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을 걷다, 먹다] 19. 이육사문학관

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이육사문학관 내 이육사 이육사문학관 내 이육사

19번째 이야기. 저항시인이자 독립투사 이육사 스토리

264(二六四), '이육사'(李陸史)는 대구교도소에서 받은 수감번호에서 취음한 이름이었다. 본명은 이원록, 혹은 이원삼. 이활이라는 이름도 사용했지만 그는 1930년대 이후에는 이육사로 살았다.

일제에 의해 17번이나 투옥되었지만 일제에 항거, 무장투쟁을 준비하다가 결국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백마(白馬)타고 떠난 우리시대의 '초인(超人)'이었다. 그는 두려움없이 거침없이 독립투쟁의 최선봉에 나섰으면서도 저항의 시(詩)를 놓지않은 '칼날 위에 선 음유시인'이었다.

오늘은 이육사 시인을 만나러 나섰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유고시, '광야'(曠野)다.

해방 전 해인 1944년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광야에서 이육사는 스스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을 자처했다. 절정(絶頂)에서는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 진 그 우에 서다...'라며 저항의 의지를 곧추세우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

퇴계 이황(李滉)은 안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가히 '퇴계교'라고도 칭할 수도 있는 한국정신문화의 뿌리다. 그 퇴계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안동은 '한국독립운동의 발상지'라고 불린다. 퇴계학이 그저 책상에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공부한 지혜와 덕성을 스스로 실천해나가고자 하는 삶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리라.

선비정신은 케케묵은 주자학과 성리학의 윤리를 책상머리에서 외워 벼슬길을 좇는 서생(書生)의 그것이 아니었다. 학문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았고 자신과 가족의 편안함보다는 이웃과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였고, 일본제국주의라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독립운동에 직접 나서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선생 뿐 아니라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 권오설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 안동이었다.

이육사의 생가터에 조성된 청포도 시비 이육사의 생가터에 조성된 청포도 시비

이육사는 퇴계선생의 14세손(孫)으로 오롯이 퇴계의 향기 가득한 도산면 원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도산서원과 퇴계 종택 및 퇴계가 거닐던 옛길. '예던길' '녀던길'이 청량산까지 이어져 있는 그 마을이다. 도산서원이 지척에 있고 안동댐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인 토계천이 마을 앞을 흐르는 곳이다. 강 건너에는 고려태조 왕건의 전설을 머금은 '왕모산'이 자리하고 있고 마을에는 여전히 퇴계의 후손들이 모여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일제에 항거하는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이육사는 일본과 중국유학을 다녀오고 난 후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에 나선다.

육사는 1924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가 1925년 귀국했다가 곧바로 중국 베이징에 가서 중국대학에서도 공부를 이어갔다. 이어 중국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고 귀국한 1927년 가을 대구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 의거'였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현 대구 중앙로)에 배달된 폭탄이 터졌고 이로 말미암아 일본경찰과 은행원 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엄청난 폭음과 함께 은행 유리창 70여장이 깨졌고 그 조각들이 대구역까지 날아갈 정도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육사는 1년 7개월 동안 투옥돼 옥고를 치렀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이 때 수감번호가 264였다.

이후 육사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육사'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안동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안동대교를 넘어 옥동으로 넘어가기 전에 만나는 어가골 교차로에서 낙동강을 끼고 이어지는 8차선 도로가 '육사로'다. 태화동에는 이육사생가도 있다. 이처럼 이육사의 자취가 안동시내 곳곳에 배어있지만 무엇보다 안동사람의 가슴에는 이육사로 대표하는 저항의식이 깊게 각인돼있다.

이육사문학관 입구의 시비 절정과 이육사의 좌상 이육사문학관 입구의 시비 절정과 이육사의 좌상

육사가 태어난 집이 있던 생가 터인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는 원촌마을 입구로 현재는 청포도시비공원이 조성돼있다. 생가자리에는 시 '초가'(草家)시비가 세워져있고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청포도를 상징하는 포도알을 상징하는 화강석 조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청포도 시비에는 육사의 모습과 시 청포도가 양각돼 있다.

