 했다. 우리는 쉽게 풀리지 않는 경제적인 어려움 말고는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낡은 집이라 두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천정에서 벽을 타고 내려온 물이 방안에 흥건했다. 장마가 오기 전에 수리를 하더라도 집을 비워야 해서 또 이사를 해야 했다. 돈을 조금 더보태 주택의 1층을 얻어서 이사를 했다. 낡기는 했어도 마당에 감나무도 있고 화분도 놓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에 햇볕이 화사하게 들어와 마음까지 환해졌다. 아내와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경찰서에 일관계로 주차해둔 다른 사람의 차를 빼주다가 급발진 형태의 의문의 사고가 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고를 내 본적 없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형편에는 적지않은 돈을 배상해 주어야 했다. 당장 방법이 없어 아내에게 연락을 하니 아내는 다치지 않았느냐 괜찮다. 어렵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걱정 말아라. 감당할 수 없는 큰 금액이 아니니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며 나를 위로 하는 것 아닌가. 일주일 후 아내가 건네준 돈으로 정비공장에서 차를 찾아다 주고 아내를 생맥주집으로 불렀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오지랖 넓게 왜 남의 차는 빼주다 일을 만드냐 는 비난을 예상 했었다. 오늘은 맥주 한잔을 해야 되겠다하니 살다 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란다. 당신도 안 다치고 무엇보다 사람이 안다쳐서 정말 다행이라면서. 돈도 우리가 감당할 만 하고 벌면 되는 것이라 감사하단다. 풀리지 않고 자꾸만 얽히는 것에 화가 치미는 나와 다르게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니 고맙고 미안하다. 그런 아내가 있어 오늘 나는 행복하다. 생맥주 한잔이 이렇게 맛있어 본적이 있었나 싶게 달았다. 그날 밤 나는 오랫만에 꿀잠을 잤다. 인생휴가빚을 줄여가며 하루를 감사하며 살아있는 것이 축복임을 고백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환갑을 맞게 되었고 캐나다에 있는 처제의 주선으로 캐나다를 경유한 미국여행을 가게 되었다. 부채가 남아있는 우리 형편에 과한 지출이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올까 싶어 용기를 내었다. 저녁 4시에 출발해 11시간을 비행해서 벤쿠버에 내렸다. 9월의 날씨는 여행하기 아주 좋은 날씨였다. 동서는 우리를 조경이 잘된 공원으로 데려갔다. 먼지 하나 없는 공원과 맑은 하늘이 인상적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본 조카며느리 처음 만나는 애기들과 인사를 나누고 미국여행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버스에 몸을 싣고 미국을 향해 출발 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교포와 어학연수를 왔다가 귀국을 앞둔 학생들과 함께였다. 한 시간 쯤 달려 미국 국경을 넘게 되었다. 총을 찬 국경 수비대가 보였고 손가락 열 개의 지문을 찍고 마치 범죄자 취급당하는 기분이다. 반나절만 달리면 땅끝마을인 우리와 다르게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의 스케일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농장의 규모에 주눅이 들었다. 농가 한 채가 있고 온갖 농기구에 경비행기와 끝이 보이지 않는 과수원등이 아롱다롱 소박한 우리네 농가와는 비교도 안되었다. 고속도로는 붐비지 않으며 속도표지판 외에 단속경찰이나 감시카메라가 없어도 규정 속도를 지킨다. 횡단보도에 사람하나 없어도 꼬박꼬박 신호를 지키는 운전자가 오히려 답답해 보였다. 라스베거스를 향해 꼬박 이틀을 달려 꿈의 도시에 왔다. 화면에서 보던 야경이며 분수 쇼 카지노, 약물에 풀린 눈을 꿈뻑이며 길가에 널 부려져 있는 군상들이 환락의 도시임을 보여주었다. LA에 왔으니 LA갈비를 먹어야 한다며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랜드 캐년을 돌아보며 자연속에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새삼 느꼈다. 영화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영화촬영의 묘미와 영화에 나온 배우로 분장한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다. 꿈의 놀이공원 디즈니랜드에서는 시속 300km의 자동차를 타보았는데 어찌나 빠른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공중에 달린 의자에 앉아 안경을 쓰고 가상의 세계를 체험하는 것도 디즈니랜드의 명성을 증명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할리우드에 아카데미 시상식장과 유명배우들의 손도장이 찍힌 거리를 걸으며 가이드는 우리나라 배우 이병헌의 손도장도 여기에 장식될 것이라 했다. 햄버거 두 개를 주문했다가 크기에 놀라 다음에는 한 개를 둘이 나누어 먹어도 남았다. 함께 나오는 콜라는 몇날을 두고 마셔야 될 것 같은 분량이다. 박찬호 선수가 꿈을 펼치던 야구장도 지나가는 길에 보였다. 며칠 동안 밥구경을 못한 저녁 자유시간에 식당을 찾아 나섰다. 한식과 가장 흡사한 것을 찾다가 일본식당이 보여 들어가니 주인이 한국사람 이었다. 가장 한국음식과 비슷한 것으로 주문하고 김치가 있기에 주문을 했다. 2불인데 서비스라며 한 접시를 주어 밥보다 김치를 더 많이 먹었다. 일주일 만에 먹어보는 김치는 그야말로 꿀맛 이었다. 꼭 먹어보아야 한다는 수제 햄버거를 크기에 질린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하나만 시켰다. 맥도날드와는 다른 신선함으로 맛있는데 작아서 더 주문을 하자니 시간이 안 되어 아쉬움을 남겨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타이어가 펑크가나 길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십여 분이면 달려오는 우리나라 보험사와는 달리 넒은 땅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살다보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가이드는 6000km를 달리는 버스투어가 평생 탈 수 있는 버스를 열흘에 다 타보는 것이라 했다.벤쿠버 동서네 집으로 돌아오자 동서는 우리를 이 곳 저곳으로 안내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횟집이며 지역의 맛 집과 관광지며 공원으로 우리에게 눈 호강을 시키려 애를 썼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관광길에 나서 빅토리아로 페리를 타고 갔다.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의 이름을 붙인 사계절 휴양도시였다. 사계절 꽃으로 가득한 브차드 가든을 돌아보는데 중국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다. 성조가 있는 말이 시끄럽기도 하지만 부딪히고 발을 밟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버린다. 가이드는 점심을 예약한 식당에 중국인들이 몰려오자 양해를 구하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안내 했다. 벤쿠버로 돌아와 동서를 기다리는데 빨간 자동차에서 내린 고운 할머니께서 도움이 필요한지 물으셨다. 괜찮다고 하니 마트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온 할머니는 다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지 걱정 어린 눈빛을 보이신다. 약속이 되어있으니 걱정 마시라 고맙다 하니 선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오른다. 낯선 동양인이 케리어들고 한참 서있는 모습이 불안하셨던가 보다. 친절한 미소에 가슴이 훈훈했다. 다음은 록키였다. 다시 산을 넘고 넘는 긴 여정이 이어졌다. 브레드피트가 나오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눈부신 물살과 신부의 면사포를 닮은 폭포, G7정상 회담을 치렀다는 호텔과 에메랄드빛 호수는 손을 넣으면 파란 물이 들것 같았다. 해마다 산맥의 얼음이 녹아내려 수년 안에 록키 산맥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어두운 이야기를 들었다. 산자락 중간에 산양들이 내려와 잘 보존된 숲과 맑은 하늘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들 이었다. 난생 처음 일상을 내려놓고 긴 시간을 먹고 놀아보는 꿈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돌고 돌아 찾은LH에서 짓는 아파트에 신청을 해도 번번이 떨어지다가 목감 신도시에 당첨이 되었다. 참전용사에게 주는 우선순위 혜택을 받아 서울에서 멀지 않아 선택을 하였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잡히는 모든 일을 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혼자서 많을 일을 감당했지만 손을 빌리는 인부들에게는 어느 곳보다 후한 일당을 주니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주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 젊은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대전으로, 울산으로 전국을 돌면서 일을 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깁스를 한채로 일을 마치고 집에오니 아내는 어이없다며 화를 냈지만 깁스를 풀자 다리는 별문제가 없었다. 제주도를 오가며 일을 하니 아내는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3년 전 암진단을 받은 큰처남이 점점 나빠져 아내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밤이면 목 놓아 울었다. 장인어른 일찍 여의고 맏이인 처남과 아내가 장모님과 어린 동생들과의 애증어린 세월을 함께 보아온 나는 할말이 없었다. 천안에서 일을 하는 중에 처남이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이 왔다. 처남과 매부이기 전에 같은 세대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같이 한 동년배로 가슴이 먹먹했다. 참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는데 요령 부릴 줄도 모르고 욕심 없이 착하게 꾸역꾸역 일만 하다가 허망하게 가버렸다. 아내는 울지도 못했다. 울면 머리가 깨지듯 아프다며 장례식 내내 진통제를 먹으며 견뎠다. 처남이 떠나고 아내는 많이 힘들어했다. 맛난 음식을 먹을땐 오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길에 좋은 풍광이라도 보면 오빠도 같이라면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특히 미국여행을 함께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함께가자 했을 때 다음에, 그러나 그 다음이 영영 사라져 버렸다. 빚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집주인은 요즘 같은 세상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사는 몇 년 동안 집세를 올리지 않았다. 우리 앞에 살던 이들도 집세를 올리지 않아 마음 편하게 집을 마련할 때 까지 몇 년씩 살다가 이사를 한 것이었다. 보증금도 떼이고 낡은 집 수리비까지 물어주었던 기억이 있는 우리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다. 부모가 자식 혼수챙겨 주듯 아이들이 새집에 살림을 채워 주었다. 보금자리 카페입주가 시작되고 연말은 지내고 가려 하니 아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새집으로 가기를 권했다. 새해를 사흘 앞둔 영하의 추위 속에 50여년을 살던 서울을 떠나 이사를 했다. 새집에 가구도 모두 새로 들여 이삿짐은 단촐했다. 아이들도 달려와 평생을 떠돌던 우리의 입주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이사에 앞서 난방도 안 된 집에 새로 들이는 가구를 받고 설치하느라 떨었던 아내가 감기인지 독감인지 고열과 두통에 몸져누웠다. 새해 연휴로 병원문을 열지 않아검색해 겨우 찾아간 병원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긴줄이 늘어서 있다. 몇 시간을 기다려 의사를 보고 약을 짓느데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보통의 감기는 병원한번 갔다오면 그약을 다먹기 전에 거뜬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사온지 한달이 넘도록 새 주방에서 라면 한번을 끓여 보지 못했다. 한 달여 만에 아내가 겨우 정신을 차렸나 싶을 무렵 내가 이상이 왔다. 병원에 가도 차도가 없어 독감검사도 해보았다. 독감은 아니라는데 몸은 점점 가라 앉더니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가 운전을 못해 정신이 혼미한 채로 가까운 응급실을 찾아가니 폐렴이라며 곧바로 입원을 했다. 열흘이 넘게 입원치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건강은 자신 있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기침을 많이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기침에 먹는 약을 주고 별다른 소리가 없어 넘기고 있는데 아내는 다른 병원을 가보라며 성화였다.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하니 의사는 당장 입원해서 시술인지 수술인지를 해야 한다며 겁을 주었다. 사진을 보여주며 흡연여부를 물어 지금은 끊은 지 10여년 되지만 몇십년을 피웠노라. 입원을 하고 수술날을 잡았다. 복강경으로 시작을 하지만 개복의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며 수술이 시작되었다. 다행이 개복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폐에 혹이 있고 한쪽은 굳어 혹과 굳어진 폐를 절제하였다. 암이 아닌지 조직검사를 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혹여 암이라는 진단이 나올까 아내와 나는 가슴을 졸이며 일주일을 보냈다. 의사는 나쁜놈은 아니네요 하지만 간질성 폐질환이라는 만만치 않은 진단이 내려졌다. 이미 폐가 많이 망가졌고 치료약도 없는 불치병이란다. 남아있는 폐기능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숨이 차기는 하나 의사의 진단과 상관없이 다시 일상은 시작되었고 얼마 후 평소에 좋아하는 바다낚시를 따라 나섰다. 수술한지 엊그제인데 안된다는 아내에게 걱정 말라며 호기를 부렸다. 갈치낚시는 여수에 가서 배로 몇시간을 바다로 나가 밤을 새우는 중노동에 가까운 일이다. 낚시를 바다에 던져보기도 전에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그렇다고 나혼자 돌아올 수도 없는 일이라 배밑창에 들어가 견디었다. 아침에 육지에 올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아내는 내 이럴줄 알았다며 병원으로 나를 끌고 갔다. 일요일이니 응급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입원실이 나올때까지 이틀을 응급실에 있다가 병실로 올라갔다. 다시 폐렴이 온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염증이 잡힌다며 의사는 정말 다행이라 했다. 면역력이 떨어진 노인들은 염증이 안 잡혀 폐렴으로 죽습니다. 하며 급성폐렴은 폐가 많이 상하니 조심을 하란다. 보름동안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러 가면 의사는 매번 같은 말을 한다. 엑스레이에 보여지는 수치와 기능검사가 다르단다. 사진에 보이는 대로라면 호흡기를 달아야 되는 데 폐기능 검사는 젊은이 못지 않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믿음이 좋은 아내는 의사가 모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며 감사하단다. 힘들게 살아오면서 악한곳에 눈돌리지 않고 살아온 당신에게 상주시는 거라며 오늘도 나를 응원한다. 이룬 것 없는 빈손이라 투덜대는 나에게 세상에 홀로 떨어져 죽겠노라 달려간 전장에서 살아왔으며, 그흔한 과외없이 반듯하게 자라 제몫을 하는 삼남매 있지요. 금쪽같은 손자녀와 마누라 있는데 무얼 더 바라느냐며 핀잔이다. 당신은 성공한 사람이니 감사하라고.얼마 전 아내와 베트남을 다녀왔다. 무심결에 어찌 변했을지 가보고 싶다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서둘러 주었다. 50년 전 전쟁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지만 어디든 사람사는 것은 다를게 없었다. 그곳의 일상도 치열하게 분주하고 아이들은 해맑고 먹거리는 풍성했다. 사람 숫자와 맞먹는 오토바이의 물결이 혼란스러웠으나 그들의 삶의 원동력으로 생동감이 넘쳤다. 얼핏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그들만의 원칙이 있어 보기와는 달리 사고는 매우 드물다 한다. 회보라빛 노을이 진다. 해를 배웅하는 이별의 손짓으로 낮과 밤은 소리 없이 자리를 바꾼다. 해가 저물면 새들은 둥지를 찾아가고 사람들도 번잡한 일상을 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눈부시게 초록이 짙어가는 산자락을 바라보며 거실에 앉아 아내와 커피를 마신다. 줄지어선 가로등에 하나 둘 깜빡이는 불빛을 보며 우리집이 카페야 그치? 마주보며 웃는다. 돌아보면 질펀한 그 시간들을 정말 내발로 걸어온 것이 맞는가 싶다. 70여년의 세월속에 시렸던 물줄기가 내안에 핏줄이 되어 소곤대고 있다. 움켜쥔 물처럼 남은 게 없이 허전하나 그핏줄이 모여 언젠가는 더넓은 강물이 만들어지기를 꿈꾼다. 내손으로 만든 호적에 3대의 숨결이 이어지고 풍요속 결핍이 그어느 때보다 혹독한 지금 평범한 일상이 고맙고 감사하다. 오늘의 나를 있게해준 내눈에 영원한 영화배우 아내의 미소 속에 나는 가슴 깊이 숨겨둔 아리랑을 불러본다. 내안의 아리랑을.

