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정인이가 분노라도 했더라면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연합뉴스
김수용 편집국부국장 김수용 편집국부국장

포스텍 출신의 젊은 작가 김초엽이 2019년 발표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단편 '공생 가설'엔 흥미로운 소재가 등장한다. 공상과학소설에 등장하는 낯선 용어들은 생략하고 간단히 뼈대만 말하자면, 생각을 읽어내는 기술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속 연구자들은 이를 이용해 신생아 울음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연구자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엄마, 아빠를 찾거나 배고픔, 불편함 등을 전달하리라고 예상했던 아기들의 울음은 도덕, 윤리, 이타성에 관한 대화로 가득했다.

소설 속 표현대로 '복잡하고 심오하고 철학적인 아기들'은 실험상 오류가 아니었다. 아기들의 이런 대화는 세 살 무렵부터 줄어들어서 일곱 살 전후로 사라졌다. 연구진이 추론한 원인은 외계에서 온 지적 생명체였다. 까마득히 먼 우주의 한 행성, 지금은 폭발로 사라진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아기들의 뇌에 머물다가 일곱 살 무렵이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공생 가설'이다. 짧게 줄이다 보니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만 소설은 상당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감정과 마음, 사랑, 이타심을 토론하는 갓난아기들.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2019년 6월 10일 한 아기가 몸무게 3.6㎏으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그 아기는 세상에 겨우 472일 머물고는 2020년 10월 13일 떠나고 말았다. 온몸에 멍이 들고 뼈가 부러진 채로 췌장이 찢어져 숨을 거둔 아기, 바로 정인이다. 복숭앗빛으로 뽀얗고 통통했던 정인이는 무려 7개월가량 표현하기도 끔찍한 폭력 속에 까맣게 말라 갔고,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한 법의학자는 "아파서 못 울 정도로 지속적인 학대에 시달렸다"고 했다. 정인이의 양모 장 씨를 살인 혐의로 기소한 검찰의 공소장에는 '사망 당일 아이가 밥을 먹지 않는 것에 격분한 장 씨가 팔을 잡아 돌려 탈골시킨 뒤 발로 복부를 여러 차례 밟아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적혀 있다. 글로 옮기기조차 손 떨릴 정도다.

소설처럼 생각을 읽어내는 기계가 있다면, 정인이는 뭐라고 했을까. 사랑과 이타심을 논하던 외계 생명체가 정인이와 함께 있었다면, 울음조차 틀어막는 극한의 고통 속에 무슨 말을 건네고 싶었을까. 양모 장 씨를 향한 원망과 미움 가득한 말들을 쏟아냈다면 우리 마음이 손톱만큼은 편하리라. 이유조차 모를 학대에 분노라도 했다면 씁쓸하나마 가슴 시린 위로를 삼으리라. 하지만 정인이는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까지도 그럴 줄 몰랐을 것만 같다. 원망과 미움, 분노와 저주는 마지막까지도 생각조차 안 했을 것만 같다. 정인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울음으로 말을 건넸던 유일한 엄마였기에.

양모 장 씨를 향한 세상의 격노가 마땅한 처벌을 요구하는 돌팔매로 그치지 않고 무고한 죽음을 막으려는 굳건한 어깨동무가 되기 바란다. 입양 부모의 마음이 변해 입양을 취소하거나 아이와 맞지 않는다고 할 경우 입양 아동을 바꾸는 방식으로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실수이기 바란다. 양모 장 씨가 다른 아기를 데려왔다면 죽이지 않았을 거란 뜻인가. 양모 장 씨와 정인이가 서로 맞지 않아 비극이 벌어졌다는 말인가. 설마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궤변에 가까운 청와대의 해명을 듣고 있자면 이런 작은 기대마저 무색할 정도다. 어른들에게 생각을 읽어내는 기계가 필요 없는 이유는 말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말은 곧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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