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산책] 모란을 읊음(영모란(詠牧丹)) - 王溥(왕부)

대추꽃은 아주 작지만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棗花至小能成實(조화지소능성실)

뽕잎은 부드럽지만 명주 실을 만든다네 桑葉雖柔解吐絲(상엽수유해토사)

참 우습군, 모란꽃은 됫박만큼 크건마는 堪笑牧丹如斗大(감소목단여두대)

아무 일 못 이룬 채로 해마다 빈 가질세 不成一事又空枝(불성일사우공지)

 

핀 줄도 모르는 새 슬며시 피었다가, 진 줄도 모르는 새 슬며시 지고 마는 꽃들이 있다. 위의 시에 등장하는 대추꽃도 그런 꽃들 가운데 하나다. 깨알 가운데서 작은 깨알보다는 조금 더 큰 꽃, 훅 불면 그냥 꺼질 것 같지만 막상 불어봐도 참으로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자세히 보면 연초록 별처럼 아름다운 꽃! 하지만 너무나도 작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한 대추꽃은 꽃으로서는 그 명함을 내밀기가 정말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꽃에서 우리 모두의 군침을 삼키게 하는 붉고도 탐스러운 대추가 열린다. 장석주 시인이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대추 한 알')라고 노래한 바로 그 대추다.

그런데 모란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모란은 꽃송이 하나가 작은 방석보다 조금 더 크다. 그러다 보니 대추꽃 천 송이를 모아보아도 활짝 핀 모란꽃 한 송이보다 더 작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모란은 '꽃 중의 왕(花中王)'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얼마나 눈부시고 화려한가. 대추꽃 1만 송이를 모아보아도 단 한 송이의 활짝 핀 모란 꽃만 한 강력한 이미지를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시인 김영랑도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모란이 피기까지는')"라고 노래하면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란에게는 화려한 겉모습만 있을 뿐 결실이라고 할 만한 알맹이가 아무것도 없다. 꽃은 그토록 화려하고도 탐스럽건만, 그 결과가 정말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이 시에서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것이 과연 대추와 모란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게다. 대추 같은 사람과 모란 같은 사람, 겉모습과는 달리 속이 꽉 찬 사람과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속이 텅빈 사람을 노래하고 있을 게다. 묵묵한 가운데 시대의 흐름과 국민들의 요구에 차곡차곡 화답한 정권과 구호는 참으로 화려했는데 막상 쭉정이만 남은 정권에 대해 노래한 것일 수도 있을 게다.

이종문 이종문

이종문 시조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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