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컬럼

 
정우창 대가대 교수

[경제 칼럼] 일본의 샐러리맨 노벨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실패 거듭해도 연구 매진 환경 조성한국도 그런 기업 있는지 돌아볼 때1973년 설립 KAIST 올해로 46살우리에게도 노벨상 소식 머잖은 듯리튬이온 배터리는 휴대전화, 노트북, 전기차의 필수 부품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1970년대 석유위기 때 화석연료 없이 에너지 생산 방법을 연구하던 스탠리 휘팅엄(77) 뉴욕주립대 교수가 처음으로 제안했다. 휘팅엄 교수가 개발한 배터리 용량은 2볼트에 불과했다.그러나 1980년 존 구디너프(97) 텍사스대 교수에 의해 2배로 증가했다. 1985년 아사히카세이(旭化成) 연구원이던 아키라 요시노(71)는 폭발 위험을 줄이고 안전성을 높인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했다. 소니(Sony)는 요시노의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1991년 상용 리튬이온 배터리를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배터리는 제2의 반도체로 불린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2018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수요는 93GWh였으나 매년 35%씩 크게 성장해 2025년에는 941GWh에 이를 전망이다. 지난 10월 9일 발표된 노벨 화학상의 영예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휘팅엄 교수, 배터리 용량을 폭발적으로 늘린 구디너프 교수, 리튬이온 배터리의 안전성을 높여 상용화에 기여한 요시노 박사 등 3명에게 돌아갔다.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대학교수라는 공식을 종종 깨트리는 나라가 일본이다. 반세기 전인 1973년 소니 연구원이던 에사키 레오나는 반도체 연구로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정밀기계업체 시마즈제작소의 주임연구원인 학사 출신 다나카 고이치가 고분자 재료의 질량측정법 개발로 화학상을, 2014년에는 니치아화학공업의 나카무라 슈지가가 청색 LED 개발로 물리학상을 받았다.올해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인 아키라 요시노 역시 기업 연구원 출신이다. 그는 교토대학에서 학사·석사를 마치고 1972년 아사히카세이에 입사했으며, 처음 10년 동안 수행한 연구는 모두 실패했다.34세가 되던 1982년 구디너프 교수의 논문을 읽고 리튬이온 배터리 개발을 시작했으며, 2015년 고문으로 물러나기까지 34년간 리튬이온 배터리 연구에 매진했다. 아사히카세이 재직 기간도 43년이나 됐다.샐러리맨으로서 석사학위 소지자인 아키라 요시노의 노벨상 수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기업 연구소나 국책연구기관 모두 박사학위자 중심이다. 박사에 대한 인식은 우리와 일본이 많이 다르다. 우리에게는 박사의 의미가 과하게 포장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기업의 연구원도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연구 환경이 구축되어 있는지, 실패를 거듭하면서 43년간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기업이 우리에게도 있는지 돌아볼 때다.일본에는 논문박사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다. 석사 과정을 마친 뒤 기업에 근무하면서 한 분야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한 후 그 분야 연구 결과로 박사학위를 받는 제도이다. 논문박사는 실무 경험과 이론이 겸비된 진짜 전문가에게 주어진다.아키라 요시노도 입사 33년 차인 2005년 57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요시노 박사는 2017년부터 메이조(Meijo)대학 교수 겸 아사히카세이의 명예 펠로우로 재직 중이며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제조업 강국 일본에는 진짜 전문가인 수많은 '요시노'가 있다. 기업은 50세, 국책연구기관은 60세, 대학은 65세를 갓 넘긴 나이에 퇴직해서 전문성을 포맷(format)한 뒤 비전문가로 살고 있는 우리의 과학기술자 활용을 위한 대책 마련도 절실해 보인다.2019년 노벨 화학상은 1975~85년에 수행된 연구의 결과물이다. 1975년, 1980년, 1985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각각 608달러, 1천711달러, 2천458달러에 불과하였다. 노벨상의 씨앗이 뿌려질 토양은 존재하지도 않았다.우리나라 이공계 대학원 발전에 큰 기여를 한 KAIST가 1973년에 설립되었으니 올해로 46세 중년이 되었다. 톰슨로이터가 논문의 피인용 횟수를 조사해서 매년 선정하는 세계 상위 1% 연구자에 선정되는 국내 연구자의 숫자도 해마다 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도 노벨상 소식이 머지않았다.

2019-11-12 16:53:52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매일춘추] 멍때리기 대회

'왜 영혼 없는 말을 하느냐'는 말을 듣고 졸지에 영혼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 없는 눈으로 영혼 없는 밥을 먹고, 영혼 없는 커피를 마시고, 영혼 없는 책을 덮을 때까지도 집 나간 영혼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영혼이라고 집 나가고 싶은 적 없었을까요? 영혼이라고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고 싶었을까요? 영혼도 누군가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겠지요. 붉은 가을의 스위치를 끄고 골방에 처박히고 싶은 날도 있었겠지요. 부끄러움에, 안타까움에 말 보다 먼저 눈물 보일 때도 있었겠지요. 얼마 전, 영혼도 없이 영혼을 위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영혼 없는 절을 하고, 영혼 없는 제삿밥을 먹었습니다.우리는 '아주 가끔씩만' 영혼을 소유한다고 쉼보르스카는 말합니다. 끊임없이, 영원히 그것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이따금씩 '공포나 환희의 순간'에 영혼은 우리 몸속에 둥지를 틀고 오랫동안 깃든다고 합니다. 청소기를 돌리거나 가구 배치를 다시 할 때, 운동화 끈을 조이고 둘레길을 걸을 때도 영혼은 우리에게 손 내밀지 않습니다. 늦은 밤까지 숙제를 하거나 김치를 담을 때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대화에 겨우 '한 번쯤 참견할까 말까' 그나마 그것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워낙 과묵하고 점잖으니까요. 그러나 삭신이 쑤시고 아프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교대 근무를 자청하기도 한답니다.'기쁨과 슬픔'이 온전히 하나가 될 때, 말없이 우리 곁에 머무는 영혼,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도 묵묵히 제 임무를 수행하는, 영혼이 우리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영혼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영혼은 어린이와 노인에게 가장 오래 깃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이 청춘을 바쳐야 하는 시기에는 영혼을 반쯤 빼놓고 사는 게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영혼을 챙기는 것이 영혼을 귀찮게 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영혼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기 위함일지도 모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니, 삶은 얼마나 고달파야 하는지요. 영혼 없이 사는 것이 어쩌면 더 행복한지도 모르겠습니다.서울시 한강사업본부에서는 '멍때리기 대회'를 올해로 4회째 개최했다고 합니다. 대회의 목적은 새로운 경험과 더불어, 지친 현대인들이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아무것도 하지말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뒤처지거나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멍때리기 대회는 이러한 통념을 꼬집고자하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가치 있는 행위라는 것이지요.그렇다고 영혼이 자발적으로 육체에서 나갈리 있겠습니까마는 잠시나마 쉬는 시간을 주자는 의도겠지요. 하여 '영혼'이라는 말이 발화되기 전, 우리도 가끔씩 영혼의 외출을 적극적으로 도우는 건 어떨까요?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2019-11-12 11:10:39

소망이 복강 CT상에 맹장부의 부종과 주변 장기의 복막염 소견이 관찰된다. (사진출처: 탑스동물메디컬센터)

[박순석의 동물병원 24시] 개는 맹장이 없다? 맹장염 걸린 소망이

소망이(6·몰티즈)가 배가 아파 병원을 찾았다. 소망이는 평소에 매우 활발하고 식탐이 왕성한 반려견이었다. 2개월 전부터 설사와 식욕부진이 반복되며 복통까지 앓았다. 소망이는 이미 여러 동물병원을 다니며 췌장염과 장염 진단을 받고 입원치료도 받았으며 당시에도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그러나 치료를 받으면 며칠 동안 증상이 호전되었다가도 복통이 재발한다고 보호자는 하소연했다. 혈액검사에서는 별다른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초음파 소견과 실험실 검사에서 IGF-I(Insunlin-like Growth Factor-1) 수치가 매우 높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 복강 종양 또는 복막염이 의심되었다.복강 CT 검사 결과 맹장을 중심으로 소장과 장간막의 광범위한 부종과 복막염 소견이 발견되었으며 서둘러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복강을 절개하자 맹장은 염증으로 인해 단단하게 뭉쳐 있었고, 맹장에는 3mm정도의 천공 흔적이 발견됐다. 장이 천공되면서 장내 오물이 복강으로 누출되어 복막염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망이는 맹장을 적출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입원기간 동안 복막염에 대한 집중적인 약물 치료가 이루어졌다. 퇴원 후에도 2주간 식이 처방이 이루어졌으며 이제는 원래의 활달한 모습으로 회복하였다. 소망이의 맹장염과 맹장이 적출되어야 하는 상황을 보호자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개의 맹장의 해부학적인 차이점을 설명해야 했다. 구글 등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개는 맹장염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사람에게 발생하는 맹장염은 맹장 끝에 달려있는 충수돌기(appendix)에 발생하는 염증을 의미하며 정확하게는 충수염(appendicitis)이라 부른다. 우측 아랫배가 찌르듯이 아프면 충수염을 의심하고 병원을 찾는다. 병원에서는 초음파 진단으로 충수돌기가 8mm 이상 부어 있는지, 통증과 염증이 있는지를 확인하여 수술 여부를 결정한다.사람의 충수돌기는 장 미생물의 저장고 역할을 하며 굳은 변, 기생충, 이물질 등에 의하여 충수염이 발생하면 극심한 통증이 유발된다.반면 개와 고양이는 소장과 대장이 연결되는 결합부에 맹장이 돌출되어 존재하며 충수돌기가 없다. 이렇듯 각 동물의 해부학적인 구조는 오랜 기간 각 동물이 살아왔던 생활 섭식 형태에 따라 다르다. 의학과 수의학이 유사하면서도 분야가 나뉘어지는 이유이다.사람에게 맹장염은 일생에 누구나 경험할 수있는 다발하는 질병인 반면 개와 고양이에게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사람의 경우 충수염을 통상적으로 맹장염이라 부르지만 개는 맹장에 염증이 직접적으로 발생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맹장수술은 맹장말단부에 달려있는 충수돌기는 제거하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지만, 소망이에게 시술된 맹장 적출 수술은 맹장 자체를 적출하는 매우 큰 수술이다.매우 드문 개의 맹장염을 경험한 수의사가 "개의 질병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라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이렇듯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수술과 치료법이 매년 소개되고 있으며 더 정밀한 검사들이 활용되고 있다.반려인의 동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 수록 수의학은 점점 더 깊어지고 정밀해지고 있다. 생명을 책임지는 수의사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박순석 탑스동물메디컬센터 진료원장SBS TV동물농장 수의사로 잘 알려진 박순석 원장은 개와 고양이, 야생동물을 구조하고 치료한 30년간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올바른 동물 의학 정보를 제공하고 바람직한 반려동물 문화를 제시하고자 '동물병원 24시'를 연재한다.

