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숫가루=MSGR'…생활 속 물든 외국어에 쩔쩔매는 사람들

문구 코너를 'Stationery'로…유제품을 'Dairy'로 표기
외국어 간판 규제 쉽지 않아…시민들 스스로 자제해야

최근 서울의 한 유명 카페 메뉴판에서 미숫가루를 'MSGR'로 표기하면서 온라인상 갑론을박이 오갔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최근 서울의 한 유명 카페 메뉴판에서 미숫가루를 'MSGR'로 표기하면서 온라인상 갑론을박이 오갔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선물도 영어를 알아야 가능한 일인가 봐요"

가정주부 20대 사공소정 씨는 지난 2월 아이의 장난감을 사려 한 대형마트를 방문했다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간판이 죄다 영어로 되어 있는 데다 문구류를 뜻하는 'Stationery', 유제품을 의미하는 'Dairy' 등 생소한 단어가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사공 씨는 "요즘 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도 영어 때문에 힘들다. 다시 영어 공부해야 할 판"이라고 했다.

메뉴판 외국어 표기로 인해 논란이 된 사례도 있었다. 최근 서울의 한 유명 카페 메뉴판에서 미숫가루를 'MSGR'로 표기하면서 온라인상 갑론을박이 오갔다. 신선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메뉴를 알아볼 수 없어 못 시키겠다"는 지적이 대다수였다.

이렇듯 대형마트, 메뉴판 등 일상생활 곳곳에 외국어가 들어와 시민들 사이 불편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외국어가 사용되는 것은 시민들의 인식 속 외국어 사용이 세련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실제로 국립국어원이 2020년 성인 남녀 5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외래어·외국어를 사용하는 이유로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서'(41.2%),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능력 있어 보여서'(22.9%), '우리말보다 세련된 느낌이 있기 때문'(15.7%)으로 꼽혔다. 소위 말하는 '있어 보이기 때문'에 쓴다는 이들이 적지 않은 셈이다.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에도 실질적인 규제는 쉽지 않다. 4층 이하에 설치되는 5㎡ 이하의 간판은 허가·신고 대상이 아니고,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의 외국어 간판은 '특별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돼 단속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규제가 쉽지 않은 탓에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상 간판 등 옥외 광고물의 문자 표기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문자 표기법에서는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해야 하고, 외국 문자로 표시할 때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글을 적은 뒤 그 옆에 외국어를 같이 써야 한다. 그러나 이를 지키는 사례는 소수에 불과했다. 한글문화연대가 2019년 12개 자치구 7천252개 간판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외국어 간판은 1천704개로 23.5%를 차지했고, 한글과 외국어를 병기한 간판은 1천102개(15.2%)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외국어 사용을 우려하면서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언어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진화하는 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냐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며 "언어는 자연과 같다. 먹이사슬처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게 된다. 이미 권력이 돼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려고 하는 언어가 영어인데 이를 그대로 두면 결국 우리말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고 강조했다.

서현정 세종국어문화원 선임연구원은 "외국어가 남용된 사례들이 많은데 시민들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며 "'홈트'를 '집콕운동'으로 바꿔 부르는 식의 참신하고 재기 발랄한 노력으로 국민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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