그 앞에 서서 육사의 대표시의 하나인 '청포도'를 감상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그가 바라던 손님은 '광복'이었을 테고 광복이 올 때를 기다리며 은쟁반에 모시 수건까지 마련하라고 조바심친다.

이육사는 그저 서정적이며 목가적인 시를 쓰며 광복을 기다리는 음유시인이 아니다. 그는 조선의열단에 가입해서 직접 독립운동에 나섰고, 시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북돋웠다. 1927년 대구 장진홍 의거 때 처음으로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44년까지 무려 17번이나 일제에 의해 투옥을 거듭했지만 그의 투쟁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시인이자 독립투사 그리고 기자이자 문학평론가로서의 삶을 살아 온 그의 정신은 퇴계로부터 비롯된 것이자 안동사람의 가슴에 흐르는 선비정신의 발현이었다.

생가 터에는 없는 이육사의 생가 '육우당'(六友堂)은 현재 두 곳에 복원돼있다. 원래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이 예상되자 1976년 기둥과 기와 등을 모두 헐어 지금의 안동시 태화동으로 이건했다.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된 홑처마 3량가(三樑架)의 일자형집이다. 안동 시내로 옮겨진 후 한쪽 일각문 자리에 대문이 서고 원래의 대문 자리는 이웃집 돌담이어서 담장도 대문도 없게 됐다. 소유권이 후손이 아닌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관리가 부실해지고 원형이 변형되자 고증을 거쳐 원촌마을에 있던 생가를 다시 복원해서 2004년 건립된 문학관 부지 내에 세웠다.

문학관에 재복원된 이육사 생가 육우당 문학관에 재복원된 이육사 생가 육우당

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은 육사의 삶의 자취와 향기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꾸며진 전시관과 추모객과 일반인들이 숙박을 할 수 있는 생활관으로 나뉘어있다.

문학관 입구에 세워진 이육사의 좌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비 절정을 배경으로 원촌마을 너머를 바라보는 동그란 안경을 낀 이육사의 모습은 독립투사로서의 강철같은 의지보다는 '문학청년'같은 순수함이 더 돋보였다.

문학관을 둘러보기 위해 입장권을 끊었다. 코로나시대라 드문드문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는 않고 있었다. 서울에서 안동역까지 KTX가 개통되면서 2시간으로 가까워졌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따뜻한 봄날이 되면 안동을 찾는 관광객들이 더욱 늘어난다면 문학관을 찾는 발걸음도 훨씬 잦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시실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이육사 시인의 흉상이다. 흉상 뒤로 보이는 17과 30, 27과 44라는 숫자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17은 17번에 이르는 투옥을, 27은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처음으로 투옥된 연도를, 30은 첫 시 '말'을 발표한 1930년을, 44는 만 40세가 되던 해인 1944년 베이징에서 순국한 것을 가리킨다.

전시관 2층에서는 수감번호 264에서 비롯된 이육사의 삶의 자취를 더듬어보게 된다. 2층 전시실을 다 보고난 후에는 카페에서 육사관련 도서들을 둘러보면서 커피 한 잔하는 여유도 가질 수 있다.

1층으로 내려가면 그의 독립운동 과정과 시와 평론 등 문학 활동을 일별할 수 있다. 한쪽에는 그가 순국했던 감옥을 재현하면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육사와 더불어 약산 김원봉과 안동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시현 선생의 모습을 나란히 배치해놓은 것도 눈에 들어왔다.

문학관을 돌아나오면서 마음이 숙연해졌다.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도 '기레기'라는 비난을 듣지 않고 이육사처럼 자신의 온 몸을 던져 권력의 불의에 항거하는 투사가 될 수 있을까하는 아쉬움도 함께 느꼈다.

문학관 앞에서 안동댐으로 흐르는 낙동강(지류)은 역사의 흐름처럼 여전히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원촌마을 앞흐르는 토계천. 강 끝 언덕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원촌마을 앞흐르는 토계천. 강 끝 언덕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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