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종교자유에 관한 이야기 2

전헌호 신부 천주교대구대교구 소속

크롬웰(Cromwell)이 국가와 교회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받아들인 그의 친구 로저 윌리암(Roger William)은 신대륙으로 건너와 1636년 로우드 아이랜드(Rhode Island)를 건설한 후 신대륙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는 1663년부터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종교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경제적·사회적 이유로 유럽인들의 이민을 장려할 필요가 생겨나면서 종교자유에 대한 생각도 좀 더 관용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1776년 미국 독립을 선언하기 직전에 발표한 버지니아 인권선언문(Bill of Rights von Virginia)은 종교의 자유를 인간에게서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천부적인 기본 인권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선택한 종교를 자유롭게 신봉할 권리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그리고 종교의식의 자유를 인정했다. 버지니아 인권선언문은 이후 설립된 미국 각 주의 법에도 적용되었다.

미국에서 혁명적인 방법으로 진행된 종교자유에 관한 사항들은 프랑스 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교회가 출생, 혼인, 사망 신고를 독점하던 것을 국가도 기록하게 됨으로써 개신교와 유대인들 그리고 비신앙인들이 이러한 일에서 받던 불편함을 해소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독일 지역에서 종교자유를 먼저 허용하기 시작한 나라는 프로이센이었고, 독일의 다른 영주들도 그 뒤를 따랐다. 1848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제국회의에서 종교의 자유가 독일국민의 기본권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했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무엇이든 국민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고, 종교적 집회와 의식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1871년에 독일 전역에 걸쳐 종교자유를 허용했지만 아직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자유이고, 오늘날 의미하고 있는 바와 같은 완전한 종교자유는 1919년 바이마르 헌법에서 허락되었다.

나치시대에는 종교자유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 실제적으로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1949년에 바이마르 헌법에서 보장한 종교자유를 재확인하면서 종교와 세계관, 집회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했다.

종교자유에 대한 이러한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가톨릭교회에서 보인 반응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비오 6세에서 12세까지 일관되게 종교의 자유에 대해 거부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국가는 공동선을 이룩해 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참 종교인 가톨릭교회의 권리와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이 교황들의 생각이었다. 이 교황들은 '진리만이 권리를 소유하며, 오류는 권리를 소유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진리를 가진 가톨릭교회만이 선교를 위한 자유의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언제나 그러했던 것과 같이 비오 교황들의 시대에도 자신이 객관적인 진리 위에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교황을 비롯한 교회 내의 신심 깊은 구성원들이 가졌던 이러한 확신은,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지켜가기 위한 것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신심 깊은 구성원들의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부자유의 고통을 호소하고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었으며 심지어 교회로부터 발길을 돌리기까지 한 것에 있다. 이러한 상황이 심화된 것을 열린 마음으로 관찰한 요한 23세에 의해 개최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종교의 자유문제에 대해 그때까지 가졌던 교회의 태도에 많은 수정을 가했다.

전헌호 신부, 천주교대구대교구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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