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돋움] 52년생 엄마의 취직

김은아(그림책 칼럼니스트) 김은아(그림책 칼럼니스트)

"딸, 나 취직했다." 엄마 밥이 생각나 무작정 친정으로 향한 어느 날, 여태 점심도 안 먹고 다녔냐는 걱정 섞인 타박과 함께 들려 온 엄마의 취직 소식에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엥? 정말? 어디에요? 하는 일은? 근무 일수는? 시간은? 시급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딸의 질문에 엄마는 위풍당당하게 대답하셨다.

"가지 하우스, 가지 따기, 주5일 근무, 1일 3시간, 아침 9시 30분부터 낮 12시 30분까지, 시급 대략 9천원." 즉시 계산기를 두들기고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그 돈 내가 줄 테니까 그냥 편하게 지내면 안 돼요? 우리 집 농사만 해도 힘든데."

"야야, 그런 말 마라. 요즘 같은 세상에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 취직시켜 주는 데가 어디 있다고. 힘든 일은 주인이 다 하고 우리한테는 편한 일만 시켜서 오히려 미안하구만은. 오후에는 집안일 하면 되고 친한 아줌마랑 같이 다니니까 지겹지도 않고 좋은 점이 참 많다."

그렇다. 엄마는 돈벌이를 떠나 밖에서 온전히 당신만의 일을 하고 싶으셨던 게다. 텃밭 농사를 짓지만 거기서 나오는 건 가족의 양식이 되므로 수익과는 거리가 멀다. 40년 남짓한 세월을 아버지 가게 일을 거들며 비서처럼 사는 동안 엄마가 받은 월급은 최소한의 생활비였고 엄마의 시계는 아버지의 24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일터까지 오가는 시간을 포함해 하루 4시간을 집에서 벗어나 그녀만의 세상으로 나아간다.

4개월이 지난 지금, 엄마는 여전히 직장인이다. 비 오는 날과 농약 치는 날은 휴무인데 꿀맛 같은 휴가라고 좋아하신다. 그렇게 엄마는 직장에 대한 애정과 나이 든 사람을 일꾼으로 써주는 농장 주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매달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이 주는 기쁨을 즐기고 있다.

'55년생 우리엄마 현자씨'(책들의 정원)를 봤다. 작가이자 출판사 대표인 딸(키만소리)이 엄마의 홀로서기 에피소드를 만화와 에세이 형태로 엮은 책이다. 그런데 엄마를 주제로 한 여느 책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주인공인 현자 씨는 딸이 여행을 하느라 해외에 있는 2년 동안 컴퓨터를 배웠다. "딸, 엄마 이제부터 컴퓨터도 배우고 영어 공부도 해서, 혼자 비행기 타고 너 있는 곳으로 놀러 갈 거야." 첫 메일은 서툰 솜씨로 써내려간 고작 다섯 줄에 불과했지만 딸은 엄마가 행복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1시간씩이나 걸려 완성한 메일은 엄마의 두 번째 인생 일기나 다름없었다.

현자 씨는 블로그 기자가 되었고 영어를 배우고 춤추러 다닌다. 환갑이 훌쩍 지난 그녀의 인생이 빛나기 시작했다. "내 나이가 어때서"를 외치는 현자 씨는 이렇게 말한다.

"환갑이 넘도록 살아보니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인생이 모자라더라. 살면서 깨달으면 그땐 이미 너무 늦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나로 살아 봐. 살아 보니 그게 맞더라. 별일 없는 하루도 내가 나로 살면 그게 맞아."

52년생 우리 엄마 정임 씨의 히스토리에도 그 시절 대한민국 여성들이 두루 겪어야 했던 보편적인 사연이 녹아 있다. 가난, 결핍, 희생, 헌신, 양보, 인내라는 단어로 압축 가능한. 결혼 후 새로 형성된 가족 체계의 특수성은 정임 씨의 삶을 전투적으로 바꿔 놓은 것 같다. 곳곳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왕년에 그 정도 고생 안 하고, 그 정도 사연 없이 산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그 시절을 살라고 하면 손사래 치며 도망갈 테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정임 씨는 서울서 타이피스트로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결혼 후에는 어린 두 딸을 앉혀 놓고 과거 엄마가 얼마나 일을 잘했고 인기가 많았는지 종종 얘기하곤 했다. 그런데 딸들은 "또 옛날 얘기"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금도 시골집 창고에는 오래된 타자기가 있다. 여태 그걸 보관하고 있다니. 젊은 시절을 함께했던 타자기를 볼 때마다 정임 씨는 어떤 상념에 잠길까.

알면서도 딸은 외면했다. 엄마의 펼치지 못한 꿈과 헛헛한 마음을. 그래서 이제는 엄마의 삶을 무조건 응원해야 하는데 머릿속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엄마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엄마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정임 씨는 지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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