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김철순 '매화 향기를 배다'

매화 향기를 배다 / 김철순

베개를 밴다. 수면에 좋다고 해서 만든 매실베개다. 딱딱하면서도 안정된 촉감이 목 언저리에 전해온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다글다글 구르는 소리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약간 거북했지만 길들이니 이제 솜을 채운 베개보다 편안하다.

 

고향 집 마당에는 매화나무가 있었다. 십여 년 자란 나무는 함박눈에도 혹독한 추위에도 끄떡없었다. 겨울 삭풍에 서 있는 매화나무는 움츠려 있지만은 않았다. 한 해 동안 꽃 피우고 열매 맺느라 굽어지고 상처 난 가지는 햇살을 모아 추스르고 다독였다. 연명할 만큼의 물만 빨아올리며 삼동을 건너온 매화나무는 눈보라 속에서 향기를 머금으면 그 자태가 선연했다. 꽃샘바람까지 이겨내고 꽃이 만발하면 마당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매화나무는 철철이 색다른 풍경을 그렸다.

 

꽃 진자리에 매실이 열렸다. 매실은 이가 시리도록 상큼하고 붉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다. 매실은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고 갈증이 가셨다. 잘 익은 매실은 살구 맛이 났다. 하지가 되면 어머니는 매실을 따서 항아리에 넣었다. 상큼한 향기는 집안에 며칠 동안 머물렀다. 매실청은 배앓이 상비약으로 보관했다. 더부룩한 속을 달래주는 속청이었다. 매실청으로 차를 만들었다. 여름날은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끈하게 몸을 다스렸다. 양념으로 나물 무침과 조림요리에 엿물 대신 넣으면 향긋한 맛이 났다. 백일 동안 숙성된 매실 향은 매화 향보다 진했다.

 

나이든 매화나무는 곡선이 부드럽다. 이른 봄 묵은 가지에 매화 한두 송이 툭툭 터지면 고요한 선율이 흐른다. 꽃이 지면 그 자리가 허전해질까 봐 새순이 금방 돋아 어느새 무성해진다. 꽃이 피어 열매 맺기까지 매화나무의 절정기를 지나면서 휘어지고 부드러워져 그 모양새도 낮게 갖추어진다. 산고를 거친 여인의 완숙한 매력이듯.

 

매실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다. 한여름 번개와 천둥의 놀람이 새겨지고. 나무에 둥지를 튼 참새의 지저귐과 곤줄박이의 울음도 들어있다. 매실 알알이 겨울의 인내와 봄의 정취와 여름의 번성도 들어있으리라.

 

씨앗 한 알을 들여다보면 점점이 박힌 숨구멍이 있다. 바람, 이슬, 눈, 비, 까지 마신 흔적이다. 단단한 껍데기로 싸고 있는 씨앗은 겹겹이 주름이 잡힌 입을 꽉 오므리고 있다. 그 속에는 생명 하나가 잉태되어 있다. 한 알의 씨앗이 자라 세상을 푸르고 생기롭게 한다.

 

매실을 모아 베개를 만든다. 육즙을 우려낸 말캉해진 매실은 푹 삶아내어 대소쿠리에 박박 문질러 육질을 벗겨낸다. 그러고는 여름 볕에 널어 이리저리 굴린다. 바싹 말린 씨앗은 눈부시도록 뽀얗게 또록또록해진다. 씨앗의 뾰족한 침은 무딘 칼로 다듬으면 동글동글하게 얌전해진다. 씨앗을 베개 속통에 넣으면 매실베개가 된다. 매실베개를 흔들면 딸각거리는 소리가 정겹다.

 

꿈같은 신혼, 원앙금침 속에는 신랑과 내가 머리를 뉘이고도 남을 구봉침 베개가 들어있었다. 양 베갯모에는 암수 봉황 한 쌍과 새끼 일곱 마리가 명주실로 수 놓였다. 부귀와 다복 그리고 장수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문양이었다. 그 기억의 집합이 내 가슴속에 진한 매화 향기로 남아있다.

 

친정어머니는 신랑과 다투더라도 잠은 꼭 한 베개를 배고 자라고 당부했다. 서로 생각의 높이를 같이하라는 깊은 마음이었으리라. 중매로 만나 낯가림도 있었지만 한 베개에 머리를 뉘이며 정이 들었다. 불같은 남편과 물 같은 나는 베갯머리에서 밀고 당기며 서로를 맞추어갔다. 어머니는 베개를 꿈을 꾸는 자리라고 함부로 밟거나 던지지도 말라고 했다.

 

살면서 늘 꿈을 꾸었다. 매화나무가 이름다이 꽃을 피우듯 예술을 향한 소망들이 자꾸만 돋아났다. 그것은 내 삶을 지탱하는 줄기였기에 잘 가꾸고 싶었다. 하지만 팍팍한 현실 앞에서 자꾸만 시들어갔다. 삶이 나아지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나는 지천명 고개를 훌쩍 넘고 있었다.

 

틈틈이 글공부를 했다. 못다 읽은 책을 읽으며 감성을 가다듬었다. 펜을 들고 써내려갔다. 서툴지만 한 줄기 두 줄기 써내려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 열매도 맺었다. 자랑거리는 아니라도 가슴에 영근 알맹이들이 지금은 밀알이 되어 또 다른 발아를 꿈꾼다. 다음 해에 싹 틔울 매실 씨앗처럼.

 

어언 수많은 계절을 순환했다. 따뜻한 봄날인가 하면 어느새 폭염의 여름이고 서늘한 가을인가 하면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그 숱한 계절을 지나오는 동안 나는 얼마나 향기롭게 꽃을 피우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은 나무로 성장했을까. 가끔 고향 집에 들러 매화나무를 볼 때마다 내 삶의 향기를 생각한다.

 

잘 익은 삶에는 발효된 희로애락이 들어있다. 인내, 눈물, 슬픔, 외로움 같은 것들은 나를 단단하게 했고 그 안에는 물과 바람과 하늘과 내가 사는 세상의 모든 소리까지 들어있다.

 

매실 베개에 머리를 누이면 인생의 사계를 배는 기분이다.

<끝>

 

◆당선 소감

김철순 김철순

동네 솔밭을 들어서는데 당선소식을 받았다. 풋풋한 솔향이 묻어 싱그럽고 흡족한 마음이었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힘을 생기게 한다. 부단한 노력은 아니지만 꾸준히 즐긴 덕분이라 믿고 싶다. 글쓰기에서 멀어지고 싶을 때도 있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허전해졌다, 일상이 되어버린 친구 같은 존재다.

수필을 알고 지내면서 사색을 자주 한다.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남다른 느낌이나 감정,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은 내 감흥을 일으키고 설레게 한다. 그것들이 나를 인내하게 하고 지탱하게 해주는 원천이다. 잘 익은 삶에 발효된 희로애락이 들어있듯이 내게도 그런 성찰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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