2019-11-12 11:04:09

함무라비 법전. 1조 무고, 5조 공정한 판결 조항이다. B.C18세기. 루브르 박물관

[유물로 읽는 동서양 생활문화] 조국 파동과 함무라비 법전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의 눈을 해치면 그의 눈도 해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구다. 함무라비 법전. 복수법(復讐法)의 동해보복형(同害報復刑·탈리오 법칙)을 보여준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면 그대로 갚아준다는 의미다. 함무라비 법전에 실제 이런 조항이 있었을까?함무라비 법전 282개 조항 4천 년 전 법전이란의 역사 고대도시인 수사에서 1901년 12월~1902년 1월 프랑스 고고학 발굴팀이 길이 225㎝짜리 검은색 섬록암 비석을 땅에서 파냈다.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이다. 발굴팀은 무려 38만 점의 유물을 소장한 파리 루브르박물관으로 법전을 가져갔다. 루브르에 전시 중인 함무라비 법전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바빌로니아 함무라비(재위 BC 1790~1750년) 치세 때다. 서문과 282개 법조항을 수메르 쐐기문자로 적었다. 언어는 셈족 아카드인의 말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일부 마모된 부분을 빼고 246개 조항이 완벽하게 판독됐다.'눈에는 눈'의 복수법? 현대 자본주의 법전과 닮아시카고 대학 하퍼(R. F. HARPER) 박사가 1904년 펴낸 '바빌론왕 함무라비 법전'(1904년)을 펼치자. 앞서 소개한 '눈에는 눈' 조항은 이 책의 73쪽에 나오는 196조다. 197조 내용도 비슷하다. '남의 뼈를 부러트리면 그 사람의 뼈를 부러트린다.' 함무라비 법전은 이렇게 흉측한 보복, 복수법인가? 법전의 13%가 사형 조항이다. 잔인한 법으로 비칠 만하다. 하지만, 법전 조항의 50%가 계약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면 황소 한 마리 끄는 일꾼의 임금이나 집 지을 때 계약조건 등을 소상히 담는다. 법전의 3분의 1은 상속과 이혼, 친권의 가사 문제다. 현대 자본주의 법전과 다르지 않다.함무라비 법전 1조, 무고죄 엄중 처벌한국 사회 최대 이슈로 떠오른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에 함무라비 법전을 비춰본다. 하퍼 박사의 책 11쪽 함무라비 법전 1조는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범죄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고발했는데, 그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면 고발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 즉 무고죄를 사형으로 다룬다. 모든 법의 1조는 그 법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반영한다. 4천 년 전 함무라비 법전은 죄 없는 사람을 고발하는 무고 방지였다.함무라비 법전 5조, 판결 실수 판사 영구 추방또 하나의 조항을 보자. 역시 하퍼 박사의 책 11쪽을 펼쳐 5조를 읽는다. "만약 판사가 판단해서 결정을 내리고, 이를 서명해 판결했는데 나중에 그 판결을 바꾸는 경우에는 판사가 자신이 내렸던 판결을 책임진다. 판결했던 벌금보다 12배로 물어낸다. 그리고 그 판사를 판사석에서 내쫓고, 다시는 판사석에 앉히지 않는다." 판검사가 정의나 원칙,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수사하거나 판결하는 악행을 막는 조항이다.국민 분열 부추기는 여야의 고발 경쟁2018년 12월 20일 자유한국당은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국 민정수석 등을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로부터 10개월이 흘러 2019년 10월 2일 이번에는 더불어민주당이 조국 법무부 장관 관련 의혹을 수사 중인 검사와 검찰 관계자를 '피의사실 공표 및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고발했다. 한국 사회를 집권 통치하는 여당과 국정 운영 동반자인 제1야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발에 나서는 모습은 단순한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양당을 지지하는 세력 간 진영 다툼으로 번진다.함무라비 법전 교훈, 엄정한 사법 판결시민단체나 국민이 내 편 네 편 나눠 고발이나 비난 대열에 합류한다. 증거나 합리적 추론조차 없다. 공지영 작가, 유시민 작가, 광화문 조국 구속 촉구 집회, 서초동 조국 수호 집회, 조국 전 장관 동생 영장 기각 판사와 발부 판사. 우리 사회 원칙과 이성이 작동하는지 묻는다.그리스 최고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2천500년 전 말이 새삼스럽다. "이성은 신이 준 최고의 선물. 하지만, 증오나 좋아하는 마음을 가질 때 이성은 어이없이 무너진다." 진영에 갇혀 혼란스러운 현실에도 합리적인 국민은 바란다. 분열보다 통합에 우선 가치를 두는 정치를. 진영을 떠나 특권, 기득권, 반칙 없는 공정한 사회를. 무고, 자의적 수사나 판결이 없는 원칙과 정의의 사법부를…. 4천 년 전 함무라비 법전이 주는 교훈과도 일치한다.

2019-11-11 18:00:00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의 기록여행] 입시 지옥

'그동안 개교 준비를 하여오던 대구야간대학은 지난 28일 오후 2시 그 학교의 임시교사인 대구농과대학에서 개교식과 겸하여 제2회 신입학생 입학식을 거행하였는데 식은 장인환 씨의 개식사와 학장 대리 최해청 씨의 인사말씀이 있은 뒤 성황리에 폐식하였다 한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 30일 자)해방이 되자 교육 균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나 구분 없이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교육 기회의 균등을 의미했다. 일부 특권계층의 자녀들만이 누리는 교육 불평등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학교의 문턱을 낮추는 일이 시급했다. 1948년의 경우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 졸업자는 19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중학교 수용 인원은 고작 7만 명에 불과했다. 진학 희망자를 60%로 잡아도 4만여 명은 학교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학교 진학의 좁은 문은 대학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학교의 수용 인원을 늘릴 수 없었다. 교육 당국은 고육지책으로 야간학교 설치를 추진했다. 수만 명의 학생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 대구야간대학이 문을 열었다. 비록 야간이었지만 학교 수용 인원의 확대는 교육 기회의 균등과 맞아떨어졌다.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컸다. 첫머리에 인용한 기사 속의 대구야간대학은 훗날 대구대와 합쳐 영남대가 된 청구대의 전신이다.상급학교 진학의 좁은 문은 입시 지옥과 맞닿아 있었다. 말하자면 수요와 공급의 격차였다. 해방 직후에는 지금과 달리 가을학기였다. 그러다 보니 7, 8월에 입학시험이 집중되었다. 중등학교 시험을 치르고 나면 대학시험이 이어졌다. 전문학교들은 대부분 대학으로 승격되었다.대구에서는 대구농대와 대구의대, 대구사대 등이 해당되었다. 대학에서는 국어와 수학, 외국어에다 상식시험을 치렀다. 신체검사 또한 빠지지 않았다.우리 손으로 치르는 입학시험은 일제강점기 때와는 크게 달랐다. '태극기를 그려 보라'거나 '훈민정음은 누가 언제 만들었느냐'는 중등학교의 문제는 이를 말해준다. 또 대학 입학시험에는 우리말 테스트와 고전문학, 시조와 속담 등이 출제되었다. 학생부 종합의 시초라고 할까. 대학에서는 학업성적이 적힌 출신교장의 내신서를 요구하기도 했다.그 시절 최고의 인기학과는 법 관련 전공이었다. 의학계통이 뒤를 따랐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일부 학부모의 입시 과열은 이미 중학교 시험부터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킬 정도였다. 1950년에 대구에서는 입학시험지를 돈으로 사고파는 사건이 일어났다. 입학시험지 인쇄를 위탁받은 기관의 직원이 문제를 훔쳐 초등학교 교원에게 수십만원을 받고 팔았다. 또 그 교원은 2만원씩을 받고 학부모들에게 되팔았던 것이다.입시 거래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들의 눈높이에서 드러난 입시 지옥의 민낯이었다. 국가적 행사로 자리 잡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4일로 코앞에 다가왔다. 속은 그대로인데 포장을 달리한 입시를 해마다 치르고 있다. 올해도 다들 고생하셨다.

2019-11-11 18:00:00

경기대 미디어학부 특임교수

[김구철의 富의 비밀 수학] 기초의학에 지름길은 없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2%대 아래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2%가 무너지면 실업률은 치솟고, 세수도 감소해 내년은 어마어마한 재정 적자가 불가피할 것이다. 지금도 사상 최저인 금리를 더 낮춰본들 투자는 제자리에, 부동산만 폭등할 것이다. 22년 전 IMF 외환위기의 악몽이 다시 도래할 수 있다. 그때가 외부요인에 의한 아시아, 동구권의 위기였다면, 이번에는 내부 요인에 의해 발생한, 한국만의 위기라는 차이가 있다.올해 노벨의학상 공동수상자인 윌리엄 케일린 하버드대 교수가 방한해 기자들과 나눈 대화를 보며, "아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평범하지만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위대한 지혜를 담고 있었고, 기초과학·응용과학이 주제였지만 한국 경제에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금과옥조였다.'인류 전체에게 도움을 주려고 고민했다.''처음부터 만루홈런을 기대하지 마라.''지식이 충분히 축적되고 다져진 뒤에야 응용이 가능하다.''자영업자' '노조' 식으로 특정 집단을 위한 정책은 위험하다. 공동체 전체를 크게 보는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 '일거에' '단숨에' 격차를 해소하고 공정 경제를 구현하려는 정책은 과욕이다. 단계적 접근으로 역풍을 피해야 한다. 범죄단체의 수괴로 인식된 자가 장관이라면 개혁이 불가능하다. 개혁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케일린의 마지막 말. '기초과학에 지름길은 절대 없다.'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자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에 왕도(王道)는 없다'를 연상시킨다. 경제가 어려운데 해법은 있느냐는 질문에, 대통령은 비무장지대에 평화 경제구역을 만들고 남북 협력체제를 구축하면 일본도 추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방으로' 해결하려는 '평화 경제론'은 박근혜의 '통일 대박론'과 무슨 차이인가? 한 방으로 해결되면 애초에 위기가 아니다. '경제에 왕도는 없다.'

2019-11-11 17:38:56

김준 고려대 사학과 초빙교수

[김준의 시사로 읽는 한자] 南郭先生(남곽 선생) 실력 없이도 한자리하는 사람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은 우(竽·관악기의 일종) 연주를 즐겨 들었다. 합주를 좋아한 그는 늘 300명의 악사들에게 동시에 연주하게 했다. 어느 날 남곽(南郭)이라는 성을 가진 자가 찾아왔다. 자기도 우를 잘 부니 왕을 위해 연주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선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악단에 합류시키고 다른 악사들과 같이 대우했다. 세월이 흘러 선왕이 죽고 아들 민왕(湣王)이 등극했다. 그는 아비와 달리 독주를 좋아했다. 그러자 남곽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남곽이라는 자는 원래 처사(處士·할 일 없는 지식인)로서 우를 연주할 줄 몰랐다. 합주 때 연주하는 시늉만 하고 악사로서의 그럴싸한 대우를 누리며 살았던 것이다. 300명이 함께 연주하는 데 남곽이 꼽사리 낀다고 무슨 문제가 있었겠는가. 그는 독주가 아닌 합주라는 허점을 이용했고 왕에게 아부할 줄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남곽 선생(南郭先生)이라 불렀다. 지금은 실력이 없으면서도 한자리하는 사람을 남곽 선생이라고 비꼬아 말한다. 우를 불 줄도 모르면서 숫자를 채운다는 남우충수(濫竽充數)란 말도 같은 뜻이다.이 이야기는 신하를 통솔하는 방법을 모은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상편(上篇)에 나온다. 관리를 임명할 때는 남의 말을 듣지 말고 꼭 한 사람씩 직접 점검할 것을 권하는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남곽 선생이 많다. 사람들은 자주 남곽 선생의 허풍에 현혹되기도 한다. 교수라고 다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인이라고 다 신앙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정치인이라고 다 신념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내 자식 하나 끼워 넣은들 무슨 문제가 될까라고 생각하는 권력도 많다. 남곽 선생들은 아부와 뇌물, 뻔뻔함과 허풍으로 세상을 탁하게 만든다. 어울리지 않는 남곽 선생들을 걸러내고 적임자를 찾는 공정성을 말하고 싶다.

