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코로나19와 마주치기' - 이주희

이주희
이주희

6학년 5반에 진급하면서 "나이를 맛있게 먹자!"는 좌우명으로 살기로 했다. 잘 나가는 듯 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코로나19>는 내 평생에 1년 반을 칩거하게 만들었다. 내 노년의 꿈을 앗아가는 동시에 7학년에 편입시켜 버렸다. 초기 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메르스'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어부부하는 사이에 온 세계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19>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고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을 옥죄며, 생명을 노리고 있다. 나이를 맛있게 먹으려 다짐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그 원하지 않았던 박탈감을 이 기회에 토로하고 싶다.

〈시니어 기자〉

10년 전 6학년에 진입하면서 1모작을 불만족스럽게 끝내고, 2모작은 모 연수원을 위탁받아 성공적(?)으로 운영하다가 5년 만에 퇴직했다. 쌈박한 3모작 꺼리를 헌팅 하고 싶었다. 전공 관련 월간 잡지사의 책임자로 초빙을 제의 받았지만 휴대폰이 잡지를 밀어내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그쪽에서 기대하는 것과 나의 역량에 비추어 볼 때 거리감이 느껴져 고사했다.

인터넷을 밤낮으로 서핑 한 결과 은퇴한 사람들의 활동영역은 생각보다는 좁지는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 같은 이른바 어르신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영역은 취미활동, 학습활동, 봉사활동, 자유여행, 용돈 벌기 등을 확인하였다. 분석 끝에 일단 '부부동반 자유여행'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중국어를, 아내는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결국 2년만인 6학년 7반과 8반인 2018~19년에 걸쳐 중국 자유여행을 부부동반으로 30일씩 네 번 다녀왔다. 나름 뿌듯했고 다양한 자연자원과 문화유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성취감에 도취된 나머지 6학년 9반이 되는 2020년에, 두 번 더 중국 자유여행하면 명실상부한 중국여행 통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친김에 중국여행 경험과 에피소드를 책으로 엮어 7학년 기념으로 출판할 생각을 마음먹고 있었는데 느닷없는 <코로나19>가 우리 부부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붙들지 못하고 누에고치처럼 칩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맛없는 나이만 마시고 먹느라고, 그동안 꼬박꼬박 모아놓은 자유여행비를 야금야금 까먹고 있을 뿐이었다.

6학년7반 그러니까 2018년 연초. 3모작으로 '배낭 여비라도 벌자'는 영양가가 넘치는 생각이 나를 부추겼다.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여 터득한 나만의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배낭여행을 떠날 여비를 벌어 저축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 아니랴!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거리를 찾으러 인터넷에서 5대양 6대주를 걷고 헤엄치며 누볐다.

그 과정에서 XX구 문화원에서 '시니어 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내 눈에 포착되었다. 기자란 기사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거리의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누군가 내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책 읽기와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책읽기'라는 선행투자를 통해서 여물게 된 나의 '글쓰기' 취미는 나에 대한 아내의 불만 사항 1호로 찍혀 있다. 눈뜨고 숨 쉬는 시간의 3분의 1 이상을 글쓰기에 매달려 살아왔기 때문이다. 원고 청탁을 받으면 결코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메뚜기도 한 철'이듯, '원고 수탁도 한 철'이라고 생각했다. 직장 생활을 국책연구원에서 시작하여 교수로 직장을 퇴직할 때까지 반평생을 '원고의 노예'로 살았다. 내가 쓴 원고들을 한 장씩 한 줄로 이어 간다면 몇 킬로쯤 될까? 저작물의 총 쪽수로 벽돌 쌓기를 한다면 내 키를 훌쩍 넘을 것 같아서 흐뭇하기도 하지만, 이 풍진 세상에 적잖은 쓰레기를 보탠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다.

지난 40년을 '원고의 노예'로 지내다 보니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즐거움이나 여유로움 따위와는 담을 쌓고 살아야 했다. 방학 때마다 한 달 이상 배낭여행을 나가는 역마살이 낀 아내가 수차 동반 배낭여행을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밀린 청탁이나 용역 원고 때문에 '딴죽'을 걸고 방콕하면서 원고 채우기에 매진했다. 아내는 나더러 글쓰기를 포기하고 '아내의 노예'로 변신해주기를 주문했지만 얼렁뚱땅 아내의 소망을 팽개치는 상습범이 되고 말았다.

"미안해 여보야! 이번만 친구랑 배낭여행을 다녀와요. 요다음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같이 여행 갈게"

아내에게 '여행 약속어음'을 발행하고 그때마다 부도를 내니 아내는 나를 '신용불량자'의 빨강 딱지를 붙여버렸다. 나는 학계에서 수여하는 논문상과 저작상과 공로상등 몇몇 개의 상을 수상할 수 있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들 시상식장에서 수상 소감을 피력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을 품은 헌사(獻詞)를 잊지 않았다. 책을 펴낼 때는 서문에서 여느 작가들처럼 아내에게 사사문(謝辭文)을 한 줄 끼워 넣어 아내를 위로했다.

"…이 자리를 빌려 나를 '원고의 노예'로 방치해준 아내에게 무한 감사드린다."든가,

"…이 책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친다."는 등등.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나에게 면죄부를 주기는커녕 바가지가 넘치는 핀잔과 야유를 쏟아냈다.

"피~ 맨날 똑같은 소리! 진심이라면 제발 자기가 쓴 책을 나에게만은 바치지 말아요! 잘 팔리지도 않는 당신의 책들은 우리 부부를 이간시키는 애물단지에 불과하거든요. 내가 원하는 것은 앞으로 당신이 '원고의 노예' 말고 '아내의 노예'로 살았으면 정말 좋겠어요."

아내의 가슴에는 분서갱유의 진시황 마귀가 씌웠는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자치구에서 개최되는 문화행사를 취재해서 계간인 문화원 기관지와 월간인 자치구청 홍보신문에 싣는 일이 '시니어 기자'의 할 일이란다. 시니어 기자가 되고 싶은 어르신은 ① XX문화원 지원서(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② 이력서 ④ 경력증명서 ⑤ 자기소개서 ⑥ 문화예술 관련 기획 콘텐츠(기사 또는 영상제작 1편) ⑦ 에세이 1편(A4 2매 내외, 기 발표된 원고도 무방함)을 제출하라고 알렸다. 기자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까다롭고 복잡한 조건을 내거는 것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제출서류에 국세 및 지방세 완납증명서나 지도교수 추천서까지 요구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3일 동안 공고문에 나열한 제출서류를 모으고 작성했다. 글쓰기가 취미이고 전공에 관련된 3개 잡지에 편집위원을 역임한 경력에다 그동안 쓴 글의 목록을 제시하고, 응모 동기를 거창하게 작문했지만, 자기소개서는 격식을 파괴하여 다음과 같이 세 문장으로 작성하여 제출했다.

"어르신이라는 소리 안 듣고 싶어 입은 닫고 귀를 열고 살다보니, 눈칫밥과 나이만 맛도 모른 채 포식하고 지냅니다. 맥락 없는 자기 자랑, 잇단 실수의 방패로 쓰곤 했던 나이 타령, 과도한 건강 염려 따위는 화제로 삼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건망증 때문에 자주 탈선합니다. 올해 중국으로 두 달간 부부 배낭여행을 준비하며 여비를 마련하는 길을 찾고 있는 천하제일의 백수랍니다."

