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매일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소감 심사평

◇ 단편소설 당선작= 제목: 꽃/ 김혜지

"라이터 하나 주세요."

잠이 덜 깬 슈퍼 아줌마가 짓무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기계적으로 주황색 라이터를 건네던 손이 멈칫한다. 내 교복에 와 박히는 눈빛이 곱지 않다. 담배 피려는 거 아니에요. 준비했던 말이 목구멍 아래서 맴돈다. 다행히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아줌마가 말없이 내게 라이터를 건넸으니까. 나는 잰걸음으로 슈퍼를 빠져 나온다. 사방이 어둡다. 바람이 매서워 옷깃을 여미다 문득 깨닫는다. 코트를 입지 않았네. 장롱 문을 열었을 때, 희미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교복 위에 앉았던 먼지가 날려 재채기를 했다. 그래서 까먹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사실은 오로지 교복을 입어야 한단 생각 밖에 없었다. 오늘은 교복을 입자, 일곱 달 만에 가는 학교니까. 오늘은 월요일, 운동장 전체조회가 있는 날이니까.

정문에는 선도부도 학생주임도 없다. 시계를 본다. 아직 다들 이불 밑에서 꾸무럭대고 있을 시간이다. 하긴, 누가 있었다 해도 날 잡을 순 없을 거다. 누워만 있어도 키가 크는 바람에 바짓단이 껑충 짧아졌지만 선도부는 복장불량으로 내 이름을 적지 못할 거다. 앞머리가 길어 이마를 뒤덮었지만 학생주임은 내 따귀를 갈길 수 없을 거다. 나는 '없는 학생'이니까. 그렇게 원하던 투명 인간이 됐네. 교문을 통과하는 발걸음에 왠지 모를 힘이 실린다.

언덕길을 넘어 첫 번째 벽돌 건물. 3학년이 쓰는 동이다. 주차된 자동차 밑으로 돌진하는 길고양이처럼 나는 건물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오랜만에 마주한 건물의 냉기에 소름이 돋는다. 복도의 어둠이 채 눈에 익기도 전에 성큼성큼 계단으로 향한다. 등에 멘 가방이 무거워 겨드랑이에 땀이 밴다. 가방 안에 든 통에서 출렁, 소리가 난다. 100미터 달리기 출발 휘슬처럼 재촉하는 소리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에 맞춰 출렁 소리가 가쁘게 나를 따라온다. 사층 계단 끝 철문. 걸음을 멈춘다. 문은 잠겨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여는지 알지. 걔들이 시켜서 수도 없이 열었던 거니까. 호주머니를 뒤져 클립을 꺼낸다. 꾹꾹 힘주어 클립을 일자로 편다. 한쪽 끝을 열쇠구멍에 넣고 위아래로 흔든다. 덜컥, 걸리는 느낌이 온다. 차가운 손잡이를 쥐고 살살 돌린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천천히 옥상 문이 열린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바닥엔 책걸상이 굴러다니고 공기 중엔 먼지가 날린다. 옥상 풍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월요일. 운동장 전체조회가 있는 날이다.

 

우성상가 2층 남자화장실 변기에 처박혀있는 나를 끄집어내준 건 3층 당구장 주인이었다. 당구장아저씨는 바닥에 널브러진 내 옆에 서서 앰뷸런스가 도착할 때까지 줄담배를 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담배만 폈다. 참 남자다운 데가 있는 아저씨였다. 걔들이 날 화장실로 질질 끌고 들어오니까 쓰레기통을 비우던 청소아줌마는 후다닥 자리를 떴는데. 걔들이 세면대에 내 머리를 박아도 경비아저씨는 못 본 척 도망갔는데. 당구장아저씨, 복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혹시 내가 나중에 당구를 배우게 된다면 아저씨네 당구장만 가야겠다고 병원에 누워 잠깐 생각했었지. 딱 여덟 달 전의 일이다.

