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누가 '친일파'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가

박병선 논설위원
박병선 논설위원

반일운동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상황을 보고 있으니 문득 10년 전 일본에서 경험한 해프닝이 떠오른다. 필자는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시리즈 취재 차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묘소를 찾았다. 사전 약속을 하지 않은 불청객이었기에 묘지기 할머니는 몇 차례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취재를 허락했다.

사진 촬영을 하려고 하자, 이 할머니가 막아서더니 갑자기 청소를 시작했다. 작은 운동장만한 널따란 묘소에는 낙엽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할머니 혼자 치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일행은 경로사상을 발휘해 할머니를 쉬게 하고 대신 나섰다. 1시간 남짓 땀 흘리며 청소하니 묘소 주변이 쓰레기 한 점 없이 깨끗해졌고, 무사히 취재를 마칠 수 있었다. 안 의사 취재를 하던 중에 원수인 이토의 묘소를 청소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안 의사의 일대기를 취재한 것은 '애국심의 발로'임이 분명하나, 과열된 반일 분위기를 보면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문맥 앞뒤 떼고 이토의 묘소를 청소한 사실만 콕 집어 '친일파'로 매도될 지도 모를 일이다. '친일파'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함부로 내뱉는 세상이 되다 보니 지레 겁먹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일본 제품을 쓴다는 이유로, 반일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친일파' '매국노' 취급을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한 지인은 연비가 좋다는 최하급의 도요타 승용차를 타는데, 곤혹스러운 일을 자주 겪고 있다. 주차한 뒤 볼일 보고 돌아와 보면 차에 껌이 붙어 있거나 커피를 쏟은 자국이 남아 있다고 했다. 유니클로 매장에 들어가는 사람을 촬영해 SNS에 올려 놓고 '친일파'로 조롱하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필자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찬성하고 일본 제품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강요와 압박은 싫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동참하면 될 일을 강제하고 감시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래전에 읽은 '반일' 유머가 생각난다.

한국 대통령과 일본 왕이 만났다. 한국과 일본 국민 수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 왕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국민은 제가 손을 한 번 흔들면 박수치고 환호할 것입니다." 일본 왕이 자국민을 향해 손을 흔들자 모두 박수치며 환호했다.

이 장면을 본 한국 대통령이 일본 왕에게 말했다. "제가 손을 한 번만 쓰면 여기 있는 국민은 물론이고 집에서 TV 보는 국민들도 모두 환호하고 기뻐해 오늘을 국경일로 지정할 것입니다." 일본 왕은 비웃듯 말했다. "한 번 해 보시지요."

그러자 한국 대통령은 일본 왕의 귀싸대기를 갈겼다.

한국인에게 반일 감정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천 년 이상 한국인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는 유전자나 다름없다. 실제 '친일파'라고 불릴 만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전 국민이 '반일주의자'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이 밉다는 이유로 일본을 두둔하는 듯한 이들조차 내심으로는 '반일주의자'다.

모두가 '반일주의자'임에도, 그 앞에서 '반일'을 강요하거나 상대를 함부로 '친일파'로 모욕하는 것이야말로 '매국적' 행위다. 정치에 이용하려거나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날뛰는 것일 뿐, 순수한 '반일'이 아니다.

상식에 반하는 강경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이나 단체는 딴마음을 가졌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반일운동'은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진행돼야 성공할 수 있다. 최소한 아베보다 도덕적으로 나은 국민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