2019-08-08 18:13:37

곽종상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쓰레기가 준 선물/곽종상

도시로 간 촌뜨기나는 늦둥이 외동이다. 아버지는 이름난 학자는 아니고 한문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선비였다. 소작 농사를 조금 지었으나 수확량은 남들보다 못했고, 해마다 가뭄과 홍수로 망쳐 보릿고개를 더 힘겹게 넘었다. 제법 큰 마을 구장을 하신 덕분에 겨우 입에 풀칠만 하면서 내가 중학엔 갈 수 없었다.아버지가 환갑일 때 나는 열여섯 살로 농사와 땔나무를 맡게 되었다. 논밭 갈이는 남의 손을 빌리고, 나머지 자잘한 일을 하는 것도 버거웠고, 민둥산에서 나무하기는 더 고역이었다. 3년을 견디면서, 이대로는 앞길이 너무 막막해서 아버지 승낙을 받아 혼자 도시로 나왔다. 밑천이라곤 아버지한테서 배운 명심보감과 붓글씨뿐. 그걸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여러 곳을 찾았으나 왜소한 체격을 보고 모두 손사래를 쳤다. 2년을 간판집, 거울점, 제본소 등을 전전하다가 당시 인기 신문 대구지사에 들어갔다.새벽 네 시에 일어나 서울에서 기차 편으로 내려온 신문을 리어카에 싣고 와서 배달원들에게 분배하는 일을 했다. 배달원들은 신문 속에 광고지를 끼우고, 다시 간추리느라 사무실은 먼지투성이였다. 당시 신문지는 두꺼우면서 질이 낮아서 먼지가 많았다.그래도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고, 신문을 맘껏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일 년에 단 하루(1월 2일)만 놀면서도 신명나게 일했다 . 5년을 그렇게 일하다가 피로가 심하고, 식욕이 없어 밥을 제대로 못 먹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병원에 갔더니 폐결핵이 심하다며 바로 입원하라고 했다.결혼한 지 4년인데 아내는 시골에서 시부모님 모시고 살았다. 1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첫돌 지난 아기와 셋이 살던 아내는 입원 소식을 듣고 올라왔다. 생기 없이 누워있는 나를 보자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만 흘렸다. 아기를 업고 며칠 병수발을 하다가 시골로 돌아갔다. 연로하신 시모님 때문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시 눈물을 지우며 돌아서는 아내에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두 누님이 바느질을 하면서 사는 셋방에 같이 살았던 터라 나의 병수발도 누님이 했다. 다행히 1년 만에 완치가 되어 다시 신문사로 돌아갔다. 그새 월급이 꼬박꼬박 인편으로 전달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도 않고 월급을 받는다는 건 당시로선 엄청난 혜택이라 참 고마웠다. 그 보답을 한다는 심정으로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탁한 공기 속에서 쉬는 날도 없이 장시간 일하다가는 결핵이 재발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2년 뒤 사직하고 나왔다. 밤새 사라진 면서기의 꿈퇴직금으로 열 달 사글세 점포를 얻어 간판점을 차렸으나 잘 되지 않아 빈손으로 시골로 내려갔다. 그 당시는 군사정권 때였다. 마침 같은 마을의 먼 친척 형님이 장교 출신으로 면장을 맡고 있었다. 내가 찾아가 인사를 하니 잘 왔다면서 곧 임시직원 채용이 있을 건데 해볼래? 하기에, 나는 반갑게 승낙하고 그날부터 지저분한 게시물을 깔끔히 새로 써서 붙이고, 차트도 새로 만들어 걸었다. 벌써 직원이 다 된 듯 협조를 했다. 그러나 곧 연락이 있을 거라던 채용은 두 달, 석 달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시 바람이라도 쏘인다며 60 리 거리인 성주 고모님 댁을 찾아갔다. 버스가 없어 걸어서 갔다가 하룻밤 자고 다음날 돌아오니 그 새 면서기가 딴 사람에게 넘어가버렸다. 군인들이 행정을 맡은 때라 작전명령처럼 '내일 오전 열 시까지 임용할 사람을 군청으로 보내라.'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면장이 우리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나는 엉뚱한 곳에 가 있으니 그 명령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부득이 한 마을에 사는 딴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겐 이렇게도 운이 없는가. 여러 달을 기다리다 하룻밤 나들이한 것 때문에 그 행운이 딴 사람에게 가다니...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여러 날 잠을 잘 수 없었다.이 면서기는 내 어릴 적 매우 부러워했던 꿈의 직업이었다.마을 앞 신작로에 아침마다 높다란 자전거 뒤에 도시락을 싣고 휘파람을 불면서 지나가는 모습은 마치 하늘나라 사람처럼 보였다. 그 면서기가 눈앞에 와 있다가 꿈처럼 사라졌다. 명심보감에 운이 돌아오면 가고자하는 쪽으로 바람이 불어 배가 빨리 가서 벼슬을 하고, 운수가 나쁘면 비석 탁본을 해서 몇 푼 벌려고 찾아갔는데 벼락이 그 비석을 때려 그마저 못하게 된다더니 내가 그 꼴이구나.이제 임용 계획이 없다고 한다. 면서기는 포기하고 두어 달 고민하다가 다시 대구로 혼자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글씨를 좀 예쁘게 쓴다는 것뿐이니 등사원지에 글씨를 쓰는 프린트사로 찾아갔다. 그 전 신문사에 있을 때도 가끔 쓴 경험은 있었다. 프린트 사장은 내가 쓴 걸 보고 '좀 연습을 하면 되겠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연습하여 필경사가 되었다. 3년 뒤 제법 인정받는 필경사가 되어 이제 밥벌이는 되겠다 싶어 전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했다. 7년을 떨어져 사는 동안 아이가 셋이 되었고 어머니도 계셔서 여섯 식구가 방 두 개는 있어야 했다. 셋방살이는 아이들이 기를 펼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또 연로하신 어머님도 계셔서 생각 끝에 아주 싼 초가를 샀다. 교회 땅 대지 14평, 부엌과 두 개의 방이 있었지만 아주 작았다. 상수도, 하수구가 없어서 뒷집에 호수로 연결하여 밤에 물을 받아서 쓰고, 쓴 물은 다시 대문 밖으로 들고 나가서 버렸다. 고지대라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500미터 떨어진 공동수도에 가서 한 시간씩 기다려 물을 받아 물지게로 지고 올 때가 많았다.네 째 아이가 태어나 일곱 식구가 되고, 맏이가 6학년이 되자 다리를 제대로 뻗고 잘 수가 없었다. 그새 아내는 온갖 부업을 했고, 나도 열심히 일해서 조금 넓은 기와집을 계약했다. 중도금을 내려고, 처남한테 빌려 주었던 돈을 받아 자전거에 싣고 오다가 그 돈을 잃어버렸다. 매사를 야무지게 하는 처남이 노끈으로 단단히 묶어 주어서 난 맘 놓고 타고 왔는데 도중에 뒤를 돌아보니 없어졌다. 얼른 왔던 길로 되돌아가며 살폈으나 신문지에 싼 돈 뭉치는 보이지 않았다. 20만원, 집값의 4분의 1이다. 정신없이 돌아와 혼자 속으로만 안고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다. 아내에게도, 처남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여기저기 아는 사람을 통해 십만 원씩 빌려 이사를 했다. 기와집이긴 해도 원래 초가에 기와를 올린 삼 칸에다 옆과 앞으로 덧붙여 방이 다섯 개였다. 우리가 세 개를 쓰고 두 개는 전세로 주었다. 맏이와 둘째에게 방 하나를 주었더니 맏이의 첫마디가 "와아 방 엄청 넓다. 운동장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워낙 비좁은 방에 살다가 조금 넓은 방이 그렇게 보였던가 보다.이사하기 전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얼음판에서 찾은 건강필경사 일은 월급제가 아니고 원지 한 장 쓰는데 얼마라는 단가에 따라 돈을 받는다. 일은 연말연시 한겨울에 가장 바쁜데 난 겨울이면 감기로 앓아눕는 날이 많았다.일하는 날보다 더 많았다. 원래 허약체질인데다 바쁜 일이 많아서 밤샘 일을 자주 하느라 건강이 더 나빠졌다. 밤일을 해도 저녁 먹는 것 외엔 아무 혜택이 없으면서 무리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허약하니 추위도 더 심하게 느껴 겨울이 무척 싫었다. 겨울이 없는 나라로 가서 살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1971년 1월 2일, 공군사관생도인 생질이 "날씨가 뭐 이래, 겨울이면 겨울답게 추워야지, 미지근하게..." 하면서 들어왔다. 여러 날 매섭게 춥다가 따뜻해져서 나는 참 좋은데 어찌 저런 엉뚱한 소리를 하나? 하면서 쳐다보니 그는 어깨에 스케이트를 맨 채 "삼촌 스케이트 타러 갑시다." 한다.여남은 살 때, 장작을 다듬어 철사를 박아 만든 스케이트를 신고 무논에서 신나게 탔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감기로 누워 있다가 겨우 생기를 찾은 상태에서 따라나설 용기는 나지 않았다. "삼촌은 경험이 있어 금방 탈 수 있습니다. 같이 가십시다." 손을 잡고 끄는 바람에 따라나섰다. 수성못은 마치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북적였다.발에 맞는 스케이트를 빌려 주어 신고, 시키는 대로 무릎을 꾸부리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했다. 처음엔 좀 되더니 5분도 안 돼서 발목이 꼬부라지며 아팠다. 나와서 쉬다가 또 걷다가 여러 번 해도 진전은 없고 발목이 너무 아파서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벗어 주고 나왔다.그 다음날 또 가자고 온 생질에게 "난 안 되겠더라. 말목이 아파서..." 하니까 "처음엔 다 그래요. 오늘은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따라 나갔으나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겨우 한 시간을 씨름하다 나왔다. 사흘째는 조금씩 앞으로 나가더니 나흘째는 제법 솔솔 미끄러져 나갔다. 신이 났다.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스케이트를 벗어 주고는 돌아와 당장 중고품 스케이트를 샀다.닷새째 날, 생질은 휴가가 끝나 돌아가고 혼자 일찍 나섰다. 오늘은 내 스케이트를 신고 씽씽 신나게 달려보리라. 기대에 부풀어 수성못에 도착하니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며칠 날씨가 따뜻해서 얼음이 녹아 위험하다는 거였다. 실망이 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날씨가 왜 따뜻해져서 이렇게 실망을 시킬까. 이제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 되겠네. (당시엔 실내스케이트장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 스스로 놀랐다. 그토록 추위가 싫어서 겨울 없는 나라로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가 겨우 닷새 만에 겨울을 기다리다니... 이렇게 쉽게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달라진 건 그뿐이 아니었다. 밥맛이 없어서 늘 반찬 투정을 했고, 내가 청했던 반찬을 만들어 주어도 두어 술 뜨고는 못 먹겠다고 수저를 놓았는데, 밥맛이 좋아져서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리고 춥다고 움츠리기만 했다가 가슴을 펴고 나서게 됐다. 운동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아침 한 시간씩 겨우 닷새 만에 이렇게 달라지다니.이렇게 운동이 좋은 걸 알았으니, 겨울만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다른 운동을 해야지. 배드민턴을 치기로 했다. 빠듯한 형편에 새 라켓은 못 사고 중고품을 사서 아이들과 아내와 아침마다 가까이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쳤다. 온 가족이 함께 노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아침밥 짓고, 도시락 준비하기도 바쁜 아내지만 골골거리던 남편이 생기가 돌자 신이 나서 잠깐씩이나마 같이 어울렸다.그렇게 봄, 여름,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왔다. 예년 같으면 벌써 두세 번 감기로 누웠을 건데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오고 수성못이 디시 얼었다. 씽씽 얼음판을 달리니 신바람이 났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모두 스케이트를 사서 같이 손을 잡고 즐겁게 놀았다. 일 년 사이, 스케이트도 발목이 꼬부라지지 않는 신형이 나와서 아이들은 쉽게 배웠다. 엄청 구두쇠로 살았지만 운동하는 데 쓰는 돈은 아끼지 않기로 했다.봄과 가을엔 친구들 가족과 어울려 등산도 하고, 여름방학엔 바다나 계곡으로 가서 민박을 하며 놀다 왔다. 그때만 해도 가족 피서가 드물었던지 아이들이 방학을 끝내고 학교에서 놀러갔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니 '와아 참 재미있었겠네.' 하며 부러워하더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지 못해서 군것질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을 건데 그걸로 위로가 좀 되었던 것 같다.상차림 없이 제문만 읽다.앞에서 돈 20만원을 잃어버리고 빚을 내어 겨우 이사를 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무렵 장인이 돌아가시고 소상(1주기)을 맞았다. 사위로서 당연히 제수를 푸짐하게 차려놓고, 유세차... 오호통재. 라는 제문을 읽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장인의 친구와 조카, 큰사위, 손서까지 제수를 차려놓고 순 한문으로 지은 제문을 읽었지만 나는 앞 사람이 차린 제수를 그냥 둔 채 한글로 쓴 제문을 읽었다."병부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고기와 떡과 온갖 과일을 그득하게 차린 상을 세 번, 네 번 받으시니 흡족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치 않으시리라 짐작됩니다. 살아계실 때를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병부님께서는 아들이나 딸, 또는 인척 집에 가셔도 융숭한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룻밤 주무시라고 권해도 집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다고 핑계를 대시며 기어이 돌아가시곤 했습니다. 그건 나 때문에 별난 반찬을 장만하느라 수고가 많고 또 돈을 쓰고 하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아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토록 자녀들이나 인척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오신 병부님이 돌아가셨다고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압니다. 오늘 소상이라고 이렇게 차리고 또 차리고 하는 건 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병부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것도 차리지 않고 평소 말씀하신 교훈과 정담을 되새겨 보는 걸로 제문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그러고 평소 저에게 말씀하신 것과 앞으로 그 훈계에 따라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면서 끝냈다. 읽기가 끝나자 연세 높은 처남이"저건 예수쟁이들이 하는 거 아닌가?" 하며 못마땅한 듯 나를 쳐다봤다.내가 그렇게 당돌한 짓을 하는 걸 아내는 그냥 따르면서 반대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오래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 당시 형편으로 빚을 내어 상을 차리는 것도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그 2년 뒤 어느 신문에서 생활합리화 수기를 공모하기에 이 이야기를 써 보냈더니 가작에 뽑혔다. '후회 없는 구두쇠'란 제목으로 신문 한 면을 다 차지하는 장문의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로부터 나는 별나게 사는 사람으로 낙인이 되었다. 여남은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할 때여서 그 신문을 보고는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와아 이렇게 신문에 크게 나고 상금도 받게 됐으니 한 턱 단단히 내야겠네."그러자 옆에서 신문을 다 읽은 사람이 말했다."여기 이 신문을 읽어보고 그런 말 하이소. 우리하고는 영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인데."하자 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그 당시 같이 일하는 필경사의 한 달 수입은 6만원 안팎이었다. 그 6만원 중에서 혼자의 용돈으로 3만원을 쓰고 나머지 3만원만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출퇴근하는 버스비, 나와서 커피 한 잔, 그땐 믹서커피가 없었고 다방에서 아가씨가 배달해 온 것을 마셨다. 점심도 배달로 시켜 먹고 또 커피, 그리고 담배와 저녁에 술 한 잔, 밤일이 늦을 땐 택시로 귀가하면 3만원으로도 빠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모두 낭비였다. 좀 일찍 집을 나서서 걷고, 커피 안 마시고, 점심은 도시락 싸와서 먹고, 퇴근도 걸어서 가면 된다. 그 여러 사람 중에서 나 혼자만 그렇게 별나게 사니 스스로 왕따가 됐지만 외롭진 않았다. 옆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자기가 할 일만 하면 되는 게 필경사 일이기에 가능했다.그렇게 구두쇠로 살면서 빚졌던 20만원을 갚는데 2년이 걸렸고,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었다. 만일 그 20만원 잃어버린 사건이 없었다면 그토록 내핍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이들 넷 공부를 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으로 공부하고, 투고하고초등 4학년 때 글짓기 시간에 내가 쓴 글을 선생님이 칭찬해 주신 게 떠올라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신문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신문사 근무 덕분에 사설,평론 등을 모조리 읽으며 공부로 삼았다. 당시 신문은 한자가 대부분이었지만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한테서 명심보감을 배운 덕분이었다. 그러다 글을 써서 신문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쓴 걸 보니 나도 쓰면 되겠다 싶어 시작했으나 좀체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써 보냈다. 1년 가까이 노력한 끝에 드디어 실렸다. 제법 긴 글이 이름과 함께 신문에 나오자 하늘에나 오른 듯 뿌듯했다. 그 뒤로도 계속 보냈다. 대구 지방지엔 쉽게 실려서 다음엔 중앙지로 도전했다. 허탕을 많이 치다가 실리게 되었다. 이 투고는 나의 즐거운 취미생활이 되었다.여행을 가거나 등산을 가거나 또 신문을 읽다가도 글감을 찾아 꾸준히 투고를 했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보니 주변에 쓰레기가 엉망으로 쌓여있었다. 파리가 득실거리고 냄새도 났다. 이름난 국립공원을 어찌 이렇게 관리하고 있는가. 입장료는 꼬박꼬박 받으면서 어디에 다 쓰는가.'라는 글이 실리고, 얼마 뒤 국립공원 경상남도지부에서 편지가 왔다. '귀하의 글을 보고 O월 O일, 헬리콥터로 쓰레기를 다 치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후련한 반응도 있었다. 더러는 비판을 당한 쪽 사람이 와서 '당신이 신문에 쓴 건 사실과 다르니 사과 글을 다시 써 보내시오. 그러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소.' 덩치가 큰 장정 두 사람이 와서 위협하기도 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소심하여 남 앞에서 말을 잘 못했고, 싸우는 사람 옆에만 있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며 겁이 났다. 그러나 글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나면 속이 후련해진다. 거짓말은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위협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맘대로 하시오. 