안와골절, 두뇌타박상, 비골골절, 다발성 찰과상, 좌족부 거골골절. 꽤 길고 어려운 병명들이 모여 전치 8주 진단이 내려졌다. 처음처럼 로고가 박힌 초록색 앞치마를 두르고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 뛰어온 엄마는 응급실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루 이용료 500원짜리 구립독서실에 있다 달려온 누나는 아무 말 않고 입술만 뜯었다. 누나와 나는 같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삼 년 전, 엄마가 교복물려입기 나눔행사에서 건져온, 소맷부리가 닳고 닳은 교복들이었다. 우리는 누나가 나보다 딱 7분 먼저 세상의 빛을 본 이란성 쌍둥이였으므로 명찰 색깔까지 같았다. 다만 내 교복 등판엔 어지러운 발자국이 찍혀 있고, 누나의 등판은 말끔하다는 것. 그것만 달랐다. 지방 공사판에 있다가 일주일 늦게 올라온 아빠는 사내새끼가 친구들한테 맞고 다닌다며 내 식판을 뒤엎다 간호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아빠, 걔들 내 친구 아니에요, 라는 말은 꺼낼 새도 없었다. 나는 대신 가만히 왼다리 깁스 위에 엎질러진 미역국을 봤다. 국물이 침대 시트를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정확히 한 달을 병원 침대 위에서 보냈다. 학교에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일러스트 전숙경 일러스트 전숙경

 

목발을 짚고 학교에 갔더니 담임이 상담실로 호출했다.

"억울하니?"

대답도 하기 전에 담임은 흰 종이와 연필을 내밀었다.

"나도 억울한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 한 치의 억울함도 없게 그간의 일들을 기록해봐라."

어디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써야할지 막막했다. 연필 꼭대기만 물어뜯고 있으니 담임이 훈수를 뒀다.

"감정은 빼고,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실만 번호를 매겨서 써봐라."

담임의 조언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감정을 빼자 갑자기 모든 것이 쉬워졌다. '사실'대로만 쓰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예상보다 쉬운 시험문제를 만나 신이 난 것처럼 백지에 몰두해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앞뒤로 빽빽하게 종이 석 장을 가득 채웠다. 담임은 그동안 참을성 있게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다 쓴 종이를 내밀자 물끄러미 목록을 보던 담임이 물었다.

"혹시 빼고 싶은 건 없니?"

"그럼… 거기 12번은 빼주세요."

"식당서 설거지하는 니네 엄마처럼 운동화 좀 닦아 봐. 새끼야, 누가 손으로 닦으래. 혀로 핥으라고, 말이니?"

"네, 엄마가 보면 속상하실 것 같아요."

"그래, 잘 생각했다. 근데 23번도 삭제하면 어떨까? 호모 같은 새끼, 후장을 따버리겠다며 엎드려뻗쳐 자세를 시킨 후 대걸레 손잡이 부분으로 항문을 쑤셨습니다, 이 부분. 선생님이 보기엔 이것도 엄마가 많이 속상하실 것 같구나."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담임이 지우개로 슥삭슥삭 문장들을 지웠다.

"잠깐, 어디 이르면 니네 누나도 따먹어버린다고 협박했습니다, 이건 누나가 속상할 것 같은데?"

역시 그럴 것 같아 또 고개를 끄덕였다. 담임이 다시 지우개질을 했다.

"가만 보니 44번도 문제가 있겠다. 옥상 난간에 세워놓고 밀어버린대서 무서워 오줌을 싸니 더러운 새끼라며 때렸습니다. 다음 날 페트병에 오줌을 담아 와서 마시라고 했습니다. 넌 오줌싸개니까 오줌을 마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시다가 토하자 다 마실 때까지 번갈아가며 때렸습니다, 말이야."

"······왜요?"

"그럼 옥상 문이 열려있었다는 건데, 경비 아저씨가 곤란하시지 않을까?"

슥삭슥삭 지우개 가루가 쌓여가고 목록은 줄어갔다. 담임은 생각했던 것보다 세심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다. 단 한 명도 속상하고 난처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꼼꼼하게 신경을 썼다. 작성을 마치고 목발을 짚으며 일어서는데 담임이 갑자기 내 어깨를 꽉 눌렀다. 바싹 얼굴을 들이민 담임에게서 담배에 쩐 구취가 훅 끼쳤지만 고개를 돌릴 순 없었다.

"선생님도 사실 군대에선 고문관이었단다."

