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대구 옛 이야기] 한훤당 김굉필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1454~1504)은 '소학'을 중시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고 일컬었다. 퇴계 이황은 김굉필을 "자신을 수양하는 데 힘써서 참다운 실천으로 공부를 삼은 자는 오직 한훤당 한 사람뿐이었다"고 평가하였다.김굉필은 1480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천거되어 남부참봉,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으로는 한양, 합천, 현풍, 양평 등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그중에서도 그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유배당하자 조광조가 그를 찾아왔던 사실은 유명한 일화이다.그러나 김굉필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훈구파들이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가 노산군(단종)을 폐위한 사실을 빗대어 비난하고자 실었다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비롯해, 세조가 덕종(세조의 장남)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불렀던 사실, 영응대군(세종의 8번째 왕자)의 부인 송씨와 승려 학조가 밀통했던 사실, 소릉(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능)을 파헤쳐 그 재궁을 바닷가에 버린 것을 비판한 기사, 황보인과 김종서가 절개를 위해 죽었다고 표현한 기사 등을 연산군에게 고하여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이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도로 지목되어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이곳에서 곧이어 김굉필은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 사사 사건에 의해 발생한 갑자사화에 얽혀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중종반정 직후 김굉필은 승정원 도승지로, 1519년 우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드디어 1610년 문묘에 종사되어 최고 유학자 반열에 올랐다. 현풍에는 김굉필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도동서원이 있는데, 최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된 한국의 9개 서원 중 한 곳이다. 도동서원을 방문하여 김굉필의 정신을 본받아 실천하는 자세를 기를 것을 바라는 바이다.
2019-09-25 18:00:00
[새론새평]도시화에 따른 물흐름 왜곡, 그린 인프라 구축 시급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불투수면적율이 증가하였다. OECD주요국가별 도시화율은 2012년 기준, 이태리 51%, 독일 64%, 미국 69%, 일본 78%, 한국 87%로 한국이 가장 도시화 되었다. 도시는 콘크리트, 아스팔트 등의 포장으로 자연적 물순환을 왜곡한다. 지하수 감소, 증발산량 감소, 강우시 유출 증가 등의 물순환 왜곡 뿐만 아니라, 미세먼지 증가, 도시열섬 효과, 비점오염 유출 증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환경부는 도시지역 불투수면적율이 20%를 넘는 도시에 대하여 LID(Low Impact Development, 저영향개발) 기법을 적용하여, 물순환 구축, 비점오염유출 저감, 지하수위 확보, 열섬현상 저감, 녹지공간 확대 등을 권고하고 있는데, 2016년 물순환 선도 도시로 대전시, 울산시, 광주시, 김해시 및 안동시를 선정하였다. 대구시는 물산업 선도 도시를 지향하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정부의 물관련 정책을 우선적으로 도입하고, 향후 자연적 물순환과 인공적 물순환을 연계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녹지·공원계획과 더불어 하수관거시스템과 연계하여 구현하여야만 한다.하수관거시스템은 오수와 우수를 함께 배제하는 합류식과 분리하여 배제하는 분류식으로 구분한다. 기존의 도시는 대구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합류식시스템으로, 강우시에는 처리없이 그대로 수계로 방류하는 하수월류수인 CSO(Combined Sewer Overflow, 합류식 하수관거 월류수)가 수질오염의 주요 원인으로, 합류식 하수관거시스템의 두드러진 문제점이다. 따라서 하수관거정비는 기존의 합류식을 분류식으로 바꾸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대구시 하수관로는 지산, 현풍, 칠곡처리분구 등의 일부 지역과 신규로 조성되는 택지개발지구를 제외하면 대부분 합류식 하수배제방식이다. 강우시에는 공공하수처리시설 용량의 3배의 하수는 차집관로로 유입하고 나머지 하수인 CSO는 그대로 차집관로의 우수토실을 통해 처리없이 그대로 수계로 방류한다. 건기시 관로내에 쌓여 있던 오염물질이 강우시 일시에 쏟아져 수질오염을 발생하게 된다. 또한 차집관로를 통해 공공하수처리시설로 유입하는 하수는 처리시설용량만 처리하고 나머지 2배의 하수는 처리없이 그대로 방류하여 하천의 수질오염을 가중시키고 있는 실정이다.지난 6월 17일에 대구시 신천의 칠성교와 경대교 사이 1km에 물고기 수백마리가 집단 폐사하였는데, 폐사한 물고기의 아가미에서 하수찌거기가 발견된 것을 보면, 15일 발생한 국지성 호우로 인해 관거내 쌓여 있던 퇴적물이 신천변 차집관거의 우수토실에서 일시에 배출한 CSO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되며, 신천 수중보의 부적절한 운영으로 인한 수량 또는 용존산소 부족의 원인도 있을 것같다. 아무튼 주된 원인은 하수관거시스템의 문제로 보인다. 뉴욕시는 대구시와 미찬가지로 합류식 하수관거시스템인데, 강우시 발생하는 CSO를 줄이고, 다목적의 기능을 갖는 인프라(Infra-structure)를 설치하고 있다. 하수도시설 개선을 위한 그레이 인프라(Grey Infra-structure)과 더불어 그린 인프라(Green Infra-structure)를 추가로 도입하고 있다.대구시 하수관거 분류화율은 약 42%로 울산시 98%, 광주시 61%, 대전 55%, 부산 50%에 비해 저조하고, 전국 최하위 수준이다. 선진국의 하수관거정비는 단순한 관거정비를 떠나 강우유출수를 줄여 도시홍수 피해를 줄이고, 오염된 초기 빗물을 처리하며, 쾌적한 도시공간 조성을 위한 분산형 GI/LID를 포함하고 있다. 대구시도 이를 포함한 100년 미래 하수관로 선진화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하수관거정비에는 수조원 이상의 예산이 소요되므로 중·장기적인 계획과 하수처리구역별로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서대구 고속철도 역세권 개발계획 중 하나인 달서천 및 북부 하수처리장과 염색폐수처리장의 하·폐수처리장 통합지하화 사업은 세계 최고의 시설로 첨단화·현대화하여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육성과 대구시 물산업 허브도시 지향에 부응하여야 한다. 하·폐수처리장 재구축 사업은 반드시 하수관로 정비 사업과 함께 추진해야 그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2019-09-25 13:12:49
[매일춘추] 예술의 비전
친구가 자신의 딸 아이에게 엄마가 아파서 죽겠다 했단다. 보통 우리는 흔한 감기몸살에도 '죽겠네'란 말을 빌린다. 그랬더니 친구의 딸아이가 엄마가 죽으면 새엄마가 오게될건데 자신을 예뻐해 줄까 걱정이라는 7세 아이의 순수함과 서운함이 느껴지는 친구의 수다가 떠오른다.7세도 그 나름의 걱정이 있기 마련이고, 청년세대, 중장년세대, 노년층의 삶의 모습들이 지금 시대에는 각양각색으로 공존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기주도성을 가지고 스스로 본인이 속한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 가려 한다. 다양한 사회적 현상과 문제들이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다양한 시선들은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하고 사실을 공유하는 한편 비판적 접근과 해결을 위한 적극적 개입들을 시도한다. 오늘날의 우리 곁의 예술현장은 사회혁신, 지역브랜드와 지역재생, 공동체, 사회적 경제 등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으며 그 중심적 역할을 하는 예술가의 역할도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현대예술에서 예술 사조를 살펴보면 모더니즘은 1920년대에 일어난 감각적이고 추상적, 초현실적인 경향의 여러 운동을 가르키며 현대적이고 도시적이며 인간의 무기력함을 타파한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롭고 열정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세대, 계층, 생각, 아이디어의 분출로 표현된다. 모더니즘은 이후 여러 현대적인 큰 격변들, 2차 세계대전, 흑인인권운동이 일어난 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후기 변화된 양식으로 나타나 예술가의 내적 표현적인 자유성을 극히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기존의 예술과는 매우 다르게 개성이 넘치고 자율적이며 다양성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특히 무용은 무용수의 움직임만으로 전달받게 되는 메시지를 관객의 상상력과 함께 자발적으로 느껴야 하는 감상의 어려움을 겪는다. 간혹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이 강한 무용 작품일 경우 다양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술가의 탈 중심 사고, 탈 이성적 사고에 의한 먼 우주 너머 세계를 춤추고 있어 비난받기도 하며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상상력으로 인해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예술의 본래적 의미이자 속성인 자기 성찰과 세계에 대한 관계 이해라는 역량의 결과가 관용과 자기 존중의 구도에서 실행되어 사회통합과 공감능력으로 만들어진다.예술은 예술가 개인적 차원에서 주어지는 변화를 다룬 것으로 개인적 발전을 위한 예술도 있는 반면 상호문화적이고 세대 간 이해를 통한 공감대와 사회적 결속력을 통한 예술의 역할은 공동체를 이끌어갈 동기 유발을 지지하고 문화 민주주의를 위한 참여와 협조의 예술로 볼 수 있다. 상호문화적이고 세대 간 이해를 통한 공감대와 사회적 결속력을 통한 예술의 역할은 우리에게 기대감과 삶의 상징성으로 다가오길 기대한다. 김정하 대구가톨릭대 무용학과 외래교수