하며 돌려보냈다.투고로 가장 보람을 느낀 건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잘못된 걸 고친 것이다. 맏이가 고교에 입학하여 새 교과서를 받아 왔기에 잠시 펼쳐 보다가 '세시풍속의 의미'라는 제목에 마음이 끌려 읽었다. '태음력은 조석간만과 일치하고 농사력에도 편리하며 노인들의 계절감에도 맞아 지금도 농어촌에서는 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음력이 조석간만과 일치한다는 말은 맞지만 농사력에 편리하고 노인들의 계절감에 맞다. 고 한 것은 틀린다. 이 글을 쓴 사람은 24절기를 음력으로 알고 쓴 게 분명했다. 음력에 따라 농사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노인들의 계절감이란 것도 24절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력을 쓰기 전부터 절기가 있어서 음력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또 농촌 대부분의 가정에는 ㅇㅇ년 음력절기표(절후표)를 벽에 붙여 놓고 농사에 활용했다. 절기표는 입춘이 음력으로 섣달이나 정월 초순, 하순에도 있기 때문에 꼭 필요했다. 그 날짜를 음력으로 기록한 표라는 말이지 절기 자체가 음력이란 말이 아니다. 입춘이 양력으로는 해마다 2월 4일이고, 하지는 6월 22일, 동지는 12월 22일이다. 간혹 하루 늦을 때가 있을 뿐이다. 또 하지는 낮이 가장 길고, 동지는 밤이 가장 길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 절기가 음력이라고 학교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었다. 이걸 바로잡는 건 내 힘으로 어렵겠다 싶어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께 편지를 냈더니 답장이 왔다. "귀하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말만 있고 어떤 조처를 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신문에 투고를 했으나 실어주지 않았다. 원고를 들고 신문사로 찾아가 설명을 하니 그제야 수긍하고 특단으로 실어주었다. 문교부에도 편지를 냈더니 고치겠다는 회신이 왔고, 2년 뒤(1980) 고친 교과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국어사전(민중서림)에 24절기는 음력이라고 되어 있다. 최근에 다시 신문을 통해 고치라고 했다.이렇게 신문을 통해 꾸준히 공부를 하고, 투고를 하면서, 비록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무식은 면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로 신문논술대회에 응모하여 동상을 받았다. 가족회의와 가족신문좀 넓은 집으로 이사 온 뒤 토요일 저녁마다 가족회의를 했다. 맏이가 중 1, 둘째가 초등 5학년, 셋째가 3학년, 막내는 입학 전이었다. 각자 하고픈 이야기를 하라고 했더니 맏이는 몇 마디 하는데 둘째는 말을 않고 있기에 아무 꺼나 얘기해 보라고 두어 번 재촉을 하자 앙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데 자꾸 하라니까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 다음부터는 할 말이 있는 사람만 하게하고 오락을 많이 했다. 쉽고 시시한 거지만 하다 보니 웃음이 터지고 재미있었다. 회의록도 만들어 기록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다시 보니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이 보여서 좋았다. 십년 넘게 계속하다 보니 처음에 말을 못해 울었던 아이가 넷 중에서 가장 말을 잘하고 웃기는 소리도 잘했다. 아이들에게 용돈도 주지 못하고 지독한 내핍생활을 하면서도 즐거움이 있었고 또 가족신문을 만들자는 의논을 했다.맏이가 군대에서 제대하여 복학했고, 동생들 셋이 중고생이니 가능하리라 싶었다. 맏이와 둘째는 좋다고 하고, 딸 둘은 주저하면서도 따르겠다고 했다. 매월 한 번씩 내기로 하고 그 이름을 뭐라고 할까? 이런 저런 말이 나오다가 "들국화가 어떨까? 이건 우리 부부 모임에서 남자들은 기린, 사슴, 낙타 등 짐승 이름을 따고, 여성은 꽃 이름을 정해서 불렀는데 엄마는 들국화였다. 들국화는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봄, 여름을 다 보내고 늦가을 서리가 내릴 때 피면서 향기가 좋고, 아주 청초하다, 모든 꽃들이 다 피어도 묵묵히 참고 있다가 늦게야 홀로 길가에나 밭 언덕에 다소곳이 피는 꽃, 그 정신도 본받을 만하지 않을까." 그러자 모두 좋다고 했다.1986년 9월, 첫 호가 나왔다. 8절지를 접어서 4페이지로, '들국화' 라는 이름을 가운데 넣고, 한쪽에는 금언이나 짤막한 좋은 글 하나를, 또 한쪽에는 가훈과 우리 주소,전화를 넣었다. 각자 하고픈 이야기를 자필로 쓰고, 그림을 잘 그리는 맏이가 네 칸짜리 만화도 그렸다. 만화 제목은 '와카노'라 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또는 왜 그런 짓을 하느냐의 경상도 방언이다. 또 한 쪽엔 '호롱불'이란 제목으로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 살았던 생활 모습이나 풍습, 예절 등을 내가 담당했다. 마지막 장엔 각자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줄여서 적었다.맏이와 둘째는 글 쓰는 솜씨가 제법 있어서 쉽게 썼고, 세 째와 막내딸은 써 본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제때 써 내는 데 힘겨워했다. 아내는 초등 3학년 중퇴여서 한글을 쓰긴 하지만 문법이 너무 틀려서 내가 다시 고쳐 썼다. 엄마 글씨를 그대로 올리자고 맏이가 주장했지만 이건 남들이 볼 수도 있는 거니까... 하면서 대필로 썼다. 먼 훗날 다시 보니 고쳐 쓴 것이 잘못이었구나 싶었다. 말이 어색하고 문법엔 맞지 않아도 그냥 자필로 쓴 걸 그대로 실을 걸, 그게 그 사람의 참모습인데... 싶었다.한 달에 한 번 내기로 약속 했지만 그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얼마간 격월로 내다가, 또 세 달 만에 내는 걸로 여러 해를 했다. 경력이 쌓일수록 글 솜씨도 늘어서 처음 네 페이지로 하다가 여섯 페이지, 여덟 페이지로 늘어났다. 맏이와 둘째가 결혼을 하여 새 가족이 된 며느리도 참여했고 , 둘째와 세 째도 결혼하니 더욱 지면도 늘어났다. 새 며느리는 좀 더 좋은 글을 써 보겠다고 글쓰기에 도움을 주는 책도 사서 읽고 있다는 말에 고맙다고 칭찬을 했다. 손녀가 나서 자라 서툰 글씨지만 같이 싣게 되니 더욱 뿌듯했다. 맏이 가족이 미국으로 간 뒤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16년을 내다가 컴퓨터 이 메일이 시작되면서 거의 매일 주고받게 되자 중단하고 말았다.신문을 만들면서 맘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기도 하고 불편한 점을 지적하여 고치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은, 큰딸이 아이 셋을 기르며 정신없는 날만 보내고 있다가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며칠만 쉬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렸다.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싶어 도와 줄 방법을 찾다가 아이들 모두를 합숙하기로 했다. 이건 참 좋은 효과를 얻어 좀 자상하게 따로 쓰기로 한다.아이들 넷을 어렵게 키우면서도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그런 소소한 것들이 가족신문에 담겨져 있어 가끔 새로 들추어 보면 뿌듯하다. 또 손자 손녀들이 태어나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최근엔 두 아기의 엄마가 된 손녀가 가족신문을 다시 만들자고 건의했다. 모두에게 의사를 물으니 찬성이라 다시 만들기로 했다. 17년 만에 들국화가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부푼다. 손자 손녀들의 합숙앞에서 잠간 얘기했던 아이들 합숙 얘기를 써 본다."너무 번잡스러운 나날에 정신이 없다. 매일 전쟁을 하는 것 같다. 방과 거실이 난장판이라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좀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그때뿐이다.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자니 마음 안정이 안 된다. 어디 조용한 곳에 혼자 가서 며칠만 쉬었으면 좋겠다."큰딸이 가족신문에 쓴 글의 일부다.그는 중학생일 때부터 제 속옷을 스스로 빨아 입었고, 감기나 몸살이 나도 잘 이겨내며 학교에 갔다. 자상하지 못한 할머니와 동생과 같은 방을 쓰면서 불편한 게 많았지만 말없이 잘 지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청 추운 부엌에서 어른처럼 엄마를 도왔다. 그런 딸이 이런 글을 쓴 걸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구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결혼하여 딸 둘을 낳고 그만 낳겠다고 했는데 아내가 권했다."하나만 더 낳아라. 너는 4대째 장손이라 너희 시부모님이 아들을 무척 기다리고 계실 거다." 그러자 딸은 "시댁에서는 그런 말씀 안 하시던데..." 했다."그건 점잖은 분들이라 말은 않고 계시는 거지, 속으로는 엄청 기다리고 계실 거다."아내가 여러 번 권해서 하나를 더 낳은 것이 아들이었다. 그 뒤 명절에 내려가니 시부모님이 무척 좋아하시며 고맙다는 말까지 하시더라고 했다.그렇게 세 아이를 낳은 것은 우리의 권고 때문이고, 지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생하고 있는 것도 우리 때문이다. 어떻게든 도와야겠다고 궁리를 했다. 우리가 올라가서 좀 도와줄까? 하다가 그건 별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반찬 걱정만 더 하게 한다 싶었다. 가장 번잡스런 막내만 데려와서 한 달쯤 봐 줄까? 하다가 '아예 손주들 모두를 모아서 같이 놀게 하면 어떨까?' 하니 아내와 딸이 그건 너무 벅찬 일이라며 반대했다.아이 하나, 둘 보는 것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닌데 여덟을 한데 모아 돌본다는 건 너무 힘겨운 일이란다. "일단 해 보고, 너무 힘에 겨우면 되돌아가면 되지. 미리 겁부터 낼 일은 아니다."하면서 내가 고집을 부렸다. 마침 여름 방학 초기라 당장 올라갔다. 서울 도봉구에 사는 손녀 손자를 데리고 수원역으로 갈 테니 너희도 아이를 데리고 나오라고 딸들에게 전화를 했다. 큰딸은 수원에 살아서 셋을 데리고 나왔고, 작은 딸은 용인 수지에서 하나를 데리고 왔다."아버지 혼자 아이들 여섯을 세 시간 동안 감당하시겠습니까?"걱정을 하면서 인계하고 돌아갔다.완행열차 무궁화, 의자를 돌려 여섯을 마주보도록 앉혀놓으니 조잘조잘 얘기하며 잘 놀았다. 나는 옆 자리에 앉아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조금 말소리가 커지면 다른 손님들께 방해가 된다면서 조용조용 얘기하라고 했다. 옆자리의 손님들이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에 작은 아들네 남매도 와서 여덟이 다 모였다. 맨 위가 중 2,막내는 네 살이었다. 한옥 대청마루에 모두를 앉혀놓고"자. 여기는 아파트와 달라서 걸음을 조심할 필요도 없고, 큰소리를 질러도 괜찮다.이웃집에도 미리 얘기해 놓았으니 맘껏 떠들고 뛰면서 놀아라."그 말이 떨어지자. '와! 신난다.' 하면서 모두 일어나 일부러 마루를 쿵쾅 쿵쾅 구르며 괴성을 지른다. 마치 야외로 놀러 나온 듯 신이 나서 뛰며 논다. 그러다가 키가 큰 아이는 맨 앞에 서고 차츰 작은 아이가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은 얹고 열차처럼 만들어 마루로 큰방, 작은방으로 돌며 논다. 마음이 놓였다. 저렇게 신이 나서 노는데 며칠은 수월하게 지나갈 것 같았다.더위가 심한 날은 큰 물통에 물을 채워 둘씩 셋씩 들어가 첨벙거리며 놀고, 좀 시원한 날은 놀이터에 가서 땅따먹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했다. 하루는 앞산 골짜기로 올라가 개울물에서 놀고, 나무 그늘에서도 놀았다. 또 모두가 둘러앉아 만두를 만들었다. 만들면서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붕어빵, 국화빵, 거북이, 올챙이 모양을 만들면서 서로 자기가 만든 게 더 예쁘다며 이건 내가 먹을 거라며 따로 모았다. 집에서는 밥을 잘 먹지 않아 애를 먹이던 아이가 옆에서 "와 이거 맛있다." 하면서 먹으니 덩달아 잘 먹고. 봉지에 든 짜장면을 감자와 돼지고기를 넣어서 끓였더니 "와 할아버지 짜장면 최고예요." 하며 잘 먹었다. 간식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었다. 아이들이 많아서 어려운 게 아니라 저희들 스스로 언니, 오빠 하면서 서로 챙기며 어울리니 어른들은 할 일이 없었다.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뿐이었다.어쩌다 한 아이가 넘어져 울거나 토라져 있으면 달래다가, "너는 혼자 집에 갈래. 데려다 줄까?" 하면 안 간다며 울음을 뚝 그쳤다.당초 예정은 3. 4일이었는데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그새 아이들이 없는 집에서 조용해진 엄마들은 처음엔 애들이 애를 먹이지나 않는지 걱정하는 전화를 하더니 잘 논다는 소리에 맘을 놓고 혼자 여행을 온 것처럼 좋다고 했고, 사나흘이 되자 애들이 보고 싶다면서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 자꾸 더 놀겠다는 걸 다음 겨울 방학 때 다시 모여서 놀자고 약속을 하고 8일 만에 돌아갔다. 약속한 대로 그 해 겨울방학에 다시 만났고, 그 다음 방학마다 계속되어 7년이나 이어졌다.처음엔 아이들 등살에 너무 지친 엄마를 며칠이라도 조용히 쉬게 하려고 시작한 건데 거기서 얻은 게 엄청 많았다. 자주 만나지 못할 사촌들이 여러 날 함께 먹고, 자고 놀면서 정이 듬뿍 들었고, 그 속에서 저희들끼리 지켜야할 질서도 배웠고, 엄마 아빠와의 정도 새롭게 느끼는 것 같았다. 또 집에서는 형제끼리 싸우기도 했지만 여럿 속에서 놀면서 형제간의 정을 새삼 느끼며 보듬어 주고 달래 주는 정도 생겼다. 이 합숙에 우리 부부는 큰 힘 들이지 않고 모처럼 사람 사는 재미를 맘껏 누렸고 정도 많이 쌓았다. 이렇게 좋은 걸 딴 사람들도 해 보라고 친지들에게 권하고, 신문을 통해 알리기도 했다. 아내의 우울증을 봉사로.이렇게 내 딴엔 제법 신이 나서 활발하게 살고 있는데 둘째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아내가 같이 갔다가 강당에 가득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여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듯 가슴이 덜컹했다. 이건 우울증이 심한 상태구나. 그 전부터 우울증이 조금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중한 상태인 줄은 몰랐다. 이대로 그냥 있어선 안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부업으로 하고 있는 바느질을 그만두게 했다.아내는, '당신 혼자 수입으로는 네 아이 공부시키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몇 해만 더 하다가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내는 집에서 온갖 부업을 해 왔다. 밤 깎기, 땅콩 까기,마늘 까기, 홀치기, 편물 뒷손질 등을 하다가 몇 해 전부터는 큰시장(서문시장) 한복점의 저고리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두 누님이 비좁은 우리 집에 같이 살면서 바느질을 할 때 아내가 거들면서 배웠던 것이다. 누님들이 따로 살림을 나간 뒤 혼자 하게 되었다. 연로하신 어머님 시중들면서 아이들 넷과 친정 질녀, 조카도 같이 데리고 있으면서 바느질을 하자니 밤늦도록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다. 그런 속에서 답답함도 많았고, 내가 오랜 기간 골골거리며 앓고 있어서 늘 불안했던 게 더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당시 맏이가 중학교 3학년, 둘째는 중 1, 셋째는 초등 5학년, 막내는 2학년이었다.이제 겨우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나는 단호히 만류하여 바느질을 그만두게 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더 큰 어려움이 닥칠 게 번하니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조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이제 내가 건강하니 어쨌든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신 건강부터 찾아야한다고 하자 아내도 따르기로 했다. 단골 한복점에 가서 그 얘기를 하자. 우리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딴 집의 일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요. 우리가 싹을 더 올려 줄 터이니 일을 계속해 주이소." 통사정을 하더란다. '그건 두고 보면 알 겁니다.' 하면서 돌아왔다고 했다.다음날부터 봉사단에 나가도록 했다. 마침 친정 쪽 언니가 뇌성마비장애인 봉사를 하는 상록봉사단 단장으로 있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은 여느 장애보다도 가장 심한 편이다. 말을 제대로 못하고, 손발이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인다.말 한마디 하는 데도 오만상을 찡그리며 손발을 뒤틀면서 겨우 한마디씩 한다. 그래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말을 겨우 한다. 그들에게 밥을 먹여 주기도 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도와주고, 휠체어를 밀며 나들이도 같이 했다, 당시만 해도 승강기 시설이 다 되어 있지 않아서 2층, 3층 계단을 만나면 업고 올라가야만 했다. 여름엔 바닷가로 가서 같이 놀았다. 생전 처음 본 바닷물에서 얼마나 신이 났던지 괴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걸 보자 힘은 들어도 마음이 뿌듯하더라고 했다. 또 고아원, 양로원, 교도소 등도 방문하면서 여러 가지 봉사를 했다.또 봉사단 옆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 주인과 의논하여 무료예식장을 운영했다. 거기서 무료로 결혼식을 하고, 사진 값도 싸게 하고 하객들에게 식사 대접하는 돈만 받아서 운영비로 썼다. 그 일이 매우 번거롭긴 했지만 아내가 힘든 일 대부분을 담당했다. 아내는 그런 일하는 걸 겁내지 않았다.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賓客)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사는 집에서 자라, 시집도 종갓집으로 가고 싶어 했단다. 손님 대접하는 걸 겁내지 않고 즐겁게 생각했으니 그런 봉사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장애인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 결혼을 돕는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우리 집의 소소한 걱정은 덜하게 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계속하면서 대구시장 상, 복지부 장관상도 받고, 우울증도 많이 좋아졌다. 꽹과리로 숫기를 찾다.난 어릴 때 숫기가 너무 없었다. 아버지가 백여 호 되는 마을 구장(지금의 이장)을 오래 하시어 아는 분이 많은데 그런 어른을 만나도 나는 부끄러워서 인사를 못했다. 늦둥이 외아들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나를 보는 사람마다"어 구장이구나. 학교 갔다 오나?" "야아 너 어디 가노? 아부지 심부름 가나?" 하면서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도망가곤 했다. 인사하는 게 그토록 부끄럽고 두렵기도 했다. 저만치 아는 어른이 맞은편에서 오면 옆길로 내려가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누는 척하고, 뭘 유심히 보고 있는 척하면서 피했다. 집으로 찾아오신 어른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고 딴 짓만 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한테서 골백번도 더 들은 말, "인사란 사람 인(人)자, 일 사(事)자, 사람의 일 중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아는 어른을 보면 꼭 인사를 하도록 해라."그래도 고쳐지지 않았다.아버지는 성격이 활달하고 말씀도 시원시원 잘 하셨다. 어디 어떤 모임에서도 여러 사람들을 잘 웃게 하고, 구수한 이야기도 잘 하셨다. 