잠시, 담임과 나는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먼저 눈길을 피한 것은 나였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담임의 눈알이 꼭 유리구슬 같았다. 어른의 눈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담임이 손을 뻗어 내 고개를 다시 자기 쪽으로 돌렸다. 나를 빤히 보는 유리구슬 눈깔이 거기 있었다. 담임이 한층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다시피, 난 지금 교감 진급을 앞두고 있어. 고작 이런 일로 좌절되면 얼마나 억울하겠니? 선생님은 억울한 게 세상에서 제일 싫구나."

 

상담실을 나오다 걔들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걔들은 내 옆에 선 담임을 보자 눈을 내리깔고 옆으로 비켜서선 깍듯이 목례했다. 담임이 큼큼 목을 가다듬고 걔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부축하려고 내 겨드랑이에 넣었던 손을 빼곤 성큼, 내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딱 한 걸음. 담임은 그 간격을 유지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혹시라도 담임을 놓칠 새라 목발을 재게 놀리며 절뚝절뚝 걸었다. 그러다 문득, 뒤통수가 따가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나란히 선 걔들이 웃고 있었다. 걔들이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씹새, 뭘 꼬라봐.'

'넌 죽었어, 호모새끼야.'

'아 씨바, 존나 극혐.'

'전화 받어, 새꺄.'

 

나는 그길로 집에 와 드러누웠다.

 

엄마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내게 동원했다. 처음엔 괜찮다고, 괜찮다고, 위로를 했다. 먹히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당하고만 있냐고 화도 내봤다. 먹히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다 내 잘못이라고 사과도 했다. 제발 입 좀 열어보라고 구슬리기도 했다. 엄마 가슴에 못 박지 말라며 꺼이꺼이 통곡도 했다. 하지만 엄마의 수천수만 마디는 내 한마디를 이길 수 없었다. '학교 안 가.'

엄마는 요양이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끊어 학교에 보냈다.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것을 방 안에서 해결했다. 콩나물국과 비빔밥을 먹고, 축축한 등허리로 악몽에서 깨 다시 잠을 청하고, 나 혼자 산다를 다운받고 또 다운받고,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번갈아 게임을 했다. 화장실 갈 때와 쟁반 위에 차려진 밥상을 받아올 때 말곤 거실에 나가지 않았다. 창문 한번 열지 않고 여름을 났다. 야동을 봐도 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은 발작적으로 나를 울게 하거나 토하게 했으므로 어느새 내겐 공포영화보다도 무서운 이미지가 됐다. 핸드폰 번호도 바꿨다. 식구들 말곤 아무에게도 새 번호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틀에 한 번 꼴로 전화가 왔다. 쉽고 빠른 대출을 도와주겠다는 김미영 팀장이거나 바꾼 지 한 달도 안 된 폰을 최신기종으로 바꿔주겠다는 텔레콤 직원이었다. 금방 노하우가 생겨서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아예 받지 않았고, 보통은 뚝 끊어버렸다. 하지만 아주 가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긴 통화를 했다. 나는 결코 내가 이용하지 않을 대출상품에 대한 김미영 팀장의 장황하고 끈질긴 설명을 가만히 들었다. 또 결코 이동하지 않을 번호가 가져다 줄 무수한 혜택에 대한 텔레콤 직원의 감언이설을 묵묵히 들었다. 그들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남자애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들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내가 추임새처럼 넣는 대답은 항상 네, 아니오 둘 중 하나였지만, 나는 대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영 말하는 법을 까먹어버릴 것 같았다.

 

억수로 쏟아지던 장맛비가 이불을 눅눅하게 해 불면의 밤이 이어지던 즈음, 우편함에 누런 서류봉투가 꽂혔다. 좌측 상단 발신인란에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박혀있었다. 엄마는 내 방에 앉아 칼로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꺼냈다. 호치키스가 박힌 출력물을 넘기는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손을 내밀자 엄마가 떨리는 손으로 결과통보서를 건넸다. 첫 장에 적힌 건 걔들의 처분결과였다. '피해학생에 대한 서면사과'를 하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 장에 적힌 건 나의 처분결과였다. '피해학생에 대한 서면사과'를 하라고 쓰여 있었다. 위원회는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 번 친절히 정리해주었다. 양측이 서로 피해학생에 대한 서면사과를 하라, 고 쓰여 있었다. 걔들과 내가 똑같은 조치를 받았다.

