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 <1>경주를 사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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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천년의 역사를 찾아 더 '맛있는' 여행 떠나자

선덕여왕은 의외로 쓸쓸하고 외로워보였다. 경주의 성산(聖山) 낭산의 시그니처다.
선덕여왕은 의외로 쓸쓸하고 외로워보였다. 경주의 성산(聖山) 낭산의 시그니처다.

경주에 가고 싶다. 아니 경주에 살고 싶다.

'제주도 한 달 살아보기'가 국내여행 트렌드의 하나로 정착돼가고 있듯이 이제 '경주 한 달 살기'는 어떨까?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장이라면 아예 일년 정도 머무는 것도 좋겠다. 혹시라도 한 달이 어렵다면 일주일씩 경주를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경주시가 아예 청년층을 대상으로 '경주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마련, 숙박비와 식비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도 희소식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두 번은 경주를 여행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갔거나, 신혼여행지로 경주를 다녀갔거나 '경주'에 대한 기억을 마음 속 깊이 갖고 있다. '경주'는 그래서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고도(古都)로 자리 잡은 모양이다. 베이비부머세대에게 경주는 불국사와 석굴암 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각인돼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주는 천년의 역사를 넘어 색다른 매력과 유혹이 넘치는 도시다.

요즘 경주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대릉원 담장을 따라 형성된 '황리단길'은 우리가 기억하는 오래된 경주와 전혀 다른 오감으로 MZ세대를 유혹한다. 아니 MZ를 넘어 온 가족이 찾아나서는 명소로 북적거린다. 마치 삼국 통일후 경주가 페르시아는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 대상까지 몰려들면서 상업무역의 중심지로 터키 콘스탄티노플, 중국 시안(西安)과 더불어 실크로드의 종착지 국제도시로 이름을 날린 것처럼 말이다.

첨성대와 월성 황룡사 빈터와 대릉원, 오릉 그리고 노서동과 서악동 고분에 가면 수학여행길의 학생들이 재잘거리는 모습과 더불어 커플티를 맞춰 입고 셀카를 찍는 선남선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곳곳의 '사진 맛집'에선 한복을 차려입고 '인생샷'을 찍으려고 길게 줄을 선 풍경도 경주의 신풍속도다.

제주도 오름보다 더 아름다운 경주의 고분 사이를 걷는 것은 경주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노서동 고분
제주도 오름보다 더 아름다운 경주의 고분 사이를 걷는 것은 경주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노서동 고분

'천년의 역사'를 가 남긴 문화유적은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제주도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경주의 경쟁력이다. 주춧돌만 남아있는 대사찰의 빈 터에서 우리는 역사의 '공허함'을 느끼고 역사책이 가르쳐주지 않는 숨겨진 이야기를 추측하는 퍼즐게임의 재미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경주다.

우리가 사랑한 시인들은 경주를 지독하게 사랑했다. 경주가 시인들을 유혹한 것은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하는 사라진 역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시인 강석경은 신라를 만나기 전 하나의 '디아스포라'에 불과했지만 경주를 만나 자신의 모태를 찾았다고 고백했다, 이성복과 유안진은 시집을 냈고 최승자는 경주를 사랑했다. 경주교도소에 수감된 박노해는 교도소 담장 너머의 왕릉을 통해 '자유'를 노래했다.

장율 감독의 영화 <경주>는 누구나 마음속 깊숙이 갇혀있던 경주를 소환해낸다. 배우 박해일은 자전거를 빌려 타고 시내를 다니다가 왕릉에 이르러 연인과 유치원 아이들을 통해 자신의 경주를 추억했다. 영화에서처럼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은 은은하게 울리면서 매 시간마다 온 도시를 깨운다. 1천오백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중생들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던 종소리였다. 그것은 부처의 말씀이기도 했고, 번뇌의 세상에서 괴로워하던 인간을 구원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경주는 천오백년 전 역사로 통하는 타임머신이다.

경주에 가면 왕릉에서 뛰쳐나온 신라 장군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는 드라마 '도깨비'의 한 장면처럼 천오백년 전 경주의 기억이 몽환적으로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 옛날 여기에 산 적이 있었던 '기시감'(데자뷔)였을까? 그만큼 경주는 특별했다. 아스라한 원초적 기억처럼 우리 혈관을 타고 오르는 피에는 신라인의 DNA가 짙게 배어있다. 그래서 나는 '내 영혼의 뿌리는 경주'라는 것을 확신한다. 물론 우리 한국인의 DNA는 신화 속 단군보다는 신라인의 DNA가 더 많이 남아있다는 주장에 압도당할 이유는 없다.