2019-09-25 11:36:56
[매일춘추] 고결한 아름다움
나의 곡 정가를 위한 '별한'이라는 곡이 있다. 남녀창 정가를 창작곡으로 만들었다. '별한'이라는 곡 제목은 조선시대 뛰어난 예인이던 기생 매창의 시조에서 가져온 것으로, 매창의 유명한 시 '이화우 흩 뿌릴제'를 비롯하여, '규원(閨怨)', '별한(別恨)', 그리고 그녀의 정인이었던 촌은(村隱) 유희경의 '도중억계랑(途中憶癸娘)' 이렇게 4개의 시조를 가사로 하여 곡을 썼다.매창은 황진이와 많이 비견되며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을 포함하여 그 시대 여러 선비들과 교류를 나눌 만큼 뛰어난 글재주와 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유희경 또한 신분은 천민이었지만 뛰어난 학식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 두 사람이 어느 날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졌는데 이는 곧 서로에 대한 문학적 깊이와 시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리라 생각된다. 시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시를 통해 사랑을 표현하며 마음의 정이 깊어갔다. 그러나 이내 긴 시간동안 두 사람은 기약 없이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그때도 서로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시로 적어 많이 주고받았는데, 그중 위의 4개의 시조를 엮어 만든 곡이 정가를 위한 '별한'이다.'임 떠난 내일 밤이야 짧고 짧아지더라도(明宵雖短短)/ 임 모신 오늘 밤만은 길고 길어지소서(今夜願長長)/ 닭 울음소리 들리고 날은 곧 새려는데(鷄聲聽欲曉)/ 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雙瞼淚千行)'- 매창 '별한(別恨)'짧은 만남을 통해 서로 마음으로써 사랑을 나누었지만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오니 그 마음을 아쉬워하며 쓴 매창의 시이다.'고운 임 이별한 후 구름이 막혀(一別佳人隔楚雲)/ 나그네 마음 어지럽다오(客中心緖轉紛紛)/ 청조도 날아 오지 않아 소식 끊기니(靑鳥不來音信斷)/ 벽오동 찬 비 내리는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碧梧凉雨不堪聞)'- 유희경 '도중억계랑(途中憶癸娘)'길에서 문득 계랑을 생각하다는 뜻의 도중억계랑은 길을 가다가도 그녀 생각이 나고 늘 그녀를 그리워하는 유희경의 마음이 잘 담겨있다. 여기서 계랑은 매창의 다른 이름으로 유희경은 매창을 늘 계랑이라 불렀던 듯하다. 그의 호를 딴 시문집 '촌은집'에는 매창에게 전해준 시 중 7수를 소개하였는데 모두 계랑이라는 제목이 들어가 있다. 이 시는 '별한'이라는 곡에서 남창가곡으로 표현하였는데, 지난 몇 달간의 칼럼을 통해 여러 번 언급한 정가 여창가곡은 부드럽고 순백의 미가 있다면, 남창가곡은 꿋꿋하고 기백이 넘치는 소리가 일품이다. 노래 창법적으로도 성악가, 대중가수 등과 많이 다르고 여창 정가와도 차이를 보이는 색다른 음색을 느낄 수 있으니 나처럼 그 매력에 한번 빠지기 시작한다면 헤어 나오기 힘들 듯하다. 고결한 우리 소리 정가, 많은 사랑 부탁드린다. 이정호 국악작곡가
2019-09-24 14:34:53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 것
일만 하면서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낯선 질문에 빠지기 시작한다. 나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누구나 인정하는 참된 가치는 존재하는가? 이런 것들을 근본적인 질문 혹은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부르자. 이런 질문들에 빠지면 대개는 내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생활도 이전과 결이 달라지면서 많이 흐트러질 수 있다. 기존의 것들은 다 뒤틀린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듯, 본 적도 없는 곳으로 이끌리며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10대나 20대에 이런 질문들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40대 50대의 나이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왜 사람들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는 삶을 살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들에 빠지는가. 이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의 성취도 얻게 되지만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데서 오는 피로감을 느끼고 스스로 지치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위기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잠시 멈춰 서서 본질적인 질문들을 붙잡은 채 삶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은 버겁기도 하지만 약간은 고상해 보이기도 하면서 위로를 주기도 한다.그런데 이런 질문들 앞에서 스스로 지쳤다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느낌에 빠진 채, 자신이 좀 약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위로나 휴식이 필요한 사람으로 다독이려 한다. 많이 지쳐서 위로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쳤다는 그 기분은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을 정도의 장벽이나 절벽 앞에 선 것과 같은 부정적 심리 상태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오히려 기능적이고 양적으로 살던 삶이 정점을 찍거나 한계에 도달한 후, 고도가 높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질적 상승을 위해 혁신의 대문 앞에 선 상태일 것이다. 기능적이고 양적인 삶의 고도가 자신의 크기만큼 커져 버리면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이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환경에 처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지금까지의 삶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이 없는 한 단계 더 높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왜 사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지칠 만큼 지쳐서 휴식이나 위로가 필요한 것이 다는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휴식 다음의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라는 전진의 명령 앞에 서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약해져서가 아니라 혁신의 요구 앞에 선 상황이다. 사실 본질이나 근본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들은 기능적인 것들보다 높다. 왜 사는가,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는 뜻은 그런 '가치'나 '본질'이 작동하는 높이를 향해서 내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낯선 질문들은 질문자의 수준이 높아져 가고 있음을 자신 스스로와 세상에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다.윤리적인 기업이 윤리적이지 않은 기업보다 더 지속적인 성장을 한다는 것이 요즘은 거의 상식이다. 윤리는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행위 다음의 원리적인 높이에 있다. 기능이기만 했던 행위가 행위 자체의 본질적인 이유나 가치적인 평가와 만나려 하면 윤리가 된다. 하나하나의 행위는 기능이지만, 윤리는 본질적인 높이다. 윤리적인 기업은 수준이 높고, 아직 윤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 기업은 수준이 높지 않다. 윤리를 추구하면 본질적 가치를 중요하게 본다는 뜻이고, 윤리 의식에 관심이 쏠리고 있지 않다면 본질보다는 기능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선이 높은 기업에는 지속적인 큰 성장이 보장되고, 시선이 낮은 기업에는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본질이란 이런 역할을 한다. 본질은 그냥 텅 빈 상태로 존재적 위상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동하면서 높이와 두께를 가지게 되고,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크기와 생명을 더 효과적으로 보장해주는 무기가 된다.개봉 된지 5년이나 지난 영화가 떠오른다. 이반 라이트만이 감독하고,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Draft Day)이다.