2019-11-11 17:38:12

김기수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세계의 창] 미국의 총기폭력과 규제

미국 시민 1인당 총기 1.2정 보유한 셈매년 거의 300건 집단 총격 사건 발생수정헌법 2조'NRA 격렬 반대 넘어서엄격한 규제 법안 제정 목소리 쏟아져미국에서는 매년 총기 폭력(gun violence)으로 수만 명씩 죽거나 다치고 있다. 최근에는 학교, 극장, 나이트클럽, 교회, 야외공연장, 슈퍼마켓 등 공공장소에서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집단 총격 사건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총기 폭력을 관찰하는 한 사이트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매년 거의 300건의 집단 총격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보다 대중의 관심을 덜 받는 총기에 의한 자살, 우발적인 사고, 개인적인 살인 등도 끊이지 않고 있다.미국 질병통제예방본부에서 나오는 사망률을 자료를 기초로 만들어진 통계에 의하면 매년 11만3천108명이 총기 관련 사고를 당하고, 3만6천383명이 사망한다고 한다.이와 같이 미국에서 총기 관련 사고가 일상화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총기 보유율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데서 찾을 수 있다.미국 인구는 약 3억 명이고 이들이 보유한 민간 총기는 총 3억9천300만 정으로, 1인당 1.2정을 보유한 셈이다. 세계 인구의 4%인 미국인이 세계 민간 총기의 42%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지속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경찰관의 비무장 흑인들에 대한 총격 사고도 흑인에 대한 경찰의 편향된 조직문화에 크게 기인하지만, 결국은 누구나 총기를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으로 인한 경찰의 과잉 대응이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미국의 높은 총기 보유율 배경에는 수정헌법 2조와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전미총기협회)가 있다.시민이 총기를 보유하고 소지할 권리를 명시한 200년 이상 유지된 수정헌법 2조는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목적으로 탄생했지만, 그 당시 국가가 개인을 온전히 보호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광활한 땅을 개척해야 했던 미국에서는 총기 보유는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권리로 간주됐고, 수정헌법 2조가 이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NRA는 1871년에 설립해 현재 500만 회원을 보유하고 엄청난 예산을 활용해 정치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총기규제 법안 반대를 위한 로비에 집중하고 있다. 정치인과 NRA 사이의 이해 사슬은 총기로 인한 사망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음에도 보다 엄격한 총기 규제를 위한 노력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이뿐만 아니라 NRA는 '총기 보유'를 마치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고, 불의에 항거하는 책임감 있는 시민 등 긍정적 이미지로 전환해 미국의 풀뿌리 총기문화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이 문화는 특히 보수 성향을 가진 유권자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했다. 따라서 정치인들도 이들의 표를 의식하여 총기 규제에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이런 이유로 미국에서는 총기의 구입, 판매 및 보유에 대해 매우 관대한 법규를 가지고 있으며, 이마저도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다. 그 결과 집단 총격 사건에 사용된 대용량 탄창과 이를 장착할 수 있는 군사용 자동 및 반자동 살상무기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뉴질랜드는 지난 3월 이슬람교 사원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반자동 소총으로 51명이 사살된 후 총리 주도로 신속하게 엄격한 총기 규제 법안을 제정하였다. 그녀는 총기 규제와 관련해 솔직히 미국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그러나 총기 보유가 뉴질랜드에서는 특권이지만 미국에서는 권리라는 차이가 있다. 권리는 특권보다 제한하기 훨씬 어렵다.지난 8월 연이어 발생한 텍사스주 엘파소와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의 집단 총격 사건이 발생한 뒤 75% 이상의 미국인이 총기 구매자의 신원조회 확대 등 보다 엄격한 총기 규제 법안의 제정에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이번에도 과거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될지, 아니면 미국의 수정헌법 2조, NRA의 규제 반대 노력 및 뿌리 깊은 총기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소한의 의미 있는 총기 규제 법안이라도 제정될 수 있을지 지켜볼 뿐이다.

2019-11-11 11:26:14

이상길 대구시 행정부시장

[기고] 스토리가 있는 문화도시, 대구  

오늘날 세계의 주요 도시는 도시 이미지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활용하고 있다. 도시만의 고유하고도 특별한 이야기를 활용해서 문화상품을 만들고 도시의 이미지와 브랜드를 창조한다. 스토리는 무형의 창조적 콘텐츠로서 보다 활발하고 매력적인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우리 대구에서는 민족시인 이상화를 비롯해 한국 근대 문화예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가 근대골목이라는 관광 콘텐츠, 그리고 스토리를 입은 공연 콘텐츠로 재탄생해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여기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시인 이상화와 이장희가 문학을 이야기하고, 작곡가 박태준·박태원 형제가 음악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근대골목, 그 길을 뒤이어 걸어간 음악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6·25 피란 시절을 전후로 전국에서 모인 예술인들과 함께 교류하며, 예술로 지역사회를 치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남산동에서 향촌동에 이르기까지, 예술계 선배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으며 공연 포스터를 붙이고, 후원금을 모아 음악회를 열었다. 매일 저녁 음악감상실 '녹향'에 모여 예술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이들은 음악가를 길러낼 교육기관을 만들었고 교향악 운동과 오페라 운동에 힘썼다. 예술만이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지역사회에 힘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술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 대구에서는 창단 55주년을 맞은 시립교향악단이 활약하고 있고, 매년 가을 국제오페라축제와 월드오케스트라시리즈가 펼쳐지고 있다. 대구시는 이런 저력을 바탕으로 2017년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에 음악 분야로 당당히 가입했다.이에 대구시는 더 늦기 전에 근현대 대구문화예술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수집하기로 했다. 올해 초 문화예술 기관·단체장 및 실무진이 참여하는 '아카이빙 위원회'를 구성했고, 지난 8월에는 문화예술 진흥 조례 개정을 통해 문화예술 자료 보관을 의무화했다. 올해는 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가입 2주년을 기념해 클래식 운동에 힘쓴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음악 이론가들의 자료와 생존 원로 음악가들의 증언을 수집해, 지역 방송사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내년부터는 순차적으로 문학, 무용, 연극 등 예술 각 분야의 원로 예술가들의 증언과 자료 수집을 통해 새로운 스토리를 발굴할 계획이다. 그들이 남긴 하나하나의 점들을 이어 근대골목 코스의 뒤를 잇는 '문화지도'를 개척할 것이다. 향촌동·북성로 등 구(舊)도심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부터 6·25 피란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의 흔적과 스토리들을 발굴·재조명하여 문화관광·교육 콘텐츠로 활용할 계획이다.이 밖에도 대구시 산하 문화예술 기관·단체들도 꼼꼼히 기록을 점검하고 있다. 대구문화재단이 10년사를 준비하고 있고 대구문화예술회관도 대구시립예술단과 함께한 30년의 흔적을 정리하고 있다.미래 문화도시는 더 이상 특정 건물 혹은 기반시설 건립을 통해 도시의 랜드마크를 만들지 않는다. 도시 고유의 스토리를 간직하고 그것을 랜드마크로 삼아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킨, 지속가능한 문화도시가 바로 우리 대구시가 지향하는 미래가 될 것이다.

2019-11-11 11:11:05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매일춘추] 현장리서치-창극 패왕별희

'덜컹' 손잡이에 문제가 있었던지 카페에 들어오는 손님마다 철문이 문틀에 부딪히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주목된 시선이 무안했던지 괜히 문에다가 한마디씩 하며 시선을 회피한다. '패왕별희' 공연을 보기 위해 오랜만에 국립극장을 찾았다. 여유 있게 움직인다는 것이 너무 과해서 2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셈으로 주변을 꽤 돌아다녔는데 카페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내소에 물어 찾아간 곳은 들어오는 손님마다 문소리 때문에 주목을 할 수 있는 연극적인 카페였다. '국립극장 근처 카페는 역시 다르구나' 하고 혼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국립극장은 지하철을 타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오르막을 한참 올라야하는 산중턱에 위치해있다. 그 길은 계절을 잘 맞춰서 가면 꽤 멋진 전경을 누릴 수 있어 참 좋아하는 길이다. 긴 오르막에도 힘들지 않고 콧노래가 나왔던 것은 아마 창극 '패왕별희'에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패왕별희' 라고 하면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를 먼저 떠올릴 텐데, 이 영화 제목은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전쟁이야기인 중국 경극에서 따온 것이다. 이 경극을 한국의 창극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어떤 협업에 의한 시너지 냈을지 궁금했다. 대만 배우출신 우싱궈가 연출을 맡았고 작창 및 음악감독은 이자람이 맡았으니 기대는 한층 더 올라갔다.객석은 거의 만석이었고 인터미션 포함, 세 시간이 넘는 공연시간동안 관객들은 꽤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기대를 너무 한 탓인지 나는 꽤 실망스러웠다. 창극과 경극의 장점이 부각되기보다 적당히 서로 양보한 느낌이었다. 경극의 고난의도 동작들은 국립창극단원들의 단기간 연습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것을 기대하고 간 것이 아닌데 따라하려고만 노력한 것 같았다. 또 창의 매력적인 가락은 익숙하지 않은 중국의 대서사에 갇혀 헤매고 있었다. 왜 국립창극단이 딱딱한 경극을 창으로 엮을 생각을 했을지 의문이다. 그래도 나를 제외한 관객들의 표정은 밝았던 것 같다. 어떤 장면에는 배우가 창을 끝낼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나와서 관객수준이 확실히 지방에 비해 높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수준은 공연을 즐기는 주체의 적극성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최소 수억 원대의 제작비를 써가며 유명 연출가와 유명안무가를 데리고 왔어야했을까? 난 초나라 한나라 이야기보다 차라리 해님 달님 이야기가 더 좋고 요란한 의상과 분장, 동작의 경극보다 차라리 단백한 판소리가 좋다.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2019-11-11 11:10:05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 오징어잡이 배 선원 추방, 뭔가 이상하다

왜 그렇게 서둘러야 했을까. 좀 더 시간을 갖고 그들의 범죄 혐의와 귀순의사 등을 철저히 확인하는 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지난 2일 해군이 나포한 북한 선원들을 7일 돌려보낸 우리 정부의 처사에 대한 이야기다. 사후에도 여러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정부의 대응이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3명의 선원이 16명을 선상에서 살해한 게 사실일까. 공개된 사진의 낡고 좁은 오징어잡이 배 위에서 한 사람씩 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사실이라 해도 범죄 정보는 어떤 경로로 얻은 것인가. 선원들이 자발적으로 범죄행위를 진술했을까. 북한 측이 먼저 정보를 제공하고 송환을 요구한 것인가. 배는 또 왜 그토록 신속히 반환했나. 청와대 관계자의 휴대전화 문자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면 공개하지 않으려 했던 건가. 의문점은 많지만 일단 정부의 발표를 믿기로 하자.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번 사안을 다루는 정부의 태도에는 의구심에 앞선 본질적 문제점들이 허다하다."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헌법 제3조의 이른바 '영토조항'이다. "북한 지역은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에 속하므로 북한 국적의 주민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유지함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대법원 판례는 따라서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한마디로 북한 주민도 헌법상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지금까지 모든 판례와 정부 정책이 북한 주민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통일부 대변인은 "이들이 살인 등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로 보호 대상이 아니며, 우리 사회 편입 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위협이 되고 흉악 범죄자로서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정부 부처 협의 결과에 따라 추방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마치 중국 정부가 탈북민 추방을 결정할 때의 발표문을 보는 듯하다. 특히 헌법상 우리 국민으로 간주해야 하는 북한 주민을 '국제법상 난민' 운운하는 부분이 그렇다.'살인 등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로 보호 대상이 아니다'라는 해석 또한 동의하기 어렵다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살인 등 범죄자의 경우 보호 대상자로 결정하지 않을 수 있다. 동 법은 대한민국의 보호를 받으려는 북한 주민이 "신속히 적응·정착하는 데 필요한 보호 및 지원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흉악범의 경우 우리 정부가 필요한 보호조치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규정일 뿐이다.일단 우리 관할구역에 들어 온 북한 주민을 추방(혹은 송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아니다. '추방' 역시 사용해서는 안 되는 용어이다. 북한 주민을 그의 의사에 반해 북한으로 강제 추방할 수는 없다. 추방이 아닌 송환이라 표현해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헌법상 우리 국민이기 때문이다. 통일부 장관은 국회에서 선원들의 "귀순 의사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선원들이 귀순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는 말이다. 공개된 문자에 따르면 선원 송환 시 '자해 우려' 때문에 적십자사 요원이 아닌 경찰관이 동행했다고 한다. 그들이 북송에 극렬히 저항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범죄자, 더구나 귀순 시도자에 대한 북한의 처우가 어떤지는 다 아는 바이다. 우리 정부가 '고문당할 위험이 있는 나라로 개인을 추방, 송환, 인도해서는 안 된다'는 유엔 고문방지협약을 위반했다는 국제적 비판이 일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이번 사안은 귀순의사를 밝힌 북한 주민을 강제 송환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중대한 문제이다. 기밀 운운하며 유야무야 넘길 사안이 아니다. 북한 주장에 따라 살인자라는 선입견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북한은 중요 탈북자들에 대해 항상 '범죄자'로 규정하곤 한다. 북한 측이 중대 범죄자로 지목하면 송환하는 선례가 될 위험도 있다. 우리의 주권과 법치주의에 입각하여 국민적 동의를 얻어 처리해야 할 사안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통일, 민족 등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와 인권의 보장, 법치주의라는 대한민국의 가치를 버리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019-11-10 17:34:01

