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서민들의 애환, 연탄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연탄에 관해서는 약 만t가량 확보될 것인데 현재 원료 6천t을 받아 방금 제조 중이니 나머지는 곧 대구연료조합이 확보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 부언해 둘 것은 일반 부민 각자가 당국의 월동 연료의 배급만 의존하지 말고 각자가 자력으로 확보에 노력하기를 바라는 바이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9월 24일)

찬바람이 불면 부민들의 걱정은 하나둘 늘었다. 추위가 몰아치는 엄동설한을 무사히 넘기려면 그만큼 준비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당국은 가을이 시작되자마자 각자 알아서 겨울 준비를 하라고 다그쳤다. 부민들은 우선 겨우내 먹을 식량을 준비해야 했다. 곡식을 미리 챙겨두지 않으면 보릿고개 훨씬 이전부터 굶주릴 게 뻔했다. 무엇보다 추위를 견디려면 월동 연료가 필요했다. 그 시절에는 땔나무인 장작이나 목탄, 연탄 등이 주요한 겨울 연료였다.

당시 대구의 사회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해방 3년이 지나도록 문전걸식을 하는 부민들이 2만여 명에 이르렀다. 전재민과 이재민들이었다. 이들은 대구역 앞이나 길거리에서 행상을 하며 입에 풀칠하기조차 버거웠다. 집이 없어 천막이나 움막, 길거리에서 한뎃잠을 자기 일쑤였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그들은 땔나무를 주워 오거나 산에 가서 나무를 구해 와 불을 붙이고는 언 몸을 녹였다.

 

 

이렇듯 장작 같은 땔나무는 그나마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월동 연료였다. 밥을 짓고 방을 데우는데 장작불은 그만이었다.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땔감은 시장에서 사고팔았다. 신탄상(시탄상)으로 불린 장사꾼은 장작이나 목탄인 숯을 팔았다. 대구의 경우 칠성시장 인근에 땔감을 팔러오는 땔나무꾼이 낯설지 않았다.

땔나무를 대표하는 장작은 통나무를 베어 잘라 쪼갠 나무다. 이러다 보니 장작으로 인해 산림 훼손이 뒤따랐다. 일제강점기 때 무분별한 나무 베기로 벌거숭이산이 된 데는 땔감 채취도 한 원인이었다. 산림 훼손을 줄이는 데는 장작 대신에 석탄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석탄은 채취나 수송 등의 문제로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게다가 값마저 비쌌다. 부산에서 대구로 석탄을 수송하는 도중에 도난당하는 일이 잦았던 이유다.

시간이 흐르면서 석탄가루로 만든 원통형의 연탄이 난방 연료로 자리 잡았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새해가 되면 정부는 서민들을 위해 생활필수품의 가격 안정을 발표했다. 쌀과 보리, 밀가루, 소금 등 먹을거리와 고무신, 비누, 등유, 무명과 비단 따위의 천이 포함됐다. 여기에는 연탄이 빠지지 않았다. 연탄은 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었다.

연탄은 구공탄(구멍탄)으로도 불렀다. 불이 잘 타게 하려고 아래위로 구멍이 뚫려 있어서다. 연탄은 오래 타고 다루기 쉽고, 화력이 좋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반면에 연탄가스로 인한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지금이야 연탄은 북성로 석쇠불고기를 맛있게 익혀주는 연료로 익숙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연탄은 여전히 이 겨울에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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