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사진을 보고 그린 애국지사 매천 황현 초상화

미술사 연구자

채용신(1850-1941), '황현 초상', 1911년(62세), 비단에 채색, 120.7×72.8㎝, 전남 순천시
채용신(1850-1941), '황현 초상', 1911년(62세), 비단에 채색, 120.7×72.8㎝, 전남 순천시

채용신이 1911년 5월에 그린 '황현 초상'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황현이 자결한 이듬해의 초상화다. 유례가 드문 순국이라 황현의 모습이 그려진 앞면에 감히 아무것도 써 넣지 못한 듯 뒷면에 날짜와 화가 이름이 있다.

초상화 제작은 모델을 직접 관찰해 그리는 도사(圖寫), 돌아가신 후의 추사(追寫), 어떤 본에 의거한 모사(模寫)가 있다. 채용신은 생전에 황현이 찍어 놓은 '사진에 임해서' 보고 그린 '임진(臨眞)'이라고 써놓았다. 15×10㎝ 크기의 작은 흑백사진을 가지고 채용신은 잊을 수 없는 강개한 눈초리의 황현을 120.7×72.8㎝ 크기의 대형 채색화로 그려냈다.

원래 사진 속 황현은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반신상인데 초상화는 정자관과 심의(深衣) 차림으로 그렸다. 오른손에 합죽선 부채를 든 것은 같지만 왼손에는 노란 표지에 붉은 실로 오침 선장한 우리나라 한적(韓籍)을 들었다. 황현의 친족과 유림의 숙의를 거쳐 모자와 의상, 가부좌를 하고 자리 위에 앉은 자세, 화문석의 문양, 안경과 양손의 지물 등이 이렇게 그려지도록 결정됐을 것이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집안의 기대를 모았고 20대에 상경해 10여년을 서울에서 보내며 당대 일류 문사(文士)인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과 사귀었다. 생원시에 합격하기도 했으나 소용돌이치는 한양을 떠나 구례로 낙향해 시대를 증언한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을 식자인(識字人)으로서, 재야의 역사가로서 우리에게 남겼다.

'황현 초상'은 채용신이 혼신의 정성을 기울여 최선의 재능을 발휘한 명작으로 꼽힌다. 당시 조선인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국망의 비통을 자신의 목숨으로 감당한 황현의 우국충정에 대한 감동이 그의 초상을 맡은 채용신을 더욱 숙연하게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채용신은 무과에 급제한 무관 출신이어서 망국에 부채감을 느꼈을 터이고, 1901년 고종의 어진을 그리며 지우를 받은 조선왕실과의 인연도 있었다.

'황현 초상'에서 황현이 쓴 안경, 손에 든 부채는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 제761-2호 '매천 황현 생활유물'로 등록됐다. 이 유물과 그림을 비교해 보면 채용신이 황현의 유품을 자세히 관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합죽선 부채는 모양은 유품과 똑같이 그리면서 색은 부자연스럽게 온통 흰색이다. 왜 흰색일까? 황현이 이미 순국한 후 그의 손때가 묻어있는 부채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애도의 색인 흰색으로 부채를 그린 것 같다. '황현 초상'을 그린 채용신과 이 초상화 제작의 주관자들은 이렇게 그림 속에 애도와 존경을 담아 놓았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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