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김서진 씨 부친 故 김국석 씨

해병대 1기 자부심 갖고 평생 정갈하게 살아…
아궁이에 군불 지펴 자식 따끈따끈하게 챙겨

55년 전 故 김국석(왼쪽 위) 씨와 부인, 김서진(가운데) 씨, 남동생 등 가족 5명이 찍은 기념 사진. 가족제공. 55년 전 故 김국석(왼쪽 위) 씨와 부인, 김서진(가운데) 씨, 남동생 등 가족 5명이 찍은 기념 사진. 가족제공.

아버지는 2014년 음력 2월 돌아가셨다. 경북 봉화가 고향인 우리 아버지는 대구농고에서 규율부장을 하시고 해병대 1기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평생을 살아오신 멋진 분이다. 농협에서 장기간 근무하신 아버지는 항상 완벽주의자였다.

어느 어린이날 아침 아버지 생각이 문득 났다. 아버지는 어느 것 하나 삐뚤어지지 않고 반듯하고 정갈하게 사는 그런 분이셨다. 보통의 잣대보다 엄격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늘 당신 스스로가 버거운 삶을 살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세월이 지나 헤아려졌다. 아버지는 한겨울 맹추위에도 아침에 눈 뜨면 가장 먼저 창문을 여셨다. 우리 5남매 형제자매들이 한참 꿈나라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온 집안 방문과 창문을 활짝 여셨다.

추위에 이불 속에서 옹송그리면 이불을 가차 없이 확 거둬버리셨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옷을 입어야 했다. 이윽고 아버지는 방마다 있는 이불을 탁탁 털고서 4각이 정확히 맞물리게 접어 개켜서 장롱 안에 넣으셨다. 유년기부터 뵌 모습이니 아침 이부자리는 남자가 하는 일로 알았다.

나는 아직도 침대를 쓰지 않는다. 우리 남매도 침대 없이 키웠다. 잠자리가 공개되는 게 싫었고 아침마다 창문 활짝 열고 이불을 탈탈 털어 반듯하게 개켜서 장롱에 차곡차곡 넣는 것을 가르쳤다. 내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대로 문화가 된 셈이다. 아... 문득, 그리운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밤새 안녕하십니까~ 하고 잠자다 눈감아야 하는데. . 그게 내 소원이다"라며 말씀하셨다. 병석에 누워 자식들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며 늘 노래하셨다. 평소 건강하고 정갈하시며 식사도 잘하셨다.

하루는 아침밥 맛나게 드셨는데 속이 불편하다며 세 끼 식사를 거르시고 힘없어하셔서 영양제 링거를 맞고 기운 차리시라고 다음날 오후 대학병원 응급실로 모셨다. 응급실에서 왜 속이 불편하신지? 검사 중에 담낭의 담관이 막혀 레이저 시술로 담관을 막은 돌을 깨트려야 한다며 일주일 동안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입원 절차를 밟으며 면도기 챙겨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집으로 모시고, 그날 저녁 8시 담석 제거 시술을 받으셨다.

담석이 제법 커서 레이저로 깨트려 시술했으나, 부분은 깨트리고 부분은 남았고 일단 담즙이 막히지 않게 처치를 했다고 했다. 시술 후 응급실로 내려와 병실 입실 처리 중 큰 여동생과 농담도 하고 기분이 좋으셨다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고 손발을 떨어트리셨다. 10여 명 의료진이 모여 전기충격과 심폐소생을 실시하고 있다는 동생의 흐느끼는 전화에 시아버님 제사상을 차리던 중 서둘러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심장 박동은 되돌아 왔지만,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 승압제, 알부민 투여 등 갖은 시도를 했다. 결국 아버지는 깨어나지 못하셨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떠난 뒤 치아 때문에 불편해하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치아와 잇몸 때문인지...
다른 문제가 있는지... 참으로 이상하다. 아프다. 많이 아프다. 월·수·금요일 밖으로 나가는 날 말고는 이렇게 끙끙 앓기가 여러 날 되었다.

63년 전 故 김국석 씨가 부인과 혼인식을 하며 찍은 기념 사진. 가족제공. 63년 전 故 김국석 씨가 부인과 혼인식을 하며 찍은 기념 사진. 가족제공.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시골의 한옥집도 한동안 방치됐었다. 아버지의 삶을 느끼기위해 거미줄을 걷어내고 창호지를 바르고 방바닥도 보수하고 주인 잃은 찻상과 찻잔도 돌보니 집안 곳곳이 기지개를 켠다. 아버지 살아계실 땐 손님처럼 찾아들어 군불지펴 놓은 따끈한 한옥집에서 편안하게 숙면을 할 수 있었다. 딸내미 온다 하면 며칠 전부터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어 따끈따끈 챙겨주셨다.

정작 지난 겨울 딸아이 내외가 왔을 때 방을 데우지 못했으니 안채에서 자래도 군불 때보고 싶다며 온돌방에 묵더니 바닥이 타고 요이불까지 태웠다. 처음에는 따뜻하더니 새벽에 점점 더 뜨거워지더란다. 아파트 삶이니.. 참나무 장작의 위력과 온돌방 생리를 모를 수밖에. 사실 나도 모른다. 단 하루도 아궁이를 지펴본 적 없고 그저 아버지 손길로 따스한 방에서 잠을 잤을 뿐이다.

아버지가 때때로 그립다. 눈물이 나기도 한다.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남동생 태현이는 오늘 부산에서 여기로 온다고 하니. 제가 겨우내 다독인 이곳 소나무밭 일, 함께 할께요. 엄마 건강하시고 동생들 넷 모두 무탈하니 늘 지켜 봐주시어요. 특히 넷째를 위한 기도! 많이 해주시어요. 시골 방산미 집 곳곳에서 아버지 향기를 느낍니다. 사랑해요.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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