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냄새는 사건에 향수처럼 뿌려져서 감정과 버무려져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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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감정·기억와 밀접한 관계…코는 뇌에 가장 가까운 통로

어제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11월의 비는 낙엽을 적시고 길바닥을 적셔서 특유의 냄새를 만들어낸다. 이 냄새가 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정신과 수련의 시절 만난 나의 소중한 환자에 얽힌 일이다.

평소에 생각지도 않던 일이 냄새를 맡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날 때가 있다. 제주 공항에 내리면 밀려오는 바다 냄새와 길가에 즐비한 가로수의 냄새는 신혼여행을 떠오르게 하듯이, 마음에 담아둔 풍경들, 아득히 먼 추억들, 사람, 장소, 그때 느꼈던 감정, 몸의 감촉까지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처럼 냄새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The Proust Effect)'라고 한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이름에서 나온 용어다.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서 맛보는 순간, 그 맛과 관련 있었던 과거 기억들이 떠올라 생기와 열정에 차오르는 장면이 있다.

냄새는 사건에 향수처럼 뿌려져서 감정과 버무려져서 저장된다. 기억은 감정으로 채색되어 무의식에 저장된다. 어느 날 불현듯 마음의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기억이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다. 정신치료에서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어서 아로마를 이용한 후각 자극이나 사소한 단서들은 기억의 동굴을 흔든다.

정신과 전공의 일 년차 때의 일이다. 당직을 서는 날이면 한숨도 자지 못할 정도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많았다. 응급처치하고 병실로 입원시키고 입원차트를 작성하고 나면 날이 밝았다.

그날은 자정까지 응급실에서 걸려오는 콜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날도 있구나. 책을 읽다가 당직실 침대에 누웠다. 그때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응급실 전화번호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이 바짝 되었다. 응급실 울렁증이 생겨났다. 남자가 칼을 들고 있다, 정신과 선생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경험이 없던 시절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환자의 차트를 보관하는 외래 접수실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동떨어져 있었다.

우선 어떤 환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차트실로 향했다. 어두운 복도에 내 발자국 소리만 크게 울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20년 이상 우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고 최근에 내원한 기록이 없었다. 아마 약을 먹지 않고 지내다가 조울병이 재발했나보다. 조울병은 기분이 고양되는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정동 장애다.

환자는 단단한 체구에 건장한 남자였다. 눈이 충혈되었고 목소리가 다 쉬었다. 정신과 병력이 수년씩되는 베테랑 정신과 환자에게 전공의 일 년차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새로 온 의사네. 나는 교수만 상대하니까 내 담당 교수 불러라." 한밤중에 교수님께 전화하는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칼을 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교수님이 나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20여분 걸렸을까. 평생에 그 시간만큼 긴 시간이 또 있었을까.

경찰관이 출동하고 긴박한 시간이었다. 환자의 칼을 뺏으려던 경찰관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때 교수님이 도착했다. 교수님을 본 환자는 갑자기 온순해지고 울기도 하고 권총도 스스로 내려놓았다. 마치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 했다. 환자는 서서히 안정되어갔다.

진료실 분위기와 상관없이 무장 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서 권총을 뺏은 죄로 환자를 잡아갔다. 교수님께서는 내 환자가 잡혀갔는데 잠을 잘 수 있겠느냐면서 경찰서로 환자를 보러 나섰다. 환자를 면회하고 반드시 치료받으라고 설득했다. 경찰 담당자에게는 조증 상태에서 벌어진 행동이니 처벌보다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간곡히 설명했다.

경찰서를 나서니 날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춥고 스산한 11월의 비가 내려 낙엽이 젖어 있었다. 큼큼한 흙냄새와 비릿한 공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선생, 고생 많았다."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만약 교수님이 전화를 받지 않고 나오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 평생에 감사한 분이다. 그 환자는 다음날 병실로 입원했고 나는 그의 주치의가 되었다. 잊을 수 없는 나의 환자였다.

이 사건을 떠올리게 한 건 어제 내린 비 때문이었다. 비 냄새는 어떤 경로로 옛 기억을 불러내는 것일까. 후각기관은 뇌에 0.3초 만에 자극을 전달한다. 화학물질로 되어 있는 냄새를 코의 후각세포가 감지를 하면 전기신호로 바꿔서 뇌로 전달한다. 냄새의 저장 장소는 뇌의 측두엽에 존재한 변연계이다. 냄새는 감정,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코는 뇌로 이르는 가장 가까운 통로여서 우울증 치료에 이용하기도 한다. 에스케타민이라는 물질을 코 안에 뿌리면 자살 위험성이 높거나 치료저항성 우울증 환자에게 상당한 효과를 보인다. 코로 흡입된 에스케타민은 글루타메이트라는 신경 흥분 물질을 방출시켜서 바로 뇌 신경계에 영향을 주게 된다. 투약 24시간 내에 호전되는 경우들이 많다.

에스케타민은 비강 스프레이 형태로 사용된다. 복용하는 항우울제는 길고 긴 단백질 생성과정을 통해 효과를 내기 때문에 급성기나 자살 생각이 높은 환자들에게 효과가 늦게 나타나는 단점이 있다. 특히 여성이나 젊은 성인, 급성으로 발병한 경우, 불안감이 동반된 우울증의 경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우리에게 냄새는 추억을 되살려주기도 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잡아주는 천사의 날개 같기도 하다. 들숨 날숨을 따라 오가는 향기는 나의 폐와 뇌를 끊임없이 일깨운다. 나도 누군가에게 향기로운 의사로 기억되고 싶다.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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