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육군 이등병 /이재영

 

이재영 씨 이재영 씨

1. 나의 학창시절

나는 서부 경남에 있는 인구 20여만 명의 진주시에서 초, 중, 고교를 다녔다.

국민학교(초등) 시절에 공부를 잘해서 반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나는 문학, 미술,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팔방미인 소리를 들으며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당시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는데, 한 학년이 60명씩 8학급인 480명 전체 9등의 성적으로 입학해서 중학교 1학년 때도 반장을 했다.

진주시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개천절이 되면 지방신문인 '경남일보'가 주최하는 '개천예술제'라는 지방 문화제가 열렸다. 촉석루가 있는 남강에 유등을 띄우는 행사와 가장행렬, 소싸움 등의 축제와 각종 문화 행사가 며칠씩 열렸는데,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구경꾼이 몰려들곤 했다.

나는 5학년 때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출전해 '가랑잎'이라는 시제를 동시로 써내어 초등부 참방(4등) 상을 받았고, 중학교 1학년 때는 '아침'이라는 시로 선배들을 제치고 중등부 차하(3등) 상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창(窓)이라는 시제의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1등) 상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교내 사생대회를 열어 전교생이 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교문 밖으로 나가도 되었다. 나는 높은 계단 위에 나무 대문이 있는 양철지붕의 아담한 집과 그 뜨락의 석류나무를 파스텔화로 그려서 제출했는데, 1학년 특선(1등)이 되어 액자에 넣어진 내 그림이 한동안 복도에 걸리게 되었다. 그 바람에 미술부에 억지로 들어가 부원들과 함께 촉석루 근처 공원에 수채화를 그리러 몇 번 가기도 했다.

중학교 때 나보다 한 학년 위면서 아버지의 지인 아들인 형이 있었는데, 학교 악대부에서 알토 색스폰을 불었다. 멋져 보인 그 형의 권유로 나는 악대부에 들어갔고, 거의 매일 방과 후에 한 시간씩 연습했다.

1학년 때는 작은북을 쳤고, 2학년부터 길쭉한 관악기인 트롬본을 불었다. 그런데, 개천예술제 때 가장행렬이 우리 중학교에서 출발했고, 우리 악대부가 행렬의 앞장에 서서 3Km가 넘는 시가지를 행진했다. 학교가 도시의 끝자락에 있으면서 운동장이 가장 컸던 때문이다.

그 당시 부유한 집안의 공부 잘하는 애들은 서울의 경기고, 양정고, 용산고나 부산에 있는 부산고, 경남고 등의 유명한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우리 중학교에서는 매년 한 명 정도가 경기고에 합격했다.

아버님이 초등학교 교장이며 부모님이 연로하셨던 나는 그냥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입학시험 석차는 7학급 420명 중에 19등이었다.

중학교와 턱이 진 운동장을 마주하고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교문도 같이 사용하는 고등학교는 집에서 4Km 거리여서 고교 때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 앞에 있는 태권도 도장에 가서 한 시간 동안 땀 흘리며 운동하고 와서 아침을 먹고 다시 등교했다.

그 당시 경남의 다른 명문고교인 마산고등학교와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매년 서울대 합격생이 재학생은 10여 명이고 재수생을 합하면 열댓 명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고교 3학년부터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겨냥한 '특별반'이 운영되었는데, 정원이 문과와 이과를 합해 40명이고, 중간고사나 특별고사 전체 성적에 따라 아래쪽은 드나들었다.

평균 25위권을 유지했던 나는 건축과를 지망했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게 장래희망이었다.

그런데, 대입 원서를 쓸 무렵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공대 건축과는 안 되고, 농대라면 무슨 학과든 써주겠다고 했다. 한 명이라도 합격 가능성이 있는 학과에 지원시키려는 학교 방침을 잘 알고 있어 집에 와서 그대로 말씀드렸다.

환갑이 지난 어머니는 "니를 농사짓게 하려고 공부시킨 줄 아나?"고 방바닥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셨고, 천장만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서울 다른 사립대학교 건축과를 지원하느니 차라리 가까운 부산대학교 공대에서 제일 좋은 학과에 지원하자"라고 하셨다.

다음날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둘째 자형에게 연락하여 확인시킨 결과, 마침 자기 제자가 지원한다면서, 생긴 지 3년째인 전자공학과가 제일 좋다고 해서 나의 진로는 듣기도 생소한 전자공학과로 결정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시집갔던 둘째 누님은 그때 아들 셋과 넷째 딸을 낳아 잘 기르고 있었다.

 

 

2. 방위산업체 입사

서울대를 목표로 선택과목을 화학으로 선정했던 나는 부산대 전자공학과에는 화학이 없어 갑자기 선택과목을 생물로 바꿔서 거의 한 달 만에 학습하느라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고 40명 정원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겨우 합격했다.

그때 의예과를 제외한 1학년생 전원을 '교양학부'라 칭하여 학과별 구분 없이 섞어서 50여 명씩 한 반으로 나누어 교육했다. 공대생이 대부분인 우리 C7 반에도 여학생이 일곱 명 있었는데, 사범대 수학과와 생물과 등이었다.

70학번으로 입학한 나는 청운의 푸른 꿈을 금정산 산기슭에 있는 넓은 교정에서 마음껏 펼치며 1, 2학년을 즐겁고 보람차게 보냈다.

검도부에 들어가서 죽도(竹刀)로 손목, 머리, 허리를 치느라 왼쪽 발바닥에 물집이 일곱 번이나 생겨 터지도록 운동했다.

2학년을 마치고 2월 초에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원주에서 복무했는데, 부모님이 65세 이상인 독자로 6개월 만에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어 휴학은 1년만 하고 3학년에 복학했다.

그래서 학과 동기생 40명 중에 방위병으로 복무를 마친 W와 함께 후배들에 섞여 수업을 받은 관계로 3, 4학년은 놀지 않고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4학년 말인 10월 초에 금성전기(주)라는 회사에서 학과장님 앞으로 졸업예정자 한 명을 무시험 특채로 추천해 달라는 의뢰가 왔다.

나와 고교 동창이며 방위병 제대했던 W는 공과대학 전체 차석으로 입학했던 수재라 교수님이 추천해서 보냈는데, 면접 보고 와서 하는 얘기가 "금성사 자매회사는 맞더라. 근데, 오래된 목조건물이 너무 작아서 영 내키지 않는다"며 자기는 금성사 공채시험에 응시하겠다고 했다.

