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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 총독부 하급 관리 독립운동

안동·서산·영동 면장·면서기 만세운동 앞장

예안시위 『매일신보』 1919년 3월 20일 보도
예안시위 『매일신보』 1919년 3월 20일 보도

"…지금부터 전 한국의 황제 폐하는…이왕 전하라 칭하며…황족의 예우를 내리고 그 급료가 풍후(豐厚)함은 황위에 있을 때와 차이가 없을 것이다.…매우 충순하게 새 정치를 보좌한 현량(賢良)은 그 공로에 준하여 영예로운 작위를 수여하고, 또 은금(恩金)을 내리며 또 그 재능에 따라서 제국 관리나 혹은 중추원 의관(議官)의 반열에 세우고 혹은 중앙 또는 지방 관청의 직원에 등용케 하였다.…함부로 망상을 다하여 정무를 시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충성스런 몸가짐으로 삼가 법을 지키는 어진 선비와 순한 백성에 있어서는 반드시 황화(皇化)의 혜택을 입어 그 자손 또한 영구히 은혜를 입을 것이니, 그대들은 삼가 새로운 정치의 큰 계책을 받들어 진정 어긋남이 없게 할지어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총독은 유고문에서 협박과 함께 '갈라치기' 방침을 밝혔다. 옛 지배층은 회유했고, 백성에겐 순종을 명령한 그는 친일(親日)에 부일(附日)하면 살 것이요, 항일(抗日)에 반일(反日)하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공포했다.

일제는 왕족과 관료, 양반·사대부 등에게는 권력과 작위·관직, 돈으로 꾀었다. 그래선지 독립운동사에서 이들 기득권층 투쟁은 농업인과 상인 등에 비해 초라했다. 반면 총독부 조직 내 민중과 접촉이 잦은 면(面) 직원, 소사(사환), 경찰 등의 협조와 내응(內應) 사례는 여럿이고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남아 전하는 인물도 꽤 있다.

◆일제의 친일파 만들기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삼키자 9월 30일자로 한국인 옛 지배층 가운데 후작 6명과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의 명단을 확정하고 10월 7일 조선총독 관저에서 작위와 은사금(恩賜金)으로 돈도 줬다. 이완용 등 을사오적 등 매국노였다. 물론 작위를 받은 76명 중 유길준·한규설 등 8명은 작위(남작)와 은사금도 거절했다.

은사금은 모두 3,000만 원이었다. 지급 대상은 작위를 받은 옛 지배층 78명과 죽은 친일파 유족(14명), 한말 관리(3,638명), 양반·유생(12,115명), 효자 등 모범자(3,209명), 홀아비·과부·고아·홀몸의 환과고독자(鰥寡孤獨者) 70,903명이었다. 2,000만 한국인의 0.4%(89,956명)였지만 이들 몫은 42%(12,602,000원)나 됐다. 남은 돈 17,398,000원은 전국 13개 도(道)별로 나눠줬다.

일제는 또 친일파 부식을 위해 총독부 관리가 되는 길도 텄다. 주로 친일 관료의 길은 총독부 말단에서부터 군수(郡守)와 도(道) 단위 자문역인 참여관, 도장관(道長官·현 도지사),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들 고위관료 한국인 가운데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은 찾기 힘들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예안면서기 이병린
예안면서기 이병린

◆순사·소사·승강기 기사도 항일

경북 안동의 만세운동은 3월 13일 1인(이상동애족장) 시위부터 27일 풍남면 하회 집회까지 14차례 열려 1만여 명이 참석했다. 안동 19개 면의 11개 면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특히 안동면과 예안면 임동면 시위는 1,500~3,000여 명의 대규모였다.