꿩 먹고 알 먹는 <시니어 기자>라는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나에게 <시니어 기자>라는 지식 산업의 역군으로 기회를 준다면 천만다행이었다. 설령 기회를 안 준다 해도 아내와 나 사이에 식어버린 애정을 데우기 위해서 '부부동반 배낭여행'을 떠나면 된다는 배수진을 치고 응모했다. 3일 후에 이 메일로 서류심사 합격통지와 함께 면접시험 시간과 장소를 통보해왔다. 30년 만에 모처럼 받아보는 1차 서류심사 합격 통지라서 마음이 뿌듯했다.

면접장 대기실에는 시간에 맞추어 나온 응모자는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었다. 어르신 여사 한 명과 노신사와 나. 세 명을 뽑는데 세 명의 응모자가 서류심사에 합격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전원 합격인 모집에 응모서류를 너무 진지하게 작성한 내가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통성명하고 악수를 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을 간보기 시작했다. 앞에 앉은 할매와 할배는 이미 이 방면에 이력이 화려하고 빠삭한 사람들 같았다. 내가 이들과 함께 장돌뱅이 대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왠지 켕기기도 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그 시간대에 참석한 후보가 세 명일 뿐이고, 전체적으로는 21명을 시간대 별로 분산시켜 면접을 보게 배려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무려 다섯 명의 면접관이 '시니어 기자직' 나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들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지… 명패에 신분을 밝혀 투명성을 강조하려는 조치가 아닐까 싶어 퍽이나 이채롭다. 세 사람은 문화예술 관련 교수들로서 나랑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매스컴을 자주 타는 유명 인사들이었다. 6학년 8반까지 이 지역에서 40여년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나를 알아보는 면접관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면접은 5년 전에 모 정당의 중앙당사에서 면접관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한 국회의원 후보 공천 심사를 위한 면접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자기소개 1분, 지원동기 30초,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예상문제였지만 응모서류에 기재되어 있는 사항을 묻는 것은 결례가 아닌가? 5학년생들이 6학년생 어르신께 질문의 화살을 거침없이 쏘아대기 시작했다.

일등 자치구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를 골탕 먹이려는 질문이라고 면접관에게 내 본성이 감추지 못하고 일침을 놓을까 말까? 자치구 문화원장에 응모한 사람들에게나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냐고 따질 뻔 했다. 서울역 노숙자에게 왜 소주를 안마시고 맥주를 마시냐며 시비를 거는 것만큼이나 맥락 없는 질문 아닌가? 나는 문화원장을 응모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다만, 시니어 기자로 뽑아주면 구청이나 문화원이 펼치는 문화·예술 사업에 대한 뉴스나 리뷰를 구민들에게 정직하게 전달하는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15분간 면접은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며칠 후 위촉식장에서 예쁘고 경륜이 넘쳐 보이는 여자 문화원장은 우리 세 사람에게 서류심사까지 포함하여 70대 1의 경쟁을 물리친 어르신들을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라고 말했다. 위촉장을 건네주고는 차례차례 카메라를 향하여 포즈를 취하는 순서로 진행했다. 사무국 직원들은 기자증과 명함, 기자가 할 일을 메모한 서류가 들어 있는 봉투를 세 사람의 '시니어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문화예술회관 공연 관람에 자동으로 초대되는 특전과 구내식당을 유료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 등등. 앞으로 1년간 기자로 재직할 수 있으며 성과가 좋으면 1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특전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공간, 즉, 기자실이 따로 없으니 재택근무를 하면서 기사를 쓰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실망 모드로 추락하고 말았다. 사무실도 없는 일 년짜리 '시니어 기자'를 뽑는데 요구하는 방대한 서류를 준비하고 까다로운 면접 절차를 꼬박꼬박 성실하게 대응한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재택근무자를 뽑는 일련의 절차와 격식이 너무 관료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기에 은퇴 달인들이 나에게 간접적으로 이르지 않았던가?

'과거를 잊지 못하겠거든 미래를 포기하라!'고.

씁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나를 아내는 더욱 쑥스럽게 만들었다.

"축하해요. 이제 아침마다 어디론가 출근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임기가 1년인 기자로 위촉된 지 2개월 가까이 재택근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재하라는 지시가 없어 나를 맥 빠지게 만들었다. 월급 받아먹기가 좀 미안하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사무국 직원 말에 의하면 월급은 따로 없고 기사를 쓰면 나오는 원고료가 '보수'라는 설명이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 왔던 관행 때문에 e메일으로라도 모종의 명령이 내려오겠지 싶어 매일매일 메일을 체크해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위촉장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자치구 양재천변에서 열리는 'XX천 벚꽃 축제'를 취재하라고? 기자 3명이 회의한 결과 나는 음악계의 유명가수들이 출연하는 개막공연, 야외조각전, 이트 플리 마켓(Eat flea market)과 에코(Eco) 등(燈) 터널 현장에서 취재하기로 일을 분장했다. 축제기간 6일중 4일을 현장에서 취재하여 A4 용지 한 장짜리, 2백 자 원고지 5장정도 기사를 써서 e메일로 사무국으로 보냈다.

내가 작성한 기사가 엄지 손톱만한 프로필 사진과 함께 기관지에 실리고 원고료를 지급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원고료는 1편당 2만 원인데 원고 량이 2백 자 원고지 다섯 장이 넘을 때에는 1만 원을 보너스를 얹어서 3만 원이 입금된다고 했다. 돈 때문에 '시니어 기자'에 응모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예의일지 모르지만 내 자존심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원고료가 실비에도 목 미치는 적은 액수라서 분노가 머리끝을 향해 치솟았다. 나흘간 취재해서 공들여 쓴 기사의 원고료가 고작 3만 원이라니 나 자신이 불쌍하고 너무 처량했다. 도랑만 치고 가재는 한 마리도 못 잡은 사례일 것 같았다. 이렇게 싼 원고료를 일찍이 받아 본 적이 없어 너무 실망한 나머지 원고료를 사양하고 말았다. 사무원은 그 예산을 집행해야 된다며 통장번호를 알려달라고 채근했지만 무시하고, 대신에 기자직 사퇴서를 작성해서 e메일로 제출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시니어 기자' 직책을 수행할 수 없어서 이에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동료인 두 시니어 기자는 서울시 산하 25개 구청이 똑같이 이런 대접을 한다면서 이런 자리라도 여러 군데 위촉을 받으면 용돈이 보충 된다며 나의 사직을 말렸지만 따르지 않았다. <시니어 기자> 일자리를 구청별로 세 명씩 위촉했다고 가정한다면, 3인*25개 자치구=75명의 '노인 일자리 창출'라는 거룩한 이름의 실적으로 계산될 것 같아서 싫었다. 허울 좋은 <시니어 기자>라는 직함에 대한 사직서는 이 땅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오기'이자 '저항'이었다.

결론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산 경험이었다.

〈지뢰 발견〉

<코로나19> 때문에 아내는 지난 30년 동안 계속해 왔던 매일 아침 '에어로빅 운동'을 일시 정지하게 되었다. 나 역시도 지난 20년간 실내 체육관에서 매일 저녁 두세 시간 즐기던 배드민턴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코로나19> 때문에 해외여행을 나가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떠날 배낭여행에 필요한 체력을 다지는 기회로 활용하기로 의기가 투합 되었다. 아내의 버킷리스트에는 5년 전부터 '산티아고 가는 길'을 한 달 간 여행하려는 프로젝트가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체력을 단련해 두겠다는 각오를 했다. 나 또한 세계 제일의 '계단의 나라' 중국에서 배낭여행을 다시 하려면 이 기회에 걷기를 달인의 경지까지 올려놔야 할 사명 때문에 <코로나19>와 마주치는 기회가 많았다.