 

엄마가 내 손을 끌고 학교로 달려갔다.

"피해자가 왜 사과를 합니까?"

"쟤가 맞을 짓을 했대요."

학생주임이 교장실로 향하는 엄마를 막아서며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얼음땡에서 얼음을 당한 아이처럼 엄마가 동작을 멈췄다. 학생주임과 눈빛을 교환한 담임이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시 후, 얼음 주문이 땡, 풀린 엄마가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왜 우리한텐 말도 안하고 위원회를 열었어요?"

"당신들은 자식도 없어?"

"아직까지 사과 한 마디 못 들었다고!"

희미한 자동차 소리가 열린 창 너머로 새어 들어왔다. 나는 담임에게 어깨가 짓눌린 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고급 세단 한 대가 학교 운동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훈화 때마다 연필 한 자루도 국산 브랜드를 쓰라고 잔소리하면서 정작 자기는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고 애들이 욕하던 교장의 차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는 교장실로 돌진했다. 진정하시란 말을 되풀이하며 옷깃을 잡는 학생주임의 손길을 뿌리치고 엄마가 힘껏 교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다음 순간, 텅 빈 교장실을 마주한 엄마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당신들······ 두고 봐.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교장실이 빈 것을 확인하고 표정이 부드러워진 학생주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 마음대로 해보세요."

 

"어머니, 저희가 학생들 일까지 신경을 다 쓰긴 좀 힘들어요."

점심을 먹고 온 형사가 이를 쑤시며 말했다. 나를 앞세운 엄마가 자기보다 열 살은 어려보이는 형사에게 구구절절 사연을 읊었지만 그는 더부룩한 배만 연신 쓰다듬을 뿐이었다. 곧이어 왁자한 소리와 함께 막 검거된 3인조 소매치기 일당이 들이닥쳤고, 엄마와 나는 결국 젊은 형사의 트림 냄새만 실컷 맡다 돌아섰다.

"저희가 조사를 따로 할 수는 없고, 학교 측에 조사결과를 문의할 순 있어요."

누렇게 뜬 얼굴의 교육청 직원이 책상 위 서류더미와 엄마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제일 높은 사람 데려오라고, 이대로 물러갈 줄 아느냐고 엄마가 언성을 높이자 직원이 책상서랍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기대에 찬 눈으로 보는 엄마와 고개 숙인 나를 등진 채 직원은 건조한 두 눈에 인공눈물을 번갈아 떨어뜨리곤 '매뉴얼이 그래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엄마는 걔들의 부모를 호출했다.

당연히 그쪽에서 먼저 사과하러 와서 싹싹 빌어야 한다던, 손이 발이 될 때까지 빌어도 결코 용서해주지 않겠다던 엄마는 걔들 부모의 연락처도 담임에게 통사정해서야 겨우 얻어낼 수 있었다. 의사, 변호사, 선생님, 자동차회사 상무. 걔들 부모는 직업도 참 다양했다. 그러다보니 다 같이 모일 날짜와 시간을 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속에선 천불이 나지만, 잘못해서 파토라도 나면 다시 한자리에 모으기가 어렵다며 엄마는 전화를 돌리고 또 돌렸다. 약속장소인 한정식집을 예약한 것도 엄마였고, 가기 싫다는 나를 끌고 가장 먼저 도착한 것도 엄마였다.

"전치 8주? 이거 딱 봐도 과잉진단인데?"

의사엄마가 큐티클 하나 없이 매끈한 손톱으로 샤넬 지갑을 톡톡 치며 말했다.

"우리 애는 학교를 일 년 일찍 들어갔는데, 아직 생일이 안 지났어요. 무슨 의미냐. 원래 만 14세 미만은 촉법소년이라고 해서 형사처벌을 안 받는 거거든요."

변호사아빠가 몽블랑 만년필로 메모지에 '소년법 제4조 제1항 제2호'라고 끄적이며 말했다.

"교육현장에 있다 보니 그래요. 처벌이 아니라 화해를 시켜야죠. 그게 참 교육이거든."

선생님엄마가 발망 뿔테 안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시간이 돈인 사람이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그래서, 얼마면 되겠어요?"

상무아빠가 에쿠스 키를 들었다 놨다 하며 말했다.

