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 두 번 다시 경험해선 안 될 나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 문재인 대통령. 매일신문 DB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 문재인 대통령. 매일신문 DB
정창룡 논설주간 정창룡 논설주간

"그럼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 이런 아내를 계속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겁니까."


대통령 후보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한마디로 불리하던 전세를 뒤집었다. 장인의 좌익 전력이 문제가 됐을 때였다. 이후에도 노 전대통령은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좌충우돌했다. 생각이 다른 이해집단과 얼굴 붉히는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게 대통령의 말이냐'는 논란에 휩싸인 적도 잦았다. "대통령 못해먹겠다." "이쯤가면 막하자는 거지요." 같은 어록이 남았다.


그래도 노 전대통령은 지도자가 구사하는 언어의 중요성을 꿰뚫고 있었다. 투박하지만 솔직한 어법 속에 철학을 담으려 했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저서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노 전 대통령이 '지도자의 말하기'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고 썼다.


"말을 잘하는 것과 말재주는 다른 것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지도자가 되는 법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연설문을 직접 쓰지 못하면 리더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동은 표현에 있지 않다. 사실 즉, 팩트에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의 용기"라고 진단했다.


이 어록을 접하며 문재인 대통령을 생각한다. 문 대통령은 침묵 혹은 수사(修辭)의 대가다. 국민이 진실을 듣고 싶을 때 문 대통령은 침묵한다. 가끔 내놓는 말에도 국민이 듣고자 하는 이야기는 쏙 빠져 있기 일쑤다. 그저 듣기 좋은 의례적 수사만 되풀이하는 경우도 많다.


북한군이 '대한민국' 국민을 사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에서도 그랬다. 문 대통령은 직접 국민 앞에 서지 않았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던 취임 때의 약속은 지킨 적은 없다. 대통령의 빈자리는 늘 청와대와 여당, 조국, 유시민, 김어준 같은 이들의 궤변이나 억지, 선동적인 언어들이 메운다.


국민들이 온 나라를 뒤흔든 추미애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말을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마디도 없었다. 검찰개혁회의랍시고 청와대서 연 자리에 추 장관과 나란히 입장하는 것으로 입장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 정부서 만든 첫 청년의 날. 청년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외면한 채 대통령은 '공정'을 37번 언급했다.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의 실체 역시 국민은 궁금하다.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의 회계부정 사건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침묵했다. 그러다 한 달이 다 지나서야 입을 땠는데 윤미향의 윤자도 꺼내지 않았다. "시민단체 활동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의례적 수사만 내놓았다.


전라도권 공공의대 신설 꼼수가 알려지며 촉발된 의료 분쟁에선 의사와 간호사를 이간질하는 페이스북 글을 올렸다가 SNS글조차 스스로 쓰지 않는 사실이 들통 났다. 진중권 씨가 "문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철학이 없다. 남이 써 준 원고나 읽는 의전 대통령 같은 느낌"이라고 하자 청와대 참모들이 발끈해 올린 것이 대통령이 원고를 교정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철학부재'와 '교정하는 모습'은 대체하기 부자연스럽다.


지도자의 말에서 철학을 찾기 어려운 나라가 잘 돌아갈까. 집권과 함께 시작한 일자리 창출, 소득주도성장, 탈원전에다 최근의 부동산 정책까지 어느 것 하나 정책적 효과를 내지 못했다. 국가채무 증가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상황을 낙관한다. 한국경제가 "기적같은 선방을 했다" 하고 "외평채 발행에 성공했다"며 나랏빚 낸 것을 자랑한다.


철학을 담지 않은 수사는 오래 갈 수 없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수사는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는 "두 번 다시 경험해선 안 될 나라"가 됐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나라 걱정에 잠을 못 이뤄야 하는데, 대통령은 낙관하고 온 국민이 나라를 걱정한다. 문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실적을 남기지 않은 대통령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문 대통령이 애초 리더가 될 수 없었거나,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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