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 유사]기생 춘도(春桃)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어느 해 동해의 작은 포구를 산책하다가 '춘도 집'이라는 옥호를 붙인 목로주점을 발견했다. 가슴이 뛰었다. 그 집에 춘도(春桃)가 살고 있는 것일까? 어릴 때 우리 동네에 춘도라는 기생이 살았다. 관사(官舍)촌인데 그런 사람이 살았으니 그녀는 죄인처럼 동네를 출입했다. 남의 눈을 피해 행동을 해 그녀를 본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춘도는 의성군 금성이 고향으로 입하나 덜 욕심으로 어릴 때 식모살이하러 우리동네로 왔다. 그 때는 명자였다. 장작불을 땔 때도, 빨래를 할 때도, 나물을 다듬을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늘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부터 그 명자가 보이지 않았다. 소문에 기생학교로 갔다는 말이 들렸다. 당시에 대구에는 권번(券番)이 두 곳이 있었으니 그 중 어느 한 곳이 갔으리라 생각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연예인 양성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들어간 셈이다. 몇 년 뒤 식모살이 하던 그 명자가 춘도가 되어 기둥서방과 함께 우리 동네에 살려왔다.

명자는 모든 노래를 다 잘 부를 수가 있었다. 그 중 소위 '18번'은 '화류춘몽(花柳春夢)'이었다.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으며,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는 얼굴 위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 점잖은 사람한테 귀염도 받았으며, 나 젊은 사람한테 사랑도 했더란다. 밤늦은 인력거에 취하는 몸을 실어, 손수건 적신 연이 몇 번인고, 이름초차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 빛나는 금강석을 탐내도 보았으며, 겁나는 세력 앞에 아양도 떨었단다. 호강도 시들하고 사랑도 시들해진, 한 떨기 짓밟히운 낙화신세, 마음마저 썩는 것이 기생의 도리냐?"-노래 이화자, 작사 조명암, 작곡 김해송.

이화자는 신민요의 대표 격이다. 춘도와 이화자의 삶은 똑 같았다. 1934년까지 인천권번에 이화자의 이름이 있다. 아마 그 후 대중가요계로 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녀가 부평 '니나노 집'에서 술집 접대부로 있을 때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의 형인 김용환(작곡가)이 노래 잘 부르는 작부가 있다는 말들 듣고 부평으로 갔다. 주근깨 많은 이화자가 젓가락 두드리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스카우트된 그녀의 노래는 날아 갈수록 인기를 얻어 돈도 제법 많이 모았으나 방탕의 길을 걸었다. 아편을 맞기도 하고 문란한 성적 행각을 하며 살다 젊은 나이에 추운 겨울밤을 헤매다가 삶을 마감한 비극의 여인이다.

춘도는 이미 노파가 되어 있었고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에게는 그녀의 옛 얼굴이 보였다. 옛날 이야기를 한 참 하니 그제야 세삼 반가운 만남이 되었다. 그 후 가끔 그 술집에 가면 춘도는 항상 술에 절어 살고 있었고 경찰관 출신인 기둥서방 영감이 가게를 그럭저럭 꾸며나가고 있었다.

춘도에게 왜 기생 때 이름을 옥호로 달고 있었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권번 출신의 자부심일까 아님 우리 동네서 받은 설움을 바닷가에서 날려 보내려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그 포구를 가지 않게 되었다. 꼬불거리던 옛길은 곧은 신작로로 바뀌고 동네의 헌집들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두가를….“

춘도집 작부들과 수작(酬酌)하며 젓가락 장단에 같이 불러보던 '선창'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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