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을 걷다, 먹다] 28. 퇴계를 키운 춘천 박씨(朴氏)

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 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28번째 이야기. 퇴계 어머니 춘천 박씨(朴氏)

사진: 노송정 종택 본채의 퇴계선생 태실.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이다. 사진: 노송정 종택 본채의 퇴계선생 태실.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이다.

꼭 한번은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지 않고서는 퇴계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느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를 알게 되자 오히려 더 안개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퇴계의 향기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그의 시대는 연산군에서 선조까지 격동의 조선 중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안동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부르는 것은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와 공자의 고향, 노(魯)나라를 합쳐 놓은 곳과 같다는 의미다. 공자의 77세 종손 공덕성(孔德成)선생이 도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추로지향'이라고 쓴 글을 도산서원 입구에 비석으로 세웠다. 퇴계 태실이 있는 도산의 노송정(老松亭) 종택에는 '해동추로'(海東鄒魯)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해동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므로 우리나라의 공맹이라는 뜻이다. '도산서원'에 가지 않더라도 안동 어디를 가나 퇴계의 향기는 난다. 안동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은 퇴계가 학문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실천하는 '선비'의 삶으로 일관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런데 공맹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당대 대학자에게 사사 받지도 않고, 기껏해야 천자문을 가르친 서당 훈장과 숙부 송재공이 있었을 뿐, 성리학의 본향 중국에 유학을 가지도 않은 퇴계는 어떻게 공자와 맹자를 합쳐 놓은 듯한 조선 최고의 대학자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사진: 노송정 종택 별채다. 퇴계의 할아버지 노송정이 건립했다. '해동추로'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노송정 종택 별채다. 퇴계의 할아버지 노송정이 건립했다. '해동추로'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따지고 보면 퇴계는 남들보다 오히려 불우(?)하다고 할 수 있는 환경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6남1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태어난 지 7개월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야 했다. 할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별세하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방 교육'은 아예 구경조차 못했다.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 씨는 홀로 어린 퇴계를 비롯한 7남매를 건사하면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양잠과 농사로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고생스러운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춘천 박씨는 퇴계를 비롯한 두 형제를 학문의 길로 인도해서 높은 벼슬에 오른 대학자로 길렀고 구순의 시어머니도 성심성의껏 모셨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다. 맹자(孟子)를 대학자로 키운 것은 맹자의 어머니였다. 맹자의 어머니가 묘지 근처로 이사를 갔는데 어린 맹자는 늘 보고 듣는 것이 상여(喪輿)와 곡성(哭聲)뿐이었다. 맹자가 늘 그 흉내만 내자 맹자 어머니는 이곳은 자식 기를 곳이 못 된다 하고 곧 저잣거리로 집을 옮겼다. 맹자는 이번에는 장돌뱅이 흉내를 내곤 했다. 맹자 어머니는 이번에는 서당 옆으로 이사를 갔더니 맹자가 글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자식교육의 대부분을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머니가 맡는 세태는 전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묘지에서 저잣거리로 그리고 서당으로 세 번이나 이사한 끝에 맹자에게 공부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제공해줬지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은 어머니의 인성 교육이다. 훌륭한 어머니 아래 불효자는 없다.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씨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씨

따라서 맹자처럼, 대학자 퇴계를 만든 것은 7할이 어머니 춘천 박씨다. 나머지 3할은 할머니의 무릎 교육이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퇴계를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자 대학자로 성장시킨 기반이자 선생이었다.

오늘 퇴계가 태어난 '노송정 종택'과 퇴계 어머니 춘천 박씨 묘소를 찾아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퇴계가 태어난 곳이 바로 할아버지 이계양(1424~1488)이 건립한 '노송정 종택'이다. 퇴계는 이 노송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해서 6살에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12살에는 숙부로부터 틈틈이 '논어'를 배웠다고 한다.

공자가 노송정 종택 대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퇴계를 잉태했다는 전해질 정도로 퇴계 태몽은 대단하다. 노송정 종택 대문에 '성림문(聖臨門)'이라는 현판이 들어선 것으 퇴계의 제자 학봉 김성일이 태몽을 해석해서 붙인 이름이다.

성림문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퇴계 태실이 있는 노송정 본채다. 태실은 본채 중에서 퇴계가 살던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있다. 'ㅁ'자형 구조로 지어진 본채 안으로 돌출돼있는 태실에는 '퇴계선생태실'이라는 현판이 높게 붙어있다.

잘 정돈된 태실 안으로 들어서자 단아한 조선 선비의 모습이 그대로 떠올랐다. 눈을 지긋이 감고서 오백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을 청하자 퇴계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와 함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홀어머니 춘천 박씨의 단호한 표정과 막내 손자를 맡아서 키웠을 할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춘천 박씨의 생전 풍모는 퇴계가 직접 쓴 묘갈(墓碣·돌비석)에 잘 드러나 있다. 퇴계는 아버지의 묘갈은 당대 대학자 기대승에게 청하여 받았으나 어머니와 할머니의 묘갈은 자신이 직접 쓸 정도로 애정을 듬뿍 담았다.

