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대의 우리나라 고사성어] 학익진법(鶴翼陣法)

'학익진법'은 학이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하듯 공격하는 정자(丁字)전법의 정명(正名)이다고 '장군다례'(將軍茶禮)는 전한다.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임진왜란(任辰倭亂) 때 해상전법으로 처음 학익진전법이라고 명명했다. 임진왜란은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전쟁이다. 그는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지방 영주가 되고, 전 일본을 통일시킨 군주가 되었다.100여 년의 전국시대에 배출된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조선을 쳐 대륙진출로 제장들의 힘을 해외로 방출시키려는 일석이조의 야망적인 전략이었다.

1592년 4월 13일 15만8천700 군사로 9군을 편성하여 부산포로 상륙했다. 부산진 점철사 정발(鄭撥)은 왜군을 맞아 싸웠으나 조총(鳥銃)에 맞아 장열하게 전사했다. 왜군은 부산성과 동래성을 무너뜨리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서울을 15일 만에 함락시켰다. 북진하여 40일 만에 평양이 점령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면서 명(明)에 원군(援軍)을 요청했다.

왜군 침입의 급보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전달되자 경상우수사 원균과 연합함대로 5월 7일 제1차 옥포(玉浦)에서 싸워 승리했다. 제2차는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固城), 제3차는 한산도(閑山島), 제4차는 부산포에서 승리하여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한산도 대첩에서는 적선 60여 척을 쳐부수어 임란 3대첩으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해 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원균과 적선 12척을 섬멸했는데, 이때 장군의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고, 거북선의 위력을 확인했다. 노량해전에서는 일본군이 패배의 설욕을 노렸으나 한산앞바다에서 학익진법(鶴瀷陣法)을 구사, 판옥선(板屋船)의 총통(銃筩)으로 공격하여 적의 지휘자가 전사하는 전과를 올렸다. 장군이 고안한 판옥선은 좌측에서 쏘면 우측에서 장전하여 돌아서 쏘아 연속 불을 품었다. 거북선이 앞에서 진두지휘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학이 날개를 펼치듯 에워싸 사정거리 안에 가두고 공격했다. 이는 군사들에게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는 투철한 정신력의 힘이었다. 그러나 섬나라 일본은 바다에서의 참패는 씻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과 일본 장수들이 이순신에 대한 평을 옮겨본다. 명(明)나라 원군 진린(陳隣)제독은 장군과 이견 충돌도 있었지만, 인격에 감동하여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가 있고, 나라를 바로 잡는데 지대한 공이 있다'(李舜臣 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고 찬사했다.

일본해군 원수 도고 헤이하치로(東卿平八郞1847~1934)는 러·일 전쟁에서 발트함대와 싸워 이기고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당신은 이순신보다 훌륭하다'고 하자 나를 영국의 넬슨(1758~1805)에 비길 수는 있으나,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다. 내가 가진 함대를 만약 이순신이 가졌다면 그는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학자 도구도미(德富猪一郞)는 '이순신은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겼다. 조선은 참으로 이순신을 자랑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도고는 러·일 전쟁에서 T자 전법으로 승리를 거뒀다는데, 그것은 결국 정(丁)자 즉 이순신의 '학익진법'으로 승리한 것이다.

 

(사)효창원 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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