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 퍼져라, 공동체 바이러스

김병구 편집국 부국장 김병구 편집국 부국장

겨울에 씨게토(썰매) 타고, 여름엔 멱을 감았다. 동네 배꾸마당(바깥마당)에 아이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마때치기(자치기)나 오징어가생 진용을 꾸렸다. (나무)칼싸움, 솔방울 던지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엄마가 저녁에 "밥 무러(먹으러) 안 오나"라고 할 때가 제일 싫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대다수 시골 아이들은 학원을 몰랐다. 하루 종일 심심하거나 따분할 겨를이 없었다.

어른들은 설날 차례 지낸 뒤 배꾸마당에 모여 새끼줄 쳐놓고 윷을 놀았다. 정월대보름, 어른들은 달집을 태우고 아이들은 쥐불놀이를 즐겼다. 모내기와 벼 베기 철에는 품앗이가 대세였다.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시며 시끌벅적했다. 조상 제사를 지낸 뒤에도 음식은 이웃과 나눴다. 어느 집 묘사든 동네 아이들에겐 잔치나 다름없었다.

마을 공동체는 어른이나 아이들에게 고독이나 외로움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배고팠던 시절 마음의 풍요를 잉태했다.

하지만 산업화와 도시화는 공동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배꾸마당이나 놀이터 대신 학원으로 향했다. 청년들은 산업현장을 찾아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다. 옛 공동체 놀이문화는 그렇게 사라졌다.

시골에는 노인들만, 도시에는 그 아들 딸, 손주들이 둥지를 틀면서 '대가족'이란 단어는 생소해졌다.

산업화에 이어 1980년대부터 번진 공동주택(아파트, 다세대주택·오피스텔), 특히 아파트는 공동체의 분화를 더 가속했다.

대구 남구 대명동 공무원아파트(1966년), 공·시영아파트(1970년대 초반)를 거쳐 1980년대부터 아파트는 단독주택을 넘보기 시작했다. 2005년 대구 모든 주거 건물의 60%를 아파트가 차지했다.

산업화와 공동주택의 성행은 마을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웃 단절과 고독사(死)를 부르기도 했다.

2018년 경북 구미 한 원룸의 30대 아버지와 2살 아들의 죽음은 월세 체납 쪽지, 단전 통지서와 함께 1주일 뒤에 알려졌다. 2015년 2월 대구 대명동 한 빌라에서는 아내와 사별한 뒤 홀로 살던 이모(61) 씨가 숨진 지 20여 일 만에 발견됐다. 같은 해 11월 대구 한 원룸의 68세 할아버지의 주검이 발견된 것은 두 달여나 지난 뒤였다.

마을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했던 시절이라면 이 같은 죽음과 단절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공동체의 부활이 다시 얘기되고 있다. 의식(衣食)이 아니라 삶의 풍요를 위해 더 절실해지고 있다.

희망도 있다. 마을 공동체의 부활, 아파트 공동체의 활성화 조짐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 만촌동 주민들로 뭉친 '만촌백인회'.

"앞으로 주민 백 명을 모으면서 동네 이웃을 돕는 좋은 일을 하자"고 2007년 10명이 첫 모임을 가졌다. 그늘진 이웃을 찾아 십시일반 모은 돈을 전하고 노력봉사를 했다. 13년이 흐른 2020년 현재 70여 명이 돈과 몸을 보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이혼한 할아버지와 손주 3남매, 홀몸할머니, 소년소녀가장, 장애가정 등이 모두 만촌백인회가 살피는 이웃이다.

대구 봉덕동 '할벤져스'.

봉덕동 효성백년가약아파트 경로당 회원들이다. 이들 할벤져스는 눈비를 개의치 않고 8년 동안 폐지를 모아 마련한 돈(1천만원)을 지난해 7월 아동시설에 오롯이 내놓았다. 서영자(79) 경로당 총무는 "회원들이 폐지를 계속 모은다. 언젠가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또 좋은 일에 써야지"라고 했다.

이 같은 공동체·나눔 바이러스가 유행처럼 번져나가길 기대해 본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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