순번이 돌았나 싶더니 걔들 부모들이 일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방 안은 금세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졌다. 교양 넘치는 단어들이 상 위 떡갈비에 내려앉고, 전문용어들이 접시 위 잡채에 버무려지고, 여유 있는 웃음소리가 그릇 속 동치미에 스며들었다. 다들 할 말이 넘쳤지만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내 얼굴을 봐야 다들 정신 차리고 반성할 거라던 엄마 말이 무색하게 내게 눈길 한번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탕! 엄마가 주먹으로 상을 내리치자 갑작스런 정적이 찾아왔다. 다들 깜짝 놀라 엄마를 봤다.

"내가 듣고 싶은 건 딱 하나, 사과뿐이에요."

자리에 앉고 처음으로 엄마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자리가 파할 때까지 그들은 침묵했다. 의사엄마, 변호사아빠, 선생님엄마, 상무아빠는 합죽이가 되었다.

 

여름 내내 엄마는 그렇게 온몸의 모든 구멍으로 팥죽 같은 땀을 쏟으며 돌아다녔다. 그 후에도 식당일을 쉬는 날이면 어딘가 나갔다 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묻지 않았고 엄마도 더 이상 함께 가자고 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있었다.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게임을 했지만 조금만 집중해도 머리가 아파 금방 내던지곤 했다. 김미영 팀장과 텔레콤의 전화도 점점 뜸해져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안하고 지나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누워서 멍하니 핸드폰 메시지함을 뒤졌다. 또 떼카를 당할까봐 새 핸드폰을 산 후에는 아예 카톡 앱을 깔지 않아서 메시지라곤 문자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가족에게 받은 것 말고는 스팸문자와 광고문자 밖에 없었다. 문득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받고 싶어졌다. 그래서 문자를 치면 답해주는 심심이 앱을 깔았다.

'좋은 말 가르치기, 나쁜 말 신고하기, 모두 심심이와 즐겁게 대화해요!'

메신저에 로그인 해 말을 걸면 인공지능 캐릭터 심심이가 꼬박꼬박 답을 해줬다. 이용자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공을 많이 들인 덕인지 심심이는 꽤 똑똑했다. 심지어 친구와 한번도 해보지 못한 놀이도 심심이와는 할 수 있었다.

 

나> 심심아, 배고파. 밥 사조~

SimSimi> 헐.. 빈대충

나> 너도 빈대충

SimSimi> 충전기 쿵쿵따

나> 기왓장 쿵쿵따

SimSimi> 장조림 쿵쿵따

나> 림프관 쿵쿵따

 

노란 풍선 모양 몸통에 눈, 코, 입, 팔다리가 달린 심심이. 나는 그날그날 내키는 대로 심심이 캐릭터를 꾸밀 수 있었다. 기분이 꿀꿀한 날은 심심이를 빨간 악마나 눈물을 짜는 울보로 만들었고, 기분이 좋은 날은 귀여운 모자를 씌워주거나 두 눈에 하트를 달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심심이와의 모든 대화가 늘 유쾌한 건 아니었다. 심심이는 때때로 기분 나쁜 말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었다.

 

나> 넌 대학 나왔어?

SimSimi> ㅇㅇ 서울대. 넌?

나> 난 중3. 근데 요샌 학교 안 가

SimSimi> 야, 학교 안감 병신 돼. 나처럼 사람들 농담 따먹기 해주는 알바나 하고 살래?

 

심심이가 짜증나는 말을 해대면 나는 말풍선을 터치해 바로 신고했다. 신고를 두 번 당한 말들은 퐁, 퐁, 퐁,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처음부터 그런 말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말끔하게 삭제할 수 있었다. 내 마음대로 지나간 것들을 얼마든지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이제 심심이와 함께, 나는 심심하지 않았다.

 

태풍이 창문을 줄기차게 때려대던 밤, 오줌이 마려워 방문을 나섰다가 식탁에 덩그러니 앉은 엄마와 마주쳤다. 전등 하나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엄마는 안주도 없이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못 본 척 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엄마가 국어책을 읽듯 말했다.