아내에게 걷기는 이미 신앙이 되었다. '걷기'는 사람의 신체구조와 뇌신경 기능상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포괄적인 활동'일 것이다. 홀로 걷기는 단순한 운동이나 자극이 아니라 모처럼 사색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함께 걷기는 가까운 가족이나 벗과 함께 나누는 따뜻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내는 당차게 선언하고 실천에 들어갔다.

"나는 아침부터 걷는다. 고로 나의 저녁이 존재한다."

휴대폰에서 걷기가 취미인 사람들이 회원으로 등록한 앱에서 자동적으로 집계한 수치를 보면 아내는 전국 120만 명의 회원 중에서 상위 1% 수준에 들어갔다고 기염을 토했다. 아내의 건각(健脚)은 이미 중국 배낭여행 때 그 자질과 역량이 증명되고도 남았다. 그 때 나는 6학년 8반, 아내는 6학년 4반이었는데 한 달 씩 네 번 135일 동안 하루 평균 2만3천보를 걸어 다닌 눈부신 실적을 기록했다. 아내를 따라 다녀야 했던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걷는 코스는 서울 강남의 병풍이라고 할 수 있는 우면산의 둘레길이다. 트레킹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코로나19> 비상사태에 마스크를 안 쓰고 숲속을 자유롭게 누비며 마스크 쓴 사람을 비웃으며 지나가는 트럼프 족, 마스크를 턱에 걸치면 일단 정부 방침에 협조했다고 생각하며 제멋대로 살고 싶은 꼰대들, 5인 이상 몰려다니면서 중국 단체 관광객들처럼 떠들어 대는 띵하오 족,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기침을 하면서 영역을 표시하고 다니는 보우소나루(브라질 대통령)족들과 수시로 마주친다. 주말이면 우리 부부는 친구인 두 부부들과 더불어 트레킹 하는데 우면산 둘레길에는 사람들이 꽤나 몰렸다. <코로나19>의 공격을 피해서 '집콕' 하던 사람들이 주말에 산이나 들로 몰려나오기 때문이다. 트래킹 족이 잘 다니지 않는 샛길을 찾아 걷자는데 일행은 전원 동의 했다. 우리가 선택한 샛길은 우면산의 중턱에 보일 듯 말 듯 감추어진 멋진 오솔길이었다.

우면산에는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그 주변이 군사시설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오솔길조차 차단된 곳이 많다. 부대 주변에는 일 년 반 동안 지뢰제거 작전 중이라는 현판이 놓여 있고, 둘레길목 곳곳에 게양된 현수막에는 '지뢰를 발견하면 인근 부대나 경찰서에 신고하라'고 쓰여 있다. 샛길로 접어들어 10여분 만에 오르막 비탈에서 우연찮게 지뢰 유사물체가 내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그 물체를 손으로 건드려보다가 제풀에 놀라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했다. 지축이 흔들리는 듯, 하늘이 노랗게 변하면서 온몸에 전율이 물결쳤다. 겁도 없이 흙과 낙엽으로 덮인 부분을 살짝 사려낸 뒤 일행들에게 확인시킨 결과 '지뢰'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일행 여섯 명중 반은 군대 근처도 가보지 못한 여사님들이고, 그녀들의 남편 둘은 방위 출신이다. 나 현역 때 '방위가 군인이라면 파리도 새' 라고 저들을 놀렸었다. 일행 여섯 중에 나만 홀로 현역으로 군에 다녀온 남아였기 때문에 일생들의 다수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군악대 출신인 나는 군악대에서 악기만 열심히 닦았기 때문에 지뢰라는 실물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사실이 그렇지만 지뢰 비슷한 물체가 땅에 뿌리를 박은 채 머리만 약간 들어내 보여 주고 있는 상태에서 저것이 지뢰가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의 정신 상태를 감정해야 할 것 같았다. '붕어빵은 붕어가 먹는 빵이다' 라거나 '칼수제비는 수제비가 아니다' 라고 우겨도 할 말이 없다. 만약에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 지뢰를 밟아버렸다면 우리 일행은 어찌 되었을까? 9학년2반인 양친이나 MZ 세대인 두 아들은 7학년도 되기 전에 지구를 떠나버린 나의 죽음을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보호하사 오늘은 목숨을 부지한 날! 나의 공화국의 국경일로 지정해야 될 것 같았다.

지뢰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거나 팔다리를 떨어져 나가게 한다는 사실은 17년 전 1모작 직장에서 캄보디아에 출장을 가서 그 참상을 일찍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캄보디아 내전 때 매설된 불발된 지뢰로 인한 사상자는 6만 5천 명이나 된다고 들었다. 그때 프놈펜에는 지뢰 피해자들, 한쪽 팔다리가 잘려나거나, 양쪽 다 없거나, 하반신이 잘려 나간 사람들이 시내 곳곳에서 구걸을 하는 모습이 뇌리에서 재생되면서 현기증이 넘쳐났었지. 사지가 멀쩡한 나는 엄청 행복한 족속이라는 사실을 그때 확인하지 않았던가?

등산로 길섶에 지뢰가 뿌리는 땅속에 감추고,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었다. 막상 지뢰 발견을 신고하려니까 아내가 말렸다. 지뢰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지뢰라면 진작 발견되고도 남았을 것이라며. 우면산을 찾는 시민들이 하루에도 수 백 명이고, 이 길을 다니는 사람이 우리뿐이 아닌데 그들 눈에 여태까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괜히 신고했다가 오라 가라, 따따부따 하면 귀찮으니까, 신고하지 말라고… 전직 공직자인 나의 신고 정신이 아내의 말림으로 빛을 바래게 할 수는 없었다. 둘레길목에 군부대가 걸어놓은 현수막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고전화를 받는 저쪽은 우면산 정상에 주둔한 공군부대였다. 지뢰 제거는 육군에서 파견대가 담당한다는데 주말이라서 출근하지 않았다며, 요즈음 <코로나19> 때문에 외출이 통제되기 때문에 즉각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어쨌든 신고전화를 접수하여 그들이 연락드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현장에 비닐 새끼 끈으로 줄을 쳐서 이 길을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접근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고 산을 내려왔다.

월요일 오전까지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시민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이 어디 있다고?! 관계기관에서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못 마땅해서 구청 공원과에 다시 신고를 했다. 그쪽 담당자의 대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산속에 있는 지뢰의 위치를 바로 알 수 있도록 지형지물 배경 사진을 찍어, 우면산 지도 위에 지뢰 유사물의 위치를 표시한 뒤에 다시 사진을 찍어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잠시 후 구청에서 군부대로 연락했는지 신상 불명의 군인이 전화를 걸어와 나더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질문을 퍼부었다. 이어지는 질문들이 나를 피곤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이 전화번호는 당신 거 맞느냐? 언제 어디서 그 물체를 발견했느냐? 신고자님이 사는 곳은 어디냐? 뭐 하러 그 길로 등산을 했느냐? 둘레길 아닌 다른 길로 다니면 매설된 지뢰 때문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데 그런 길을 다니면 안 된다고 훈계까지 끼워 넣었을 때 문제의 본질과는 괴리된 질문이라서 언짢음을 이겨 바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질문하는 내용은 이미 구청에 죄다 알려 주었는데 다시 반복해서 질문하는 이유가 뭔가요?"

휴대폰에서 그 대답이 어정쩡하게 흘러나왔다.

