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7)50년 7월 보도연맹원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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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원에 대한 대구 일원의 대대적인 검거선풍은 1950년 7월의 둘째 주부터 시작되었다. 7월초부터 드리우기 시작한 죽음의 그림자는 음산하고 불길한 안개처럼 다가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마'하며 방심하고 있었다.

대구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있던 아동문학가이자, 대륜중학교 교사였던 김홍섭(金洪燮)은 7월12일, 수업 중에 불려나와 경찰에 연행되었다. 가족은 물론, 동료교사들과 제자들에게 미처 작별인사도 못한 채 연행돼 나오면서도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 수업차질에 대한 걱정부터 앞세우는 천직의 교사였다. 그 길로 그는 다시는 살아오지 못했다.

대구의 '민전'간부였고, 대구언론계의 중진이었던 마영(馬英)은 언론인다운 정보력과 센스로 그때까진 한번도 예비검속에 걸려본 적이 없었다. 경북보련결성대회 때는 사회까지 맡는 등, 치안간부들과도 반말을 트는 사이였다. 때문에 "설마하니, 나를..." 했던 방심이 화근이었음을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고서야 뼈저리게 느꼈으나 때늦은 후회였다.

경북문련위원장 등의 경력을 지닌 이응수(李應壽) 변호사는 불과 한 달여 전에 치렀던 5·30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피로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역시 보련명단에 들어 있었지만 국회의원 출마 자체가 정치적 과거사와의 결별행위로 여겨 굳이 과민해하지 않고 있었다.

7월13일 형사들이 연행하려 왔을 때, 아무리 막가는 시국이라지만 현직 변호사인 자신을 설마 어쩌랴 싶어, 가서 따질 셈으로 순순히 따라간 게 오산이었다.

민혁당 경북도당 간부를 지냈던 이원식(李元式)은 7월14일 역시 남대구서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더위로 숨 막히는 좁은 유치장에서 같은 처지의 사람 10여 명과 더불어 "이젠 죽었구나" 낙담하며 앉은 채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8시, 뜻밖에도 누군가 그를 불러내었다. 반신반의하며 감방을 막 나올 무렵, 마침 건너편 감방에 갇혀 있던 이응수 변호사가 철창가로 다가와, "이형, 정말 석방되는 거요?"하며 머리를 갸웃해 보이더라고 뒷날 회고한 바 있다.

세상에 전해진 이 변호사의 마지막 모습은 이것뿐이다. 고위 친지의 도움으로 일시 석방될 수 있었던 이원식은 그 길로 백부의 집 툇마루 아래에 '특수공사'를 하고 석 달간 숨어 지내 살아남았다. 그러나 남편을 대신해 뒤늦게 끌려간 3남매의 주부였던 그의 아내는 끝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대구의 인민당 간부였던 유한종(柳漢鍾)은 7월 10일 쯤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즉시 경산군 안심면의 정치동지인 백기호의 과수원집으로 도망쳤다. 백기호는 6.25 직전에 이미 피신 차 상경한 뒤여서, 백기호 모친의 도움으로 과수원내 구석진 한 곳에 구덩이를 파고 은신할 수 있었다. 두 달 반의 두더지생활 끝에 백랍 같은 얼굴로 살아나온 그는 재차 부산으로 도피함으로써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6.25 직전인 6월 14일 현재 대구형무소의 재소자는 약 4천명이었다. 이 중 120명의 여성 수인을 제외하곤 모두 남수(男囚)였으며,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절대다수인 약 3천명에 이른다고 이용기 당시 형무소장이 밝힌바 있다. 49년 말 현재 대구의 보련가맹자가 1천500명을 웃돌았고, 그 뒤에도 계속 늘어나, 6.25 직후엔 적어도 2천명 선을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적게 잡아 70%만 검속되었다 쳐도 1천400여 명이 죽음에 내몰렸던 셈이다. 따라서 기존의 좌익재소자 3천여 명과 합쳐, 모두 4천400여 명의 좌익수, 또는 '무고한 좌익혐의자' 중, 과연 얼마만큼 목숨을 잃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랏줄에 묶여 수없이 트럭에 실려 가는 모습만 봤다"는 증언만 넘친다. 달성의 가창골과 경산의 코발트광산 등에서 학살된 사실만은 밝혀졌지만, 정확한 명단과 숫자는 여전히 미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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