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굴욕적인 평화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초한(楚漢) 쟁패전에서 중원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은 북방의 골칫거리였던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되레 포위를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월등한 군사력에도 유목 기마병 특유의 치고 빠지는 전략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결국은 매년 많은 양의 비단과 곡물을 보낸다는 치욕적인 화친조약을 맺고 겨우 돌아왔는데, 그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흉노는 점점 더 많은 공물을 요구하며 변방을 침략해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한나라는 무제에 이르러서야 대군을 일으켜 흉노를 정벌하고 멀리 내쫓았다. 돈으로 산 평화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실증한 역사적 사례이다. 송나라의 경우는 더 가관이었다. 쿠데타를 통해 황제로 등극한 송 태조 조광윤은 도둑이 제 발 저린 탓인지, 무인(武人)의 힘을 약화시키며 지나치게 문치주의를 표방했다.

백성의 비약적인 증가와 농업 생산량 증대로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적인 융성을 구가했으나 외세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미국 역사학자인 존 킹 페어뱅크가 "경제와 문화 대국이었던 송나라가 가난뱅이 유목 민족에 정복당한 것은 놀라운 역설"이라고 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는 너무도 약체였던 것이다. 그러니 늘 싸움은 피하고 보자는 식이었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가 쳐들어오자 '전연의 맹'이라는 강화조약을 맺고 해마다 비단과 은을 보냈다. 서북 지역 탕구스족의 서하가 침입하자 또 강화를 체결하고 많은 공물을 보냈다. 동북 지역의 여진족이 금(金)을 건국하자 이전보다 더 많은 공물을 요구했다. 여진은 기어이 수도 개봉을 함락하고 황제와 일가족을 포로로 잡아갔다. 황제의 아우가 항주로 쫓겨 내려와 남송(南宋)시대를 이어갔다. 하지만 금나라에 세공을 바치며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다가 몽골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송나라에는 상무정신이 없었다. 적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은과 비단을 내주며 달래는 방법을 택했다. 굴욕적인 평화가 오래간 사례는 역사상 없었다. 북한은 남한의 쌀 지원도 거절해버렸다.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며 남한을 '겁먹은 개'라고 원색적으로 조롱한다. 그런데도 현 정권은 남북 경제 협력과 평화 타령을 하고 있다. '평화는 힘이 있어야 보장된다'는 김정은의 충고가 오히려 폐부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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