"보이스 피싱이나 허위 신고가 아닌지 확인하는 중입니다요."

신고한 지 3일 만에 대응하는 당국의 답변치고는 할배 개그 수준이었다. 그 후에 파출소 순경과 공군부대 장교라며 또다시 6하 원칙에 따른 질문을 쏟아내려는 기미를 보여 구청에 내가 접수한 정보를 이용하라고 전화를 끊었다. 신고하지 말라던 아내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셈이었다. 지뢰를 제거하는데 사실관계를 파악해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으로 전화로 확인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더 이상 전화가 안 오겠지 싶었는데 또 한 번 신호음이 울렸다. 육군 소속 지뢰제거 담당 소대장이란다.

"선생님 보내주신 사진만으로 판별하자면 우리들이 찾고 있는 '대인지뢰'는 아닌 것이 분명하고, 저희 판단으로는 '대전차지뢰'로 보입니다요. 지금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가능하면 둘레길 초입에서 만나서 동행해 주실 수 없을까요?"

"내 나이 70이라 다시 산에 올라가기 싫어서 사진 6장을 찍어 보냈으니 이것만 가지고도 지뢰 위치를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산에 올라가서 찾아보고 못 찾으면 어르신께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반시간 후에 전화가 육군 부대로부터 걸려왔다.

"어르신께서 신고해 주신 지뢰 유사 물체를 찾아서 저희가 발굴했는데요. 땅에 묻힌 물체는 대인지뢰도 대전차지뢰도 아니고요. 코펠 뚜껑이 흙과 낙엽 속에 반 이상이나 묻혀있어서 겉으로 보기에 '대전차지뢰'처럼 보였던 것입니다요."

통화를 끝낸 후에 자기들이 발굴한 코펠 뚜껑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내 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내가 지뢰가 아니라고 했잖아!"

아내는 군대도 갔다 오지 않았는데도 지뢰가 아닌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신고하지 말라고 말릴 때 내 말을 들어야죠. 아내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는 속담도 몰라요?"

앞으로는 아내 말을 금과옥조로 잘 새겨들어 자다가 떡을 얻어먹기로 했다.

〈장모님 고이 잠드소서〉

장모님은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5년간 무의식 속에서 병마와 싸우다가 <코로나19> 와중에 세상을 떠나시어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나 아들딸들에게도 마지막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5년의 침묵을 유지한 채로 세상을 떠나셨다.

5년 전, 아내가 직장 은퇴 기념으로 백 일간 남미 배낭여행 중일 때 장모님은 어느 날 저녁 TV 연속극을 보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 불명 상태가 되고 말았다. 119 응급 앰뷸런스로 당직 전문의가 없어서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다가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때늦은 뇌수술을 받았다. 장모님의 의식불명은 뇌실내출혈 때문이었다. 뇌실내출혈은 뇌의 탈장이 숨골을 압박하여 호흡장애가 생겨 의식을 잃는 병이라고 한다. 병원은 뇌실내출혈인 장모님의 뇌 안의 압력을 신속히 낮추기 위하여 머리를 열어 혈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뇌수술을 한 이후에도 의식이 회복되지 않아 인공호흡기를 달았지만 가래 때문에 산소 호흡량이 부족하게 되므로, 목에 1, 2센티 생 구멍을 내서 그곳을 통해 관을 삽입해서 산소를 공급하였다. 출혈이 발생한 좌뇌 쪽이 아닌 우뇌 쪽에서 두개골 바로 안쪽에 물이 차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이를 방치하면 뇌압이 증가하게 되므로, 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까지 했다. 그러저러한 여러 차례의 수술이 장모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되고 진행되었다.

장모님의 의식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간 여유가 있는 두 딸과 친손자와 외손자, 그리고 며느리가 교대로 간병에 필요한 일들을 휴대폰 문자를 주고받으며 공유했다. 간병을 하는 식구들은 무의식 상태인 장모님에게 하루에 물 1.5L를 주사기로 주입하여 탈수를 막았다. 아침 8시, 점심 13시, 저녁 18시에 농도가 낮은 묽은 미음을 호스로 통해 주입하고 뒤처리를 했다. 복용 약은 물과 섞어서 하루 3회 투여했으며 소변 배출량을 매 시간마다 기록하고 소변주머니가 다 채워지면 통으로 옮겨서 화장실에다 버렸다. 대변은 환자가 매일 자의적으로 배설할 수 없어서 간호사가 관장을 실시했다. 몸에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2시간마다 체위를 <왼쪽 → 오른쪽 → 똑바로> 변경해 주어야 했다. 매일 환자를 재활치료실로 이동하여 치료를 받고 10시 30분~11시에 머리를 가눌 수 있는 휠체어에 태워 병원 구내를 산책시켜야 했다. 가래가 생기면 2시간마다 썩션(suction)을 해서 제거해 주어야 했다.

장모님이 병원에 입원한 지 3개월이 지나도록 의식은 돌아오지 않아 식물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했다.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배가 고파도 배고프다는 말을 입으로 못 하고, 눈을 감은 채 숨만 내쉬며 살았다. 최초 수술이 있은 후 한 달 만에 남미 배낭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는 엄마와 한마디의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실상을 접하고 대성통곡했다. 몇 달 동안 수차에 걸쳐 소통을 시도한 끝에 아내는 엄마가 자기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아내가 엄마에게 숨을 크게 쉬라면 크게 쉰다면서. 나름 집중해서 관찰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았지만 아내에게 아니라고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4년간 자손들과 간병인의 돌봄을 받았지만 조금의 차도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5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계신 장모님께도 <코로나19>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감염을 피하기 위해서 가족들의 면회가 전면 금지되었다. 장모님의 병세는 매일 담당 간호사를 통해서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10개월 동안 면회도 가지 못한 채 <코로나19>가 끝나기를 희망했지만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 장모님이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그날 장모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지난 5년 동안의 투병과 간병의 보람도 없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셨다.

40년 전 처음으로 장모님을 뵙던 날. 장모님과 나는 신경전과 설전을 벌여야 했다. 장모님은 나를 퍽이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예비 장모님은 자기 딸이 나랑 결혼하면 고생문이 훤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딸을 나에게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직장도 없이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나?"

그때 나는 궁하기 짝이 없어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대답 아닌 대답으로 임기응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학교수로 채용되기 전까지 집안 살림은 제가 하고 아내는 직장생활을 하면 되겠지요."

"남자라서 집안일이 얼마나 힘든 줄 모르는 모양인데요.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요."

무슨 근자감인가 싶어 장모님은 의아하고 뜨악한 얼굴로 나를 정면으로 꼬나보셨다.

"저는요. 군대에서 대령의 숙소 당번, 속된 말로 '따까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를 잘하는 '밥빨청설 도사'거든요. 약속컨대, 따님 손에 절대 물을 묻히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신혼 때부터 '밥빨청설'의 도사답게 가사를 훌륭하게 처리했다. 아내의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도 확실하게 지켰다. 손에 물을 묻히지 않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아내에게 고무장갑을 계절마다 지속적으로 선물했다. 내 덕분에 아내는 방학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5대양 6대주를 가리지 않고 배낭여행을 띵까띵까 다녀올 수 있었다.

5년 전 뇌졸중으로 병원에 실려 오기 직전 장모님 생신날 아내는 자유여행중이나라 혼자 참석한 나에게 안쓰러운 얼굴로 말씀하셨다.

