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민족운동 큰 업적, 신앙인 서상돈은 더 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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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동 땅 1만평 희사…선종 100주년 맞은 서상돈 대구대교구 추모 사업

'천주교 신자로서의 서상돈'.

일제강점기 하에 나라의 빚을 갚아보자고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세례명 아우구스티노'1851∼1913)은 천주교 신자로서도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대구대교구 설립의 기초를 닦은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6일 서상돈 선종 100주년 추모미사 강론에서 선생의 삶을 다룬 영상물 상영을 지시했다. 이에 대구대교구는 대구평화방송에서 제작한 36분짜리 '신앙인, 빛과 소금의 길'이라는 영상을 다시 재편집해, 계산성당 본당 스크린을 통해 천주교 신자들에게 보여줄 계획을 잡고 있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으로 유명한 서상돈은 자선 사업가이자 민족운동가의 면모뿐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로서 지역 복음화에 헌신했다. 특히 대구성당(현 주교좌 계산성당)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교구 설정 당시 1만여 평의 부지(현 대구시 남산동 대구대교구청 일대)를 기증하는 업적을 남겼다. 아울러 막대한 재산을 털어 구휼사업과 교육사업에 앞장섰으나 스스로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던 '실천적 신앙인'으로 모범을 보였다.

교구 전 사목국장 김영호 신부는 "한국교회가 평신도의 손으로 시작된 것처럼 대구대교구의 시작에도 평신도의 역할은 지대했으며, 그것은 현 시대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메시지가 된다"고 말했다.

서상돈은 지물상과 포목상을 통해 이룩한 막대한 부(富)를 바탕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해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민족운동가이지만 다양한 전교활동과 자선사업을 펼친 신앙실천가로서의 삶도 크게 조명되고 있다.

서상돈은 고조 할아버지인 서광수로부터 내려온 뿌리깊은 천주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이런 신앙적 배경은 서상돈과 그 후손들이 교회의 빛과 소금으로 신앙의 명가를 이루게 된 토대가 됐다. 대구 달성 서씨 도위공파인 서상돈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784년 전후다. 서상돈의 고조부이며 대구 달성 서씨 20세 손인 서광수가 여섯 아들과 함께 천주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듬해 천주교의 첫 박해인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 고조부는 달성 서씨 문중에서 파적 당하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당시 서상돈은 병인박해로 대구 감옥에 갇혀 있는 백부 서인순을 자주 방문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 먹으며 생활하는 백부를 보고 이후 거상(巨商)이 된 후에도 절대 쌀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서상돈은 죽은 장남(병옥)을 포함해 병조, 병주, 병민 등 네 아들을 두었다. 비록 딸은 없었지만 대구대교구 류흥모 신부의 동생인 류흥민을 데릴사위로 삼았다. 아들 병조는 아버지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이어받아 계산본당 총회장을 지냈으며,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데릴사위 류흥민은 독립운동이 한창이었던 1910년대 말 대구지역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집안 어른들은 서상돈에게 자주 이 말을 했다고 한다. '너(서상돈)는 천주교 집안의 후손이니 항상 신앙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상돈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저는 천주교 신자였고, 가족 전체에게 그 사실은 여지없는 진리였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상돈의 증손자로, 손꼽히는 성서학자인 서인석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서상돈 선생의 집안은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할머니가 잠도 재우지 않았으며, 집안 어른들은 성경 속에 하느님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고 항상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한편 서상돈의 직계 후손 외에도 천주교 시조라 할 수 있는 서광수의 많은 후손 중에도 성직자와 수도자, 학자가 꾸준히 배출되고 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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