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기록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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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형 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임진형 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임진형 대구챔버페스트 대표

근대 서정시를 대표하는 김소월은 부재와 상실, 결핍 등을 노래한 시인으로서 짧은 삶이었지만 우리에게 긴 울림을 주고 있다. 그는 자연 친화적인 시를 추구하였지만 그 안에는 현실(성)이 깊이 스며들어 있어 더욱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연과 현실은 시의 두 축이다. 이를 소월은 특유의 정서와 비유-이미지, 리듬으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등 주옥같은 시가 들어 있는 시집 '진달래꽃'은 한국 근대시를 대표하는 텍스트이자 우리들의 연인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작품은 자유시라기보다는 동요-동시로서 널리 불려 왔다. 하지만 그 내용은 사실 가볍지가 않으며, 사랑과 죽음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기억과 기록이 그것이다. 앞뜰에는 가시적인 부동(성)의 금모래와 빛이, 뒷문 밖에는 비가시적인 유동(성)의 갈잎과 갈잎의 노래.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의 내면에는 슬픔이 깔려 있다. 맑은-투명한 슬픔이다. 일제 식민지하에 죽은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남긴 개인의 아픔이자 역사적 상처다. 그러니까 나도 죽어서 저승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함께 강변에서 살고 싶다, 라는 자기 고백이다. 이 시는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독립을 되찾은 지 77년이 지난 지금, 고인의 외증손녀인 소프라노 김상은의 목소리로 불려지고 있다.

매일같이 총알이 빗발치고 셀 수도 없이 터지는 탄환을 피해 한 소년이 지하에 숨어 있다. 그는 크로아티안 피아니스트 막심 므라비차.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1991~1995)이 발발했을 때 므라비차는 피아노를 공부하는 10대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전란 가운데서도 지하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며 음악 콩쿨에 출전해 수상을 한다. 이후, 므라비차는 피아노곡 '크로아티아 랩소디'를 발표하고 전 세계를 순회 연주하면서 크로아티아의 아픈 역사를 알린다. 이 곡은 내 나라를 지키고 되찾기 위한 투쟁의 산물이다. 전쟁으로 인해 잿더미로 변한 도시와 4년간 지하실 생활을 하며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므라비차의 아픈 상처이자 내면의 고백이다. 그리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한 크로아티아 민족성을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로 표현한 역사적 기록이다. 므라비차는 그때를 기억하며 말한다. "내가 살던 도시에는 매일 수천 개의 포탄이 터졌다. 그렇다고 사는 것을 포기할 순 없고,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이때 피아노는 나를 지탱시키는 유일한 것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저편 어딘가에는 가정과 나라를 잃고 전쟁 중이거나 난민의 신세로 전락해 유랑하는 이방인이 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국인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아도르노는 말한다. "더 이상 조국이 없는 사람에게는 글쓰기가 살아갈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아도르노의 글은 그의 조국이다. 예술에는 이렇듯 상실의 아픔을 달래고 알리며, 기억하는 힘이 있다. 이는 또한 예술가의 책무이자 사명이다. 예술이라는 몸짓으로 오늘을 기록하고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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