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 이야기] <24> 맞춤양복 55년 천기봉양복점 고동수 대표

반세기 동안 맞춤양복 외길을 걸어오고 있는 고동수 대표는 예순이 넘은 현재도 재단, 봉재 등 전 파트를 모두 챙기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반세기 동안 맞춤양복 외길을 걸어오고 있는 고동수 대표는 예순이 넘은 현재도 재단, 봉재 등 전 파트를 모두 챙기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양복점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는 가운데 반세기가 넘도록 맞춤양복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장인이 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양복을 짓는 천기봉양복점(대구시 중구 이천동) 고동수(68)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고 대표는 "몸이 아닌 마음에 맞추는 옷을 짓고 있다"며 "나를 찾는 고객이 있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양복점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수십 년간 고 대표의 손 때가 묻은 재봉털.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수십 년간 고 대표의 손 때가 묻은 재봉털.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맞춤양복 외길 55년

천기봉양복점 안은 각종 재료들로 가득하다. 벽에 걸려 있는 양복지와 손때 묻은 가위, 다리미, 색색깔의 실꾸러미, 자투리 천까지 예전의 양복점 모습 그대로다. 진열장엔 멋진 양복 윗도리 몇 벌이 반듯하게 진열돼 있다. 한쪽에 자리잡은 작업대 위엔 직각자, 굽은자, 줄자, 천을 대는 마자, 소매 곡선용 특수제작자 등이 널브러져 있고 용도가 제각각인 재봉털도 양복점 곳곳에 숨어 있다. 수납함엔 사탕처럼 형형색색 크고 작은 단추와 실, 지퍼 등이 들어 있다. 모두 고동수 대표가 수십여 년 사용한 것들이다.

고 대표는 1951년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났다. 4남 1녀 중 장남인 고 대표는 초등학교 를 졸업한 후 당시 여느 사람이 그랬듯 먹고살기 위해 대구로 나왔다. 이종사촌 형이 운영하던 양복점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재봉털에 실 끼우기, 단추구멍 만들기 등을 배웠다. "당시엔 누구나 비슷한 환경이었다. 나 역시 취직을 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눈물이 난다"고 회고했다.

고 대표는 일을 배우던 시절엔 양복점이 많았다고 했다. "1960, 70, 80년대는 섬유경기가 좋아 맞춤양복점 역시 수익이 괜찮다. 당시 결혼식 문화도 일조했다. 신랑은 예복을 비롯해 평균 대여섯 벌의 양복을 맞췄다. 또 부모, 형제, 사돈까지 많게는 10여 벌씩 해갔다. 백화점엔 기성복 코너가 없어 맞춤복 전성기였다"고 했다.

대구 시내 양복점을 전전하던 고 대표는 1986년 당시 잘 나가는 천기봉양복점에 숙련공으로 들어갔다. 천기봉은 고 대표에게 자신만의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했다. 고 대표는 열심히 스승의 가르침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제자 고동수의 안목과 성실함을 본 천기봉은 1993년 가업을 물려줬다. 양복점은 물론 수십 년간 사용하던 재봉털과 다리미, 자 등 물품과 간판도 고스란히 제자에게 줬다. "그때 스승님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양복 기술 모두 가르쳐줬다"며 "스승님은 당시 중앙로 1급지 양복점에 맞서 2급지 양복점의 자존심을 지켜나간 분"이라고 평가했다.

고 대표는 스승의 기술을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나하나의 기술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하나가 모인 전체가 아름다운 태(모양)를 만들지 못하면 그 옷은 좋은 옷이 아니다"며 "양복 장인은 장애인 체형도 정상인처럼 보이게 천의무봉(天衣無縫:하늘나라 옷에는 바느질한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만들 줄 알아야 된다"고 말했다.

고 대표는 양복을 짓는 일은 물론 수선도 같이 했다. 맞춤양복과 함께 수선을 양복점 경영에 접목한 것. 유행이 지난 양복도 고 대표의 손을 거치면 새로운 최신형 양복으로 새롭게 재탄생했다. "양복점을 시작할 때 맞춤양복점이 안 될 때라 수선을 함께했는데, 체형이 변해 수선하러 오는 손님도 많다"고 했다.

이 같은 그의 유명세는 입소문을 타고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지금은 대구경북이 아닌 타 지역에서 문의 및 제작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단골은 물론 젊은이, 외국 손님도 많이 찾는다. "한 단골손님은 아들, 손자까지 데리고 와 옷을 맞추는가 하면, 5, 6년 전 이곳에서 옷을 맞춰간 미국손님은 올 8월에 다시 대구를 찾아 네 벌이나 맞춰갔다"고 했다. 고 대표는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기성복과는 편의성과 내구성에선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기성복이 맞지 않거나 이상 체형을 가진 손님도 많이 찾는다"고 했다.

고 대표는 전통 유럽풍의 디자인으로 젊은 층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에 있는 디자이너 지인을 통해 최신 유럽 디자인 기법을 배우는가 하면 수시로 백화점을 들러 최신 트렌드를 연구하기도 한다. 고 대표는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은 과거에 비해 까다롭고, 유행에 민감하다"며 "특히 어려운 경제사정 등으로 실속과 니즈를 동시 만족시킬 수 있어 호응도가 큰 것 같다"고 말했다.

고 대표는 세월 따라 양복 스타일도 많이 변했다고 했다. "70, 80년대와 요즘 스타일을 비교해보면 요즘은 상체는 몸에 딱 맞는 것을 선호한다. 바지는 지금은 좁은 형태이지만 그땐 나팔바지를 선호했다. 상의 코(뒤트임)도 많이 변했다. 앞 여밈도 대다수 싱글이지만 트렌치코트 같은 더블 스타일도 그땐 엄청 인기를 끌었는데 지금은 다들 촌스럽다고 한다. 양복은 유행의 시험대인 것 같다"고 풀이했다.

고 대표는 대구사람의 양복 스타일은 보수적이라고 했다. "색상의 경우 검정·감색을 비롯해 갈색과 회색을 주로 찾는다. 체크무늬의 경우 공무원, 교사 등 점잖은 분은 선호하지 않고, 밝은 청색, 하늘색, 밝은 베이지색 등은 야하다고 하면서 잘 찾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작업장엔 항상 부인 홍희영(64) 씨가 함께한다. 손바느질은 물론 가봉을 도맡아 한다. 홍 씨는 "맞춤양복은 바느질거리가 많아 거들고 있다. 하지만 하루종일 함께 있어도 오가는 말은 몇 마디뿐"이라며 핀잔을 하면서도 "일밖에 모르는 재미없는 남편이지만 신뢰 하나로 지끔껏 살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의뢰받은 양복을 디자인하고 있는 고동수 대표.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의뢰받은 양복을 디자인하고 있는 고동수 대표.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고객이 나를 찾는한 일 계속 할터"

고 대표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10시까지 일한다. "아직 건강하고 나를 찾는 고객이 많아 하루도 놀 수 없다"면서 "힘들긴 하지만 예전처럼 고객이 만족하는 양복을 만들어 보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 대표는 아들 2명 모두 출가시켰다. "힘든 것을 보고 자란 때문인지 아직까지 뒤를 잇고 싶다는 아들은 없다"고 했다.

고 대표는 끝으로 "고객이 자신을 잊지 않는 한 오직 한 길을 걷겠다"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몸에도 맞고 마음에도 드는 옷을 짓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라이프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

기획 & 시리즈 기사

[매일TV] 협찬해주신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