정상환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기고]올바른 검찰개혁의 방향

최근 야당에서 벌거숭이 임금님을 패러디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자 여당은 대통령의 품위를 격하시켰다는 이유로 크게 반발하였다. 사실 많은 국민들이 조국 전 법무장관 사태를 지켜보면서 '벌거숭이 임금님' 우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벌거숭이 임금과 다른 점은 자신이 앞장서서 조 전 장관이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고 능력 있는 적임자라고 강변했다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그동안 양심적 지식인임을 자처했던 많은 이들이 문 대통령의 주장에 아무런 비판 없이 동조하였다. 국론 분열이라는 치명적 결과만 아니었다면 한 편의 소극을 보는 기분이었다.검사 생활을 오래 했던 필자 역시 검찰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한다. 1999년 심재륜 고검장의 항명 파동 때 서울중앙지검에서 평검사들의 총장 반대 서명운동을 주도한 적이 있고, 모 월간지에 "탈피하지 않는 뱀은 죽는다"는 제목으로 검찰의 인사 관행과 수사 시스템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수사기관의 인권침해적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그러나 지금 정부의 검찰 개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적절하다. 검찰 개혁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조 전 장관을 검찰 개혁의 상징 내지는 순교자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공수처' 법안은 입법 체계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내용 면에서도 문제가 많다. 수사 대상은 고위 공직자들을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반면에 기소 대상은 판사, 검사, 경무관급 이상 경찰관으로 제한하는 기형적 법안인데, 검사를 표적으로 한 입법이라는 것이 명백하다.여권 인사를 수사하는 검사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비근한 예로 '피의사실공표'의 경우 수사 정보가 수사기관에 의해 유출되기보다는 사건 관련자에 의해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공수처는 여권 인사를 한창 수사하고 있는 검사에 대해서 '피의사실공표' 등을 이유로 소환 조사할 가능성이 있다. 여당은 공수처장 임명 절차가 중립적이라고 강변하지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추천위원회의 구성원 면면을 보면 결국 대통령이 선호하는 친여 성향의 인사가 지명될 것이 분명하다.필자는 제대로 된 검찰 개혁 방안이라면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검사 인사권을 대통령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여야 한다. 인사권의 독립 없이는 정치적 중립은 요원하다.둘째, 검찰권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가령 사회의 주목을 받는 주요 사건이나 당사자의 신청이 있는 경우 피의자, 피해자, 관계인, 변호인 등을 상대로 그 검사가 합법적이고 인권친화적인 수사를 진행하였는지 사후에 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인사에 반영하여야 한다.셋째, 수사만능주의를 극복하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정치적 고려에 의해서 발단된 사건에 대해서는 검사가 수사 착수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검찰권을 이용한 국정운영은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다만, 이를 검사에게만 맡길 경우 자의적 판단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사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검사의 요청 또는 직권으로 수사 회피 내지는 유보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2019-11-10 15:41:05

종이에 담채, 27.3×4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심사정(1707~1769) '선유도'

선유(船遊), 곧 뱃놀이는 상당히 고급한 유흥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뱃놀이의 흥겨움, 유쾌함의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인공은 뱃전에 의지해 만경창파를 무심히 응시하고, 마주 앉은 주인공의 친구 역시 먼 물결을 망연히 바라 볼 뿐이다. 배는 소용돌이치는 물결 한 가운데 있어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이 위태로워 보이는데 사공만 온 몸을 기울여 삿대질 하며 풍랑을 헤쳐가고 있다.이 배는 유람용이 아니라 침실과 서재가 있는 주거용을 그린 것 같다. 당나라 때 범택(泛宅), 부가(浮家)라는 말이 있었다. 물에 띄운 집, 물에 떠 있는 집은 곧 배이다. 영어로는 '하우스보트', 순 우리말로는 '집배'가 된다. 배를 집으로 삼는 주거(舟居)는 한편으로는 자유를 누리는 생활이다. 중국은 북마남선(北馬南船)이라고 하듯 강남은 운하와 수로가 길처럼 연결되어 배로 어디든 갈 수 있다. 일엽편주를 나의 집으로 삼아 떠다니며 인간 세상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싶다는 선망이 범택부가라는 말에 담겨있다. '선유도'의 배는 세상에서 자유롭고 싶은 심사정의 심정을, 배를 둘러싼 파도는 세상살이의 세파(世波)를 의미하는 듯하다.주거(舟居)가 주는 자유와 함께 꼭 필요한 것이 가끔 마주할 친구와 다소의 물건이다.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는 청색 책갑에 든 책과 꽃이 꽂혀 있는 꽃병, 벼루로 보이는 물건이 있다. 그 옆의 고목 분재(매화가 아닐까)에는 반려 학(鶴)이 한 마리 앉아 있다. 정수리가 붉은 단정학(丹頂鶴)이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주거(舟居) 일 것 같다.심사정은 증조부 심지원이 효종시대에 영의정을 지냈고, 조부의 형 심익현이 효종의 부마로 왕실 외척이었던 명문대가였으나 조부가 역모사건에 가담해 극형에 처해져 집안이 완전히 몰락했다. 평생 동안 그림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고 생계를 위해서도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50여 년간 우환이 있거나 즐겁거나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 몸이 불편해 보기가 딱할 때도 물감을 다루며 궁핍하고 천대받는 쓰라림이나 모욕을 받는 부끄러움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현재거사묘지명」)고 할 정도로 화가의 일생을 살았다.'선유도'는 심사정이 평생의 화업(畵業) 속에서 이룬 부드러운 먹선의 격조 있는 묘사와 은은한 담채의 무르익은 솜씨를 잘 보여주는 아름답고도 쓸쓸한 그림이다. "갑신신추 사(甲申新秋寫) 현재(玄齋)"로 날짜와 호를 쓰고 앞쪽에는 연주인(聯珠印) '현재'를 찍었고, 말미에는 '심씨(沈氏)', '이숙(頤叔)'으로 성씨와 자를 새긴 인장을 찍었다. 부친 손세기(1903-1983) 선생을 이어 이 그림을 소장했던 손창근(1929년 생) 선생이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명품들 중 한 점이다. 미술사 연구자

2019-11-10 06:30:00

채명 무용평론가

[매일춘추] 청년예술가에게 배우자!

몇 주 전 대구의 한 거리에서 열린 '거리춤 페스타'에서 젊은 친구들의 춤 경연 방식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청년들이 이미 예전부터 해오던 거리춤 축전이 어른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축제 주최 단체에 인사차 들른 중장년들이 젊은이들의 춤 경연방식에 감동 받아,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즉석 찬조를 하기도 했다.무엇이 이들의 발목을 잡고, 앉는 자리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불편한 춤판을 지키게 했을까? 대부분 관객들의 공통된 감정이 공유되었다. 첫째, 청년 심사원들은 공정했다. 예선전에선 빠른 진행을 위해 오픈되지 않았지만, 참가자 중 반을 뽑은 후, 본선 16강 선출부터는 모든 심사결과가 관객 앞에서 바로 3초 만에 결론이 났다. 관객의 반응도 심사에 고려되는 듯이 보였다. 스트릿 댄서들이 뛰어난 즉흥적 춤 솜씨를 보일 때, 관객들은 함께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기본 방식은 1대 1 배틀이었다. 모든 순서와 대결자 선택은 그 자리서 추첨으로 이루어졌고, 1분간씩 자신의 춤 기술을 즉석에서 주어진 음악에 맞춰 선보였다. 어떤 음악에 어떤 대결자들이 붙는가도 관심거리였다. 그리고 의상을 유난하게 갖춰 입은 춤꾼들, 추리닝 입은 이들, 뚱뚱한 친구, 몸매가 좋은 친구 등 그러한 부대적인 조건이 심사에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오로지 춤 실력이었다.둘째, 춤꾼들은 자유로움 속에 최선을 다한 후 결과에 승복했다. 그들은 춤추는 동안 자신의 기량을 뽐내며 서로 약간의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세 명 심사원들이 손을 들어 위너를 가려내면, 춤꾼들은 쿨하게 예의를 다해 서로 격려한 뒤 물러났다. 그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심사원들은 경연이 끝난 후 초청공연자로서 바로 무대에 올라, 신화적 존재감으로 참가자와 관객들에게 감동의 피날레를 선사했다.현실 사회도 이리 공정할 수는 없는 걸까? 뒤에서 어른들이 경연을 좌지우지 하여 젊은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이 상처를 입었던가? 아직도 예술경연장에서 어른들의 입김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공정한 심사는 경연이 끝난 후 그 자리서 오픈되는 방식이 되어야함을 청년예술가들로부터 배운다.행사 후 감동의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른들이 자신의 노하우로 더 좋은 방안을 가르쳐 보겠다고 젊은 친구들을 붙잡고 열심히 얘기하는 분들이 있었다. 뒤에서 또 다른 어른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한다. "저러면 안 되지, 젊은 세대들에게 배울 생각을 해야지, 저러니 구리다는 소릴 듣지." 기성세대는 아직도 젊은이들을 염려한다. 자, 이제 꼰대들은 입을 닫고 청년 세대를 위하여 주머니를 풀 때다. 채명 무용평론가

2019-11-10 06:30:00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종문의 한시산책] 심부름꾼에게 묻다(문래사, 問來使) - 도연명

그대 산속에서 여기 왔으니 / 爾從山中來(이종산중래)얼마 전 천목산을 출발했겠군 / 早晩發天目(조만발천목)우리 집은 남쪽 산 아래 있는데 / 我屋南山下(아옥남산하) 지금쯤 몇 떨기의 국화가 폈나 / 今生幾叢菊(금생기총국) 이미 장미 잎은 떨어졌겠고 / 薔薇葉已抽(장미엽이추) 틀림없이 가을 난초 향기롭겠군 / 秋蘭氣當馥(추란기당복) 돌아가 산속으로 찾아가 보면 / 歸去來山中(귀거래산중) 산속에는 술이 응당 익고 있겠지 / 山中酒應熟(산중주응숙)이 시의 작자가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술술 넘어가는 시풍을 보면, 아닌 게 아니지 싶기도 하다.먹고 살기 위해 잠시 체질에도 맞지 않은 벼슬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도연명은 체질적으로 전원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벼슬에 몸이 꽁꽁 묶여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고향의 전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위의 작품은 고향에서 온 심부름꾼에게 고향 소식을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은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남산 아래 있는 우리 집에는 지금쯤 국화가 옹기종기 피어 있을 게다. 게다가 가을 난초가 제철을 만나, 향기를 내뿜고 있을 터다. 어디 그 뿐인가. 좋은 술이 한창 익어가고 있을 테니, 가을난초 향기를 맡으면서 막걸리에 국화꽃을 띄워 마시면, 커- 취한다, 이렇게 좋을 수가.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나는 지금 먹고 살기 위해 벼슬에 꽁꽁 묶여 있다, 흑흑!'"신매동 살고 있는 참 어여쁜 시인님이 / 지하철 2호선을 스무 정거장 타고 와서 / 칼국수 먹고 가라네, 아 그것도 손칼국수! // 야호! 하고 외치며 뜀박질을 했다마는 /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근무이탈 할 수가 없어 / 배달 좀 해 달라 했네, 스무 고개 넘어 와서 // 아 글쎄, 그랬더니, 아 그렇겐 못한다며, / 정말로 먹고 싶으면 사표 쓰고 오라고 하네 / 에라이 사표를 쓰자, 작심했다.... 참는, 봄날!"변변찮은 나의 시 '봄날'이다. 봄이 오면 나도 퇴직을 하게 되니, 마음 탁 놓고 칼국수를 먹으러 달려가도 될 게다, 야호, 야호!