"이 서방! 자네 결혼 반대한 거 정말 미안해. 이렇게 훌륭한 사윗감을 미처 몰라 봐서 미안하네. 우리 딸 역마살 때문에 예순 다섯 나이에도 집안일 하느라고 정말 고생 많이 하네. 우리 맏딸을 자주 배낭여행을 보내줘서 너무 너무 고맙네! 여행 다녀오면 자네한테 잘할 것이야"

이것이 장모님과 내가 생전에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조문객을 받으면 감염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 장모님 부음을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는가? 부음은 알리되 조문은 마음으로 받겠다는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왜냐하면 조문객들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서도 최소한 일주일은 불안한 마음으로 조신하게 지내야 하므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고인의 사인을 꼬치꼬치 묻기도 했다. 그 이면에는 <코로나19>를 사인으로 의심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연초(2020년 2월)에 어느 날 <코로나19>의 확진자가 별로 많지 않을 때 먼 친척의 빈소에 조문을 갔었다. 대구에서 31번 환자가 나타난 뒤에 같은 교회 소속 교인 중에 확진자가 많이 발생해서 대구가 쑥대밭이 되었지만, 서울은 다른 나라같이 조용해서 장례식장을 별로 부담감 없이 조문을 갔었다. 처음 만난 고인의 사위이자 상주(喪主)의 매제가 되는 사람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소주를 몇 잔 기울이며 고인을 추모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직업이 목회자라고 했으며 대구 쪽에 지인의 장례식에 운전을 하고 다녀오는 길이라는 말을 귀전으로 들었다. 대구가 코로나 때문에 야단이 났는데 그곳까지 뭐 하러 갔을까 라는 생각은 했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 사위의 목회자로서 사역구역이 내가 살고 있는 동네라서 더 치근해져서 속 깊은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 사위는 접견실내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구가 봉쇄될지도 모른다는 급박한 사정을 보도했다. 그날 나는 한 시간 만에 엉거주춤 장례식장을 떠나면서 나중에 동네에서 만나 식사나 한번 하자면서 목회자에게 명함을 달라고 했더니, 명함이 떨어졌다면서 대신 내 전화번호를 그의 휴대폰에 찍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9시 뉴스에 <코로나19> 바로 우리 동네에 있는 X천지 비밀 교육장에서 확진자가 여럿 나왔다는 뉴스가 있었다. 우리 동네와 대구 확진자의 원천이 그 유명한 X천지라는 보도 때문에 나의 머리칼이 한꺼번에 곤두서며 깊은 시름에 빠지고 말았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고인의 사위가 문제의 X천지 교회 집단 소속 목회자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자기가 근무하는 교회 이름도 위치도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분명 X천지 교인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생각이 밀려들어 그가 목회자라는 심증을 굳히자 시간이 흐를수록 만약에 감염되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에 몸에서 열이 나고, 기침이 심하게 났지만 마신 술이 과했기 때문에 나타난 일시적인 증상일 것이라고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싶어서 코로나 감염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에서 알려준 <코로나19> 증상과 엇비슷하여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선 집에서 아내와 격리에 들어갔다. 일단 낮에 조문 간 상가(喪家)의 상주에게 전화해서 우리 동네에서 목회자로 있다는 상주의 매제가 우리 동네 어느 교회 목회자인지를 파악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상주도 자기 매제가 어느 교파, 어느 교회 소속인지 알지 못한다고 얼버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 의심은 더욱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사위가 경북 청도에서 있었다는 교주 형님의 장례식에 다녀온 목회자가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상주가 매제의 소속 교회를 확인해서 전화로 알려주겠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으나 소식이 없었다. 상주가 자기 매제의 교회를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면서 X천지에 관련이 있는 목회자가 틀림없는 것 같아 더욱 불안해졌다. 이튿날 아침까지 상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아 동네 내과로 달려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코로나19>에 감염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의사가 말했다. 그래도 2주간 찜찜하고 불안하게 지내는 동안 아무런 추가적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무증상인가 의심도 했지만 별일 없어서 괜한 사람을 의심한 것 같아 정말 미안했다.

종합병원의 <코로나19> 상황이라 장례식 규정은 엄격했다. 조문객들이 장례식장을 출입할 때 발열이나 호흡기 증상을 체크는 병원 당국에서 해주었다. 상주인 처남은 조문객을 맞이할 때나 쉴 때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지인들과는 악수가 아닌 목례로 인사를 시종했다. 빈소에서 식사를 할 때 서로 마주 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앉아서 식사를 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식사를 하고 간 사람보다는 식사를 하지 않고 빈소를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식사를 권하지도 않았고 못했다. 조문객들은 떠날 때에도 악수를 하지 않고 고개만 숙여 위로의 마음을 표시하거나 서로의 주먹을 맞댄 후 빈소를 떠났다. 장례식 진행은 장의사의 요구대로 최소 인원만 참여하였고, 화장장과 공원묘지에 납골 절차도 정부 방침에 따랐다. 상주와 참가자들은 마스크를 쓴 채 제를 올렸고 음식은 나눠 먹지 않았다. 장모님 장례식에 올만한 사람도, 와야 할 사람도 <코로나19>가 막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장모님을 간병하느라고 5년간 고생했던 유가족들을 약간은 편하게 해 주었다. 장모님은 그렇게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우리 처가댁의 아들딸들은 자녀들에게 "연명치료는 절대 하지 마라"는 유언을 문서로 작성하여 공증하기로 했다.

〈며느리의 임신〉

지금 9학년 2반인 우리 양친은 55세에 손자를 품에 안았지만, 나는 7학년이 되도록 아직 손(孫)이 없다. 아들 W가 결혼한지가 3년이 지났는데도 아이 소식이 없다. W에게 애는 언제 가질 것이냐며 재촉을 했지만 반응은 뜨악했다.

"맞벌이인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누가 키우게요?"

아내는 늘 명백하게 대답했다. 아기는 엄마 아빠가 키워야 한다고.

며느리가 아기를 가졌다는 카톡 문자가 휘파람 부는 이모티콘을 타고 날아왔다. 우리 집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실로 36년 만에 듣게 된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가슴 한쪽이 심란해지면서 기쁨이 반감되고 말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임산부라는데… 이를 어쩌나?

오래전부터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산부인과나 소아과 의사들이 생활고(?)를 겪자 의대 본과생들이 산부인과 전공을 지원하지 않는 추세라고 한다.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갔을 때, 산부인과 교수라는 주례자가 산부인과 의사인 30대 후반의 신랑과 신부에게 '자네들이라도 아기를 많이 낳아 사양화되는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살려내라'는 당부하던 말은 나를 웃프게(웃고 슬픈) 만들었다.

사실 아기를 낳아서 키우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내 어릴 적, 그러니까 60년 전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아기 보기'의 육체적· 정신적 부담은 아직도 내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장남인 나는 어릴 적부터 '아우 돌보기'를 하느라고 4, 5년 동안을 힘겨운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여덟 살 먹은 나에게 '어린애 돌보기'는 요즘 말하자면 어렵고(difficult), 지저분하고(dirty), 위험한(dangerous) 이른바 3D 분야였다.