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한 미식축구 클리블랜드 구단장인 써니가 선수 선발을 하는 과정에 읽힌 얘기이다. 켈리헨이라는 선수가 있다. 위스콘신 대학 선수인데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학 성적 우등상까지 받은 그는 어느 프로 구단에서나 가장 탐내는 대학 졸업 선수이다. 두 개의 일화가 중요하다. 하나는 켈리헨이 대학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자신의 생일 파티에 100여명의 손님을 초대했지만 그 가운데 같은 팀원의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팀 동료는 한 명도 초대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가 더 있다.어느 구단에선가 자기 팀에 관심 있어 할 만 한 선수들에게 작전설명서를 보내는데, 그 작전설명서 마지막 장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붙여놓았다. 그것을 받은 선수들에게 나중에 설명서를 읽었는지 물어보니 모두 읽었다고는 하면서도 절반 정도가 100달러짜리 지폐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읽지 않았으면서 읽었다고 한 사람이 절반이었던 것이다. 그 절반의 선수들에게 마지막 장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붙여두었었다는 사실을 밝히자 모두들 당황하였고, 대부분은 읽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켈리헨은 지폐 얘기를 하고 추궁하니까 안타깝게도 거짓말을 한 번 더한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아! 이제 생각나네요."라고 말한 것이다. 다른 선수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특히 클리블랜드 구단 경호실장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이라고 켈리헨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브라이언 드류라고 하는 선수만이 지폐를 우편으로 돌려보내면서 카드를 동봉하는데, 카드에는 "우승을 안겨드릴 때까지 이건 아껴두세요."라는 문구를 적었다.브라이언 드류는 언젠가 게임에서 터치다운을 성공시킨 후, 그 공을 관중석의 어떤 여인에게 준다. 이것은 규정 위반이었던 것 같다. 그 사건으로 브라이언 드류는 징계를 당한다. 그런데 공을 받은 여인은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브라이언의 누이였다. 누이는 얼마 후 사망하였다. 징계까지 각오하고 브라이언은 누이에게 터치다운을 한 공을 선물하였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를 징계도 감수하는 행위를 하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써니는 켈리헨이 욕심났지만, 가장 본질적인 인성 문제에서 안심이 되지 않자, 마지막 선택의 시점에 한 번 더 켈리헨에게 확인한다. "당신 생일에 팀 동료가 왔었는지 진실만 말해 달라."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써니에게 한 켈리헨의 대답은 끝까지 바른 길 위에 서지 못한다. "부끄럽지만... 그날 밤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대신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을 위장한다. 켈리헨은 "부끄럽지만..."이라고 말은 했지만 아직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염치가 없는 것이다. 기능적인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 도덕적 반성 능력이라는 본질적 태도보다 컸다. 써니는 제1지명권을 행사하면서 켈리헨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브라이언 드류를 선택한다.운동선수에게는 운동 능력이 제일 중요하게 보인다. 그러나 수준 높은 단계에서는 운동 능력이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격의 총화임을 안다. 인격적인 문제는 본질이고, 현상적으로 보이는 운동 능력은 기능이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에게 삶의 매 순간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더 잘하고 싶으면, 기능보다는 본질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개 이런 수준의 선택을 하면서 앞서 나간다. 목표보다는 목적을 선택한달지, 성적보다는 인성을 강조한달지, 시청률보다는 작품성을 더 중시한달지, 진학률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 본달지 하는 것들이다. 왜 미식축구 선수에게서도 거짓말을 하는지의 여부나, 언행일치가 이뤄지고 있는지의 여부나, 가식적인 변명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치졸함이 있는지의 여부나, 동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지의 여부를 매우 중요하게 봐야 하는지는 더 수준 높은 실력이란 기능적인 운동 능력보다도 결국 그런 점들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높은 수준의 삶이다. 선진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들은 이렇게 산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지켜지지 않더라도 운동만 잘하면 된다는 수준에서의 선택은 삶을 기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며, 그것은 진정한 승리의 길을 보장하지 않는다. 승리의 길 대신에 종속적인 삶으로 인도할 뿐이다.이런 의미에서 공자도 "특히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높이의 사람이라면 기능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君子不器)고 말한 것이다. 본질과 기능 사이에서 본질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야만 제 자리에서 뱅뱅 돌거나 좌우를 수평 이동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를 차원을 높여가며 전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에 빠지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내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고, 이 기본이 본질을 선택하게 할 수 있게 한다. 제자 자공이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자 공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行己有恥)이라고 답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내면을 가졌는가의 여부가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룰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본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염치라고 한다. 수치심, 즉 부끄러움을 아는 자기반성 능력이 인간적인 활동의 출발점이란 뜻이다. 수치심을 모르면 정의로운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불의가 주는 잠깐의 이익을 거부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없다. 수치심을 모르면 자식 앞에서도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서슴없이 하거나 심지어는 자식을 데리고 함께 부정한 일을 하기도 하는데, 자식과 더불어 누릴 아주 사소한 이익이 삶의 본질적 가치를 오히려 압도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자식을 망치는 것인 줄을 모르는 것은 부정한 일을 통해서 얻을 작은 이익을 본질적 가치를 지켜서 얻을 이익보다 큰 것으로 여기는 무지와도 관련된다. 지적 능력이 전인적으로 배양되지 않으면, 아무리 학식이 높아도 수치심을 알기는 어렵다.기능적인 잠깐의 이익을 거부하고 본질을 선택하는 태도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는 수치심(부끄러움)을 알아야만 발휘된다. 그래서 "중용"은 '수치심을 알아야 용기에 가까워질 수 있다'(知恥近乎勇)고 기록한 것이다. "관자"는 더 적극적이다. 국가의 기틀 네 가지, 즉 '예(禮)·의(義)·염(廉)·치(恥)'라는 4유(四維)를 제시한다. 수침심은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그 가운데서도 수치심은 정의를 실현하는 기둥이다. 사회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는 자기 반성력이 사라지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려서 파멸을 면치 못한다. 수치심이라 불리는 염치가 사라지면 파렴치(破廉恥)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파렴치한 사회라면, 거기서 무슨 일이 가능하겠는가.개혁을 완수하고 싶은가? 혁명을 이루고 싶은가?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가? 자녀를 잘 기르고 싶은가? 창의적이고 싶은가?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가? 선도력을 갖고 싶은가?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가? 좋은 가수가 되고 싶은가? 종합적으로 말 해, 한 층 더 오르고 싶은가? 기능에 빠지지 않고 더 본질적인 것을 선택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선택의 순간에 더 본질적인 것을 고르게 되는가? 염치를 알면 된다. 최소한 부끄러워할 줄만 알아도 한 층 더 오를 수 있다.
