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아버지 배우영씨의 금연

 

손자의 백일날에 아버지 배우영씨(가운데) 손자의 백일날에 아버지 배우영씨(가운데)

아픔은 더 큰 아픔으로 치유가 된다. 그러나 그리움은 더 깊은 그리움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추억할 뿐이다. 언제 시작되었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억겁의 시간 속에 그리움은 언제나 과거의 시간에 맞춰진다. 누구에게나 따듯한 모정(母情)의 그리움은 똬리를 틀고 있다. 하지만, 깊은 부정(父情)은 가슴에 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에게 아버지는 금연의 추억과 함께 그리움이 계절병처럼 살아나곤 한다.

옛날에 집안에 맏이인 형을 대신 동생이 군대에 간 경우의 얘기는 들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반대였다. 장남인 아버지 배우영씨는 6·25 때 동생의 입대를 면하게 하려고 동생 대신 보국대에 지원했다. 그때 나이가 30대 후반이었다. 진격과 후퇴를 거듭할 때 영천 화산전투에서 발목이 절단되는 상처를 입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무릎까지 절단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렇게 성치 못한 몸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그래서일까,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입버릇처럼 "너희 아비와 삼촌은 몸은 둘이었지만 마음은 하나였다"라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만큼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좋은 시절에 동생들에게 안부 전화도 자주 하지 않으니 아버지가 아시면 형편없는 자식이라고 나무라실 것 같다. 그 깊은 형제애의 DNA는 물려받지 못했는지 그립고 아쉽다.

20여 년 전 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때, 휴일이면 안동에 계시는 아버지를 뵈러 다녔다. 하루 전에 간다고 전화를 드리면 아버지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굽은 어깨에 턱을 괴고 골목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 좁은 어깨가 지금은 한없이 넓고 든든했음이 담 너머 그리움처럼 환영 된다. 돌아가시기 2년 전쯤, 한번은 건강이 좋지 않아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다.

그때 아버지는 담배를 자주 피워 기관지가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아버지가 담배를 많이 태우시니 검사를 마치고 문진 시간에 아버지가 담배를 끊도록 간곡히 당부해 달라고 했다. 의사 선생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아버지와 문진을 할 때다. 의사 선생님이 "할배요, 할배는 담배을 몇 년 피우셨니 껴" "담배요, 열여섯 살부터 여든다섯인 지금까지 한, 칠십 년 피웠니더" "할배요, 제가 검사를 해보니, 할배는 담배를 끊지 않으면, 앞으로 얼마나 사실지 의사인 제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날부터 칼로 무를 자르듯 69년간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그날 이후 시골에 가면, 예의 그 골목 앞에서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은 옛 모습이지만 손가락에 담배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2년을 사시다가 멀리 가셨다. 예순 중반을 넘어선 내가 형제애의 DNA는 없고, 흡연의 유전자는 이어받아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기 때문일까? 담배를 끊고 금단 현상에 괴로워하셨을 아버지의 심사를 헤아려 본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담배를 피우시게 할 걸, 지금 생각해 보면 담배를 마음껏 피워도 2년은 족히 사셨으리란 생각이 든다. 금단의 2년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오늘 아버지 묘소 앞에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올리고 눈을 감는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담배 연기 속에 금연의 추억이 그리움 되어 피어오른다. 아들 배해주 올림

 

관련기사

AD

사회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