한 방 그득한 사람들이 밤늦도록 놀면서도 아버지 이야기에 빠져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말이 너무 많다고 싫어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이런 소심하고 숫기 없는 성격은 장가를 가고, 군대 생활을 하면서도 그대로여서 별명이 색시로 통했다. 글씨를 좀 예쁘게 쓴 덕분에 중대본부 교육계를 담당했는데. 제대를 하면서 중대본부 사람들이 내게 써 준 추억담에 색시란 말이 많이 나왔다. 특히 부관은 '그런 소심한 성격으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 건지 걱정된다. 좀 대담해지도록 노력하라'는 충고까지 해 주었다.제대 후 직업은 앞에서 말했듯이 필경사였다. 사람을 많이 대하는 게 아니고 맡은 원고를 보고 필경만 하면 되는 거라. 성격하고는 상관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초면의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여성과 대면을 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까지 더듬거리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웅변대회에 나가 보기도 하고, 대화법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어보기도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꽹과리 개인지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꽹과리는 내가 어릴 때 마을 어른들이 놀다가 쉬는 사이에 흉내를 내 봤는데 잘 친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남아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었다. 6개월 열심히 배워서 웬만큼 칠 수 있게 됐다. 얼마 뒤 마을 자치센터 프로그램에서 풍물단원을 모집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아내와 같이 신청했다.지도하는 선생이 내가 치는 걸 보고 꽹과리를 맡게 하고, 아내는 장구를 치게 했다. 스무 사람 중 남자는 나와 두 사람뿐이고 모두 여성이었다. 꽹과리는 항상 앞장서서 이끌어야 하니 없는 신명도 우쭐거리며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부끄럼이 차츰 사라지고 신명나게 놀 수 있었다.연말이 되면 자치프로그램 경연대회가 있어 출전했다. 우리는 '굿놀이'라는 이름으로 나갔다. 나는 꽹과리로 앞에서 이끌고 아내는 무당이 되어 춤을 추면서 복을 비는 역할을 맡아 열심히 연습했다. 신명나게 노는 게 연습이라 날마다 즐거웠다. 경연대회는 널찍한 강당에서 많은 청중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으나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신나게 놀아 우수상을 받았다. 그 다음 해는 아내가 심청이 역할을 맡아서 했고, 또 각설이 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나의 숫기를 살려보려고 배운 꽹과리 덕분에 부부가 같이 무대에 나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니 신이 났고, 좋은 취미생활이 되었다. 집에서 살림만 하고 부업으로 바느질만 했던 아내가 어디서 그런 끼가 숨어 있었든지. 자랄 때는 엄한 아버지와 오라버니 밑에서 기를 펴지 못했고, 노래 부르는 것조차 용납이 안 되었다고 했는데, 나보다는 훨씬 신명나게 놀아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뿐만 아니라 아내는 여러 곳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힘든 일을 앞장서 한다. 절에 가서도, 공양주를 돕고, 배식도 거들며, 동지 팥죽은 이십 년 넘게 도맡아 끓였다. 그리고 친정 화수계에서 해마다 여행을 가면 차에서부터 모든 치다꺼리를 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웃기고, 숙소에 가서도 모두가 함께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고 한다. 한 번은 너무 짓궂은 장난을 하자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는데 한 사람은 너무 놀라서 잠시 기절을 하는 소동이 벌어져 청심환을 먹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이 여러 가지 효과가 조그마한 꽹과리 덕분이라 생각하니, 작은 일이라도 하고픈 걸 찾아서 취미를 잘 살리는 것도 삶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걷는 여행의 즐거움2000년 봄 대구에서 광주까지 500리 걷는 행사를 노인복지관 주관으로 한다기에 참가했다. 그 재미를 알고, 그해 가을엔 해남에서 임진각까지 1,300리 걷기에 아내와 같이 참여했다. 당시 아내는 무릎이 아파서 한의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퇴행성관절염이라며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라고 하더란다. 겁을 내며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걷다가 안 되면 차가 따라 오니 타면 된다.'면서 같이 나섰다. 7- 8일까지는 아픈 것을 참으며 힘겹게 걷다가 차츰 나아져서 후반엔 신이 나서 우쭐우쭐 춤을 추며 걸었다. 18일 완주를 하고 임진각에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니 나도 아내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걷기 행사는 노인복지관 주관이라 공짜로 했는데, 다음 해 봄, 광주에서 대구로 오는 걸 한 번 더 하고는 끝났다. 참 아쉬웠다.이제 남이 차려주는 밥상만 기다릴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차려서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친구 둘을 설득하여 나섰다. 열차로 포항에 가서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점심은 길가에서 지어 먹고 호미곶까지 가서 민박집으로 들어가 일박하고 다음날 일찍부터 걸었다. 사흘을 걸어 울산에 도착하니 다리는 좀 아팠지만 기분은 참 좋았다. 복지관 주관으로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보다 더 자유롭고 재미있었다. 자신이 생겼다. 다음 해 봄엔 세 친구를 더 부추겨 부부가 함께 12명이 나셨다. 지난번 셋이 걸었던 울산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걸었다. 이번엔 일정한 목표도 없이 쉬엄쉬엄 걷기로 했다. 걷다가 쉬다가 점심때가 되면 갯바위 위에서 버너와 코펠로 밥을 짓고 된장을 끓여 각자 갖고 온 밑반찬을 신문지 위에 늘어놓고 둘러앉아 먹었다."와아 밥맛이 우째 이래 좋노.""그래, 나는 집에서는 밥맛이 없어서 반 그릇도 못 먹는데 여기서는 배도 더 먹는다."모두가 같은 소리를 하며 맛있게 먹고는 적당히 누른 밥솥에 숭늉을 끓여 훌훌 마시면서 참 오래 만에 배부르게 먹었다며 좋아한다.까만 갯바위로 파도가 쳐서 하얀 옥구슬을 수만 개씩 공중으로 날리고, 그 위로 갈매기는 끼룩끼룩 노래하며 춤을 춘다. 마치 우리를 위해 노는 것만 갔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흥이 나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다시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쉬다가 해가 뉘엿거리면 민박집으로 찾아간다. 저녁도 점심과 마찬가지로 밥을 지어 먹고는 윷놀이를 한다. 남녀로 편을 갈라서 놀면 서로 이기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아슬아슬한 고비에서는 모두 일어나 고함을 지른다. 주인집에는 미리 양해를 구했다. 딴 손님이 없으니 맘껏 노시라고 했다. 윷놀이는 이기든 지든 아무 벌칙도 없고 상금도 없는 데도 어찌나 큰소리로 응원하고 이기면 춤을 추고 진 쪽에서도 즐거워하는 사람들 보면 같이 즐겁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 걱정했던 게 웃다보니 소화가 다 됐다며 또 한바탕 웃는다.다음날 아침에 아주머니들이 바닷가로 산책 나갔다가 어선에서 자잘한 생선을 한 뭉치 얻어 왔다. 조금만 사려고 했는데 그냥 가져가라고 하더란다. 그걸로 매운탕을 끓이니. 그 또한 별미였다. 이렇게 맛있는 매운탕 처음 먹는다며 모두가 좋아한다. 두 번째 민박집은 노래방 기기가 있어서 신나게 노래하며 우쭐우쭐 춤도 추며 놀았다.2박 3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열차에서 경비를 따져보니 한 집에 31,000원."아니 한 집이 아니고 한 사람이 그런 거 아닌가?""뭐 빠진 거 없나. 단디이 계산해 봐라.""쌀 갖고 와서 밥하고, 반찬도 갖고 온 거 먹고, 왕복 열차비와 민박 두 번에 10만원,그것뿐인데 빠질 것도 없다.""와아. 둘이 사흘을 놀다 가는데 3만 천원 들었다니. 남들한테 얘기하면 거짓말이 카겠다."이렇게 걸으면서 노는 여행은 남자들보다 부인들이 더 좋아했다. 집에서는 지겹도록 밥 짓고, 반찬 만드느라 신경 쓰는데, 여기 나오면 남자들이 다 하고 설거지도 다 하니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한다."이런 호강이 어데 있노.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오면 좋겠다." 부인들은 평생 해 보지 못한 호강을 하는 듯이 좋아했다.적은 돈으로 이렇게 재미있는 여행을 왜 딴 사람들은 하지 않을까? 싶어 여행스케치에 두 번(03년12월과 04년 6월) 소개하고 신문에도 자랑을 했다.우리는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동해안을 해마다 봄가을 두 번씩 11년을 계속 다녔다.주변에 다른 친지들과도 여러 번 같이 나갔다. 2007년 제주 올레길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걷기에 나서자 전국 곳곳에 걷는 길이 많이 만들어졌다. 내가 걸었을 때보다 더 멋진 풍광을 보면서 걸을 수 있게 됐으니 참 다행이다. 숙명적인 친구친구와 거의 매일 E메일을 주고받는다. 최근에 그 친구가 '우리는 숙명적인 친구'라고 편지에 썼다. 무슨 숙명이라고 까지...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열 살부터 만나서, 편지를 주고받고 하는 게 68년이다. 지금은 컴퓨터만 열면 편지가 와 있어서 읽고, 답장을 써서 보내면 되지만 옛날엔 그게 쉽지 않았다. 우표 한 장 살 돈도 없어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겨우 구해서 반시간 넘게 걸어가 우표를 사서 부쳐야했다. 같은 마을에 살아 같이 학교에 가고 오면서 온갖 짓궂은 장난도 하면서 다니다가 그 친구가 겨우 열여덟 살에 한국전쟁이 일어나 소년병으로 입대했다.나보단 한 살 위인 그는 키가 좀 컸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내게 편지를 보낸 것이 그 시작이다.그의 집에는 어머니와 형이 있었지만 답장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나는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꾸준히 이어지면서 본가의 안부도 내게 묻곤 했다.그가 제대한 뒤 직업을 찾고 있을 때 나는 먼저 대구로 나와 신문사에서 일을 했다. 그 덕분에 신문을 매일 우송해 줄 수 있었다. 그 신문 광고란에서 경찰관임용 공고를 보고 응시하여 합격했고 경찰관이 되었다. 시골 여러 지서 근무를 하면서도 편지는 계속됐다. 그 편지로 인해 내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간판점을 차린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시골로 내려갔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지금은 잠시 실망스럽지만 그대는 영특하니 곧 새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냥 위로하는 말이었지만 크게 용기를 얻었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정년퇴직 후엔 자주 어울려 다니면서도 편지는 더 자주 주고받았다. 컴퓨터가 나와서 더 편리하게 되자 매일 편지가 오간다. 하루만 빠지면 무슨 탈이 났는가 싶어 전화로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는다.해마다 6월이 되면 전쟁 때를 회상하며 전적지를 찾아갔다. 멀리 강원도 철원 인민당사와 백마고지를 바라보면서,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때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다고 소상하게 이야기하면 나도 마치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것처럼 공감이 되었다. 그는 너무 심한 폭음 소리 때문인지 한쪽 귀는 듣지 못하고 한쪽 귀로만 대화를 하고 있다. 부인들도 서로 친 동서나 되듯이 잘 지낸다. 조금만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들고 가서 나누어 먹고,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 죽을 쑤어 가서 같이 먹기도 한다.아흔이 가까워지니 여기저기 아픈 데가 늘어나고 다리가 부실하여 멀리 나들이를 같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다면서 늘 밝게 살고 있다.이렇게 숙명적인 친구가 두 사람 더 있다.한 마을에서 자라 같이 학교에 다닌 동갑내기다. 그도 나와 같이 외아들로 자랐다.조금 다른 것은 살기가 우리보다 나아서 시골에서 중학을 마치고 대구상고 야간부를 나왔다. 고등학교는 시킬 형편이 안 되는 것을 내가 권해서 억지로 다녔다, 낮엔 일을 해서 벌고, 야간에 다니면 된다면서 권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라도 공부를 한 덕분에 식품공장 경영을 맡아 할 수 있었다고. 늘 고마워한다.부산에 살아서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자잘한 일이라도 서로 오가며 정을 나누었고,노후에는 더욱 자주 만나 여행을 같이 했다. 대구 광주 5백리를 같이 걷기도 하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동해안 걷기 11년을 부부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2016년 가을 울릉도에 네 부부가 같이 가서 놀다온 일주일 만에 갑자기 가버렸다. 평소 약도 먹지 않고 건강한 편이었는데 앓아눕지 않고 갔으니 생로병사 중 병은 뛰어넘고 간 것이다.서운하긴 하지만 멋진 죽음이라 부럽다는 고별사를 읽어 주었다.또 한 친구는 같은 필경사란 직업 덕분에 만났다. 우연히 옆에 앉아 일을 하다가 통성명을 하자면서, "고향이 어딘데?" "창녕 이방." "어? 나도 바로 옆이네." 도와 군은 다르지만 십여 리 거리였다. "나이는?" "스물여섯." "어? 동갑이네." "생일은?" "구월 초하루," "뭐? 나는 초이틀인데. 하루 차이네." "형제는?" "혼자뿐이다." "나도 독신인데."이렇게 희한한 만남으로 같은 일을 하면서 같이 놀러 다니고, 부부는 물론 아이들도 두 집이 2남 2녀로 같은 또래여서 다정한 친구가 되어 함께 산으로, 바다로 어울려 다녔다. 겨울이면 얼음판에, 여름엔 강이나 바다로, 친 형제처럼 어울려 다녔다. 또 대구, 광주 5백리를 두 번, 해남에서 임진각까지 천삼백 리도 같이 걸었고, 동해안 걷기도 늘 같이 했다. 집도 가까워서 아침 산책도 같이 하고, 조금 색다른 음식을 만들면 나누어 먹곤 한다.난 외동이면서 사촌도 한 분인데 연세가 높아 그 아들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내 또래의 종질이 있어 참 정답게 지내다가 일찍 가버렸다. 그러니 내게 이런 친구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외로운 신세가 됐을까. 이 밖에도 가끔 만나는 친구가 여럿 있긴 해도 위의 세 사람은 정말 숙명적이라 할 만큼 좋은 친구들이다. 쓰레기가 준 선물아침마다 산길 산책을 한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와 아카시 꽃향기를 마시며 산새들 노래도 듣고, 다람쥐 재롱도 보고, 가끔은 산토끼와 노루, 멧돼지도 지나간다. 대도시에 살면서 이런 산이 가까이 있으니 참 다행이라 여기며 즐겁게 걷는다. 그 덕분인지 아흔이 가까우면서도 아직 건강에 별 이상이 없다.이 좋은 산길에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 과자 봉지, 음료수 껍질, 담배꽁초, 휴지 등이 지저분해서 상쾌한 기분을 조금 앗아간다. 저런 게 없으면 더 좋을 건데...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다니다가 줍기로 했다. 처음엔 쑥스럽기도 하여 사람들이 지나간 뒤에 줍고 의자에 앉아있는 주변은 그냥 지나갔다, 잘난 체 하네 라며 핀잔을 듣지나 않을까. 더욱이 담배 피는 사람들은 '너 그런다고 내가 못 버릴 줄 아나' 하며 덤빌 것도 같아 겁도 났다. 또 너무 많아서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길 폭은 3미터, 거리는 천 미터 남짓 된다. 며칠 줍다보니 생각보단 힘들지 않았고, 지나가던 사람이 "좋은 일 하십니다." "수고하십니다." 하는 소리에 쑥스러움은 사라지고 용기가 생겼다. 차츰 버리는 사람도 적어져서 깨끗해지자 보람이 느껴졌다. 허리 굽혀 줍는 수고로움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도 못한 뿌듯함이 다가왔다. 그냥 산책만 하던 때보다 기쁨 한 가지가 더 보태졌다.그게 어느덧 사십 년이 되었다. 처음엔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주웠는데 이젠 맨손으로 다니며 몇 개 줍기도 하고, 하나도 줍지 못할 때도 있다. 그새 버리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고, 또 가끔은 줍는 사람도 만난다. "경쟁자가 생겼네요." 하며 서로 웃었다.작은 쓰레기 한두 개라도 줍고 나면 뿌듯하고, 또 한 개도 없는 날이면 '이 깨끗한 산길은 내가 만든 거야.'자부심이 생긴다. 최근에 이 길이 '앞산자락길'과 연결되어 더욱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 더러는 맨발로 다니기도 하고 더러는 길이 하도 좋아서 두 번 세 번 오가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치 우리 집 정원이 아름다워서 구경 온 사람처럼 반갑다. 또 간혹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을 봐도 밉지 않다. 그런 사람이 있어 내가 이렇게 뿌듯함을 느끼고, 멋진 정원을 가진 부자가 된 거니까. 남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아니 나도 처음엔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봤던 쓰레기가 내게 이토록 좋은 선물을 안겨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앞으로도 이 쓰레기 줍기는 내가 걸을 수 있는 날까지 계속할 것이다. 비록 그러지 못할 때가 온다 하더라도 이 길만 생각하면 뿌듯한 마음은 남아 있을 것이다.앞에서 아내가 봉사단에 나가 장애인 돕는 일을 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걸 보고 나도 봉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산길 쓰레기 줍기도 그로 인해 시작할 수 있었다.내가 살아온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이 쓰레기 줍는 거만큼 나를 오래도록 뿌듯하게 한 건 없다. 내가 만일 이걸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토록 즐겁지도, 건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때 시니어클럽에 들어가 시각장애인에게 책 읽어주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휠체어를 밀면서 나들이하기, 주민자치센터에서 서예 지도, 가훈 써 주기 봉사도 했지만 그런 건 그리 오래 하지 못했고, 그때의 기쁨뿐이었다. 그러나 이 쓰레기 줍기는 40년이 되었지만 한결같이 나를 뿌듯하게 해준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을 난 받아본 적이 없다.30대 중반, 건강을 잃고 골골거릴 때 아내는 내 걱정을 많이 했다. "저 어린 것들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는 살아야 할 낀데....." 그러고 50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아내가 나보다 다리 허리가 약해졌다. 그만치 몸과 마음의 골몰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 아침마다 산길 산책을 하면서 좀 힘이 되어주느라 손을 잡고 다닌다. 그렇게 걷다가 조그마한 꽁초를 발견하고 그걸 줍느라 잡았던 손을 놓는다. 아내는 잠시 멈추어 서서."당신 그거 알아요?""뭐?""당신이 이 길에서 하는 거, 내한테는 반에 반도 못하고 있다는 거."-끝-

