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엘르

'원초적 본능' 감독 <폴 버호벤>이 만든 '원초적 복수'

매력적 중년 여성 집에 괴한 침입

위기감 느껴 자기 방식으로 추적

사건 전말 세세하게 설명 안 해

다차원 해석 가능한 모호함 매력

최근 70대, 80대 노장의 영화감독들이 활발히 영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리들리 스콧, '8인의 수상한 신사들'의 기타노 다케시, '트립 투 유럽' 상연 전으로 재개봉작 3편을 선보이는 우디 앨런 등이다. 여기에 올해 79세인 네덜란드 출신 감독 폴 버호벤의 신작이 이번 주에 개봉한다.

폴 버호벤은 네덜란드에서 만든 '포스맨'(1983)을 통해 국제무대에 알려졌고 곧 할리우드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는 '로보캅'(1987), '토탈 리콜'(1990), '원초적 본능'(1992) 등 철학적 예술적 블록버스터로 주류 상업영화가 멍청하고 단순하다는 선입견을 깨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파격적인 성과 폭력의 묘사와 급진적인 세계관 탓에 언제나 그의 신작은 화제를 몰고 왔다. 그러다가 '쇼걸'(1995), '스타쉽 트루퍼즈'(1999), '할로우 맨'(2000)으로 흥행의 내리막길을 걷다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블랙북'(2006) 등의 문제작을 발표했다.

강렬하고 대담한 표현 수위에서 타협함 없이 젊은 날의 스타일을 지켜나가는 폴 버호벤의 차기작을 팬들은 언제나 기다렸고, 지난해 '엘르'를 가지고 찾아왔다. 이 영화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랐고, 골든글러브 외국어영화상과 프랑스 최대 영화상인 세자르 작품상을 받았다.

영화는 사건 설정에서부터 이야기 진행, 결말까지 논쟁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용감하다. 언제나 당당하고 매력적인 중년여인 미셸(이자벨 위페르)의 집에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침입한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주변의 조언을 무시한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 미셸은 아들 내외를 초대하고, 전남편과 친구들을 만나고, 게임회사 CEO로서 여전히 살아간다. 하지만 계속되는 괴한의 접근에 위기감을 느끼고 곧 자신만의 방식으로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어린 시절의 비밀이 밝혀지고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상한 행동의 정체도 하나씩 드러내게 된다.

주인공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행동을 계속해서 하는데 이것이 거대한 논쟁점의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간다. 영화의 원작은 '베티 블루 37.2'를 썼던 필립 지앙의 장편소설 '오…'를 각색한 것으로, 원작자와 감독 모두 원초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집착과 광기가 어떻게 자신을 파괴하는지를 탐구해왔다.

폴 버호벤의 과장된 성과 폭력의 묘사는 어느 정도 불쾌감을 유발하곤 하지만 그는 그 속에서 허위적인 현대 인간의 도덕관념, 종교에 대한 과잉 집착, 낙인찍기의 폭력성,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에 대한 의문 등을 통해 날카롭게 현대사회를 풍자한다. 영화는 과감하고, 냉철하고, 때론 유머러스하다.

미셸 주위에는 폭력적인 침입자, 철부지 아들, 막무가내 며느리, 무능력한 전남편, 범죄자 아버지, 퇴행적인 엄마, 사장을 얕보는 직원, 불륜을 모의하는 친구 남편 등 온갖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다. 그들은 돈과 명예에 취해 있으며, 근사한 부르주아 문화의 겉옷을 입고 문명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겉옷을 한 꺼풀 벗기면 거기에는 추악하고 도착적인 욕망 덩어리가 드러난다.

범죄자 아버지를 둔 미스터리한 여성 미셸은 과거나 세간의 루머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특별한 자신만의 자아를 형성했다. 그녀는 끔찍한 어린 시절의 사건 이후에도 고향에서 살고 있고, 피해자성으로 자신을 묶어두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야릇하게 쳐다보는 주변 남자들에게 예측할 수 없는 돌발 행동으로 대응함으로써 당당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영화는 사건의 전말을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현 상태만 쭉 나열한 후, 나머지는 관객에게 맡긴다. 다차원의 풍요로운 해석을 요하는 모호함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인 이자벨 위페르는 이 영화로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폴 버호벤은 이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촬영하려다가 "도덕관념을 넘어서는 역할을 맡을 미국 배우가 없으리라 생각했다"며 이자벨 위페르를 캐스팅하고 유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 정도로 '엘르'는 기존의 윤리의식과 전형적 플롯을 뛰어넘는 과감한 영화다. 과연 거장의 손길은 녹슬지 않았다. 꽃보다 싱그러운 할배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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