2019-09-23 18:00:00
[신병주 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서원을 찾아가는 즐거움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한다. 옛 선비들이 풍광이 좋은 곳에서 책을 옆에 끼고 독서하는 장면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기도 한 계절이다. 경치도 뛰어나면서 독서가 딱 어울리는 곳으로 서원을 추천하고 싶다. 서원은 선현을 추모하고, 후진 교육을 위해 세운 기관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립 교육기관이다.학생들을 가르치는 강당과 강당 앞마당의 좌우에는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두었다. 서원의 제일 높은 언덕에는 배향 인물을 모신 사당을 만들었는데, 대개 존덕사(尊德祠), 숭덕사(崇德祠), 상덕사(尙德祠) 등의 이름을 붙였다. 서원의 정문에는 시원한 2층 누각을 배치하기도 했는데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가 대표적이다.지난 6월 30일 좋은 소식이 들려 왔다. 안동의 도산과 병산, 영주 소수, 대구 도동, 경주 옥산 등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것이다. 서원의 세계유산 지정으로 우리나라는 종묘와 창덕궁, 조선왕릉,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등 총 14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2018년 한국의 산사 11곳 지정에 이어, 서원 9곳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한국의 불교와 유교 유산은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까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유산들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최초의 서원은 중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고려 말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안향을 배향한 서원을 세우고, 이름을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중국의 주희가 백록동서원을 세운 뜻을 계승한 것이었다.명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백운동서원에 서적, 토지, 노비 등을 지원받고 편액(扁額)을 하사받았다. 사액서원이 되면서 그 명칭도 소수(紹修)서원으로 바꾸었다. 선현의 뜻을 잘 계승하고 닦아나가겠다는 뜻이었다.세계유산으로 지정된 9곳의 서원 중 6곳이 영남 지역에 분포한 것도 주목된다. 조선시대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사림파 학자들이 배출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후학들을 양성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1610년에는 공자를 모신 성균관 문묘(文廟)에 함께 배향하는 영예를 지닌 오현(五賢)을 선정했는데,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그 주인공이다.그중 영남을 기반으로 한 4명의 학자를 배향한 서원이 모두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 정여창을 배향한 남계서원,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이황을 배향한 도산서원이다.도산서원에서는 이황의 생전 자취가 잘 남아 있는 완락재(琓樂齋), 암서헌(巖棲軒), 정우당(淨友塘), 몽천(蒙泉) 등을 만나볼 수 있고, 병산서원의 2층 누각인 만대루에서는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산과 낙동강의 풍경을 바라보는 호사를 누려볼 수 있다.호남을 대표하는 사림파 학자 김인후를 배향한 장성의 필암서원에서는 인종이 세자 시절 김인후에게 보낸 묵죽(墨竹) 그림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경장각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충청도 지역의 대표 서원 돈암서원에서는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건물인 응도당(凝道堂)과 함께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등 충청도 지역 유림들의 성장과 활동을 만나볼 수 있다.서원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당쟁의 온상이라는 이유로 영조 때와 흥선대원군 집권기 때 대규모로 폐출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그 정신과 유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서원이 위치한 곳은 주변의 자연 경관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고 서원에 배치된 강당, 기숙사, 사당, 누각 등은 전통시대 교육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가을날에 학문적 향기가 불어오는 서원을 찾아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정수들을 찾아보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한다.
2019-09-23 18:00:00
[세계의 창] 하이켄크로이츠는 안 되고 욱일기는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일본은 어떻게 다를까. 독일은 과거를 멀리하고 일본은 과거를 가까이 한다고 한다. 독일은 2차 대전 이전의 나치 체제와의 단절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구축했고,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의 연속선상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찾았다. 독일 초대 총리 아데나워는 1951년 의회연설에서 "독일의 이름으로 일어난 전쟁 범죄에 대해 현재와 미래에도 도의적 금전적 보상 의무가 있다"며 과거와의 단절과 반성을 선언했다. 맥아더 점령군 사령관의 지시를 받기는 했으나, 일본은 이전의 메이지헌법 체제하에서 제국의회의 심의와 천황의 재가를 거쳐 신헌법을 제정, 공포했다.독일은 연합국에 의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더해 스스로 국내법을 만들어 전범을 처벌했다. 일본은 연합국의 도쿄 국제군사재판을 부정하고 연합국의 군사점령이 끝나자 전범을 석방했다. 1952년 일본 국회는 원호법과 연금법을 개정하여 전사자와 마찬가지로 전범과 그 유족에게 연금과 위로금을 지급했다. 일본에는 공식적으로 전범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같은 논리에서 전쟁 중에 그들이 저지른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은 범죄가 아니며 배상의 의무도 없어진다.내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와 욱일기(旭日旗, 떠오르는 아침 해와 같은 기세)가 논란이다. 욱일기는 태양을 상징하는 일장기에 황실의 문양인 국화의 꽃잎을 햇살 무늬(光線)로 형상화한 것이다. 욱일기는 1870년과 1889년에 각각 육군과 해군의 정식 군기로,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 편성된 항공부대도 사용하면서 일본군의 상징이 되었다. 육군은 "무용(武勇)으로 국위를 세계에 떨친다"는 의미로, 해군은 "햇살 무늬는 세계에 천황의 위엄을 빛나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에서 만든 전쟁 홍보영화에는 침략 전쟁의 상징으로 하이켄크로이츠(逆卍字)와 함께 반드시 욱일기가 등장했다. 패전과 함께 욱일기도 사라졌으나, 1954년 육상 자위대와 해상 자위대가 발족하면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말한, "옛 제국군의 전통을 잇는다"는 취지로 다시 사용되었다.1945년을 기점으로 한 독일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는 국가 상징의 연속과 단절일 것이다. 독일은 2차 대전 이전 나치의 당기와 국기에 사용되었던 하이켄크로이츠를 금지하고 나치 시절 애창되던 국가의 1, 2절 가사는 삭제하고 3절만 사용한다. 일본의 경우는 군국주의의 상징인 천황제를 비롯해 일장기, 욱일기, 국가(기미가요)를 그대로 사용한다. 왜 욱일기는 사용되고 하이켄크로이츠는 금지되었을까. 왜 독일은 반성하고 일본은 하지 않을까. 독일 할레대학 맨프레드 교수는 주변국과의 관계도 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은 영국, 프랑스, 폴란드 등 주변국으로부터 나치의 부활을 계속 감시받았고,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유럽통합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 각국은 일본을 감시할 여력이 없었다. 중국은 내전에 시달렸고, 한반도는 전쟁 와중에 있었고, 동남아의 신생국들은 내부 정비에 바빴다. 경제적으로 일본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아시아 각국은 일본을 추궁하지 못했고, 이를 이용한 일본은 경제적 지원이라는 형태로 그들과 쉽게 타협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위안부라는 인권문제가 등장하고 아시아 각국이 성장하면서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일본 정부는 욱일기는 풍어, 출산 등에도 사용되었으며, 군국주의 상징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과거 역사를 상기시키는 욱일기는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팸플릿을 만들어 중국 방문객들에게 배포했다. 일본은 한국만이 욱일기를 문제 삼는다고 하나 중국도 공감을 표하고 국제축구연맹(FIFA)도 금지한 경우가 있다. 내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과거와 단절한 일본을 볼 수 있을까.
