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독립운동의 ‘성지’에 기념관이 없어서야!

문희갑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고문, 전 대구시장

문희갑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고문, 전 대구시장 문희갑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고문, 전 대구시장

 

필자의 조부이신 수봉 선생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살아생전에 유학(儒學)과 적선(積善)으로 큰 덕을 쌓았으나, '집안일을 남에게 자랑하지 말라'는 소신을 엄격하게 지켜 송덕비 하나 세우지 못하게 하셨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내내 상해 임시정부에 막대한 군자금을 보내 독립운동을 도왔지만, 그 일은 가족조차 몰랐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추조(追弔)와 특발(特發)의 글을 동시에 보내 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그러나 이 문건은 당시 빈소에 전달되지 못했다. 밀파된 이교재 선생이 창원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했기 때문이다. 그 후 무려 33년이 지나 이교재 선생의 후손이 집수리를 하다가 천장에서 문건을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필자가 새삼 조부의 옛일을 꺼낸 것은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대구·경북에는 수봉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부지기수로 있다. 그 사연들도 구구절절하다. 살펴보면,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 후 최초로 창의(倡義)한 문석봉 선생이 대구 출신이다. 국채보상운동에 활활 불을 지핀 서상돈 선생도 예의 대구 사람이다.

경술국치 이후 무단통치가 시작되고 나서도 독립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대구 출신으로 최연소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이갑성을 필두로 이만집의 기독교, 홍주일의 천도교, 동화사의 학승들, 성유스티노 신학생들, 계성학교·신명학교 학생들, 서문시장 상인들 등 너나 가리지 않고 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무렵 달성공원에서 창립, 눈부신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대한광복회 역시 대구 사람이 이끌었다. 총사령관 박상진과 지휘장 우재룡 외에도 채기중과 최준이 이름을 올렸다. 1920년대 항일운동을 이끈 의열단도 대구 사람 이종암이 서상락 등과 함께 창단했다. 대구 기생 현계옥, 시인 이육사도 의열단원으로 '광야'에서 활약을 했다.

윤봉길, 이봉창 지사에게 폭탄을 전한 이상정 장군과 '빼앗긴 들'을 노래한 그의 동생 이상화도 대구 사람이다. 이 밖에도 소설가 현진건은 '일장기말살사건'을 주도했고, 윤상태는 조선국권회복단 통령(統領)으로 항일에 앞장섰으며 서상일은 조양회관을 세워 민족의식을 북돋웠으니 그 숫자가 하도 많아 일일이 다 밝힐 수가 없다.

그래서 대구야말로 독립운동의 성지(聖地)다. 대구에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분이 159분 계신다. 1925년 인구를 기준으로 비교할 때 서울의 1.6배, 부산의 3배, 인천의 5배나 되는 숫자이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신 독립유공자가 그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보다 더 많다고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서울, 부산, 광주뿐만 아니라 김포, 밀양, 나주 같은 중소도시에도 건립되어 있는 독립운동기념관이 대구에만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과연 말이 되는 일인지 기가 찬다. 내 탓도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 든 사람으로 죽어서 선열들을 보기가 못내 부끄럽다.

기미년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훌쩍 지나면서 대구에 독립운동기념관을 세우자는 범시민운동이 시작되었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한광복회 리더로 무장투쟁을 이끌다 두 차례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백산 우재룡 선생의 장남 우대현 씨가 동구 용수동의 땅 4만7천㎡를 기증했다 하니 참으로 가상하다.

독립운동기념관 건립운동은 여야를 따질 일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를 초월한 애국애족 운동이 되어야 한다. 범시민 모금운동도 있어야 하고, 중앙정부의 예산 확보 노력도 있어야 한다. 국난 극복의 상징인 대구 사람답게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모아 대구독립운동기념관을 하루라도 빨리 세웠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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