솔직히 대기업에 공채시험으로 들어갈 확신이 없던 나는 교수님께 대신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2층 계단이 삐거덕거리는, 럭키치약 만들던 공장에 가서 면접을 봤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정부의 자주국방 계획에 따라 럭키금성그룹에서 군용 통신 장비를 제조할 방위산업체로 2년 전에 설립한 그룹 계열사였다.

일본의 NEC(Nippon Electric Co: 일본전기)와 합작이었고 체신부에 교환기도 관납(官納)하고 있으며, 연말에 경기도 오산에 짓고 있는 새 공장으로 이전해 갈 계획이라고 했다.

후덕하게 생기고 연세가 있어 보이는 개발부장님과 두 명이 면접을 봤는데, 부장님 자기도 진주고 출신이라며 무척 반가워했다.

나는 주저할 이유가 없어 입사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고 며칠 뒤에 출근했다.

바지에 칼 주름을 잡은 연하늘색 정장에 하얀 도쿠리(목 폴라)를 받쳐 입고 휘파람을 불며 출근해보니 나와 함께 입사한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서울대 전자과 출신이라고 했다.

개발부에는 서울대 전자과 출신인 부장님 밑에 과장은 없고 '기좌(技佐)'라고 불리는 대리급 두 명이 있었고, K대리님은 서울대 전자과 출신이며 다른 한 분은 인하대 기계과 출신이었다.

그 아래로 개발부 연구원이 5명인데, 전자과 출신이 4명이고 기계과 출신이 1명이었다. 그러니 개발부 직원은 부장님과 우리 신입사원 두 명을 포함해서 전부 10명뿐이었다.

나는 기사(技士)라는 명찰을 달고 2층 구석의 칸막이로 구획된 작은 사무실인 '개발부'에서 근무했다. 본사는 서울에 있고, 공장 전체 종업원은 150명 정도 되는데 당시 공순이라 불리던 조립부서의 여자 종업원이 다수였다.

창고 같은 작은 식당에서 교대로 점심을 먹었고, 젊은 남자 직원들이 손바닥만 한 마당에서 배구를 하다가 공이 담장을 넘어 개울에 빠지면 건지러 가지도 못하고 깔깔거려 웃으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회사는 작아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무척 좋은 느낌이었다.

 

 

3. 분/소대용 무전기 KPRC-6

3-1. 생산기술 담당

나는 K기좌님의 직접 지시를 받고 근무했는데, 내게 주어진 업무는 분/소대용 무전기인 'KPRC-6'의 생산기술 담당이었다.

KPRC-6는 송신부와 수신부가 분리되어있던 미군 군용무전기의 도면을 받아와 ADD에서 송수신 일체형으로 국산화시킨 무전기이다.

ADD는 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의 약자로 국방과학연구소인데, 국방에 필요한 병기와 장비에 관한 기술적 연구개발 및 시험을 담당하여 자주국방에 기여할 목적으로 1970년에 설립된 연구기관이며 당시에는 서울 홍릉에 있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는 개발 완료 후 초도생산(Pre-production)이 끝나고 첫 양산(Mass-production)이 수행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곧 ADD에서 검수관이 와서 치르는 첫 로트(Lot)의 출하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회사가 초창기라 제조부서 내에 별도의 담당 엔지니어는 없고, 생산기술을 개발부에서 직접 맡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생산기술 담당자로 지정된 것이다.

제조부에 내려가 봤더니 군용무전기를 생산하는 부서가 조립실과 시험실로 구분되어 있고, 조립실에는 PCB(인쇄 회로기판)에 부품을 납땜하는 여자 종업원이 30명 정도, 시험실에는 조립된 제품을 계측기로 시험하는 남자 종업원이 10명 정도 있었다.

생산 과장 직속인 조립실과 시험실의 책임자는 '직장'이라 불리며, 조립실은 나이든 특전사 중사 출신인 노OO 직장이 맡아 있었는데, 성격은 온순해서 여직원들을 잘 다스리고 있었다.

시험실은 철도고등학교를 나온 최OO 직장이 맡고 있었는데 나보다 네 살 위였으며, 최 직장 밑에 무전기의 시험을 송신부와 수신부로 나누어 각각의 책임자로 두 명의 반장이 있었다.

시험실 남자 직원들은 모두 고졸이었는데, 국가에서 기능공 집중 양성을 위해 설립한 금오공고, 부산공고(한독) 등 특성화 공고 졸업생으로 입사해서 5년간 근무하면 병역특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모두 영리하면서도 매우 성실했으며 생산기술 담당인 나의 지시를 잘 따랐다.

시험실 최 직장은 입사 선배로서 자기가 알고 있는 기술적인 내용을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줬는데, 나는 그가 회로도 위에 빨강, 파랑, 녹색 볼펜으로 메모하는 방식까지 배웠다. 빨간색은 회로도의 전원선 플러스, 파란색은 그라운드(마이너스)이고, 녹색은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깨알같이 적었다.

시험실의 두 반장으로부터 조립된 무전기를 계측기로 시험 조정하는 방법도 설명 들었는데, 최 직장의 회로 설명을 들은 다음이라 그런지 송신부 이 반장과 수신부 김 반장의 시범을 금세 이해하고 직접 시험 조정을 할 수 있었다.

길이가 25센티 정도이고 휩 안테나를 장착하는 KPRC-6는 주파수가 VHF(초단파) 대역인 슈퍼헤테로다인 방식 FM(주파수변조) 무전기로 상당히 높은 기술의 복잡한 회로였지만 대학교 때 착실히 공부했던 나는 이틀 만에 회로 전체의 동작 원리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연락하라 이르고 나는 대부분 시간을 개발부 내 자리에서 ADD에 제출할 도면을 작성하며 보냈다. 주요부품 관련 미군의 영문판 도면을 번역하여 한글 도면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회로도나 기구도면은 미농지에 기름을 적셔 만든 반투명하고 두꺼운 트레이싱 페이퍼에 펜이나 컴퍼스에 먹물을 묻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서 작성하는데, 나중에 습식 복사기에 넣으면 일반 모조지 종이에 도면이 복사된다.