2019-08-08 18:13:17

[포토뉴스] 미리보는 '제17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8일 대구 노보텔에서 열린 '제17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기자간담회'에서 테너 이병삼이 오페라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오페라와 인간을 주제로 한 이번 축제는 28일 개막해 대구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한 도심 곳곳에서 10월 13일까지 열린다.

2019-08-08 18:05:42

대구호러페스티벌 거리홍보 모습. 매일신문 DB

주말나들이·축제·공연·전시·5일장 정보(8월 9일~11일)

※일부 행사는 주최 측 사정으로 취소될 수 있습니다 〈대구호러페스티벌〉대구 시민들에게 시원한 여름을 선사할 제16회 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이 9일(금)부터 11일(일)까지 대구스타디움 서편 시민광장에서 다채롭게 열린다.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은 대구연극협회(회장 이홍기)와 대구호러공연예술제 조직위원회(조직위원장 이홍기, 정용화)가 공동 주최하고, 대구시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이 후원하는 여름 특화형 축제이다.올해 축제는 국내·외 초청공연과 다양한 호러체험, 물총놀이, 물풍선 던지기 등 놀이와 게임, 호러플리마켓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축제장이 채워진다.▷장소= 대구스타디움 서편 시민광장▷일시=8월 9일~11일 ◆대구전시▷노상동 초대展 'Dada 山水'=네앙25 갤러리/~9월 20일▷axis 2019=021 갤러리/~9월 29일▷아양아트센터 기획 '디지털 시대…사진으로 아날로그 기억을 얹다 Ⅳ'결과展=아양아트센터 아양갤러리/~8월 18일▷웃는얼굴아트센터 시즌 기획 2. 김정기 초대展=웃는얼굴아트센터 갤러리/~8월 9일▷여류 100호회 소품展=달성토성마을 다락방/~8월 10일▷봉산문화회관 기획 2019 Hello Contemporary Art-기억공작소 10년으로부터의 자연설계=봉산문화회관 야외광장 및 1-3전시실/~8월 10일▷어울아트센터 기획 'Tech-Emotions'=어울아트센터 갤러리 금호, 갤러리 명봉, 야외공원/~8월 10일▷소북소북-2展=범어아트스트리트 스튜디오 10/~8월 11일▷봉산문화회관 기획 유리상자-아트스타 2019 ver.3 심효선=봉산문화회관 아트스페이스/~8월 11일▷대구포토사랑 창립 10주년 기념 회원전=강정보 디아크/~8월 11일▷석재 서병오 '그 위대한 여정'=대구문화예술회관 1-5 전시실/~8월 11일▷대구현대미술가협회·대구문화예술회관 공동 기획 '대구, 현대미술의 눈'=대구문화예술회관 6-13 전시실/~8월 11일▷한묵회 부채 초대展 '바람이 분다'=달성미술관/~8월 15일▷정석영 개인展=갤러리 문101/8월 1일~15일▷1979년 새로운 도전과 용기:곽인식, 곽덕준, 곽훈=갤러리 신라/~8월 18일▷대구문학관 기획 '炬火를 찾습니다'=대구문학관 기획전시실/~8월 18일▷'어느 날, 어느 순간'=현대백화점 대구점 갤러리H/~8월 20일▷백두대간 자생 씨앗 아름다움에 반하다=범어아트스트리트 벽면 갤러리/~8월 23일▷스티브 윌슨 초대전=갤러리 전/~8월 24일▷대구예술발전소 기획 '대구아트레전드:이상춘"=대구예술발전소 1-2전시실, 로비 및 야외공간/~8월 25일▷2019 여름방학 체험전 신통방통미술탐험대 이집트 미술여행 'Blue Fantasy'=대백프라자 갤러리 전관/~8월 25일▷서승은 중국 출판기념 특별展 'retrospect'=키다리갤러리/~8월 25일▷대구 남부도서관 초대展 '재활용의 상상'=남부도서관 전시실/~8월 28일▷범어아트스트리트 입주작가 릴레이전-Studio 10. ARTGORI=범어아트스트리트 윈도우갤러리/~8월 30일▷방짜유기박물관 기획 '음식, 유기에 담다'展=방짜유기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8월 31일▷갤러리 더키움 초대展 제 22회 김종언 작품展 '밤새'=SPACE 174/~8월 31일▷어호선 조각 초대展=소나무갤러리 1층 전시실/~8월 31일▷어문선 조각 초대展=소나무갤러리 2층 전시실/~8월 31일▷HOMAGE to KOREA, 대한민국에 바칩니다展=우손갤러리/~9월 7일▷2019 수성아트피아 여름방학 특별기획 展 '브릭:또 다른 세상과 만나다'=수성아트피아 전시관 전관/~9월 11일▷'이영희 기증 복식, 새바람' 특별展=국립대구박물관 특별전시실/~9월 15일▷대구미술관 기획 박종규展 '~Kreuzen'=대구미술관 4-5전시실/~9월 15일▷공전하는 사유, 마주침의 순간들 展=경북대학교 미술관/~9월 17일▷대구미술관 기획 'POP/con'=대구미술관 어미홀, 1전시실/~9월 29일▷봉산문화회관 기획 기억공작소 Ⅲ 권정호展=봉산문화회관 4전시실/~9월 29일▷수창청춘맨숀 기획 '인사이드 아웃'=수창청춘맨숀/~9월 29일▷Group of T의 'Launch out展'=칠곡경북대학교병원 힐링갤러리/8월 2일~9월 30일▷대구미술관 기획 박생광 展=대구미술관 2-3전시실/~10월 20일 ◆경북 전시▷초헌 장두건 관 상설전. 산과 들=포항시립미술관/~8월 11일▷소프트 하우스, 비욘드 스틸=포항시립미술관/~8월 11일▷류현민 : 바람이 불어오면=포항시립미술관/~8월 11일▷10중89展=청도 영담한지미술관/~8월 24일▷[2019 경주작가릴레이전 : 최정우] LIAISE=경주예술의전당 갤러리 달/~8월 25일▷최용대 초대展=칠곡 갤러리 오모크/~8월 28일▷수피아미술관 개관展 '어른들은 누구나 어린이었다'=수피아미술관/~8월 31일▷경주솔거미술관 특별기획전 '전통에 묻다'=경주 솔거미술관/~9월 15일▷황술조 작고 80주년 회고전=경주 솔거미술관/~9월 15일▷메간헤스展=안동문화예술의전당 상설갤러리, 5갤러리, 34갤러리, 35갤러리/~9월 22일▷홍리원 개인전:초원위의 여자=경주 갤러리 데스틸/~9월 29일▷THE 냥-LOVE LIKE CATS=한국수력원자력본사 홍보관/~9월 30일▷Rene Magritte, The Revealing Image : Photos and Films=경주 우양미술관/~10월 31일▷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와 함께하는 세계 명화 100선=청도 프로방스/~11월 30일▷[한수원아트페스티벌2019]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 경주의 아침=경주예술의전당 1층 전시홀/~12월 31일▷에코, 아이코=알천갤러리/~2020년 2월 29일▷공존, 함께 걸어온 시간=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전시교육동 2층 특별전시실/~2020년 4월 30일 ◆대구 공연▷서구문화회관 가족뮤지컬 '어린이 넌센스'=서구문화회관 공연장/8월 9일 오후 3시▷대구콘서트하우스 기획 주석용 아코디언 리사이틀=대구콘서트하우스 챔버홀/8월 9일 오후7시30분▷서구문화회관 기획뮤지컬 '넌센스'=서구문화회관 공연장/8월 9일 오후 7시30분, 8월 10일 오후 5시▷어울아트센터 기획 서울발레시어터 '한여름 밤의 꿈'=어울아트센터 함지홀/8월 10일 오후2시·5시▷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 한여름 밤의 팝스 오케스트라 퍼레이드-디오오케스트라=코오롱 야외음악당/8월 10일 오후 7시30분▷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 한여름 밤의 팝스 오케스트라 퍼레이드-마니존윈드콰이어=코오롱 야외음악당/8월 11일 오후 7시30분▷연극 '서툰살인'=문화예술전용극장 CT/~8월 25일 화~금요일 오후 7시30분, 토·일요일 오후 3시·6시▷연극 '그녀가 산다'=아트벙커/~9월 1일 화~금요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4시·7시, 일요일 오후 3시·6시▷서약=떼아뜨로 중구/~오픈런▷동반자살=떼아뜨로 중구/~오픈런▷채환의 논픽션 모노드라마 '마흔즈음에' 김광석을 노래하다=채환홀/~오픈런 ◆경북 공연▷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창작 오페라 석주 이상룡"=안동문화예술의전당 웅부홀/8월 10일 오후 3시·7시▷이장희 콘서트 나 그대에게=울릉천국 아트센터/8월 9일~10일 오후 5시▷세계로 떠나는 음악여행=안동문화예술의전당 야외무대/8월 10일 오후 2시▷하이마스크=안동유교랜드 원형극장/8월 11일 오후 2시▷8월에 눈 내리는 경주예술의전당 전야 - KOC! ANI 경주=경주예술의전당 어울마당/8월 9일·10일 오후 8시 ▷플라잉=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엑스포문화센터/~12월 31일 매주 토·일요일 오후 2시30분▷개그투데이=청도 한국코미디타운/~오픈런▷전유성의 코미디시장 철가방극장 상시공연=청도 철가방극장/~오픈런 ◆주말 대구경북 5일장▷8월 9일(금)=포항시 장기장, 경주시 불국시장/안강장/양남장, 김천시 지례장, 안동시 구담장/정산장, 구미시 해평장, 상주시 용호장/은척장, 문경시 가은장, 경산시 하양장, 군위군 우보장, 의성군 봉양장, 청송군 청송장/안덕장, 영양군 영양장, 영덕군 영덕장, 청도군 청도장, 고령군 고령장. ▷8월 10일(토)=대구시 현풍장, 포항시 오천장, 경주시 양북장/건천장, 김천시 황금장, 안동시 길안장/임동장/은혜장/신평장, 구미시 장천장, 문경시 농암장, 경산시 경산장, 군위군 의흥장, 의성군 단촌장, 청송군 도평장, 영덕군 영해장, 청도군 화양장.▷8월 11일(일)=포항시 기계장/청하장, 경주시 서면장, 안동시 운산장, 영주시 소천장, 상주시 함창장/공성장, 의성군 금성장/안계장, 청도군 풍각장/동곡장. ◆그 외 국내 주요 가볼만한 곳▷스마트국토엑스포=서울 강남구 코엑스/~8월 9일▷광주문화재야행 '동구 달빛걸음'=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등/8월 9일~10일▷수원 문화재 야행(夜行)=경기 수원시 수원화성 등/8월 9일~11일▷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인천 연수구 송도달빛축제공원/8월 9일~11일▷둔내고랭지토마토축제=강원 횡성군 둔내면 시가지 일원/8월 9일~11일▷명주인형극제 =강원 강릉시 명주예술마당/8월 9일~11일▷라이프플러스 시네마위크=서울 영등포구 63빌딩 앞 한강공원/8월 9일~17일▷춘천아트페스티벌=강원 춘천시 축제극장몸짓, 춘천인형극장 등/~8월 10일▷섬의 날 기념 '대한민국 썸 페스티벌'=전남 목포시 삼학도 일대/~8월 10일▷가맥축제=전북 전주시 전주종합경기장 내 야구장/~8월 10일▷영월 동강뗏목축제=강원 영월군 동강둔치 일대/~8월 10일▷한여름 밤의 신정호 별빛축제=충남 아산시 신정호수공원/~8월 10일▷통영한산대첩축제=경남 통영시 도남관광단지·문화마당 등/8월 10일~14일▷이럴때 이런음악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서울 영등포구 영산아트홀·중구 세종문화회관 등/8월 10일~14일▷명원세계차박람회=서울 강남구 코엑스/~8월 11일▷태백 해바라기축제=강원 태백시 황연동 구와우마을/~8월 11일▷제천국제음악영화제=충북 제천시 청풍호반 일대/~8월 13일▷서울무궁화축제=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독립공원/~8월 15일▷제주국제관악제·제주국제관악콩쿠르=제주 서귀포시 ICC제주국제컨벤션센터 탐라홀 등 제주도내 각 공연장/~8월 16일 ▷세미원 연꽃문화제=경기 양평군 세미원/~8월 18일▷논산 토마토페스티벌=충남 논산시 상월면 상월로 522 일대/~8월 18일▷한강몽땅 여름축제=서울 '한강공원' 일대/~8월 18일▷아시아프 2019=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8월 18일▷이순신의 물의나라=경남 통영시 도남동 트라이애슬론 광장/~8월 18일▷세계 조롱박 축제=충남 청양군 알프스마을/~8월 18일▷춘천 호수별빛나라축제=강원 춘천시 춘천MBC사옥, M광장 일대/~8월 23일▷포천 이동갈비바베큐축제=경기 포천시 도리돌마을/~8월 25일▷아침고요수목원 무궁화축제=경기 가평군 아침고요수목원/~8월 25일▷양주 유수풀=경기 양주시 장흥자연휴양림/~8월 25일▷옐로우리버비치 시즌5=경남 합천군 옐로우리버비치/~9월 1일▷연천DMZ국제음악제=경기 연천군 허브빌리지 올리브홀, 연천수레울아트홀, 연천문화체육센터 등/~9월 21일▷동강국제사진제=강원 영월군 동강사진박물관/~9월 29일▷마노르블랑 수국축제=제주 서귀포시 마노르블랑/~9월 30일

2019-08-08 14:47:45

대구미술관이 여름방학을 맞아 현재 전시 중인 '팝콘'전 홍보를 위해 매주 한 번 씩 갓 튀긴 팝콘을 관람객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대구미술관 제공

여름방학 문화바캉스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대구미술관

높다란 천장에 탁 트인 로비에 들어서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분 좋은 햇살과 함께 쾌적하고 상쾌한 실내 공기가 연일 36℃를 오르내리는 후텁지근한 도심과는 비교 자체를 불허한다. 무더위 속에서 대구미술관을 찾은 엄마와 아이들, 친구들은 미술관이 제공하는 갓 튀긴 팝콘을 먹으며, 포토존에서 셀카로 추억을 쌓고, 1층과 2층으로 이어지는 3편의 기획전시를 감상하며 예술에 흠뻑 젖는다.대구미술관(관장 최은주)이 여름방학을 맞아 하루 평균 관람객 수 1천300여명을 기록함으로서 '문화바캉스'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초·중·고가 방학에 들어간 지난달 넷째 주부터 이달 첫째 주까지 두 주간 대구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은 모두 1만5천500여명으로, 같은 기간에 2016년의 6천800여명과 2017년의 1만1천300여명에 비하면 관람객 수가 각각 2.4배와 1.36배 늘어났다.특히 올해 여름방학 기간 중 관람객 수는 지난해 간송특별전의 관람객 수 1만7천여명에 육박하는 수치로, 현재의 전시가 특별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는 것은 대구미술관이 대구시민들의 문화 대안공간으로 연착륙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이처럼 대구미술관이 '문화바캉스'의 장으로 떠오른 배경에는 '대프리카'로 상징되는 대구의 무더운 여름이 있다. 높은 기온과 습도에 미술작품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구미술관은 연중 항온(23~24℃)과 항습(58%)를 유지한다. 그러다보니 시민들에게 대구미술관 로비인 어미홀과 전시실은 훌륭한 피서지가 되었다. 숨이 막히는 무더위도 피하고 미술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멋진 '여름 피서지'가 되는 셈이다.덧붙여 다양한 색깔을 내고 전시기획으로 관람객 층을 다양화하고 매주 특정 요일마다 이벤트를 여는 등 관람객 유치를 위한 미술관의 노력 또한 관람객 증가에 힘이 되고 있다.초·중생 두 아이의 엄마인 최환성(42·수성구 만촌동) 씨는 "시내에 있으면 찜통더위에 에어컨에만 의존해야 하지만 미술관에 오면 아이들의 심성과 인문학적 교양도 키울 수 있고, 무엇보다 쾌적한 환경이 마음에 들고 각종 이벤트로 두세 시간 정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람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대구미술관은 또한 최근 교육팀을 강화해 '보는 미술관'에서 '참여하는 미술관'으로 관람객 참여도를 높임으로써 사회교육 기관과 시민친화적인 미술관 역할에도 노력하고 있다.미술관 분야 예비 전문인 특강, 꿈 다락 문화학교, 담(Daegu Art Museum의 약자)씨네 교육상점, 치매 힐링 프로그램, 성인을 위한 워크숍, 중등교사 교육 등 전시 연계 특강 등을 통해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이밖에도 대구미술관은 유튜브, 인스타 그램, 페이스 북, 블로그 등 모바일 환경에 맞춘 다양한 홍보채널 운용과 홈페이지 개편으로 전시 외 미술관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전달해 미술관에 대한 궁금증과 친숙성을 높이고 있다.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교육은 전시, 소장품과 더불어 미술관의 핵심 기능 중 하나다"며 "다양한 관객 개발과 사회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미술관 교육팀을 대폭 강화했다. 앞으로도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참신한 교육 프로그램을 신설해 지역의 문화 허브로 성장해 가겠다"고 밝혔다. 문의 053)803-7901

2019-08-08 12:12:01

조선의 미식가들/주영하 지음/휴머니스트 펴냄

어릴 적부터 입맛이 남달랐던 허균은 유배지에 와서 보니 쌀겨조차 부족했고 밥상 위의 반찬이라곤 썩어 문드러진 뱀장어나 비린 생선에 쇠비름과 미나리뿐이었다. 그나마 하루에 간신히 두 끼를 먹다 보니 종일 배가 고팠다. 허균은 여러 음식을 종류대로 나열해 기록하고 때때로 보면서 고기 한 점을 눈앞에 둔 셈치기 위해 글을 썼다. 그리고 글의 제목을 '푸줏간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시다'라는 뜻으로 '도문대작(屠門大嚼)'이라고 붙였다. …… '도문대작'에서 언급된 지역은 동해·남해·황해를 비롯하여 조선 팔도에서 빠지는 곳이 없을 정도다. 벼슬한 뒤로는 남북으로 임지를 옮겨 다니며 이런저런 음식을 대접받았다. 이쯤 되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음식이라면 고기며 나물이며 먹어보지 않은 게 없다고 하니, 그야말로 허균은 '식신로드'의 주인공이었던 셈이다.(조선의 미식가 中)먹방인 쿡방이 유행하고 자신이 다닌 맛집을 SNS나 블로그에 남기는 것이 유행이다.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먹은 것을 기록하고 남긴 15명의 미식가들이 있었다. 이들이 남긴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조선의 미식가들'이 출간됐다.◆왕부터 사대부 여성까지, 조선의 미식가들음식을 문화와 인문학, 역사학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구해 온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교수가 조선시대 음식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지은이는 조선시대 문헌을 두루 살펴 직접 먹거나 만들어본 음식에 관한 글을 남긴 15명을 뽑아, 그들의 글을 통해 음식 취향과 경험을 책에 담았다.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남긴 글에서는 음식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성리학을 중시했던 그들이 '군자라면 먹고 마시는 일을 즐기지 말고 피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로 인해 음식은 절제해야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균은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성이요, 특히 식욕은 생명과 관계된. 옛 선현들이 먹고 마시는 일을 천히 여겼던 것은 먹는 것을 탐해 이익을 좇는 일을 경계한 것이지, 어찌 먹는 일을 폐하고 음식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이겠는가?"라고 말했다.이 책에서는 다섯 가지 사건과 시기로 한반도의 음식 역사를 구분한다. 불교의 유입에 따른 육식 기피, 원나라 간섭기 육식 문화의 확대와 새로운 음식 유행,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 된 성리학의 영향, 17세기 본격 시작된 연행사의 청나라 방문, '콜럼버스 교환'으로 새로운 식재료의 등장 등이다. '조선 미식가' 15인의 글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음식 취향과 경험이 등장한다. 왕과 어의, 선비, 사대부 여성 등 15명은 살았던 시대도, 남긴 글의 형식도 신분이나 성(性)도 다르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각각의 시대에 유행했던 음식과 식재료, 요리법, 그리고 생생한 '식후감(食後感)'까지 살필 수 있다.◆음식에 대한 애정을 글로 남긴 미식가들고려 말 조선 초를 살았던 이색은 원나라에서 들어온 소주와 두부에 관한 시를 지었고, 조선 중기 연행사로 연경을 다녀온 김창업은 중국에서 맛본 새로운 음식에 관한 글을 남겼다.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는 세시기를 통해 조선 후기 민간의 세시풍속을 자세히 기록했다.사대부 여성들도 서재에서 요리에 관한 글을 남겼다. 이들은 요리법을 연구하고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조선 여성이 쓴 가장 유명한 요리책은 장계향이 쓴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과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가 있다. 이들은 손수 요리책을 지어 집안 대대로 물려주었고, 여강 이씨는 집을 떠나 임지에 있던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며 요리법과 음식 맛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사대부가 여성들이 남긴 글은 조선시대 지배층의 식생활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음식만을 주제로 한 글은 흔치 않았지만, 허균과 김려, 이옥 등은 직접 맛본 음식에 관해 글을 남겼다. 허균은 조선 팔도에서 먹어본 음식의 품평과 함께 먹은 장소, 요리법, 잘 만드는 사람과 명산지 등의 정보를 '도문대작'에 자세히 기록했고, 이옥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의 맛과 먹는 방법을 글로 남겼다. 김려는 귀양살이를 하며 박물학적 관심에서 어류학서 '우해이어보'를 썼는데, 그는 고추를 좋아해 고추에 대한 애정 가득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유교사회에서도 음식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고 글로 드러낸 이들 덕분에 우리가 조선의 음식에 대해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352쪽, 2만원.