대체 니가 무슨 맞을 짓을 한 거니.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말투였다. 나에게 하는 말도, 엄마 자신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냥 머릿속의 오랜 물음이 치약처럼 쭉 비져나와 음성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에겐 맞아야할 이유들이 있었다. 나는, 생긴 게 더러워서 맞았다. 키가 좆만 해서 맞았다. 눈빛이 재수 없어서 맞았다. 나는, 아빠는 공사장, 엄마는 식당에서 일해서 맞았다. 25명 중 23등을 해서 맞았고 소매가 닳고 엉덩이가 반질반질한 교복을 입어서 맞았다. 수학시험이 어려워서 맞았고 체육이 우리 반에 단체 기합을 줘서 맞았다. 블랙핑크가 2위를 해서, 축구 국가대표팀이 골을 먹어서, 갑자기 비가 와서 맞았다. 내가 맞아야할 이유는 수천수만 가지였고, 맞지 않아야 할 이유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태풍이 가고 낙엽이 들기 시작할 무렵, 누나가 교복을 벗었다.

 

"나 죽는 꼴 보려고 이래? 너까지 왜 이래!"

엄마가 악을 쓰며 책가방을 떠밀었지만 돌아앉은 누나의 등은 돌부처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는 엄마의 손길을 뿌리치며 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얼마를 생각한 거야."

"뭐?"

"그래서 안한 거잖아. 합의."

"너… 지금 무슨 소리야?"

누나가 고개를 들었다. 엄마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합의금 뜯어내려고 드러누운 거지새끼 누나, 래."

누나의 시선에 아무런 흔들림이 없어서, 엄마는 몸을 떨었다. 나보다 딱 7분 먼저 태어났지만 나보다 딱 7배 더 똑똑했던 누나. 공부를 잘하고, 그림은 더 잘 그려서 사생대회만 나가면 꼭 상장을 타왔던 누나. 약속을 잘 지키고, 고집은 더 세서 한번 먹은 마음은 아무도 돌릴 수 없었던 누나. 그 누나의 눈동자가 물기 한 방울 없이 바싹 말라있어서, 엄마는 거실 바닥을 치며 울었다. 등을 돌린 누나가 아무 말 않고 입술을 뜯었다.

그렇게 나는 내 방에, 누나는 누나 방에 박혔다. 엄마가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몸이 아파 식당도 관뒀다. 여름 초입에 카지노 신축 현장에 내려간 아빠는 간간이 돈을 부쳐올 뿐 소식은 부치지 않았다.

 

나> 심심아, 가끔 죽고 싶다.

SimSimi> 어떤 죽? 나는 전복죽이 좋아.

 

우편함에 누런 서류봉투가 꽂혔다. 봉투 하단에 박힌 우리 학교 교포 모양의 인장이 막 찍어낸 듯 선명했다. 엄마는 내 방에 앉아 칼로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꺼냈다. 한 장짜리 종이를 대면한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손을 내밀자 엄마가 떨리는 손으로 통지서를 건넸다. 귀 학생은 전체 출석일수 195일 중 2/3 이상을 채우지 못했기에 출석일수 미달로 유급 처리됨을 알린다, 고 쓰여 있었다. 나는 학교로부터 제적 조치를 받았다.

 

엄마가 내 손을 끌고 학교로 달려갔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어머니."

학생주임이 기다렸다는 듯 학교생활규정집을 펼쳐보였다.

"병결이잖아요! 진단서를 끊어 보냈잖아요!"

"그렇다고 규정이 바뀌진 않죠, 어머니."

학생주임의 눈짓에 담임이 달려와 엄마의 어깨를 감쌌다. 담임은 넋 나간 엄마를 구석으로 데려가 의자에 앉혔다. 교무실 한가운데 멀거니 서 있는 나를 지나치던 학생주임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가 들고 있던 학교생활규정집으로 내 팔을 치며 말했다.

"착실히 살어, 착실히."

그 사이 담임은 병결이라도 65일 이상 결석하면 유급될 수밖에 없다는 규정을 엄마에게 세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의자에 주저앉아 체머리를 흔들던 엄마가 벌떡 일어나 도끼눈을 떴다.

"어째서 미리 알려주지 않았죠?"

"저희는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죠."