청사진으로 복사된 용지를 꺼내면 막걸리 냄새가 물씬 풍겼고, 물기를 머금어 흐늘거려서 자칫하면 찢어지며 한참 있어야 말랐다.

짧은 군대 시절 서무병으로 근무하면서 배웠던 차트 글씨체로 또박또박 직접 써넣었다.

 

3-2. 사회생활 첫 난관

 

입사한 지 닷새쯤 지나 양산제품의 출고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생산과 시험실에서 무전기의 전원부 회로가 거의 다 불량이라는 긴급한 연락이 왔다.

전원부는 무전기 외부에서 삽입하는 12V 망간 전지의 전압을 안정된 5V 전원으로 바꿔주는 레귤레이터(전압 안정기)로, 무전기의 심장이나 같은 매우 중요한 회로이다.

지금은 엄지손톱 크기의 IC(집적회로) 칩으로 만들어지지만, 그때는 손바닥 크기의 PCB 조립체로 만들었다.

그 시험 방법은 외부에서 전원공급기 파워 서플라이(power supply)로 인가하는 전압이 8V~13V로 변동해도 레귤레이터(regulator)의 출력은 5V 플러스 마이너스 0.2V인, 4.8V~5.2V 이내로 안정하게 나와야 한다.

내려가서 살펴보니 측정 전압값이 4V~6V 수준으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전원회로에는 두 개의 트랜지스터가 사용되고 있는데 모두 미국에서 수입한 비싼 제품이고, 출력전압을 결정하는 5V 제너 다이오드(Zener Diode)도 수입품이었다.

트랜지스터는 고가품이어서 만만한 제너 다이오드 몇 개를 교체시켜 봤지만, 결과는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설령 제너 다이오드를 교체해서 수리가 된다고 해도 불량을 고려한 여유분 재고량이 많지 않아서 수백 대나 되는 전량을 다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주변에 우르르 모여서 들여다보는 시험실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고민에 빠져 얼굴이 붉어지던 나는, 몇 가지 시험을 해봐야겠다며 직접 인두를 들고 회로기판 앞에 앉았다.

일반적으로 다이오드(Diode)는 PN 접합 구조로 양극과 음극을 가지는 반도체인데, 순방향으로 전압이 걸리면 전류를 통과하고 역방향으로 걸리면 전류를 차단한다.

제너(Zener) 다이오드는 순방향 특성은 마찬가지이지만 역방향으로 전압을 걸면, 역방향전류가 어느 일정치 이상의 값에 이르면 항복사태(Breakdown)가 일어나 큰 전류가 흐르면서 다이오드 양단전압이 특정한 값으로 일정하게 유지된다.

다이오드에 수동소자인 저항(resistor)을 직렬로 연결하여 전류가 흐르게 구성되어 있는데, 나는 불량 제품에서 그 저항값을 바꿔가며 제너 다이오드 양단전압이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했다.

몇 개를 시험해본 결과 저항값의 변경만으로도 제너 다이오드의 전압을 표준값 이내에 맞출 수가 있어서 그렇게 수리하도록 지시했다. 값싼 저항은 국내에서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설명을 들어서 감을 잡은 시험 반장은 불량품을 몇 시간 만에 전부 양품으로 수리하였다.

 

3-3. 군납(軍納) 검수

며칠 후에 양산 첫 로트 납품 검수를 위해 서울 ADD에서 검수관이 부산으로 내려왔다. 기계과 출신인 J기좌님이 나를 데리고 공장장님 승용차로 부산역에 검수관 마중을 나갔다.

잔뜩 쫄아서 J기좌님 뒤에 서 있는데, J기좌를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몸집 크고 인상이 굳은 검수관 뒤에 가방을 들고 따라 나오는 대학 동창 S가 보였다.

S는 ROTC(학훈단) 교육을 받아서 장교로 임명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통신학교 성적이 우수해서 ADD에 차출되었고, 고향이 부산이니까 검수관 보조로 따라온 것이었다.

나도 반가웠지만 J기좌님은 무척 다행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납품 검수시험은 로트(Lot) 별로 실시하는데, 한 로트의 제품 숫자가 100대이면 QA(품질보증) 기준표에 의해 13대를 임의로 샘플링해서 검수하며, 그중에 '중 불량'이 3개를 넘으면 로트 전체가 불합격 처리되어 '로트 반송' 되고, 전량을 확인 수정한 후에 다시 검수를 받아야 했다.

검수는 'V/M(Visual & Mechanical : 육안 및 물리적) 검사'를 먼저하고 '계측 시험' 및 '환경시험' 순으로 치러졌다. 환경시험은 충격, 진동, 요동, 침수시험과 온도시험 등이다.

군용 통신기의 동작 및 사용 온도 범위는 섭씨 영하 –40도에서 영상 +55도이다. 따라서 온도시험은 샘플링된 제품을 온도조절 챔버인 '항온항습기'에 넣고 –40도와 +55도에서 지정된 시간 동안 사이클링을 거친 후에 송신출력, 수신감도 등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의 정상 동작 확인시험을 실시한다.

'충격시험'은 1.1m 높이에서 나무판에 자유 낙하시키고, '진동시험'은 시험대에 고정하여 특정 주파수를 인가해 진동시키며, '요동시험'은 차량에 탑재된 상태처럼 널찍한 목제 시험대에 얹고 좌우 상하로 심하게 요동치게 흔든 후에 정상 동작을 확인한다.

'방수시험'은 드럼통 수조 1m 깊이에 침수시켜 담근 채 하룻밤을 새우고 나서 뚜껑을 열어 제품 내부에 물이 스며든 흔적이 있는지 확인했다.

침수시험에서 이슬만 한 물방울이라도 발견되면 검수관이 "붕어가 팔딱거린다"며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제조업체의 기를 꺾고 통제하기를 원하는 검수관으로서는 가장 만만하게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 맨눈으로 판단하는 V/M 검사여서 치사할 정도로 까탈스럽게 굴었다.

제품의 몸체에 난 작은 흠집, 약간 비뚤어져 부착된 명판, 너무 과다한 PCB 기판 납땜 높이, 부품의 다리인 리드선 길이가 조금 길거나 짧게 커트된 것 등을 지적하고는, 불합격 판정을 내릴까 말까 고민하며 즐겼다.

