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의 이른 아침에] 민주주의 위기와 사법부

노동일 경희대 교수

윤석열 검찰총장이 법무부의 2개월간 정직 처분에 불복해 낸 집행정지 신청의 심문기일이 오는 22일로 잡혔다고 20일 서울행정법원이 밝혔다. 사진은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의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검찰총장이 법무부의 2개월간 정직 처분에 불복해 낸 집행정지 신청의 심문기일이 오는 22일로 잡혔다고 20일 서울행정법원이 밝혔다. 사진은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의 모습. 연합뉴스
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나는 오늘 밤, 어떠한 두려움이나 편향됨 없이, 또한 정치적 기관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성향으로부터도 온전히 독립하여 주어진 직무를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지난 10월 26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선서식에서 에이미 코니 배럿 신임 연방대법관이 한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배럿 대법관 탄생은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인준 과정에서 배럿 대법관이 속한 소수 기독교 종파에 대해 제기된 우려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정치적 역풍을 무릅쓰고 임기 말 대법관 지명을 강행한 트럼프 대통령의 속셈 역시 비판에 휩싸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대선 투표에서 질 경우 소송전을 벌일 것이고, 2000년 선거처럼 연방대법원 판결로 대통령을 결정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던 시기였다. 배럿 대법관 임명은 '그때'를 대비하여 대법원의 6대 3 보수 우위를 확실히 다져 놓은 트럼프의 묘수로 여겨졌다. '나 자신의 성향'(my own preferences)으로부터도 독립적으로 직무를 수행하겠다는 특이한 다짐은 그런저런 우려를 의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2월 11일 미 대법원은 대통령 선거 후 거의 한 달여 계속된 트럼프 대통령의 소송전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텍사스를 비롯한 18개 주가 조지아, 위스콘신 등 4개 경합주 선거인단 투표를 무효화해 달라며 제기한 소송을 각하한 것이다. 간단하지만 미국 대통령 선거 절차는 개별 주법이 정하고 있고, 다른 주는 그에 대해 다툴 자격이 없다는 법리를 재확인한 결정이었다. 광범위한 선거 조작이 있었고, 연방대법원에만 가면 승리할 수 있다고 공언해 온 트럼프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배럿 대법관은 임명 초기 일부 정치적 판결에서 스스로 회피한 바 있지만 11일 대법원의 심리와 결론에는 동참했다. 취임 때 국민 앞에서 한 약속을 지킨 셈이다. 배럿뿐 아니다. 고서치, 캐버너 등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들 모두 이견이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대법원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다"면서 "지혜도 용기도 없다"고 비난했다. 대법원보다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대법관들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트럼프 재임 시절 망가지고 진흙탕 싸움으로 이어질 뻔하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대법원의 신속하고 단호한 결정 덕에 그나마 회복의 계기를 잡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정직 2개월 징계를 집행했다. 설마하던 사상 초유의 일이 현실화한 것이다. 무도(無道)하고 어이없고 비겁한 조치다. 민주주의의 본질인 절차적 정의를 숱하게 무시한 점에서 징계는 무도하다. "과거의 윤 총장이라면 이러했을 것이다"며 "소설 쓰시네" 소리를 들을 만한 내용으로 일국의 검찰총장 징계를 결정한 것은 어이가 없다. '판사 사찰'이란 엄청난 불법을 인정하면서 정직 2개월 결론을 내리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수사 대상 운운하는 것은 비겁하다. 징계에 대한 많은 분석이 나오고 있기에 더 이상 첨언은 생략한다. 이 자리를 빌려 하고 싶은 말은 다름 아니다. 사법부가 신속하고 단호한 결정으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행정부와 한 몸이 된 입법부는 말 그대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북한의 짜증 한 번에 표현의 자유, 재산권 등 민주주의의 성취를 위협하는 법률들이 마구잡이로 통과되고 있다. 통제 장치가 고장난 권력의 독주가 현실화 된 것이다. 공수처가 출범하면 권력층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는 불가능해질 게 분명하다. 검경의 권력층 비리 수사를 공수처에 이첩하라는 조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민주주의의 핵심은 권력 간 견제와 균형이라고 배우고 가르치는 지식이 아무 쓸모없어질 판이다.

이런 민주주의의 위기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법원이다. 내일 윤 총장의 징계 처분 집행정지 요청을 심리할 예정인 서울행정법원에 국민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이유이다. 법관이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떠한 두려움도 편향됨도 없이, 정치적 압력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향으로부터도 온전히 독립하여 직무를 수행할 것을 다짐한 처음의 뜻을 되새기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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