"(어머니 춘천 박씨는) 서기 1470년 3월 8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아리따웠으며 자라서 우리 아버지의 계실(繼室·후실)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성심껏 섬기면서 조상을 받들었고 안 살림은 근검으로 다스렸다.

아랫사람을 대하기는 엄하면서 자혜로웠고 노비들을 거느리는 데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의뢰하고자 하였다. 길쌈을 하여 생활을 하였으나 밤새도록 하여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퇴계는 어린 시절 늘 자식들을 위해 일해 온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다.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존된 어머니의 묘갈에는 절절한 사모곡처럼 어머니 춘천 박씨에 대한 그리움이 듬뿍 배어있었다.

"신유년(1501년)에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하시고 다음 해 6월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그때 맏형님이 겨우 장가를 들었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어머니께서 깊이 생각하시기를 많은 아들을 두고 초년에 과부가 되어 가문을 잇지 못하고 마침내 시집 장가를 떳떳이 보내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크게 근심스럽고 두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제사는 맏이에게 맡기고, 그 옆에 방을 지어 거처하면서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짓고 누에를 쳤다.

부역과 세금이 혹심하여 많은 사람의 살림이 결단났는 데도 어머니께서는 능히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환란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가업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으며, 멀고 가까운 스승을 쫓아 공부하도록 학자금을 마련하였다.

언제나 훈계하시기를 다만 문예만 할 것이 아니라 몸가짐을 삼가는 것이 귀하다 하였고 사물에 알맞은 비유로써 가르침을 하였다.

언제나 간절히 경계하시기를 세상에서 과부의 아들은 배움이 없다고 말하니 너희들이 백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웃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 라고 말했다. 뒤에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니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늘 세상의 환란을 근심하였다..."

사진: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씨의 묘소. 뒤로 퇴계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가 차례로 조성돼있다. 사진: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씨의 묘소. 뒤로 퇴계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가 차례로 조성돼있다.

어머니는 퇴계에게 높은 관직을 마다하고 작은 벼슬(고을 원)에 그칠 것을 소원하셨다. 놀라운 것은 퇴계를 비롯한 7남매를 꿋꿋하게 길러낸 춘천 박씨가 문자를 배운 적이 없어 글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퇴계는 "문자를 배운 적은 없으나 평소에 늘 들은 아버님의 정훈(庭訓 가정의 가르침)과 여러 아들이 서로 공부하는 것을 들어서 이해하는 바가 있었으며 의리로 비유하여 사정을 밝게 하는 지식과 생각은 마치 사군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만 지니고 있을 뿐 겉으로는 항상 조용하고 조심할 뿐이었다"라고 표현했다.

글을 모르는 어머니 아래에서 조선 최고의 대학자가 탄생한 것은 모순이나 아이러니가 아니다. 퇴계는 어머니에게 글로 배운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삶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가사를 지성으로 돌보고 아이들에게 행동으로 가르치고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하는 것보다 더 나은 교육이 어디 있겠는가.

 

사진: 퇴계 아버지의 묘갈. 사진: 퇴계 아버지의 묘갈.

퇴계가 직접 쓴 묘갈이 있는 어머니 춘천 박씨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수곡 묘소'라 불리는 퇴계 부모와 조부모 묘소는 노송정 종택 바로 뒷산에 있었다.

묘소는 맨 위에 '조모'로부터 그 아래로 '조부', 그리고 '어머니 춘천 박씨', 그 아래쪽에는 '부친' 순서로 자리하고 있었다. 순서를 가늠할 수 없는 '역장'(逆葬)으로 볼 수 있었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역장에 개의치 않고 묘역을 조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장 늦게 세상을 떠난 된 퇴계 어머니와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소 사이에 뒤늦게 비집고 자리 잡은 듯한 형국이다.

사진: 노송정 종택 퇴계 태실 사진: 노송정 종택 퇴계 태실

묘소는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더라도 '길지'(吉地)였다. 눈앞에 개천이 흐르고 좌우로는 야트막한 산이 바람을 막아주면서 시야가 트인 아늑한 전망이 두드러져 보였다.

네 기의 묘소는 소박했다. 퇴계 스스로는 죽으면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할 정도로 소박했지만 효심이 지극한 퇴계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묘갈은 자신이 직접 쓸 정도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자신과 대척점에 서기도 한 고봉 기대승(奇大升)에게 아버지의 묘갈을 써줄 것을 직접 요청해서 바꾸기도 했다.

이 '수곡 묘소'에서 진하게 묻어나는 퇴계의 향기와 기대승이라는 이름 석 자를 발견하는 것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퇴계의 시대나 지금이나 세상은 늘 혼탁하고 혼란스럽다. 그의 시대가 혼란했던 만큼 퇴계라는 대학자가 나올 수 있었고, 지금의 세상 역시 천하대란을 통해 천하대치의 새 영웅이 탄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영웅을 기르는 것은 그 시대가 아니라 자식을 올바르게 이끄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퇴계의 향기를 통해, 혼란한 시대를 변화시키는 것은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춘천 박씨 같은 어머니의 존재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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