60년 전. 농촌에서 어른들은 들일에 바쁘다 보니 나는 집에서 아우를 데리고 놀아야 했다. 한창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 나이에 아우를 돌보는 일은 그야말로 중노동중의 중노동에 해당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우를 등에 업혀주면서 아우가 허리를 다치면 안 된다며 긴 띠로 나와 아우를 세 바퀴나 칭칭 감아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들어 놓고 일터로 나갔다. 또래들과 술래잡기나 공치기를 할 때는 등에 혹처럼 붙어있는 아우 때문에 기민성을 발휘하지 못해 놀이에서 술래는 늘 내 몫이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띠로 아우를 나무에다 묶어 놓고 놀다가 엄마한테 들켜서 덕장의 명태처럼 얻어맞았다. 형아에 대한 아우의 정을 떼면 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영악한 생각까지도 했다. 아우를 거꾸로 목에 매달아 발목을 붙잡고 얼마간 왔다 갔다 하면서 흔들면 어지러워 나를 멀리 할 것이라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그러나 아우는 그게 아니었다. 재미있다며 자꾸자꾸 해달라고 졸라대니 내 쪽에서 힘이 빠져 숨겨진 목적을 스스로 포기해야 했다.

이제 맞벌이인 며느리가 아이를 낳게 되면 백조와 백수인 우리 부부가 손주를 봐줘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떡 애기 때 옹알이 하면서 어른들의 시선을 붙들어 두는 아기 얼굴, 커가면서 재롱을 피우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나의 삶을 즐겁게 만들 것이며 나이를 맛있게 먹게 할 것 같았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유모차가 있어서 업어서 키우지 않아도 되고, 지능을 향상시키는 장난감이나 애들이 쉽게 빠지는 게임기도 많이 나와 있으니까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아기를 돌본 경험이 있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그 증거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요컨대, 아기 돌보기는 '황혼의 자유'를 구속할 뿐만 아니라 아기를 가르치면서 돌봐야 하므로 이중고라고 했다. 내가 아우를 돌보던 시절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정도의 깔끔한 '위생 관념'과 고도의 '육아 지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아기 돌보기는 나 역시 싫지만 아기 얼굴은 언제까지라도 보고 싶다. 평생을 직장인으로 보낸 아내는 자기 경험상 '아기는 엄마가 키워야 하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 신념의 근원은 무엇일가? 아내가 직장이란 트랩에 갇혀 자식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자책감에서 비롯된 결론일까? 아니면 일생동안 직장에 매달리다 개인적인 삶을 가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 여생을 즐기려고 명퇴를 감행한 마당에 손주를 돌봐야 한다면 또다시 억매는 삶이 싫어서 내린 결론인지도 모른다. 아내의 굳은 신념은 며느리가 아이를 낳고 육아를 위해서 퇴직을 했다면 몰라도 복직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적극적으로 아기를 봐주겠다고 선언했지만, 나의 다짐이 궁극적으로 아내의 부담으로 전가 될까봐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며느리는 임신 4개월 만에 직장을 휴직했다. 아내는 며느리가 내린 휴직조차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임신 4개월부터 출산휴가를 써버리면 육아 휴직기간이 짧아져 육아가 더욱 힘들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임신한 상태로 직장인 학교에 나가게 되면 며느리 본인은 물론이고 태아도 <코로나19>에 감염될 우려가 크다는 점, 감염을 피하기 위해 하루 종일 마스크를 끼고 강의를 하게 되면 태아에게 좋을 리가 없다는 점, 자신의 임신 때문에 고3들에 대한 입시지도가 소홀하게 되면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해서 막다른 결단이라고 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에 임산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경험적 연구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저 '예방이 최대의 방역'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며느리가 일찍 휴직하기로 내린 결단을 잘 했다고 추켜세웠다.

이제 임신 5개월이 된 며느리는 1주에 한 번씩 병원에 다녀야 된단다. 담당 의사의 진찰에 의하면 며느리의 경구가 짧아 조산기가 있어서 이를 막는 시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산부인과를 종합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려 확진자가 하루 평균 700명대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수많은 환자들이 들락거리는 대학 종합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아야 했다. 대기업 사원인 아들 W은 직장 내에서 확진자가 많이 발생해서 그동안 선별 검사를 네 번이나 받아야 했다. 코로나 때문에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6일은 재택근무하고 3일은 출근해서 근무를 해야 했다. 선별검사를 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자가 격리 수준으로 각자 방을 따로 쓰며 집에 머물러야 했다. 재택근무 경험이 없는 나는 학생들이 방학을 맞는 즐거움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옆에서 본 결과로는 그게 아니었다. 재택근무라 해도 항상 업무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집안에서 임산부인 와이프의 시중을 들지 못했다.

임산부들이 <코로나19> 상황에서 많은 환자가 드나드는 병원을 출입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다녀야 하는데 만삭인 며느리를 누가 병원으로 데려갈 것인가?

W 결혼식 때 주례자를 세우지 않고 아버지인 내가 주례자를 대신했다. 주례사에서 W에게는 아들이 없는 '처가댁의 아들'이 되라 했고, 며느리에게는 딸이 없는 '우리 집안의 딸'이 되라고 주문했었다. 그들은 맞벌이를 하면서도 우리 부부보다 훨씬 알콩달콩 사랑하면서 잘 사는 것 같아 여간 흐뭇하지 않다. 비록 출산은 많이 늦었지만 기다리던 임신도 했다. <코로나19> 상황만 아니라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가면 되지만 혹시라도 감염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결국은 우리 부부 중 둘 중에서 한 사람이 며느리를 병원으로 픽업을 해야 했다. 나는 시아버지가 픽업하는 것보다는 시어머니가 픽업하는 것이 며느리를 더 편안하게 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는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며, 당신이 손주 낳으면 돌봐 준다고 했잖은가? 뱃속에 있는 손주도 손주니까 애를 봐야한다면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그런 아내의 채근은 워낙 부도를 많이 낸 나의 과거의 행적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산부인과 병원으로 픽업하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며, 오히려 집안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라면 하지요! 라고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손녀를 잉태한 며느리의 픽업을 시아버지더러 하라는 아내의 월권은 받아들이기 싫었다. 내가 며느리를 픽업한다면 며느리가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아내가 며느리의 입장을 전혀 역지사지 하지 않고 나한테 핑퐁을 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산부인과로 픽업해야 한다고 한사코 주장했다. 이에 아내는 W의 결혼식 때 며느리에게 주문하고 선언한 바와 같이 "딸 같은 며느리"가 병원에 진료 받으러 가는데 당연히 아빠인 당신이 픽업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아내는 나에게 '며느리 바보'가 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대학원 졸업하고 입대해서 군대생활을 늙은 졸병으로 마친 내가, 손녀를 손꼽아 기다리던 내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정작 고객인 며느리가 원한다면 픽업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며느리가 스스로 불편하기 때문에 시아버지를 선택하지 않고 비교적 덜 불편할 것이 분명한 시어머니를 택할 것이라고 백% 확신했다.

고객제일주의를 내세워 며느리에게 선택권을 주자고 제안하여 그 의사를 물었더니 며느리의 대답은 나의 예상과 기대를 한참 벗어난 대답이 돌아왔다.

"어머님과 아버님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픽업해 주시면 더 좋지요."

며느리의 선택은 나를 무척 당황하게 만들었고, 솔직히 말해서 황당했지만, 결국 나는 '딸 같은 며느리'를 병원에 모시고(?) 다녀야 했다. 우리 아파트에서 W네 아파트까지 자동차를 20 여분 몰고 가서, W네 아파트에서 대학병원까지 30분 픽업을 해주면 끝나는 일이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어려워하지 않는 점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지만 멋쩍게 만든 것은 틀림없었다.