2019-08-08 11:15:15

[문화캘린더] 공연 12~23일

♧국악 뮤지컬 '곰돌이의 여행'=16일 오후 3시, 7시 30분 서구문화회관 공연장 053)663-3081♧2019 월드오케스트라시리즈-유러피안 솔로이스츠 콘서트=16일 오후 7시 30분 대구콘서트하우스 챔버홀 053)250-1400♧판소리 뮤지컬 '제비장군전' 리딩 공연=16일 오후 7시 30분 봉산문화회관 스페이스 라온 010-3049-2731♧대구오페라하우스 기획 렉처 오페라 '카르멘'=16, 17일 금 오후 7시 30분 토 오후 3시 대구오페라하우스 별관 카메라타 053)666-6170♧DAC 팔공홀 재개관 기념 페스티벌-뮤지컬 '깨어나는 전설 바데기'=16, 17일 오후 7시 30분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053)606-6193♧DAC인문학극장 '깊은 시선'-역사학자 이이화=20일 오후 7시 30분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053)606-6345♧대구콘서트하우스 기획 특별 연주회 '별들의 꿈'=20일 오후 7시30분 대구콘서트하우스 챔버홀 053)250-1400♧대구시립예술단 기획 수요상설공연=21일 오후 7시 대구문화예술회관 동편 야외 무대 053)606-6314♧대구시립교향악단 기획 연주회 '할리우드 인 대구'=23일 오후 7시 30분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053)250-1475♧서구문화회관 기획 명랑 연극 '동백꽃'=23일 오후 7시 30분 서구문화회관 공연장 053)663-3081♧대구오페라하우스 기획 아마추어 오페라 '라 보엠'=23일 오후 7시 30분 대구오페라하우스 별관 카메라타 053)666-6170♧대구학생문화센터 기획 뮤지컬 '비방문 탈취작전'=23일~8월 24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오후 2, 5시 대구학생문화센터 소극장 053)231-1334

2019-08-08 11:09:51

2018 시상식 모습

지역 출판사 책으로 서평 도전하세요

대구의 중견 출판사 학이사(대표 신중현)에서 운영하는 학이사독서아카데미와 사랑모아통증의학과(원장 백승희)가 공동으로'제3회 사랑모아독서대상-서평'을 공모한다.매일신문, 한국출판학회, 한국지역출판연대가 후원하는 이 공모전은 국민의 독서문화 진흥과 지역 출판 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개최하며, 지역 출판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서평 대상도서는 서울과 경기도 소재 출판사를 제외(수원, 광주, 시흥 지역 출판사 가능)한 전국의 모든 지역 출판사에서 발간한 도서를 대상으로 공모하며, 만18세 이상이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수상자에게는 사랑모아 독서대상 1명(상금 100만 원과 상패), 한국출판학회장상 1명(상금 70만 원과 상패), 학이사독서아카데미상 1명(상금 50만 원과 상패), 후원 기업상 20명(상금 각 30만 원과 상장)을 선정해 시상하며 수상작은 단행본으로도 출간된다.이 공모전은 지난 대회부터 직장 내 독서운동에 관심을 가진 대구지역 20개 기업이 동참, 기업의 명칭을 딴 독서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응모 부문은 제한이 없으며, 원고 분량은 각 편당 3천 자 안팎으로 2편 이상이다. 응모기간은 2019년 8월 20일(화)부터 11월 20일(수)까지이며, 2019년 12월 중순 심사결과를 발표한다.원고는 학이사 홈페이지에서 양식을 다운받아 메일(hes3431@naver.com) 또는 우편 (대구시 달서구 문화회관 11안길 22-1 학이사독서아카데미)으로 접수하면 된다. 053) 554-3432

2019-08-08 11:09:03

뮤지컬 '넌센스'

대구 서구문화회관 뮤지컬 '넌센스'

대구 서구문화회관(관장 박원숙)은 9일(금) 오후 오후 7시 30분, 10일(토) 오후 5시 양일간 20여 년 동안 인기가 식지 않는 국민 뮤지컬 '넌센스'를 무대에 올린다.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주관하는 방방곡곡 문화공감 우수공연 프로그램인 이번 공연은 댄 고긴의 원작을 바탕으로 신인 뮤지컬 배우들의 열정과 신선함이 더해져 강력한 웃음폭탄 무대를 보여줄 예정이다.뮤지컬 '넌센스'는 의문의 야채스프를 먹고 무려 52명의 수녀들이 식중독 증상으로 죽어버린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행히 외출중이라 목숨을 건진 5명의 수녀들이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펼치는 배꼽 잡는 사투를 그린 코미디뮤지컬이다.폭염의 대프리카에서 무더위에 불쾌지수가 높아졌다면 가족들과 함께 마음껏 웃고 즐기며 더위를 한방에 날려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문의 053)663-3081

2019-08-08 11:06:02

대구교육박물관이 개최하고 있는 기획전시 '영어, 가깝고도 먼'.

대구교육박물관 기획전시 연계 '영어 이야기' 강연 개최

대구교육박물관(관장 김정학)은 10월 20일(일)까지 열고 있는 기획전시 '영어, 가깝고도 먼'과 연계한 특별강연을 9월 한 달간 총 4회에 걸쳐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개최한다. '미래를 여는 영어, 미래인재를 위한 4인 4색 영어이야기'를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강연은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영어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인물들을 초청,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이다.첫 강연인 9월 3일(화)에는 '영어 잘하는 개그맨 김성원'씨가 강연자로 나선다. 멕시코 이민 후 영어를 접한 계기, 우리나라로 돌아온 후 영어를 잊지 않기 위해 애썼던 시간, 그리고 영어를 통해 슬럼프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9월 10일(화) 강연자는 기업체 영어 교육 전문가 케빈 경이다. 영어에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영어 대화를 회피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알고 있는 쉬운 표현들을 사용해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9월 17일(화)에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 레지던트 이근영씨가 강사로 나선다. 외국에 대한 경험 없이 미드로 영어를 공부해 프로농구 동시통역사까지 지낸 그의 영어 공부 방법과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영어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들어본다.9월 24일(화)에는 런던 정경대(LSE)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한 정영은씨가 영국 유학, 국제 자원봉사 등을 통해 많은 외국인들과 만남을 경험하면서 느낀 이야기를 들어본다.기획전시 '영어, 가깝고도 먼'은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역사, 교육과정변천, 교육수준 향상을 위한 노력 등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걸어온 길을 다양한 사진과 그림, 옛 교재 등을 통해 살펴보는 전시다.강연 참가신청은 대구교육박물관 홈페이지(www.dge.go.kr/dme)를 통해 8월 12일(월)부터 선착순으로 받으며 중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053)231-1754

2019-08-08 11:05:39

노상동 작

네앙25갤러리 '노상동 다다산수전'

미술사적 조류에서 다다이즘(Dadaism)은 이성적 계획이나 미학적 범주를 벗어난 예술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다다이즘과 서예가 결합한 결과는 어떨까?네앙25 갤러리는 9월 20일(금)까지 노상동 초대전 '다다 산수'전을 열고 있다. 추상서예가 노상동 작가는 서양의 다다이즘 개념과 동양의 산수 정신인 구상형식의 회화를 결합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문필묵(文筆墨) 기세운(氣勢韻)'을 보여주고 있다.노상동은 지금까지 36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추상서예의 개척자로 산수와 네모를 결합한 작품을 구사하고 있다. 문의 010-7245-0509

2019-08-08 11:05:30

정석영 작

갤러리 MOON101 정석영 조각 개인전

조각은 3차원의 공간 속에 구체적인 물질로 구현한 입체로서 강하고 견고한 '양감'의 구성체이다. 청년 조각가 정석영은 현실과 조각이 관계에서 늘 의문을 던지며 불가능한 순간을 과학적인 조각 접근 방법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원래 조각은 물질을 소재로 도구를 사용해 입체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조형적 시각성'이 중요하다. 정석영은 이런 의미에서 자신만의 다른 접근방법으로 독특한 소재를 선택해 대상을 정밀하게 모방하고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그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연장 시리즈'의 재료는 대리석이다. 이 대리석으로 작가는 조인트, 프레스, 몽키 스패너와 같은 금속의 연장들이나 스위스 칼처럼 작은 오브제에 이르기까지 조각으로 구현하고 있다.돌로 세밀한 금속공구를 조각한다는 게 말처럼 만만치는 않다. 고도의 기술과 까다로운 공정, 힘든 노동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기에 작가는 욕망의 배설과 난해함을 무기로 삼는 현대미술의 반대편에 서서 수공의 기예에 골몰하는 예술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이번 신작들은 비정형적 형태 속에서 과학적 해석으로 풀어 만들어진 조각 개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일반적인 돌조각의 개념과 표현력을 넘어 가장 전통적인 재료로 구현한 현대적이고 기계적인 정교함은 그 자체만으로 관객들에게 충격과 경이로움을 주고자 한다."작가의 말처럼 그의 정직한 에술적 태도는 연장 시리즈에서 형태적 설명에 바탕을 둔 섬세함에 다시 한 번 놀라기에 충분하다.갤러리 MOON101은 지난해 '대구청년미술프로젝트 2018'에 선정돼 출품한 작가들 중 릴레이 형식의 초대 개인전을 열고 있는데 이번 정석영 작가는 1차로 기획돼 진행되는 개인전이다. 전시는 28일(수)까지.문의 010-4501-2777

2019-08-08 11:05:16

바이올린 조윤진

청년 음악가 100명의 '솔라시안 유스 오케스트라'

청년 음악가 100여명으로 꾸며지는 '솔라시안 유스 오케스트라' 공연이 17일(토) 오후 5시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열린다.솔라시안 유스 오케스트라는 청년 음악가 육성 프로젝트로, 참여하는 100여명의 청년 음악가들은 국내외 실력파 연주자들과 저명한 지휘자와 함께 8월 12일부터 17일까지 6일간 연습에 돌입한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17일 공연으로 펼쳐질 예정이다.이번 솔라시안 유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은 뉴저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데이빗 로다. 제1회 번스타인 국제 지휘 콩쿠르의 파이널 리스트로 이름을 알리며 지휘자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그는 보스턴 교향악단에서 오자와 세이지의 부지휘자로 활동했다.또 유럽의 명문 학교와 오케스트라를 휩쓸고 있는 젊은 연주자들도 대거 참여해 선배 연주자로서 후배들과 음악적 교류를 나눌 예정이다.바이올린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부악장 조윤진, 앙상블 토니카 음악감독 이강원, 하겐 필하모닉 악장을 역임한 김나현이 나선다. 비올라에는 함부르크 NDR 엘브 필하모닉의 종신 단원 김영도, 첼로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단원인 악셀 본 휴네가 담당한다. 그리고 하노버 북독일 라디오 필하모닉 등에서 수석단원을 역임한 조재복이 콘트라베이스를 맡는다.플루트에는 로마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수석 아드리아나 페헤이라, 오보에에는 대구시립교향악단 수석 김민정이 참여한다. 클라리넷은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 수석 스테판 뫼르트, 그리고 괴팅어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 두이스부르크 필하모니 공동수석 등을 역임한 허지은이 함께한다. 호른에는 전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수석인 리오넬 스페샬, 그리고 로마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수석 알폰소 곤잘레스 바퀸이 트럼펫을 맡는다.일주일간의 연습을 통해 베토벤 생애 유일한 오페라 작품 '레오노레 서곡 3번', 영국의 인상주의를 대표 주자 본 윌리엄스의 '탈레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그리고 대담하고 극적인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5번'을 연주한다.이형근 대구콘서트하우스 관장은 "대구콘서트하우스는 국내 유일의 오케스트라 전용홀로서의 사명을 띠고 청년 음악가들에게 최고의 도움닫기가 될 준비를 마쳤다. 이 치열한 여름을 거쳐 더 원숙한 연주자로 나아가는 이들의 성장과정을 많은 관객들이 함께 공감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석 1만원. 053)584-0300

2019-08-08 11:05:00

가족 뮤지컬 '월드스타 뽀로로'

뮤지컬 '월드스타뽀로로' 대구 앙코르 공연

아이월드컴퍼니는 가족 뮤지컬 '월드스타 뽀로로'를 17일(토)~18일(일) 수성아트피아에서 앙코르 공연을 한다.뮤지컬 '뽀로로'는 2005년부터 2016년까지 353곳 전국투어, 총 3천600여 회의 공연을 통해 총 200만명이 관람한 국내 최고의 가족극이다. 이런 대기록의 뽀통령이 2019년 완전히 새로운 'NEW 뽀로로쇼'로 3년만에 다시 찾아왔다.뮤지컬 '뽀로로'는 뽀로로를 비롯해 크롱, 패티, 루피, 에디, 해리 등 최고의 캐릭터와 신나는 동요가 어우러진 대형버라이어티 같은 환상적인 무대를 선사한다.또 무대에는 대형 비행기가 등장하고 빙하가 움직이는가 하면 뽀로로 친구들이 객석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색다른 재미도 있다.공연 17일(토)~18일(일)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4시 30분. 관람료 R석 5만5000원, S석 3만3000원(예매시 할인적용). 문의 1544-3901.

2019-08-08 11:04:09

여성소리그룹 '악녀'. 웃는얼굴아트센터 제공

여성소리그룹 악녀 소창극 '심청' 공연

(재)달서문화재단(이사장 이태훈) 웃는얼굴아트센터는 예술키움시리즈 여섯 번째로 여성소리그룹 악녀의 소창극 '심청'을 오는 28일(수) 오후 7시 30분 웃는얼굴아트센터 와룡홀에서 공연한다.예술키움시리즈(문화가 있는 날 정기공연)는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에서 진행하는 '2019 지역문화예술회관 문화가 있는 날 공연산책'에 선정된 국비 지원 사업으로 지역문화 활성화를 목표로 지역의 우수예술단체를 발굴하고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수준 높은 공연을 제공하는 기획프로그램이다.8월 공연단체인 여성소리그룹 '악녀'(대표 서은애)는 즐거울 락(樂)에 여자 녀(女) 즉, '음악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여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판소리를 하는 여성들이 모여 결성한 팀인 악녀는 오랜 시간 동안 한 분의 스승을 모시며 함께 동고동락한 선·후배가 뜻을 모아 만들어졌다.여성소리그룹 악녀는 2017년 창단 연주회를 가진 이후 2018년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 Sing콘서트 '홍운탁월의 신명' 출연,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가야금병창 축하공연, 제2회 정기연주회 '상사몽', 제12회 달성문화원 우리소리 정기공연 '국악의 향연' 출연 등 활동을 했다.악녀는 이번에 공연에서 전통음악어법을 바탕으로 전통음악과 창작음악 레퍼토리를 통해 국악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과 만남을 통해 국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예정이다.특히 소창극 '심청'은 한국의 전통예술 중 판소리를 고찰하는 공연으로 우리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한 시대적 사명감과 전통음악의 계승 그리고 발전적 측면을 젊은 예술가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준비됐다. '악녀'만의 해석과 개성으로 효녀 '심청'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가 기대되고 있다.송국선 달서문화재단 상임이사는 "관객들이 뮤지컬에는 익숙해져있지만 창을 기본으로 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극 '창극'은 어려워하는 것 같다"며 "전통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인 만큼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이후 '예술키움시리즈(문화가 있는날 정기공연)'은 9월 25일(수)-웃음 가득한 뮤지컬 갈라(뮤테이저), 10월 30일(수)-탑퍼커션앙상블과 함께하는 타악기 앙상블(탑 퍼커션 앙상블), 11월 29일(금)-연극 춘분(극단 헛짓)이 예정되어 있다. 전석 1만원. 문의 웃는얼굴아트센터 053)584-8719.

2019-08-08 11:03:55

대구시향 '제19회 대학생 협주곡의 밤' 협연자 모집

대구시립교향악단(이하 대구시향)은 오는 10월 31일(목)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개최되는 '제19회 대학생 협주곡의 밤' 협연자를 공개 모집한다.모집 대상은 대구경북지역 소재 대학의 재학생(휴학생 및 대학원생 제외)으로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피아노 부문에서 약간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단 2016년 1월 1일 이후 대구시향 '대학생 협주곡의 밤'에 출연한 이력이 있는 자는 모집 대상에서 제외된다.전 참가자는 반주자를 개별 동반해 교향악단과 협연이 가능한 자유곡 1곡(전 악장)을 연주해야 하며, 듀엣 이상인 경우에도 응시 가능하다.응시원서 접수 기간은 8월 19일(월)부터 8월 21일(수) 오후 5시까지며, 대구콘서트하우스 홈페이지(concerthouse.daegu.go.kr)에서 제출서류를 내려 받아 작성 후 이메일(dsooffice1964@naver.com)을 통해 접수하면 된다. 응시원서에는 반드시 최근 3개월 이내에 촬영한 상반신 컬러사진(3㎝x4㎝)을 사용해야한다.응시자 실기전형은 8월 29일(목) 오전 10시부터 대구콘서트하우스 3층 챔버홀에서 진행되며, 같은 날 오전 9시에는 대구콘서트하우스 5층 대구시향 연습실에서 응시자 예비소집이 있을 예정이다. 최종 합격자는 9월 2일(월) 개별통보 및 대구콘서트하우스 홈페이지에 공지할 예정이다.대구경북지역 클래식 음악의 저변확대와 차세대 유망주 발굴을 위해 대구시향에서는 매년 상반기에는 '청소년 협주곡의 밤', 하반기에는 '대학생 협주곡의 밤'을 개최해 오고 있다. 053)250-1473

2019-08-08 11:03:08

상주본 인위적 훼손 여부, 실험으로 밝힌다

JTBC 탐사보도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9일 오후 9시 30분 방송에서 훈민정음 상주본의 행방을 추적한다고 예고했다.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11년 전 존재가 알려지면서 소유권 논란이 이어지다 지난달 15일 대법원이 국가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다시 화제가 됐다. 그러나 소장자 배익기 씨가 상주본을 숨겼고, 진상규명을 통해서만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혀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배 씨는 앞서 2015년 한글날을 앞두고 해례본의 1조원 가치를 주장하며 1천억원을 자신에게 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상주본 주석이 세종대왕 친필이기 때문에 간송본보다 가치가 높다는 게 배 씨의 말이다.이에 제작진은 상주본이 정말 1조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검증에 돌입했다.아울러 최초 공개 이후 9년 만인 2017년 4월 10일 다시 모습을 드러낸 상주본이 불에 그을린 모습인 점이었던 것에도 착안, 관련 실험도 했다.최근 한 사찰의 스님은 불에 탄 상주본 모습을 보고 인위적으로 훼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러 전문가가 이 스님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모여 인위적 훼손 가능성을 가리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다.

