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채(63) 에코프로 회장은 요즘 포항에서 최고 인싸(인사이더·주류)다. 열심히 벌어 넉넉하게 나누는 그의 행보 때문이다.
최근 태풍 힌남노로 포항이 피해를 입자, 100억원을 성금으로 턱 하니 내놨고, 과감한 투자를 계속하며 청년들을 포항으로 모으고 있다. SK이노베이션과 2024년부터 10조원대 계약을 맺는 등 생산하고 있는 양극재 소재가 국내 대기업으로부터 인정받으며 회사 가치가 크게 높아지자, 그는 이를 선순환 구조로 잇기 위해 투자와 지역 환원 활동을 더 몰아붙이고 있다.
이 회장은 "'에코프로에 입사하면 참으로 좋겠다'는 사람들의 소릴 듣는 게 사업을 하면서 평생 꿈으로 여겼다"고 한다. 실제 에코프로에 취업한 사람들 주변에서 이런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올해는 직원들이 더욱 사명감 있게 일하고 훌륭한 인재를 불러 모으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획기적인 사내 복지' 마련에 엄청난 돈을 투자할 계획이다. 공무원 연금 못지않는 직원들의 안정적인 퇴직연금이 그것인데, 이게 실현된다면 '에코프로에 입사하면 집안의 경사'라는 얘기가 절로 나올 듯하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다. 회장님을 궁금해하는 시민들이 많다. 개인사를 잠시 들려 달라.
▶1959년 포항시 남구 대송면에서 태어났다. 누나 하나에 여동생이 여섯인 딸 부잣집 외아들이다. 우리 시절에 대부분 그랬듯이 너무 가난해 빨리 자라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포항중학교를 마친 뒤 취업을 위해 대구상고로 진학했다. 형편이 어려워 친척집에 머물며 중학생 공부를 도와주는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은행원이 됐고, 야간대학(영남대학교)에 다니며 진급을 꿈꿨다.
그런데 야간대학을 졸업해도 고졸 입사이기 때문에 진급에 한계가 있다고 해 그만뒀다. 이후 삼성에 입사했지만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를 위해 사직했다. 공인회계사가 된 후 회계법인을 운영하다, 우연한 기회에 사업가로 변신했다.
▶공인회계사에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계기가 있었나
-쫄딱 망한 게 계기다. 친척이 하던 의류 사업을 인수했는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앞에 그대로 무너졌다. 고민했다. 왜 망했을까. 첫째 의류 사업을 잘 모르다 보니 경쟁력이 없었고, 둘째 모든 걸 혼자 다 하려고 했다. 그래서 세상에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찾아 경쟁력을 높이고, 유능한 동료들과 같이 의지하며 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차 뉴스에서 '교토의정서'를 접했다. 온실가스를 줄이자는 게 핵심인데, 이거다 싶었다. 이때부터 미친 듯이 공대 출신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상대 출신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경쟁력과 든든한 동료 확보'를 위해 카이스트 등 유능한 과학자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한마디로 '지식 구걸'이었는데, 그게 주효했다.
▶상대와 공대의 만남은 어땠나
-당최 공대생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화학 기호조차 하나 모르는 내가 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래서 열심히 들었다. 배우려고 눈을 반짝였다. 그들의 꿈을 신뢰했고 단어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정성이 통했던지 마음을 열어 직접 함께 일하기도 했고, 조언을 하며 동행하기도 했다. 인연이 20년 넘었지만 여전히 만나 그들에게 배운다. 그들이 있었기에, 1998년 꿈에 그리던 창업을 이뤘다. 물론 10평 남짓한 사무실에 직원은 1명이었지만 꿈을 일구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첫 사업, 그리고 기회는 언제 찾아왔는가
-2001년, 반도체 등에서 나오는 불산 등을 제거해 온실가스를 줄이는 국가 과제를 처음 실행했다. 돈은 안됐지만 가능성을 보았던 사업이었다. 무엇보다 과학자들과 소통하며 사업 영감을 얻고, 미래 회사 기술 개발에 도움 받을 많은 조력자들을 얻었다. 이 기간 흡착제 등을 팔며 사업을 유지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빌린 돈으로 버티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2004년 정부가 주도한 '미래성장동력-초고용량 리튬 2차 전기개발 컨소시엄'에 참가하면서 제일모직을 만나 기회를 얻게 됐다. 제일모직과 손잡으면서 전구체 사업을 시작했다.