남산만큼이나 부른 배를 내민 며느리에게 자동차 문을 열어서 조수석에 앉혀서 대학병원으로 운전해 갔다. 처음에는 엄청 민망하고 거북했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스스럼이 없어졌다. 나의 생각과 신세대인 며느리의 생각에 갭이 제법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원 건물 정문에서 차에서 내린 아내는 며느리를 부축하여 QR코드로 인증을 한 후에 병원 출입구를 통하여 산부인과에 가서 진찰 수속을 밟아주었다. 며느리는 대기실에 들어갈 수 있지만, 보호자는 임산부들이 <코로나19>에 감염될 것을 우려하여 대기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통제했다. 대기실 밖에는 앉을 의자가 없어서 병원 건물 밖에서 며느리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결국 아내와 나는 며느리의 병원 행차에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병원 언저리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며느리의 호출을 기다려야 했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돈가스와 김밥을 '테이크아웃' 해서 점심 식사를 때우게 해 주었다. 연속적으로 몇 번 픽업을 하다 보니 며느리와 관계가 엄청 돈독하고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머지않아 세상에 태어날 손녀의 이름을 지어놓고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 아이부터는 <코로나19>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원격 진료 프로그램'이 개발되면 좋을 것 같았다. 임산부가 병원을 찾아가지 않고도 집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이자 백신을 맞지 않고 세상을 그대로 하직하겠다고 옹고집을 부리시는 걸 설득하려고 친가를 찾아가 두 분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마침 그날은 어머니를 50년간 시집살이를 시키고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의 17회 기일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지난 설과 추석에도 조상께 차례를 모시지 못해 할머니가 대노할 것 같다면서 이번 제사는 간단하게라도 모시자는 어머니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평소에는 15명 정도의 친척들이 참석했지만 5인 이상 모이면 안 된다는 정부의 방역방침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우리 부부만 참례해서 제사를 모시기로 했다. 넷 중에서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9학년2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릎 관절이 고장 나 큰절을 못한다며 제사에는 참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종교적 이유 때문에 음식 장만은 해주지만 제사는 못 모신다고 빠져버렸다.

나는 최근에 유튜브를 제작하면서 배운 온라인 Zoom을 이용해서 불참한 할머니 직계 비속들에게 제사 모시는 실황을 영상으로 중계하기로 했다. 휴대폰 카메라를 삼각대에 설치하여 제사를 모시는 장면이 친척들에게 실시간 전달되도록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막 강신을 하려는 찰나에 아우에게서 문자가 카톡! 하고 날아왔다. 제사상에 지방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버지가 손수 써 놓으신 지방을 제상에 올려놓고 강신 재배부터 시작했다. 7학년인 내가 혼자 촛불을 켜고, 술잔을 올리고 내려 잔을 비우고 다시 술을 따르고, 큰 절을 두 번씩 하고 삽시를 하다 보니 무릎이 불편해서 제사가 순조롭게 모셔지지 않았다. 2년 만에 초대받고 제사상에 앉으신 할머니가 한참 어지러워 하셨을 것 같다. 정성을 다해 제사를 모시려 했지만 내 관절도 굳어서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께 우리 가족들이 <코로나19> 상황을 잘 극복하게 잘 보살펴 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할머니께 술 한 잔 올리겠다고 자청하고 제실로 들어오셨다. 거동이 불편하고 관절이 굳어 몸을 구부려 절을 하지 못하고 앉을 수도 없는 사람이 억지로 큰절을 하시면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며 기도하셨다.

"어머니! <코로나> 때문에 이렇게 조촐하게 제사를 올려서 죄송합니다. 기쁜 소식이 하나 있어요. 두 달 후에 어머님 진 손녀가 태어난대요. 어머님이 잘 챙겨서 순산하게 도와주세요! 어머니 잘 부탁합니다!"

올해 제사를 간단하게라도 모시자는 어머니의 숨겨진 의도가 이제야 드러났다.

할머니 임종 때 나는 캄보디아 해외출장을 갔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도 못 했다. 나를 실질적으로 키워주신 할머니의 영혼을 뵐 면목이 없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며 끄적거려 놓은 '할머니'라는 제목의 시, 시답지 않은 시, 한 수를 지어 축문 삼아 낭독해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가족들에게 동영상으로 중계하였다.

'할머니'

동생들한테 엄마 젖꼭지를 빼앗겨

칭얼대던 나에게

할미 젖은 두 개다 네 거라며

앞가슴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아장대는 나에게 맛난 거 걷어다 먹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

나중에 커서

할미 비행기 태워줘야 돼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칸방에서 궁박하게 자취하던 중3 때

밭이랑에서 우거지 줍어다가

시금치나물 한 접시, 시금치 된장국 한 사발 퍼주며

'돈 주고 사 온 거라 맛이 기가 막히다'며 시치미를 떼셨습니다.

양변기 통에 머리 감았다고

기겁을 하는 나에게 그러면 왜 안 되냐며

따지던 우리 할머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시면서

울 엄마와 티격태격 잘도 싸우시더니

70 고개 넘은 울 엄마더러 치매라고 괴롭히시더니

외국 출장 다녀오겠다고 안부 전화했을 때

넌 참 좋겠다. 하늘을 날아갈 수 있어서…

나도 살아생전에 한번 비행기 타고

하늘을 날고 싶으시다더니

출장에서 돌아왔는데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나요?

비행기도 타지 않고 하늘공원으로 날아가

벽제 골 항아리 속으로 숨어버리셨네

할머니가 내내 그립습니다.

〈백신접종을 위한 공청회〉

우리나라는 2021.03.20.부터 AZ백신 접종을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일반 의료진과 요양병원 종사자들에게 접종하였다. AZ백신에 대한 제원이나 정보는 전문 의사들이 만든 유튜브 동영상으로 일반인들에게 폭넓고 깊게 소개되었다. AZ를 접종한 의사들의 경험담도 유튜브나 TV에서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그러나 AZ 백신이 다른 백신보다 혈전 생성 비율이 높을 뿐 만 아니라 부작용이 큰 것으로 보고되는 사례가 많다는 언론이나 유튜버들의 의도적인 왜곡 보도 때문에 접종 대상인 우리 연령대인 국민들의 불안을 한껏 키워놓았다.

그러나 정부는 접종 후 신고 된 부작용이 AZ백신 접종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정부가 분석한 것이 아니라 WHO가 'AZ 백신과 혈전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반복했다. 국내 전문가 중에는 AZ접종 후 사망한 사람의 사인과 상관관계가 없다는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야당에서는 말썽 많은 AZ를 대통령부터 시범을 보이라는 요구조차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의 백신접종 연령 계층에는 해당하지는 않지만 항체가 생긴 뒤에 출국하여 외국 정상들을 만나서 국제회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AZ 백신을 우선 접종하는 장면이 TV에 공개되기도 했다. 그 장면에서 간호사가 AZ백신을 다른 백신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의심을 담은 '가짜뉴스' 가 보도되기도 했다.

질병관리청은 2021. 5.27.부터 내 연령층에 속하는 65세에서 74세까지의 국민들에게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접종 예약 5.6.~ 6.3.까지 받는다고 발표했다. 이에 해당되는 우리 나이 어르신들은 방콕하면서 단톡방에서 AZ를 맞아야 하는지 맞지 말아야 하는지를 놓고 끊임없는 설왕설래(說往說來)와 갑론을박(甲論乙駁) 토론이 봇물을 이루었다. 친구들은 AZ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교환하면서 접종여부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썽 많은 AZ백신을 나 같은 7학년 초반의 국민을 접종 대상으로 지정한데 대하여 당사자들은 은근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7학년생인 대학 동창들이 초대된 단톡방에서는 <코로나19>의 예방을 위해 AZ 백신 접종과 관련하여 공청회를 방불하게 의견교환을 하면서 정보들을 공유하면서 걱정을 가중시켰다.

