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의 대구이야기(34)…보도연맹 강제가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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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로 인한 민족적 비극은 반세기를 넘긴 지금까지 많은 이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특히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맹했다가 변을 당한 '피학살자' 유족들의 원한은 깊다. 일제 말엽의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을 모방한 '국민보도연맹'(약칭 '보도연맹' 또는 '보련')이 조직, 설립된 것은 1949년 6월이었다. '타공(打共)시국'의 법적 근거라 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이 48년 12월에 제정되자, 이미 전향했거나 전향시킬 좌익인사들에 대한 반공교화와 선무공작을 위한 조직의 필요성이 시급히 대두되었다.

당시 내무장관 김효석(金孝錫·납북)이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이승만 정부의 각료 중 조봉암(曺奉岩)에 뒤지지 않는 진보성향의 인물이었다. 선무공작의 노림수도 깔려 있었지만 김효석 나름의 순수한 동기도 없지 않았다. 좌익인사들을 끌어안고 보호계도(保導)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에 동참할 기회를 주자는 의도였다. 의도는 변질됐지만 조직은 순조로워, 49년 말 현재 전국맹원이 30여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대구를 포함한 '경북보도연맹'은 49년 11월 6일 대구역전 공회당에서 1천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선포식을 가지면서 설립되었다. 이날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선포식에서 맹원들은 다음과 같은 충성의 맹세를 해야만 했다. (1) 오등(吾等)은 대한민국정부를 절대 지지 육성을 기함. (2) 오등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 분쇄할 것을 기함. (3)오등은 이론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노동당을 분쇄함을 기함. (4) 오등은 민족진영 각 정당사회단체와 보조를 맞추어 총력결집을 기함.

이후 박승준(朴承俊) 대구지검장, 조재천(曺在千) 경북도경국장, 백기호(白基浩) 경북보련간사장 공동명의로 신문에 가맹권고문을 내었다. 과거행위를 불문에 부칠 테니 자수마감일인 11월 20일까지 자수할 것을 강조하면서 은근히 어르는 내용이었다.

"남로당원, 그 대중단체 맹원동지들이여, 자수하시라. 그 가족들이여, 그 친우들이여, 자수하도록 인도 권유하시어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기를 절실히 바란다. 가맹하지 않은 자는 악질분자로 규정하여 엄중처단이 있을 것이다."

11월 23일 현재 대구에선 모두 1천554명이 가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중 절반이 학생이었고, 민청원이 약 20%, 남로당원이 약 17%, 여맹원이 약 8%였다. 가맹성적이 고무적이자, 사직당국은 곧 군(郡)부 조직을 마치고 새로운 선무공작도 펼 것이란 자신감까지 보였다. 사실 보련에만 가맹하면 과거사를 불문에 부친다는 당국의 '공언'이 있기 전부터 도하 각 신문에는 '탈당성명서'란 제목의 보신형(保身形) 전향성명서가 줄을 잇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분자의 모략에 빠졌음을 절실히 깨닫고 금후는 여하한 경우가 있더라도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완전히 이탈할 것을 성명합니다. 나는 과거의 죄상을 반성하고 금후 우리 대한민국의 국책에 순응하여 충성을 다 바쳐 건국사업에 노력하겠습니다. 만일 추호라도 어그러짐이 있을 때에는 여하한 처단이라도 감수하겠음을 서약합니다."

개인성명뿐만 아니라 경북도내 각 지방에선 수십 명씩 연명으로 좌익단체 탈퇴성명서를 내자마자 무더기로 보련에 가맹하는 일도 있었다. 보련가맹이 지난날의 사상적 과오에 대한 일체의 면죄부가 되는 것처럼 인식되어졌고, 사직당국 역시 그렇게 종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차츰 강제성이 더해졌다. 지역별 할당제도 강요되었다. "A군에선 지난주에 100여 명이 가맹했는데 너희 B군에선 왜 그 모양이냐?"는 상부의 질책이라도 받으면 실적을 올리려고 좌익전력이 없는 사람들까지 맹원명부에 끼워 넣는 판국이었다. 몇 달 뒤 전쟁이 나자, 이때의 강제날인명부가 '저승사자명부'가 될 줄은 그 누구도 알 턱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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