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윤동주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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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손진은 시인
손진은 시인

달빛이 찍는 창살의 실루엣이 이마와 콧마루, 입술,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간질인다. 달빛이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 소리가 날 듯한 기숙사, 옆에 누운 친구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고 그는 사념에 잠긴다. 고향 처녀들의 영상도, 바다를 건너온 친구의 이해 못할 절교선언 편지도 떠오른다. 감상적인 그 친구에게도 필연코 가을은 온 것인가?

그는 어느새 정원에 나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줍어지는 코스모스 앞에 서서 닥터 빌링스의 동상처럼 슬퍼"진다. 민감한 옷깃은 달빛에도 서늘해지고, 선득선득한 이슬은 서러운 사내의 눈물처럼 느껴진다. 가을밤은 그의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준다.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이 있고 달이 있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해 죽어라 팔매질을 한다. 달은 산산히 부서진다. 허나 일렁이던 물이 잔잔해지자 다시 얼굴을 드러낸다. 하늘을 쳐다보니 놈은 하늘 위에서 자신을 빈정대는 게 아닌가. 그 때 그는, 저 물에 비친 허상을 없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자신을 비웃는 저 달을 겨누자고 생각한다. 마침내 꼿꼿한 나뭇가지에 띠를 째서 줄을 매고 좀 단단한 갈대로 화살을 만들어 "무사의 마음으로 달을" 쏜다.

윤동주의 산문 '달을 쏘다'는 애초 연희전문 문과 1학년 1학기 8월말 무렵 정인섭 교수의 '문학개론' 기말고사 시간에 써서 제출한 것인데, 약간 고쳐서 그해 10월 '조선일보' 학생란에 투고, 다음해 1월 23일자에 실린 작품이다. 더 놀라운 것은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이 있고 달이 있다"라는 구절에서 못을 '우물'로 바꾸면서 1년 뒤 그의 대표시 중 한 편인 '자화상'을 낳았다는 것.

스물한 살의 영혼은 왜 자정 넘은 시간, 달밤의 산책길에서 달을 향해 살을 겨누었을까? 김유신이 습관에 따라 천관녀의 집으로 향하던 애마의 목을 치는 심정이었을까? 차라리 50대말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참회록'에 나타나는 톨스토이의 심정의 일단으로 비견하고 싶다.(그가 몇 년 뒤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라는 '참회록'을 쓴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윤동주는 겨우 스물 하나.

이제나 그제나 대학 1학년이면 살가운 연애도, 감상도 치기도 부려 볼 나이. 그러나 그는 센티멘탈리즘을, 지금껏 대상이 자기에게로 이끄는 대로 살아온 삶을, 그 달밤의 한 복판에서, 송두리째 뽑아 내친 것이다.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 것이 아니라, 기실 잘못 살아온 스물한 살 인생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1938년을 기점으로 그는 동시 쓰기를 그만 둔다. 감상을 폐기하고 '나'라는 존재에 대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식민지 현실이라는 '생활'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한다.

누구는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고 했지만, 청년 윤동주가 아직 우리들 가슴에 살아 있는 것은 아직도 자신을 바꾸지 못하고 어쩡쩡 살아가는 중년들에게 매서운 화살을 들이대기 때문일까. 적막강산의 가을은 그 심정도 모르고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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