<2021년 4월 9일 오후>

*4:32, 친구1: AZ는 미국에서 승인이 되지 않는 백신인데 왜 이걸 맞으라는 걸까? 왜 부작용이 가장 심한 AZ백신을 하필 우리 연령대에게 맞으라 하지? 난 미제 화이자 백신을 맞고 싶은데…

*4:34, 친구2: 국민이 접종할 백신을 선택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고 하네요. 3일 정도 죽을 만큼 아플 각오로 AZ백신을 맞으려고 하는데… 솔직히 두렵고 걱정 됩니다. 특히, 나같이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질병관리청에 관계하는 의사들이 체온계, 타이레놀, 혈압계 등을 준비하라네요. 근육통과 발열 체크하고 해열제 복용하라고…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보도에 의하면, 지금 나온 CVID-19 백신들은 워낙 화급하게 1년 만에 나온 탓으로, 그 효능과 이상 반응이 불투명해서 우리가 모르모토가 되는 기분이네요.

*5:01, 친구3: 그래도 백신은 모두 맞도록 합시다. AZ 조차도 없어서 못 맞는 상황이니까 안 맞고 걱정하느니 맞고서 안심하고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우리 동창모임도 가능하고 조만간 붕우들과 소주도 한잔 마실 수 있겠지요.

*5:06, 친구4: 이상 증상 대비 각오하시고, 타이레놀 충분하게 준비하시고, 여차하면 응급실 갈 준비 등 완비하시고요~

*5:09, 친구5: 우리 나이 또래 아무도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담담하게 있다가 맞을 때가 되면 그냥 맞으면 될 것 아닐까요?

*5:22, 친구2: 친구5님 같이 건강에 자신 있으면 담담하게 있다가 턱~~ 맞으면 되지만 소인은 몸 상태가 나약하기 그지없고 1인 가족인지라 쓸 데 없지 않은 걱정을 대폭 하는 중…

<4월 18일 오전>

*11:16, 친구4: AZ백신에 관해 이런저런 학설도 많으니 두루 참고하시길~~ 어제 내가 만났던 지인의 사위가 건장한 40대 외과의사인데, AZ백신을 맞고 3일간 아주 힘들었다며 가족들에게는 맞지 말라고 했다고 하데요.

*11:26, 친구6: AZ에 대한 정보를 자주 확인하고 카톡에 올려주시니, 친구4 자네가 동기들께 큰 봉사하시는 것이네.

*12:07, 친구7: S의과대학 모 교수는 백신 무용론을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백신 맞은 사람들은 모두 속아서 헛짓한 거야? 뭐야? AZ나 화이자, 모더나 등등 제약회사들이 돈벌이를 위해 지구촌 인류를 상대로 사기를 쳤단 말인가? 백신 맞는 거 심각하게 고려해봐야겠네. AZ 백신 접종 후기를 두루 읽어본 후 그 내용을 나름 정리합니다.

- 접종 후 10시간 후부터 서서히 증세 심해짐. 공통 증세는 발열, 오한. 전신에 극심한 통증. 정신몽롱, 오심, 구토… 타이레놀 안 먹으면 거의 죽음 직전… 일반인 70세 접종 5월부터 시작, 곧 닥칠 일. 신경 쓰지 않는 분들은 가서 맞으면 되고, 나같이 신경 쓰이는 분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시죠. 백신 안 맞을 권리도 물론 있겠지만. ㅋㅋ

*12:13, 친구8: 이번 맞을 권리를 포기하고 다시 권리를 회복하려면 아마도 연말에 가야 가능한대요. 전 국민의 70%만 맞으면 항체가 형성이 된다 하니 나머지 30%는 안 맞아도 된다는 말인가? ㅋㅋ

*12:15, 친구5: 내과 의사인 59세 조카가 며칠 전에 AZ백신을 맞았는데 하루반 정도 가벼운 몸살 기운이 있다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함

*12:15, 친구7: 친구4가 올린 동영상 보니 갑자기 무서워지네. 난 아직은 죽으면 안 되는데. 할 일이 많이 남아서…

*12:30, 친구6: 큰사위, 막내처남, 큰딸, 모두 우선 접종대상임. 맞고 나서, 하루, 이틀 가벼운 몸살기? 정도였다고 합니다. 부작용은 결국 확률의 문제일 듯. AZ의 부작용 발생 건수는 100만 건당 20건 정도 발행한다니까. 참고하세요.

<5월 8일 오후>

*5:09, 친구5: 까이꺼 이판사판 빨래판! 바이러스란 놈은 인간보다 지구에 먼저 존재했고, 이제 숨은 실력자로 등극했으니 조심스럽게 다뤄야지요.

*5:10, 나: 전문의들은 안 맞고 확진되어 고생하는 것보다는 맞고 약간 고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해서 맞으려고 합니다.

● 그래서 저는 오늘 담담하게 예약 했습다.

ㅡ 일시 / 2021년 5월 31일 (월) 09:00

ㅡ 장소 / XXX내과의원

ㅡ 백신 종류 / AZ 백신

ㅡ 예약번호 / *********

● 참고로 접종장소는 주소지와 전혀 상관없이 예약할 수 있음. 예약 일시나 장소를 변경하시려면 접종일 기준 이틀 전까지 http://ncvr.kdca.go.kr에서 가능합니다.

*5:11, 친구7: 어떤 병원의 의사는 AZ백신인 줄 알고 접종했는데 알고 보니 폐렴 백신을 잘못 주사했대나 봐요. 어떤 간호사가 백신을 2회 접종했는데도 항체가 생기지 않아 글쎄 확진자가 되었다네요. 접종을 예약하는 병원은 노련한 큰 병원이 좋을까 붐비지 않는 작은 의원이 좋을까? 접종 예약시간은 아침이 좋을까? 오후가 좋을까? 누구 의견 있나요?

*5:13, 친구5: 문외한인 우리들에게는 복불복! 각자 지성과 이성으로 판단해서 예약합시다.

<5월 29 오후>

*6:05 친구2: 드디어 접종 후 안정을 취하고 있음

*6:07 친구5: 접종으로부터 24시간 경과했는데 몸은 괜찮음. 친구들도 걱정은 안 해도 될 듯…

*6:09 친구6: 이번에 예약한 사람 중 No Show한 사람 때문에 생긴 여분의 백신을 예약하는 사람이 엄청 늘어나 그나마도 품절이라 하네요. 우리 모두 예약된 대로 접종하고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이기도록 합시다.

*6:09 친구3: 시중에 타이레놀도 품절되었대요. 성분이 같은 다른 이름의 의약품도 많다 하니 약사와 상의하시도록!

나는 2021.5.31.09에 예약한 병원에서 AZ 백신을 접종했고, 다음 날 하루 근육통으로 괴롭긴 했지만 타이레놀은 복용하지 않았다. AZ백신을 1차 접종한 결과 카톡방 멤버 11명 중에 타이레놀을 한 알이상 복용한 사람은 5명이고, 6명은 무사히 지나갔다.

무엇보다도 머지않아 태어날 손녀를 안심하고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여간 다행이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상황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6학년을 뒤로 하고 7학년에 진급되는 것은 너무 무의미하고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긴급 상황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얼굴 맞대며 어울리지 않더라도 의사를 소통할 수 있으며, 필요한 정보와 지식과 지혜를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하였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가 되면 '나이 먹는 즐거움'을 다시 만끽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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