2019-11-09 06:30:00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

[광장]대구 인류의 원류를 찾아

2006년 달서구 월성동 777-2번지 아파트 부지 일대에서 1만3천 184점에 이르는 다량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의 발굴은 대구지역 인류 역사를 신석기시대에서 구석기시대로 앞당겨주었다.월성동 구석기 유물 발굴 중 특이한 점은 구석기 제작지의 존재였다. 이곳에서는 석기 제작의 원석인 몸돌, 몸돌을 가공하는 데 사용했던 망치돌, 몸돌로부터 떼어 낸 격지(몸돌에서 산출된 가공 돌), 긁개, 새기개, 찌르개, 흑요석 등 다양하고도 많은 석기들이 발굴됐다. 그리고 받침돌(臺石)을 비롯해 모룻돌도 함께 출토되었다. 특히 화산분출 때 형성되는 유리질 화산암인 흑요석은 최근 구성광물 분석결과 백두산 기원으로 밝혀져 대구 최초 인류 기원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동 중에 다른 지역 구석기 인류와의 물물교환으로 흑요석을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장소 관련성을 입증하는 데 있어 흑요석은 가장 중요한 과학적 수단이다.후기 구석기시대로 입증된 달서구 월성동 유적과 유물은 약 2만여 년 전의 것으로, 2만 년 전 보다 훨씬 이전에 백두산 일대를 출발하여 대구로 구석기인류가 이주해왔다고 볼 수 있다.그런데 백두산 일대에서 살다가 이동해 온 대구 최초 인류는 또 다른 외부 이주 세력과의 혼혈로 인해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2017년 언론에 공개된 신석기시대 인류의 유전체(게놈) 비교분석 관련 연구에 의하면 한민족의 기원이 알타이산맥에서 몽골, 중국 대륙을 거쳐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기존의 북방계설(언어, 외모 등 유사성) 보다 오히려 동남아시아에서 올라 온 남방계설에 무게가 더 실리는 과학적 증거가 드러났다. 즉, 우리 민족의 유전체는 고립된 현대 베트남, 타이완 원주민 유전체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북동쪽 프리모레 지방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인류 두개골 유전체에 결합시켰을 때 가장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특히 고구려, 동부여, 옥저 영토였던 프리모레 지방의 동굴(악마의 문 동굴, Devil's Gate Cave)에서 발굴된 약 7천 700년 전 신석기시대의 40대 여성, 20대 여성 유골에서 채취한 유전체 분석에서 드러난 연구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현재의 한국인과 같은 갈색의 눈, 앞니가 삽처럼 생긴 수렵채취인으로 밝혀졌다. 또한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유전변이, 고혈압에 약한 유전자, 몸 냄새가 적게 나는 유전자, 마른 귓밥 등의 유전자 특성이 현대 동아시아 유전체 특성과 유사하다고 한다.'악마의 문 동굴'에서 발굴된 유전체는 주변에 거주하는 울치족을 제외하면 한국인과 가장 비슷하다. 모계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체도 한국인의 특성과 일치해 모계가 동일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리하면, 한민족은 남방계와 북방계의 혼혈이며, 유전체 특성에서 볼 때 남방계 농경민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다.한민족 기원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와 월성동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물과 유적을 고려해 볼 때, 대구 최초의 인류는 빙하기의 추운 날씨를 피해 백두산 일대로부터 이주해온 구석기 인류가 대구 최초의 토착민이었다. 한편 고조선 원조 인류는 3〜4만 년 전과 약 1만 년 전 동남아시아에서 극동으로 각각 이주해간 수렵채취인들과 농경인들 간 혼혈로 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고조선의 멸망으로 남하하던 유민들이 대구 최초 토착민과 혼혈로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면 될 거 같다. 현재 달서구 진천동 상화로 변에 설치되어 있는 '대구 2만년 역사가 잠든 곳' 조형물(길이 20m, 높이 6m)은 이곳이 대구 최초의 인류 거주지였음을 알게 해준다.

2019-11-09 06:30:00

장창수 작 '위로'

[내가 읽은 책]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김혜남‧박종석, 포르체, 2019

'안녕, 나의 우울아.'저자는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이렇게 열었다. 서문의 제목이 이렇게 해맑을 수가. 세계보건기구는 인류를 괴롭히는 무서운 질병 중 네 번째가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안부를 묻듯 가볍게 툭 던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의 독감이라는 우울증. 그것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라고 조언한다(9쪽). 그 끝에는 밝은 빛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렇다. 그게 뭐든 동굴이 아니고 터널이라면 끝내는 지나갈 수 있는 거니까.근래에는 심리상담과 심리치료의 경계가 모호해졌다(권석만, '이상심리학총론', 2016). 이럴 때 전문가가 주는 깊이 있는 통찰은 마치 공부를 하기 전 책상 정리를 하는 듯한 개운함을 준다. 저자 김혜남은 국립정신병원에서 12년 동안 정신분석 전문의로 일했고, 베스트셀러인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를 쓰기도 했다. 공저자인 박종석은 서울대학교 정신건강센터 전문의를 거쳐 현재 연세봄건강의학과 원장으로 있다.이 책은 올해 9월에 나왔고, 10월에는 태풍 '미탁'이 우리나라를 지나갔다. 그때 서평의 필자는 안동의 숙소에서 쓸쓸히 이 책을 읽었는데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던 인간의 내면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당시 안동은 국제탈춤페스티벌 중이었다. 나는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문구가 쓰인 종이컵에 축제의 흥겨움과 요란함을 부어 마시고는 개인의 불안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던 것이다.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번아웃증후군, 만성피로증후군, 허언증, 강박증, 불안장애 등 거의 대부분의 증상들이 소개된다. 각 증세들마다 '입사 5년 차 직장인 진영 씨' 등의 구체적인 캐릭터를 내세우고 그들이 겪는 에피소드를 들어 설명한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조증, 우울증의 자기 진단을 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체크리스트도 제시해 놓았다. 자기를 점검하는 데 요긴하다.파트가 끝날 때마다 '일요일 오후 1시'라는 대화 코너를 선보인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저자가 겪었던 마음의 상처 이야기를 이토록 진솔하게 털어놓는 심리학 서적은 본 적이 없다. 저자 박종석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20년 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중학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대구에 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함께 기거하며 삶의 의욕을 회복했다고 털어놓는다."친구의 가벼운 위로, 지나가는 사람의 작은 친절도 삶의 숨구멍을 틔워주는 소중한 물꼬가 될 수 있고, 그것이 희망이 되어 바닥에서 다시 올라올 수 있구나(47쪽)."누군가의 작은 관심이 큰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시나브로 터널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버렸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용기를 내 반대쪽 출구로 걸어가 보자. 필경 거기에 빛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가 맞아 줄 테니까.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옆방에서 근무하던 K 선생님이 벌컥 방문을 열었다. 우리는 웃으며 인사했고 차 한 잔을 나누었다. 그러고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타인의 작은 배려가 큰 힘이 되었다면 가끔은 다른 이에게 돌려주는 것도 좋으리라. 이타심은 남을 돕기도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을 돕는다. 이 가을, 모두들 괜찮은지 물어보는 책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를 읽어 보자. 덧붙여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파인딩 포레스터'(2000)다.장창수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2019-11-09 03:30:00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춘추칼럼] 언어의 힘

인터넷 헐뜯고 비방하는 언어 난무서로 칭찬'격려는 찾아보기 힘들어지구 지키는 생태운동가 마음으로나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를 바꾸자주문한 시집이 도착했다. 시인을 알지만, 잘 모른다. 그와 알고 지낸 시간이나 함께 나눈 대화는 내 삶의 다른 시간에 비하면 턱없이 짧다. 하지만 이제 함께 보낸 시간의 길이가 앎의 정도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다. 내가 아는 시인은 퉁명스럽지만 따뜻하고, 거칠지만 정교하다. 그는 막연한 낙관이나 섣부른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며,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의 힘은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온다. 그것은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관조와는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담그는 방식이다.시인은, 당연하게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으로 그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견디는 데서 시를 쓴다. 그의 시는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단순한 묘사나 고발에 그치지 않는다. 정확한 현실 인식 너머를 생각한다. 개인과 사회, 개인과 공동체, 개인과 구조 등의 관계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비결을 제공한다. 그것은 어쩌면 어릴 적 고향의 강가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던 강물에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다. "어린 내가 서러우면 강둑에 앉아 흐르는 물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황규관, '강물' 중)흘러가는 강물은 시작과 끝에 주목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주목하고, 반응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조바심이 아니라 기다림을 배우는 일이다. 멀리서 정류장으로 차가 들어오면 먼저 타려고 뛰어간다. 차를 놓치면 안 된다는 아우성이 넘치는 시대에 이번 차를, 다음 차를, 다음다음 차를 그냥 보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이다. 그것을 배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사라지고 말았다."…이번 차는 모른 척 보내고/ 우두커니 혼자가 되자/ 혼자가 되어/ 멀리서 내리는 빗소리를 듣자// 다음 차도 보내고/ 다음다음 차도 보내고/ 저물녘에 우는 늙은 새울음도 보내고/ 슬픔에 사로잡힌 영혼도 보내고…."('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중)시인의 힘은 그의 언어에서 나온다. 그는 부드럽고 유려한 문체가 아니라 적확하고 명료한 언어의 힘을 지향한다. 그의 언어는 어떤 사상이나 개념이나 집단에 정박하지 않고 흘러갈 따름이다. 언어가 힘을 잃어버린 시대에 그의 언어에서 그 힘을 발견한다. 균형을 잡고 판단을 가늠하는 기준을 세워주었던 '법의 언어'가 사라졌고, 현실과 사실을 가장 정확하고 날카롭게 전달했던 언론의 언어가 실종되었다. 아이들의 언어는 가장 빠르게 오염되고 있으며, 어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카톡 단톡방에서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죽이는 언어들이 난무한다.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살리는 언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언어가 사라지고 죽어가는 시대에 우리의 언어는 어떠해야 하고 어떤 언어를 지향해야 하는 걸까."가장 큰 언어는 들을 수 없는 언어다./ …가장 깊은 언어는 그 기원을/ 모른다…/ 가장 오래된 언어는 그 최종 지점도/ 없다…// 오늘의 언어가/ 과거의 언어가 아니듯/ 우리의 언어가 어제의 비명이었고/ 싸움이었고 사랑이었듯/ 반달을 바라보는 골목길이었듯/ …/ 국가의 언어 말고/ 탐욕의 언어 말고/ 나의 언어를 나의 너/ 의 언어를// 원통하게 죽어간 이의 언어를/ 언제나 버려졌던 어머니의 언어를/ 어깨가 떨리는 언어를/ 바람결에 반짝이는 언어를…"('가장 큰 언어' 중)이 시대에 여전히 '언어'를 붙들고 있는 이들을 주목하자. 시인, 소설가, 비평가, 에세이스트 등 다양한 형태의 작가들은 어쩌면 지구를 지키는 생태운동가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이라도 언어를 붙들고 씨름하자. 그것은 나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고, 우리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고, 직장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고, 공공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겨울의 문턱이다. 시집 한 권 읽자, 시집 한 권 사자. 나의 언어, 우리의 언어를 위해.

2019-11-07 12:03:03

김용하 한국수목원관리원이사장

[기고] 갑질 식물 칡넝쿨에서 답을 찾다.

