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로 읽는 동서양 생활문화] 진영논리 내 편 지키기와 도편(陶片)추방제

김문환 세명대 교수 김문환 세명대 교수

그리스 아테네에는 2천500년 전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현대 건물과 오순도순 키를 잰다. 고대 유적을 간직한 상징적인 장소가 아고라(Agora)다. '너른 광장'을 가리킨다. 현대 철학의 비조 소크라테스가 거닐었을 아고라 판아테나이카 도로 서쪽 끝 지점에 기둥이 죽 늘어선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아탈로스 스토아(Stoa)다. 스토아는 지붕을 갖추고 한쪽이 야외로 트인 복도식 건물을 말한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을 둘러싼 회랑이나 경복궁 근정전 주변 회랑을 생각하면 쉽다. 여름에는 햇빛을 가리고 비를 피할 수 있어 물건도 팔고 정치 토론도 벌였다. 아탈로스 스토아 전시 유물 가운데 '테미스토클레스'(ΘΕΜΙΣΘΟΚΛΕΣ)라는 이름이 적힌 도자기 접시가 눈길을 끈다. 무슨 사연일까?

◆BC 480년 페르시아 전쟁 승리 주역 테미스토클레스

영화 '300'은 그리스 아테네 북방에서 BC 480년 펼쳐진 테르모필레 전투를 그렸다. 당대 세계 최대 제국 페르시아가 아테네에 쳐들어왔을 때 스파르타가 보낸 300명의 지원군 전원이 죽음으로 대항했던 전투다. '테르모'(Thermo)는 '열기'라는 뜻이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BC 480년 상황을 떠올려봤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 결사대가 페르시아 대군을 일시 막아주는 사이 아테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를 궤멸시킨다. 주역은 테미스토클레스 장군. BC 483년 은광을 발굴해 번 돈을 시민들에게 무상 배분하지 않고, 최신 3단 갤리선 100척을 건조해 전쟁에 대비한 테미스토클레스의 선견이 아테네를 구한 거다.

 

테미스토클레스 이름이 적힌 도자기 접시를 비롯해 도편추방제에 사용된 도자기 오스트라콘. B.C5세기.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 테미스토클레스 이름이 적힌 도자기 접시를 비롯해 도편추방제에 사용된 도자기 오스트라콘. B.C5세기.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

◆테미스토클레스를 내쫓은 도편추방제

전쟁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운세가 기운다. 아테네는 당시 정치 지도자 선출은 물론 정책 결정. 재판을 국민이 맡았다. 아고라에 모여 개최하는 회의를 에클레시아(Eklesia)라고 불렀다. 민회다. 전쟁 승리 8년 뒤 BC 472년 민회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조국을 배반한 혐의다. 조국을 구한 영웅이라도 민심을 거스르면 배반자로 낙인찍혀 한순간에 명예를 잃고 추방당한다. 도자기 접시나 파편을 오스트라콘(Ostrakon)이라 부르고, 여기에 추방하고 싶은 정치인의 이름을 적어낸 제도를 도편(陶片)추방제,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kismos)라고 부른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주민소환제, 혹은 탄핵제도다.

◆도편추방 결정나면 10일 내 출국, 10년간 입국 금지

아테네 민주주의에 도편추방제를 도입한 인물은 아테네의 민주개혁가 클레이스테네스다. BC 504~501년 사이다. 보통 2만여 명 가까이 모인 민회에서 6천 명 이상 찬성하면 해당 인물은 10일 이내에 아테네를 떠나야 했으며 10년간 민회의 번복 없이는 귀국할 수 없었다. 과거의 공적이나 진영, 파벌, 명망 가문을 가리지 않고 죄를 물었다. 전쟁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8년 만에 민심을 잃고 쫓겨난 것은 물론 BC 490년 마라톤 전투 승리의 주역 밀티아데스 장군의 아들 역시 민심의 탄핵을 받고 추방됐다. 심지어 도편추방제를 만든 클레이스테네스의 조카도 도편추방제에 걸려 쫓겨났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페리클레스의 부친 크산티포스도 BC 484년 인기 있는 정치 지도자에서 하루아침에 도편추방당했다. 아테네 주권자인 국민들은 BC 5세기 13명의 정치 지도자를 그렇게 권력에서 몰아냈다.

◆정치 명망가나 영웅도 한순간에 국민 이름으로 탄핵

'그리스 로마 문명'에 대해 멋진 문구를 지어낸 미국의 19세기 작가 애드가 앨런 포. 1849년 40세에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기 전인 1845년 '헬레네에게'(To Helen)라는 제목의 시에서 "영광은 그리스의 것이요, 위대함은 로마의 것"(To the glory that was Greece, And the grandeur that was Rome)이라고 읊조린다. 포가 찬미한 '그리스의 영광'은 바로 이런 민주주의다. 국가에 기여한 점이 있더라도 명망가라도 민심을 거스르면 가차 없이 단죄했던 아테네 도편추방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에서 비롯돼 유재수 전 부산 경제부시장 감찰무마 사건, 김기현 전 울산시장 하명 수사 사건 등에서 정치권이 보여주는 내편 지키기 꼼수들은 2천500년 전 아테네 도편추방제에서 보여준 추상같은 신상필벌과 사뭇 다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비록 공이 있어도 내편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춘풍추상(春風秋霜)에서 더욱 빛난다. 집무실에 액자로만 걸지 말고, 실천할 때 국민의 감동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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