예안면서기 이광호
예안면서기 이광호

3월 17일 1,500여 명이 모인 예안면 1차 시위는 신상면(애족장) 면장 중심의 거사 준비와 예산 유림의 조수인(애족장) 지도자 등의 준비, 만촌교회 교인 중심의 준비로 이뤄졌다. 특히 신상면 예안면장은 식민통치 행정기관인 면사무소에서 김창옥(애족장)·이광호(〃)·이중원(〃)·이남호(〃)·이병린(〃)·이해동(대통령표창) 면서기 등과 이시교(애국장) 잠업 순회교사와 거사를 꾸몄다. 이들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 계획을 세워 17일 장날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펼쳤고 일본 군경 진압대와 맞섰다. 신 명장은 징역 1년 6개월, 나머지 주동자도 징역 6월(이해동)~4년(이시교)의 옥고를 겪었으니 다른 지역의 많은 친일 면장·면서기와는 달랐다.

대호지면장 이인정
대호지면장 이인정

또한 충남 서산군 대호지면의 이인정(애족장) 면장은 면사무소의 송재만(〃) 사환(소사)과 김동운(대통령표창)·민재봉(애족장) 면서기, 주민 한운석(〃) 등과 함께 1919년 4월 4일 만세시위 계획을 짰다. 이 면장은 만세운동을 위해 '도로 수선'의 취지의 공문을 보냈고, 송재만 소사는 면내 8개 마을 구장이나 구장 대리의 집을 방문, 공문을 전하고 각 집마다 1명을 도로 수선을 위해 4월 4일 면사무소에 모일 것으로 요청했다. 주민 한운석은 군중들이 부를 애국가를 작사했고, 송재만 소사는 자신의 옷감용 광목(廣木)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4일 주민 400~500여 명이 모이자 이 면장은 "오늘 모인 것은 도로보수 부역공사가 아니라 독립만세시위를 위한 것이니 다 함께 참가하자"며 앞장섰고 행진하며 경찰주재소를 습격, 기물을 부수며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이 면장은 징역 1년형으로 옥고를 치렀다.

대호지면 사환 송재만
대호지면 사환 송재만

이들 가운데 송재만·이인정·한운석 3명은 올해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특히 면장의 지휘 아래 면서기, 사환, 주민 등이 역할을 나눠 시위를 벌였고, 지역 유생과 문중가문도 동참하면서 면내 모든 마을이 나서고 면계(面界)를 이동하며 원정독립운동을 펼친 점이 평가받았다. 또 1개 면민의 단일 독립운동으로 ①순국 3명 ②태형 88명 ③불기소 65명 ④면소 4명 ⑤징역 39명 등 199명이 탄압을 받아 ①대통령표창 83명 ②애족장 38명 ③애국장 3명 등 모두 124명이 서훈되는 기록도 세웠다.

순국 용덕면장 강제형
순국 용덕면장 강제형

이밖에 1913년까지 충북 영동군 영동면장 겸 영동군 12개면 협의소장, 금융조합을 지낸 이승구(애국장)는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정리해 중국에 망명했고, 경남 용덕면 전용선(애족장)최병규(〃) 면서기는 강제형(〃) 면장과 함께 3월 14일 만세시위를 벌였다. 강 면장은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고, 제주도 중문면 사무소 이기순 면서기는 항일 활동을 하다 1942년 옥중 순국하는 등 전국의 여러 면장과 면서기가 독립운동에 나섰다.

순국 중문면서기 이기순
순국 중문면서기 이기순

대구부 신암동의 정동석(애족장) 구장(區長)은 대구경북에서 군자금을 모으던 투사 송두환(애국장)을 도와 1920년 권총과 실탄을 은닉 보관하다 발각돼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다. 또 1937년 조선총독부 승강기 운전수인 최명근(애족장)은 총독부 내에서 일본제국주의 비판과 일제에 불만을 드러낸 글을 쓰다 1년 6월형을 받아 194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경주경찰서 도순사 이홍석
경주경찰서 도순사 이홍석

사법 분야에서는 유복영(애족장)이 입회 서기로 있다 만세운동 주동자를 일본 검사가 고문하자 이를 규탄, 검사의 뺨을 때리며 맞섰고 변호사가 되자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다. 또 경주경찰서 이홍석(애족장) 도순사(都巡査)는 애국지사 김창숙(대한민국장)을 돕던 정기수(미서훈)의 피신을 돕고 그의 중국 도항증을 주는 활동을 펴다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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