올해도 더위에 지쳐가던 7월 말 즈음 아내가 내민 얼음 몇 알 띄운 칡즙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더위와 갈증을 한 번에 삭여준 고마운 칡즙을 다 마셔갈 때쯤 문득 칡에 대한 일반적인 우리의 인식은 어떨지 생각해 봤다.칡은 조선 중기부터 뿌리의 녹말인 갈분을 이용해 구황작물로 이용됐고, 줄기의 껍질은 견, 면 등 이전의 직물인 갈포의 원료로 사용했다. 이젠 농업생산성 향상으로 구황작물에서 벗어나 건강식품으로 애용된다. 간에 좋으며 피로를 푸는데 효율적이고 갱년기 증상을 개선하는 에스트로겐 성분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안정시키는 이소플라본 성분이 포함되어 있으니 최고의 건강식품이다.그런데 갑질 식물이라니? 구황작물로 허기를 달래고, 옷의 재료가 되는 천을 만들어줬던, 우리 몸을 지켜주고 병을 치유해 주던 고마운 칡은 생각보다 다른 식물에 대한 횡포가 심한 식물이다.칡이라는 놈은 덩굴성 목본식물로 추위에도 강하고 염분이 많은 바닷가에서도 잘 자라는 기초 체력을 바탕으로 줄기를 20m까지 길게 뻗어가면서 주위의 다른 나무나 물체를 감아 올라간다. 생명력이 워낙 강해 주변의 다른 식물들을 덮어서 햇빛을 가리는 탓에 칡넝쿨이 우거진 곳은 금방 황폐화되기 십상이다.쓰임새가 많은 식물임에도 토지 장악력이 어마어마해서 제때 손쓰지 않으면 땅 자체를 포기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억센 녀석이다. 환경부에서 생태계교란종으로 지정·고시 중인 가시박이나 환삼덩굴 같은 식물에 비하면 우리에게 고마운 식물이긴 하지만, 자생식물 중에서도 이런 갑질 식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갑질 횡포가 심한 것이 칡이다.무분별한 칡 확산 우려는 국내뿐만 아니다. 미국도 산의 사면 안정을 위해 칡을 도입했으나 초기에만 그 효과를 미미하게 보았고, 칡의 무궁한 생명력에 참패해 사람과 돈을 써가면서 전문적으로 제거작업을 하고 있다. 이쯤되면 칡은 '글로벌 갑질 식물'로 분류해도 무방하겠다.현 정부는 갑질을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권한을 남용하거나, 우월적 지위에서 비롯된 사실상의 영향력을 행사해 상대방에게 행하는 부당한 요구나 처우를 의미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내 이익과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 특히 약자라고 판단되는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언행 모두 갑질로 볼 수 있다.칡과 갑질을 연관시켜보면 갑질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정부 주도로 갑질에 대한 종합대책이 수립되고 공공분야로부터 시작한 갑질 근절 의지가 점차 민간으로 확산 중인 이 시점은 곧 일부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칡넝쿨 제거 5개년 계획'과 같이 무지막지한 칡넝쿨 확산에 대한 종합계획을 수립해 실시하는 좋은 예라 할 것이고, 또 다른 지자체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는 칡 수매를 통한 '칡넝쿨 비료화 사업'은 갑질 예방과 사후대책을 통한 올바른 조직문화 정착과 그 맥을 같이 하는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계획을 수립하고 환류체계를 구축하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이 된 셈이니 이제 남은 것은 칡을 뿌리째 거두어 매각할 일과 비료로 만드는 수고만 남았다. 이런 수고에는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바른 인식과 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나 자신부터 '나'와 '너'의 다름을 인정하고 '우리'라는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갈 때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갑질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사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뿌리와 줄기를 퍼트려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이기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갑질, 이제는 과감하게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김용하 한국수목원관리원장

2019-11-07 11:44:25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매일춘추] 주관식

해마다 이 날이 되면 대한민국은 마치 종말이라도 온 듯 조용해진다. 북적대던 출근길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비행기들도 한동안 상공을 맴돌다 무전을 받은 뒤에야 대한민국 땅에 착륙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선 보기 힘든 이 희한한 광경이 일어나는 날은 바로 1년 중 딱 하루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선 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인생을 결정짓는 시험이라고 생각하며 이 수능을 위해 학생들은 10년을 공부한다. 그리고 이날 수험생들이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게 온 나라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수능의 시험 문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객관식과 주관식이 그것인데 객관식은 주어진 보기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고 주관식은 빈칸에 알맞은 답을 적어 넣는 것이다. 학생들은 난이도가 높은 객관식 문제도 어려워하지만 보기가 없는 주관식 문제를 더욱 어렵게 느끼곤 한다. 객관식 문제는 어쨌거나 보기 중 하나는 답이기에 답을 모르는 경우라도 5분의 1 확률로 정답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주관식 문제는 그 문제에 관한 나만의 생각과 해답을 적는 것이기에 알지 못하면 답을 적을 수 없다. 또한 단답이 아닌 경우에는 답을 대강 알고 있어도 그 내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적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주어진 보기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생각을 나만의 문체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비단 시험 문제를 풀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다 큰 성인이 된 후에도 나만의 답을 나만의 생각으로 이야기하는 일은 쉽다.필자가 초등학생일 때의 일이다. 당시 HOT와 젝스키스가 아이돌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유행할 때였다. 어느 날 친구들이 어느 가수를 좋아하느냐 물었고 필자는 외국 아이돌 밴드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필자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기대한 아이돌 그룹 중 하나를 이야기하지 않고 보기에도 없는 외국 아이돌 그룹을 말하는 필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 마음에 더 이상 이상한 사람이 되기 싫었던 필자는 그 이후부터는 당시 친구들이 좋아하는 가수 중 하나를 골라 그 가수를 좋아 한다고 말했다. 남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는 내 마음에 드는 답이 없어도 그저 주어진 보기 중 선택하는 쪽을 택하며 그렇게 성장해 온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은 나만이 주관적인 답을 찾으려 더 노력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항상 주관적 판단만이 가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짜로 내가 선호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회와 타인이 제시하는 객관식의 문항들 외에 나만의 취향을 드러내는 주관적인 해답들을 찾아보는 일은 나라는 사람을 완성하는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2019-11-07 11:41:23

황기호 수성구의회 의원

[기고]지방분권 의지 강한 총선후보 보고 싶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 조선시대부터 수도로 사용한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은 수백 년 동안 국가의 수도가 되면서 한국의 도시 중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있듯이 1990년대 이후로 지방도시가 쇠락하고 서울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더욱 높아져 사람과 대기업들이 중앙인 서울로 서울로 몰려드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기현상을 보였다.시골 마을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산골오지의 마을이 아니라 군 단위의 마을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대구와 같은 대도시도 예외는 아니다. 인구 유출이 점점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 층 인구의 유출로 지방 도시는 갈수록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이 서울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기회를 찾아 태어나고 자란 지방을 떠나 서울로 서울로 가고 있다.매일신문에 임기 반환점을 도는 문재인 정부의 지방분권(地方分權) 정책이 '포장만 화려했지 알맹이는 없다'는 기사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참여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겠다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지방소멸을 재촉하는 정책들을 더 많이 내놓았다는 것이다.필자는 수성구 자치분권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방분권이 무엇인가? 권리를 지방으로 나누는 것 즉, 중앙으로부터 집중된 많은 권리를 지방정부로 나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방자치단체에 행정 기능의 책임과 권한을 돌려주는 것이다.왜? 지방분권이 필요한가?중앙정부를 중심으로 살림을 살다 보면 지방의 특수성과 애로사항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지방의 균형발전이 어렵기 때문에 지방분권이 꼭 필요하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중앙정부로부터의 하달식이 아닌 지방정부 스스로가 지역 특성에 맞는 경제, 문화, 행정 등을 함으로써 지역의 경쟁력을 높이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은 주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이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준다.우리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관습처럼 되어 있다. '중앙으로 중앙으로부터'라는 잘못된 악순환의 관습을 깨야 한다. 지방분권의 활성화 차원에서 작년에는 지방분권 관련 마술쇼, 올해는 지방분권을 주제로 한 뮤지컬과 토크쇼를 통한 홍보 등이 있었다. 1년에 한두 번의 홍보가 아니라 축제와 같은 프로그램들을 많이 만들어 주민들의 참여도를 높이고 교육과 홍보를 통한 지방분권 필요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물론 시작은 중앙의 살림을 사는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내려 놓는 게 전제되어야 지방분권이 가능한 것이다. 과연 그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겠는가?역사적으로 볼 때 자기에게 주어진 많은 권리를 내려놓은 왕이나 지도자는 없었다. 그러나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은 지방분권 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틀림없다.자치분권이 이루어지면 행복한 시대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지방분권이 이루어지면 주민이 주인인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가 아닐까.내년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지방분권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의원들이 당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꼭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2019-11-07 02:30:00

오정일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새론새평] 시장(市長)이 할 일

도시가 살기 좋으면 사람 모이고 불만이 있으면 다른 도시로 떠나대구 시민들에게 필요한 市長은 삶의 편의성을 높여주는 행정가사람들은 발로 투표한다. 현재 사는 도시에 불만이 있으면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그래서 살기 좋은 도시는 인구가 증가하지만 살기 힘든 도시의 인구는 감소한다. 이는 소비자가 한 제품에 불만이 있으면 다른 제품을 사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발로 또는 돈으로 투표한다. 도시가 기업과 다른 점은 무한정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도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인구가 늘면 혼잡이 증가해서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그래서 한 나라 안에는 큰 도시도 있고 작은 도시도 있다.대구광역시 인구는 1990년 223만 명이었으나 1995년 달성군과 통합하면서 245만 명으로 증가한 후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인구는 1995년 정점을 찍었다. 인구 대비 전입자와 전출자 비율은 1990년 13%에서 2017년 7%로 감소하였고 전입자 수는 1995년을 기점으로 전출자 수를 밑돈다. 이에 따라 매년 약 1만3천 명의 인구가 유출되고 있다. 지난 40년의 통계는 대구광역시 인구가 안정적으로 유지됨을 보여준다. 안정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정체되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균형에 도달했다는 뜻이다.모든 도시가 인구 100만 명 이상일 필요는 없다. 큰 도시도 있고 작은 도시도 있는 것이다. 대구광역시의 목표가 인구 300만 명을 달성하는 것일 수 없다. 도시 성장 자체는 의미가 없다. 한 도시가 살기 좋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그 결과 인구가 증가한다. 대구광역시의 목표는 편의성(amenity)을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치안, 전염병 예방, 깨끗한 물, 일정 수준 이상의 병원, 양질의 초중등 공교육, 혼잡하지 않은 도로, 원활한 대중교통, 적당한 면적의 녹지와 공원, 적절한 가격의 주택 등이 도시 편의성을 결정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중하층에 속하는 시민들에게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관건이다.시장은 도시 상징의 변경, 국제행사 유치, 경전철 또는 지하철 건설, 랜드마크 시설 건축, 유명기업 유치, 공연장 또는 미술관 건립을 통해 도시가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업은 발전하는 도시가 해야 할 일이지 이로 인해 도시가 발전하지 않는다. 예산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대구광역시의 편의성이 높아져서 살기 좋은 도시가 되면 인구가 증가하고 많은 기업이 유치될 것이다. 저렴한 공장 부지를 제공하고 세금을 감면한다고 해서 기업이 유치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살기 힘든 도시에는 기업도 오지 않는다. 기업에 사람은 수요인 동시에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선호한다. 그러한 도시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고 혁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을 오게 하려면 도시가 살기 좋아야 한다.최근 대구광역시 청사와 대구공항 이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내년 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청사와 공항이 오래되었고 규모가 작은 것은 사실이다. 토건사업이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이 사업들을 추진할 적기인지는 의문이다. 청사와 공항을 이전하기에는 대구광역시의 재정적 여력이 없다. 지하철 부채, 버스 보조금, 복지 지출만으로 예산의 대부분이 소진되는 것이 현실이다.도시 편의성을 높이는 것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과정이다. 성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몇 번의 극적인 행사로 도시 편의성은 높아지지 않는다. 예산만 낭비될 뿐이다. 시장은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시민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일은 빛이 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손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이 일을 해야 한다. 시장은 정치인이 아니다. 시장은 행정가이다. 시민들에게 필요한 시장은 정치적인 선동가가 아니라 청렴하고 합리적인 관리자이다.