만약 불합격되면, 로트 전량의 뚜껑을 열고 지적된 부분을 다 다시 확인해야 하므로, 몇 달씩 잔업을 해온 제조부서 직원들에게는 밤샘을 치러야 하는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검수 첫날 저녁에 J기좌님은 나와 함께 검수관을 모시고 숙소로 잡은 동래온천 관광호텔로 가서 저녁 식사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J기좌님은 내 동창인 S와 함께 검수관님을 모시고 온천장 구경이라도 시켜주라며 적잖은 돈을 내게 주고는 서둘러 먼저 갔다.

H대학교 출신인 검수관도 나이 차이는 3년 정도밖에 안 나서 온천장의 도우미 있는 맥주/양주 집으로 모셨는데, 술값이 꽤 나왔다.

어쨌거나, 몇 번의 로트 반송 끝에 분/소대용 국산 무전기 KPRC-6 초도품 5백여 대는 일주일 만에 무사히 합격판정을 받았고 잘 포장되어 조달청으로 납품되었다.

이것으로 나의 사회생활 첫 직장의 업무는 성공적으로 끝난 셈이 됐고, 생산부서 직원들도 나의 지시를 기꺼이 잘 따랐다.

그 덕분에 경기도 오산으로 이전한 후에 다른 검수관까지 내려와 치른 여러 번의 검수도 별 무리 없이 잘 넘길 수 있었다.

 

4. 오산 공장

1974년 12월 말에 금성전기(주) 공장은 경기도 오산에 있는 신축공장으로 이전했고, 1975년 시무식은 대지가 5천 평이고 그 절반이 건평인 오산 공장에서 치러졌다.

원래 논을 사서 지목변경을 해서인지 공장 울타리 안에 논이 여러 마지기 있었고, 그해 봄에 각 부서에서 차출된 직원들이 직접 모내기를 했다.

연구소는 공장 정문 옆에 지어진 큰 3층 건물의 3층을 다 사용했는데, 잔디 깔린 운동장은 축구장보다 커서 한 번은 군부대 내빈들이 대형 수송 헬기인 시누크를 2대나 타고 온 적도 있다.

개발부장님이 연구소장이 되고 두 분 기좌는 과장이 되었으며, 연구원도 계속 들어와 수십 명을 넘어섰다.

특히 나는 현장 생산과 직원들이 매년 재미로 뽑는 기사급 인기투표에서 1등을 한 데 이어, 실제 회사 인사고과에서 1등을 했다.

입사 3개월밖에 안 되는 신입사원이라서 사규상 호봉 특진은 못 했지만, 내 모교인 부산대학교 전자과에 무시험 특채 의뢰가 계속 요청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 등 7개 대학교에만 요청함)

그래서 연초에 전자과 1회 졸업생인 C선배가 입사했고, 뒤이어 매년 기수마다 여러 명씩 들어와서 2년 뒤에는 3회인 내 동기까지 모두 9명이나 되었다.

나는 VHF 주파수대역의 무전기인 KPRC-6 생산기술과 함께 별도로 진행된 'KPRC-6 채널조정기' 개발을 맡아서 근 1년 만에 양산 출하시켰다. 채널조정기는 전방 중대급에서 고장 난 무전기를 수거해 수리하거나 채널을 변경하여 조정할 때 사용하는 휴대용 장비이다.

1976년쯤엔가, ADD 주관으로 전방부대의 무전기 사용현황을 점검하기 위한 시찰을 가게 되었다. 나는 검수관 3명과 함께 강원도 홍천, 인제 등지의 군부대에 들러 KPRC-6 무전기 사용에 문제점이나 애로사항은 없는지 파악하며 휴전선 최전방 포병부대까지 2박 3일간 시찰했다.

 

휴전선 최전방 포병 소대에 가보니 대포가 낮은 야산 뒤쪽에서 북한을 향해 거치되어있었다. 대포가 북한군 부대 지역을 빤히 바라볼 줄 알았던 나는 이외의 구조에 놀랐고, 대낮부터 술에 취한 소대장이 자기 침상 밑에서 양주를 꺼내어 권하는 바람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강원도 산골짝 깊숙한 전방부대 곳곳에서 우리가 만든 무전기가 잘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는 것에 대한 긍지를 느꼈고, 앞으로 맡을 개발업무에 더 충실해야겠다는 각오도 새삼스럽게 다져졌다.

돌아오는 길에 통신 장비 병참 지원부대가 있는 강릉에 들러서 동해의 짙푸른 바다도 난생처음 구경했다.

 

5. 지뢰 탐지기

이어서 나에게 주어진 개발 아이템은 지뢰 탐지기였다. 그때까진 우리 국군에게는 금속지뢰 탐지기만 있었는데, 미군에서 금속/비금속 겸용 지뢰 탐지기를 사용하면서도 우리 한국군에는 지급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ADD에서 미군 지뢰 탐지기 샘플 1대를 주면서 업체에서 분석하여 그대로 만들어보라고 했다.

낚싯대 굵기의 길쭉한 원통 막대의 한쪽 끝에 사각형으로 납작한 머리가 달려있고, 반대편 손잡이 부분에 전자회로 박스(box)가 붙어있는 구조였다.

회로 박스를 열어서 PCB를 그대로 베끼면 전자회로는 카피할 수 있는데, 사각형의 머리는 플라스틱 재질로 몰드(mold)를 한 것이어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ADD로부터 들은 기술적인 사항은, 레이더처럼 400Mhz 대역의 주파수를 송신하고 지뢰에 부딪쳐 반사되어 오는 신호를 수신해서 그 미미한 차이를 증폭하고 분석하여 지뢰의 존재 여부를 판단한다고 했다.

비금속 지뢰는 플라스틱이 주를 이루고 있으므로 땅의 주요 성분인 모래(실리콘)와 플라스틱의 유전율(입실론) 차이를 이용하여 탐지하는 원리였다.

 

나는 샘플을 들고 오산 읍내 큰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X-ray)로 사각형 머리 부분을 촬영했는데, 병원 직원들이 신기한 듯 웃었다.

여러 컷의 엑스레이 사진 필름으로 분석해보니 머리 부분의 내부는 인쇄 회로기판인 사각형 양면 PCB였고 한쪽 면은 송신안테나이며 다른 쪽은 수신안테나였다.

 

투명 트레이싱 페이퍼 위에 실물보다 확대한 회로 패턴을 손으로 아트 워크(art work) 작업해서 외주를 주면, PCB 업체가 축소 촬영하여 실물 크기의 필름을 만든다.