2019-09-23 11:09:14
[기고] 경주, 세계적 R&D 도시로 거듭난다
인구 150만 명의 거대한 대전시가 만들어진 데에는 대덕연구단지가 중심에 있다. 하지만 대덕연구단지의 모태가 1959년 설립된 원자력연구소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대덕연구단지에는 1천876개 연구기관과 기업이 입주해 있다. 전문직만 7만2천671명이고 연구개발(R&D) 사업비는 8조원에 이른다.핵심인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전문직 1천200여 명을 포함해 2천여 명, 예산은 6천억원, R&D 예산만 4천억원이다. 이 중 인건비 2천억원을 포함해 4천억원 정도는 지역에서 소비된다.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토록 염원해오던 혁신원자력기술연구원을 경주에 유치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2028년까지 국비, 지방비, 출연금 등 7천210억원을 투입해 경주 감포 일대의 360만㎡ 부지에 연구원을 건립하고 차세대 미래 원자력 관련 연구를 수행한다. 경주시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협약 내용에도 없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처리라든가, 허구성 사업에 선지원을 한다는 등 사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한다. 단언컨대 혁신 원자력기술연구원에서 중점 수행할 연구 분야는 명확하다.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미래 세대 원전으로 주목받는 초소형 원전인 SMR(Small Modula Reactor) 개발이고, 둘째는 자연재난 등 각종 재난으로부터의 안전관리이다. 셋째는 방사성폐기물의 관리와 원전해체를 위한 핵심 기술연구 등이다.SMR은 1천㎿ 이상의 대형 원전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통상 300㎿ 이하의 원전을 일컫는다. 소형화일체화모듈화의 특성이 있는데 친환경적이고 안전을 담보하는 장점이 있다.대형 원전은 300만 개 부품이 연결돼 있는데 대부분 사고가 배관 등 연결 부위에서 발생한다. 반면, SMR은 모듈화로 부품이 1만 개로 확 줄어든다. 배관은 거의 없다. 자동차 부품이 2만5천 개인 점을 감안하면 가히 혁신적이다.그래서 SMR은 사고가 없다. 설령 사고를 가정하더라도 워낙 작아 원자로 내에서 국한한다. 적은 건설 비용도 이점이다. 대형 원전은 1기당 최대 5조원의 투자 비용이 들어가고, 1㎞당 54억원이 소요되는 송전선로 비용이 또 발생한다.반면 SMR은 3천억원에서 7천억원 정도의 건설비가 소요된다. 송전선로 비용은 없다. 활용성도 다양하다. 극지 탐사, 쇄빙선, 우주선 등에 사용이 가능하다.SMR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050년까지 1천 기가 설치될 것으로 보고 3천500억달러(한화 420조원)의 시장 규모를 전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구상의 화력발전소 1만8천400곳이 결국은 SMR로 대체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러한 미래 세대 SMR 원전을 연구하는 곳이 바로 혁신 원자력기술연구원이다. 경주시와 경북도가 그동안 많은 공을 들여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하지만 연구원을 어떻게 잘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경주시민의 몫이다. 정주 지원은 물론, 연구원을 지역 발전과 어떻게 접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성공하는 자는 방법부터 찾고 실패하는 자는 핑계부터 찾는다는 말이 있다. 지난 4월 중수로해체기술원만 유치해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 후 절치부심 끝에 경북도와 경주시는 경북도지사, 시장부터 담당 직원에 이르기까지 첩보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힘겹게 연구원을 유치했다.이제 경주가 세계 속의 R&D 연구도시로 거듭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다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2019-09-22 15:34:59
[이른 아침에] 언제까지 싸움만 할 건가?
이건 좀 심하다. 싸워도 너무 싸운다. 국회의원들은 왜 맨날 싸움질만 해대느냐며 사람들이 비난할 때도 그러지 마라고 했다. 국회는 원래 싸우는 곳이라고, 유권자들이 서로 내편 들어달라며 뽑아줬으니 좀 싸워도 된다고 했다. 지난 정부가 걸핏하면 일치단결, 혼연일체를 강조할 때도 그건 아니라고 했다. 때가 어느 땐데 병영국가에서나 나올 법한 소릴 하느냐고, 사람 사는 곳은 어느 정도 티격태격하기 마련이라고, 그게 다양성이고 거기서 새로운 게 나온다고 했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말문이 막힌다. '수꼴' '좌빨' '꼰대' '극혐' 등 증오와 멸시를 꾹꾹 눌러 담은 말들이 온 나라에 넘쳐난다. 나이 따라 세대가 반목하고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과 지역이 갈라져 서로를 백안시하고 여성이 남성을, 남성이 여성을 서로 깎아내린다. 이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적당히 싸움에 편승하거나 갈등을 이용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잇속을 챙긴다. 심지어는 싸움을 은근히 부추기기까지 한다.이건 다양성이 넘치는 사회도 아니고 좋게 말해 정치적으로 역동적인 사회도 아니다. 그저 난장판에 가까울 뿐이다. 이번 정부 들어 내내 그랬다. 처음 문재인 대통령이 홍은동 자택을 나와 청와대로 향할 때, 거리에서 시민과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을 때, 그때 잠시 조용했을 뿐이다. 그 후론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곱씹어 보면 나라가 이처럼 사분오열된 가장 큰 원인은 정치에 있다. 취임 초, 쪼그려 앉아 어린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국민과의 스킨십을 즐기는 대통령을 보며 여당은 '불통의 시대가 가고 소통의 시대가 왔다'고 했다. 그러자 야당은 그건 소통이 아니라 그저 보여주기식 '쇼통'일 뿐이라 받아쳤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어 사사건건 끊임없이 이어졌다.크게는 탈원전 문제로 싸우고 4대강 보 해체를 두고 싸우고 대북 정책을 놓고도 싸우고 또 싸운다.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 소득주도성장에 관해선 전쟁을 벌이다시피 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대선 후보들의 선거공약을 보면 이런 문제들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도 말이다.작게는 대통령의 옷차림, 여당 정치인의 말 한마디, 야당 대표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정쟁거리가 되었다. 싸움이 격화될수록 양쪽은 유리한 판세를 점하려 각각 기를 쓰고 국민을 끌어들였다.한쪽은 내 뜻대로 돼야 나라가 제대로 설 거라 하고 다른 쪽은 그렇게 되면 나라가 거덜날 거라고 했다. 그러다 점점 국민을 향한 호소는 협박이 되고 국민과 국민을 갈라놓는 이간질이 되었다. 그렇게 논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편향된 믿음과 불굴의 투쟁심만 남았다. 저런 수구세력이 국민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리가 없고, 저런 좌파세력이 올바른 생각을 할 리가 없다는 식이다.어느 한쪽의 논리로만 본다면 아직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이렇게 되면 굳이 뭐가 옳고 더 좋은 건지 논쟁을 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 시간에 저 나라를 좀먹는 나쁜 무리를 향해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 것이 지지자 규합에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한 달 넘게 나라의 모든 이슈를 집어 삼키고 있는 조국 논란도 마찬가지다. 야당이 정치적 반사이익을 노린 게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임명을 막으려 했다면 인사청문회를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강남 좌파 조국은 틀림없이 위선자에 악인일 거라는 확신과 적개심을 앞세우기보다 그에 관한 의혹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따져 물었어야 했다.짧은 기간, 어마어마한 양의 조국 관련 뉴스가 쏟아졌다. 그 과정에서 육두문자 빼곤 한 인간과 그의 가족에게 퍼부을 수 있는 모든 모욕과 비난은 다 본 듯하다. 어떤 이는 아침부터 밤까지 서로 싸우고 비난하는 뉴스만 접하다 보니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라고 한다.이제 그만 좀 하자. 대한민국이 무슨 조국 이전 시대와 조국 이후 시대로 나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죽하면 대한상의 회장이 "정치는 끝없이 대립하고 우리 경제는 버려지고 잊힌 자식 같다"며 한탄을 할까? 조국 장관이든 그의 가족이든 죄가 있다면 재판을 통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경제도 돌아보고 태풍이 오는지도 살피고 가을 하늘도 한 번씩 쳐다보자. 그렇게 다른 이야기도 좀 하고 살자.