기회는 위기에서 왔다. 2006년 제일모직이 반도체 사업에 집중한다며 돌연 양극재 사업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걸 쏟았는데 청천벽력이 이런 건가 싶었다. 당시 양극재는 노트북, 공구 등 수요가 한정적이어서 성장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양극재 시대는 올 것이라고 보면서도 언제 올지 자신할 수 없었다. '어차피 누구와 경쟁하지 않는 사업 분야를 개척하자는 마음으로 뛰어들었으니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제일모직 측과 협의를 거쳐 모든 양극재 기술과 영업권을 인수받았다. 이후 니켈과 양극소재, 전구체 등을 생산했지만 10년 가까이 수익은 좀체 나지 않았다. 50억원 적자가 나는 해도 있었다. 직원들도 포기하자고 할 만큼 절망적이었다.
▶기회는 어떻게 왔나
-일본 회사 '소니'가 우리를 살렸다. 2010년 전 만해도 소니의 배터리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으로 이름 높았다. 2차전지를 세계 최초로 양산한 기업도 소니다. 그런 소니가 이름도 없는 한국의 중소기업이 만든 소재를 가져다 쓴다는 소문이 나자, 대기업들이 손을 내밀었다.
2015년 첫 흑자를 올렸고, 양극재 소재 생산에 집중하며 2016년 1천억원을 달성했다. 이 시기 포항에 양극재 공장을 짓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현재는 20만톤(t)가량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포항이 16만t, 청주가 4만t이다. 매출은 올해 5조원을 내다보고 있다.
숫자만 보면 엄청난 성장인데, 우리는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빛 하나에 의지해 뚜벅뚜벅 걸었을 뿐이다. 그 빛은 포항이 줬다. 포항시가 공장 지을 때 도와줬고, 시민들이 우수한 인재를 공급했고 환영해줬다. 열심히 벌어 포항을 위해 내놓는 건 당연하다. 개인적으로도 고향 포항을 위해 뭔가 했다는 게 너무 기쁘다. 포항에 계시는 어머니도 흐뭇해하신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전기차 시대가 더 커질 것을 대비해 규모의 성장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포항 1천600명, 청주 1천200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직원 1만명 채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직원 1만명이 많아 보이겠지만, 양극재와 관련된 산업생태계 조성 계획이 본격화되면 저절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올해만 1조원 넘게 투자했다.
양극재 시장은 채굴, 원소재 생산, 가공 등 세계적으로 분업화돼 있는데, 이를 하나의 기업이 밸류체인(가치사슬)으로 만들어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폐배터리 리사이클부터 전구체 생산, 양극소재 제조, 2차전지용 고급소재 전환, 물류까지 모두 아우르는 세계 첫 원스톱 양극소재 생태계 조성을 반드시 이루겠다.
그렇게 되면 5년 내 세계 최고 양극재 전문 기업이 된다고 확신한다. 포항의 미래도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난 믿는다. 기업은 산업혁명 이후 본격화됐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발명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지역의 가치로 녹여야 한다.
직원들을 위해서는 '노후를 보장하는 퇴직연금과 미래를 확신할 수 있는 재무제표'를 주려한다. 확실한 보상은 노조 문제도, 이직도, 부정부패도 자랄 틈을 주지 않는다.
끝으로 이 회장에게 좌우명을 묻자, "따로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만, '선한 행동과 생각'을 많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직원, 신뢰, 포항'이다.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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