그 필름으로 FR-4라고 부르는 두께 1.6mm의 유리섬유 적층판인 에폭시수지 위에 회로를 프린트하고 동판을 에칭하여 필요한 회로 패턴만 남은 PCB 기판을 만들게 된다.

에폭시 PCB는 유리섬유라서 불에 잘 타지 않고 견고하면서 양면 PCB뿐만 아니라 다중 적층 PCB도 만들 수 있어서, 고급 장비에는 기존의 싸구려 페놀 PCB 대신에 널리 사용되며, 에폭시를 여러 겹 발라서 만든 가벼운 보트(boat)도 있다.

 

한 번은 기구팀 과장이 된 J기좌님을 따라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 있던 PCB 공장을 방문했었는데, 공장장이 J과장님 친구분이었다.

그분의 설명을 듣다가 내가 실크스크린이 몇 메시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며 놀라워했다. 나는 비단 같은 고급 섬유에 무늬를 인쇄할 때 300메시 정도의 실크스크린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물어본 것이다.

어쨌거나, 그때 나를 빤히 쳐다보던 J과장님은 귀사 길에 "우리 회사가 PCB 생산을 직접 하면 어떻겠냐?"고 묻길래,

좋은 생각이라면서 국내에서 외주해오면서 그 특성이 아주 까다롭고 중요한 전자 부품인 수정진동자 크리스탈(Crystal)도 함께 고려해보면 좋겠다고 했다.

 

귀사 후에 J과장님이 윗선에 어떻게 보고서를 올렸는지는 몰라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우리 공장 내에 커다란 PCB 생산 라인이 설치되어 가동되었다.

방문 갔던 그 PCB 업체는 매우 영세했었는데, J과장님 친구분은 어찌 됐는지 모르겠다. 내가 얘기했던 크리스털은 깊이 파고드니 기술적으로 너무 복잡해서 나중에는 나도 감히 자체생산 검토할 엄두를 못 냈다.

 

어쨌거나 그 영세한 PCB 공장에서 미제 지뢰 탐지기 머리 부분 송수신 안테나와 똑같은 PCB를 만들었고, 몰드 업체에서 국방색 실리콘으로 압착하여 거의 비슷한 지뢰 탐지기를 만들었다.

회사 건물 내에 시멘트로 벽을 쌓아 널따란 모래사장을 만들고 비금속 재질인 파라핀으로 모의 지뢰를 만들어 파묻고는 지뢰 탐지기를 좌우로 스위프(sweep) 시키며 모래 속 여러 깊이에 파묻은 크기별 파라핀 뭉치를 찾아내는 시험에 매달렸다.

개발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나는 다른 아이템 개발을 부여받아서 지뢰 탐지기는 후배 연구원에게 넘겨줬는데, 나중에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양산 납품되었고, 지금도 군에서 제식 장비로 잘 사용되고 있다.

 

6. 땅굴 탐지기

6-1. SU-26

나의 직속 상관이던 K기좌님은 과장이 된 후에도 계속 나의 직속 상관이었다.

내가 기좌가 된 1978년 여름에 K과장님의 지시로 서울 용산 국방부 건물 맞은편, 지금의 전쟁기념관 자리에 있던, 육군본부 '26위원회'의 황 대령이라는 분을 만나러 갔다.

군 기밀 사항이라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갔는데, 가보니 땅굴탐지기 'SU-26'에 관한 미팅이었다. SU는 Seoul University의 약자였다.

 

육본에서 서울대학교 전자과에 땅굴 탐지기 개발을 의뢰했고, 서울대 전자과 학과장 P교수님 제자인 대학원생들이 기본적인 회로시험을 마쳐서, 이제는 군납 제품을 제대로 생산할 방산업체에 이관하려는 자리였다.

대학교 학창시절에 P교수님의 번역본 저서인 '교류회로이론'을 교재로 공부했던 나는, 그분을 만나 뵙는 것만도 무한한 영광이어서 그저 황송할 따름이었다.

 

미팅을 마치고 P교수님을 따라 서울대학교에 가서 대학원생들이 만든 개발 샘플을 받았는데, PCB도 아닌 만능기판에 부품을 꽂고 점퍼선으로 배선해서,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조립된 브레드보드(breadboard) 수준의 조악한 조립품이었다.

회로도도 종이에 손으로 그려진 조잡한 것이었지만, 차마 P교수님께 컴플레인도 못한 채 앞으로 내가 만들어야 할 땅굴탐지기의 성능 규격인 스펙(specification)과 그 물건들을 받아들고 그냥 내려왔다.

 

6-2. 지하 200미터

 

북한이 지하 200m 깊이에서 땅굴을 파고 내려온다고 한다. 휴전선 근처에서는 폭파를 자제하고 굴착기나 곡괭이로 굴삭 작업을 할 것이므로, 지상에서 피에조(piezo) 압전센서를 설치하고 그 소리를 증폭하여 감청해서 위치를 파악하는 원리이다.

 

오디오 증폭기의 게인(Gain)은 120dB로 전압이득이 백만 배나 되고, 주파수 범위는 40Hz부터 400KHz까지로 엄청 넓은 다이내믹 사운드 앰프다.

 

개발 장비의 목표는 피에조 센서를 30m마다 직선으로 길게 묻어서 막사에 있는 탐지기 본체까지는 유선통신용 삐삐 전화선 같은 실드(shield) 선(線)으로 끌어와 연결하고, 본체에는 10개의 LED를 센서별로 채널이 구분되게 장착해서, 만약 어느 센서에 진동음이 전달되어 오면 그 채널의 LED가 진동의 강도에 비례해서 빠르게 깜박거리게 만들어, 굴착지점이 10개 센서 중에 어느 위치에 더 가까운지 쉽게 파악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녹음기를 내장하여 중요한 소리는 나중에 카세트테이프로 들어볼 수 있도록 했다.

 

브레드보드를 가져와서 회로도와 샘플을 자세히 살펴보니 적용한 회로가 교과서에 나와 있는 수준이어서 소요 부품의 수급이 어려워 기본 골격만 유지하고 회로도를 대폭 수정했다.

PCB를 외주 제작하고 부품을 수배해서 파일럿(pilot) 제품을 서두르고 있는데, 서울 본사 특판영업부에서는 서울대가 다 개발해 놓은 것을 가져와서 똑같이 생산만 하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느냐며 재촉했다.

