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도서관-영남대] 사림(士林)의 공론(公論) 형성 '서원통문'(書院通文)

이병훈 연구교수(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서원통문. 영남대 제공
서원통문. 영남대 제공

2019년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대구경북에서는 ▷영주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 ▷안동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현풍) 도동서원 등 5곳이 해당된다.

이들 서원에 제향된 안향, 이황, 류성용, 이언적, 김굉필 등은 조선시대 유현(儒賢)으로 칭송받던 유학자들이다. 보통 서원 제향 인물은 당대에 학식과 덕행이 높아서 영원토록 모범이 될 유학자를 뽑는다. 그러나 서원이 무분별하게 건립되면서 제향하는 인물을 선정하는 기준도 바뀌었다. 학식과 덕행보다는 자기 가문의 이름난 조상을 제향하려 애썼다. 하지만 제향 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은 형식적이라도 사림(士林)의 공통된 의견인 공론(公論)에 따른다는 기본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공론을 형성하는 데에는 '통문'(通文)이 사용되었다. 통문은 민간단체나 개인이 기관이나 관계가 있는 인사 등에게 어떤 일을 알리거나 추진하기 위하여 보내는 문서이다. 서원에서 제향 인물을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에 통문을 통해 이해관계에 있는 단체나 기관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이 때 동의를 얻는 곳의 지역적 범위와 사회적 위상에 따라서 공론의 공신력에서도 차이가 났다.

그래서 안건을 발의하는 단계부터 위상이 높은 서원이나 가문에 의뢰하기도 했다. 이들의 영향력에 기대어 보다 많은 기관과 단체의 동의를 얻고, 나아가 서원 건립과 운영에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반대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 때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해가는 과정에서도 통문이 사용되었다.

영남대 중앙도서관에는 필사본 '서원통문'이 소장되어 있다. 서원통문은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1538~1571)의 서원 제향을 위한 공론의 취합 과정에서 만들어진 통문들을 날짜순으로 옮겨 적은 것이다. 류중엄은 퇴계 이황의 문인 가운데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자(顔子)에 비유되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17세기부터 그를 서원에 제향하는 데에는 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러나 건립 비용과 서원 건립을 금지하는 조정의 법령으로 모두 실패하였다. 결국 류중엄은 1808년(순조 8)에야 비로소 손홍량(孫洪亮)과 김자수(金自粹)를 제향한 타양서원(陀陽書院)에 추가로 제향되었다.

서원통문은 1805년(순조 5)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예안의 사림들이 류중엄의 제향 논의를 다시 제기했을 때부터 1808년(순조 8) 타양서원에 추가로 제향된 후 이를 반대하는 손홍량, 김자수 후손들을 설득하는 과정까지를 확인할 수 있다.

1805년(순조 5)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안동의 사림들은 당초 류중엄의 동문이었던 남치리(南致利·1543~1580)를 제향한 노림서원(魯林書院)에 함께 제향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당시 도내의 사림들도 모두 동의하였지만, 위패를 놓는 자리 문제로 실패하였다.

그래서 1808년(순조 8) 다시 공론을 형성해 타양서원에 제향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미 제향하고 있던 손홍량, 김자수의 후손들 가운데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가문들이 반대하였다. 비록 류중엄의 제향이 마무리된 시점이지만 작은 흠도 만들지 않기 위하여 안동과 예안지역 사림들은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통해 후손들을 계속 설득하였다.

오늘날에도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사안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청취하는 과정이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여론을 취합해 의견을 조정하는 과정이 일반적으로 진행되었다. 이해 당사자들의 불만을 수렴하고 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노력하였다.

이병훈 연구교수(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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