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천경자(1924-2015),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채색, 130×162㎝, 개인 소장 종이에 채색, 130×162㎝, 개인 소장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그린 기행 회화는 천경자의 작품 세계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해외로 나가는 일이 흔치 않았고, 출장이 아니라 여행 자체가 목적인 관광이 익숙하지 않던 1969년부터 그녀의 스케치와 기행문이 종합일간지에 실리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아프리카 여행과 자전적 이미지를 결합한 기행화이자 풍경화이자 자화상인 다층적 멀티장르 회화이다. 눈으로 덮인 희고 평평한 꼭대기가 인상적인 킬리만자로산이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보이고, 사슴, 얼룩말, 멧돼지, 사자, 영양, 기린, 코끼리 등 낯선 동물들이 드넓은 노란 들판의 드문드문한 나무 사이에 있다. 한껏 매혹적인 색채의 이국적 풍경이지만 동물의 표정과 동작은 침울하다.

코끼리 등 위에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한 여성이 있다.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천경자는 "고독과 상념에 잠긴 채 코끼리 등에 엎드려 있는 나체 여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고 했다.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그녀가 자신의 오십 평생을 회상하는 자서전을 쓸 때 그렸던 그림이다. 이 그림의 화려한 풍물, 당당했던 그녀의 겉모습과 달리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속마음은 회한이었던 것 같다.

그림재주뿐 아니라 글재주도 뛰어났던 천경자의 개인사는 그녀 자신의 명민하고 솔직한 수필로 그 편린이 알려지며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천경자는 철없이 한 결혼과 스스로 강행한 이혼, 기혼 남성과의 연애, 혼외자녀 출산과 양육, 자녀들에 대한 죄책감과 호적 문제, 임신 중절 수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역할 등을 감당한 여성으로서, 창작자의 짐을 진 예술가로서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통을 스스로 밝혔다. 생의 역경은 천경자 회화의 동력이 되었고, "자신의 비애와 분노를 즐기며 예술을 구가하고 싶은" 승화된 자학이 되었다.

천경자는 20세기 한국화 화단에서 많지 않은 채색화가이다. 일 년 동안이나 손을 대고서야 완성한 이 대작도 그렇지만 천경자는 긴 시간을 두고 붓질을 중첩하며 자신의 상념을 화면에 축적시켰다. 돌가루인 석채(石彩) 안료에 호분과 아교를 사용해 덧칠을 거듭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채색법이 부피감과 질감, 색감을 쌓아올려 밀도 높은 화면을 이루었다. 수묵화는 먹이 한 번 종이에 정착된 후 덧칠하면 제대로 스미거나 번지지 않아 오히려 처음의 붓질을 훼손하지만 채색화는 채색을 두텁게 할수록 그 안료 고유의 색조를 충분히 나타낼 수 있어 여러 번 나누어 칠할수록 깊이 있는 색이 된다. 천경자는 수묵화가 주류이던 당시 한국화 화단에서 꿋꿋하게 채색화를 고수하며 자신의 화풍을 이루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서.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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