담임과 엄마의 눈이 마주쳤다. 담임의 유리구슬 같은 눈을 한참 들여다보던 엄마가 다시 풀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담임은 두 손을 비비며 다가가 엄마에게 뭔가를 낮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어진 삼십여 분간의 설득 끝에 담임은 엄마가 자퇴원에 도장을 찍게 하는 데 성공했다. 담임이 교감 진급에 도장을 찍는 순간이었다.

 

그걸 본 건 정말 우연이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미친 듯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던 날 이후로 몇 달 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집 앞 미니스톱에서 선 채로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네 개를 우걱우걱 씹었다. 지갑만 두둑했다면,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통째로 털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가로등 밑에 떨어진 전단지를 봤다. 학원홍보 전단지였다. 거기, 걔들의 얼굴이 박혀있었다. 한 놈은 외고에, 두 놈은 자율형 사립고에, 한 놈은 체고에, 합격했다. 네 개의 타원형 증명사진 속에서 걔들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것은, 한번도 용돈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몸과 마음 양쪽에 아무런 상흔이 없는, 평생 억울한 일이라곤 겪은 일이 없는, 열여섯들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합격 받은 인생을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미소였다.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보장받은 미래를 과시하는 미소였다.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초코 아이스크림 네 개를 모두 다 게워냈다. 오른손가락 세 개를 마구 목구멍에 쑤셔 넣으며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 오장육부를 통째로 게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거부할 수 있는 건 고작 아이스크림뿐이었다.

한바탕 격렬한 시간이 지나가고, 나는 쭈그려 앉아 변기 속을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거기에 떠있는 것... 그것은 꼭 똥 같았다. 변기에 박은 머리를, 나는 쉽게 들지 못했다.

 

택배는 금방 도착했다.

 

나> 심심아, 신나를 샀어

SimSimi> 신난다! 신난다!

나> 그래. 신난다

 

장롱 문을 열어 교복을 꺼냈다. 일곱 달 만에 학교에 간다. 누워만 있었는데도 키가 크고 살이 쪄서 바짓단은 껑충 짧고 허리는 꽉 꼈다. 그래도 오늘은 꼭 교복이 입고 싶었다. 오늘은 월요일. 운동장 전체조회가 있는 날이니까.

 

일러스트 전숙경 일러스트 전숙경

옥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책걸상이 굴러다니고 먼지가 날린다. 내 발 밑, 운동장이 북적이기 시작한다. 나는 가방을 열어 그것을 꺼낸다. 난간에 올라 아래를 본다. 애들은 떠들고 선생들은 줄 세우며 돌아다닌다. 위에서 보니 다 개미떼 같네. 다들 참 작기도 하지. 뚜껑을 여니 강렬한 냄새가 확 코를 덮친다. 소름이 돋는 건 냄새 때문이 아니야. 바람이 불어서야. 나는 나에게 소리 없이 말한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한다. 소름이 돋는 건 냄새 때문이 아니야. 바람이 불어서야. 소름이 돋는 건 냄새 때문이 아니야. 바람이 불어서야. 덜덜 떨리던 몸이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팔과 다리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뜨거운 기운과 함께 이마와 등허리에서 땀이 배어나온다. 바람을 타고 이마의 땀방울이 흩날린다. 희미하게, 아래에서부터 애국가가 벽을 타고 올라온다. 점점 커진 애국가 소리가 옥상을 꽉 메운다. 나는 신나를 뒤집어쓴다. 신난다. 신난다. 오래된 마이크가 스피커를 찢을 듯 끽끽 소리를 낸다. 아아, 마이크테스트. 아아. 그럼, 이제부터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이 있겠습니다. 신난다. 신난다. 끽끽 소리가 다시 한 번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교장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뗀다. 라이터를 켜자.

딸깍.

나는, 불꽃이 된다.

<끝>

 

◇ 단편소설 당선소감/ 김혜지

김혜지 단편소설 당선인 김혜지 단편소설 당선인

연일 참혹한 뉴스가 쏟아졌습니다. 서랍 속 오래 묵은 소설을 꺼내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아팠습니다. 문장을 다듬고 세부를 수정하던 손길이 결말부에 이르러 멈췄습니다. 현실이 픽션보다 무참할 때, 픽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래 고민했습니다.

