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예술의 기억] '기록'과 '기억'에 대한 책임감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지역 예술단체 창단의 주역에 대해 언급한 지난달 신문 칼럼이 나간 뒤, 한 원로 예술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지금까지 그 단체 창단 역사에서 가려진 부분이 있다. 주역이 바로 나였다. 오랜 세월 대구를 떠나 생활하다 보니 대구에 남은 사람에 의해 주관적으로 성과가 정리된 것 같다. 이제라도 바로 알아주길 바란다고 했다.

어느 장르든, 예술단체가 만들어지고 수십 년을 이어오는 것이 한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가능했을 리는 없다. 그분께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이런 경우는 문화예술단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월간 '대구문화' 창간(1985년 12월)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필자가 처음 '대구문화'를 맡았을 무렵, 시민회관(현 대구콘서트하우스)에 배부하러 가면 청경 아저씨들이 반기며 책자들을 소중하게 받아 올려 주셨다. 그분들은 매번 '이거 창간했을 때 우리도 같이 (배부)했는데…'라는 말을 항상 덧붙이셨다. 처음에는 반겨주시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그다음에는 '우리도 같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됐다.

'같이 했다'는 사람은 그분들만이 아니었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뿌리 찾기'부터 해야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창간의 주역으로 언급되는 사람들을 모두 찾아가서 만났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연극인 이필동 선생님을 비롯해서 언론인 이태수 선생님, 장긍표 당시 시민회관 관장님, 행정가 김선오 선생님, 시립예술단 사무국 권혁문 국장님, 그리고 현재 대구교육박물관을 맡고 계신 김정학 관장님….

그들은 모두 '대구의 문화예술'을 기록한 이 잡지가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잘 이어가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제대로 이어가겠냐는 '걱정'과 잘 이어가 주길 바라는 '당부'의 마음이 함께 전해졌다.

어찌 보면 대구 문화예술계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때, 이미 수많은 문화예술계 선배님들이 이런 '기록'과 '기억'에 대한 책임감을 지워주셨던 것 같다. 이 글이 얼마 전 어느 예술기획자가 필자에게 "새로운 콘텐츠들이 넘쳐 나는데 굳이 과거를 자꾸 들추고 챙기려 하냐"고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이 될지 모르겠다.

원고가 급할 때마다 부탁드리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단숨에 글을 써주셨던 고(故) 이필동 선생은 '대구연극사'를 두 번이나 펴내셨다. 그는 "대구의 연극이 언제까지나 서울 연극의 변방에서 한낱 지방 연극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자기 색깔을 확보한 특성 있는 지역극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대구연극의 뿌리를 찾고 선배들의 업적을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일평생 국내외 헌책방을 다니며 자료를 모아 향토문학관에 900여 권을 기증한 고(故) 윤장근 선생은 생전에 '대구 문화사 최후의 증인'으로 불렸다. 지금의 대구근대골목에 표기된 주요 지점들은 그의 증언에 따른 것이 많다. 그는 젊은 시절 오상순, 조지훈, 최태웅, 구상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녹향과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백록과 백조다방 등을 오가며 어울렸고, 그들이 떠난 뒤에는 그들의 흔적을 기록했다. '대구문단인물사'를 펴냈고 작고 문인들의 시비 건립에도 앞장섰다. 그는 필자에게 대구와 작은 인연이라도 있는 예술인들은 반드시 찾아서 기록하고 기려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작은 인연이라도 먼저 '찜'하면 그가 바로 대구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2020년이 시작됐다. 대구시는 2020년 한 해 동안 장르별 원로 예술인들을 추천받아, 구술 아카이빙을 하고 그들의 소장 자료를 기증·위탁받을 계획이다. 연초에는 지역의 연구자들을 위해 지역 문화예술 관련 잡지와 기록물들을 온라인으로 공개한다. 또 지난해 개정된 문화예술 진흥 조례에 따라 문화예술 기관별 자료 아카이빙을 의무화하고 해당 매뉴얼도 만들어 배포할 계획이다.

크게 팽창한 대구 문화예술계의 역사 정리가 짧은 기간에, 소수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시스템도 필요하지만 개개인의 애정과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 2020년, 대구문화예술 아카이브 구축의 주인공이 되어 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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