 

6-3. 자장(磁場) 차폐

거기에다 한 가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득이 무척 높은 예민한 탐지기라서 땅속 지자기(地磁氣)의 영향을 받으면 안 되니까, 탐지기가 자장으로부터 안전하게 차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탐지기 주변에서 자석을 들고 움직였을 때 아무런 영향을 받지 말고 정상적으로 동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학교에서 전기자기학 이외에는 자장 차폐를 별도로 배운 적은 없어서, 연구소 도서실을 뒤져 며칠간 관련 서적을 읽어보고야 겨우 감을 잡았다.

 

오디오 증폭기 회로에 사용되는 트랜스포머가 코일로 잔뜩 감겨있는데, 여기로 자장이 통과하면 코일에 유도전류가 발생하여 잡음을 만들 소지가 있었다.

따라서 외부에서 도래한 자장의 영향을 막는 방법은 이 트랜스를 투자율(透磁率)이 높은 금속 재질의 커버로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투자율 '뮤'가 높은 재료는 철(쇠)인데, 순철은 '뮤'가 2만~10만쯤 된다고 나와 있어서, 1.0t(두께 1.0mm)의 순철을 매입하여 주먹 크기의 밑바닥 없는 육면체 금속 커버를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트랜스 위에 씌우고 PCB 기판의 그라운드(ground) 면에 납땜을 철저히 했는데도 자석을 가까이 대고 흔들면 10개의 LED 중 몇 개가 깜박거리며 회로가 오동작했다.

나중에 원인을 규명해보니, 순철을 가공하여 용접하는 과정에서 열이 가해져 '뮤'가 낮아져 잡철이 돼버린 것이었다.

 

납기는 다가오고 특판영업에서 독촉은 빗발치는 가운데, 며칠씩 밤새며 문제해결에 매달리던 나는 혼미한 상태에서 자석을 들고 장비 주변을 돌리다가 뭔가를 건드렸고, 그것이 테이블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나는 무심코 다른 손으로 떨어진 물건을 집어 올려보니, 납땜하는 인두여서 그걸 인두 받침대에 꽂아 놓았다.

그런데 그 순간 손가락 끝이 따끔하여 들여다보니, 피부가 노랗게 변했고 살이 타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게 아닌가? 내가 무심결에 뜨거운 인두를 손으로 집었던 거다.

나는 화끈거리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 수돗물을 틀고 담갔는데, 금세 서너 개의 물집이 생기더니 점점 커지며 부풀어 올랐다.

 

그 일이 있자, 사수이신 K과장님이 일본 기술잡지를 건네주며 퍼멀로이(Permalloy)의 수입을 검토해보라고 했다. 퍼멀로이는 니켈과 철의 합금 소재로 일본의 상표명이었는데, 얇은 두께로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실드 케이스(Shield Case)를 제조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서둘러 수입한 퍼멀로이 케이스로 문제를 해결하여 근근이 자장 차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6-4. 부평시 은광(銀鑛)

이듬해인 1979년에 우리 연구소는 전체 인원이 70여 명에 이르렀고, 전자 부문 K과장과 기구 부문 J과장이 승진하여 부장이 되고, 그 밑에 과(課) 단위인 기구 부문 1개, 전자 부문 5개, 총 6개의 실(室)로 조직이 구성되어, 과장을 실장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과장인 6실 실장이 되었다.

땅굴탐지기의 양산 납품 전에 육군본부 26위원회에서 국방연구소(ADD)에 확인시험을 의뢰했다.

시험장소는 부평 시내에 있는 폐쇄된 은광이었다. 직원 2명을 데리고 약속된 장소에 갔더니 육본에서 황 대령이 직원 2명을 데려왔고, ADD에서는 O실장이 10여 명을 데리고 왔는데, O실장은 나중에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고 아주대학교 총장도 역임하신 유명한 분이다.

부평의 폐광은 갱도가 산꼭대기에서 땅속 200m 정도 아래에 있고 전기시설도 제대로 남아있었다. 산 위에 탐지기를 설치하고 갱도 안에서 굴착기를 가동하면서 탐지기에서 그 음파를 탐지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마침 그 당시는 야간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밤 12시까지 기다렸다가 차량통행이 없는 조용한 시간대에 실시하면 되었다.

 

그런데 하필 산꼭대기가 공동묘지여서 오밤중에 서로 안 가려고 했고, 몇몇은 웃으며 가위바위보로 아래위 임무를 정했다.

나는 만 27세의 새파란 과장이었지만, 제조업체 대표로 갔기 때문에 40~50대인 황 대령, O실장과 함께 갱도 입구에 머물며, KPRC-6 무전기로 산 위 탐지기 팀과 갱도 안의 드릴 팀에게 "굴착 시작", "굴착 종료" 등의 지시만 내렸다.

시험결과는 아주 좋았고, 얼마 후에 10여 대를 정식으로 납품했다.

 

6-5. 땅강아지

그러고 나서 몇 달 후에 나는 ADD 직원 3명과 함께 현장실사를 갔는데, 임진각에서 육본 관계자를 만나 현장 장교의 안내로 차를 타고 '자유의 다리'를 건너서 한참을 들어갔다.

휴전선 근처의 현장에 도착하니 야전 막사가 3개 설치되어 있고, 그곳이 군(軍)에서 검토한 결과 의심이 많이 가는 지역 중 한 군데라고 했다.

 

파견 나온 군인들이 동서 방향으로 30m 간격으로 팽이처럼 생긴 10개의 피에조 압전센서를 실드선에 물려서 땅속 1m 깊이에 파묻어 꽁꽁 다져놓았다. 그리고 압전센서의 실드선을 막사 안으로 끌고 와서 탐지기의 입력단자 10개에 각각 채널별로 구분하여 연결하고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면서 감청한다고 했다.

그런데 저만치에 미군 막사와 미군들이 여러 명 보여서 물어보니, 미군들도 땅굴을 탐지하고 있다고 했다.

미군은 땅속에 지름 수십 센티의 쇠파이프를 수직으로 박고 그 속에 카메라가 달린 장치를 손가락 굵기의 케이블에 연결하여 집어넣어 눈으로 확인한다고 했다. 지금의 내시경 같은 장비라는 말인데, 한국군은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고 자기들끼리 비밀리에 작업한다고 했다.