2019-11-06 19:50:13

이도수 경상대 명예교수

[불가사의 인도] 힌두교 경전 속의 괴물 '좀비'

현대인들의 입에 회자되는 '좀비'는 도깨비처럼 친근한 이미지를 풍긴다. 그러나 고대 힌두교 경전에 등장하는 좀비(zombie) 원형은 극히 흉측한 괴물이었다. 영혼이 떠난 육신은 분해되어 잔해가 바다로 흘러들어가거나 흙에 동화되어야 윤회 법칙이 정상 가동된다. 그러나 때로는 윤회 법칙 작동 이상으로 영혼 없는 육신이 그대로 무덤 속에서 매우 오랜 세월을 보내는 기현상이 생기기도 한다.무덤 속 산송장인 좀비들은 오랜 세월 동안 무덤에 갇혀 지내다가 이들을 불러내는 악령의 나팔소리를 듣고 좋아하며 무덤 밖으로 달려 나가 인간사회를 어지럽히고 돌아온다.현대 영화 제작자들이 흥행 목적으로 이 흉측한 괴물에다 인간 친화적인 이미지를 덧씌워 도깨비처럼 친근감을 느끼게 한 결과로 요즘 상호나 상품명에 '좀비'를 애칭처럼 붙이게 되었다. 필자가 처음 고대 인도의 신비 사상에 심취되었을 때, '좀비'라는 흉측한 괴물이 과연 존재할까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신화와 전설은 은유적이라지만 좀비만큼 흉측한 괴물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그런데 최근에 그 '좀비'라는 흉측한 괴물이 우리나라 도처에서 득실대는 것을 목격하고 경악하게 되었다. 그 좀비 군상들을 한동안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다가 중앙의 모 유튜브 방송 대담 프로에 출연하여 국내에 득실대는 좀비 목격담을 털어놓고 있다. 대담 사회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국내에서 설쳐대는 좀비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해보라기에 나는 주저없이 이렇게 말했다. 드루킹, 킹크랩! 그들은 악령의 나팔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우우 몰려나와 국민 여론을 밤 사이에 뒤집어놓기도 하고, 청와대 게시판에 귀신이 곡할 장난질을 하고는 어둠과 함께 사라지니 이게 좀비일 것이다. '알릴레오'라는 요상한 이름의 나팔수는 좀비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어 악역을 시키는 악령 괴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얘기를 들은 수십만 시청자 중에 공감 반응은 많아도 반감 댓글은 여태 없었다.

2019-11-06 18:00:00

대구 영남중 교사

[김태훈의 대구 옛 이야기] 장진홍 의거

경북 칠곡군 출신의 장진홍(1895~1930)은 인명학교에서 수학한 후 1914년 대한제국 친위대를 개편하여 창설한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1918년 중국 봉천으로 이동한 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 100여 명을 모집하여 군대 양성에 힘썼으나 러시아 백군이 하바롭스크를 점령하자 활동을 멈추고 귀국하였다.장진홍은 전답을 매각하여 600여원의 자금을 들고, 서적 행상을 가장해 전국을 누비며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하였다. 이후 그는 미군 하사관 김상철에게 조사한 내용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할 것을 당부하였다.이후 장진홍은 1927년 4월 무렵에 호리키리 시게사부로(堀切茂三郞)로부터 폭탄제조법을 익힌 후 직접 폭탄을 만들어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등 4곳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대구의 덕흥여관에 투숙한 후 그해 10월 18일 여관 종업원인 박노선에게 4곳마다 폭탄이 든 나무 상자를 건네줄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박노선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나무 상자 1개를 전달하였으나, 포병 출신 은행원 요시무라 게츠(吉村潔)가 화약 냄새를 맡고 나무 상자를 개봉하여 도화선을 절단하였다. 그는 나머지 3개 상자도 찾아내어 건물 밖으로 내놓은 후 경찰에 신고하였다. 곧이어 폭탄 3개가 연달아 폭발하였는데, 은행 창문과 출입문이 부서지고 경찰과 은행원이 부상당하였다.그 후로도 장진홍은 안동의 주요 기관과 영천경찰서를 폭파시키려다 무산되자, 곧바로 도일하여 동생 장의환의 집에 머물며 동경경시청 폭파를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1930년 7월 31일 대구형무소에서 자정순국하였다.조선은행 대구지점은 옛 하나은행 대구지점이 있던 장소인데, 현재 건물은 허물어지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그 앞 빈터에 장진홍 의거를 알려주는 푯말을 세워 그의 독립정신을 되새기려는 움직임이 필요할 것이다.

2019-11-06 18:00:00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찬란한 예술의 기억] 대구가 품고 있는 이야기 하나

여기 한 장의 포스터가 있다. 파스텔 톤의 색 면을 여러 겹 겹친 화면 위에 빨간색과 파란색, 그리고 검은색 물감을 고루 사용한 글씨가 연주회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대구현악회 창립 연주회, 현악합주, 편곡·지휘 이기홍, 특별출연 첼로 김경임, 바이올린 독주, 바이올린 이중협주, 찬조 출연 바리톤 이점희, 피아노 김경환, 일시 6월 2일, 장소 청구대학 대강당, 주최 대구음악가협회, 후원 일간신문사, 능인중·고등학교, 대구청년로타리클럽….' 이 포스터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전신, 대구현악회의 창립 공연(1957. 6. 2) 때 사용된 것이다.대구현악회 창립을 주도한 이기홍 지휘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포스터는 당시 능인중학교 동료 교사였던 백태호 화백이 30장을 제작해 준 것이다. 당시 공연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이기홍 지휘자가 소장용으로 간직한 단 한 장이다.이 포스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궁금한 점이 생긴다. 1957년에 현악합주 연주회를 열었다는 것은 우리 지역에 합주를 할 만큼의 연주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5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해방 후 혼란기를 지나 6·25전쟁이 일어났고 대구는 직접적인 포탄의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어떻게 이런 연주회가 가능했을까. 더군다나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그리고 바리톤 협연까지.한 사람씩 이름을 짚어가며 의문점을 풀어봤다. 대구현악회를 창단한 이기홍 지휘자는 영천 금호 출신으로 서울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6·25전쟁과 함께 대구로 내려와, 대구로 피란 온 음악가들과 함께 교류하며 음악 활동을 했고, 레슨을 통해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길러냈다. 어느 정도 연주자가 모이자, 합주 형태의 공연을 기획했고 여기에 가장 큰 힘을 보탠 사람이 바리톤 이점희 선생이다.협연자로 이름 올린 이점희 선생은 이기홍 지휘자보다 열한 살이나 많았지만, '음악으로 대구 사회를 치유하자'는 데 뜻을 모은 음악 동지였다. 이점희 선생은 계성학교에서 박태준 선생의 영향으로 음악가의 꿈을 키웠고 계성학교 교사로, 지역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며 음악가들을 길러냈다.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된 후 1970년대부터는 오페라운동에 몰입해 대구오페라협회, 대구오페라단을 거쳐 대구시립오페라단 창단을 위해 노력했다.행사를 주최한 대구음악가협회는 어떤 단체였을까. 이점희 선생을 비롯한 음악인들이 1952년 대구음악연구회를 발족했고, 3회의 발표회를 연 후 1956년 대구음악가협회를 새롭게 조직했다. 당시 시대 분위기는 음악가들이 순수하게 음악만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금을 해서 음악회를 열어 관객을 맞았다. 음악이 가진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연주회 장소였던 청구대학(영남대학의 전신) 강당은 지금의 노보텔 자리에 있었다. 이곳은 연주회 장소가 부족했던 당대 예술가들에게 소중한 공간이었다. 공연장이라고는 공회당(현 콘서트하우스)과 키네마극장(현 CGV한일), 문화장 여관(현 금융결제원 자리) 정도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다시 포스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백태호 화백의 유려한 필체로 제작된 이 포스터는 캘리그래피로 제작된 대한민국 최초의 연주회 포스터일 가능성이 높다. 이 포스터의 영향이었을까. 대구현악회 창립 연주회는 크게 호평을 받았고 그해 연말 대구교향악단의 창단을 이끌어냈고 1964년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됐다.이제 포스터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 이기홍 지휘자가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안타깝게도 이 포스터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제는 사진만으로 남아 있기에 이 포스터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더 소중하다. 더 늦기 전에 그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낼 준비를 마쳤다. 이 포스터를 모티프로 대구시와 지역방송이 다큐멘터리 '대구 음악 이야기'를 공동 제작했다. 오는 14일(목) 오후 11시, TBC대구방송에서 음악가들의 행적을 통해 대구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다.

2019-11-06 18:00:00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 수필가

[매일춘추] 헬리콥터 맘과 캥거루족

봉준호 감독이 2009년에 만든 김혜자, 원빈 주연의 '마더'는 모성애의 극한을 보여주는 영화다. 아이가 5살 때, 너무나 살기가 힘들어 동반자살을 하려고 음료수에 농약을 타서 먹였으나 미수에 그친다. 그 아이가 28살의 청년이 되었지만 지능은 어린이 수준이다. '바보'란 소리만 들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들이 어떤 연유로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자 엄마는 지능이 떨어지는 순수한 자신의 아들이 그랬을 리가 없다면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직접 나선다.영화는 여성의 극단적 모성애를 보여주는데, 첫째는 동반자살 시도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이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반자살이란 말은 맞지가 않다. 아이를 소유물로 착각하는 데서 오는 오류일 뿐인 것이다.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아이는 엄마가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다. 모정의 결핍은 어쩔 수 없겠지만. 두 번째는 자식을 해코지 하려는 대상에게 가하는 공격성이다. 이는 새끼에게 위해를 가하면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어미와 같은 동물적인 본능이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처참하게 살인을 하고는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말을 한다. 의지였다기보다는 반사적 행동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단순한 모성애에만 끌려 아이를 키우는 다소 푼수기의 홀어머니를 보면서, 아이는 농약사건이 아니었어도 마마보이로 밖에 자랄 수 없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육아와 양육을 구별하지 못하는 엄마들이 너무나 많다. '헬리콥터 맘'이니 '캥거루족' 같은 말도 모두 극성스런 엄마들 때문에 생긴 신조어 아니겠는가. 지나치게 간섭하며 과잉보호를 하는 엄마를 헬리콥터 맘이라고 한단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말이 바로 캥거루족이다. 성인이 되어도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지하는 자녀를 일컫는다.필자는 첫돌 사진은 고사하고 어릴 때의 사진이라곤 없다. 아래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사진이 없는 이유가 너무 시골이어서거나 가난해서가 아니다. 누나나 형은 어릴 때 사진이 꽤 있다. 부모님께서 두 서넛 키우시다보니 넷째부터는 심드렁해진 것이다. 아무래도 손길이 덜 미쳤다는 이야기인데, 역설적이게도 나와 여동생이 형제 중 생활력이 강하다.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스스로 길을 모색하게 되어 있다. 그게 성장하면서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키우기란 쉽지가 않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을 생각하면 애처로운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정말로 꽃길을 걷게 하고 싶다면 눈보라 치는 거리로도 내몰 줄 알아야 한다. 자녀에게는 춘풍과 같은 사랑도 중요하지만 추상같은 엄격함도 필요하다. 부모는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잘 적응하게 훈육시킬 의무가 있다.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수필가

