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페르소나의 착각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중에 라틴어와 섞이며 사람(Person)이나 인격(personality)의 어원이 되었다. 페르소나의 현대적인 의미는 '가면을 쓴 인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며 밖으로 내놓는 공적 얼굴인 것이다.

삶을 무대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역할에 따라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의 남편과 아내 또는 부모 형제로, 직장의 상사나 부하로, 그리고 의료인, 법조인,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교육자, 공직자 등 직업인으로 저마다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진정한 자아(自我)와는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

분석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은 페르소나를 자아와 본성을 감춘 채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일종의 연기로 규정하기도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페르소나를 자신의 본성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여기에다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며 집단화하는 것이다.

관념으로 무장한 페르소나는 세상을 선과 악의 이원론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자신들과 다른 것들을 죄악시하며 단죄와 거세의 대상으로 여긴다. 절대선(善)이라는 종교와 이념의 페르소나를 쓰고 저질렀던 인간성에 대한 폭압의 사례는 역사가 입증한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과 독일의 나치즘, 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그랬다. 조선시대 주자학의 폐해도 그 예외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페르소나를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하려 한다. 좋은 배역일수록 가면을 벗은 민낯은 초라하기 때문이다. 본성을 망각하거나 본모습에서 일탈한 페르소나는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한다. 도그마의 제복을 걸친 페르소나는 도덕적 우월감과 폭력적 정의감을 드러내며 사회와 국가를 질곡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명나라의 반유교적 혁신사상가 이탁오(李卓吾)는 "정작 나라를 망치는 것은 소인(小人)이 아니라 군자(君子)이다"라는 폐부를 찌르는 역설을 남겼다. 그것은 '탐관(貪官)의 피해보다 청관(淸官)의 해악이 더 크다'는 지적과도 상통한다. 그렇다. 탐관과 소인은 스스로의 잘못을 알 뿐만 아니라 그 피해의 범위 또한 국지적이다.

하지만 청관과 군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선(善)으로 여기는 것은 물론 사회 공동체의 규범을 재단하면서 상당한 지지 세력을 거느린다. 세인들은 탐관의 적폐에는 익숙하지만 청관이 더 가증스럽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단화된 청관의 방향성이 틀어지는 순간 사회와 국가에는 돌이키기 어려운 재앙이 엄습한다. 그 폐해 또한 후대의 온 나라에 미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정의로운 정치 세력의 일방통행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그 누구도 정의를 독점할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든 정의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정의의 독점이란 곧 독선의 반증일 뿐이다. '죄인(罪人)의 악보다 선인(善人)의 악이 더 클 수 있다'는 촌철살인도 그래서 나왔다.

도로상에서 운전자 자신이 역주행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사회와 국가라는 무대 위에서 영원한 주역은 없다. 독선과 오만의 페르소나를 자아와 본성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무대 안팎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돌이킬 수 없는 파멸과 마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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