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라라를 지나쳐간 남자들

수원대 교수

선이 지나치면 악이 되는 것 같다고 했지요? 자기 옳음이 강한 사람이 부담스런 이유입니다. 자기 방식이 아닌 것은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면서 정의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인간이 용감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그런 사람이 가까운 사람일 때 가까운 사람은 치명적 상처를 입습니다. 닥터 지바고의 라라처럼 말입니다.

라라는 지바고의 소울 메이트라 할 수 있지만, 소용돌이 멈추지 않는 돌물목 같은 그녀의 운명은 그녀를 혁명가 스트렐니코프의 부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적 공간도, 둘만의 시간도, 둘만이 나눌 언어도 없는 남자가 남편일 때 삶은 얼마나 각박할까요? 더구나 상대는 라라인데.

라라의 남편 스트렐니코프는 정의와 평등과 민중의 빵을 위해 싸우는 대단한 혁명가지만, 라라에게는 없는 남편, 삶을 흔드는 위험한 남편이었습니다.

아마 스트렐니코프가 라라 곁에서 오손도선 정붙이며 살아간 시간의 두께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표정하게 비인간적인 정치인으로는 죽지 않았도 되었을 것입니다. 혁명을 하든, 정치를 하든, 사업을 하든 자기 표정이 없는 자의 세상은 자기 세상이랄 수가 없어서 자꾸 세상을 두려운 곳으로, 무서운 곳으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보다는 코마로프스키가 낫다는 친구가 있습니다. 코마로프스키가 누구냐구요? 라라를 사랑했으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라라에게 다가가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라라와의 관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개혁의 대상이었을 법한데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수완 좋은 사업가 말입니다. 그는 끝까지 라라의 생존을 책임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글쎄요,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자존감인 라라에게 그것이 통할까요?

어쨌든 세상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지 않아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기대도, 실망도 없는 그는 세상이 지옥인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며 자기 힘으로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힌 능구렁이이니 어쩌면 자기 옳음이 강한 사람보다는 현실적일 수 있겠습니다. 그가 라라가 파샤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의 말은 정말 적확했으니까요. "그래, 그는 고매하고 순결한 남자야. 세상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멸시를 받고 있지, 불행을 잉태하는 남자야, 특히 여자에게는."

젊은 날 그저 싫기만 했던 코마로프스키의 매력을 발견했다는 친구의 말에 '닥터 지바고'를 다시 보는데, 내 눈에 여전히 그가 역겹네요. 나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얼마나 불행한 지도 모르는 파샤도 싫지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고마는 코마로프스키의 탐욕도 그만큼 싫습니다.

젊은 날 나는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경험하면서도 엄살떨지 않고 꼿꼿하게 인간의 길을 가는 아름다운 라라를 사랑했는데, 이제는 남자들이 보이네요. 역시 '의사 지바고'의 매력은 지바고에 있습니다.

삽화 권수정
삽화 권수정

지바고에게는 엄마가 없지요? "진흙은 검게 변하고 그릇은 깨어졌도다." 엄마를 차가운 흙속에 묻는 날 사제가 읊는 노래를 소년 지바고는 어떻게 들었을까요? 그 엄숙하고도 슬픈 자리, 무서운 노래가 그에게는 묘하게도 생에 대한 감수성이 된 것 같습니다.

지바고에겐 채워지지 않은 공허가 있습니다. 거기에 그리움이 깃들고 그리운 것들이 시가 된 거지요. 그는 엄마가 남긴 발랄라이카의 선율을 듣고, 현미경 위에서 노는 세균들의 춤을 봅니다. 모독당한 사랑에게 총을 겨누는 여자의 행위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혁명의 와중에서 피 흘리는 사람들을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싸매줍니다. 의사로 살든, 혁명의 시대를 살든 그는 시인입니다. 수완 좋은 사업가의 눈에 그는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고, 혁명가의 눈에는 민중적인 삶을 외면하는 부르주아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거지요? 그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소문과 상식의 세상을 살지 않고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습니다.

당연히 그는 생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답을 갖고 있다면 마냥 좋을 수만은 없는 라라와의 사랑을 따라가겠습니까, 라라의 영상을 따라가다 쓰러져 죽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심연에서 유래합니다." 헤세가 '데미안' 서문에서 한 말인데 바로 지바고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지바고에게는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은 헤세가 말한 대로 바로 '어머니'에게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운명을 살고 잇는 것은 아닙니다. 헤세가 지적했듯이 제각기의 심연에서 건져내는 운명은 고유합니다. 시인은 바로 그 고유한 운명을 따라가는 자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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