2019-11-06 11:16:54

전헌호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종교칼럼] 중앙분리대에서 자란 이름 모를 풀

어제도 여느 때와 같이 앞산 밑 북카페에서 수요일마다 하는 강의를 위해 길을 나섰다. 태풍이 부는 상황이긴 했지만 특별한 일은 없는 일상의 날이었다. 그런데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키가 1m 정도는 될 그 풀이 지난 봄부터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겠는데 어제 처음 나의 인식 범위에 와닿은 것이다. 범안로에서도 고가도로인 롯데플라자 옆을 지나 시내로 가는데 저 앞에서 그 풀이 태풍에 흔들리고 차가 지나갈 때마다 흔들렸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건강한 모습으로 가지마다 씨앗을 잔뜩 달고 있었다.중앙분리대 콘크리트 틈새에 바람을 타고 모인 먼지들과 각종 풀잎과 낙엽들에 뿌리를 박고 자라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 거다. 그의 동료들이 씨앗으로 저 넓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동안 그는 저 좁고 열악한 곳에 떨어졌건만 발아하여 자라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그동안 나의 차를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차들이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 흔들어댔으며 소음과 매연은 또한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비오는 날들이 있어서 저렇게 자랐겠지만 지난여름 한낮의 강력한 햇빛은 얼마나 목마르게 했겠는가.그의 건강한 모습은 이 모든 열악한 상황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여 그 자신이 되어갔으며 자신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로 하여금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자라고 그 모든 분란을 견디게 했는지 궁금하다. 그가 그곳에서 자라는 동안 어떤 의식과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궁금하다.그 풀은 금년 봄에 그곳에서 발아할 만큼의 조건이 되지 않았더라도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 씨앗의 상태 그대로 여러 해들을 기다릴 것이다. 태풍도 지나가고 가을이 짙어지면 그가 맺은 수많은 열매들은 다음 해를 위한 씨앗이 되어 이리 저리 흩어져갈 것이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는 알 수 없지만 강력한 생명력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그러면서 나는 그동안 어떤 의식과 생각으로 살아왔는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의 수고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육십 중반에 이르도록 살면서 겪었던 온갖 일들은 글로 소상하게 쓴다 하더라도 제대로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고 망각의 세계로 접어든 부분 또한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앙분리대에서 자란 그 풀만큼 의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부모님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왔는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기억에 떠올릴 수도 없으며 말로 다 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조국과 국제사회가 나의 생존과 성장 그리고 교육을 위해 제공한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대충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이 역시 다 헤아릴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나의 생존을 위해 지구환경이 나에게 제공한 것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도 절실하게 필요한 이 공기를 아무런 조건 없이 무상으로 계속 제공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물과 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날마다 먹는 음식을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희생되고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들어가 있는가.그런데 나는 나의 삶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해왔는가. 이 수많은 요소들에 대해 인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얼마나 갖고 살아왔는가. 참으로 반성하며 다시 생각해 볼 부분이 너무도 많이 보인다.

2019-11-06 10:13:57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매일춘추] 국화 옆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던가요?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던가요? 소쩍새 울음과 먹구름 속 천둥과 간밤 무서리 안부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을은 왔고 국화꽃은 어김없이 피었습니다. 공원에서 혹은 수목원에서 국화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가을햇볕에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가을의 소유권을 가지고도 가을을 소유하지 않은 채, 가을을 세공하고 있었습니다.서정주 시인은 왜, 국화 앞에서가 아니고 국화 옆에서 라고 했을까? 라는 생각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대구수목원의 국화축제장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있는 국화코끼리, 국화기린, 국화곰돌이…. 살아있는 동물 보다 피어있는 동물을 보는 눈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화는 국화 '위'나 '아래'에서 피지 않고 오직 '옆'에서 피어나고 있었지요.마더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해 CBS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스튜디오를 찾은 마더 테레사에게 앵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테레사 수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대답했지요. "나는 듣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을 들은 앵커는 당황해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듣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잠시 생각하다 다시 "그분도 듣지요" 라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앞에 있는 눈, 코, 입에 비해 옆에 있는 귀가 좀 더 큰 이유는 왠지, 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옆에 있는 것 잘 들으라는 당부나 계시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만 보고 가다 놓친 것들 귀담아 들으라고요. 그런데 옆을 강조하거나 사족 같은 귀 없이도 국화는 잘 듣고 있었습니다. 잘 듣는 다는 것은 잘 보는 것이겠지요. 상대방 소매 끝에 달랑거리는 실밥을 떼어 준다거나 입가에 묻은 국물 보고 휴지를 슬쩍 건네는 일처럼요. 휴지를 건네 듯 국화는 여린 날개의 벌들에게 한 모금의 달콤한 가을을 선사하였습니다.잠깐 동안 국화는 피어나지 않고 새어 나기도 했습니다. 국화의 속도로 힐끗힐끗 새어 가을을 누설하느라 바빴습니다. 꽃잎에서 꽃잎은 새어나고, 벌들도 새어나고, 가을도 새어났습니다. 국화의 몸은 더욱 부풀어 지고 벌들도 더 분주했습니다. 가을의 얼굴은 또 얼마나 빨개지는 지. 옆에서의 일들은 앞에서의 일보다 대체로 자잘한 대신 즐거움은 오래갑니다. 오래가는 것은 훨씬 더 큰 일입니다. 국화 옆에서도 국화는 온통 가을의 귀를 곤두세웁니다.예컨대 옆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옆이 된다는 건 누군가의 옆이 되어 주고 싶은 것이겠지요. 옆은 나란한 것이며 닮아가는 것이며 손잡는 것입니다. 봄과 여름을 지나 함께 가을을 맞는 국화처럼. 임창아 시인·아동문학가

2019-11-05 11:05:54

[세월의 흔적]<46> 주판

"368원이요, 473원이요, 389원이면 ". 선생님이 문제를 내면 여기저기서 주판알 굴리는 소리가 '토독토독' 합창을 한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입학시험에 주산 과목이 있었다. 저마다 주판을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문제지에는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문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적이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조그만 손가락으로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며 판셈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중학교에 입학하자 상업이라는 과목도 있었다.세월이 빠르게 흘러서 직장인이 되었다. 숫자를 많이 사용하는 부서에서 일하였고, 늘 계산을 하는 게 맡은 업무였다. 옆자리의 동료 가운데 주판을 잘 놓는 직원이 있었다. 덧셈이나 뺄셈은 물론 곱하고 나누는 셈까지 척척 해냈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복잡한 곱셈이나 나눗셈을 얼마나 잘하는지 부러웠다. 심지어 소수점 이하의 계산까지도 막히지 않고 해냈다. 때로는 손을 빌리기도 하였지만.문명의 이기가 수고를 덜어주었다. 손잡이를 앞뒤로 돌리며 계산하는 기계식 계산기가 나왔다. 돌릴 때마다 '땡 땡' 하는 소리가 났다.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참으로 신기했다. 열심히 배워서 업무에 이용하였다. 그런 세월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전자계산기라는 게 등장하였다. 성능이 좋을 뿐 아니라 크기며 모양도 다양하였다.그러나 사용하다 보면 틀릴 때가 있었다. 한 번은 동료가 해놓은 계산이 틀려서 나무랐다. 그랬더니 "계산기로 했는데요" 하면서 볼멘소리를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아, 계산기를 만지는 손가락에 잘못이 있었겠지" 하였더니 머리를 긁적거렸다. 요즘에 비유하자면 컴퓨터는 못하는 일이 없다. 고성능의 기계 설비를 제작하고, 인공위성을 원격 조정하는 일도 척척 해낸다. 하지만 그것을 조작하는 것은 사람의 손가락이다.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주판이 널리 쓰이지 않았다. 특히 사대부 집안에서는 주판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전래되어 오던 산목(算木)에 의한 계산법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주판이 보급되었는데,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주판보급회라는 조직을 만들고부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쓰이고 있는 윗알이 1개, 아래알이 4개인 주판이 사용된 것은 1932년부터이다주판은 오랫동안 상업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복이 되자 상업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사용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주산의 급수를 정하여 문교부와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검정을 실시해 왔다. 전자계산기가 널리 보급되는 바람에 비록 쇠퇴의 길을 걷고 있지만, 아직도 속도라는 면에서 뒤지지 않기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숙련된 전문 기능사는 수많은 현대의 기계식 계산기와 경쟁이 가능하다.해마다 대구엑스코에서 '전국 주산 수리영재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다. 학생들의 두뇌계발과 인성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올해는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금상까지는 메달과 상장을, 그 이상의 수상자에게는 트로피를 주었다.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2019-11-04 18:06:00

강판권(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나무와 창의성] 12월의 나무: 상수리나무

상수리나무는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대표적인 구황식물이었다. 어려울 때 목숨을 구해준 구황식물은 본초학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약효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본초학은 전근대 시기의 식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 심지어 식물학자조차도 식물을 본초학으로 이해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초학에 기초한 식물 인식은 모든 식물을 약효로만 바라보는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식물을 보면 가장 먼저 약효를 따진다. 식물원조차도 식물 이름표에 약효를 적는다. 어려운 시대가 아닌 요즘도 가을철 산에 가면 참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상수리나무나 굴참나무의 열매를 줍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식물에 대한 본초학적 인식에서 벗어날 때 우리나라의 국민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상수리나무가 열매를 떨어뜨려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계절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회남자" '시칙'에는 12월을 다음과 같이 바라보았다.천자는 현당(玄堂)의 좌개(左个)에서 조회를 하고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즉 사방에 개고기나 양고기를 찢어놓고 크게 푸닥거리하게 하고, 흙으로 빚은 소를 밖에 내놓게 한다. 어업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물고기 잡이를 시작하게 하고, 천자도 몸소 나아가 물고기를 잡으며, 잡은 고기를 태묘에 먼저 올린다. 백성에게는 오곡의 씨앗을 꺼내 놓게 하고, 농업 담당 관리에게는 씨 뿌릴 일의 계획을 세우게 하고 가래 보습 등의 쟁기를 수리하여 농기구를 갖추게 한다. 악사에게는 대규모의 합주를 연주하게 한 후 한 해의 음악 활동을 마감하게 한다. 그런 다음 산림을 관리하는 담당자에게 명령하여 땔나무를 거둬들여 종묘 제사와 각종 제사에 사용하는 땔거리를 공급하게 한다.상수리나무의 이름은 임진왜란 때 피란 갔던 선조가 피란지에서 먹은 도토리묵을 환궁해서도 수라상에 올린 것과 관련이 있다. 묵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도토리는 털로 덮여 있다. 상수리나무의 열매는 같은 과의 굴참나무와 거의 같다. 그래서 두 나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잎을 봐야 한다. 상수리나무의 잎은 앞뒤의 색깔이 거의 같은 반면 굴참나무의 잎은 앞뒤의 색깔이 다르다.상수리나무의 한자는'역'(櫟)이다. '역'은 '쓸모없는 자' 혹은 '장수'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중국 전국시대 장주가 편찬한 "장자-인간세"에 등장하는 제나라 근처 곡원의 사당 앞에 살고 있는 상수리나무에 얽힌 우화 때문이다. 이곳의 상수리나무는 굽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덕분에 천명대로 살 수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쓸모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철학을 낳은 나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자"에 등장하는 우화를 모방해서 '역옹'(櫟翁)의 호를 사용했다. 그중에서 고려시대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은 자신의 호를 딴 작품이다.무용지용의 철학은 생명체에 대해 비교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은 쓸모를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의 가치는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따라 생명체의 가치를 판단한다.내가 자주 다니는 대구시 북구 구암산에는 콩과의 갈잎큰키나무인 아까시나무가 상수리나무와 더불어 많이 살고 있다. 산등성이 등산로 주변에도 아까시나무가 적지 않게 살고 있다. 그중에 한 그루가 상수리나무의 뿌리와 얽혀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에 가보니 누군가가 상수리나무는 살려두고 아까시나무만 잘라버렸다. 지금 아까시나무는 목이 날아간 채 죽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아까시나무를 자른 사람의 심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까시나무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구암산의 아까시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누리기는커녕 영문도 모른 채 타살되어 버렸다. 인류의 역사에서 구암산의 아까시나무처럼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위대한 목숨을 잃어버린 존재가 아주 많다. 구암산의 아까시나무를 벤 자의 행동은 만행이다. 생명에 대한 만행은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나쁜 것이다. 아까시나무에 만행을 저지른 사람은 지금 아까시나무의 꽃으로 만든 꿀을 맛있게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산객들 중에는 이같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도 갖지 않고 버젓이 살아간다.

2019-11-04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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