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스토리가 있는 도시

이진숙 전 대전 MBC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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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무르익기도 전에 꽃부터 피었다. 3월이면 벌써 협죽도꽃이 티그리스 강변에서 시위하듯이 진분홍빛을 발산했다. 강변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살갗을 태울 듯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 바그다드의 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저녁 무렵 아부누아스 거리는 외식하러 나온 가족들로 붐볐다.

"그에 대한 사랑으로 나는 죽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 내 눈은 그의 멋진 몸에 머물러 있고, 나는 그의 아름다움에 놀라지 않지…."

아랍 문학 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는 아부누아스 시 속의 주인공 같은 남성들도 영화 장면처럼 지나갔다. 가족들이 아부누아스를 찾는 것은 마스구프 때문. 티그리스강에서 잡은 잉어 요리다. 테이블을 잡아 놓고 손님은 먼저 수족관 속의 잉어를 고른다. 잉어는 벌써부터 펄떡펄떡 힘 자랑을 한다. 그러면 종업원은 뜰채 속의 잉어를 기절시키고 요리 준비를 한다. 식당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호부즈(빵)가 구워져 나온다. 잘 반죽된 밀가루를 둥글넓적하게 빚어 화덕 속 벽에 철썩 붙이면 반죽은 떨어지지도 않고 노릇하게 구워진다. 바구니에 담은 호부즈는 식탁으로 옮겨지고 손님들은 후후 불어가며 뜨끈뜨끈한 빵을 뜯어먹는다. 그러는 동안 종업원은 모닥불처럼 세워진 장작불 가장자리에 쇠꼬챙이에 꽂은 잉어를 세운다. 옆구리를 갈라서 속이 다 보이게 손질된 잉어가 익어가는 동안 손님들은 메자라고 불리는 전채 요리를 먹으면 된다. 홈모스, 바바간누시, 팔라펠, 타불레 같은 반찬을 먹고 있으면 종업원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마스구프를 큰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준다. 토마토, 양파, 피망, 파슬리를 다진 데다 카레, 큐민, 고춧가루를 적당량 넣은 페이스트를 잉어에 고루 얹어 구운 마스구프, 손이 가기도 전에 군침부터 먼저 고인다. 석양 무렵 티그리스 강변 마스구프 식당에서 친구 A는 아부누아스의 시를 읊어주었다. 마스구프가 이라크의 대표 요리로 꼽히는 것은 맛도 맛이지만 티그리스강과 아부누아스가 함께 어우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금요일이면 무타나비 책 시장으로 갔다. 이라크 사람들은 책 시장에 압바시드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무타나비의 이름을 붙였다. 금요일은 우리로 치면 일요일, 휴일이었다. 이날이 되면 바그다드의 지식인들이 무타나비로 몰려왔다. 걸프전으로 서방의 경제 제재를 받던 시절, 무타나비는 더욱 붐볐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새 책은 언감생심 구경도 못 하고 무타나비의 헌 책방에서 억누를 수 없는 탐구욕과 지식욕을 채웠다. 돌아다니다 지칠 때쯤이면 아부 알리의 노천 찻집으로 갔다. 커다란 장독처럼 생긴 오븐에는 숯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 위에는 주전자들에서 보글보글 차가 끓고 있었다. 아부 알리는 핀잔으로 불리는 유리잔에 티스푼으로 하얀 설탕을 듬뿍 깔고는 솜씨 좋게 차를 부어주었다. 차는 은은한 숯 향이 배어나서인지 더욱 감칠맛을 냈다. 전쟁 때문에 더 늙었다며 한숨을 짓던 아부 알리는 아직 살아 있을까?

아부누아스와 무타나비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거리들이다. 지금 이라크는 방문 금지 국가로 지정되어 일반인은 여행할 수 없는 곳이지만 이라크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이 거리들은 반드시 들러야 하는 명소들이다. 시와 음식과 차, 스토리가 있어서 가보고 싶은 욕망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언제나 취해서 다녔다는 아부누아스, 아홉 살부터 시를 썼다는 지적인 시인 무타나비, 그리고 마스구프와 아부 알리의 차, 이런 것들이 거리에 환상과 상상을 덧입히기 때문이다. 대구에도 '상화로'가 있지만 그곳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을까? 입시철이면 기도를 하러 몰려드는 팔공산 갓바위,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서문시장, 최초의 백화점 미나까이가 있었다는 북성로, 비극적인 생애를 살다간 김광석의 이름을 붙인 김광석 거리…. 대구에도 스토리가 있는 장소들이 알고 보면 꽤 많다. 이야기를 발굴하고 스토리를 덧입히면 세계적인 관광 자원이 될 수 있는데도 "대구에는 갈 곳이 없어"라고 자조하는 걸 보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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