 

막사 안에 들어가 봤더니 탐지기에 연결된 헤드폰을 끼고 앉아있는 병사는 매10분마다 귀에 들리는 소리를 일지에 적고 있었다.

근무 중에 졸지 말고 제대로 감청하도록 조치한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일지를 들춰봤는데, 또르륵 똑똑, 빠각 빠각, 틱틱, 찌익 찍찍 등등, 온갖 의성어가 다 적혀 있었다.

아무것도 안 적을 수는 없고, 앞사람과 똑같이 적을 수도 없으니까, 자기 나름대로 구별해서 적다 보니 희한한 의성어가 만들어진 것 같다.

증폭기 이득이 무척 크기 때문에 하필 압전센서가 묻혀있는 근처의 지상에 개미 한 마리만 지나가도 아주 큰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런데 넘겨본 어느 페이지에 "뚜루룩 뚝뚝, 우르릉 꽝꽝"이라는 큰 글씨가 보여 살펴보니, 장교 확인 비고란에 "땅강아지로 사료됨"이라고 적혀 있다.

몇 년 뒤에 들린 얘기로는 이 땅굴탐지기로 땅굴 2개를 찾았다고 했다.

 

7. 분/소대용 소형 무전기 PRC-85K

1979년에 ADD에서 분/소대용 무전기 KPRC-6의 후속 모델로 미군에 의존하지 않는 손바닥 크기의 아주 작은 순수 국산 무전기 개발을 구상하게 되었다.

주파수 발생 방법도 트랜지스터 부품 회로에 채널 주파수에 맞는 수정진동자를 삽입하는 기존 방식이 아닌, IC(집적회로)를 사용하는 주파수 합성방식인 FSS(Frequency Synthesizer)가 요구되었다.

 

당시 KPRC-6는 우리 금성전기(GSEC)와 다른 방위산업체인 동양정밀(OPC)이 절반씩 나눠서 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ADD는 GSEC와 OPC에게 새 무전기의 목표 규격만 제시하고 각 회사 나름대로 독자적인 무전기를 개발하도록 통제하면서 경쟁을 시켰다.

 

그 무렵 나는 생산부 시험실에서 송신부 반장으로 있던 L을 승진시켜 내 부서로 발령내어 연구원으로 삼고 있었는데, L을 이 새 무전기 개발담당자로 지정하여 함께 회로도를 만들어 가면서 시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FSS용 IC는 미국 모토로라 회사에서 나오는 MS-시리즈를 사용했다.

 

주어진 몇 달이 지나 양쪽 회사가 만든 시제품이 ADD로부터 중간평가를 받았는데, 회로는 GSEC가, 기구 제품은 OPC가 낫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OPC가 GSEC의 회로를 따르지 못하겠다고 버티자, ADD는 두 회사가 여관을 잡고 함께 합숙하면서 닷새 내로 기구 및 회로의 통일과 합의를 보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합숙 사흘이 지나도록 기구 부분만 수정에 합의했고, 회로도는 각사의 장점만 부각하며 고집을 부렸다. OPC는 책임자가 부장이었는데, 자기나 나나 엔지니어의 자존심과 회사의 이미지 때문에 도저히 양보할 수는 없었다.

결국, ADD는 다시 기간을 정해주고 각자 알아서 최종 파일럿 제품을 만들어 제출하라고 했다.

 

나중에 숱한 회의와 협의 끝에 OPC 케이스에 GSEC 회로가 내장된 제품으로 결정되어 허리에 차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소형 분/소대용 무전기로 개발되었으며, 제품의 명칭은 'PRC-85K'로 정해져 제식 장비로 양산 납품되었다.

 

내 부서의 PRC-85K 개발담당자였던 L은 15년쯤 뒤에 '엘씨텍'이라는 개인회사를 차려 사장이 되었는데, 상호의 뜻을 물었더니 무선통신 고주파 공진회로에 사용되는 인덕턴스 L과 커패시턴스 C라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쯤 후에 SK텔레콤의 외주업체이던 '엘씨텍'은 코스닥 시장에 상장되었고, 은퇴한 L은 지금 개인 재산 100억대의 부자이다.

 

8. 다연장 로켓포 발사장치 BSP

국방과학연구소 ADD가 대전으로 이전하였고, 자주국방의 일원으로 4x9 배열의 36문 130mm 다연장 로켓 발사기인 K-136의 국산화가 추진되었다.

로켓탄은 한국화약, 포신은 HD, 탑재 차량은 KIA 등등하여 여러 방위산업체가 공동으로 참여했는데, 발사장치인 '컨트롤 박스(Control Box) BSP'의 개발은 우리 회사에 할당되었다.

 

크지 않은 BSP 본체는 차량 외부에 부착되고 조종기만 차량 내부에 장착된다.

회로 부분은 특별히 어렵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어서 신입사원 한 명을 담당자로 지정해서 맡겼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수십 가닥의 전선과 장비의 연결 부위를 고무(rubber) 재질의 외피로 매끄럽게 몰딩하는 작업인데, 당시 국내의 고무 몰딩 수준이 열악하여 수십 번의 시험작업을 거치며 아주 힘들게 성공시켰다.

 

1980년 어느 날, 충남 태안의 ADD 안흥 시험장에서 국산 다연장 로켓포 K-136의 시험발사가 있어 통보를 받고 참석했다.

개발에 참여했던 방산업체 관계자들과 ADD 요원들 모두 시험장 내의 콘크리트 벙커에 들어가서 좁은 창틈으로 멀리 바다 위의 작은 섬을 주시하며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안내자는 혹시 로켓탄이나 차량이 폭파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벙커 속에서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섬 근처 해상에는 군함이 떠서 무전으로 시험장과 교신하는 소리가 벙커 내의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처음엔 한 발이 나가는 단발 사격이 이뤄지고 목표지점에 정확히 떨어졌다는 무선보고가 있었다. 숨죽이고 있던 참석자들이 함성을 지르고 박수로 환호했다.

이어서 두 발 연속 및 여러 발 연속 등의 시험이 차례로 이어졌고 개발은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그 며칠 후 내 부서 담당자였던 신입사원이 사표를 제출했는데, 퇴사 사유를 적는 난에 '상사에 대한 불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나!