분황사 당간지주
분황사 당간지주

다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단일민족과 단일국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자. 통일신라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사라지고 모두 신라인이 되었다. 신라가 고려가 되고 고려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통해 오늘의 우리가 존재한다. 경주를 통해 나우리의 '오리진'과 정체성을 확인해보는 건 어떨까.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다. 만일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라는 가정을 통해 통일신라를 폄훼하고 정통성을 부정하는 주장이 난무하기도 한다. 그런 역사적 가정이 통한다면 오히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구려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됐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역사를 오히려 긍정하는 것이 좋겠다.

◆경주는 고분의 도시다.

수학여행에서 처음 만난 경주는 놀라웠다. 공동묘지는 대낮에도 무서웠을 나이였다. 그런데 수많은 왕릉이 도심을 차지한 경주시내는 이상하거나 무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둑어둑해진 저녁에도 튼실한 고분사이를 다녀도 귀신은 커녕 도깨비불도 나타나지 않았고 왕릉이 무덤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달빛에 드러난 고분들의 능선은 제주도의 '오름'보다 아름다웠다,낮은 구릉이 왕들의 무덤인지 모르고 경주사람들은 왕릉을 기둥삼아 집을 지었고 밭을 갈았다. 왕릉 사이로 해가 떴고 아이들은 능을 오르내리며 놀았다. 눈이 펑펑 내리면 왕릉은 눈썰매장으로 변했다. 그런 고향 경주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부러웠고 그 친구의 '왕릉눈썰매장'이 그리웠다.

'왕릉뷰'는 박정희 대통령이 살렸다. 무엇이든 오래된 것은 '불도저'로 밀어붙이던 '개발독재'시대였다. 경주를 역사문화관광지구로 묶지 않았다면 지금 경주시내 고분이란 고분은 모두 사라지고 높고 낮은 빌딩차지였을 것이다. 고분사이로 삐죽삐죽 보이는 모텔간판과 낡은 저층 아파트들을 '애물단지'라고 지적하지만 왕릉을 밀어버렸으면 어떻게 됐을 지 아찔하다.

◆경주는 도깨비 도시다.

경주에선 늘 도깨비를 만난다.

천년신라의 왕궁 '월성'을 느릿느릿 산보하다 계림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함께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의 '에스코트'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편안했다. 경주를 지켜온 '도깨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어느 어스름 저녁 북적거리는 '황리단길'을 피해 인접한 노서동 고분으로 접어들었다. 저녁노을에 비친 봉황대와 금관총의 풍경 그리고 곧바로 어둠을 비추는 가로등이 깜빡거리는 동네 풍경은 경주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도깨비는 고분에 사는 것 같다.

느릿느릿 가을이 찾아 온 고분들 사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고 걷자. 그러면 순간 경주의 '천년' 도깨비들이 슬그머니 뛰쳐나와 함께 장난을 치는 기분이 들거나 운이 좋으면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유혹에 빠지는 상상을 하곤 한다.

<삼국유사>는 김유신 장군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수십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무덤에서 뛰쳐나와 '미추왕릉'을 찾아와 하소연을 하고 돌아갔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있다. 설화 속 주인공 역시 도깨비들이었을 게다.

경주는 노천박물관이다. 땅 속 몇 미터만 파도 오래된 유적의 기억들이 쏟아져 나온다. 혹시라도 호리병 속에 갇혀있던 천년 묵은 도깨비들의 봉인을 해제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품고 있는 월정교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품고 있는 월정교

◆경주는 사랑의 도시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국정토'를 만들고 거대한 탑을 세우고 석굴암을 조성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대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다에 묻어달라고 한 것을 기억하는가. 나라를 지키는 호국(護國)이었다.

월정교를 건너다가 물에 빠진 원효대사를 파계로 이끈 요석공주의 요염한 미소가 가을날 동화처럼 생각나는 경주다.

1천5백 년의 시간도 왕릉을 무너뜨리거나 없애지 않았고 파헤치고 도굴하지도 않았다. 중국이라면 왕조가 바뀔 때마다 왕릉은 파괴되거나 도굴되고 훼손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경주의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일제 식민지 때부터였다.

왕릉과 이웃한 황남동에 가면 6.25전쟁 때도 파괴되지 않은 낡은 게스트하우스가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문을 나서면 곧바로 고분을 산책할 수 있고 찻길만 건너면 황리단길에 들어설 수 있다. 경주에선 특별할 것이 없는 '능뷰'가 아름다운 한옥 루프탑카페에 가서 '스페셜티 커피'와 '마르가리따 피자' 혹은 '빠네 파스타'를 먹는 호사를 누리면서 한나절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경주가 주는 유혹이다.

이제 닥치는 대로(?) 떠도는 이야기와 땅 속 깊숙이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아내 우리가 아는 경주보다 더 '맛있는' 경주를 만나고 싶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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