2019-08-08 10:47:04

신재순 작 'Plastic Flowers'

대구환경미술협회 '환경미술-재활용의 상상전'

일회용품들이 넘쳐나는 현실이다. 한 번 쓰고 나면 쓰레기로 치부돼 관심 밖으로 밀려나면서 정작 우리의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재활용'이 화두로 등장한 또 다른 현실에서 대구환경미술협회(회장 신재순)는 대구시남부도서관의 초대로 '환경미술-재활용의 상상전'을 열고 있다.이 전시는 무심코 버려지는 물건을 실생활에서 자원으로 응용할 수 있는 대안 마련과 더불어 기왕이면 조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함으로써 지구 환경 보호와 자원 보전 및 심리적인 힐링과 녹색환경 마인드를 고양하기 위해 개최됐다.이 목적을 위해 대구환경미술협회 회원 30여명은 작가들 나름의 생활환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활용품을 이용, 평면과 입체, 설치 등의 작품 50여점을 펼쳐 보이고 있다.남학호 작가는 음료와 맥주병을 모아 병뚜껑을 활용한 '입술의 유혹'을 제작, 재활용과 자원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신재순 작가는 페트병의 밑면을 잘라 불에 녹여 채색한 꽃들과 상품의 포장용기로 쓰인 플라스틱 케이스로 꽃병을 만든 'Plastic Flowers-500년간 시들지 않는 꽃'과 폐약통과 의자를 이용한 설치작품 '오염된 우리의 자리'를 통해 플라스틱의 무분별한 남용과 오염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다.김호성 작가는 각파이프, 철망, 엔진부품 등을 용접하고 볼트로 조인 정크아트 작 '여행자'와 '불멸의 죽음'을 내놨으며, 배수아 작가는 계란판, 색빨대, 버려진 의자를 이용해 '니들이 계란판을 알어?'라는 작품을 통해 버려진 것들의 미적 가치를 부여하고, 서정숙 작가는 종이 쇼핑백, 종이박스, 포장지 등을 오브제 삼아 '일상을 담아'를 선보이고 있다.김명주 작가의 폐 이어폰을 활용한 '소통 할까요?'는 남의 소리를 듣지 않고 내가 듣고자 하는 것만 들으려는 현대인들의 속성을 풍자하며, 서정분 작가는 화분 지지대, 면봉, 자투리천으로 만든 설치 작품 '한여름 밤의 꿈'을, 조승형 작가는 전기 플러그, 일회용 머리빗을 이용해 마이클 잭슨 춤동작을 형상화한 '마이크 잭슨'을 출품했다.배국자 작가는 고깔모양의 정수기 종이컵을 한 번 쓰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나팔꽃'으로 재탄생시켰으며, 이상희 작가는 일회용 숟가락, 스티로폼, 리본테이프를 활용한 '꽃들의 향연'을, 문차식 작가는 도자기 파편을 이용한 '그대 그리고 나'를, 배영순 작가는 골판지를 써서 '붓-날개달다'를, 손명숙 작가는 일회용 접시를 이용해 '행복한 미키마우스'를, 김명삼 작가는 작은 기계부품으로 '부엉이'를 형상화했다.이외에도 김칠생 김효교 유희숙 손영순 김장수 작가들은 과일 포장재, 폐CD, 폐타일, 골프동, 폐지 등을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무엇보다 이번 전시의 포인트는 일회용품들에 무관심했던 관람자들에게 '아 일회용품에 이런 것들이 있었구나'와 '이렇게 쓰일 수도 있구나'하는 각성을 불러일으켜 줄 수 있다는 점이다.신재순 회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지구 자원 보전을 위해 재활용하고 아껴쓰고 절약하는 습관을 키워 몸을 실천하는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전시는 28일(수)까지. 문의 053)231-2331

2019-08-08 09:45:46

강윤정 작 'Res extensa'

봉산문화회관 3전시실 강윤정 개인전

3D로 프린트된 나무 모형물과 LED조명, 프로젝션으로 이루어진 영상과 설치 작품 전시가 열린다. 작가 강윤정이 봉산문화회관 3전시실에서 'Res Extensa'를 주제로 한 개인전이다.작가에게 나무는 자연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3D 프린팅으로 물질화된 자연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연의 물질적 재현이면서 형상적인 재현이 아니라 자연환경에서 느끼는 심상의 재현으로 자연환경을 전시장으로 들여온 것이다.그래서 작가의 작품들은 자연의 축소판이라기보다 전시장이 더 넓은 환경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전시는 14일(수)부터 18일(일)까지이다.문의 010-8200-1791

2019-08-08 09:37:59

신재순 작 'Plastic Flowers'

대구환경미술협회 '환경미술-재활용의 상상전'

일회용품들이 넘쳐나는 현실이다. 한 번 쓰고 나면 쓰레기로 치부돼 관심 밖으로 밀려나면서 정작 우리의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재활용'이 화두로 등장한 또 다른 현실에서 대구환경미술협회(회장 신재순)는 대구시남부도서관의 초대로 '환경미술-재활용의 상상전'을 열고 있다.이 전시는 무심코 버려지는 물건을 실생활에서 자원으로 응용할 수 있는 대안 마련과 더불어 기왕이면 조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함으로써 지구 환경 보호와 자원 보전 및 심리적인 힐링과 녹색환경 마인드를 고양하기 위해 개최됐다.이 목적을 위해 대구환경미술협회 회원 30여명은 작가들 나름의 생활환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활용품을 이용, 평면과 입체, 설치 등의 작품 50여점을 펼쳐 보이고 있다.남학호 작가는 음료와 맥주병을 모아 병뚜껑을 활용한 '입술의 유혹'을 제작, 재활용과 자원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신재순 작가는 페트병의 밑면을 잘라 불에 녹여 채색한 꽃들과 상품의 포장용기로 쓰인 플라스틱 케이스로 꽃병을 만든 'Plastic Flowers-500년간 시들지 않는 꽃'과 폐약통과 의자를 이용한 설치작품 '오염된 우리의 자리'를 통해 플라스틱의 무분별한 남용과 오염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다.김호성 작가는 각파이프, 철망, 엔진부품 등을 용접하고 볼트로 조인 정크아트 작 '여행자'와 '불멸의 죽음'을 내놨으며, 배수아 작가는 계란판, 색빨대, 버려진 의자를 이용해 '니들이 계란판을 알어?'라는 작품을 통해 버려진 것들의 미적 가치를 부여하고, 서정숙 작가는 종이 쇼핑백, 종이박스, 포장지 등을 오브제 삼아 '일상을 담아'를 선보이고 있다.김명주 작가의 폐 이어폰을 활용한 '소통 할까요?'는 남의 소리를 듣지 않고 내가 듣고자 하는 것만 들으려는 현대인들의 속성을 풍자하며, 서정분 작가는 화분 지지대, 면봉, 자투리천으로 만든 설치 작품 '한여름 밤의 꿈'을, 조승형 작가는 전기 플러그, 일회용 머리빗을 이용해 마이클 잭슨 춤동작을 형상화한 '마이크 잭슨'을 출품했다.배국자 작가는 고깔모양의 정수기 종이컵을 한 번 쓰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나팔꽃'으로 재탄생시켰으며, 이상희 작가는 일회용 숟가락, 스티로폼, 리본테이프를 활용한 '꽃들의 향연'을, 문차식 작가는 도자기 파편을 이용한 '그대 그리고 나'를, 배영순 작가는 골판지를 써서 '붓-날개달다'를, 손명숙 작가는 일회용 접시를 이용해 '행복한 미키마우스'를, 김명삼 작가는 작은 기계부품으로 '부엉이'를 형상화했다.이외에도 김칠생 김효교 유희숙 손영순 김장수 작가들은 과일 포장재, 폐CD, 폐타일, 골프동, 폐지 등을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무엇보다 이번 전시의 포인트는 일회용품들에 무관심했던 관람자들에게 '아 일회용품에 이런 것들이 있었구나'와 '이렇게 쓰일 수도 있구나'하는 각성을 불러일으켜 줄 수 있다는 점이다.신재순 회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지구 자원 보전을 위해 재활용하고 아껴쓰고 절약하는 습관을 키워 몸을 실천하는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전시는 28일(수)까지. 문의 053)231-2331

2019-08-08 09:37:36

성태진 작 '배틀 오브 백두산'

롯데갤러리 대구점 '나의 추억, 나의 히어로'전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날아라 날아 태권 브이/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어릴 적 꿈과 상상의 나래를 함께 키워갔던 '우리들의 영웅' 로보트 태권 브이가 입체와 평면 작품으로 우리를 찾아왔다.롯데갤리러 대구점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태권브이를 주제로 한 작품 40여점을 선보이는 '나의 추억, 나의 히어로'전을 펼치고 있다. 추억의 만화영화 속 캐릭터를 모티브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고 있는 백종기, 성태진 작가 2인전이다.태권브이가 넥타이를 매고 기타를 치는 '가수를 꿈꾼 로봇', 루이비통으로 치장하거나 교복을 입은 태권브이는 마치 그때 그 시절 우리가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만화는 현실과장이나 왜곡을 토해 사회적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화려한 시각적 가능성으로 인해 독특한 미술작품으로서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하며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최초의 국산 로봇이자 애니메이션 주인공이었던 태권브이는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대중적 아이콘이었다. 산업화의 고도 성장기이자 빈부격차, 경쟁사회의 갈등과 상실감 등 시대적 상황에서 강인한 로봇이자 우리나라 국기(國技)인 태권도를 무기로 하는 히어로의 탄생은 많은 이들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작가 백종기는 10년 이상 꾸준히 '추억'과 '로봇'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단단한 포맥스 재질로 된 저부조 형태의 그의 입체작품은 밝고 경쾌한 색상으로 덧입혀져 로봇의 단단한 외형을 잘 드러내고 있고, 그 시절 복장을 한 채 과거 상념에 빠져 있거나 명품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은 그의 작품은 로봇의 속마음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함이다.판화를 전공한 작가 성태진은 주로 목판 위에 글자를 새기고 그 위에 채색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해 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목판 제작과정과 최근의 캔버스 작업을 동시에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추리닝을 입고 오토바이로 배달하며 초라한 행색으로 술집에 앉아 시대를 한탄하는 고단한 삶에 노출된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하지만 자력갱생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소시민(태권브이)은 영웅의 모습으로 돌아와 천지못에서 거대한 공룡에게 로켓트 펀치를 날리며 캔버스를 종횡무진 누빈다. 이는 곧 우리의 욕망을 대신한 히어로를 표현한 것이다.한편 전시기간 중에는 태권브이 페이퍼토이 만들기와 추억의 딱지 만들기 이벤트도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 전시는 9월 2일(월)까지. 문의 053)660-1160

2019-08-08 09:37:19

[전시캘린더]13일부터 10월 20일까지

♧정석영 조각 개인전=15일까지 갤러리 MOON101 010-4501-2777 ♧강윤정 개인전-Res Extensa=18일까지 봉산문화회관 3전시실 010-8200-1791 ♧김정기 28번째 개인전=18일까지 웃는얼굴아트센터 053)584-8720 ♧1979년, 새로운 도전과 용기:곽인식 곽덕준 곽훈=24일까지 갤러리신라 053)422-1628 ♧대구아트레전드:이상춘 기획전=25일까지 대구예술발전소 053)430-1228 ♧환경미술-재활용의 상상전=28일까지 대구시 남부도서관 전시실 053)231-2331 ♧제22회 김종언 작품전 '밤새'=31일까지 갤러리 더키움 053)561-7571 ♧나의 추억, 나의 히어로전=9월 2일까지 롯데갤러리 대구점 053)660-1160 ♧브릭;새로운 세상과 만나다=9월 8일까지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로비/멀티아트홀 053)668-1566 ♧이영희 기증 복식 새바람 전=9월 15일까지 국립대구박물관 053)760-8543 ♧'박종규, ~Kreuzen'전=9월 15일까지 대구미술관 053)803-7907 ♧'팝/콘'전=9월 29일까지 대구미술관 053)803-7863 ♧'Inside Out'전=9월 29일까지 수창청춘맨숀 053)252-2569 ♧2019 기억공작소Ⅲ '권정호-뉴욕 1985'=9월 29일까지 봉산문화회관 4전시실 053)661-3500 ♧박생광 회고전=10월 20일까지 대구미술관 053)803-7863

2019-08-08 09:36:55

강문희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오래 된 편지/강문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낙동강의 갈대로 역은 자그마한 곽 뚜껑을 열었다. 곽 속에는 빛바랜 편자 한 통과 가락지 한 개 그리고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는 밀고 밀리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에서 쓴 아버지의 편지였다. '포연으로 가득했던 산하에 가을을 알리는 들국화가 하나 둘 피기 시작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들국화가 피어 있는 진지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쓴 편지였다. 자식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편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꼭 살아서 돌아가 사랑하는 당신을 껴안아 보고 싶다'는 대목에서는 목이 메어와 더 이상 읽지를 못했다. 외롭고 쓸쓸한 날 얼마나 앍으셨으면 편지의 귀퉁이가 헤어져 넘기는 부분에 몇 겹으로 스카치테이프를 붙어놓으셨다. 고향이 수몰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갈 때도 낙동강을 떠나가지 못했던 어머니의 슬픈 세월이 오늘도 마루에 서서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저문 강에서 삽을 씻는 어머니의 가녀린 등 너머로 강의 하루가 저문다. 평생을 낙동강 가에서 살면서, 밭을 일구고 흙을 만지며 살아온 어머니의 생애는 강을 닮았다. 남자일 여자일이 따로 없는 어머니의 억센 팔뚝은 낙동강의 물결만큼이나 울퉁불퉁하게 고랑이 져 있다. 가혹한 세월을 여자 혼자의 몸으로 맛서 싸우며 살아왔던 어머니의 삶은 전사처럼 강인했고 때로는 갈대처럼 가녀렸다.낙동강은 어머니의 강이었다. 안동댐이 건설되고 누대를 살아온 마을이 수몰되면서 조상의 산소가 옮겨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을 떠나갔다. 일가친척들이 뿔뿔이 흩어져 고향을 떠나갔을 때도, 꼭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굳게 믿는 어머니는 낙동강을 떠나가지 못했다.갈대꽃이 하얗게 피면 낙동강의 가을은 깊어간다. 첫 서리가 내리고 갈대꽃이 필 무렵이면 어머니는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낙동강의 갈대를 한 짐씩 머리에 이고 왔다. 갈대는 찌고 말려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섬세했던 어머니는 잘 다듬은 갈대로 이삭은 빗자루를 만들고 줄기로는 소쿠리와 망태, 돗자리와 광주리 등을 만들었다. 그런 밤이면 어머니의 방에는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평소에는 말이 없는 어머니도 갈대를 엮는 밤이면 '전선에서 온 편지' 등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며 밤늦게 까지 갈대를 엮었다.흐르던 강물이 댐에 가두어지고 거대한 구조물이 물길을 막아도 역사의 고비마다 일어섰던 민중의 물결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낙동강의 물길을 막지는 못했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을 넘어 강은 다시 흘렀다.일 년 365일 하루도 밭에 나가지 않는 날이 없었던 어머니가 비탈 밭에 보이지 않던 날, 집에 들르니 어머니는 넋 나간 사람처럼 마루에 앉아 강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사연인즉슨 오늘 아침에 국방부에서 전화가 왔는데 유학산 기슭에서 아버지의 유해가 발굴됐다는 내용이었다며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하거나 유족의 요청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한다고 했다.뻐꾸기도 비명을 지르며 세월을 일으켜 깨우던 늦은 봄, 아버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다. 유해를 받아든 어머니의 손은 떨렸고 기다림에 지친 가녀린 몸은 휘청거렸다. 평소에도 마루에 앉아, 지금도 저 강 길을 따라 손을 흔들며 달려 올 것 같다던 어머니의 가느다란 기다림마저도 내려놓아야하는 인연의 비정을 감당하기에는, 기다림의 깊이와 길이가 너무도 깊고 길었으리라. 아버지의 유해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묻히었다.세월이 흘러 인생의 깊이를 알 나이가 되었을 때 쯤 다시 저무는 낙동강을 걸으면 아직도 강의 깊이를 알기에는 어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누구를 원망 한번 하지 않고 일체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다가 가셨던 어머니의 생애에 이르면 자꾸 목이 메어 온다.낙동강이 저문다. 시시각각 변하는 물빛은 천지의 조화를 담은 듯 장엄하다. 짙푸르던 강물이 암갈색으로 변하고 이윽고 붉디붉은 황혼이 온 강을 적신다. 강도 하루에 한 번씩 사무치는 외로움을 풀려고 저리도 붉게 꿈틀거린다. 어머니도 저 강물처럼 외롭고 슬픈 날은 아무도 없는 저문 강에서 삽을 씻으며 울었으리라. 이윽고 강은 어둠에 몸을 기대며 고요히 눕는다. 어느덧 강은 적막해지고 반딧불이 한 마리가 그리웠던 시간들을 호명하며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어둠속을 유영한다. 사무쳐오는 그리움에 다시 뒤돌아보면 "야야, 어두운데 조심해라" 일흔이 다된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쩌렁 쩌렁한 목소리가 저문 강물에 퍼져나간다.