2019-09-22 14:55:43
[광장]귀곡천계의 습성을 버리자
귀곡천계(貴鵠賤鷄)란 고니를 귀하게 여기면서 닭을 천하게 여긴다는 사자성어로, 멀고 드문 것은 귀하게 여기는 반면, 가깝고 흔한 것은 천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닭은 가까이 자주 접하는 가축으로 자주 볼 수 없는 고니보다는 천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같은 조류(鳥類)라는 측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 우리의 문화나 역사의 인식에 있어 이런 귀곡천계의 습성이 남아 있어 안타깝다.지리적 여건으로 대륙인 중국 옆에 있는 한반도의 숙명 때문에 오랫동안 중국의 문화나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 현대에 와서도 외세에 의한 개방으로 그동안 내려오던 과거의 전통이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서양의 교육이나 제도를 도입함에 있어 우리 것 대부분은 부정되었다. 속된 말로 무조건 먼 곳이나 남의 것은 좋은 것이라 여기고, 우리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서는 버려야 하고 천하게 여겼다. 이런 오랜 중국의 사대주의 전통이나 맹목적 서양문화의 도입으로 인한 귀곡천계 습성이 우리의 가치관이나 문화에 많이 스며들어 있다특히 고대사 분야가 매우 심하다. 중국의 삼황오제나 제가백가들을 신봉하여 과거시험 과목으로 달달 외울 정도이고, 현대에도 서양의 그리스로마신화는 수백 권의 책으로 출간될 뿐만 아니라, 도표를 그려가면서 그 어려운 신들의 이름과 계보를 다 외우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의 단군신화나 고대에 대해서는 미신이거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무시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현실이다. 고대사는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후대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각색된 신화나 소설이기에 역사적 사실에 바탕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중국이나 서양 것은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신뢰하면서, 정작 우리의 단군신화나 환단고기, 천부경 등 고대사에 대해서는 미신 내지 허무맹랑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 같은 신화이고 그 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똑같다. 이는 그동안 우리의 근대교육이 서양 문화에 대해 맹목적으로 선진국이라고 단정하고 비판 없이 세뇌 교육을 받은 영향이라고 본다.문화나 역사는 상대성이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준이나 격을 논할 수 없는 분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 찬란했던 사라진 고대문화도 지금 거꾸로 볼 때, 결코 우열을 가릴 수 없듯이 오늘날 각자 이어져 온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도 고유성을 인정해야 한다. 설사 우리의 고대사가 다소 비현실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 해도, 전혀 근거나 스토리가 없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가 우리 것을 사랑하고 가꾸고 전승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것을 지켜 주리요.오늘날 국제화 시대라지만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말과 문화와 정신을 버리고 후손들이 어떻게 잘될 수 있다고 보는가.그런 의미에서 최근 대구경북지역이 그동안 보수적 전통으로 지켜온 지난날의 문화나 정신적 가치들을 세계인들이 같이 공감하고 지켜야 할 문화와 전통으로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 14곳 중 5곳이 등재되었다.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 그래서 서양과 중국 위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귀하게 여기는 습성을 버리고, 비록 초라하고 볼품없더라도 우리 것을 우리가 사랑하고 지키겠다는 생각으로의 전환과 교육이 뒷받침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19-09-21 06:30:00
[내가 읽은 책]이미지 인문학 1, 2/ 진중권/천년의 상상/ 2014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방법으로 현실을 만나고 이해하던 것이 변하고 있다. 오늘날은 움직이는 현실이 바로바로 전해진다. 문자문화가 전자매체를 만나 '0'과 '1'의 숫자코드로 단순화된 '디지털 이미지'가 된다. 전할 내용들이 문자, 회화, 사진, 컴퓨터 형상(CG)같은 다양한 재현영상에 실려 빠른 속도로 다수에게 전해진다. 과연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에 전자기기의 수동적 소비만 하면 될까? '이미지 인문학'은 스마트 환경에 적응이 어려운 '인문학적 실체'에 닥친 재난에 대해 경고한다.2008년부터 기술미학연구회와 함께 뉴미디어인 '이미지, 사운드'와 올드미디어인 '인문학'과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이 분야에서 진중권 작가의 기획, 교육, 연구, 저술활동은 특히 뛰어나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학과 학‧석사 후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이미지 인문학'은 1~2권으로 각각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와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를 말한다. 디지털의 철학, 리얼 비추얼 엑추얼(가상현실), 파타피직스(패러디 과학), 지표의 진실, 실재의 위기(1권), 디지털 사진의 푼크툼, 언캐니, 휴브리스와 네메시시, 인 비보‧비트로‧인 실리코, 디지털 미학(2권)등이 그것이다.조각상이 놓여 있어야 할 받침대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휴대용 모니터를 통해 보면 그 빈 곳에 가상의 금송아지가 나타난다. 그 모니터는 손에 들린 각도에 따라 실시간으로 시점을 바꿔주기 때문에, 관객은 마치 현실의 금송아지를 투명한 창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가상에 불과한 그 금송아지의 표면에는 현실의 공간이 반영된다. 전시될 공간의 인테리어를 미리 촬영해 입력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가상의 객체가 현실로 나온다는 전설이 실현된다. (p64)'스마트'로 대표되는 '정보혁명'시대에는 '이미지를 못 읽는 자가 새로운 문맹자로 전락'(p136)한다.'클릭', '더블클릭'으로 움직이는 디지털 시대도 나이가 든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직접 만드는 주체들도 새로운 체계에 적응한다. 스마트폰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노인들이 늘고, 교통카드를 만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상거래에도 적극 활용한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무심히 거닐다 잠시 사진작가가 되기도 한다. 손 안의 스마트 폰은 손쉽게 바다로부터 아주 멀리 떠가는 조각배를 큼직한 사진으로 건져내 보여준다. 스마트 기기를 통해 오늘도 다양한 전문지식들이 기술소비자를 만나는 여행을 시작한다. 새로운 기술소비자를 만난 뉴미디어 기술은 분명 현실과 가상이미지 중간쯤에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다.주어진 것을 담아 전달하던 사진적 현실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시도는 주체적인 활동에 있다. 이제 단순히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나치게 쉽게 아무 사진이나 전체 공개로 올릴 수 있어서 더욱 문제가 된다. 인터넷 상에 조심성 없이 올린 개인의 정보들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페이스북에서는 세계의 이름 모를 친구신청이 매일 도착한다. 만나고 헤어지는 경계도 없다. 말 걸어주는 이가 많아서 디지털 세상은 행복하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행복하게 소통하고 있다면 더욱 좋을 것도 같다.서강 학이사 독서아카데미회원
2019-09-21 06:30:00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한국 최초의 탐정소설전집
