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너라는 꽃

박채현 동화작가

박채현 동화작가
박채현 동화작가

뒷산에 가을이 한창이다. 툭,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에 나만 가슴 설렌 게 아닌가 보다. 청서가 달려와 냉큼 물고 달아난다. 모롱이를 지나니 참나리는 간 곳이 없고 구절초가 피어 방싯대며 웃는다. 나는 놀라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지는데, 별일 아니라는 듯 딱따구리는 나무만 쪼아댄다.

꽃은 거저 피지 않는다. 구절초는 이 가을에 피려고 지난 겨울부터 노력했을 터이다. 꽁꽁 언 땅속에서 겨울을 나고, 샛바람에 연한 잎을 단련하고, 한여름 목마름을 수차례 견뎌야 비로소 구절초의 계절이 돌아온다. 봄에 개나리가 피려면 혹독한 겨울날이 필요하고, 뙤약볕이 쌓여야 접시꽃이 핀다. 좋은 시절 다 두고 추운 겨울에 꽃피우는 수선화도 제 나름의 이유가 있다.

D고등학교에 보건교사로 근무할 때다. 한 학생이 수업 도중에 보건실로 달려왔다. 학생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울먹였다. "선생님, 이생폭망이에요." 열일곱 살 아이의 '이번 생이 폭삭 망'했다니. 밤새워 공부했건만 성적이 오히려 내려갔단다. 수재들만 모인 학교이다 보니 몇 배 노력해도 티가 나지 않아 절망스럽다는 말이다.

경쟁 사회에서 상대적인 평가를 피할 수는 없다. 성적은 노력의 대가이니 겸허히 받아들일밖에. 그렇다고 밤새워 쌓은 지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인생이 폭삭 망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단지 상대적인 줄 세우기에 밀렸을 뿐이다.

꽃에 '상대적'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봄에 핀 꽃에 승자라거나 겨울에 핀 꽃에 패배했다고 하지 않듯이. 개나리는 봄에 노랗게 피어 예쁘고, 동백은 겨울에 빨갛게 피어 곱다. 꽃송이가 크든 작든, 꽃잎이 빨갛든 노랗든, 봄에 피든 겨울에 피든, 꽃은 다 아름답다.

꽃은 절망하지 않는다. 피어난 자리를 불평하지 않고, 비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비바람에 흔들리고, 쓰러지고, 꺾였다가도 다시금 줄기를 곧추세운다. 키가 작거나 송아리가 성글어도 오롯이 제 모습으로 피어나려 부단히 애를 쓴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기답게 피어난 자체로 꽃은 대견하다.

우리네 삶도 꽃과 같다. 비탈지고 메마른 환경에 태어나기도 하고, 시련에 흔들리고 꺾일 때도 있다. 비를 맞고 시름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도 꿋꿋이 이겨내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우리는 모두 꽃이다. 가족을 위해 종일 도로 위를 누비는 배달원, 새벽잠 설치며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버스 기사, 소방관, 간호사, 요리사, 경찰관, 교사, 미용사…. 세상에는 알뜰살뜰한 사람꽃이 다채롭게 피어난다.

아들아이가 예술고 입시를 앞두고 하루에 12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성적 앞에서 늘 고개 숙이던 아이다. 공부에 몰두하지 못해도 그림은 끈질기게 그려낸다. 살뜰히 살아낸 하루하루가 모이면 꽃피울 계절이 오리라 믿는다.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너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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