2019-08-07 18:23:50

김태호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틈/김 태 호

벌어진 창틈 사이로 칼바람이 불어온다. 커튼이 가려져 있어도 방안 공기가 차다. 이불을 뒤척이며 잠을 청해 보지만 좀처럼 눈이 감기질 않는다.고향집을 빈집으로 비워 둔지 수년이 흘렀다. 워낙 두메산골이라 사려는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 여름 한철 피서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며 공부까지 시켜 준 고향집이다. 여름밤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놓아가며, 온 가족이 오순도순 살았던 정든 옛집이 아니던가.모처럼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옛 생각으로 상념에 잠긴다. 걸터앉은 마루 틈으로 애기누에만한 개미들이 바지런히 무엇을 나르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어딘가로 옮기는 모양이다. 마룻장 빈 틈 사이로 줄을 지으며 겨울 양식을 저장하는 것 같다. 고개를 들어 마루 천장을 바라본다. 오랜 세월 손을 대지 않아 천정 틈 사이로 빗물이 스며든 자욱이 보인다. 장마라도 들면 틈이 더 커져 하늘이 보일 것만 같다. 낡은 고향 집의 틈새들을 바라보며, 고택만큼 오래된 내 삶의 빈틈들을 회상해본다. 칠십 평생 동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로 가슴을 아프게 한 적도 있고, 알게 모르게 행동으로 마음의 상처를 주기도 한 것 같다. 아마 이 세상에 빈틈없이 완벽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때로는 내 가슴에 너무 큰 틈이 생겨 인생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공부는 뒷전이고 오락에 빠져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대학을 다니던 맏형의 갑작스런 요절로 우리 집은 한때 대들보가 부러진 황량한 분위기에 잠겨있어야만 했다. 그때 나는 사춘기인 중3 때라 가슴에 빈틈이 구멍처럼 컸었고, 마음으로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마음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로 인해 대구로 가는 고입 진학은 포기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돕기 위해 인근 면에 있는 농고에 진학했다.가슴의 틈 때문이었던지, 12Km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하면서도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3년간 허송세월만 보냈다. 졸업 후 대학을 가려해도 실력이 모자라 대입시험에서는 결국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눈물을 머금으며 학업을 접고 아버지와 농사를 지으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졸지에 장남이 되어버린 나에 대한 할머니의 기대를 져 버릴 수 없어, 대구로 가서 재수를 했고 결국 이듬해에 겨우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나는 여러모로 빈틈이 많은 사람이 분명했다. 틈새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력 끝에 대학생활은 큰 시련 없이 보낼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해 졸업과 동시에 경북에 있는 오지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첫 발령을 받고는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기분이었다. 본래 낙천적인 성격 탓으로 놀기만 좋아하는 무능력한 소유자였는데, 동반자까지 만나자 더 나태해져 갔다. 편할수록 더 편해지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속성 때문일까.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듯 안일무사주의자로 전락해 버렸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에 빠져 현재에 안주하려는 행동이 부끄러운 것인지도 몰랐다.언제나 그렇듯 폭풍이 한번 휘몰아친 뒤에서야 사람은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그 당시 승진이라는 목표는 안중에도 없었다. 저만치 동기들은 앞서가고 형체가 사라질 쯤 되어서야 그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출발점 행동이 늦을수록 몇 갑절의 노력이 있어야 따라갈 수 있지 않겠는가. 탐욕만 가득한 이기주의자에 대한 형벌은 가혹했다. 제일 먼저 건강이 부도를 맞았다. 할 수 없이 한쪽을 포기하고 가족을 데리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바람이 몰아치는 땅으로 신기루를 좇았다가 가족을 지키고, 건강을 되찾고, 폭풍 속을 참고 견디며 인생 곳곳의 고비사막을 넘었다. 고통이 늘 상처로만 남는 것은 아닌 법, 때에 따라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내면 인내심 강한 지도자로 거듭나기도 하는 것 같다. 인고의 길을 묵묵히 견디다 보니, 오아시스처럼 '교직의 꽃'이라는 자리에 앉게도 되었다.느지막이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건강이 돌아오고 가족이 다시 보였다. 요즘은 토끼 같은 손자들의 재롱을 보는 재미도 솔솔 하고, 혼자만의 시간엔 수필이라는 벗이 곁에 있어 좋다. 이 친구는 내 영혼을 살찌우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신실한 삶의 동반자가 되어 주고 있다. 만약에 내 마음에 틈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알토란같은 청년시절, 오락에 빠지고 학업에 소홀해서 오늘의 내가 존재했을까 의문부호가 남는다. 내 삶의 크고 작은 보람들이 마음의 틈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오래 전에 '맨발의 효자 기봉이'란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있다. 기봉이는 선천성 지적 장애아로 태어났지만, 노모를 극진히 모시고 자기인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비록 틈이 많은 바보였으나 결국에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인물이 되었다. 우리 속담에 '등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C작가의 '바보 존'이란 저서에 보면 "바보처럼 꿈꾸고, 바보처럼 상상하며, 바보처럼 모험하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현대처럼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자면 바보처럼 꿈꾸고, 생각하는 것도 오늘을 사는 현명한 방법일지 모른다. 오히려 바보가 길 잃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수호천사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날에는 학습능력이 탁월한 인재들에게 주로 기회가 주어졌다면, 요즘에는 점점 '꿈꾸는 현명한 바보'들에게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 오늘날의 사회는 빼어난 천재가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노력하는 바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틈이 꼭 부족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사람 뿐 만이 아니라, 집이나 건물에도 틈이 있어야 햇살과 공기가 잘 통한다. 옛 속담에 '물이 너무 맑아도 고기가 모여들지 않는다.'고 했다. 틈이 있어야 관계 속에서도 타인이 들어 갈 여지가 있고, 이미 있는 사람도 편안하게 할 것이 아닌가. 또한 틈이란 사람사이의 소통창구이기도 하다. 굳이 틈을 가리려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열어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빈틈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다시 틈새들을 바라본다. 삶 속의 틈들이 허점이 아니라 여유이기도 한 것을 왜 그리도 몰랐을까. 조급한 마음에 오늘처럼 작은 것을 바라보며 여유를 가져 본 적이 그 언제였던가. 작은 틈이 큰 것들을 내려놓고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한다.앞으로는 내 마음의 문을 좀 더 열어 작은 틈만큼이라도 더 넉넉한 날들을 보냈으면 좋겠다. 나는 결코 빈틈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틈이 있는 본연의 모습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 더욱 알찬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메워가고 싶다. 고향집 대청마루의 틈이 오늘은 선지자의 숲처럼 유난히 깊어만 보인다.

2019-08-07 18:23:38

김현숙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반딧불이 한의원/김 현 숙  

노령이라는 고비 길을 힘겹게 오를 무렵, 오른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뾰족한 칼로 도려내 고춧가루를 뿌린 듯 통증은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관절염이었다. 어린 시절 체기가 있으면 어머니는 손끝으로 피를 모아 바늘로 따주곤 했다. 그 순간적인 바늘의 지나감도 아픔으로 느낄 만큼 통증에 약한 내게 퇴행성관절염은 견디기 힘들었다.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나는 참 무심한 딸이었다는 걸 관절염 통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무릎 통증으로 고생하셨는데 연골주사 맞는 게 치료의 전부였다. 밤새 아프다고 끙끙 앓으면 나는 마지못해 파스를 한 아름 사다 드리거나 진통제를 내미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싶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아파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게 관절염 통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내가 산후통으로 힘들어할 때 어머니는 밤을 새우셨다. 수건에 찬물과 더운물을 번갈아 적셔가며 이마에 올려주고는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그때는 단지 어머니 성격이 극성스러워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진단을 받기 위해 유명 정형외과에 갔을 때 긴 소파에 기대어 누워있는 노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냥개비처럼 마른 몸에 그마저도 다리가 아닌 의자에 체중을 부대끼고 있었다. 고령화는 그렇게 병원마다 노인들의 무거운 삶을 보여주었다. 환자들은 야윈 손에 번호표 한 장 달랑 쥐고 물리치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은 마치 명절 때, 서울역에서 고향 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줄지어 섰던 인파 같았다. 매일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면서 통증과 싸우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통증을 낫게 해줄 치료를 고대하며 노인들은 기다림을 반복했다. 나 또한 그 속에 끼어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기다림에 지친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정형외과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대책 없이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정류장 건너편 빌딩 모퉁이에 '반딧불이 한의원'이란 조각 무늬가 눈에 박혔다. 난 무엇에 홀린 듯 한의원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한의원은 3층에 있었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계단을 디뎠다. 돌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무릎이 비명을 질러댔다.대기실에 있던 환자들은 다양한 물리치료기구를 이용하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스스로 기구를 사용하다 보니 지루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었다. 어떤 치료기구 앞에서는 서로 하겠다고 다투는 분도 있었다."어서 오세요. 우리 한의원은 처음이시죠?"간호사가 낭창낭창한 목소리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친절이었다. 난 괜스레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한 줄기 훈훈한 온기가 나의 목마름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협소하지만 안락한 침대에 눕자 정확한 전기치료기와 찜질팩이 아픈 부위를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간호사의 손길도 따스했다. 곧 의사의 침술이 시작되었다."관절염은 그 연골부위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혈관에 침을 놓습니다. 그래야 혈관과 신경이 원활하게 소통되면서 통증의 원인이 잡힙니다. 다음 단계는 주변 근육이 튼튼해지도록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단순한 치료가 아닌, 의사의 처방에 맞게 환자도 노력해야 병을 이길 수 있다는 점을 의사는 강조했다.내 몸에 침이 꽂히는 순간, 깊은 후회가 몰려들었다. 그때 나는 왜 어머니를 한의원에 모시지 못했을까. 침 한번 맞게 해드리지 못한 불효가 무릎이 아닌 가슴의 통증으로 몰려왔다. 어머니는 관속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무릎을 펴지 못했다. 통증 때문에 똑바로 눕지 못하고 항상 새우잠을 잤던 어머니 무릎은 그렇게 영영 굳어버렸고 마지막까지 펴지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직전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네 병은 내가 가지고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수술 잘 받아라."그때 난 암과 투병 중이었지만 어머니께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생명의 꽃불이 꺼져가는 순간까지 불치병을 앓고 있는 딸을 위해 두 손을 모으셨다. 요즘 부쩍, 어머니가 그립다. 어버이날 어머니를 생각하며 펑펑 울었다.반딧불이의 발광체는 짝짓기를 위한 원초적인 사랑의 신호이다. 또 하나는 위험한 적이 공격할 때 동료를 구하기 위한 희생의 불씨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순간까지 딸을 위해 반딧불이의 불씨가 되어주었다. '반딧불이'란 단어가 눈에 쏙 들어온 건 어쩌면 어머니의 인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무릎통증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걷기가 훨씬 자유로워졌다.그날 정형외과를 박차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나는 통증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되새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머니는 내 가슴속에 파랗게 살아 계신다.

2019-08-07 18:23:27

민병숙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초원의 빛/민병숙

낙엽 진 산등성이의 풍경이 눈을 시리게 한다. 낙엽을 다 떨어내고 쨍한 하늘은 적적한 겨울 숲에 불붙는 듯한 석양이 천천히 붉은 자락을 펴고 있다. 노을보다 붉은 고추가 가득했던 밭에는 끝물 고추만이 빛 바란 추억처럼 서걱대고,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주목은 노을 속에 붉다.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풍성하면 풍성한 그대로, 그 누구도 붓질하지 않은 쓸쓸한 계절의 그림이다. 초겨울이 그려내는 그림 속으로 남편과 산책을 나섰다. 남편은 건강검진에서 발견된 불필요한 세포 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에서 회복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진 그의 핏기 없는 얼굴은 쇠하고 물기까지 말라버린 노인이었다.공기 좋은 시골 생활이 건강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 나는 항암치료를 마친 남편을 설득해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 남편의 건강에 대한 염려로 시작한 무거운 마음과 그래도 반쪽짜리라도 전원생활이란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으로, 철딱서니 없는 여편네처럼 좋은 맘도 있었다. 남편은 부모님의 각별한 기대로 중, 고, 대학교를 서울로 진학해 학업을 마쳤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의 일을 도운 누나 덕에 자신만 편히 공부했다는 부담감이 있었다.월남에서 군대 생활을 한 그가 결혼 후 형편이 어려운 누나의 빚을 정리해 주는 걸로 시작해 몇 년 후엔 가게가 달린 작은집을 마련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준비해 주었다. 그 일로 인해 결혼해서 몇 년 동안 그 집에 얹혀있는 융자금을 갚느라, 남편의 월급봉투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세월도 있었지만, 남편은 내게 형제간의 우애라며 이해시켰다.병가를 내고 일 년을 쉬었던 그가 후배를 상사로 모셔야 했을 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직장에서 받았을 스트레스도 책임져야 할 가족들을 생각해서 자존심을 누르고 눌렀을 것이다. 캐나다에 사는 언니의 초청으로 이민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표를 던지고 싶었던 남편의 생각과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시어른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북에 고향을 둔 시아버님은 6.25 때도 헤어지지 않고 살았는데 이제 와 헤어져 산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표면적 이유와 장남이란 굴레였다."세상에 지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 장남이 어디 있나."장남이란 사실을 다시 깨닫기 위해 장남이란 너울을 뒤집어쓰는 자위였다.그러나 막냇동생에게 서준 보증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도저히 더이상은 우애라는 말로 미화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내게도 인내의 한계였다. 싸우고 또 싸우면서 이혼을 생각했다. 그때가 우리 부부에게 닥친 가장 큰 위기였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잘 참고 넘어간 인내 또한 내겐 대견한 일이기도 하다.명예퇴직을 종용하던 회사 분위기에 밀려 하던 일과 상관없는 부서로 밀려나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킴으로 그곳에서 정년을 맞았다. 퇴직 후 시작한 사업 또한 새로운 장비가 들어올 때면 자금문제로 나는 화를 냈고 사업을 접으라는 잔소리를 되새김질하듯, 끊임없이 했었으니 남편은 직장에서나, 사업을 할 때나 편치 않았을 것이다.어쩌면 나 때문에, 또는 자식이나 부모, 형제로 인한 이유가 그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들어앉아 그의 건강에 구멍을 숭숭 뚫었을 것이다.황금빛 벼 이삭이 찰랑대던 빈 들녘이 초겨울 바람에 쓸쓸하다. 기계에 의해 말끔하게 잘려나가 벼 밑동만 남아 있는 사이로 드문드문 우렁이껍질이 보였다. 제법 튼실하게 살아냈을 살구 알 만한 우렁이껍질을 주워들고 보는데 괜스레 내가 서러워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의 절정기엔 열심히 논바닥을 헤엄쳐 다니면서 잡초를 제거하는 임무에 충실했을 것이고, 새끼를 낳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손에 들린 우렁이 껍데기를 힘주어 꼭 쥐었다. 자신의 희생 없이는 어떠한 생명도 잉태하고 가꿔낼 수 없다는 진리를 보여준 성스러움이었다.새끼에게 온몸을 먹이로 내어주고 사라져 간 우렁이.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다 건강에 과부하가 걸린 남자.홀쭉해진 볼. 얇아진 등판,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았던 젊음도, 단단했던 육신의 버팀목도 이젠 다 어디로 갔을까. 열심히, 소리 없이 달려온 그에게 나는 평생을 무임승차하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젊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당연함이, 건강을 잃은 남편을 마주한 오늘에 나를 아프게 한다.추수가 끝난 논밭 사이로 난 길을 꼬불꼬불 돌아드니 논바닥에서 이삭을 줍던 까치들이 발작 소리에 놀란 듯 푸드득 날갯짓을 하더니 그대로 다시 앉아 지푸라기를 헤집으며 이삭을 줍는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삭을 줍는 까치와 같이 남편과 나도 인생의 이삭을 찾고 있는 시간인지 모른다.남편의 시선을 따라 산등성이 아래로 서서히 내려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열심히 살았기에 후회 없이, 미련 없이 떠나는 모습이 순결한 의식처럼 장엄하다.'우리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네. 초원의 빛이요. 꽃의 영광이요.'청춘의 아름다움과 덧없을 노래한 초원의 빛이 계속 떠올랐다.마을 길에는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의 동그랗게 굽은 등 위로 짙은 산그늘이 내려앉는다.

2019-08-07 18:23:17

윤진모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나의 로망/윤진모

"아이고, 우리 아가야-."아내가 내 등을 토닥거리며 한 말이었다. 전날 술을 과음하여 엎치락뒤치락하다 잠을 설친 아침이었다. 우리 집에 아기가 어디 있나. 잠결이었지만 아내가 이상해 보였다. 4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남편을 어린애 취급을 하다니.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가끔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때문에 되물으면 "말할 때 좀 귀담아들어요."라고 야단이다. 낮은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고 말해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잘 들리지 않아 못 알아듣는 걸 자꾸 책잡으면 어떡하란 말인가. 이참에 청각 장애 등급이나 한번 받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용하다는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받아도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의사의 진단이다.아내는 최근에 와서 걸핏하면 잘 잊어버린다. 정말 잊어주었으면 하는 건 좀체 잊지 않는다. 내가 예전에 실수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서 변명하듯 막말한 말은 끝마디까지 줄줄 외고 있다. 기억력의 천재인 양 되풀이할 땐 진절머리가 난다."당신이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수십 년 지난 지금 그걸 어찌 다 알아낼 수 있는가. 말은커녕 상황조차 까마득하게 사라진 처지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좋은 것만 기억하면 어디 몸에 병이라도 날까. 걸핏하면 예전의 일을 끄집어내어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렇다고 젊을 때처럼 밤새도록 술이나 퍼마실 배짱이 없으니 아내의 재방송하는 말을 오른쪽 귀로 듣고 왼쪽 귀로 흘려들을 수밖에…….이젠 이러니저러니하고 말하기 싫다. 아내가 외출하고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화장실에 불이 켜져 있다. 이게 어디 한두 번인가. 같이 늙어가면서 다투어야 봐야 이로울 게 없다. 단순히 선별형 건망증 정도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모른 척해버린다."열쇠 어디 있어요?"내게 맡기지 않은 열쇠를 찾는다고 야단이다. 안방에서 작은방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가방을 뒤진다. 이곳저곳 호주머니에 손이 들락거린다. 제발 좀 같은 데 놔두라고 해도 잘 듣지 않는다. 괜히 걱정이 앞선다. 저러다 나들이라도 갔다가 집을 못 찾아오는 것은 아닐지. 아들과 손자들을 아버지라 부르고 나를 아가라 부르지 말란 법이 있을까. 다른 사람 앞에서 나더러 "우리 집 아기는요."라 부르면 어떡하지.결혼식을 올린 후 부모와 함께 살았다. 한집에 살면서 아내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오랫동안 서먹하게 지냈다. 가까이 가서 소매를 끌어당기거나 눈짓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 쉽고 흔한 "여보" 소리가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별다른 호칭 없이 지냈다. 꼭 불러야 할 경우엔 가톨릭 세례명을 대신했으니 큰 어려움은 없었다.새벽 미사에 간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그녀의 휴대폰이 거실 탁자 위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다. 어디를 갈 땐 가지고 다니라고 누차 이야기해도 잘 듣지 않는다. 허리가 아파 자주 병원에 다니는 사람이 혹시 길거리에 넘어져 다치지는 않았을까. 길을 건너다 무슨 사고라도 생겼으면 어떡해. 연락할 방법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진즉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미로를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서너 시간 뒤 아내가 목욕탕에 다녀왔다며 나타났다. 엊저녁 식사할 때 내일 새벽 미사 마친 후, 목욕하고 온다고 말했다니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언제부터 그런지는 모른다. 미사 때 집전 사제가 하는 말이 귀에 잘 들리지 않아 아내에게 다시 물어 확인한다. 영화를 봐도 등장인물이 주고받은 대사가 귓가에 잠시 머물다 저만치 물러나기도 한다. 인터넷을 뒤져 눈으로 확인해야 제대로 스토리를 이해하는 때도 있다. 밥을 먹다가 궁금한 것이 있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여기 왜 왔지?' 하며 돌아서는 경우도 생긴다. 아내더러 잘 잊어버린다고 나무라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나.아내가 무엇을 잘 잊어버리듯이 내가 그 꼴이다. 흔히들 치매에 걸리면 끝장이라고들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멈춤이다.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면서 새롭게 출발하라는 신호가 아닐까. 아내에게서 아가 소리를 들어도 좋다. 제대로 아기 노릇 한번 해 보면 어떠하리. 무엇이 두려우랴. 노망(老妄)은 또 다른 이름의 로망이다.그녀와 처음 수성못을 한 바퀴 돌 때였다. 하늘에서 아름다운 별 하나가 내려와 사뿐사뿐 춤을 추다 내 품에 안겼다. 물이 출렁거리고 내 가슴은 울렁거렸다. 구차스럽게 무슨 긴말이 필요하랴.간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늦게까지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 아내가 내뱉는 "아가."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집을 찾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아가야, 아가야."하는 소리만 귓가에서 맴돌고 있다.

2019-08-07 18: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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