중학교 때 친구 중에 탐정소설 마니아가 있었다. '여학생'이라든가, '학원'같은 잡지가 인기를 끌고, 청소년 연애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그 친구는 코난 도일에서부터, 아가사 크리스티, 앨러리 퀸의 탐정소설을 탐독하고 있었다. 몇 몇 주변 친구들이 호기심에 그 친구에게 탐정소설을 빌리곤 했지만 대부분 몇 페이지도 채 읽지 못하고 곧장 돌려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탐정소설에는 여학생 취향의 낭만적 연애이야기가 없었다. 연애담은커녕, 책장을 여는 순간 잔혹한 시체가 눈앞에 툭 떨어졌다.문제는 이 뿐이 아니었다. 실마리를 따라서 범인을 찾아가는 탐정소설 추리 과정은 중학생에게는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달콤한 연애소설에 젖어 있던 아이들로서는 당연히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탐정소설과 관련한 취향에 관해서는 일제강점기 조선 대중도 1970년대 한국 여중생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던 듯하다. 일제강점기 조선대중은 연애소설 혹은 귀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나오는 야담류에 빠져있었다. 연애의 달콤한 묘미도, 귀신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도 없이 과학적 지식으로 가득 차있는 탐정소설은 조선 대중들에게는 낯선 세계였다.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동안 서구 탐정소설은 번역 과정에서 조선 대중의 입맛에 맞게 모습을 바꿔서 소개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한 편의 야담을 읽는 기분으로 탐정소설을 읽었다. 그런 조선에서 원작 내용을 그대로 번역한 탐정소설, 그것도 전집발간은 그 자체로서 혁명적 시도였다. 조광사에서 기획한 '세계걸작탐정소설전집'(1940)이 바로 그것이다. 전집이라고는 하지만 총 세 권. 어찌 보면 전집이라는 이름을 내걸기도 부끄러운 분량이었다. 수록 작품은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에밀 가브리오, 이든 필포츠, 그리고 프레드릭 아놀드 쿠머의 대표 탐정소설 5편이었다.일본과 비교하면 참으로 초라한 결과였다. 일본에서는 이미 1929년, 유명 출판사 세 곳에서 제 각각 수 십 권에 달하는 세계유명탐정소설전집에, 코난 도일 전집, 모리스 르블랑 전집까지 발간된 상황이었다. 그 때문일까.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달랑 세 권에 불과했던 이 전집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분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 권 밖에 되지 않는 '세계걸작탐정소설전집'이었지만 그 발간에는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했던 조선 문학가들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그들 문학가들은 탐정소설의 과학적 지식이 조선사회를 덮고 있던 미신과 초자연적 의식을 말끔하게 제거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조선이 오랜 어둠을 벗어던지고 일제를 이길 수 있는 강인한 힘을 가지게 되기를 희망했다. 일본탐정소설전집 발간을 뒷받침해주었던 일본 제국의 거대 자본과 문화적 지원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탐정소설 전집 발간을 향한 대중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세계걸작탐정소설전집'은 척박한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조선의 미래를 꿈 꾼 몇 몇 문학가들이 만들어 낸 열정의 결과였다.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2019-09-21 06:30:00
[춘추칼럼]'존경하는' 대신 '존중하는'
진정서를 써본 일이 있다. 지인이 갇혀 있기에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부양하는 가장임을 긍휼히 여겨 집행유예로 봐주십사 애걸복걸하는 내용이었다. 반성문보다 더 쓰기 힘든 글이 남을 위해 쓰는 진정서임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첫 문장 때문에 괴로웠다. 진정서를 어떻게 쓰는 건지 대략 알아보았는데, 하나같이 첫 문장이 '존경하는 판사님'이었다. 정말 존경하는 부모와 스승께도 왠지 쑥스럽고 오해 받을까봐 써보지 못한 말을, 생면부지의 판사에게 써야 한단 말인가?판사가 진정서를 틀림없이 읽어주고, 진정서가 판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인다고 치자. 누구나 쓰듯 '존경하는 판사님'이라고 시작하면, 판사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첫 문장을 신경도 안 쓸 것이다. '존경하는'을 쓰지 않으면 판사의 감정이 상할지 모른다. 진짜 존경하지 않는 것으로 오독할 수도 있다. 불쾌할 수도 있다. "남들 다 쓰는 '존경하는' 말 한마디를 안 붙였네, 성의가 없어!"어느 드라마에서처럼 '친애하는'을 쓰거나 '대쪽 같으신' '사랑해 마지않는' '똑바로 판결해주시리라 믿는' '법의 수호자이신'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하늘님 같으신' 등과 같이, 남다르게 써도 좋은 소리 못 들을 테다. "뭐야, 판사한테 장난쳐?"판사는 실제로 존경할 만한 분일 테다. 공부로 따진다면 내가 한없이 우러러봐야 한다. 일의 가치와 중요성을 생각할 때 절로 존경심이 든다. 경제적인 면을 따지면 나같이 모자란 사람은 공경을 해도 모자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이라는 말을 왜 그렇게 쓰기 싫었을까. 아무리 지인을 구하고자 하는 글이지만, 아무리 의례적인 표현이라지만,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호칭이 아니었기에, 그런 판에 박힌, 진심이 담기지 않은 관용어를 쓰는 것이 저어됐을 테다.'존경하는'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발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이 토론인지, 회의인지, 질의인지, 취조인지, 말싸움인지 잘 모르겠지만, 국회의원의 언변 덕분에 곧잘 놀라고 자주 웃는다. 저렇게 재미난 분들이 계신데, 소설이 읽힐 리가 없다. 도무지 적응 안 되는 말이 '존경하는'이다. 주로 진행자인 위원장이 쓰는 말이다. 질의자가 여당 의원이든 야당 의원이든 꼭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님'이라고 칭하는 것이다.대체 왜? 혹시 반어법일까? 그렇게 보기엔 칭하는 이나 듣는 이나 너무 자연스러운 얼굴이다. 텔레비전 보는 국민을 세뇌시키려는 것일까? 국회의원님을 부를 때는 앞에 '존경하는'을 붙여야 된다고. 국회의원끼리라도 존경해주자는 것일까? 혹시 진심인 걸까? 여야를 떠나서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성별을 떠나서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준 사이더라도, 국회의원으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동류 의식의 표현일까?'존경하는 의원님'도 '존경하는 판사님' 못지않게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관용어일 테다. 내가 추측한 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의도가 담겨 있다기보다는 위원장쯤 되어 회의 진행을 할 때 으레 쓰는 단순 관형어일 테다. 품위 없는 언어를 사용하며 다른 당 의원을 자격이 없다고 매도하는 이들도 위원장이 되면 '존경하는 의원님'을 입에 달게 될 테다.어쩌면 '존경하는'은 법원과 국회뿐만 아니라, 판사 못지않은, 국회의원 못지않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존경하는' 사람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존경하는 공화국'일지도 모른다.'존경하는'은 그만 하자. 국회의원을 '존경하는'(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하는) 국민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존경받으면 안 되는 직업이기도 하다. 국민을 위해 일하고 국민에게 칭찬받아야 할 머슴이니까.국민의 충복끼리 '존경하는'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럽다.(진짜 언제쯤 존경하고픈 국회의원을 볼 수 있을까) 정 무슨 말을 붙이고 싶다면 '존중하는'이 어떤가. 사람끼리 존중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못하니 '존중하는'이라는 말이라도 사용하라는 것이다.
