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대의 우리나라 고사성어] 녹동백이(綠瞳白耳)

'녹동(綠瞳)'은 눈이 녹색이고, '백이(白耳)'는 귀가 흰 사람으로, 귀인상을 말한다. 박제가(朴齊家·1570~1805)는 우부승지 박평(朴玶)의 서자로 본관은 밀양, 호는 초정(楚亭), 조선후기 북학파 실학자다. 그는 서화(書畵)에 뛰어난 신동으로 양반가에 태어났으나 녹색의 눈과 흰 귀의 서얼로 놀림과 차별을 받았다. '소전(小傳)'에는 '녹동이백이 택고고유친(綠瞳而白耳 擇孤高愈親), 녹색의 눈과 흰 귀로 고고한 사람과만 친하다'고 했다.

양인의 첩 자식은 서(庶)고, 천인의 첩 자식은 얼(孼)인데 후에 '서얼'로 불렀다. '서얼차별법'은 태종 때 논의되어 세종 때 시행됐는데 요직의 가문들이 이중삼중으로 얽혀 권력독점을 막고 1부1처제를 위해서였다. 시행 후 상소문과 개혁방안이 쏟아졌지만 양반명문대가에 의해 수 백 년 동안 이어졌다. 양반(兩班)의 신분제도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으로 상민(尙民)의 반대어다. 고려 때 문무반(文武班) 동서반(東西班)이, 여말선초에 그에 속한 인척 등을 문반(동반·東班) 무반(서반·西班)으로 구분, 두 반이 양반이었다. 조선은 사회계급을 사(士)·농(農)·공(工)·상(商)으로 구분하고 사족(士族)이면 양반, 상민은 신분이 낮아 상놈으로 대변됐다. 서얼(庶孼)들은 실력을 갖추고도 경륜을 펼칠 수가 없었다. 제가는 '마음속에 천만가지 계책을 가지고 있으나 소인배라며 듣지도 않는다'고 한탄했다. 조선 후기의 한원진(韓元震)은 조선의 우환은 '문관이 무관을 멸시하고, 사대부가 서얼을 짓밟는 것'이라 했다. 제가는 부모를 여읜 마음을 '시인의 세계는 벽(癖)이 없고 지혜를 넓히는 능자의 세계라 고독이 없다'며 공담을 피했다.

1761년 서얼출신들이 '백탑시파(白塔詩派)'를 결성하고 399편의 '건연집(巾衍集)'을 펴내 청나라에 이름을 떨쳤다. 제가는 선비들이 두보(杜甫)의 시를 외우는 것을 보고 남의 찌꺼기를 줍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군왕도 자송문(自訟文)에서 '소금이 짜지 않고, 겨자가 맵지 않으면 뭐 하겠느냐' 했다.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박제가 네 서얼이 '사가시집(四家詩集)'을 펴내 연경에 조선의 문명을 높였다. 정조는 1777년 3월 '서얼허통절목'을 반포하여 서얼출신학자들과 교류하며 책을 간행하였다. 서얼보다 낮은 천민(賤民)인 노비·백정·광대·무당·창기 외 공노비와 사노비, 납공노비, 솔거노비, 외거노비들의 실태는 말이 아니었다. 노비는 세습되어 부모 중에 한쪽이 노비면 그 소생도 노비였고, 노비 간에 결합하여 출생한 노비는 주인의 소유였다.

1779년 규장각에 검서관을 설치하고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박제가를 중용하여 소통정책을 폈다. 제가는 사변화된 유학을 사물 내부의 법칙성까지 경학의 진의로 밝힌 실학사상을 김정희에게 전하고, 정희의 과학적이면서 체계화된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녹동백이(綠瞳白耳) 제가는 청나라를 네 번이나 다녀 와 역사·지리·천문·역산·의학·농법 등으로 민생에 실하게 기여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피지배신분층의 '신분해방'으로 서얼차별과 천민제도가 철폐(撤廢)되므로 인권이 회복되어 새로운 세상를 맞았다. 박제가는 중유정집, 북학의, 명농초고, 정유시고를 남겼다.

(사)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임종대 임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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