본인 얘기는 내가 너무 빡세게 일을 시켜서 힘들어 못 견뎌, 대학원진학을 고려하며 그만둔다는 얘기였다.

그 사직서를 나의 부장님께 올렸을 때 호인이던 부장님이 싱긋이 웃으셨다. 부장님은 체신부(정보통신부)에서 근무하다가 우리 연구소에 부장으로 영입된 분이다. 나의 사수 K부장님은 부소장이 되셨다.

 

나중에 그 친구가 독일 유명한 통신용 계측기 제조회사의 한국지사에서 잘 근무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사회생활에서 은퇴하기 직전인 2014년에 쉬고 있다며 내 개인회사로 찾아왔었는데, 나도 막 회사를 접기 직전이어서 함께 저녁 먹고 옛날의 얘기만 하다가 헤어졌다.

 

9. 백암 1980년 5월

비싼 제품을 팔다 보면 가끔 하찮은 물건을 서비스로 줘야 할 때도 있다.

본사 특판영업부에서 국가정보부서인 안기부로부터 어떤 물품의 제작을 극비리에 의뢰받아 왔다.

1979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덕분에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시절인 1980년에는 중정의 이름이 안기부(안전기획부)로 바뀌었는데, 안기부 산하 전파감시소에서 자기들이 사용할 콘솔(console) 2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간첩 등 불순세력의 무선통신을 도청하는 전파감시소가 경기도 용인 동쪽 백암에 있는데, 도서관 열람실 같은 칸막이 속에서 근무하는 도청 요원이 100여 명이나 되어, 2개의 큰 감청실 중간에 중앙통제실을 마련해서 요원들의 근무상태를 감시하며 필요한 감청 신호를 보고받는 콘솔 장비라고 했다.

콘솔당 통제되는 50개의 칸막이 채널은 LED 램프로 구분하고, 도청 중인 전파의 음성신호를 콘솔에서 함께 들으면서 동시에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면 되는 수준으로, 배선은 좀 복잡하지만, 회로는 개발이랄 것도 없는 간단한 장비였다.

다만 콘솔 한 대의 길이가 가로 3m, 세로 1.5m로 피아노 두 대를 연결한 크기여서, 기구 가공제작이 전자회로 조립시험보다 더 큰 문제였다.

대부분 연구원이 맡기를 꺼리는 제품인데, 마침 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후배인 신입사원 H가 있어서 그에게 맡기고 코치만 해주면서 진행했다.

1980면 5월 15일경 제작이 완료된 콘솔 2대를 작은 트럭 두 대에 나눠 싣고 연구원 3명과 함께 안기부가 알려준 장소로 납품 설치를 하러 2박 3일 예정의 출장을 떠났다.

용인 동쪽 양지IC 근처에서 안면 있는 안기부 직원 P선생의 마중을 받고, 남쪽으로 시골길을 30분쯤 들어가니, 야산으로 둘러싸인 꽤 넓은 평지가 나오고 높은 담장 너머로 각종 안테나가 보였다.

정문에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안으로 들어가니 운동장 땅바닥에 하늘을 향해 설치된, 지름 십여 미터의 그물망 접시처럼 생긴, 거대한 파라볼라 안테나(Parabolic Antenna)가 눈에 띄었다.

중앙통제실에 콘솔을 하역하여 제자리에 놓고 보니, 유리창 너머 양쪽 감청실은 아직 칸막이 설치가 안 된 채 바닥 마감 작업만 되어 있었다.

출발할 때는 감청실로부터 끌어다 놓은 100가닥의 케이블을 콘솔 장비에 연결하여 작동 확인만 하면 되는 줄 알고, 근처 민가에서 이틀간 민박하며 토요일 오전까지 끝내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P선생이 모셔온 꽤 높아 보이는 T선생의 요구로, 감청실 마루 밑 플로어 덕트의 100가닥 배선 작업도 우리가 해줘야 했다.

결국, 일요일인 18일도 모자라 월요일인 19일 저녁까지 작업하여 겨우 끝냈다.

민박집에서 전남 광주시에 무슨 큰 데모가 있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피곤해 잠자리에 들기 바빴던 터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안기부 선생님들 표정과 행동이 좀 수상하게 변하긴 했었다.

콘솔 장비 납품을 마치고 안기부 차량으로 양지까지는 나왔는데, 시외버스 막차 시간이 지난 뒤였다.

다행히 용인까지 가는 빈 트럭이 한 대 와서 짐칸에 4명이 올라타고 올 수 있었다.

밤중에 트럭 짐칸에 쪼그려 앉아 실려 오는 피곤한 귓전에 논에서 떼창으로 부르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용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개골개골 들려왔다.

학교 후배인 콘솔 담당자 H는 귀사 후 한 달 뒤에 사표를 내고 고향 진주로 내려갔다.

그곳 양지IC 근처에 육군 휴양소가 있는데, 우리 회사로 통신장교 대상의 2시간짜리 '안테나 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내가 강사로 지정되어서 원고를 타이핑 치고 도표나 그림도 오려 넣어 30쪽이 넘는 '안테나 이론과 실무'라는 교재를 만들어서 100부 인쇄했다.

가서 보니 위관급 장교가 대부분인데, 영관급까지 40여 명이 칠판 있는 교실에서 학생들처럼 집체 교육을 받았다.

 

강의를 마치고 오는 길에 강사료를 봉투에 넣어줘서 기분이 아주 좋았는데, 열심히 듣고 질문도 하던 장교들 반응이 괜찮았던지 그 후에 한 번 더 다녀왔다.

 

10. 에필로그

 

1983년 이후에 나는 산업용 무전기와 가정용 무선전화기인 코드리스 폰(Cordless Phone) 및 당시는 셀룰러폰(Cellular Phone)이라 불리던 휴대용 무선전화기 개발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나는 독자이면서 부모님이 연로하여 입대 6개월 만에 이등병으로 의가사 제대했고, 다른 친구들보다 2년쯤 일찍 사회에 진출한 관계로 가끔 미안한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러나 방위산업체 연구소에서 군 통신 장비 국산화 개발에 참여하여 항상 빠듯한 시간에 쫓기다 보니, "이것이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육군 이등병 출신인 내가 그 누구 못지않게 자주국방의 일익을 담당했노라고 자부한다.

충~성!

 

관련기사

AD

문화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

기획 & 시리즈 기사

[매일TV] 협찬해주신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