2019-09-19 14:12:02
[기고]사기 범죄를 예방하자
최근 사기 범죄의 증가로 인해 서민경제가 악화되고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가 파괴돼 국민들의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다. 사기 범죄는 피싱 사기(보이스'메신저 피싱)와 생활 사기(인터넷·취업'전세 사기), 금융 사기(유사 수신·불법 다단계·불법 대부업·보험 사기) 등으로 나뉜다. 지난해 발생한 사기 범죄는 27만29건으로 2017년 대비 16.6%나 증가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특히 피싱 사기가 크게 증가하는 추세인데 이 중 보이스 피싱 사기는 올해 상반기에만 1만9천92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21% 증가했고 메신저 피싱 사기는 2천432건으로 전년 대비 271%나 증가했다. 피싱 사기는 범행 대상자에게 전화나 메신저 등으로 허위 사실을 이야기하고, 송금을 요구하거나 특정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사기 수법을 말한다.사기범들은 예전에 주로 가족이 납치를 당한 것처럼 가장하는 수법이 많았지만 현재는 국민연금공단, 법원, 우체국, 경찰, 은행 등을 사칭해 세금 환급과 신용카드 대금 연체, 은행 예금 인출 등 다소 구체적이고 교묘한 수법으로 급박한 상황을 연출해 피해자에게 범행을 꾀한다. 또한 '○○은행의 현금카드에서 돈이 인출되었습니다'라는 문구나 우편물 미수령, 법원 출석 요구, 연금 환급 등 마치 공공기관이 발송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피해자들에게 알리면서 송금을 유도하거나 개인 정보와 금융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이에 경찰은 이달부터 11월 말까지 피싱 조직원과 가짜 앱 개발자, 개인 정보 유통업자, 대포폰'대포통장 판매책, 인터넷을 활용한 인터넷 사기, 취업을 미끼로 돈을 뜯어내는 취업 사기, 허위 서류를 꾸며 보증금을 가로채는 전세 사기, 유사 수신, 불법 대부업 등의 사기 범죄에 대해 대대적인 집중 단속을 실시한다.국민 여러분도 '나는 아닐 거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사기 범죄를 예방해야 한다. 범죄 피해자는 통상적으로 어르신들이 많지만 의외로 젊은 층을 포함해 다양한 연령층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사기 범죄를 예방하려면 최소한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자동 응답 시스템(ARS)을 이용한 사기 전화를 주의해야 한다. 전화를 이용해 계좌번호나 카드번호, 주민등록번호 등 정보를 요구하는 경우 일절 대응하지 않는다.▷현금 자동 입출금기(ATM)를 이용해 세금 또는 보험료 환급, 등록금 납부 등을 해준다는 안내에 일절 대응하지 않는다.▷만일 전화 사기범들의 계좌에 자금을 이체한 경우, 즉시 거래 은행에 지급 정지 신청을 하고 112 또는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한다.▷개인 정보를 알려준 경우, 즉시 주거래은행이나 금융감독원에 신고한다.▷자신의 동창생 또는 종친 회원 등 긴밀하게 연락을 하지 않는 관계에서 송금을 요구하는 경우 반드시 사실 관계를 재확인해야 한다.▷자녀를 납치한 것처럼 가장해 부모에게 전화해 송금을 요구할 경우, 섣불리 돈을 송금하거나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말고 반드시 사실 관계를 재확인 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풍성한 한가위 연휴가 끝나고 수확의 계절이 다가왔다. 농가마다 가을걷이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런 시기일수록 사기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사기 범죄는 한순간,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범죄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2019-09-19 12:04:31
[특별기고]'가혹한 세금'은 국민저항 부른다
정부가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9.3% 늘어난 513조5천억원으로 편성했다. 2017년 사상 첫 400조원 예산을 돌파한 지 3년 만에 정부 제출 예산 500조원을 넘어선 것이다. 역대 최대 규모인 초(超)슈퍼 예산이다.문재인 정부 출범 3년 만에 100조원 이상이 늘어난 액수다. 이 정도면 중증(重症) 재정중독이다. 국가의 씀씀이는 커졌지만, 세입은 늘지 않아 적자 국채 발행이 작년과 올해 30조원대에서 내년 60조2천억원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또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수준은 올해 37.2%에서 내년 39.8%로 이미 위험 수준이다. 재정건전성 악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통계청에 따르면, 7월 실업자 수는 109만7천 명으로 7월 기준 IMF 사태 이후 가장 많았다. 일자리 정부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문제는 내년 법인세 수입이 올해보다 14조8천억원 이상 줄어든 64조4천억원에 그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법인세 수입 감소는 기업의 경영활동 위축의 지표라는 점에서 내년도에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을 편성했지만 일자리 증가를 기대하기는 애당초 글렀다고 볼 수 있다.최근 해외 이민 열풍이 불고 있다.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대한민국을 탈출해 해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증여나 상속을 목적으로, 높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투자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도 늘고 있는 것이다.통계청이 운영하는 'e-나라지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 해외이주자는 6천257명으로 2017년 1천443명과 비교해 4배 이상 증가했다.옛말에 가혹한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했다. 바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이다.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국 춘추시대 말 공자가 노나라의 혼란 상태에 환멸을 느끼고 제나라로 가던 중 무덤 앞에서 슬피 우는 여인을 만난다. 사연을 물어보니 시아버지, 남편, 아들이 모두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이다. 공자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여인은 "다른 곳으로 가면 무거운 세금 때문에 그나마 살 수가 없다. 차라리 여기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대답한다. 이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고 했다.즉,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처럼 현대판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피해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탈출하고 있는 것이다.동학혁명의 원인도 가혹한 세금 때문이었다. 1892년 말 전라도 고부(현 정읍)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은 온갖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수탈을 자행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인물인 셈이다.당시 농민들은 조병갑이 개인적으로 착복한 사건이 일어나자 관찰사에게 이 사실을 호소했다. 하지만 관찰사는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했다. 이에 전봉준과 1천여 명의 농민들은 1894년 2월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군 관아를 점령하게 된다. 이들은 관아에 있던 불법적인 세금으로 징수한 곡식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줬다. 즉, 동학혁명의 원인은 가혹한 세금에 대한 성난 민심 때문이었다.호질기의(護疾忌醫)라는 말이 있다. 병을 숨기고 의원에게 보이기를 꺼린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자신의 결점을 감추고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현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에 꼭 어울리는 말이다.문재인 정부는 이미 실패한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정책을 폐기하지 않고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포장지로 포장을 한다고 해도, 추락하는 경제상황을 감출 수는 없다. 아집으로 경제가 성장한다면 세상에 못사는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당장 소주성 정책을 폐기해야 하는 이유다.일자리 정부를 강조한 문재인 정부가 세금 착취에, 빚더미까지 떠넘기겠다는 것은 몰염치의 극치다. 국민 입장에서는 수탈(收奪)일 뿐이다. 일자리를 갉아먹고, 국민을 해외로 떠나버리게 하는 가혹한 세금은 국민과 나라를 병들게 한다. 동학혁명처럼 수탈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날 수 있음을 깊이 새겨야 한다.
2019-09-18 20: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