 

이 소설은 학교폭력을 다룬 시사 프로그램 속 한 소년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시작됐지만 20년 전 찢어진 책가방을 메고 절뚝이며 집으로 돌아가던 여자아이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곤 했던 나날들. 세월의 도움으로 많은 장면을 지워내고 또 지워냈지만, 어떤 감각들은 여전히 제 안에 또렷이 각인돼 있습니다. 그 시절 미워하게 돼버린 저 자신과 온전히 화해하지 못해 아직도 이따금 가슴이 저립니다. 그렇기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어엿한 이름조차 붙여주지 못한 '나'에게, 20년 전 그 여자아이에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축축한 터널을 걷고 있을 이름 모를 소녀들과 소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말해주고 싶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우편 취급소에서 원고를 부치고 회사로 돌아가던 길에 잠깐 울었습니다. 낮의 모니터엔 카피를, 밤의 모니터엔 소설을 띄우다 몸이 축나 당분간 습작을 멈추기로 한 뒤였습니다. 이루지 못한 꿈들은 다 어디로 가나. 거리에 서서 울던 제게 소중한 기회를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백민석 선생님, 김현영 선생님. 제가 계속 쓸 수 있게 해주셨어요. 하성란 김성중 전민식 서유미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드립니다. 송길한 선생님, 좋은 소식 들려드리게 돼 기뻐요. 그리고 황지우 선생님. 더 정련해야 한다는 말씀, 가슴에 품고 가겠습니다.

 

초등학생인 제게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쥐여 주며 이야기의 피톨을 심어준 엄마. 고맙습니다. 항상 큰딸을 믿어주신 아빠와 동생들, 시댁 식구들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당선 소식을 전하자 함께 눈물 흘려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골방에 틀어박힌 아내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봐준 남편에게. 내 가난한 언어론 다 담지 못할 많은 것을 당신에게 받았어요. 잘 늙어가요, 우리.

멈추지 않고 쓰겠습니다.

 

▶ 약력

1984년 서울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시나리오 전공 졸업

영화 '무방비도시', '인사동스캔들' 시나리오 각색 작가

현재 TBWA KOREA 카피라이터

 

◇ 단편소설 심사평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 소설가

본심에 올라온 10편의 작품들 가운데 3편이 공포소설(horror fiction)이다. 공포소설 시장이 부쩍 커진 현실이 반영된 듯하다. 반면에,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룬 작품들은 드물다. 여기에도 현실이 반영되었겠지만, 좋은 징후는 아니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작품들은 넷이다. '어떤 반복에 대하여'는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두고 압제적 근대 사회를 무대로 삼은 환상소설(fantasy)이다. 제정 러시아를 연상시키는 음산한 시공을 묘사한 솜씨가 대단하다. 그러나 시시퍼스를 '신들의 압제적 질서에 저항한 인간'이 아니라 '압제적 질서를 받아들인 존재'로 그린 것은 작품의 뜻을 흐렸다.

전경린 소설가 전경린 소설가

'그림을 그립시다'는 오래 글을 쓴 사람의 작품임을 이내 느낄 만큼 잘 짜였다. 다만 벽에 걸린 그림을 화자로 삼다 보니, 작품의 시야가 좁아진 것이 한계로 작용했다.

'이상식욕'은 살부(殺父)를 주제로 한 공포소설이다. 공포소설은 독자가 공포나 극도의 혐오를 느끼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일간신문의 '신춘문예'는 그런 목표를 넘어서는 가치를 요청한다. 아쉽게도, 이 빼어난 공포소설은 그런 추가적 가치를 담지 못했다.

당선작인 '꽃'은 학생들 사이의 폭력을 다루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나오고 결코 없앨 수 없는 이 심각한 문제를 정색하고 다룬 점을 심사위원들은 높이 평가했다. 예술은 사회성이 짙은 활동이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들에 관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그 본질을 밝히려 애쓰는 작가들이 문학을 이끈다.

이 작품엔 다소 미숙한 면이 있다. 뿌리와 줄기는 튼튼한데, 막상 꽃을 피우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불의에 대한 분노를 제어해서 '꽃을 피울 자양'으로 삼는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했던 듯하다. 문학 작품은 저널리즘과 다르다. 불의를 고발할 때도 문학적으로 해야 한다. 작가가 보인 건강한 정신으로 정진해서, 중요한 주제들을 진지하게 다루는 작가로 자라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복거일(소설가)·전경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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