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이상적 관망자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오래전에 철학자 한병철은 "21세기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성과사회를 사는 우리는 결국 성과주체가 된다. 성과주체인 우리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강제하고 착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성과를 내야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이익을 위해서 무엇이든 한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주군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자신의 인격쯤은 하찮게 여긴다. 성과를 낼 수 있고, 결과를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사회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이 잘 살게 되면 되는 것인가!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결과만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인가! 문제는 인간이 배부른 돼지로만 살 수 없다는데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묻는다. 어떤 삶을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삶이 다르기 때문에 답도 다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가치 있는 삶을 찾고, 성과보다는 의미 있는 삶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메타윤리학에서 '이상적 관망자'(ideal observer)란 용어가 있다. 헤어(R. M. Hare)는 이상적 관망자를 '가장 바람직하고 윤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상적 관망자는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완벽한 전망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일을 공정하게 조망하고, 판단하는 자를 '이상적 관망자'라 한다. 우리는 사회와 직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신문과 방송에서 소위 평론가라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의 소리에서 '올바른 삶의 길'도 '윤리적 사고'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상적 관망자'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적 관망자'는 '무사의(無私意)' 즉 마음(의지)에 사심(私心)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논어'에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했다. 이에, 중국 철학자 육구연(陸九淵)은 의리에 밝은 군자의 길을 변지(辨志)에서 찾았다. 변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우리의 마음이 의(義)를 향하는지, 사사로운 이익을 향하는지 구분하는 능력이다. 이 변지가 바로 육구연이 일생을 두고 추구한 진리의 길이었고, 수행이었다.

기독교 역시 영적인 삶의 길을 분별(discernment)에서 찾았다. 분별은 신중함과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있다. 이 분별의 끝은 하나님의 지혜를 관상하는데 있지 않는가.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상적 관망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잘 성찰하는데 있다. 그래서 성 막시모 증거자는 "모든 감각적 능력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할 수 있는 영혼은 완전한 영혼이다"고 했던 것이다.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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